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 장 (Chapter Seven)

성경적 해석(Biblical Interpretation)

바울은 서신에서 디모데에게 이렇게 썼다.

네가 네 자신가르침을 살펴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딤전 4:16, 강조 추가).

사역자마다 이 권면을 마음속에 새기고, 우선 먼저 자신을 살펴 경건의 좋은 본을 세워야 한다.

둘째, 그는 응당 자신의 가르침에 각별히 주의 기울여야 한다. 왜냐하면, 바울이 위의 인용구절에 쓴 것처럼 대로 그의 구원과 그의 말을 듣는 자들의 구원은 그가 가르치는 것에 의존하기 때문이다.[1] 만일 사역자가 거짓 교리를 포용하고 사람들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면, 그 결과는 그와 타인에게 영원한 불행을 줄 수 있다.

제자 삼는 사역자가 거짓 교리를 가르치는 것은 변명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성령님과 그분의 말씀을 주셔서 그를 진리로 인도하셨기 때문이다. 대조적으로, 잘못된 동기를 가진 사역자들은 종종 앵무새처럼 다른 인기 있는 사람들의 가르침을 되풀이 하거나, 스스로 말씀을 공부하지 않고, 그들의 교리와 가르침에 오류를 범하는 경향이 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 사역자는 그의 마음을 깨끗이 하고 그의 동기가 (1)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2) 사람들을 개인적으로 부유하고, 힘 있고, 인기를 누리는 것이 아닌 마지막 날에 예수님 앞에 온전히 설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되어야 한다. 또한, 그는 말씀에 대해 철저하고 균형 잡힌 이해를 갖기 위해서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연구해야 한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또한, 이렇게 썼다.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 2:15).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공부하고, 묵상하는 것은 사역자가 지속적으로 연습해야 할 학문이 되어야 한다. 성령님은 그가 말씀을 열심히 연구할수록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므로 그는 “진리의 말씀을 정확하게 다룰 수” 있게 된다. 오늘날 교회의 가장 큰 문제점 중 하나가 사역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해석하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그들이 가르치는 사람들을 잘못 인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이다. 야고보는 이렇게 경고했다.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약 3:1).

이런 이유 때문에 제자 삼는 사역자가 어떤 성경 구절이든지 정확하게 이해하고 뜻하는 바를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할지를 아는 것은 필수적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해석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말을 정확하게 해석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만일 우리가 어떤 저자 또는 강사가 의도하는 바를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우리는 반드시 상식을 기반으로 한 특정 규칙을 적용해야 한다. 이 장에서 우리는 성경 해석의 세 가지 가장 중요한 규칙을 고려할 것이다. 그 세 가지는, (1)지능적으로 읽기, (2)문맥으로 읽기, 그리고 (3)정직하게 읽기이다.

첫 번째 규칙: 지능적으로 읽기. 당신이 읽은 것이 비유나 상징적으로 이해하도록 분명히 의도되지 않았다면 문자 그대로 해석한다.

성경은 모든 문학처럼, 비유, 과장법의인법 등 수사법으로 가득하다. 그들은 이런 방법으로 해석해야 한다.

비유는 기본적으로 다른 두 가지 사물의 유사성을 비교한 것이다. 성경에는 많은 비유가 포함되어 있다. 최후의 만찬 때 그리스도의 말씀에서도 하나의 비유를 찾을 수 있다.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6-28).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주신 떡이 문자 그대로 그분의 몸이고, 그들이 마신 포도주가 문자 그대로 그분의 피라고 뜻하셨을까? 상식적으로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성경은 명백하게 예수님이 그들에게 주신 것은 떡과 포도주라고 말씀하시며, 어느 시점에도 떡과 포도주가 몸과 피로 변화되었다는 말씀은 없다. 최후의 만찬에 참석한 베드로와 요한도 그들의 서신서에서 그런 변화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었으며, 제자가 이렇게 쉽게 식인종이 되었을 가능성은 더더욱 없다.

일부는 “하지만, 예수님이 떡과 포도주는 그분의 몸과 피라고 말씀하셨기에 나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믿겠다!”라고 반박한다.

예수님은 그분이 문이라고 하신 적이 있다(요 10:9을 보라). 그분은 문자 그대로 경첩과 손잡이가 있는 문이 되었는가? 예수님은 그분은 포도 나무이고 우리는 가지라고 하신 적이 있다(요 15:5을 보라). 예수님은 문자 그대로 포도 나무가 되셨는가? 우리는 문자 그대로 포도 나무 가지가 되었는가? 예수님은 그분은 세상의 빛이며 하늘에서 내려 온 떡이라고 하신 적이 있다(요 9:5; 6:41을 보라). 예수님은 또한, 햇빛이고 한 덩어리의 떡이신가?

