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 4:7, 11-13, 강조 추가).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고전 12:28, 강조 추가).
사역의 은사는 특정 신자들을 향한 부르심과 그들에게 주어지는 여러 가지 능력을 말하는데 이는 그들로 하여금 사도, 선지자, 복음 전도자, 목사 또는 교사의 직분을 감당할 수 있게 해준다. 아무도 이런 직분을 자기 절로 감당할 수 없으며 반드시 하나님의 부르심과 은사를 받아야 한다.
한 사람이 다섯 가지 직분 중 한 가지 이상을 감당할 수는 있지만, 특정 조합이어야만 가능하다. 예를 들어, 신자는 목사와 교사, 또는 선지자와 교사의 직분에 부르심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목사와 복음 전도자로 부르심을 받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왜냐하면, 목사의 사역은 한 지역의 사람들을 목양할 것을 요구하므로 자주 여행해야만 하는 복음 전도자의 소명을 목사가 이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비록 이 다섯 가지 직분이 서로 다른 목적을 위해 다른 은사를 받았지만, 그것들은 모두 하나의 총체적인 목적인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엡 4:12)[1] 하기 위해 교회에 주어졌다. 모든 사역의 목표는 거룩한 사람들을(“성도”의 의미)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너무 자주, 사역자들은 그들이 거룩한 백성을 봉사를 위해 온전하게 하기 위해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니라 교회의 봉사 가운데 앉아 있는 육적인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부르심을 받은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 이 다섯 가지 직분 중의 하나에 부르심을 받은 모든 사람은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하는 데 대한 자신의 공헌을 항상 평가해야 한다.
일부 사역의 은사는 초대 교회만 위한 것일까?(Were Some Ministry Gifts Only for the Early Church?)
이런 사역의 은사는 교회에 얼마나 오랫동안 주어질까? 예수님은 그분의 거룩한 백성이 봉사를 위해 온전하게 될 때까지, 적어도 그분께서 재림하실 때까지는 이런 은사를 주실 것이다. 교회에는 항상 성장해야 할 새롭게 태어난 그리스도인들이 있으며, 나머지 그리스도인들도 항상 영적으로 성숙해야 할 공간이 있다.
일부 사람들은 불행하게도 하나님이 그분의 계획을 변경하신 것처럼, 오늘날에는 오직 목사와 복음 전도자 두 종류의 사역만이 존재한다고 결론지었다. 아니, 우리는 초대 교회가 그랬던 것처럼 여전히 사도, 선지자, 교사를 필요로 한다. 우리가 전 세계 많은 교회 가운데서 이런 은사의 예를 볼 수 없는 이유는 예수님이 이런 은사를 가짜 교회, 거룩하지 않은 교회, 거짓 복음 교회가 아닌, 그분의 교회에만 주셨기 때문이다. 가짜 교회에서는 단지 일부 사역의 은사들(대부분 목사와 몇 명의 복음 전도자)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한 미약한 시도를 하지만, 예수님께서 그분의 교회에 주신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고 기름 부음을 받은 사역의 은사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다. 그들은 거룩한 사람들을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이 선포하는 복음은 사람을 거룩하게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사람들로 하여금 용서받았다는 생각을 하게끔 기편한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온전하게 되어 봉사의 일을 하려는 소원이 없다. 그들은 자신을 부인하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려고 하지 않는다.
당신이 부르심을 받았는지 여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How do You Know if You are Called?)
한 사람이 교회에서 이런 직분으로 부르심을 받았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무엇보다도 우선, 그는 하나님이 부르신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그는 자신이 특정 사역을 수행해야 한다는 부담을 받을 수 있다. 이런 부담은 단순히 어떤 필요가 보이는 것보다는 훨씬 더 큰 것이다. 오히려 그 안에는 그로 하여금 특정 사역에 투입하려는 하나님께서 주신 굶주림이 있다. 만일 그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면, 그는 자신의 부르심대로 살기 전까지는 만족할 수 없다. 이것은 사람들에 의해 임명되는 것과는 상관이 없다. 하나님만이 그를 부르시는 유일한 분이시다.
둘째로, 진정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이루기 위한 준비가 되어 있음을 발견한다. 다섯 가지 직분을 맡은 사람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신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초자연적인 기름부음을 받았다. 부르심에 따라 기름부음도 받게 된다. 만일 기름부음이 없다면, 부르심도 없다. 한 사람이 특정 사역에 참여하려는 뜻을 품고 그 사역을 위해 신학교에서 4년 동안 교육받으면서 자신을 준비시켜도 하나님의 기름부음이 없다면, 그는 진정한 성공을 이룰 수 없다.
