이 장에서 우리는 가르침의 사역의 여러 측면을 고려할 것이다. 우리가 모두 그리스도의 모든 계명에 순종하는 제자를 삼고 가르치기 위해서는[1] 사도, 선지자, 복음 전도자,[2] 목사/장로/감독, 교사(물론), 그리고 어느 정도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라면 모두 가르침의 책임을 져야 한다.
내가 이전에 강조한 바와 같이, 제자 삼는 목사거나 사역자는 가르칠 때 먼저 자신이 본을 보여준 후 말로 가르쳐야 한다. 그는 자신이 설교하는 것을 실천해야 한다. 매우 성공적인 제자 삼는 사역자인 사도 바울은 이렇게 썼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자가 되라(고전 11:1).
이것은 모든 사역자의 목표여야 한다 — 자신이 인도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정직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나를 본받으십시오. 만일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은 어떠한 인생을 사는지 알고 싶다면, 저를 바라보기만 하면 됩니다.”
대조적으로, 나는 전에 목회했던 교회에서 했던 말이 기억난다, “나를 따라 하지 마십시오…그리스도를 따르십시오!” 비록 그 당시 사람들이 나를 따르지는 않았지만, 나는 내가 따라야 할 좋은 본이 되지 못했음을 인정했다. 사실, 나는 내가 그리스도를 제대로 따르지 않았음을 인정하였고, 내가 하지 않는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요구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바울이 했던 말과는 너무 달랐다. 사실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본받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우리를 본받지 말라고 한다면 우리는 사역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그들의 사역자들을 그들의 본보기로 삼기 때문이다. 지도자들의 모습이 교회의 모습을 반영한다.
연합의 본을 보여주며 가르치라(Teaching Unity by Example)
본을 보여주며 가르치라는 개념을 하나의 특정 주제인 연합의 주제에 적용해보자. 모든 목사/장로/감독들은 그들이 인도하는 양들이 연합할 것을 원한다. 그들은 그들의 지역 내 지체들 사이의 분열을 싫어한다. 그들은 당을 짓는 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결국, 예수님은 그분이 우리를 사랑한 것처럼 우리가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하셨다(요13:34-35을 보라). 서로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우리를 지켜보는 세상 앞에서 우리가 그분의 제자임을 보여주는 증표이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지도자는 그들의 양 떼가 서로 사랑하고 연합을 이루기 위해 노력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그러나 가장 먼저 자신이 본을 보여줌으로써 가르쳐야 할 사역자인 우리는 자주 삶 속에서 사랑과 연합에 대한 우리의 가르침에 훨씬 미치지 못하고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다른 목회자들을 사랑하고 그들과 연합하는 데 있어서 부족함을 보여줄 때, 우리는 교회에서 설교하는 것과는 대조되는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다. 우리는 회중들에게 그들이 우리가 하지 않는 일을 하기를 기대한다.
사실, 예수님의 연합에 관한 가장 중요한 말씀은 지도자들에게 하신 것으로 다른 지도자들과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예를 들어,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후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13-15)[예수님이 본을 보여주면서 가르치셨다는 점을 주목하라]
목사들은 종종 이 성경 구절을 사용하여 자신의 회중들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치는 데 이것은 적절하지 않다. 오히려, 이 구절의 말씀은 지도자들인 12명의 사도를 향한 것이다. 예수님은 그분의 미래 교회들이 분열되거나 서로 경쟁하는 경우 교회가 자기의 사명을 다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 그래서 그분은 지도자들이 겸손하게 서로를 섬기기를 바라신다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주셨다.
그 시대 문화적인 맥락에서, 예수님은 가정 하인들의 가장 낮은 작업 중의 하나인, 발을 씻어주는 것으로써 겸손한 섬김의 본을 보여 주셨다. 만일 그분이 역사의 다른 시간에 다른 문화를 방문했었다면, 그분은 화장실을 파거나 제자들의 쓰레기통을 청소했을 수도 있다. 그분의 현대 지도자 중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러한 사랑과 겸손함을 보여주기를 원할까?
예수님은 한 시간도 흐르기 전 그곳에서 이 중요한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강조하셨다. 그분은 그들의 발을 씻어주신 몇 분 후, 예수님은 그분의 미래 교회 지도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4-35).
이 말씀들은 확실히 그리스도의 모든 제자에게 적용될 수 있지만, 원래는 다른 지도자들과의 관계에 관해서 지도자들에게 한 말씀이었다.
다시 한 번, 단 몇 분 후, 예수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 15:12-13).
예수님은 다시 한 번 지도자들에게 말씀하고 계신다는 것을 주목하라.
몇초 후,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요 15:17).
그 뒤로 몇 분이 지난 후,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분이 그들을 위하여 기도 하시는 것을 듣게 된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요 17:11, 강조 추가).
마지막으로, 불과 몇 초 후에, 예수님이 계속적으로 기도하시는 중에 제자들은 그분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듣게 된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안에, 내가 아버지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요 17:20-23, 강조 추가).
따라서 같은 공간에서 한 시간도 안 되는 사이에, 예수님은 여섯 번이나 그분의 미래 지도자들에게 연합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으며 서로 겸손하게 사랑하고 섬기는 것을 통하여 연합을 이루라는 것을 보여주셨다. 이것은 분명히 예수님께 매우 중요했다. 그들의 연합은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중요한 요소였다.
우리는 얼마나 잘 하고 있는가?(How Well Are We Doing?)
불행하게도, 우리가 우리의 양들이 사랑으로 연합되기를 바랄 때, 우리 중 많은 사람은 서로 경쟁하고 다른 교회의 대가로 비윤리적인 방식으로 교회를 세우고 있다. 우리 중 대부분은 교리가 다른 목회자들과의 교제를 피한다. 우리는 심지어 교회 건물 앞에 표어를 써 붙여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가 연합되지 않음을 광고하고 있으며 “우리는 다른 교회 그리스도인들과 다르다”라는 메시지를 보낸다. (그리고 우리는 세상사람들에게 우리가 연합되지 않음을 잘 교육하고 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불신자들은 기독교를 매우 분열된 기관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말만하고 실행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의 실제모습은 우리의 설교보다 회중들에게 연합에 관해 더 많은 것들을 가르친다. 지도자들의 언행이 일치하지 않을 때 보통 그리스도인이 연합하고 서로 사랑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유일한 해결책 또는 방법은 회개이다. 우리는 신자들과 세상 사람들에게 잘못된 본을 보여준 것에 대해 회개해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우리를 분열하는 장벽들을 제거하고 예수님이 명령하신 대로 서로를 사랑하기 시작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먼저 교리적으로 서로 다른 목회자들을 포함한 다른 목회자들과 사역자들과 만나야 함을 의미한다. 나는 거듭나지 않았거나, 예수님께 순종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거나, 또는 개인 이익을 위해 사역하는 목회자들과 교제하라는 뜻이 아니다. 그들은 양의 탈을 쓴 늑대들이며, 예수님은 어떻게 그들을 알아낼지 분명하게 알려주셨다. 그들은 그들이 맺은 열매로 알아낼 수 있다.
