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과 재혼의 주제는 종종 신실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논쟁 되고 있다. 두 가지 근본적인 질문이 그 논쟁의 근거가 된다. (1) 하나님이 이혼을 허락하셨다면 언제 하셨는가? (2) 하나님이 재혼을 허락하셨다면 언제 하셨는가? 대부분 교단과 독립적인 교회들은 성경 말씀에 대한 그들의 특정 해석에 근거하여 무엇이 허락되고 무엇이 허락되지 않는지에 대해 공식적인 교리 입장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신념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 의한 것이라면, 우리는 마땅히 그들의 신념과 그 신념에 의해 살아가는 삶을 존중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모두 100% 성경적인 신념을 갖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제자 삼는 사역자는 하나님의 의도에 어긋난 것을 가르치기를 원하지 않으며 또한, 하나님께서 종래로 의도하시지 않은 부담을 사람들에게 주려 하지 않는다. 그런 목표를 염두에 두고, 나는 최선을 다하여 이 논쟁 주제에 관한 성경 말씀을 해석할것이며, 그것에 동의할지 여부에 대해서는 당신이 결정하게 할 것이다.
먼저오늘날 전 세계에 만연해 있는 이혼에 대해 나도 당신처럼 괴로워하고 있음을 알려주고 싶다. 더욱 나를 괴롭게 하는 것은 사역자를 포함한 많은 자칭 그리스도인이 이혼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하난의 큰 비극이다. 우리는 이런 일이 더는 일어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하며 이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해결책은 바로 복음을 전하고 사람들이 회개하게 하는 것이다. 서로 결혼한 두 사람이 진정으로 거듭나고 그리스도를 따른다면, 그들은 결코 이혼하지 않을 것이다. 제자 삼는 사역자는 자신의 본이 되는 삶이 가르침에 있어서 가장 영향력 있는 방법임을 알기에, 자신의 결혼을 든든히 하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25년이 넘는 행복한 결혼생활을 해왔으며 전에 결혼한 적이 없다. 나는 절대 이혼하는 것을 상상할 수 없다. 때문에 나에게는 자신을 위해서 엄격한 이혼 관련 말씀을 약화시키려는 동기가 없다. 그러나 나는 이혼한 사람들에 대해 깊은 공감을 하고 있으며, 내가 나이가 어렸다면 나중에 유혹받아 이혼하고 싶은 여자거나 지금의 훌륭한 아내보다 나를 품어줄 수 없는 여자와 결혼하는 나쁜 결정을 쉽게 할 수 있었음을 알고 있다. 다시 말해서, 나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면 결국 이혼했을 것이다. 나는 대부분의 결혼한 사람들이 내가 말한 것에 공감한다고 생각하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혼한 사람들을 향해 돌을 던지지 않도록 자신을 억제해야 한다. 우리는 누구이기에 자신의 결혼도 관리하지 못하고 이혼한 사람들이 겪은 어려움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그들을 정죄하는가? 하나님은 그들이 우리보다 더 의롭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가 같은 상황에 놓였다면 더 빨리 이혼했을 수도 있음을 아시기 때문이다.
결혼한 사람은 아무도 궁극적으로 이혼할 것을 예상하지 않는다. 때문에 나는 아무도 이혼의 고통을 당해본 사람보다 이혼을 더 싫어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혼한 사람은 결혼을 유지하도록 도와주고, 이혼한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어떠한 은혜든지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할 것이다. 나는 이러한 심정으로 이 글을 써내려간다.
나는 성경 말씀이 성경 말씀을 해석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다. 나는 이 주제에 대한 말씀들이 종종 다른 말씀들과 모순되게 해석되는 것을 보게 되는데, 이것은 이 말씀들이 적어도 부분적으로 제대로 이해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기본 진리(A Foundation)
우리가 모두 동의할 수 있는 기본적인 진리부터 시작하도록 하자. 가장 기본적으로, 성경은 하나님이 일반적으로 이혼에 대해 매우 반대하신다고 주장한다. 일부 이스라엘 남자들이 그들의 아내와 이혼했을 때, 하나님은 그분의 선지자 말라기를 통해 이렇게 선언하셨다.
나는 이혼하는 것과 옷으로 학대를 가리는 자를 미워하노라…그러므로 너희 심령을 삼가 지켜 거짓을 행하지 말지니라(말 2:16).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로운 성품을 알거나, 이혼이 남편, 아내, 자녀들에게 얼마나 큰 피해를 주는지를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혼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도덕성에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요일 4:8을 보라), 그분은 이혼을 미워한다.
일부 바리새인들이 어느 한 번 예수님께 “어떤 경우”에 이혼이 합법적인지에 관해 질문한 적이 있다. 그분의 응답은 이혼에 대해 반대하는 그분의 기본적인 입장을 드러내고 있다. 사실, 그분은 누구도 이혼하기를 원하지 않으셨다.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이르되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마 19:3-6).
역사적으로, 예수님의 시대에 유대 종교 지도자들 사이에 두 가지 학파가 존재했다. 우리는 나중에 이 두 가지 학파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알아보도록 하겠지만, 지금은 그 중 하나는 보수파고 하나는 자유파라는 것만 알아두자. 보수파는 오직 매우 심각한 도덕적 이유가 있을 때에만 남자가 자기의 아내와 이혼하는 것이 허락된다고 믿었다. 자유파는 남자는 어떠한 이유에서든 자기의 아내와 이혼할 수 있으며 심지어 아내보다 훨씬 더 매력적인 여자를 찾은 것까지 포함한다고 믿었다. 이러한 모순되는 신념은 예수님께 질문한 바리새인들이 기본적인 입장이었다.
예수님은 창세기의 말씀을 인용하여 하나님의 본래 계획은 남자와 여자가 일시적이 아닌 영원히 함께 있는 것임을 호소하셨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두 성을 만드신 것은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게 하기 위함이며 결혼은 가장 주요한 관계라고 선언하였다. 결혼의 관계가 일단 성립되면, 그것은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보다 더 우위이다. 남자는 그의 부모를 떠나서 아내와 결합하게 된다.
또한, 남자와 아내의 성적인 결합은 하나님께서 그들이 하나가 되기를 위한 뜻에도 부합된다. 분명한 것은, 자손을 번식하는 이런 관계는 하니님께서 일시적으로 뜻하신 것이 아니라 영구적인 것이다. 나는 바리새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응답 어조는 이런 물음을 제기하고 있는 자체에 대한 실망감을 드러낸다고 생각된다. 하나님은 분명히 사람들이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그들의 아내와 이혼하는 것을 의도하지 않으셨다.