셋째로,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특정 은사를 훈련시키기 위해 이미 여러 가지 기회를 주셨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이러한 방식을 통하여 그는 자기가 더 큰 기회, 책임, 그리고 은사를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
만일 한 사람이 하나님의 내적 충동과 다섯 가지 사역 은사 중 하나에 대한 부르심을 느끼지 못했거나, 하나님이 주신 임무를 완성하기 위한 어떠한 기름부음도 받지 못했거나, 자신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은사를 훈련할만한 어떠한 기회도 만나지 못했다면, 그는 하나님이 부르심이 없는 무언가를 하려고 시도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그는 지역 교회의 지체들과 그의 이웃들과 자신의 직장에서 축복의 통로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비록 그가 “다섯 가지” 사역에 부르심을 받지 못했다 할지라도,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은사를 사용하여 봉사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으며, 그는 자신의 신실함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성경에서 다섯 가지 사역의 은사를 언급했다고 하여, 특정 직분을 맡은 사람마다 모두 같은 사역의 은사를 가졌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바울은 “사역은 여러 가지”(고전 12:6)라고 썼는데, 이것은 같은 직분을 가진 사역자라도 사역이 다를 수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이런 직분을 맡은 사람들이 기름부음을 받은 정도가 다양해 보이기에, 우리는 기름부음을 받은 정도에 따라 각 직분을 분류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일부 교사들은 다른 교사보다 특정 방면에서 기름부음을 더 많이 받은 것으로 나타난다. 다른 사역의 은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어떤 사역자라도 일정 기간 자신의 신실함을 증명하고 하나님께 자신을 철저하게 성별함으로써 그의 사역에 대한 하나님의 기름부음이 더하게 할 수 있다고 믿는다.
사도의 직분을 살펴보다(A Closer Look at the Office of Apostle)
사도로 번역된 헬라어는 apostolos이며 문자적인 의미는 “보냄을 받은 사람”이다. 신약 성경의 진정한 사도는 교회를 세우기 위해 하나님에 의해 특정 장소에 보내진 신자이다. 그는 사도인 바울이 쓰다시피 하나님의 “집”의 영적인 터를 닦아놓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다.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라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매(고전 3:9-10상, 강조 추가).
“지혜로운 건축자”는 건물의 전반 건축 과정을 감독하며 완성된 모습을 구상한다. 그는 목수 또는 벽돌공 같은 전문가가 아니다. 그는 목수나 벽돌공의 일을 할 수는 있으나 아마 그들처럼 잘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도는 복음 전도자나 목사의 작업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은 갖고 있지만, 교회를 세우는 제한된 시간 동안만 가능하다(사도 바울은 일반적으로 한 곳에 6개월에서 3년 동안 남아 있었다).
사도는 교회를 세우고 그곳에 하나님의 질서를 세우도록 감독하는데 가장 뛰어나다. 사도는 회중들을 목양하기 위해 장로/목사/감독을 교회에 세울 책임이 있다(행 14:21-23; 딛 1:5).
진정한 사도와 거짓 사도(True and False Apostles)
오늘날, 교회에서의 권위를 갈망하는 일부 사역자들이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성급하게 선포하는데, 그들 중 대부분에게는 큰 문제가 있다. 그들은 세운 교회가 없고(한두 개의 교회를 세웠을 수 있다), 성경적인 사도가 가져야 할 은사와 기름부음이 없기에, 그들이 교회에 대한 권한을 가지도록 허용하는 속기 쉬운 목사를 반드시 찾아야만 한다. 만일 당신이 목사라면, 이러한 자고하고 권력에 목마른 거짓 사도들에 의해 속지 말기를 바란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양의 탈을 쓴 늑대이다. 그들은 종종 돈을 추구한다. 성경은 거짓 사도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고후 11:13; 계 2:2을 보라). 만일 그들이 당신에게 자신이 사도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면, 그것은 대개 그들이 사도가 아니라는 표시이다. 그들이 맺은 열매가 그들에 대해 말해줄 것이다.
자신만의 교회를 세운 후 그 교회에 수년 동안 목사로 있는 사람은 사도가 아니다. 이러한 목사들을, 아마도, “사도적 목사”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만의 교회를 개척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지속적으로 교회를 세워가지 않기 때문에 사도는 아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고 기름부음을 받은, 오늘날 “선교사”로 불려지는, 교회를 세우는 것이 주된 부르심인 사람들은 사도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신학교를 세우거나 목사들을 훈련시키는 일을 하는 선교사들은 사도가 아니라 교사이다.
진정한 사도의 사역은 교회를 세우는 것을 돕기 위해 나타나는 초자연적인 표적과 기사에 의해 특징 지을 수 있다. 바울은 이렇게 썼다.
내가 아무 것도 아니나 지극히 크다는 사도들보다 조금도 부족하지 아니하니라 사도의 표가 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고후 12:11하-12).
한 사람의 사역에 표적과 기사가 동반하지 않는다면, 그는 사도가 아니다. 분명한 것은, 진정한 사도는 드물며, 거짓되고, 거룩하지 않은, 거짓 복음의 교회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주로 이 세계에서 여전히 복음을 접해보지 못한 곳에서 그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사도의 높은 지위(The High Rank of the Apostle)
신약 성경에서 사역의 은사에 관한 나열에서 두 번 모두 사도의 직분을 첫 번째로 나열하였는데, 이것은 사도의 직분이 최고의 부르심임을 나타낸다(엡 4:11; 고전 12:28).
아무도 자신의 사역을 사도로서 시작하지 않는다. 한 사람이 궁극적으로 사도로 부르심을 받을 수 있지만, 처음부터 사도의 직분으로 시작할 수는 없다. 그는 반드시 몇 년간의 복음 전파와 가르침을 통하여 자신의 신실함을 증명한 후에야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그에게 예비하신 직분을 감당하게 된다. 바울은 어머니의 태로부터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지만, 사도의 직분을 감당하기까지 오랜 시간 동안 전직 사역을 하였다(갈 1:15-2:1을 보라). 그는 실제로 교사와 선지자로 시작하였으며(행 13:1-2을 보라), 나중에 성령님에 의해 보내심을 받고 사도로 된 것이다(행 14:14을 보라).