오히려, 나는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목사들과 사역자들, 그리스도안에 있는 진정한 형제자매들을 가리킨다. 만일 당신이 목사라면, 당신은 다른 목사들을 사랑하고, 당신의 양들 앞에서 그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것을 시작하는 한 가지 방법은 주위의 다른 목회자들한테 가서 자신이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은 것에 대해 용서를 구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가로막힌 벽들을 부숴야 한다. 그런 다음 정기적으로 함께 만나서 식사를 나누고, 서로를 격려하고, 권면하고, 기도하는 위한 모임들을 가지도록 한다. 그렇게 되면, 당신은 궁극적으로 분열의 경향이 있는 교리들에 대해 논의하기를 즐기게 되고, 논의하는 것들에 대해 동의 여부를 떠나 연합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게 될 것이다. 내가 결과적으로 교리가 부동한 사역자들의 말들을 기꺼이 듣기 시작하였을 때, 나의 삶과 사역은 크게 풍성하게 되었다. 나는 마음의 문을 닫음으로 인해 수년 동안 많은 축복을 놏쳤다.
당신은 또한, 당신의 교회거나 가정교회 모임에 다른 목회자들을 초대하여 설교하게 하거나, 당신의 교회에서 다른 교회거나 가정교회 모임들과 합동예배를 드림으로써 당신의 사랑과 연합을 보여줄 수 있다.
당신은 당신 교회의 이름을 변경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나머지 지체들과의 불통일을 세상에 광고하지 않을 수 있다. 당신은 당신이 소속된 교단이거나 특정한 단체에서 퇴출하고 오직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로 알고, 당신은 예수님이 서로 어울리지 않는 많은 다른 교회들이 아닌, 하나의 교회를 세우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믿는다는 메시지를 모든 사람에게 보낼 수 있다.
이것이 급진적으로 들린다는 것을 나도 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 종래로 분명하게 의도하신 적이 없는 것들을 지켜야만 하는가? 왜 그분을 불쾌하게 하는 일에 관여하고 있는가? 성경에는 교단 또는 특별한 단체에 관한 언급이 없다. 고린도교회가 자신이 좋아하는 교사들에 따라 분열되었을 때, 바울은 그들의 분열은 그들이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들이며 영적으로 어린아이임을 드러냈다고 단호하게 질책하였다(고전 3:1-7). 우리의 분열도 그 점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우리 사이를 벌어지게 하는 모든 것은 피해야 한다. 가정교회는 교회이름을 짓거나 어떠한 단체에 가입하는 것을 피면 해야 한다. 성경을 보면, 개별적인 교회들은 오직 그들이 만나는 집에 의해 식별되었다. 교회 안의 그룹들은 오직 그들이 위치한 도시들에 의해 식별되었다. 그들은 모두 자신들을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한 교회의 지체로 여겼다.
우리한테는 오직 한 왕과 한 나라가 있다. 누구든지 신자들이거나 교회들이 그를 알아주도록 스스로 높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서 자신의 나라를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내 영광은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사 48:11)라고 말씀하신 왕앞에 설 준비를 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다시금 사역자들은 모든 사람 앞에 응당 그리스도에 대한 순종의 좋은 본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그들의 본을 따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 앞에 보여준 그들의 본은 가장 영향력 있는 가르침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바울이 빌립보에 있는 신자들에게 썼던 것처럼.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빌 3:17, 강조 추가).
가르침의 내용(What to Teach)
바울처럼, 제자 삼는 사역자는 목표가 있다. 그 목표는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골 1:28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또한, 바울처럼,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칠“(골 1:28 상,강조 추가) 것이다. 바울이 단지 사람들을 교육하거나 대접만 하라고 가르친 것이 아님을 주목하라.
제자 삼는 사역자는 바울과 함께 “이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다”(딤전 1:5)라고 말할 수 있다. 즉, 그는 그가 섬기는 사람들의 삶 속에 진정한 그리스도의 형상과 거룩함이 나타나기를 원하는 데 그것이 바로 그가 그리스도의 모든 계명을 지키는 신자들을 가르치는 이유이다. 그는 진리를 가르치고, 청중들에게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 12:14)라고 권면한다.
제자 삼는 사역자는 예수님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그들의 제자들도 예수님이 그들에게 명령하신 모든 것을 순종하게끔 가르쳐야 한다고 명령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다(마 28:19-20을 보라). 그는 그리스도가 명령하신 것은 아무것도 홀시하지 않고 가르쳤다고 확신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그는 정기적으로 예수님의 계명이 기록되고 재강조된 복음서와 서신서를 통해 구절마다 가르친다.
이런 강해식 가르침은 그의 가르침을 균형 잡아준다. 우리가 주제별 메시지만 가르친다면,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주제에만 집중하고 그렇지 않은 주제는 홀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강해식 교사는 단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뿐 아니라, 그분의 훈계와 진노에 대해서도 가르친다. 그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받는 축복뿐 아니라 져야 할 책임에 대해서도 가르친다. 그가 사소한 주제를 크게 다루고, 덜 중요한 것을 강조하고, 가장 중요한 것을 무시할 가능성이 작다. (예수님에 의하면, 이것은 바리새인들이 범했던 잘못이었다; 마 23:23-24.)
강해식 가르침을 두려워하지 말라(Overcoming Fears of Expository Teaching)
많은 목사는 강해식으로 가르치는 것을 두려워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성경 안의 많은 부분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고 또한, 그들의 회중들이 그들이 얼마나 모르는지를 아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잘난 척 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누구도 성경의 모든 내용을 완벽하게 알 수는 없다. 심지어 베드로도 바울이 쓴 몇 가지가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한 적이 있다(벧후 3:16을 보라).
강해식으로 가르치는 목사가 이해하지 못하는 구절에 부딪쳤을 때, 그는 단순히 그 부분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그의 회중들에게 알려주어야 하며 다음 구절로 이동하여야 한다. 그는 또한, 그의 회중들이 성령님께 그의 이해를 도와주시도록 기도드리도록 부탁할 수 있다. 그의 겸손은 회중들에게 좋은 본이 되며 그 자체가 설교가 된다.
가정교회의 목사/장로/감독은 비공식적인 분위기 속에서 소그룹을 가르칠 때 추가 이점이 있는데 그것은 그의 가르침 중에 질문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령님이 연구되고 있는 말씀에 대해 그룹의 다른 사람들에게 통찰력을 줄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준다. 그 결과 모두가 더 효과적인 학습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리스도의 계명을 가르칠 때에는 마태복음 5-7장의 산상수훈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다. 예수님은 많은 계명을 주셨고, 그분은 유대인 추종자들이 모세를 통해 주어진 율법을 바로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잠시 후 이 책에서, 나는 산상수훈을 어떻게 강해식으로 가르칠지를 보여줄 것이다.
설교준비(Sermon Preparation)
신약 성경 어디에도 목사/장로/감독들이 많은 현대 사역자들의 관행대로, 개요 양식에 조리 정연한 중점과 실례를 적은 주간 연설/설교를 준비했다는 증거는 없다. 물론 우리 중 누구도 예수님이 그런 일을 하셨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 초대교회에서 가르치는 방식은 교회가 제도화되면서 채택된 전통적인 그리스와 로마의 강론식보다는 유대인 방식을 따라 더 자연스럽고 상호 작용적이었다. 만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법정에 호출되었을 때 어떻게 변호할지 준비하지 말라고 하시고 성령님이 그들에게 자연스럽게, 반박할 말씀들을 주실 거라고 약속하신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교회의 모임에서 목회자들을 어느 정도 도울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할 수도 있다!