분명히, 이러한 표현들은 모두 비유라는 수사법을 사용한 것이며, 기본적으로 다른 두 가지 사물의 유사한 부분을 비교한 것이다. 어떤 면에서 예수님은 문과 포도나무와 같다. 최후의 만찬에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도 분명히 비유이다. 포도주는 그분의 피(어떤 면에서)와 같았고, 떡은 그분의 몸(어떤 면에서)과 같았다.

그리스도의 비유(Christ’s Parables)

그리스도의 비유는 모두 직유이다. 직유는 은유와 비슷하지만, 항상 같이, 처럼, 듯이 등 단어들과 함께 쓰인다. 그들은 본질적으로 다른 두 가지 사물의 유사성을 비교하여 영적인 교훈을 가르친다. 그것은 우리가 비유를 해석함에 있어서 기억해야 할 중요한 점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모든 비유의 세세한 부분까지 중요하게 생각하는 오류에 빠질 수 있다. 은유와 직유는 항상 유사성이 끝나고 차이점의 시작하는 곳에 도달한다. 예를 들어, 내가 아내에게 “당신의 눈은 호수 같다”고 했을 때, 나는 그녀의 눈이 푸르고 깊어 매력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그곳에 물고기가 헤엄치고, 새들이 앉으며, 그리고 겨울에는 그곳이 얼음으로 꽁꽁 얼어 붙을거라는 뜻이 아니다.

아래에 예수님이 직유로 하신 세 가지 비유를 고려해보겠는데, 먼저 그물의 비유부터 보도록 하자.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 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버리느니라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리라(마 13:47-50).

천국과 그물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그들은 매우 많이 다르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몇 가지 유사성이 있다. 사람들이 그물 안의 물고기를 좋은 것과 못된 것으로 가르는 것처럼 천국에서도 그러할 것이다. 어느 날인가 현재 함께 살고 있던 악인과 의인은 분리될 것이다. 하지만 유사성은 그곳에서 끝난다. 물고기는 헤엄치나 사람은 걸어 다닌다. 어부들은 물고기를 가려내나 천사들은 의인과 악인을 가려낸다. 물고기는 조리 한 후에 맛을 얼마나 잘 내느냐에 의해 판단되지만, 사람은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순종과 불순종에 의해 판단된다. 좋은 물고기는 그릇에 담지만, 나쁜 물고기는 버려진다. 의인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만, 악인은 지옥에 던져진다.

이 비유는 비교되는 사물들이 기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모든 은유와 직유가 궁극적으로 불완전한 비교임을 보여주는 완벽한 예이다. 우리는 말하는 사람의 의도를 넘어서 차이점이 실제로 닮은 점이라고 가정하지 말아야 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모두 “좋은 물고기”는 실제로 불에 구워져 조리되지만, “나쁜 물고기”는 물속으로 돌아가 한동안 더 살수 있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다. 예수님은 그런 의미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분의 목적을 파괴하는 것이다.

이 특별한 비유는, 우리가 좋은 사람이나 나쁜 사람이든지, 원하든 원하지 않던 간에 교회로 사람들을 끌어 오려는 “그물식 전도”전략을 가르치지 않는다! 이 비유는 해변이 전도하기 가장 좋은 곳이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이 비유는 교회의 휴거가 환란 기간의 끝에서 발생한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는다. 이 비유는 선택당한 물고기들은 그들 자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이 선택받았기에 우리의 구원도 순전히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이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예수님의 비유에 부당한 중요성을 강제적으로 부여하지 말라!

항상 준비되어 있으라(Remaining Ready)

예수님의 또 하나의 비유인 열 처녀의 비유를 보도록 하자.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그 중의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신랑이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새 미련한 자들은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달라 하거늘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마 25:1-13).

이 비유의 기본적인 교훈은 무엇인가? 그것은 마지막 구절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그것이 전부다.

내가 이전 장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예수님은 이 비유를 그 당시 그분께 순종하며 따랐던 가장 가까운 제자 중 일부에게만(마 24:3; 막 13:3을 보라)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이 비유는 예수님이 재림하셨을 때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도 준비되어 있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암시한다. 바로 그 때문에 예수님은 그들을 경고하셨다. 따라서 이 비유는 지금 그리스도의 재림을 위한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도 그분이 실제로 재림하실 때에는 준비되어 있지 않을 가능성이 있음을 가르치고 있다. 열 처녀는 처음에는 모두 준비되어 있었지만, 그중 다서명은 나중에 준비되어 있지 못했다. 만일 신랑이 빨리 돌아 왔더라면, 열명 모두 혼인 잔치에 참석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섯 명의 미련한 자와 다섯 명의 슬기 있는 자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자칭 그리스도인 중 절반만이 그리스도가 재림할 때 준비되어 있을 거라는 것을 증명하는가? 아니다.