우리는 바울과 최초의 열두 사도 이외의 사도들에 대한 언급을 사도행전 1:15-26; 14:14; 로마서 16:7; 고린도후서 8:23; 갈라디아서 1:17-19; 빌립보서 2:25; 데살로니가전서 1:1과 2:6에서 찾을 수 있다. (고린도후서 8:23과 빌립보서 2:25에서 사자로 번역된 헬라어는 apostolos이다.) 이것은 사도적 직분은 열두 사도한테만 한정한다는 이론을 뒤엎어 버린다.
그러나 열두 사도만이 “어린 양의 사도”로 분류될 수 있으며, 그들만이 그리스도의 천 년 통치에 특별한 지위를 갖게 될 것이다(마 19:28; 계 21:14을 보라). 성경의 계시가 끝났기 때문에 우리는 독특하게 성령님의 영감을 받아 성경을 기록한 베드로, 야고보, 요한과 같은 사도들이 더는 필요가 없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여전히 사도행전에 기록된 바울과 다른 사도들이 했던 것처럼 성령님의 능력으로 교회를 세워갈 사도가 필요하다.
선지자의 직분(The Office of Prophet)
선지자란 초자연적인 계시를 받고 하나님의 영감으로 말하는 사람을 말한다. 선지자는 종종 예언의 은사뿐 아니라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영들을 분별하는 것과 같은 계시의 은사에도 쓰임 받는다.
모든 신자는 성령님이 뜻하시면 예언의 은사로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선지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선지자는, 우선, 기름 부음이 있는 설교를 하거나 가르칠 수 있는 사역자이다. 왜냐하면, 선지자는 두 번째로 높은 부르심인 것으로 보이며(고린도전서 12:28에 나열된 순서를 참조하라), 비록 전직 사역자라 할지라도 수년 동안의 사역을 하기 전에는 선지자의 직분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한 사람이 선지자의 직분을 감당한다면 그에게는 초자연적인 능력도 따르게 될 것이다.
신약 성경에서 선지자로 칭함을 받은 두 사람은 유다와 실라이다. 우리는 사도행전 15:32에서 그들이 안디옥 교회에 긴 예언을 하였음을 읽게 된다.
유다와 실라도 선지자라 여러 말로 형제를 권면하여 굳게 하고
신약 성경에서 또 다른 선지자의 예는 아가보가 될 것이다. 사도행전 11:27-28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읽게 된다.
그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아가보는 지혜의 말씀을 받았음을 주목하라. 그에게 미래에 대한 무언가가 계시된 것이다. 물론, 아가보는 미래에 일어날 모든 일을 알았던 것이 아니다. 그는 단지 성령님이 그에게 보여주시고자 하는 일들만 알았다.
사도행전 21:10-11을 보면 아가보의 사역을 통해 지혜의 말씀이 나타난 또 다른 예가 나온다. 이번에는 바울에 관한 예언이었다.
여러 날 머물러 있더니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 하거늘
새 언약 아래에서 선지자에게 개인적인 지도를 구하는 것이 성경적일까? 아니다. 그 이유는 모든 신자들 안에는 그들을 인도하시는 성령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선지자는 마땅히 신자가 하나님 안에서 알고 있는 것을 확인해 주어야 한다. 예를 들어, 아가보가 바울에게 예언했을 때, 그는 바울이 무엇을 해야 할지에 관해서는 어떤 지시도 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바울이 이미 알고 있던 것을 확인해 주었을 뿐이다.
이전에 언급한 바와 같이, 바울은 사도의 사역에 부르심을 받기 전에 선지자(그리고 교사)로 있었다(행 13:1을 보라). 우리는 갈라디아서 1:11-12으로부터 바울이 주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았으며 또한 많은 비전을 보았음을 알고 있다(행 9:1-9; 18:9-10; 22:17-21; 23:11; 고후 12:1-4을 보라).
진정한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거짓 교회에서 진정한 선지자를 찾을 수 없다. 거짓 교회는 실라, 유다, 아가보와 같은 진정한 선지자를 피할 것이다(피하고 있다). 그 이유는 진정한 선지자는 그들의 불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계시하기 때문이다(계시록의 처음 두 장에서 소아시아의 대부분의 교회에 대한 요한의 계시처럼). 거짓 교회는 그런 계시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교사의 직분(The Office of Teacher)
고린도전서 12:28에 나열된 순서에 따르면, 교사의 직분은 세 번째로 높은 부르심이다. 교사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기 위해 초자연적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이다. 사람이 성경을 가르친다고 해서 그가 신약 성경의 교사인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단순히 자기가 좋아서 가르치거나 또는 의무적으로 가르치지만, 교사의 직분을 맡은 사람은 가르침에 있어서 초자연적인 은사를 받았다. 그는 종종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초자연적인 계시를 부여받으며 그것을 사람들이 이해하고 적용할 수 있게끔 설명할 수 있다.
아볼로는 이 직분을 맡은 신약 성경의 한 예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그의 사도적 사역과 아볼로의 가르침의 사역을 비교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고전 3:6, 10중, 강조 추가).