물론, 하나님은 누구도 어떤 방식으로든 죄를 짓는 것을 의도하지 않으셨지만, 우리 모두는 죄를 짓고 있다. 자비롭게도, 하나님은 죄의 노예가 되어 있는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을 주셨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이 원하시지 않는 일을 한 후에 우리에게 해주실 말씀이 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누구에게도 이혼을 의도하신 적이 없지만, 이혼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불가피하다. 하나님은 첫 번째 이혼이나 그 후의 수백만 차례의 이혼에 놀라지 않으셨다. 그리고 그분은 그분께서 이혼을 미워하심을 선언하실 뿐 아니라, 이혼한 사람들에게 하실 말씀을 가지고 계신다.
태초에(In the Beginning)
이러한 기초위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혼과 재혼에 대해 하신 말씀을 더 구체적으로 탐구해 보도록 하자. 이혼과 재혼에 대해 가장 논쟁이 많은 성경 구절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므로, 먼저 하나님께서 같은 주제에 대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을 살펴보는 것이 우리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하신 말씀과 예수님을 통해 하신 말씀이 모순됨을 발견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이 변했거나 우리가 모세나 예수님의 말씀을 잘못 해석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처음으로 이혼과 재혼에 관해 하신 말씀부터 알아보자.
나는 예수님께서 이혼과 관련이 있다고 하신 창세기 2장의 말씀을 이미 언급한 바가 있다. 이번에는 창세기의 기록에서 바로 읽어보도록 하자.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 2:22-24).
이 말씀은 결혼의 기원을 밝히고 있다. 하나님은 첫 번째 사람인 남자에게서 첫 번째 여자를 만드셨으며 그녀를 그 남자에게 영구적으로 데려왔다. 예수님은 말씀 속에서 “하나님이 짝지어준”(마 19:6, 강조 추가) 것이라고 하셨다. 하나님이 정하신 첫 번째 결혼은 이후의 모든 결혼에 대해 모범을 보여주었다. 하나님은 여성을 남성의 수만큼 만드시고, 그들이 서로 다른 성에 끌리게 만드셨다. 따라서 하나님이 혼인을 안배하신다고 말할 수 있다(비록 사람들이 아담과 하와보다 더 많은 선택권이 있지만). 그러므로 예수님이 지적하신 것처럼, 어떠한 사람도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나누지 못한다. 하나님의 의도는 부부가 별도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상호 의존하면서 함께 생활하는 가운데 축복을 찾는 것이었다. 이미 드러난 하나님의 분명한 뜻을 거역하는 것은 죄를 구성한다. 따라서, 성경의 두 번째 장부터, 어떠한 결혼에 대해서도 이혼하는 것이 하나님이 의도하신 바가 아니라는 것은 기정 사실이다.
마음에 새겨진 하나님의 율법(God’s Law Written in Hearts)
나는 또한, 창세기의 두 번째 장을 읽어본 적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본능적으로 이혼이 잘못됐다는 것을 알고 있음을 지적하고 싶다. 왜냐하면, 성경 지식이 없는 많은 이교도 문화에서도 혼인약속은 평생 지켜지기 때문이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썼다.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롬 2:14-15).
하나님의 윤리강령은 모든 사람의 마음에 새겨졌다. 사실, 아담부터 예수님의 시대까지 이스라엘 사람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은 양심을 통하여 윤리강령을 알게 되었으며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께서 받은 모든 율법이다. 누구든지 이혼을 염두에 둔 사람은 자신의 양심에 대면해야 하며, 그가 양심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이혼하기 위한 정당한 이유를 찾는 것이다. 만일 그가 정당한 이유가 없이 이혼한다면, 비록 그가 잘 억제 할 수 있겠지만, 그의 양심은 그를 정죄할 것이다.
우리가 아는 바로는, 기원전 1440년쯤 이스라엘 사람에게 모세의 율법을 주시기 전 아담부터 스물일곱 세대가 내려오기까지, 이혼과 재혼에 관한 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 주신 계시는 양심의 법이 전부였다; 하나님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셨다(모세가 출애굽 할 때까지 창세기 2장에 관해서 언급하지 않았음을 기억하라). 모세의 율법 이전의 노아의 홍수시대를 포함한 스물일곱 세대 동안, 수백 년 동안 수백만 개의 혼인 중 일부가 이혼으로 끝났다고 보는 것은 합리적일 것이다. 또한,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은 이혼 때문에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고백하고 회개하면, 그들을 용서하기를 원하신다고 결론 내리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은 것 같이 모세의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도 사람들이 구원받고 하나님께 의롭다 칭함을 받을 수 있음을 확신한다(롬 4:1-12을 보라). 만일 아담부터 모세까지의 사람들이 그들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칭함을 받을 수 있다면, 그것은 그들이 이혼한 죄까지도 모두 용서받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가 이혼과 재혼에 관한 주제를 탐구하기에 앞서, 이런 의문이 든다. 모세의 율법이 있기 전에 이혼의 죄를 지은 사람이 하나님의 사하심을 받았지만, 재혼할 때(율법이 없으므로) 양심의 정죄를 받을까? 나는 단지 문제를 제기할 뿐이다.
자신의 잘못이 아닌, 단지 이기적인 배우자 때문에 이혼 당한 죄 없는 이혼의 피해자들은 어떠할까? 그들의 양심은 그들이 재혼하는 것을 금지할까? 내 생각에는 불가능해 보인다. 만일 한 남자가 다른 여자 때문에 자신의 아내를 버렸다면, 버림받은 아내가 다른 남자와 재혼할 권리가 없다고 생각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녀는 자신의 잘못 때문에 이혼한 것이 아니다.
모세의 율법(The Law of Moses)
성경의 세 번째 책을 읽기까지 우리는 이혼과 재혼에 관한 구체적인 언급을 찾을 수 없다. 모세의 율법에는 제사장과 이혼한 여자와의 결혼 금지가 기록되었다.
그들은 부정한 창녀나 이혼 당한 여인을 취하지 말지니 이는 그가 여호와 하나님께 거룩함이라(레 21:7).
모세의 율법 중 아무 데도 이스라엘 평민에 대한 이런 금지는 없다. 또한, 그 인용된 구절은 (1) 이혼 당한 이스라엘 여성들이 있다는 것과 (2) 제사장이 아닌 이스라엘 남자가 이혼한 여자와 재혼하는 것에는 잘못이 없다는 것을 암시한다. 위에서 인용된 율법은 단지 제사장들과 제사장과 결혼하려는 이혼한 여자에게만 적용된다.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이혼한 여자가 제사장이 아닌 다른 남자와 재혼하는 것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제사장이 아닌 남자가 이혼한 여자와 재혼하는 것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대제사장(또는 그리스도의 최고 대표로서)은 일반 제사장들보다 더 높은 기준으로 생활하도록 요구받았다. 그는 심지어 과부와 결혼할 수도 없다. 우리는 레위기에서 몇 구절 뒤 이런 말씀을 읽게 된다.
과부나 이혼 당한 여자나 창녀 짓을 하는 더러운 여인을 취하지 말고 자기 백성 중에서 처녀를 취하여 아내를 삼아(레 21:14).