기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성령님을 나타내는가? 아니다. 그것은 단지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만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가? 아니다.

신랑이 밤중에 돌아왔으므로 예수님도 한밤중에 재림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가? 아니다.

왜 신랑은 슬기 있는 처녀들에게 문에서 그들의 미련한 친구들을 찾아보라고 하시지 않았을까? 만일 신랑이 그렇게 하였다면, 미련한 자들이 궁극적으로 혼인 잔치에 참여하게 되므로 이 비유의 전체 중점을 망치게 된다.

아마도 그것은 미련한 처녀들이 등불이 꺼지므로 잠이 든 것처럼 미련한 신자들도 영적인 어둠 속에서 걷다가 영적으로 잠들게 되면 궁극적으로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아마도 이 비유에 나오는 혼인 잔치가 미래의 어린 양의 혼인 잔치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비유 혹은 세부적인 내용에 따른 의미를 강요하지 않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은 그 정도까지이다.

열매를 맺으라(Bearing Fruit)

아마도 내가 들었던 그리스도의 비유에 대한 최악의 해석은 한 목사의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에 대한 해석일 것이다. 먼저 이 비유를 읽어 보자.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주인이 이르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마 13:24-30).

한 목사의 해석을 보도록 하자.

곡식과 가라지가 자랄 때에는 모습이 똑같다. 아무도 어느 것이 곡식이고 어느 것이 가라지인지 알 수 없다. 이 세상과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아무도 누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며, 누가 불신자인지 알 수 없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불신자보다 그리스도께 더 많이 순종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삶만 보아서는 구별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들의 마음을 아시기에, 그분은 마지막에 신자들을 구별해 낼 것이다.

물론, 그것은 곡식과 가라지 비유의 요점이 아니다! 현실 속에서 보면, 신자들은 실제로 불신자와 매우 많이 구별됨을 알 수 있다. 종들이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가 심어졌음을 깨달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가라지는 열매를 맺지 못하므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이 열매 맺지 못하는 가라지를 선택하여 마지막에 거두어 내어 지옥에 던져질 악인들에 비유하신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비유의 중점은 분명하다. 진정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열매를 맺으나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 비록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사람들 속에 사는 악인들을 즉각적으로 심판하시지는 않지만, 언젠가는 그들을 의인들 가운데서 거두어 내어 지옥에 던져 넣으실 것이다.

예수님은 실제로, 이 비유에 대한 해석을 제공하셨다. 그러므로 누구도 그분의 해석 이외의 어떠한 의미도 찾을 필요가 없다.

이에 예수께서 무리를 떠나사 집에 들어 가시니 제자가 나아와 이르되 밭의 가라지의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소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 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그 때에 의인들이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마 13:36-43).

과장법(Hyperbole)

성경에서 두 번째로 자주 사용된 수사법은 과장법이다. 과장법은 특정 사물을 강조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지나치게 표현하는 것이다. 어머니가 그녀의 아이에게 “나는 너에게 집에 돌아와 저녁 식사를 하라고 천 번 전화 하였다”라고 말하는 것은 과장법이다. 성경에서 과장법의 예로 오른손을 찍어 내버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 수 있다.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마 5:30).

만일 예수님께서 문자 그대로 우리 중에 오른손으로 죄를 지은 사람은 모두 그 손을 잘라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셨다면, 우리는 모두 오른손을 잃어야 할 것이다! 물론, 죄의 문제는 사실 우리 손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도, 예수님은 죄는 우리를 지옥으로 보낼 수 있으며, 죄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유혹과 우리로 하여금 넘어지게 하는 것들을 제거하는 것임을 가르치셨다.

의인법(Anthropomorphism)

 

우리가 성경에서 만나게 되는 세 번째 수사법은 의인법이다. 의인법은 우리가 그분을 이해하도록 돕기 위해서 하나님께 인간의 속성을 부여하는 은유적인 표현이다. 예를 들어, 창세기 11:5은 이렇게 썼다.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창 11:5).

이것은 틀림없이 비유이다. 왜냐하면, 전지하신 하나님께서 문자 그대로 하늘나라에서 바벨로 내려오셔서 사람들이 무엇을 건설하는지 조사하셨을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많은 성경학자들은 팔, 손, 코, 눈과 머리카락처럼 하나님의 몸의 부분들을 묘사하는 매 성경 말씀마다 의인법을 사용하였다고 본다. 물론, 전능하신 하나님은 실제로 인간처럼 이러한 부분들이 없다.

하지만, 나는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그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첫째, 왜냐하면, 성경은 명백하게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되었다고 가르친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 1:26, 강조 추가).