아볼로는 처음부터 심거나 터를 닦은 것이 아니다. 대신, 그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씨앗에 물을 주었으며 기존의 터 위에 하나님의 집을 지었다.
아볼로는 사도행전 18:27에서도 언급되었다.
아볼로가 아가야로 건너가고자 함으로 형제들이 그를 격려하며 제자들에게 편지를 써 영접하라 하였더니 그가 가매 은혜로 말미암아 믿은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니 이는 성경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언하여 공중 앞에서 힘있게 유대인의 말을 이김이러라.
아볼로는 이미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었으며”, 그의 가르침은 “힘 있었음”을 주목하라. 기름부음을 받은 가르침은 항상 힘 있다.
교회에서, 가르침의 사역은 심지어 기적을 행하거나 병을 고치는 은사보다 더 중요하다. 바로 그 때문에 고린도전서 12:28에서 가르침의 은사를 먼저 나열하였다.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강조 추가).
불행하게도, 신자들은 때때로 자신의 삶에 영적 성장과 거룩함을 가져다주는 말씀의 분명한 가르침을 듣는 것보다는 병 고침을 받는 것을 더 추구한다.
성경은 설교와 가르침 모두에 대해 말씀한다. 설교가 더 많은 영감과 동기부여를 주는 반면 가르침은 더 논리적이고 교육적이다. 복음 전도자는 일반적으로 설교한다. 교사와 목사는 일반적으로 가르친다. 사도들은 설교도 하고 가르치기도 한다. 신자가 가르침의 가치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일부 사람들은 심지어 강사들이 기름부음을 받은 유일한 시간은 그들이 큰 소리로 빠르게 설교할 때뿐이라고 생각한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예수님은 기름부음을 받은 교사의 가장 좋은 예이다. 가르침은 그분의 사역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였으며 많은 사람은 그분을 “선생님”이라고 불렀다(마 8:19; 막 5:35; 요 11:28).
교사와 가르침에 대한 자세한 연구를 위해서 사도행전 2:42; 5:21, 25, 28, 42; 11:22-26; 13:1; 15:35; 18:11; 20:18-20; 28:30-31; 로마서 12:6-7; 고린도전서 4:17; 갈라디아서 6:6; 골로새서 1:28; 디모데전서 4:11-16; 5:17; 6:2; 디모데후서 1:11; 2:2와 야고보서 3:1을 보라. 마지막에 나열된 성경 말씀은 우리에게 교사들은 더 큰 심판을 받게 되므로 그들은 자신이 가르치는 것에 대해 매우 신중해야 함을 알려준다. 그들은 단지 말씀만을 가르쳐야 한다.
복음 전도자의 직분(The Office of Evangelist)
복음 전도자란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을 말한다. 그의 메시지는 사람들로 하여금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믿음을 갖게 인도한다. 불신자의 관심을 끌고 메시지의 참됨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복음 전도자들에게는 종종 기적이 동반한다.
초대 교회 때에 많은 복음 전도자가 있었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사도행전에 복음 전도자로 기록된 사람은 오직 한 명뿐인데 그의 이름은 빌립이다.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머무르니라”(행 21:8, 강조 추가).
빌립이 처음에 접대하면서 일꾼(또는 “집사”)으로서의 사역을 시작했다(행 6:1-6을 보라). 그는 스데반이 순교하고 교회가 박해를 받을 시기에 전도자로 세움을 받았다. 그는 사마리아에서 처음으로 복음을 전하였다.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이 나으니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행 8:5-8).
빌립은 하나의 메시지 곧 그리스도만을 전파했음을 주목하라. 그의 목표는 제자 곧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추종자들을 삼는 것이었다. 그는 그리스도가 기적을 행하시는 자, 하나님의 아들, 주님, 구주, 곧 오실 심판자라고 선포하였다. 그는 사람들이 회개하고 주님을 따를 것을 촉구하였다.
또한, 빌립에게는 자신의 메시지를 입증하는 초자연적인 표적과 기사가 함께했음을 주목하라. 복음 전도자의 직분을 맡은 사람은 병 고치는 은사와 다른 영적인 은사로 기름부음을 받게 될 것이다. 거짓 교회에는 단지 거짓 복음을 선포하는 거짓 복음 전도자가 있을 뿐이다. 오늘날 전 세계는 이런 거짓 복음 전도자들로 가득하며,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기적과 치유로 그들의 메시지를 확증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분의 복음을 전파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전파하지 않는다. 그들은 보통 사람들의 필요와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풍요로운 삶을 제공 할 수 있는지를 전파하거나, 회개가 없는 구원의 공식만을 전파한다. 그들은 사람들이 죄책감은 없애지만, 구원은 이루지 못하는 거짓 결단만 하게 한다. 그들의 복음 전파 결과는 그들이 거듭날 기회마저도 적어지게 하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이 생각하기에 이미 소유하고 있는 것을 더는 받을 필요가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러한 복음 전도자는 실제로 사탄의 왕국을 세우는 것을 돕고 있다.