이 구절은 모든 이스라엘 과부들이 재혼하는 것이 죄거나, 모든 이스라엘 남자들이 과부와 결혼하는 것이 죄라는 것을 증명할까? 물론, 아니다. 사실, 이 구절이 어느 과부가 어느 남자와 결혼하든지 그 남자가 대제사장이 아니기만 하면 죄가 아니라는 것을 강하게 암시한다. 다른 성경 구절에서도 과부가 재혼하는 것의 정당성을 확인해주고 있다(롬 7:2-3, 딤전 5:14을 보라).
이 구절은 또한, 우리가 앞에서 고려했던 구절(레 21:7)과 함께 모든 이스라엘 남자들이(제사장이거나 대제사장을 제외한) 이혼한 여자거나 심지어 처녀가 아닌 “부정한 창녀”와도 결혼할 수 있다. 이것은 모세의 율법에 따라 이혼한 여자거나 “부정한 창녀”도 마찬가지로 제사장이 아닌 모든 남자와 결혼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 하나님은 비록 간음과 이혼을 매우 반대하시지만, 간음한 자와 이혼한 자에게 또 다른 기회를 주는 은혜를 베푸셨다.
재혼에 대한 두 번째 특정 금지사항(A Second Specific Prohibition Against Remarriage)
하나님은 이혼한 여자들에게 얼마나 많은 “두 번째 기회”를 주셨을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세의 율법을 따라 이혼한 여자에게 단 한 번의 재혼의 기회를 주신다고 결론 내려야 하는가? 그것은 잘못된 결론이 될 것이다. 우리는 나중에 모세의 율법에서 이런 말씀을 읽게 된다.
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 그 여자는 그의 집에서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려니와 그의 둘째 남편도 그를 미워하여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냈거나 또는 그를 아내로 맞이한 둘째 남편이 죽었다 하자 그 여자는 이미 몸을 더렵혔은즉 그를 내보낸 전남편이 그를 다시 아내로 맞이하지 말지니 이 일은 여호와 앞에 가증한 것이라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범죄하게 하지 말지니라(신 24:1-4).
이 말씀에서 유일하게 금지하는 것은 두 번 이혼한(또는 한 번 이혼하고 한 번 과부가 된) 여자가 그녀의 첫 번째 남편과 재혼하는 것이다. 이 말씀은 그녀가 두 번째로 재혼함으로 인해 느끼는 죄책감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지만, 그녀가 두 번째로 이혼(또는 두 번째 결혼에서 과부가 되었을 때), 첫 번째 남편에게 돌아가는 것을 금지하였다. 이것은 그녀가(그녀와 결혼하기를 원하는) 임의의 남자와 재혼할 수 있음을 분명하게 나타낸다. 만일 그녀가 다른 사람과 재혼하는 것이 죄가 된다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구체적인 가르침을 주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분은 단지 “이혼한 사람은 재혼하지 못한다”는 말씀만 하시면 됐을 것이다.
또한, 만일 하나님께서 그녀가 두 번째로 결혼하는 것을 허락하셨다면, 그녀가 첫 이혼 후 결혼할 남자는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 그리고 만일 그녀가 세 번째로 결혼하는 것이 허락받았다면, 그녀가 두 번째 이혼 후 결혼할 남자는 그녀의 첫 번째 남편이 아닌 이상 죄를 짓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혼은 미워하시지만, 이혼한 사람은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그들에게 또 다른 기회를 주시는 자비를 베푸셨다.
요약(A Summary)
나는 지금까지 발견한 사실을 요약해 보겠다. 비록 하나님은 이혼에 대한 증오를 선언하셨지만, 그분은 구약전이나 구약 중에 재혼이 아래의 두 경우를 제외하고는 죄라고 밝히신 적이 없다. (1) 두 번 이혼하거나 한 번 이혼하고 한 번 과부가 된 여자가 첫 번째 남편과 재혼하는 것과 (2) 이혼한 여자가 제사장과 결혼하는 경우이다. 또한, 하나님은 제사장이 아닌 사람이 이혼한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죄라고 하신 적이 없다.
이것은 예수님이 재혼하는 이혼한 사람들과 이혼한 사람들과 재혼한 사람들에 대해 언급하신 것과는 분명히 모순된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이 간음하였다고 하셨다(마 5:32을 보라).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 혹은 모세의 뜻을 오해했거나, 하나님이 그분의 법을 바꾸셨다. 내가 의심하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잘못 해석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분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주신 율법에 따라 천오백 년 동안 도덕적으로 수용되던 것을 갑자기 도덕적으로 죄가 된다고 선언하셨다는 것은 어쩐지 이상해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명백한 모순을 더 완전하게 해결하기 전에, 나는 또한, 구약에 따라 재혼을 허락하신 하나님은 이혼의 이유와 이혼 중에 느끼는 죄책감의 정도에 대해서는 규정하지 않으셨음을 지적할 수 있다. 하나님은 종래로 어떤 이혼한 사람은 이혼 이유가 정당하지 않기에 재혼할 자격이 없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으며, 종래로 어떤 사람은 이혼을 정당하게 했기에 특별히 재혼할 자격이 있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그러나 현대 목사들은 일방적인 증언을 바탕으로 종종 이러한 판단을 시도한다. 예를 들어, 이혼한 여자가 그녀의 목사에게 자신은 이혼의 피해자이기에 재혼하도록 허락할 가치가 있다고 설득하려고 한다. 그녀의 전 남편이 이혼한 것이고 그녀는 이혼을 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목사는 그녀의 전 남편의 얘기를 들어볼 기회가 있다면, 그는 그 남편에게 다소 동정심을 가지게 될 것이다. 아마도 그녀는 잘못이 작지 않으며 일부 비난을 받아야 할 것이다.
나는 이혼 소송을 먼저 제기했다는 죄책감을 피하기 위해 서로에게 이혼 소송을 하도록 부추기는 남편과 아내를 알고 있다. 그들은 모두 이혼을 한 후에 자기가 아닌 상대방이 이혼 소송을 제기했다고 말함으로 두 번째 결혼을 정당화할 수 있기를 원했다. 우리는 사람들을 속일 수는 있지만,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다. 예를 들어, 한 여자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계속적으로 자신의 남편과 동침하기를 거부함으로 인해 남편이 외도가 나서 결국 이혼을 했다면, 하나님은 그녀를 칭찬하실 수 있을까? 그녀가 적어도 부분적으로 이혼의 책임을 져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신명기 24장에서 읽은 두 번 이혼한 여자의 사례에는 이혼의 정당성에 대한 언급은 없다. 그녀의 첫 번째 남편은 그녀에게서 “수치되는 일”을 발견했다. 만일 그 “수치되는 일”이 간음이라면, 간음하는 자는 돌로 쳐 죽이라는 말씀대로 그녀는 죽어 마땅하다(레 20:10을 보라). 그러므로 만일 간음이 이혼할 수 있는 유일한 합법적인 이유라면, 그녀의 첫 번째 남편은 아마도 이혼할만한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반면에, 그녀는 아마도 간음하였고, 마리아 남편인 요셉처럼 의로운 그는 그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마 1:19) 했을 것이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가능성이 존재한다.