이것은 목사가 기도하고 공부하면서 자신을 준비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권면하였다.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 2:15).
바울의 가르침을 따라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골 3:16)려는 사역자들은 그들안에 가득 차서 흘러넘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칠 수 있다. 그러므로 친애하는 목사여, 중요한 문제는 당신 자신이 성경에 빠져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당신이 당신의 설교주제에 대해 지식과 열정으로 넘쳐 있다면, 하나님의 진리를 전달함에 있어서 더 준비해야 할 다른 것은 거의 없다. 또한, 당신이 강해식 설교를 한다면, 연속적인 구절을 개요로 삼을 수 있다. 그런 다음 당신이 해야 할 준비는 가르칠 구절들을 기도하면서 묵상하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가정교회 목사라면, 상호작용적인 분위기 때문에 설교개요에 대한 필요성을 줄일 수 있다.
하나님이 그가 가르칠 때 도와주시라는 것을 믿는 사역자는 하나님의 도움을 보상받을 것이다. 그래서 자기 자신, 자기만의 준비, 자신의 노트를 적게 의지하고 주님을 더 의지해야 한다. 점차 당신은 믿음과 신심을 갖게 되며, 설교 노트를 적게 준비하게 되며, 개요만 준비하거나 개요를 준비하지 않아도 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자의식이 강한 사람은 공공 실수를 너무 두려워하기 때문에 설교 할 때 준비된 노트에 의존할 가능성이 크다. 그는 자신의 두려움은 자존심에 뿌리내린 불안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는 자신이 사람들의 눈에 어떻게 보이는지에 대해서는 덜 근심하고 그와 그의 청중들이 하나님의 눈에 어떻게 보여지는지에 대해 더 관심 두어야 할 것이다. 어떠한 준비된 설교도 성령의 기름 부음이 있는 가르침보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을 것이다. 모든 사람이 준비된 노트대로만 대화한다면 얼마나 많은 교통이 저애받을지 생각해보라! 대화는 죽을 것이다! 준비하지 않은 대화형 방식은 준비된 연설보다 더 진실해 보인다. 가르치는 것은 연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진리를 부여하고 있다. 우리가 연설을 듣고만 있을 때에는 자동적으로 집중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이밖의 네 가지 생각들(Four More Thoughts)
(1) 일부 사역자들은 앵무새같이 다른 사람들이 쓴 책들에서 모든 설교 자료를 뽑아낸다. 그들은 개인적으로 성령님께 가르침을 받는 놀라운 축복을 놏치고 있으며 또한, 그들이 베낀 작가들의 오류를 전파할 가능성이 크다.
(2) 많은 목사는 종종 전통적인 다른 설교자들의 설교와 가르침의 방식을 모방한다. 예를 들어, 설교는 높고 빠르게 진행할 때 기름 부음 받는다고 일부 교회권에서는 주장한다. 그래서 교회 참석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소리치는 설교를 들어야만 한다. 현실은, 사람들이 단조로운 연설처럼, 과도한 고함에 집중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양한 목소리가 훨씬 더 매혹적이다. 또한, 설교는 훈계이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큰소리로 하지만 가르침은 교육이기 때문에 보통 대화방식으로 한다.
(3) 수백 차례의 교회예배에서 설교 청취자들을 관찰한 결과, 나를 놀라게 한 것은 너무 많은 설교자와 교사들은 사람들이 지루해하거나 또는 청취하지 않고 있는 상황을 의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목사여, 지루해 보이는 사람은 정말로 지루해하고 있다! 당신이 말하는 동안 당신을 바라보고 있지 않는 사람은 듣고 있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설교 말씀을 듣지 않는 사람은 최소한의 도움도 받지 못하게 된다. 만일 신실한 사람들이 사람들마저 지루해하거나 말씀을 듣고 있지 않다면, 당신의 설교는 개선되어야 한다. 더 많은 실례를 들어보라. 관련 예화를 들려주라. 비유를 들어보라. 단순하게 하라. 당신의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을 가르치라. 진심으로 하라. 자기 자신이 되라. 다양한 목소리로 진행하라. 가능한 한 많은 청취자와 시선을 맞추라. 얼굴 표정을 사용하라. 두손을 사용하라. 주변을 이동하면서 진행하라. 너무 길게 말하지 말라. 그룹이 작으면 적절한 시간에 사람들에게 질문할 기회를 주라.
(4) 모든 설교는 세 가지 중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인간적인 발상이다. 목표는 현대 설교이론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제자를 삼는 것이다. 예수님은 “내 양을 먹이라”라고 하셨지, “내 양을 감동시키라”라고 하지 않으셨다.
가르침의 대상(Whom to Teach)
예수님의 모식에 따르면, 제자 삼는 사역자는 그가 가르치는 대상을 어느 정도 선택할 수 있다. 그것이 당신을 놀라게 할 수 있지만, 사실이다. 예수님은 종종 비유로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는데, 그렇게 하신 이유가 있었다. 그분은 모든 사람이 그분의 말씀을 이해하기를 원하지 않으셨다. 성경을 보면 이점은 분명하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어찌하여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마 13:10-13).
그리스도의 비유를 깨달을 수 있는 권한은 오직 회개하고 그분을 따르기로 결단한 사람들한테만 있다. 회개할 기회를 거절하고, 자신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에 반항하는 자들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거절 받는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주신다(벧전 5:5을 보라).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그분의 추종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마 7:6). 물론, 예수님은 비유적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그분의 뜻은 “값진 것을 그것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주지 말라는 것이다”이다. 돼지는 진주의 귀중함을 모르며 마찬가지로 영적인 돼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그것이 값진 것임을 알지 못한다. 만일 그들이 실제로 듣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믿었다면, 그들은 그 말씀을 최고로 생각하고 순종하려 할 것이다.
한 사람이 영적인 돼지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가 가는 길에 진주 하나를 던져보고 그가 그 진주를 어떻게 하는지를 보면 된다. 만일 그가 그것을 무시한다면, 이 사람이 영적인 돼지임을 알 수 있다. 만일 그 사람이 순종한다면, 그 사람은 영적인 돼지가 아님을 알게 된다.
불행하게도, 너무 많은 목사는 예수님이 그들에게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을 하고 있다. 그들은 계속해서 돼지에게 진주를 던져주며, 하나님의 말씀을 저항 하거나 거부한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런 사역자들은 하나님이 주신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이 명하신 대로, 발에서 먼지를 털어버리고 진작 떠났어야 했다.
양, 염소, 돼지(The Sheep, Goats and Pigs)
사실, 당신은 예수님께 순종하지 않고 제자로 훈련받으려 하지 않는 사람은 제자로 삼을 수가 없다. 많은 교회는 이와 같은 사람들로 가득하다, 그들은 단지 문화적인 그리스도인이며, 그들 중 대부분은 예수님이나 기독교에 대한 몇 가지 신학적 사실에 정신적인 동의를 함으로써 거듭났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들은 돼지나 염소이지, 양이 아니다. 그러나 많은 목사는 그들이 영적으로 돕고 섬겨야 할 진정한 양들은 정작 무시하면서, 이러한 돼지와 염소들을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자신의 시간의 90%를 사용하고 있다! 목사여, 예수님은 당신이 염소나 돼지가 아닌 그분의 양들을 먹이라고 하셨다(요 21:17을 보라)!