일부 사람은 우리는 자기 인식, 도덕적 책임, 이성의 능력 등 면에서만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만들어졌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창세기 1:26과 아주 유사한 말씀을 몇 장 뒤에서 보게 된다.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창 5:3, 강조 추가).

이 말씀은 틀림없이 셋이 그의 아버지와 신체적인 외모가 비슷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그것이 창세기 5:3의 의미라면, 창세기 1:26의 같은 표현도 같은 의미일 것이다. 상식적이고 온전한 해석은 그 같은 결론을 얻게 된다.

또한, 일부 하나님을 본 성경 저자들의 그분에 관한 묘사들이 있는데, 예를 들어, 모세는 73명의 다른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나님을 보았다.

모세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 인이 올라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보니 그의 발 아래에는 청옥을 편 듯하고 하늘 같이 청명하더라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들의 존귀한 자들에게 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뵙고 먹고 마셨더라(출 24:9-11).

만일 당신이 모세에게 하나님이 손과 발을 가지셨는지를 묻는다면, 그는 무슨 말을 했을까?[2]

선지자 다니엘도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환상을 보았다.

내가 보니 왕좌가 놓이고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성부 하나님] 좌정하셨는데 그의 옷은 희기가 눈 같고 그의 머리털은 깨끗한 양의 털과 같고 그의 보좌는 불꽃이요 그의 바퀴는 타오르는 불이며 불이 강처럼 흘러 그의 앞에서 나오며 그를 섬기는 자는 천천이요 그 앞에서 모셔 선 자는 만만이며 심판을 베푸는데 책들이 펴 놓였더라…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성자 하나님]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단 7:9-10, 13-14).

만일 당신이 다니엘에게 하나님이 하얀 머리털과 형체가 있어 왕좌에 앉을 수 있지 않는가 하고 묻는다면, 그는 무슨 말을 했을까?

이 모든 것으로 보아, 나는 성부 하나님은 비록 육과 피가 아닌 영이시지만(요 4:24을 보라), 인간의 모습과 비슷한 영광스러운 형체를 가지셨다고 확신한다.

성경 말씀을 해석함에 있어서 어느 부분은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어느 부분은 비유적 또는 상징적으로 해석해야 할지를 분별할 수 있을까? 그것은 논리적인 사로를 가진 사람에게는 쉬운 일이다. 우리는 비유적 또는 상징적으로 쓰인 것을 다른 방법으로 해석할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한 모든 것은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예를 들어, 구약의 예언서들과 계시록은 상징으로 가득한데, 어떤 부분은 해석되었고, 어떤 부분은 해석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상징적으로 쓰인 부분을 알아보기는 어렵지 않다.

두 번째 규칙: 문맥으로 읽으라. 모든 단락은 앞뒤 단락과 성경 전체에 비추어 해석되어야 한다. 가능한 한 역사와 문화적인 배경도 고려되어야 한다.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주요 원인은 앞뒤 문맥과 성경적인 배경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경을 문맥을 떠나서 해석한다면,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을 성경이 하게 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성경은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을 알고 있는가? 시편 14편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없다”(시 14:1)라는 말씀을 읽게 된다. 하지만, 만일 우리가 그 말씀을 정확하게 해석하려면, 우리는 그 말씀의 문맥을 읽어야 한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시 14:1, 강조 추가). 이제 이 구절은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또 다른 예를 들면: 나는 어느 한 번 한 목사가 그리스도인들은 “불의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설교를 들었다. 그 목사는 마태복음 3:11의 말씀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란 세례 요한의 말씀을 읽으면서 설교를 시작하였다.

이 구절을 근거로, 그는 설교하였다. 나는 그가 설교 중에 “당신이 성령으로 세례 받은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세례 요한이 선포한 것처럼 예수님은 당신에게 불로 세례를 베푸시기를 원하신다”라고 말한 것을 기억한다. 그리고 그는 계속하여 우리가 “불의 세례를 받기”만 하면, 우리는 주님을 위해 일하려는 열심으로 가득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불의 세례”를 받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제단앞으로 불렀다.

불행하게도, 그 목사는 문맥을 떠나 성경을 해석하는 전형적인 실수를 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은 불의 세례를 베푸실 것이라고 말한 것은 무슨 의미였을까? 답을 찾기 위해서 우리가 모두 해야 할 일은 해당 구절 앞의 두 구절과 뒤의 한 구절을 읽는 것이다. 먼저 앞의 두 구절부터 시작하자. 요한은 이렇게 말했다.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마 3:9-10, 강조 추가).

우선 먼저, 우리는 적어도 요한의 청중들 가운데는 자신들의 혈통으로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 유대인들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요한은 복음을 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또한, 요한이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불 속에 던져질 위험이 있다고 경고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요한이 10절에서 말한 “불”은 11절에서 말한 불과 같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우리가 12절을 읽어보면 이 사실은 더욱 명확해진다.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 3:12, 강조 추가).