그녀의 둘째 남편은 단지 “그녀를 미워했다”고 기록되었다. 다시 한 번, 우리는 남편의 잘못인지 아내의 잘못인지를 알지 못하며 혹은 둘 다의 잘못인지를 모른다. 하지만, 아무런 상관이 없다. 하나님은 그녀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그녀가 두 번 이혼한 여자를 받아주려는 남자와 재혼할 수 있는 은혜를 베푸셨다. 다만 그 남자가 첫 번째 남편이어서는 안 된다.
반대 의견(An Objection)
“하지만, 사람들에게 어떠한 이유에 이혼했든지 이혼 후 재혼하는 것이 합법적이라고 말해 준다면, 그것은 그들이 불법적으로 이혼하는 것을 조장하는 것이 된다”고 사람은 종종 주장한다. 나는 그런 일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 일부 종교적인 사람들에게 나타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이 죄를 짓는 것을 막기 위해 억제하는 것은 헛된 노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마음으로 하나님께 진정 순종하는 사람은 죄를 짓기 위한 방법을 찾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노력하며 그런 부류의 사람은 일반적으로 든든한 결혼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또한,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구약시대에 이스라엘에게 자유롭게 재혼하는 율법을 주셨기 때문에 사람들이 불법적인 이유로 이혼하는 것을 근심하지 않으셨다.
우리는 사람들이 용서받을 수 있음을 알고 더 죄를 지을까 봐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그들의 모든 죄를 용서하신다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하는가?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일을 멈춰야만 한다. 다시 한 번, 그것은 모든 사람의 마음의 상태에 좌우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분께 순종하기를 원한다. 나는 내가 어떠한 죄를 짓든지 하나님께 구하기만 하면 용서를 받을 수 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나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미 거듭났기 때문이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되었다. 나는 그분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 싶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결혼을 유지하도록 하기 위해 이혼으로 말미암아 부득이하게 발생하는 부정적인 결과에 하나 더 추가하실 필요가 없음을 아신다. 결혼생활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재혼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으므로 이혼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말하는 것은 그들의 이혼하지 않게 하는 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가 당신을 믿을지라도, 불행한 결혼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독신의 삶은 지속적으로 불행한 결혼생활을 하는 것에 비하면 천국처럼 들릴 것이다.
재혼에 대한 바울의 입장(Paul on Remarriage)
우리가 재혼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과 모세의 율법을 조화시키는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 모세에게 동의하는 한 명의 성경 저자가 더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의 이름은 사도 바울이다. 바울은 이혼한 사람들이 재혼하는 것은 죄가 아니라고 분명하게 쓰면서, 구약 성경의 말씀에 동의하였다.
처녀에 대하여는 내가 주께 받은 계명이 없으되 주의 자비하심을 받아서 충성스러운 자가 된 내가 의견을 말하노니 내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니 곧 임박한 환난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네가 아내에게 매였느냐 놓이기를 구하지 말며 아내에게서 놓였느냐 아내를 구하지 말라 그러나 장가 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요 처녀가 시집 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로되 이런 이들은 육신에 고난이 있으리니 나는 너희를 아끼노라(고전 7:25-28, 강조 추가).
바울이 이 구절에서 이혼한 사람들을 가리키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는 그 시대 그리스도인이 박해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결혼한 사람, 결혼한 적이 없는 사람, 그리고 이혼한 사람들에게 그냥 지내는 것이 좋다고 권면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이혼한 사람이나 처녀가 결혼하는 것은 죄가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했다.
바울은 이혼한 사람이 재혼하는 것에 대한 합법성을 논의하지 않았음을 주목하라. 그는 이혼한 사람이 그의 이혼에 대한 책임이 없어야만 재혼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하나님 외에 누가 이런 일을 판단할 자격이 있겠는가?). 그는 재혼은 이혼하기 전에 구원받은 사람들에게만 허락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아니, 그는 단순히 재혼이 죄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이혼에 대한 바울의 태도가 너그러운가?(Was Paul Soft on Divorce?)
바울이 재혼에 대해 은혜로운 정책을 시인한다는 것은 이혼에 대해서도 부드럽다는 뜻일까? 아니, 바울은 이혼에 대해 분명하게 반대하였다. 고린도 교회에 보낸 첫 번째 서신에서, 그는 재혼에 대한 율법을 썼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이혼에 대한 미움과 조화된다.
결혼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라)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라서지 말고(만일 갈라섰으면 그대로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내가 말하노니(이는 주의 명령이 아니라) 만일 어떤 형제에게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있어 남편과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를 버리지 말며 어떤 여자에게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있어 아내와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 남편을 버리지 말라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애될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아내 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 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처럼 명하노라(고전 7:10-17).
바울은 먼저 신자와 결혼한 신자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들은 당연히 이혼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며 이것은 그의 명령이 아니라 주님의 명령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 점은 우리가 지금까지 성경에서 고려했던 모든 것에 동의힌다.
지금부터가 진짜 흥미로운 부분이다. 바울은 분명히 심지어 믿는 자들도 드물지만 이혼할 수 있음을 인식할 정도로 현실적이었다. 만일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바울은 자신의 배우자와 이혼한 사람은 독신으로 남아 있거나 원래의 배우자와 화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비록 바울이 아내들에게 이러한 구체적인 가르침을 줬지만, 나는 이 가르침이 남편에게도 적용된다고 추정한다.)
다시 말하지만, 바울이 쓴 것이 우리를 놀라게 하지 않는다. 그는 먼저 이혼에 대한 하나님의 율법을 정하였지만, 하나님의 율법이 항상 순종 되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때문에 두 신자 사이에 이혼의 죄가 발생하면, 그는 더 자세한 가르침을 주었다. 자신의 배우자와 이혼한 사람은 독신으로 남아 있거나 원래의 배우자와 화합해야 한다. 신자들 사이에 이혼했을 경우, 이것은 가장 좋은 해결책이 될 것이다. 그들이 독신 상태를 유지할수록 화합할 수 있는 희망이 있으며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좋다. 물론, 한 사람이 재혼하게 되면, 화합할 수 있는 희망과 가능성은 없어지게 된다(그리고 분명한 것은, 만일 그들이 이혼함으로 인해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면, 바울이 그들에게 독신으로 있거나 또는 화합하라고 말할 이유가 없다.)