고린도전서 12:28에서는 에베소서 4:11에서처럼 복음 전도자의 직분이 다른 사역의 은사들과 함께 나열되지 않았지만, 나는 능력을 행하는 자와 병 고치는 은사가 복음 전도자의 직분에 적용된다고 추측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복음 전도자 빌립의 특징이며, 모든 복음 전도자의 사역에 자연스럽게 따르게 되는 초자연적인 입증이기 때문이다.
교회에서 교회로 옮겨 다니면서 스스로 복음 전도자라고 자칭하는 많은 사람들은 진정한 복음 전도자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교회 건물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만 설교하며, 병 고치는 은사나 능력을 행하는 은사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일부 사람들은 이 같은 은사를 가지고 있는 척하지만, 그들은 단지 순진한 바보들만 속일 수 있다. 그들의 가장 큰 기적은 사람들을 일시적으로 무너뜨리는 것뿐이다.) 이런 옮겨 다니는 사역자들은 교사거나 설교자거나 권사일 수 있다(롬 12:8을 보라). 하지만 그들은 복음 전도자의 직분을 맡은 자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 사람이 권사 또는 설교자로 사역을 시작하게 하고 나중에 그에게 복음 전도자의 직분을 맡길 수 있으시다.
복음 전도자의 직분에 관한 자세한 연구를 위해 빌립의 사역을 기록한 사도행전 8:4-40을 읽어보기 바란다. 사역의 은사들이 상호 의존하는 것의 중요성과(특히 14-25절을 보라) 빌립이 무리에게 복음을 전파하였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로 개별적인 사람을 향한 사역도 하였음을 주목하라(행 8:25-39).
복음 전도자들이 그들의 회심자에게 세례를 줄 수는 있어 보이지만, 그들이 반드시 새 신자에게 성령세례를 줘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주로 사도나 목사/장로/감독의 책임이 될 것이다.
목사의 직분(The Office of Pastor)
이전의 두 장에서, 나는 목사의 성경적인 역할과 제도적 교회 목사의 역할을 비교한 바가 있다. 그러나 목사의 사역에 대해 아직 할 말이 많이 남아 있다.
목사의 직분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세 개의 핵심 헬라어 단어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헬라어로 그들은 (1) poimen, (2) presbuteros (3) episkopos이다. 그들을 순서대로 번역하면 (1) 목자나 목사, (2) 장로, (3) 감독 또는 주교이다.
단어 poimen은 신약 성경에서 열여덟 번 나오는데, 열일곱 번은 목자로, 한 번은 목사로 번역되었다. 동사의 형태 poimaino는 열한 번 나오는데 목자로 가장 많이 번역되었다.
헬라어 presbuteros는 신약 성경에서 육십 여섯 번 나오며, 육십 번은 장로 또는 장로들로 번역되었다.
마지막으로, 헬라어 episkopos은 신약 성경에서 다섯 번 나오며, 그 중 네 번은 감독으로 번역되었다. 킹 제임스 버전은 주교로 번역하였다.
이 네 단어 중의 세 단어는 교회에서 같은 위치를 가리키며, 그들은 서로 교체되어 씌어졌다. 사도 바울은 교회를 설립하고 떠날 때마다, 장로들(presbuteros)을 임명하여 교회의 회중들을 보살피게 하였다(행 14:23, 딛 1:5을 보라). 그들의 책임은 감독자(episkopos)로서 그들의 양 떼를 보살피는(poimaino) 것이었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 20:17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을 읽게 된다.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presbuteros] 청하니(강조 추가).
그리고 바울은 그 교회의 장로들에게 무슨 말을 했는가?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episkopos]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poimaino] 하셨느니라(행 20:28, 강조 추가).
세 개의 헬라어 단어가 서로 대체하여 사용됨을 주목하라. 그것들은 세 가지 다른 직분이 아니다. 바울은 장로들에게 그들은 목자처럼 행하여야 할 감독이라고 말했다.
베드로는 그의 첫 번째 서신에서 이렇게 썼다.
너희 중 장로들[presbuteros]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poimaino]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벧전 5:1-4, 강조 추가).
베드로는 장로들이 그들의 양떼를 치라고 말했다. 여기에서 치라고 번역된 동사는 에베소서 4:11에서 (명사의 형태인) 목사로 번역되었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강조 추가).
이것은 또한 우리로 하여금 장로와 목사가 같은 의미임을 믿게 한다.
바울은 디도서 1:5-7에서 장로(presbuteros)와 감독(episkopos)을 의미하는 단어를 서로 교환하여 사용하였다.
내가 너를 그레데에 남겨 둔 이유는 남은 일을 정리하고 내가 명한 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강조 추가)
따라서 목사, 장로, 그리고 감독의 직분이 같은 직분이라는 것을 합리적으로 부인할 수 없다. 그러므로 신약 성경의 서신서에서 감독과 장로에 대해 쓴 모든 것은 목사에게도 적용된다.
교회 관리(Church Governance)
위에서 인용한 성경 말씀에서 보다시피, 장로/목사/감독에게는 교회에 대한 영적인 감독권이 주어졌을 뿐 아니라 또한 교회를 관리할 수 있는 권한도 부여되었음이 매우 분명하다. 간단하게 말하면, 장로/목사/감독이 교회를 담당하고, 교회의 구성원들은 그들에게 복종하여야 한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히 13:17).