10절과 12절에서 요한이 말한 불은 지옥의 불이었다. 12절에서 그는 예수님이 사람들을 두 그룹 – “곳간에 모아 들일” 알곡과, “꺼지지 않는 불로 태울” 쭉정이로 나눌것이라고 비유적으로 말하였다.

앞뒤 구절에 비추어 보면, 요한은 11절에서 예수님이 신자들에게는 성령의 세례를, 불신자들에게는 불의 세례를 베푸실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였음이 틀림없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도 그리스도인들에게 불의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설교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 구절의 앞뒤 문맥뿐 아니라 신약의 나머지 말씀들도 살펴봐야 한다.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그리스도인이 “불의 세례”를 받았었다는 예를 찾을 수 있는가? 없다. 가장 흡사한 사건은 오순절 날 제자가 성령의 세례를 받고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의 머리위에 나타났다는 누가의 묘사일 것이다. 하지만, 누가는 종래로 그것이 “불의 세례”라고 말한 적이 없다. 또한, 우리는 서신서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불의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권고나 지시를 찾을 수 있는가? 없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불의 세례를 추구하지 말하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은 매우 안전하다.

성경에서 나온 거짓 복음(A False Gospel Derived From Scripture)

문맥을 고려하지 않고 성경을 해석하는 목사와 교사들 때문에 종종 복음이 잘못 전파되고 있다. 이 이유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거짓 가르침은 도처에 널려 있다.

예를 들어,구원은 행위가 아닌 은혜에 의하여 받은 것이라는 에베소서 2:8의 말씀은 거짓 복음을 홍보하기 위해 악용되고 있는데 그것은 모두 앞뒤 문맥을 무시하였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렇게 썼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8-9).

많은 사람은 바울이 진술한 구원에 관해서 단지 은혜에 의하고, 하나의 선물이며, 행위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에만 초점을 두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성경의 수백개의 증언에 반해서 구원과 거룩함 사이에는 아무 연결이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일부는 심지어 구원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까지 말한다. 이것은 문맥이 무시됨으로써 성경이 잘못 해석되는 전형적인 예이다.

우선, 이 성경 말씀이 전반적으로 무엇을 말씀하시려는지 생각해보자. 바울은 우리가 은혜에 의하여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지 않고, 우리가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고 하였다. 믿음은 구원을 이루는 등식에서 은혜와 같은 위치에 있다. 성경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유익이 없고, 죽은 것이며, 구원할 수 없다고 하였다(약2:14-26을 보라). 따라서 바울은 거룩함이 구원과 관계없다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우리의 노력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우리 구원의 기초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우리가 결코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 구원을 받을 수 없지만, 오직 우리가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믿음으로 응답할 때에만 구원이 실제로 이루어진다. 구원의 결과는 항상 순종과 진정한 믿음의 열매이다. 다음 구절을 보더라도 이 점을 입증할 수 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우리가 성령님에 의해 재창조된 모든 이유는 바로, 지금 그리스도의 새로운 피조물이 된, 우리가 순종함으로 선한 일을 행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바울의 구원 등식은 다음과 같다.

은혜 + 믿음 = 구원 + 순종

즉, 은혜 더하기 믿음은 구원 더하기 순종과 같다. 하나님의 은혜가 믿음에 의해 응답받는 경우, 그 결과는 항상 구원과 선한 일이다.

그러나 바울의 말을 문맥으로 해석하지 않는 사람은 아래와 같은 등식을 지어낸다.

은혜 + 믿음 – 순종 = 구원

즉, 은혜에 순종이 없는 믿음을 더하면 구원과 같다. 그것은 성경에 관한 한 어디까지나 이단이다.

만일 우리가 바울의 말의 맥락을 조금 더 읽는다면, 우리는 곧 에베소의 상황은 바울이 설교했던 모든 곳과 같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유대인들은 바울의 새롭게 회심한 이방인들에게 그들이 구원받으려면 반드시 할례를 받고 모세의 율법의 의식들을 지켜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었던 것이다. 바울이 “행위”가 사람을 구원할 수 없다고 쓸 때 마음속에 생각했던 것이 바로 할례와 율법적인 의식이었다(엡 2:11-22을 보라).

만일 우리가 에베소 교회에 쓴 바울의 서신을 좀 더 전체적인 맥락에서 읽는다면, 우리는 바울이 거룩함이 구원에 필수적이라고 믿었다는 것을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 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엡 5:3-6, 강조 추가).