당신은 바울이 이혼 신자들에게 준 두 번째 가르침이 항상 지켜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 만큼 총명하다고 생각하는가?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아마도 그는 진정한 신자들이 그의 첫 번째 가르침을 따라 이혼하지 않기를 기대했기 때문에 이혼한 신자들에게 더는 가르침을 주지 않았을 수도 있다. 따라서 매우 드문 경우에만 두 번째 가르침이 필요했다.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결혼 생활에 문제가 있다면, 자신의 결혼을 유지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결혼을 유지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해본 후 이혼할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 신자는 자신의 수치와 그리스도께 영광 돌리려는 마음 때문에 다른 사람과 재혼하는 것을 고려하지 않을 것이며 여전히 화합할 수 있는 희망을 품을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이혼에 관한 현대 교회의 진짜 문제는 교회 내에 주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지 않고 그분께 순종하지 않는 거짓 신자들의 비율이 너무 높다는 것이다.
바울이 쓴 고린도전서 7장을 보면 하나님이 불신자보다는, 성령님이 내주하시는 신자들에 대한 기대가 더 높다는 것이 매우 분명하다. 우리가 읽다시피, 바울은 신자들은 믿지 않는 배우자가 있어 그와 함께 살기를 좋아하면 이혼하지 말아야 한다고 썼다. 다시 한 번, 이 가르침은 우리를 놀라게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주제에 대해 성경에서 읽은 다른 부분과 완벽하기 일치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혼을 반대하신다. 그러나 바울은 계속하여 믿지 않는 사람이 이혼을 원하면, 신자는 허락해야 한다고 말한다. 바울은 불신자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음을 알기 때문에 불신자가 신자처럼 행동하기를 기대하지 않았다. 나는 불신자가 신자와 함께 살기를 원한다는 것은 불신자가 복음에 잠재적으로 열려 있는 좋은 표시거나, 또는 그 신자가 타락했거나 거짓 그리스인이라는 표시라고 생각한다.
이제 누가 불신자와 이혼한 신자가 재혼하는 것이 자유롭지 못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바울은 종래로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다. 그는 이혼한 두 신자에 대해서도 재혼하지 못한다고 하지 않았다. 우리는 하나님이 왜 불신자와 이혼한 신자가 재혼하는 것을 반대했는지 궁금할 것이다. 그것은 어떤 목적을 위한 것일까? 그러나 신자의 재혼을 허락하는 것은 분명히 예수님이 재혼에 대해 하신 말씀에 어긋난다.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라”(마 5:32). 이것은, 다시 한 번, 나로 하여금 우리가 예수님이 하시려는 말씀을 잘못 해석한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게 한다.
문제점(The Problem)
예수님, 모세와 바울은 모두 이혼은 이혼을 제기한 사람 또는 쌍방의 죄의 표심임에 동의한다. 그들 모두는 전반적으로 일관성 있게 이혼을 반대했다. 하지만 우리의 문제점은 여기에 있다. 우리가 어떻게 재혼에 대한 모세와 바울의 주장을 예수님의 말씀과 조화시키겠는가이다. 물론 우리는 그들의 모든 말씀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이므로 조화될 것을 기대해야 한다.
예수님이 무엇을 말씀하셨고 누구에게 말씀하셨는지를 정확히 살펴보자.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은 이혼과 재혼의 주제에 관하여 두 번 말씀하셨는데, 한 번은 산상수훈 중에 하셨고, 한 번은 바리새인들에게 질문을 받았을 때 하셨다. 먼저 바리새인들과 나눈 대화부터 시작하도록 하자.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이르되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여짜오되 그러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버리라 명하였나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 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마 19:3-9).
예수님과의 대화 중에, 바리새인들은 내가 전에 언급했던 모세의 율법, 신명기 24:1-4의 말씀을 인용했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신 24:1, 강조 추가).
예수님의 시대에, 무엇이 “수치되는 일”인지에 관해서 두 가지 관점이 있었다. 이십여 년 전, 힐러라는 랍비가 수치되는 일이란 화해할 수 없는 차이라고 가르쳤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과 논쟁할 무렵, 예수님께 한 바리새인들의 질문이 드러내듯이 힐러의 해석은 이미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이혼할 수 있다는 데까지 자유로워졌다. 남편은 아내가 그의 저녁 식사를 태우거나 음식에 소금을 너무 많이 넣었거나, 공공장소에서 무릎이 노출되거나, 머리를 깎거나, 다른 남자와 말을 하거나, 시어머니에 대해 나쁜 말을 하거나, 불임이여도 이혼할 수 있다. 심지어 남자는 자기의 아내보다 더 매력적인 사람을 만나도 아내가 수치스럽다고 생각하여 이혼할 수 있다.
힐레 이전에 살았던 다른 한 명의 유명한 랍비는 삼마이다. 그는 “수치되는 일”은 간음과 같이 매우 부도덕한 일만 가리킨다고 가르쳤다. 당신이 의심할 수 있듯이, 예수님의 시대의 바리새인들 사이에는 힐레의 자유로운 해석이 삼마이의 해석보다 훨씬 더 인기가 있었다. 바리새인들은 이혼은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합법적이라고 가르치고 또 그렇게 살았으므로 그 당시 이혼은 매우 창궐했다.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전통적인 습관에 따라, 이혼할 때 아내에게 이혼 증서를 주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모세의 율법을 범하려 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을 잊지 말라(Don’t Forget that Jesus’ was Speaking to Pharisees)
이런 배경을 알고 있으면, 우리는 예수님이 반대하신 것이 무엇인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분의 앞에는 한 무리의 위선적인 종교 교사들이 서 있었으며, 그들 중 전부가 아니더라도 대부분은 더 매력적인 이성 때문에 한 번 이상의 이혼을 경험하였다(나는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이 간음의 형태인 음욕을 품는 것에 대해 경고하신 후 바로 이혼에 대한 말씀을 하신 것이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지켰다며 자신을 정당화했다.
바리새인들의 질문 자체가 그들의 편견을 드러내고 있다. 그들은 분명히 사람이 어떤 이유에서든지 이혼할 수 있음을 믿고 있었다. 예수님은 창세기 2장의 결혼에 대한 모세의 말씀을 인용하셔서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잘못 이해하고 있음을 드러냈다. 하나님은 어떤 이혼도 원하시지 않았으며 더욱이 “어떤 이유에서든지” 이혼할 수 있는 것을 원하시지 않았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청소년들이 “애인”과 헤어지듯이 자기들의 아내와 이혼하고 있다!
나는 바리새인들이 이혼에 대한 예수님의 입장을 이미 알고 있었을 거라고 짐작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미 그 부분에 대해 공개적으로 언급하셨고 그들은 거기에 대한 항변거리를 이미 준비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버리라 명하였나이까?”(마 19:7).
이 질문은 다시 한 번 그들의 편견을 드러내고 있다. 그것은 마치 모세가 남자들에게 그들의 아내에게서 “수치되는 일”을 발견하면 이혼하라고 명령하고, 적절한 이혼 증서를 요구하는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우리가 신명기 24:1-4을 읽고 아는 바와 같이 그것은 모세가 말하려는 것이 전혀 아니다. 그는 단지 한 여자의 세 번째 결혼에 대해 규정하면서 그녀가 첫 번째 남편과 재혼하는 것을 금지하였을 뿐이다.