물론, 어떤 그리스도인도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목사에게는 복종하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그 또한 어떤 목사도 완벽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목사/장로/감독은 아버지가 자기 가족에 대한 권한을 가진 것처럼 교회에 대한 권한을 가지고 있다.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공손함으로 복종하게 하는 자라야 할지며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리요)(딤전 3:2-5, 강조 추가).
바울은 계속하여 말하였다.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리할 것이니라(딤전. 5:17, 강조 추가).
분명히, 장로는 교회를 관리할 것이다.
비성경적인 장로(Unscriptural Elders)
많은 교회들은 장로들로 구성된 관리 그룹이 있어 그들의 관리 구조가 성경적이라고 생각하지만, 문제는 그들의 장로에 대한 개념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의 장로는 정기적으로 선출되고 교회 내에서 교대한다. 그들은 종종 “장로 위원회”로 불려진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은 성경의 정의에 의하면 장로가 아니다. 우리가 바울이 장로가 될 수 있는 사람을 위해 열거한 요구 사항을 살펴보면, 이것은 아주 분명해진다. 바울은 장로는 전직으로 섬고 삯을 받으며 교회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교회를 다스리는 위치에 있다고 썼다(딤전 3:4-5; 5:17-18; 딛1:9). 교회의 “장로 위원회”에 앉아 있는 사람들 중에 이 자격에 부합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들은 삯을 받지 않는다; 그들은 설교하거나 가르치지 않는다; 그들은 교회에서 전직으로 섬기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은 교회를 어떻게 다스릴지를 잘 알지 못한다.
비성경적인 교회 관리는 다른 어떤 것보다도 교회에 많은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원인이 될 수 있다. 잘못된 사람들이 교회를 다스릴 때, 문제가 오는 것이다. 그것은 다툼과 타협을 일으키며 교회를 완전히 무너뜨릴 수도 있다. 비성경적인 교회 관리 구조는 악마에 대한 환영 인사와도 같다.
나는 제도적 교회뿐 아니라 가정교회의 목사들에게도 이 글을 쓰고 있음을 알고 있다. 일부 제도적 교회 목사들은 교회에서 장로들을 선출하는 비성경적인 관리 구조를 가진 교회에서 목회할 수 있다. 이러한 비성경적인 관리 구조는 일반적으로 투쟁이 없이는 변경될 수 없다.
이러한 목사들에 대한 나의 충고는 그들이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관리 구조를 변경하여야 하며 불가피한 일시적인 충돌을 견뎌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그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정기적인 충돌이 불가피하게 될 것이다. 만일 그가 일시적인 충돌을 견디는 데 성공한다면, 모든 미래의 충돌을 피면하게 될 것이지만, 만일 실패한다면, 그는 새로운 교회를 개척하고 처음부터 성경적으로 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고통이 따르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더 많은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만일 현재 자신의 교회를 관리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진정한 제자라면, 그에게는 그들이 현재의 구조에 대한 필요한 변화를 가져오게끔 설득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장로는 다수제인가? (The Plurality of Elders?)
일부 사람들은 성경에서 장로에 대하여 항상 복수상태로 언급했기 때문에 그대로라면, 한 명의 장로/목사/감독이 회중을 인도하는 것은 비성경적인 것이라고 지적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이것은 결정적인 증거가 되지 않는다. 성경은 분명히 특정 도시에서 한 명 이상의 장로가 교회를 감독한다고 언급했지만, 그 장로들이 같은 회중을 공동으로 감독했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바울이 에베소의 장로들을 청하였을 때(행 20:17을 보라), 그들은 전체 인구가 수천 또는 수만 명의 사람들이 있는 도시에서 왔음이 분명하다(행 19:19을 보라). 따라서, 에베소에는 많은 무리들이 있었을 것이며 매 장로마다 하나의 가정교회를 감독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어떤 위원회를 부르셔서 일을 시키신 사례가 없다. 그분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시고자 하셨을 때, 그분은 한 사람, 모세를 부르시고 지도자로 세우셨다. 다른 사람들은 모세를 돕기 위해 부르심을 받았지만, 모두 그에게 종속되었고, 모세와 같이, 그들도 각각 특정 하위 그룹을 책임지고 있었다. 이 양식은 성경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은 이루시고자 하는 일이 있을 때, 한 사람을 부르시며, 다른 사람을 부르셔서 그 사람을 돕게 한다.
따라서 하나님은 장로 위원회를 부르셔서 스무 명 규모의 매 작은 가정 교회를 모두 감독하게 하실 것 같지 않다. 그것은 분쟁에 유발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모든 가정 교회는 오직 한 명의 장로에 의해 감독 되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교회에 한 명 이상의 장로가 있으면, 젊고 영적으로 덜 성숙한 장로(들)은 가장 나이가 많고 영적으로 성숙한 장로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말이다. 성경적으로, 신학교가 아닌, 교회가 젊은 목사/장로/감독들을 훈련하는 장소가 되어야 하며, 한 가정교회에 여러 명의 장로/목사/감독이 있고 영적으로 미숙한 장로가 성숙한 장로의 제자 훈련을 받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고 바람직할 수 있다.