만일 바울이 하나님의 은혜가 회개하지 않는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들을 궁극적으로 구원한다고 믿었다면, 그는 이러한 내용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에베소서 2:8-9에 기록된 말씀 속에 담긴 바울의 의도된 의미는 오직 그가 에베소에 쓴 서신을 전체적인 맥락에서 해석할 때에만이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갈라디아인의 패배(The Galatian Fiasco)

바울이 쓴 갈라디아서도 마찬가지로 문맥을 떠나 해석되었다. 그 결과 복음이 왜곡되었는데, 이 점은 곧바로 바울이 그의 서신에서 바로잡으려 했던 것이었다.

갈라디아 교회에 쓴 바울서신의 전반적인 주제는 “율법에 대한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울은 그의 독자들이 거룩함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필요하지 않다는 결론에 이르도록 작정했을까? 물론 그렇지 않다.

우선, 우리는 바울이 다시 한 번 갈라디아에 와서 새로운 회심자들에게 할례를 받지 않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들이 구원받을 수 없다고 가르치고 있었던 유대인들과 맞서 싸웠음을 알 수 있다.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반복적으로 할례에 대한 문제를 언급하였는데, 그것이 유대인 율법주의자들의 주안점이었기 때문이었다(갈 2:3, 7-9, 12; 5:2-3, 6, 11; 6:12-13,15을 보라). 바울은 갈라디아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계명에 너무 순종하는 것을 우려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구원을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안에 믿음을 두는 것이 아닌 할례를 행하고 자기의 노력으로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데 의지할까봐 우려했다.

우리가 갈라디아 교회에게 보낸 바울의 서신을 전반적인 맥락에서 보면, 그가 제5장에서 다음과 같이 쓴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갈 5:18-21, 강조 추가).

만일 바울이 갈라디아 신자들에게 그들이 거룩하지 않아도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을 전달하려 했었다면, 그는 그 같은 내용을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메시지는 거룩하지 못한 사람들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희생을 폐하고 할례와 모세의 율법을 통해 구원을 얻으려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할례는 구원을 이루지 못한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만이 신자를 거룩한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시키는 구원을 이룬다.

할례나 무할례자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갈 6:15).

이 모든 것은 성경을 해석할 때 문맥을 고려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다시금 보여준다. 복음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왜곡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문맥을 무시하는 것이다. 우리는 고의적으로, 뻔뻔스럽게 이런 일을 하는 “사역자들”의 마음이 궁금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한 번은 한 목사가 성경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신다”(롬 2:4)고 말씀하시기에 우리가 복음을 전파할 때에는 하나님의 진노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따라서, 그의 말에 따르면, 복음을 전파하는 적절한 방법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선하심만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아마도 사람들을 회개하게 인도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 목사가 로마서 2장에서 인용한 구절의 앞뒤 구절을 읽어보면, 그 구절은 하나님의 심판과 거룩한 진노로 에워 쌌음을 발견하게 된다! 문맥상으로 보았을 때 그 목사가 말한 것이 바울의 의도와 같을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이런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 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며(롬 2:2-9, 강조 추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대한 바울의 언급은 하나님이 진노를 늦추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공개적으로 죄인들에게 회개하라고 경고하는 설교자들의 예로 가득한 성경의 큰 맥락 속에서, 어떻게 사역자가 그런 터무니없는 말을 할 수 있는지 궁금해할 것이다.

성경의 일관성(Scripture’s Consistency)

성경은 하나님의 묵시로 쓰인 것이기 때문에, 그 메시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적이다. 때문에 우리는 전후 맥락을 신뢰하여 특정 구절에서 나타내려는 하나님의 의도를 해석할 수 있다. 하나님은 한 구절에서 다른 구절과 충돌되게 말씀하시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런 경우가 있다면, 우리는 두 구절에 대한 우리의 해석이 조화될 때까지 공부를 계속해야 한다. 예를 들어, 예수님은 산상수훈 중 여러 곳에서, 구약 성경의 도덕적 율법에 모순되거나 심지어 그것을 수정하는 듯한 말씀을 하셨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또 눈에는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 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마 5:38-39).

예수님은 이 계명을 모세의 율법에서 직접 인용하신 후 그것과 모순되는 듯한 말씀을 하셨다.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하나님께서 기본적인 도덕성에 대한 마음을 바꾸셨는가? 복수하는 것이 구약에서는 허용하는 행위였지만, 신약에서는 아닌가? 문맥을 보면 우리한테 도움이 될 것이다.