하지만 당신은 누가 양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들은 교회에 가장 먼저 오고 가장 늦게 떠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진리를 배우기에 갈급해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이 자신의 주님이고 그분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 싶기 때문이다. 그들은 주일 뿐 아니라 언제든지 모임이 있을 때마다 교회에 온다. 그들은 소그룹에 소속되어 있다. 그들은 종종 질문한다. 그들은 주님을 기뻐한다. 그들은 섬길 기회를 찾고 있다.
목사여, 당신의 대부분 시간과 관심을 그 사람들에게 쏟아부으라. 그들은 제자이다. 당신의 교회에 참석하는 염소와 돼지들에게는 그들이 참을 수 있는 한 계속하여 복음을 전파하라. 만일 당신이 진정한 복음을 전파한다면, 그들은 오래 버틸 수 없을 것이다. 그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거나 그들이 힘이 있다면 당신을 교회에서 제거해버리려고 시도할 것이다. 만일 그들이 성공하면 당신이 떠날 때에는 발의 먼지를 털어버리라(가정교회 모식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다, 특별히 당신의 집에서 모이는 교회에서는!).
마찬가지로, 복음 전도자들은 복음을 반복적으로 거부하는 같은 사람들에게는 계속해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의무를 느낄 필요가 없다(눅 9:60 을 보라). 당신은 왕들의 왕으로부터 가장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그리스도의 대사이다! 당신의 위치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매우 높으며 당신의 책임은 위대하다! 모든 사람이 복음을 한 번씩 듣기 전까지는 누구에게도 복음을 두 번씩 말하는 데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만일 당신이 제자 삼는 사역자가 되려면, 당신은 누구한테 가르쳐야 할지 선택해야 하며, 당신의 소중한 시간을 예수님께 순종하려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낭비하지 말아야 한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썼다.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딤후 2:2, 강조 추가).
목표에 도달하다(Reaching the Goal)
예수님의 사역에서는 일어날 수 없었지만, 현대 교회에서 늘 일어나는 일이 무엇인가를 잠깐 상상해보라. 예수님이 부활 후 이 땅에 머물면서 현대 제도적 교회 같은 교회를 시작하고 그곳에서 30년간 목회했다고 상상해보라. 그분이 같은 회중들에게 주일마다 설교하신다고 상상해보라. 베드로, 야고보와 요한이 20년 동안 매주 주일마다 가장 앞자리에 앉아 예수님의 설교를 듣는다고 생각해보라. 베드로가 요한한테 기대어 “우리가 똑같은 설교를 이미 열 번은 들었다”라고 귀에 속삭이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우리는 그런 장면이 말도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님이 절대로 그분 자신이거나 사도들을 그런 상황에 놓이게 하지 않으실 것을 알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특정한 시간 내에 특정한 방식으로 몇 명의 제자들을 삼으셨다. 약 3년의 기간 동안, 그분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몇 명의 다른 제자들을 삼으셨다. 그분은 교회 건물에서 매주 주일마다 한 번씩 그들에게 설교하는 방식으로 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그들과 함께 살면서 가르치고, 그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그들에게 섬길 수 있는 기회를 주는 방식으로 제자를 삼으셨다. 그분은 그분의 사명을 다하셨다.
그럼 왜 우리는 예수님이 하시지 않을 일을 하고 있을까? 왜 우리는 수십 년 동안 같은 사람들에게 설교하는 것을 통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이루려고 시도하는가? 언제면 우리의 사명을 성취할 수 있을까? 왜 몇 년이 지나도, 우리의 제자들은 그들만의 또 다른 제자를 삼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는가?
나의 요점은 만일 우리가 우리의 작업을 제대로 하고 있다면, 우리의 제자들은 정말로 더는 우리의 사역을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성숙해질 때가 올 것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제자를 삼지 못하는 상황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앞에 설정한 목표를 달성할 것이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할지를 보여 주셨다. 덧붙여, 성장하고 있는 가정교회는 지속적으로 제자를 삼고 지도자들을 개발하는 것이 필요하다. 건강한 가정교회는 수십 년 동안 같은 설교자가 같은 사람들에게 설교하는 끝없는 순환에 빠지지 않는다.
정확한 동기(Right Motives)
제자를 삼도록 가르치는 데 성공하려면, 정확한 동기를 갖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 누군가가 그릇된 동기로 사역하고 있을 때, 그는 그릇된 일을 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 교회가 수많은 거짓과 편면적인 가르침으로 가득 찬 이유이다. 사역자의 동기가 인기를 얻어 다른 사람들 보기에 성공적이 되는 것이거나, 돈을 많이 버는 것이라면, 그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실패하기 마련이다. 가장 슬픈 것은 그가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는 데 성공하여 인기를 누리고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성공하고, 많은 돈을 벌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잘못된 동기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는 날이 올 때에, 그는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아무런 상급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만일 그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허용된다면,[3] 모두가 그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천국에서 그는 상을 받지 못했고 낮은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천국에 계급차이가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예수님은 이렇게 경고하셨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마 5:19).
물론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고 가르치는 사역자들은 그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 고통을 당할 것이다. 예수님은 그분께 순종하는 자들에게 고통을 약속하셨다(마 5:10-12; 요 16:33을 보라). 그들은 세상적인 성공, 인기와 부를 얻을 가능성이 작다. 그들이 얻는 것은 앞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상급과 칭찬이다. 어떤 것을 얻기를 더 원하는가? 이것에 관하여 바울은 이렇게 썼다.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 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 이 닦아 둔 것 외에는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고전 3:5-15).
바울은 자신을 터를 닦은 지혜로운 건축자에 비유했다. 아볼로는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세운 후 그곳에 온 교사이고, 바울은 그를 이미 닦아 놓은 터 위에 세우는 자에 비유했다.
바울과 아볼로는 모두 궁극적으로 자신의 공적의 양이 아닌 질에 따라 보상될 것이라고 한 것을 주목하라(3:13을 보라).
비유적으로 말할 때, 바울과 아볼로는 여섯 가지 부동한 재료로 하나님의 건물을 세울 수 있는데, 그중 세 가지 재료는 일반적이고, 상대적으로 저렴하고 불에 타기 쉬우나, 나머지 세 가지는 흔치 않으며, 매우 비싸고 및 불에 타지 않는다. 어느 날, 각각의 건축 재료는 하나님의 심판의 불을 받을 것이며, 나무, 풀과 짚은 불에 타 없어질 것이며 그들의 가치 없음과 현세적인 품질을 드러내게 된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소중하고 영원한 공적을 대표하는 금, 은, 보석은 심판의 불길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비성경적인 가르침은 그리스도의 심판의 불에 타서 재가 될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육체의 능력, 방법, 또는 지혜로 한 모든 일과 잘못된 동기로 한 모든 일도 같은 결과를 맞이할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사람들의 칭찬에 대한 욕구에 의해 하는 모든 일은 보상되지 않는다고 경고하셨다(마 6:1-6,16-18을 보라). 이런 쓸모없는 일이 지금은 인간의 눈에 잘 보이지 않을 수 있지만, 미래에는 반드시 모든 사람에게 드러나게 될 것이라고 바울이 경고했다. 개인적으로, 만일 나의 공적이 나무, 풀 및 짚과 같은 종류에 속한다면, 나는 나중이 아닌 바로 지금 발견하고 싶다. 지금은 회개할 시간이 있다; 그때가 되면 너무 늦을 것이다.