나는 “같은 지위”의 장로들에 의해 감독 되는 교회에서도 이런 현상이 있음을 발견했다. 거기에는 항상 다른 장로들에게 존중받는 한 장로가 있었거나 다른 장로들이 수동적인 반면 지배적인 한 명의 장로가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사실, 위원회에서조차 항상 한 명의 의장을 선출한다. 같은 지위의 사람들이 어떤 일을 할 때에도, 한 명의 지도자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인식을 하게 된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디모데전서 3:4-5에서 바울은 장로의 책임을 아버지의 책임에 비교했다. 장로들은 반드시 자기 집을 잘 다스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교회를 관리할 자격이 없다. 그러나 같은 지위의 두 아버지가 어떻게 한 가정을 다스릴 수 있겠는가? 나는 분명히 문제가 생길 것으로 생각한다.
장로/목사/감독들은 더 넓은 범위 지역의 지체들에 의해 서로 연결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동료 장로들 사이에 상호 책임을 지고 문제가 생겼을 때 서로 도울 수 있다. 바울은 “장로의 회”(딤전 4:14을 보라)를 언급한 적이 있는데, 그것은 장로들의 모임이 틀림없으며, 가능하게 사역의 은사를 가진 다른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만일 설립 사도가 있으면 그는 장로의 오류로 말미암아 생긴 지역교회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을 도울 수 있다. 제도적 교회의 목사가 타락하면, 교회의 구조 때문에 항상 큰 문제가 발생한다. 거기에는 건물과 각종 프로그램들을 유지해야 하는 문제가 있다. 그러나 가정교회는 즉시 해산시킬 수 있으며 회원들은 다른 모임에 참여하면 된다.
봉사할 수 있는 권한(Authority to Serve)
하나님은 목사에게 교회에서의 영적 및 관리 권한을 부여하셨지만, 그에게 자신의 양떼를 지배할 수 있는 권한은 부여하시지 않았다. 목사는 그들의 주님이 아니며 예수님만이 그들의 주님이시다. 그들은 목사의 양떼가 아닌 하나님의 양떼이다.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벧전 5:2, 강조 추가).
각 목사는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자신의 사역에 대하여 언젠가 회계하여야 할 것이다.
또한, 재정적인 문제에 있어서, 목사/장로/감독은 독립적으로 행동하지 말아야 한다. 교회에서 어떤 이유로 정기적으로 또는 간헐적으로 모금하고 있다면, 교회 내의 다른 지체들이 재정을 책임져야 한다. 그래야만 헌금을 관리하는 것에 대한 불신이 생기지 않을 수 있다(고후 8:18-23을 보라). 재정을 맡은 사람들은 선출하거나 임명할 수 있다.
장로에 대한 지급(Paying Elders)
장로/감독/목사들이 교회에서 전직으로 사역하기 때문에, 성경은 그들이 삯을 받아야 함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바울은 이렇게 썼다.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리할 것이니라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은 마땅하다 하였느니라(딤전 5:17-18).
이 주제는 명확하다. 바울은 심지어 삯이란 단어를 사용한다. 바울의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아야 한다는 말은 앞뒤 문맥을 살펴보면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앞 구절들을 보면, 바울은 도움을 받을 수 없는 과부들을 재정적으로 도와주어야 할 교회의 책임을 명백하게 썼으며, “참 과부인 과부를 존대하라”(딤전 5:3-16을 보라)라는 같은 표현으로 쓰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이 문맥을 보았을 때 “존대하라”는 표현은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것을 의미한다.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여김을 받아야 하며, 적어도 과부에게 지원하는 것의 두 배는 받아야 하며 자녀가 있으면 그 이상을 받아야 할 것이다.
세계 각곳의 대부분(심지어 가난한 국가)의 제도적 교회들에서는 목사들을 지원하지만, 전 세계의 많은 가정교회, 특히 서방의 가정교회들에서는 지원하지 않는다. 나는 그 이유가 부분적으로는 가정교회에 다니려는 서양 세계의 많은 사람들의 마음 상태가 반역적이고, 그들이 이 세상에서 요구가 가장 적은 기독교 형식을 찾으려 하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그들은 제도적 교회의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정교회에 다닌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그들은 그리스도께 대한 모든 헌신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그들은 아무런 재정적인 헌신도 요구하지 않는,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기대하신 것과는 매우 대조적인 교회를 찾았다.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지 않고 땅에 쌓아 두며 재물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가 아니다(마 6:19-24; 눅 14:33을 보라). 만일 한 사람의 기독교 신앙이 돈에 대한 영향력을 잃는다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성경적이라고 주장하는 가정교회는 목사들을 지원할 뿐 아니라, 가난한 자들을 돌봐주고 선교사역에 후원해 주어야 한다. 그들은 재정적인 방면에 있어서, 제도적 교회를 훨씬 능가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지불이 필요한 건물과 프로그램을 위한 직원들이 없기 때문이다. 한 명의 목사를 지원하기 위해 열 명의 신자가 십일조를 내면 된다. 소득의 20%를 헌금하는 열 명의 신자는 한 명의 목사와 한 명의 선교사를 목사와 같은 수준에서 지원할 수 있다.
목사는 무엇을 하는가?( What do Pastors do?)
교회의 평범한 출석자에게 “다음과 같은 일들은 누구의 직업인가?”고 묻는다고 상상해보자.
누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들려주고 거룩한 삶을 살고 기도해야 하는가? 누가 다른 신자들을 권계하고 격려하고 병든 자를 방문하고 안수하고 치유해줘야 하는가? 누가 다른 사람의 짐을 함께 져야 하는가? 누가 지체를 위하여 은사를 사용해야 하는가? 누가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희생하는가? 누가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고 그리스도의 계명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가?