예수님은 주로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는데(마 5:1-2을 보라), 그들이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접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는 회당에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의 가르침을 받는 것이었다. 거기에서 그들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하나님의 율법을 듣게 되는데 그 의미는 이미 문맥을 무시하고 가르치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새인들에 의해 왜곡된 후 였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항상 사소한 잘못에 대해 개인적인 복수를 하라는 뜻으로 그 계명이 해석되기를 원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사실, 모세의 율법에서 복수는 그분의 것이고(신 32:35을 보라), 사람은 마땅히 그들의 원수에게 선을 행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셨다(출 23:4-5을 보라). 그러나 율법 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은 그 계명을 무시하고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자기방식대로 해석하여, 그들에게 개인적인 복수를 할 수 있는 권리에 대해 편리를 주었다.[3] 그들은 문맥을 무시하였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하나님의 계명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법정에서 정의로운 재판이 이루어지게 하기 위해 주신 계명들 가운데서 발견된다(출21:22-24; 신 19:15-21을 보라). 하나님께서 재판제도를 세우신 자체가 개인적인 복수에 대해 기뻐하시지 않음을 보여준다. 증거를 조사하는 공정한 재판장은 피해를 당하거나 편견이 있는 개인들보다 정의를 훨씬 더 잘 행사할 수 있다. 하나님은 법정과 재판장들이 공정하게 범죄를 처벌할 것을 기대하신다. 따라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처음에 모순되는 것처럼 생각했던 것이 조화를 이룰 수 있게 된다. 예수님은 단순히, 삶 속에서 거짓 가르침을 받고 있던 그의 청중들에게, 이미 모세의 율법에 있지만, 바리새인들에 의해 왜곡된, 개인 복수에 대한 하나님의 진정한 뜻을 이해하도록 돕고 계셨다. 예수님은 그분이 모세에게 주신 율법을 어기지 않으셨다. 그분은 단지 그것의 원래 의미를 보여주셨을 뿐이다.

이것은 또한, 우리로 하여금 법정까지 갈 수 있는 큰 분쟁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바를 알게 해준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동료에 의해 받은 어떠한 피해나 고통도 그냥 넘어가기를 원하지 않으셨다, 그렇지 않으면 그분이 법정을 만드시지 않았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도 동료 신자(또는 불신자)에 의해 받은 어떠한 피해나 고통도 그냥 넘어가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신약 성경은 서로 화해 할 수 없는 그리스도인들은 동료 신자의 중재를 도움받을 수 있다고 하였다(고전 6:1-6을 보라). 그리고 큰 침해에 관해서 그리스도인과 불신자가 법정까지 가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다. 큰 침해란 당신의 눈 또는 이가 뽑힐 정도로 피해를 입는 것을 말한다! 사소한 침해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뺨을 맞거나, 또는 작은 일(옷 같은 것) 때문에 고소당하거나, 또는 1마일을 걷도록 강요당하는 것 같은 일을 말한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들이 그분을 본받고 무지한 죄인들과 악인들에게 특별한 은혜를 보여주기를 원하신다.

이 같은 사로 대로, 예수님께 순종한다는 생각으로, 일부 마음 좋은 신자들은 그들에게서 물건을 훔친 사람들에 대해 법적 고소를 거부하고 있다. 그들은 자기들이 “다른 뺨을 돌려대는” 줄로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도둑들이 다시 훔칠 수 있도록 방임하고 있으며 그들에게 범죄에 대한 결과가 없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은 같은 도둑에 의해 도난당한 다른 모든 사람을 향해 사랑으로 걸어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도둑들이 정의의 심판을 받고 회개하기를 원하신다. 하지만, 누군가 당신의 뺨을 때리는 것 같은 사소한 침해를 주었을 때에는 그를 법정에 고소하거나 다시 때리지 말고 그에게 자비와 사랑을 보여주라.

 

신약에 근거하여 구약을 해석하라(Interpreting the Old in Light of the New)

신약 성경을 구약 성경에 근거하여 해석할 뿐 아니라 구약 성경을 신약 성경에 근거하여 해석해야 한다. 예를 들어, 일부 신실한 신자들은 모세의 음식 법을 읽고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율법에 따라 자신의 식단을 제한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신약 성경의 두 구절만 읽었더라면 모세의 음식 법은 새 언약 아래에서는 적용되지 않음을 발견할 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 이는 마음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로 들어가 뒤로 나감이라 이러므로 모든 음식물을 깨끗하다 하시니라(막 7:18-19).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혼인을 금하고 어떤 음식물은 먹지 말라고 할 터이나 음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딤전 4:1-5).

새 언약 아래에서, 우리는 모세의 율법이 아닌, 그리스도의 율법을 따라야 한다(고전 9:20-21을 보라). 비록 예수님이 모세의 율법의 도덕적 측면을 분명히 인정하셨지만(따라서 그것을 그리스도의 율법안에 통합하셨다), 본인이나 사도들은 그리스도인들은 모세의 음식 법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고 가르치지 않으셨다.

그러나 초기 그리스도인이 모두 회심한 유대인이었으므로 그들의 문화적인 신념으로 말미암아 구약의 음식 법을 계속하여 지켰음이 분명하다(행 10:9-14). 그리고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기 시작하면서 초기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에게 모세의 음식 법을 지키도록 요구하였는데 이는 순전히 주변의 유대인들에 대한 배려로 말미암은 것이다(행 15:1-21을 보라). 따라서, 그들은 그 법을 지키는 것을 통하여 구원을 받는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모세의 음식 법을 지키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다.