우리의 동기를 점검하라(Checking Our Motives)
우리 동기에 대해서 자신을 기만하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다. 나도 분명히 그랬었다. 우리는 자신의 동기가 순수한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가장 좋은 방법은 우리의 동기가 잘못되었는지를 하나님께 물어보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점검해본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기도하는 것과 은밀한 중에 가난한 자들을 도와주는 것과 같은 선한 일을 하라고 하셨는데, 그것은 우리 자신이 선한 일을 하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의 하나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람들의 칭찬보다 하나님의 칭찬을 더 바라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사람들이 우리를 지켜볼 때만 하나님께 순종한다면, 그것은 무언가가 매우 잘못된 일이다. 또는, 만일 우리가 사람들한테 잡히면 명성을 흐리는 수치스러운 죄들은 피하려 하지만, 아무도 알아낼 수 없는 죄들은 방종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동기가 잘못되었음을 보여준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모든 생각, 말과 행동을 아시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기쁘시게 하려 한다면, 우리는 매 순간 일이 크든지 작든지 다른 사람들이 알든지 모르든지 그분께 순종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만일 우리의 동기가 올바르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계명을 모두 순종하는 제자를 삼는 것을 희생시키면서 교회출석만을 향상 시키기 위한 교회성장 유행은 따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가르칠 것이며, 단지 세상적이고 영적이지 못한 사람들을 끌기 위한 인기주제에만 초점을 두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거나 또는 성경을 가르칠 때 전반 성경내에서의 문맥을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자신을 위한 지위와 명예를 추구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명성을 추구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부자들의 비위를 맞추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 땅에 보물을 쌓아두지 않을 것이며 단순하게 살고 우리의 양 떼들에게 좋은 청지기의 본을 수립하기 위해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바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설교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보다 하나님이 어떻게 보시는가에 더 치중할 것이다.
당신의 동기는 어떠한가?
제자 삼는 것을 타격하는 하나의 교리(A Doctrine that Defeats Disciple-Making)
제자 삼는 사역자는 결코 제자를 삼는 목표를 위배하는 것은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는다. 따라서, 그는 결코 사람들로 하여금 주 예수님께 불순종하면서도 편안한 느낌이 들게 하는 말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는 결코 하나님의 은혜를 죄를 짓고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는 수단으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죄를 회개하고 승리의 삶을 살아가는 수단으로 보았다. 성경은, 우리가 알다시피, 오직 이기는 자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한다고 선언한다(계 2:11;3:5;21:7을 보라).
일부 현대 목사들은, 불행하게도, 제자를 삼는 목표에 큰 피해를 주는 비성경적인 교리들을 붙잡고 있다. 이런 교리들 중 미국에서 매우 큰 인기를 누리고 있는 하나가 무조건적인 영생보장, 또는 “한 번 받은 구원은 영원하다”는 것이다. 이 교리는 거듭난 사람은 그들이 어떻게 사는가와는 관계없이 그들의 구원은 절대로 박탈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구원은 은혜로 받는 것이기에, 구원을 받기 위해 기도했던 사람은 은혜로 구원을 받으며, 똑같은 은혜는 그들의 구원을 유지해줄 것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그들은 기타 관점들은 모두 사람들이 자신들의 공로로 구원을 받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본다.
물론, 이러한 관점은 거룩함에 대한 큰 손해이다.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것이 한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는 데 있어서 중요하지 않다고 본다면 예수님께 순종할만한 동기는 없게 되는데 특히 순종이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할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내가 이 책의 앞부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은혜는 그분께 순종해야 할 책임은 면해주지 않는다. 성경에 의하면 구원은 단지 은혜에 의해서만 아니라 또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는다고 하였다(엡 2:8을 보라).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은혜와 믿음이 모두 필요하다.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적절한 응답이며, 진정한 믿음은 항상 회개와 순종을 낳는다.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고 아무 유익이 없으며 자기를 구원할 수 없다고 하였다(약 2:14-26을 보라).
그것은 성경이 반복적으로 지속적인 구원은 지속적인 믿음과 순종에 의존한다고 선언한 이유이다. 이 점을 증거하는 많은 성경 말씀들이 있다. 예를 들어, 바울은 골로새 신자들에게 쓴 편지에서 이렇게 주장하였다.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골 1:21-23, 강조 추가).
그것보다 더 명확할 수 없다. 오직 신학자만이 바울의 뜻을 오해하거나 왜곡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계속하여 믿음안에 거하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흠 없음을 확인해 주실 것이다. 이 같은 진리는 로마서 11:13-24, 고린도전서 15:1-2과 히브리서3:12-14, 10:38-39에서도 쓰여 있는데 그것은 최종적인 구원은 지속적인 믿음에 달려 있음을 명백하게 나타내고 있다. 이 같은 말씀들은 모두 만일이라는 조건적인 단어를 포함하고 있다.
거룩함의 필요성(The Necessity of Holiness)
신자가 죄를 범함으로 영생을 잃을 수 있을까? 그에 대한 답은 많은 성경 말씀 속에서 찾을 수 있는데 아래와 같은 말씀들은 모두 각종 죄를 짓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하지 못함을 확인하고 있다. 만일 한 신자가 다음의 바울이 나열한 죄들을 다시금 짓는다면, 그는 궁극적으로 구원을 상실할 수 있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아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전 6:9-10, 강조 추가).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수로가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갈 5:19-21, 강조 추가).
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엡 5:5-6, 강조 추가).
모든 경우마다, 바울은 서신으로 신자들을 경고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두 번씩 그들에게 미혹받지 말라고 경고하였는데 이는 그가 어떤 신자들은 그가 나열한 죄들을 지으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을 걱정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예수님은 그의 가장 가까운 제자들인,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에게 만일 그들이 그분의 재림을 맞이하기 위해 준비하지 않는다면 그들도 지옥에 던져질 수 있음을 경고하였다. 불신자들의 무리가 아닌 제자들에게(막 13:1-4을 보라) 했던 다음의 말씀들을 확인해보라.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둑이 어느 시각에 올 줄을 알았더라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이러므로 너희도[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의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동료들을 때리며 술친구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마 24:42-51, 강조 추가).