많은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은 주저함이 없이 “이 모든 것은 목사의 책임이다”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진짜 그럴까?
성경에 따르면, 모든 신자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벧전 3:15).
모든 신자는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벧전 1:15-16).
모든 신자는 기도하여야 한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6-17).
모든 신자는 다른 신자를 권계하고 격려하고 도와주어야 한다.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살전 5:14, 강조 추가).
모든 신자는 병든 자를 방문하여야 한다.
헐벗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 25:36).
더 많은 책임(More Responsibilities)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모든 신자는 병든 자에게 안수하고 치유하여 한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 즉 나으리라 하시더라(막 16:17, 강조 추가).
모든 신자는 지체들의 짐을 서로 져야 한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 6:2).
모든 신자는 다른 사람을 위하여 자신의 은사를 사용해야 한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롬 12:6-8).
모든 신자는 자기를 부인하고 복음을 위해서 희생하여야 한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막 8:34-35, 강조 추가).
그리고 모든 신자들은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풀어야 하며 그들을 가르쳐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게 해야 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마 5:19, 강조 추가).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히 5:12, 강조 추가).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9-20, 강조 추가).[2]
이러한 책임은 모든 신자에게 다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회 출석자들은 이런 일들은 단지 목사들에게만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아마도 목사 스스로 너무 자주 이런 일들은 전적으로 자신의 책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목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So What are Pastors Supposed to do?)
만일 이러한 책임들이 모든 신자에게 주어졌다면, 목사는 무엇을 해야 할까? 간단히 말해서, 그들은 거룩한 신자들이 그런 일들을 할 수 있도록 세워주기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엡 4:11-12을 보라). 그들은 거룩한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모든 계명을 지키게 하기 위해(마 28:19-20을 보라) 교훈과 본을 통하여 가르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딤전 3:2; 4:12-13; 5:17; 딤후 2:2; 3:16-4:4; 벧전 5:1-4을 보라).
성경은 이것에 대해 더 이상 명확할 수가 없다. 목사의 성경적인 역할은 주일 아침 예배에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모아놓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하게 세워가는 것”(골 1:28)이다. 성경적인 목사는 사람들의 귀를 자극하는 것이 아니라(딤후 4:3을 보라),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사람들을 가르치고, 훈련시키고, 권면하고, 경책하고, 바로 잡고, 책망한다(딤후 3:16-4:4을 보라).
바울은 디모데전서에서 한 사람이 목사의 직분을 감당하기 위한 일부 자격 조건을 나열하였다. 열다섯 가지 중의 열네 가지는 성품에 관련된 것인데 이것은 모범이 되는 삶이 가장 중요함을 보여준다.
미쁘다 이 말이여, 곧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함은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라 함이로다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신중하며 단정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며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공손함으로 복종하게 하는 자라야 할지며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리요) 새로 입교한 자도 말지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 또한 외인에게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라(딤전 3:1-7).
이러한 자격 조건들과 제도적 교회에서 종종 새로운 목사를 찾을 때 명시하는 조건들을 비교해보면 많은 교회들의 주요 문제가 보인다. 그들은 직원 관리일꾼/즐겁게 해주는 사람/연설을 짧게 하는 사람/행정가/심리학자/활동 및 프로그램이 감독/모금 전문가/인맥이 넓은 사람/불평이 없는 사람을 찾고 있다. 그들은 “교회의 사역을 끌어갈” 사람을 찾고 있다. 그러나, 성경적인 감독은 무엇보다도 좋은 성품을 가진 그리스도께 헌신된 진정한 일꾼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의 목표는 자신과 같은 사람을 만들어 내는 것이기때문이다. 그는 그의 무리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도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 11:1).
목사의 직분에 관한 진일보의 연구를 위하여 사도행전 20:28-31; 디모데전서 5:17-20; 및 디도서 1:5-9을 보라.
집사의 직분(The Office of Deacon)
끝으로, 나는 집사에 대한 언급을 조금 하겠다. 집사의 직분은 지역교회에서 다섯 가지 사역의 은사에 속하지 않는 유일한 직분이다. 집사는 장로처럼 교회에서 관할 권한이 없다. 집사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diakonos인데 문자적인 의미는 “종”이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과부들을 구제하는 일에 임명된 일곱 명의 남자들은 최초의 집사로 간주된다(행 6:1-6을 보라). 그들은 교회 회중에 의해 택함을 받고 사도들에 의해 임명되었다. 그들 중 적어도 두 사람, 빌립과 스데반은 나중에 하나님의 의해 능력 있는 복음 전도자로 세움을 받았다.
디모데전서 3:8-13과 빌립보서 1:1에도 집사에 대한 언급이 있다. 분명한 것은, 이 직분은 남자와 여자가 모두 맡을 수 있다(딤전 3:11을 보라).
[1]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를 삼기 위함이다”라는 것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2]만일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들의 제자들도 그분께서 그들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지키게끔 가르쳤다면, 그들도 결국 그들의 제자들에게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풀고 그리스도의 계명을 가르쳐 지키게 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풀고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은 모든 제자들이 따라야 할 영원한 계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