모세가 이혼을 언급한 이상, 이혼은 어떤 이유에서는 허락되었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응답 중에 사용하신 동사 “허락“과 바리새인들이 질문 중 사용한 동사 “명하였나이까“를 주목하라. 모세는 이혼을 허락하였지 명하지 않았다. 모세가 이혼을 허락한 이유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이 완악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혼을 허락하신 것은 사람들의 죄악에 대한 자비로운 용인이다. 그분은 사람들이 그들이 배우자에게 충실하지 않고 음행을 할 것을 알고 계셨다. 그분은 사람들이 마음이 상할 줄을 알고 계셨다. 그래서 그분은 이혼을 허락하셨다. 그것은 그분이 원래 의도하신 것과는 달랐다. 하지만, 죄로 말미암아 그것이 필요하게 되었다.
다음으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말씀하셨다. 그것은 심지어 모세가 말한 “수치되는 일”이 무엇인지에 대한 정의인듯 싶다.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라”(마 19:0, 강조 추가). 하나님의 눈에는, 음행이 한 남자가 그의 아내와 이혼할 수 있는 유일하게 정당한 이유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이해할 것 같다. 한 남자나 여자가 그들의 배우자에게 할 수 있는 가장 모욕적인 일이 무엇이겠는가? 한 사람이 간음을 하거나 정사가 있는 것보다 배우자에게 잔인한 것은 없다. 예수님이 “음행”이란 단어를 사용하셨을 때 단지 간음만 가리키신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의 배우자에게 정열적인 키스와 애무를 하는 것이 모욕적인 음행인 것과 같이, 포르노를 보고, 성적 도착에 빠지는 것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음욕을 품는 것이 곧 간음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을 기억하라.
우리는 예수님께서 자기들의 아내와는 어떤 이유에서든지 이혼하고 재빨리 재혼하지만, 일곱 번째 계명을 어기지 않는 이상 영원히 간음을 범했다고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고 계심을 잊지 말자. 예수님은 그들에게 그들은 단지 자기 자신을 속일 뿐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은 간음과 다를 바 없다. 정직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남자가 다른 여자가 결혼하기 위해 자기의 아내와 이혼하는 것은 적법성의 탈을 쓴 간부의 소행임을 보아낼 수 있다.
해결책(The Solution)
예수님을 모세와 바울과 조화시킬 수 있는 핵심은 예수님은 단순히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폭로하셨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분은 모든 재혼을 금지하는 법을 세우신 것이 아니다. 그럴 경우, 그분은 모세와 바울을 반대하시고 수많은 이혼한 사람들과 재혼한 사람들에게 혼란을 가져다주시는 것이 된다. 만일 예수님이 재혼에 관한 율법을 주셨다면, 예수님이 주신 율법을 듣기 전에 이혼하고 재혼한 사람에게는 뭐라고 해야 하는가? 우리는 그들이 간음 관계에서 생활하고 있으며, 성경에서 간음하는 자는 아무도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경고한 것을 알면서도(고전 6:9-10을 보라), 그들에게 다시 이혼하라고 말해야 하는가? 하지만, 하나님은 이혼을 미워하시지 않는가?
우리는 그들에게 정기적으로 간음을 범하지 않기 위해 그들의 전 배우자가 죽을 때까지 자신의 배우자와 성관계를 맺는 것을 중단하라고 말해줘야 하는가? 하지만, 바울은 결혼한 부부가 성관계를 서로 억제하는 것을 금지하지 않았는가? 이러한 권고는 성적인 유혹을 부추기고 심지어 전 배우자가 죽기를 바라는 마음을 조성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이런 사람들에게(어떤 사람들이 제창하는 바와 같이) 현재의 배우자와 이혼하고 원래 배우자와 재혼하라고 말해 주겠는가? 이것은 신명기 24:1-4에 기록된 모세의 율법에서 금지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재혼하지 않은 이혼한 사람은 어떠한가? 만일 그들이 단지 그들의 전 배우자가 음행을 범했을 때에만 재혼하도록 허락받는다면, 누가 상대방이 실제로 음행을 범했는지를 결정하겠는가? 재혼하기 위해, 일부 사람은 자신의 배우자가 마음으로 음욕을 품었음을 증명해야 하고, 또 그들의 전 배우자의 정사에 대한 증인을 찾아내야 하는가?
내가 전에 질문한 것처럼, 전 배우자가 성관계를 가지려 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함으로써 음행을 범한 경우는 어떠할까? 성관계를 가지려 하지 않은 사람이 재혼하는 것은 허락하고, 음행을 범한 사람의 재혼은 허락하지 않는 것이 공평할까?
결혼 전에 간통을 저지른 사람의 경우는 어떠할까? 그 사람의 간통은 그의 미래의 배우자에 대한 부정한 행위가 아닌가? 그 사람이 간통죄를 짓고 있을 당시 그 사람 또는 그 사람의 성행위 대상자가 이미 결혼한 상태라면, 그 사람의 죄가 간음에 해당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왜 그 사람이 결혼하는 것이 허용되는가?
결혼하지 않은 두 사람이 함께 생활하다가 헤어진 경우는 어떠할까? 그들은 왜 헤어진 후 다른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허용되는가? 단지 그들이 공식적으로 결혼하지 않았기 때문인가? 그들은 이혼한 후 재혼한 사람들과 무엇이 다른가?
그리스도인이 된 후 “이전 것은 지나갔다”라는 것과 “새 것이 되었다”라는 사실은 어떠한가(고후 5:17을 보라)? 그것은 불법적으로 이혼한 죄를 제외한 모든 죄를 의미할까?
이상의 모든 질문과 그 외 많은 질문들은[1] 예수님께서 재혼에 관해 새로운 율법을 주신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뒷받침해 준다. 물론 예수님은 정말로 재혼에 관한 새로운 율법을 주셨다면 그것의 파급 효과를 충분히 인식하셨을 것이다. 그것 자체는 그분이 단지 어떤 이유에서든지 자신의 아내와 이혼하고 재혼하는 음탕하고, 종교적이고, 위선적인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폭로하기 위함임을 우리에게 알려주기에 충분하다.
예수님이 그들이 한 일이 잘못된 일이라고 단순하게 말씀하시지 않고 “간음을 범한 것”이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그들이 어떤 이유든지 이혼하고 재혼하는 것이 간음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이다. 물론 그들은 종래로 그런적이 없다고 말한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유일하게 관심가지신 것이 재혼의 성적 측면이었고, 성적으로 금욕만 할 수 있다면 재혼을 허락하신다고 결론지으려는가? 분명히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이 종래로 뜻하지 않으신 것을 말씀하셨다고 하지 말아야 한다.
심사숙고한 비교(A Thoughtful Comparison)
이런 두 사람을 상상해 보자. 한 사람은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주장하지만, 이웃의 젊은 여자에 대해 음욕을 품기 시작한 이미 결혼한 종교인이다. 그는 곧 아내와 이혼하고 환상적인 그녀와 빠르게 결혼한다.