이 이야기는 무엇을 말해주는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야, 이 비유에서 나오는 믿음이 없는 종처럼 되지 말라.”[4]
예수님은 가장 가까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강조하기 위하여 인츰 열 처녀의 비유를 계속했다. 열 명의 처녀들은 처음에는 신랑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마지막에 그중 다섯 명은 준비하지 않으므로 결혼잔치에서 제외되었다. 예수님은 “그런즉 깨어 있으라[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 너희[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마 25:13)는 말씀으로 이 비유를 마치셨다. 즉,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야, 다섯 명의 어리석은 처녀들처럼 되지 말라”는 뜻이다. 만일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가 준비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없었다면 예수님이 경고하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 후 예수님은 인츰 그들에게 달란트 비유를 하셨다. 그것 또한, 같은 메시지였다. “주인한테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처럼 그의 주인이 돌아왔을 때에 주인이 그에게 위탁한 것을 아무것도 보여줄 것이 없는 모습이 되지 말라”는 내용이다. 비유의 끝에서, 주인은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마 25:30)고 선언한다. 예수님은 그분의 메시지를 더는 명확하게 할 수가 없었다. 오직 신학자만이 그의 의미를 왜곡할 수 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도 예수님이 재림했을 때 순종하지 않았다면 결과적으로 모두 지옥에 던져질 수 있는 위험에 놓여 있다. 만일 그런 가능성이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에게 존재한다면 우리 모두에게도 존재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마 7:21을 보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5]
무조건적인 영생보장의 거짓 교리를 가르치는 사람은 분명히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사탄에 동조하고 있는 것이며, 예수님과 사도들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그들은 예수님의 모든 말씀을 순종하려는 제자를 삼으라는 예수님의 계명을 효과적으로 무효화시키고, 천국으로 향하는 좁은 길을 차단하고, 지옥으로 통하는 넓은 고속도로를 확대해가고 있다.[6]
제자 삼는 것을 방애하는 또 하나의 현대 교리(Another Modern Doctrine that Defeats Disciple-Making)
거룩함이 궁극적인 구원에 중요하지 않다고 사람들을 미혹하는 것은 단지 무조건적인 영생보장을 가르치는 것뿐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종종 제자 삼는 것을 저애하는 방식으로 사용된다. 설교자들이 종종 회중들에게 “하나님은 당신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사람은 그 말을 “하나님은 나의 순종 여부를 떠나서 나를 받아주고 열납하신다”고 해석한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진실이 아니다.
대부분의 그 같은 설교자들은 하나님께서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지옥으로 보낸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들의 믿음은 확실히 정확하다. 그것에 대해 한 번 생각해보자. 분명히, 하나님은 그분이 지옥으로 보낸 사람은 열납하지 않는다. 그럼 어떻게 그분이 그들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지옥으로 던져진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 맞는가? 그들이 당신한테서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한다고 말할 것 같은가? 당연히 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그분께 혐오스러운 존재들이며 그 때문에 그들은 지옥에서 벌을 받게 된것이다. 그분은 그들을 열납하거나 사랑하시지 않는다.
그렇게 때문에, 이 세상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분명히 잠시적인 자비로운 사랑이지 열납하는 사랑이 아니다. 그분은 죄인들에게 자비를 베풀고 심판을 늦추었으며 그들이 회개할 기회를 주셨다. 예수님은 그들을 위하여 죽으심으로 그들에게 용서받는 방법을 제공하셨다. 이로부터 봤을 때 우리는 하나님이 죄인들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분은 결코 그들을 열납 하지는 않으셨다. 그분은 그들에게 아버지가 자식을 향한 사랑 같은 것은 느끼신 적은 없다. 오히려, 성경은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신다”(시 103:13, 강조 추가)고 선언한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분을 경외하지 않는 자한테는 같은 긍휼을 베풀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법관이 살인범에게 사형이 아닌 종신형을 선고하는 자비에 더 가깝다.
사도행전을 보면 복음을 전파했던 그 누구도 구원받지 못한 청중한테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한다고 말한 적이 없다. 오히려, 성경적인 설교자들은 종종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 그들의 청중들을 경고하고 그들이 회개하기를 촉구했으며, 하나님이 그들을 열납하시지 않으며 그들은 위험에 직면해 있으며 그들의 생명은 극적인 변화가 필요함을 알려주었다. 만일 그들이 청중들에게 단지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한다는 말만 했다면(수많은 현대 사역자들이 하고 있는 것처럼), 그들은 그들의 청중들로 하여금 자신은 하나님의 진노를 사지 않으며 위험에 놓여 있지 않기에 회개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빠지게 할 수 있다.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미움(God’s Hatred of Sinners)
오늘날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자주 선언되는 반면, 성경은 종종 하나님이 죄인들을 미워함을 말씀한다.
오만한 자들이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하리이다 주는 모든 행악자를 미워하시며 거짓말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시리이다 여호와께서는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와 속이는 자를 싫어하시나이다(시 5:5-6, 강조 추가).
여호와는 의인을 감찰하시고 악인과 폭력을 좋아하는 자를 마음에 미워하시도다(시 11:5, 강조 추가).
내가 내 집을 버리며 내 소유를 내던져 내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을 그 원수의 손에 넘겼나니 내 소유가 숲속의 사자 같이 되어서 나를 향하여 그 소리를 내므로 내가 그를 미워하였음이라(렘 12:7-8, 강조 추가).
그들의 모든 악이 길갈에 있으므로 내가 거기에서 그들을 미워하였노라 그들의 행위가 악하므로 내 집에서 그들을 쫓아내고 다시는 사랑하지 아니하니라 그들의 지도자들은 다 반역한 자니라(호 9:15).
위의 모든 성경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사람들의 행함을 미워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을 미워한다고 하셨음을 주목하라. 이로부터 우리는 하나님이 죄인은 사랑하지만, 죄는 미워한다는 말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한사람을 그의 행위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그의 행위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드러내기 마련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죄가 아닌 죄를 지은 사람을 미원하는 것이 맞다. 만일 하나님이 그분이 미워하는 죄를 지은 사람들을 열납하신다면, 그분은 자기모순에 빠지게 된다. 인간의 법정에서, 사람은 자신의 죄행에 대한 재판을 받게 되며, 그들은 응당한 보응을 받게 된다. 우리는 죄행은 미워하면서, 범죄자를 열납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사람들(People Whom God Abhors)
성경은 하나님이 특정 개인들을 미워하신다고 단언할 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이 몇 종류의 죄인들을 싫어하시며, 그들은 그분께 가증스럽다고 선언한다. 다음의 인용된 성경 말씀들이 사람들의 행위가 하나님께 가증스러운 것이 아니라, 그들 자체가 하나님께 가증스럽다고 했음을 다시 한 번 주목하라. 그 말씀들을 보면 하나님이 그들의 죄를 싫어하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을 싫어하신다고 하였다.[7]
여자는 남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요 남자는 여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라 이같이 하는 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자이니라(신 22:5, 강조 추가).
이런 일을 행하는 모든 자, 악을 행하는 모든 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하니라(신 25:16, 강조 추가).
너희가 아들의 살을 먹을 것이요 딸의 살을 먹을 것이며 내가 너희의 산당들을 헐며 너희의 분향단들을 부수고 너희의 시체들을 부숴진 우상들 위에 던지고 내 마음이 너희를 싫어할 것이며(레 26:29-30, 강조 추가).
오만한 자들이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하리이다 주는 모든 행악자를 미워하시며 거짓말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시리이다 여호와께서는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와 속이는 자를 싫어하시나이다(시 5:5-6, 강조 추가).