다른 한 사람은 종교인이 아니다. 그는 종래로 복음을 들어 본 적이 없으며 죄악의 삶을 살다가 결국 결혼을 망쳐버렸다. 몇 년 후, 독신인 그는 복음을 듣고 회개함으로써 전심으로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하였다. 3 년 후, 그는 자신의 교회에서 만난 매우 신실한 그리스도인 여자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들은 둘 다 열심히 주님의 뜻을 찾고 다른 사람들의 조언을 구하면서 결혼을 결정한다. 그들은 결혼하였고, 죽을 때까지 충실하게 주님과 서로를 섬기면서 살았다.
이제 우리는 두 사람이 재혼할 때 모두 죄를 지었다고 가정해보자. 둘 중에 누구의 죄가 더 큰가? 분명히, 첫 번째 사람이다. 그는 간음을 범한 것과 같다.
그러나 두 번째 사람은 어떠한가? 그는 정말 죄지은 것으로 보이는가? 그는 첫 번째 남자처럼 간음한 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에게 예수님이 이혼과 재혼한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을 들려주며, 하나님은 그와 첫 번째 아내와 여전히 부부 사이라고 생각하시기 때문에 그는 지금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여자와 사는 것이 아니라고 말해야 하는가? 우리는 그에게 그가 간음하면서 살고 있다고 말해야 하는가?
대답은 분명하다. 간음은 결혼한 사람들이 배우자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눈을 돌림으로 범하는 것이다. 때문에 사람이 더 매력적인 짝을 찾았다는 이유 때문에 자신의 배우자와 이혼하는 것은 간음과 같다. 하지만,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그가 충성해야 할 배우자가 없기 때문에 간음을 범할 수 없으며, 그것은 이혼한 사람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일단 예수님의 말씀을 성경과 역사적인 맥락으로 이해한보면, 성경의 나머지 부분과 모순되는, 말도 안되는 결론을 내릴 수가 없다.
덧붙여, 제자가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하신 응답을 들었을 때,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진대 장가 들지 않는 것이 좋겠나이다”라고 말하였다(마 19:10). 그들은 바리새인들의 가르침과 영향력 속에서 성장했고 바리새인들의 문화적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들은 종래로 결혼이 그렇게 영구적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사실, 몇 분 전까지만 해도, 그들도 어떤 이유에서든지 아내와 이혼할 수 있다고 믿었을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은 이혼과 간음을 범하지 않기 위해서는 차라리 결혼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재빨리 결론 내렸다.
예수님은 아래와 같이 응답하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 어머니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 지어다(마 19:11-12).
이것은 사람의 성적 욕구 또는 그것을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이 결정적인 요소임을 뜻한다. 심지어 바울은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 결혼하는 것이 나으니라”(고전 7:9)라고 말하였다. 고자로 태어난 사람 또는 사람에 의해 고자가 된 사람은(어떤 사람은 자신들의 처첩들을 보호하기 위해 신뢰할 수 있는 남자들을 거세한다) 성적인 욕구가 없다.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가 된 사람은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마 19:11)라고 하신 것처럼, 하나님께로부터 특별한 자제력을 타고난 사람일 것이다.
산상수훈(The Sermon on the Mount)
우리는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들었던 청중들 중에는 이스라엘의 통치자이고 교사인 위선적인 바리새인들의 영향 아래 자신의 삶을 보낸 사람들도 있었음을 유의해야 한다. 우리가 앞서 산상수훈에 대한 연구에서 배운 것처럼, 예수님의 말씀 중 대부분은 바리새인들의 거짓된 가르침에 대한 정정임이 분명하다. 예수님은 심지어 무리에게 그들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마 5:20). 이것은 다시 말해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지옥으로 간다는 말이다. 예수님이 말씀을 마치실 때 무리들은 그의 가르치심에 놀랐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그들의 서기관들”처럼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다(마 7:29).
예수님은 설교의 첫 부분에서 간음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지만, 음욕을 품거나, 이혼하고 재혼한 사람들의 위선을 폭로하셨다. 그분은 간음의 의미를 확대하여 간음이 단지 다른 사람과 결혼한 두 사람이 육체적으로 지은 죄뿐만이 아니라고 하셨다. 정직한 사람이라면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예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있다. 예수님이 설교하시기까지 무리 중의 대부분 사람은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이혼하는 것이 합법적이라고 생각했었음을 잊지 말라. 예수님은 그분을 따르는 자들과 다른 모든 사람이 하나님이 태초부터 의도하신 것이 훨씬 더 높은 기준이라는 것을 알기를 원하셨다.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마 5:27-32).
우선 전에 내가 지적했던 바와 같이, 이혼과 재혼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이 음욕에 관한 말씀 뒤에 직접 따라옴으로써 어느 정도 둘 사이의 관계를 이어놓았을 뿐 아니라, 예수님은 그 둘을 간음으로 동일시함으로써 더욱 긴밀히 연결시켰다. 따라서 우리는 이 성경 구절을 관통하는 문맥을 읽게 된다. 예수님은 그분을 따르는 자들이 일곱 번째 계명을 지키는 것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를 알도록 도와주셨다. 그것은 바로 음욕을 품지 말고 이혼하고 재혼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그분의 유대인 청중들은 모두 회당에서(아무도 개인적으로 성경을 소유하지 못했다) 일곱 번째 계명을 들어보았을 것이며, 그들의 선생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삶 속에서 그 계명을 어떻게 지키고 있는지도 관찰하였을 것이다. 예수님은 계속하여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하고 말씀하셨지만, 그분은 새로운 율법을 추가하시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분은 단지 하나님의 원래 의도를 드러내려 하셨다.
첫째로, 음욕은 십계명에 의해 명확하게 금지되었으며, 십계명이 없다고 할지라도 음욕에 대해 생각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하나님이 질책하시는 것을 하려는 욕망은 잘못된 것임을 인식할 것이다.
둘째로, 창세기의 첫 부분에서 하나님은 결혼은 한 평생의 약속임을 분명하게 밝히셨다. 또한, 결혼에 대해 생각해본 사람은 이혼과 재혼은 간음과도 같다는 결론을 내릴 것이다. 특히 재혼하려는 의도로 이혼하는 경우다.
그러나 이 설교에서 다시 한 번, 예수님은 단지 사람들이 음욕을 품는 것의 진실과 어떤 이유에서든지 이혼하고 재혼하는 것의 진실을 알도록 도와주신 것임이 분명하다. 그분은 “성경에 기록”된 적이 없는 재혼에 관한 새로운 율법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흥미로운 것은 극소수의 교회에서만이 눈을 빼어 내버리거나 손을 찍어 버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따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생각들은 성경의 나머지 부분에 위배되며 단지 성적 유혹을 받지 말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의 많은 사람은 재혼한 사람이 간음을 범한 것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이 성경의 나머지 부분과 많이 모순됨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려 한다. 예수님의 목표는 그분의 청중들이 진리를 직시하고 이혼을 줄이는 것이었다. 만일 그분을 따르는 자들이 그분이 음욕에 대한 말씀을 마음에 새긴다면, 그들은 음란한 행위를 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음란한 행위가 없다면, 이혼을 위한 합법적인 근거가 없을 것이며, 하나님이 태초부터 의도하신 것처럼 사람은 더는 이혼하지 않을 것이다.
남자가 어떻게 하는 것이 아내로 간음하게 하는 것인가?(How Does a Man Make His Wife Commit Adultery?)
예수님이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라고 말씀하셨음을 주목하라. 이것은 다시 한 번 우리로 하여금 그분께서 재혼에 관한 새로운 율법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한 남자가 정당한 이유가 없이 자기 아내와 이혼하는 것이 죄라는 진실을 밝히시는 것이다. 그는 “아내로 하여금 간음하게 하였다.” 따라서 일부 사람은 예수님이 그녀의 재혼을 금지하신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말도 안 된다. 강조점은 이혼하는 남자의 죄에 있다. 그가 한 행위 때문에 그의 아내는 재혼하는 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게 되었으며, 그녀는 남편의 이기심의 피해자로서 그녀에게는 아무런 죄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그 남자가 아내를 버림으로 하여 그녀는 재혼할 수밖에 없게 되고, 이것은 그 남자가 아내가 다른 남자와 잠자리에 들게끔 강박하는 것과 같다. 때문에 간음을 범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과 자기의 아내의 이중적인 간음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피해받은 아내를 간음죄로 정죄하셨다고 하시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전혀 공평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피해받은 아내가 재혼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전혀 무의미하게 된다. 그녀가 재혼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녀가 간음하였다고 말씀하실 수 있겠는가? 그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 남자에게 그의 간음 그리고 그의 아내의 “간음”에 대한 죄를 물으실 것이다. 그 아내에게는 아무런 간음죄도 없으며 그녀의 재혼은 합법적이다.
그리고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라”는 예수님의 그다음 말씀은 무엇을 의미할까? 두 가지 가능한 해석이 있다. 예수님은 간음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남자들에게 세 번째 간음죄를 추가하셨거나(비슷한 이유 때문에 그분은 두 번째 죄를 추가하셨다), 다른 한 가지는 한 남자가 “간음을 범하지 않고” 한 여자와 결혼하기 위해 그녀가 자기의 남편과 이혼하도록 부추기는 것을 말씀하셨다. 만일 예수님이 이 땅에서 누구든지 이혼한 여자와 결혼하는 남자는 간음을 범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면, 수 백 년 전 모세의 율법에 따라, 이혼한 여자와 결혼한 모든 이스라엘 남자들은 다 간음을 범한 것이 된다. 사실, 그날 예수님의 청중들 중 모세의 율법에 따라 이혼한 여자와 결혼한 남자들은 갑자기 조금 전만 해도 죄라고 생각하지 않던 일로 인해 죄책감을 느꼈을 것이며, 예수님은 그 순간 하나님의 율법을 변경했음이 틀림없다. 또한,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서신에서 밝힌 바와 같이, 이혼한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죄가 아니라고 믿는 사람들이 앞으로 그런 결혼을 하는 것은 실제로 간음죄를 짓는 것이 된다.
성경의 일관적인 정신에 따라, 나는 이혼한 적이 있는 여자와 결혼한 남자를 존경한다. 만일 그녀가 죄 없는, 전 남편의 이기심의 피해자였다면, 나는 그녀와 결혼한 남자를 과부와 결혼하고 보살펴주는 남자를 존경하는 만큼 존경할 것이다. 만일 그녀가 이혼에 대한 질책을 받아야 한다면, 나는 그녀와 결혼한 남자가 그녀의 가장 좋은 면을 믿어주는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고, 그녀에게 은혜를 베풀어 과거를 잊어주고 위험을 감수하려는 모습을 존경한다. 왜 성경을 읽은 적이 있고 성령님이 내주하시는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이 이혼한 적이 있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을 금지하신다는 결론을 내릴까? 이러한 관점이 어떻게 하나님의 공의에 부합될 수 있겠는가? 공의로운 하나님은 이 경우처럼 자신의 잘못 때문에 이혼 당한 것이 아닌 여자와 같은 피해자를 벌하시지 않는다. 이러한 관점이 어떻게 회개한 죄인들에게 용서와 기회를 주는 복음에 부합되겠는가?
요약(In Summary)
성경은 이혼은 항상 일방 또는 쌍방의 죄를 포함한다고 일관하여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아무도 이혼하는 것을 의도하신 적이 없다. 하지만, 음란한 행위가 발생했을 때, 다행히도 이혼할 수 있는 규정을 만드셨다. 그분은 또한, 이혼한 사람들이 재혼할 수 있는 규정도 만드셨다.
만일 재혼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이 없었더라면, 성경을 읽는 사람은 아무도 재혼이 죄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구약시대의 두 가지 극히 드문 경우와 신약시대의 한 가지 극히 드문 경우 즉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과 이혼한 후 재혼하는 경우를 제외한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과 성경의 나머지 부분을 조화시킬 수 있는 논리적인 방법을 발견했다. 예수님은 더 엄격한 율법으로 하나님의 재혼에 관한 율법을 대체한 것이 아니다. 이미 이혼하고 재혼한 사람들이 그런 율법을 따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그것은 엎어진 물을 다시 담으려는 격이다). 또한, 그것은 무제한 혼란을 빚어내고 사람들이 하나님의 다른 율법을 어기게 한다. 오히려, 예수님은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볼 수 있도록 도와주셨다. 그분은 자신들은 절대로 간음을 범하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다른 방식으로 간음을 범하고 있음을 보게 하셨다. 바로 그들의 음욕과 이혼에 대한 자유로운 태도를 보게 하셨다.
전체 성경이 가르치는 바와 같이, 용서는 죄의 크기와는 관계없이 회개한 죄인에게 주어지며, 이혼한 사람들을 포함한 모든 죄인에게 두 번째, 세 번째의 기회가 주어진다. 재혼은 신약에서 다른 신자와 이혼한 신자가 재혼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죄가 되지 않는다. 이 경우 진정한 신자는 음행을 저지르지 않기 때문에 이혼할 만한 정당한 이유가 없으며, 이런 이혼은 절대로 발생하지 말아야 한다. 이런 극히 드문 경우에는 두 사람이 독신으로 지내든지 다시 화합해야 할 것이다.
[1]예를 들어, 한 이혼 한 목사가 재혼할 때 자신이 그리스도의 몸에서 단절 되었다고 생각하면서 한 말을 생각해보자: “나는 아내와 이혼하기보다 차라리 그녀를 죽였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내가 그녀를 살해했더라면, 나는 회개 할 수 있고, 용서를 받아 합법적으로 재혼할 수 있으며 내 사역을 계속할 수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