대저 패역한 자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 정직한 자에게는 그의 교통하심이 있으며(잠 3:32, 강조 추가).
마음이 굽은 자는 여호와께 미움을 받아도 행위가 온전한 자는 그의 기뻐하심을 받느니라(잠 11:20, 강조 추가).
무릇 마음이 교만한 자를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니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하지 못하리라(잠 16:5, 강조 추가).
악인을 의롭다 하고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 사람은 다 여호와께 미움을 받느니라(잠 17:15, 강조 추가).
우리는 어떻게 이 말씀들과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는 사람들을 조화시킬 수 있을까? 하나님이 죄인들을 싫어하고 미워한다면서 또한, 동시에 그들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반드시 모든 사랑이 다 같은 것이 아님을 인식해야 한다. 일부 사랑은 조건적이다. 그것을 “자비로운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사랑은 “…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과 같다. 그것은 사람들의 행위와는 관계없이 사랑하는 사랑이다. 바로 그런 사랑이 하나님이 죄인을 향한 사랑이다.
자비로운 사랑과 대조적인 사랑은 조건적인 사랑이다. 그것은 “열납하는 사랑”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것은 얻거나 받은 것이다. 조건적인 사랑은 “나는…때문에 당신을 사랑한다”라고 말한다.
일부 사람은 사랑이 조건적이 되면 더는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이런 사랑을 하찮게 생각하는 데 그것은 순전히 이기적이며, 하나님의 사랑과 다르다고 말한다.
하지만, 사실은 우리가 곧 성경에 볼 수 있겠지만, 하나님도 조건적인 사랑을 소유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열납하는 사랑은 멸시되지 말아야 한다. 열납하는 사랑은 하나님이 그분의 진정한 자녀를 향해 가지고 있는 첫 번째 사랑이다. 우리는 그분의 자비로운 사랑보다 열납하는 사랑을 더 소망해야 할 것이다.
열납하는 사랑은 열등한 사랑인가? (Is Approving Love an Inferior Love?)
잠깐 멈추고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해보라: “사람들이 나한테 어떤 사랑을 하기를 더 원하는가? – 자비로운 사랑인가 아니면 열납하는 사랑인가?” 나는 당신이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에도 불구하고” 사랑하기보다는 “…때문에” 당신을 사랑하기를 더 원함을 확신한다.
당신은 당신의 배우자가 당신에게 “나는 당신을 사랑할 이유가 없으며, 당신에게는 내가 당신을 좋아할만 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라는 말을 듣고 싶은가? 아니면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데에는 많은 이유가 있다. 당신에게는 내가 존경하는 부분이 너무 많다”는 말을 듣고 싶은가? 당연히 우리는 우리의 배우자가 열납하는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기를 원할 것이며, 그 사랑이야말로 연인들이 함께할 수 있도록 유지해주는 기본적인 사랑이다. 한 사람이 그의 배우자에 대해 존경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 때에, 모든 열납하는 사랑이 더는 존재하지 않을 때에, 그 혼인은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만일 그 혼인이 지속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에서 유래된 자비로운 사랑의 덕분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열납하는 또는 조건적인 사랑은 열등한 사랑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자비로운 사랑이 줄 수 있는 가장 칭찬할만한 사랑이라면, 받을 수 있는 가장 칭찬할만한 사랑은 열납하는 사랑이다. 또한, 열납하는 사랑이 하나님이 예수님께 가졌던 유일한 종류의 사랑이라는 사실은 그것을 정당한 존경을 받게끔 한다. 하나님 아버지는 종래로 예수님께 한 방울의 자비로운 사랑도 품으신 적이 없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안에 사랑받지 못할 만한 일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증언하셨다.
내가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요 10:17).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가 예수님을 사랑하신 이유는 예수님이 죽기까지 순종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열납하는 사랑은 아무 잘못된 점이 없으며 모든 것이 마땅하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사랑을 얻었으며 또한, 받기에 합당하셨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계명을 지킴으로써 그분의 사랑안에 거하셨다고 말씀하셨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 15:9-10, 강조 추가).
이 성경 말씀처럼, 우리도 예수님의 계명을 지킴으로써 그분의 본을 따르고, 그분의 사랑안에 거할 수 있다. 그분은 이 구절에서 열납하는 사랑에 대해 분명하게 말씀하셨으며 우리가 능히 그리고 응당 그분의 사랑을 얻어야 하며, 우리가 그분의 계명을 지키지 않음으로 인해 그분의 사랑 밖으로 나올 수도 있음을 알려주셨다. 우리가 그분의 계명을 지켜야만 그분의 사랑안에 거할 수 있다. 오늘날 이러한 것들은 거의 가르쳐지지 않고 있으나,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기에 응당 가르쳐야 한다.
예수님은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열납하는 사랑을 받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 믿었으므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요 16:27, 강조 추가).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요 14:21,23, 강조 추가).
두 번째 인용구절에서, 예수님은 헌신하지 않은 신자들이 그분의 말씀을 지키기 시작하면 그분이 그들에게 특별한 방식으로 가까이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지키기 시작하면, 그분의 아버지께서 그들을 사랑하실 것이고, 그분과 그분의 아버지께서 그 사람안에 들어와서 함께 사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는데 이것은 분명히 거듭남을 가리키고 있다. 모든 거듭난 사람들의 안에는 아버지와 아들의 성령이 함께 거하신다(롬 8:9을 보라). 그러므로 우리는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은 회개하고 예수님께 순종하기 시작한 사람들이고, 그들은 유일하게 아버지로부터 열납하는 사랑을 얻은 사람들임을 다시 한 번 알게 된다.
물론, 예수님은 그분을 믿는 자들에 대한 자비로운 사랑을 여전히 보유하고 계신다. 그들이 불순종할 때, 그분은 그들이 자신들의 죄를 자백하고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면, 그들을 용서할 준비되어 계신다.
결론(The Conclusion)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그분의 순종의 자녀를 사랑하시는 것이 그분이 죄인을 사랑하시는 것과 다름을 말하기 위함이다. 그분은 죄인들을 단지 자비로운 사랑으로 사랑하시며 그 사랑은 일시적이며 그들이 이 땅에 살아 있을 동안만 지속된다. 비록 그분이 자비로운 사랑으로 그들을 사랑하시는 동시에, 그분은 그들의 성품을 열납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을 미워하신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가르치는 것이다.
한편, 하나님은 그분의 거듭난 자녀를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훨씬 더 사랑하신다. 그분은 그들이 회개하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기 때문에 주로 열납하는 사랑으로 그들을 사랑한다. 그들이 거룩하게 성장해갈 때, 그분은 자비로운 사랑으로 그들을 사랑하실 이유가 점점 적어지고, 갈수록 열납하는 사랑으로 그들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곧바로 그들이 원하는 사랑이다.
이것은 또한, 많은 현대 설교자들과 교사들에 의해 묘사되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은 오류가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잠깐 시간을 내어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다음의 익숙한 표현들을 성경 말씀에 비추어 평가해보기 바란다.
1.) 당신은 하나님이 당신을 지금보다 더 많거나 적게 사랑하시게 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2.) 당신이 하나님이 당신을 향한 사랑을 멈추시게 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3.)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이다.
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신다.
5.) 하나님은 죄인은 사랑하시지만, 죄는 미워하신다.
6.) 당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얻거나 받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7.)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행위를 근거로 하지 않는다.
위의 표현들은 사람들을 잘못 인도할 수 있거나 완전히 거짓이다. 왜냐하면, 대부분은 하나님의 열납하는 사랑을 완전히 부정하고 많은 부분에서 그분의 자비로운 사랑을 잘못 표현했기 때문이다.
(1)에 관해서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열납하는 사랑을 더 많이 하시게 하기 위해서 신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그들은 더 많이 순종하면 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열납하는 사랑을 더 적게 하시게 하기 위해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도 있다. 불순종하면 된다. 죄인들에게는 하나님이 그들을 더 사랑하시게 할 수 있는 것이 있는데 바로 회개이다. 회개 후 그들은 하나님의 열납하는 사랑을 얻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들을 덜 사랑하시게 하는 것은 죽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향해 가지고 계신 유일한 사랑인 자비로운 사랑을 잃게 된다.
(2)에 관해서는,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옛 죄로 돌아감으로 하나님의 열납하는 사랑을 잃게 되고 다시금 하나님의 자비로운 사랑만 받는 처지가 될 수 있다. 그리고 불신자들이 죽게 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향한 유일한 사랑인 자비로운 사랑은 중지된다.
(3)에 관해서는, 하나님의 열납하는 사랑은 당연히 조걱적인다. 심지어 그분의 자비로운 사랑도 조건적으로 육체적으로 살아 있는 사람한테만 적용된다. 죽은 후에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사랑이 끝나므로 그 사랑은 일시적이고 조건적이다.
(4)에 관해서는,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시지 않을 가능성은 더욱 높다. 왜냐하면, 모든 죄인이나 성도들에 대해서 그분은 부동한 정도의 반대와 열납을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물론, 죄인들과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도 같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5)에 관해서는, 하나님은 죄인들과 그들의 죄를 미워하신다. 그분이 죄인들을 자비로운 사랑으로 사랑하시고 그들의 죄는 미워하신다고 말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 그분의 열납하는 사랑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분은 그들을 미워하신다.
(6)에 관해서는, 누구든지 그리고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열납하는 사랑을 쟁취해야 한다. 물론 아무도 그분의 자비로운 사랑은 쟁취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사랑은 무조건적으로 주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7)에 관해서, 하나님의 자비로운 사랑은 행위에 근거한 것이 아니지만, 하나님의 열납하는 사랑은 확실히 그러하다.
이 모든 것은 제자 삼는 사역자는 응당 하나님의 사랑을 성경에서 묘사한 것처럼 정확하게 제시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그분은 누구도 속임 당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께 열납하는 사랑을 받은 사람만이 천국에 갈 수 있으며, 그리고 하나님은 오직 거듭나고 예수님께 순종하는 사람들만 열납하신다. 제자 삼는 사역자는 사람들이 거룩함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은 아무것도 가르치지 말아야 한다. 그의 목표는 하나님의 목표와 같으며, 그리스도의 모든 계명을 지키는 제자를 삼는 것이다.
[1]모든 신자는 대중적으로 사람들을 가르쳐야 할 책임은 없으나, 그들이 제자를 삼을 때에는 일대일로 가르칠 책임은 있다(마 5:19; 28:19-20; 골 3:16; 히 5:12을 보라).
[2]복음 전도자가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가르침의 한 형태로 간주되며 복음 전도자는 반드시 성경적으로 정확한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3]내가 “만일”이라고 말한 이유는 이기적인 동기에 의해 사역하는 사람들은 양의 탈을 쓴 늑대들이며 그들은 분명히 지옥에 던져질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을 잘못된 동기를 가진 진정한 사역자들과 구별되게 하는 것은 잘못된 동기의 정도라고 생각한다.
[4]놀랍게도, 예수님께서 자신의 가장 가까운 제자들에게 경고했으며 믿음이 없는 종은 신자를 가리킨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는 일부 교사들은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장소가 천국의 외각이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거기에서 믿음이 없는 신자들은 예수님이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천국으로 그들을 환영 할 때까지 상급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해 일시적으로 슬퍼할 것이라는 것이다!
[5]물론, 그리스도인이 하나의 작은 죄를 지었다고 해서 즉각적으로 구원을 상실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사람들은 용서받는다(만일 그들이 그들에게 죄를 지은 사람들을 용서한다면).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훈계받을 위험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속적인 훈계에도 마음이 강퍅해진다면, 그들은 구원을 상실할 수 있다.
[6]그리스도인이 구원을 상실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아직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다음의 신약 성경의 말씀을 읽어야 할 것이다. 마 18:21-35; 24:4-5, 11-13, 23-26, 42-51, 25:1-30; 눅 8:11-15; 11:24-28; 12:42-46; 요 6:66-71; 8:31, 51; 15:1-6; 행 11:21-23; 14:21-22; 롬 6:11-23; 8:12-14, 17, 11:20-22; 고전 9:23-27; 10:1-21; 11:29-32; 15:1-2; 고후 1:24; 11:2-4; 12:21-13:5; 갈 5:1-4, 6:7-9; 빌 2:12-16; 3:17-4:1; 골 1:21-23; 2:4-8, 18-19; 살전 3:1-8; 딤전 1:3-7, 18-20; 4:1-16; 5:5-6, 11-15, 6:9-12, 17-19, 20-21; 딤후 2:11-18; 3:13-15; 히 2:1-3; 3:6-19; 4:1-16; 5:8-9, 6:4-9, 10-20; 10:19-39; 12:1-17, 25-29; 약 1:12-16; 4:4-10; 5:19-20; 벧후 1:5-11; 2:1-22; 3:16-17; 요일 2:15-28; 5:16; 요이 6-9; 유 20-21; 계 2:7, 10-11, 17-26; 3:4-5, 8-12, 14-22; 21:7-8; 22:18-19. 무조건적인 영생보장의 거짓 교리를 가르치는 사람들이 증거로 제출하는 말씀들을 보면 단순히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만 강조하고 인간의 책임에 대한 언급은 없다. 따라서 그런 말씀들은 내가 나열한 말씀들과 조화를 이루게끔 해석해야 한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사람들의 신실함을 보장하지 않는다. 그것은 내가 나의 아내에게 나는 영원히 그녀를 떠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 그 약속을 지킨다고 해서 그녀가 나를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보장할 수는 없는 것과 같다.
[7]어떤 사람들은 죄인에 향한 하나님의 미움과 혐오를 보여주는 성경 구절은 모두 구약에 있다고 주장할 수있다. 그러나 구약부터 신약까지,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태도는 변함이 없다. 마태복음 15:22-28에 기록된 예수님과 가나안 여자와의 만남은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태도를 잘 보여주는 신약의 한 예이다. 예수님은 처음에 그녀의 간구에 대답조차 하지 않으셨으며 심지어 그녀를 개라고 부르기까지 하셨다. 그녀의 지속적인 믿음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그녀에게 자비를 베푸시게 하였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한 예수님의 태도를 열납하는 사랑의 일종이라고 간주 할 수 없다(마태복음 23장을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