초기 그리스도인 중 일부는 또한, 우상에게 제물로 바친 고기를 먹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바울은(자신처럼)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신자들에게 그들의 “믿음이 연약한” 형제들을 사랑으로 대하고, 그들이 양심의 가책을 받게 하는 일은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가르쳤다(롬 14:1을 보라). 만일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의 신념 때문에 특정한 음식을 먹지 않는다면(그런 신념이 근거가 없더라도), 그는 오해에 대한 심판보다는 헌신에 대한 칭찬을 받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개인적인 신념으로 특정한 음식을 먹지 않는 사람은 그 음식을 먹는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 두 부류의 사람은 마땅히 서로를 사랑으로 품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분명한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이다(롬 14:1-23을 보라).

성경은 점진적 계시되어 있기 때문에, 어떤 경우라도, 우리는 항상 가장 오래된 계시(구약 성경)는 가장 새로운 계시(신약 성경)에 근거하여 해석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계시한 것 중에 어느 것도 모순되는 것이 없으며 항상 상호 보완적이다.

문화적 그리고 역사적 배경(Cultural and Historical Context)

 

가능한 한, 우리는 또한, 우리가 공부하는 성경 구절의 문화적, 역사적 배경을 고려해야 한다. 성경 속의 한 상황이 처해 있는 독특한 측면인 문화적, 지리적, 역사적 배경에 대한 요해는 종종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놓쳤을 수도 있는 통찰력을 얻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 물론, 이것은 성경 외의 다른 책들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좋은 성경공부는 보통 이 방면의 도움을 포함한다.

다음은 성경을 읽을 때 역사적 또는 문화적 정보가 어떻게 우리로 하여금 혼란에 빠지지 않도록 도와주는지에 대한 몇 가지 예이다.

1.) 우리는 때때로 성경에서 사람들이 지붕에 올라가거나(행 10:9을 보라),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는 장면들을 보게 된다(막 2:4을 보라). 성경이 씌어질 당시 이스라엘에서 가정집의 지붕은 일반적으로 평평했고, 대부분의 집은 그 평지붕까지 올라갈 수 있도록 외부에 계단이 있었다는 것을 아는 것은 우리한테 도움이 된다. 만일 우리가 그 사실을 모른다면, 우리는 어떤 성경 인물이 지붕을 올라타고 굴뚝을 붙잡고 있는 모습을 상상할 수도 있다!

2.) 우리가 마가복음 11:12-14에서 예수님이 “무화과의 때”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무화과나무가 열매 없음을 저주하는 장면을 읽을 수 있다. 그것은 무화과나무가 제 계절이 아닐지라도 보통 몇 개의 열매는 맺는다는 사실을 안다면 예수님의 기대가 불합리하다고 여기지 않을 것이다.

3.) 우리는 누가복음7:37-48에서 한 여자가 예수님이 식사하고 계시는 한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갔음을 읽게 된다. 성경은 그녀가 예수님의 뒤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었다고 말씀한다. 우리는 예수님이 식탁 위에 앉아서 식사하시는 중에 어떻게 이런 일이 진행될 수 있었는지 궁금할 것이다. 그녀가 식탁 아래로 기어들어 갔을까? 그녀는 어떻게 식사하는 다른 사람들의 다리를 빠져나갔을까?

그 답은 “식탁에 기대어 앉으셨다”(눅 7:37, ESV)는 누가의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그 당시 사람은 식사할 때 낮은 식탁을 에워싸고 옆으로 누운 자세로 한쪽 팔로 몸을 받쳐 세우고 다른 팔과 손으로 음식을 먹었다. 예수님은 이 자세로 그 여자에게 향유를 부음 받았다.

이것은 또한, 우리가 최후의 만찬에서 요한이 예수님께 질문하려고 예수님의 품에 의지하여 누운 이유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요한은 예수님께 등을 돌린 상태로 그분의 옆에 누워 있다가 예수님의 품에 허리를 기대고 직접 질문하였을 것이다(요 13:23-25을 보라). 다빈치의 유명한 그림인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을 중심으로 식탁의 양쪽에 제자가 여섯 명씩 앉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화가의 성경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고 있다. 그는 역사적 배경을 알 필요가 있다!

의복에 대한 보편적인 질문(A Common Question About Clothes)

나는 종종 전 세계의 목사들로부터 이 같은 질문을 받는다. “성경에서 여자는 남자의 옷을 입지 못하도록 하고 있는데 그리스도인 여자는 바지를 입을 수 있습니까?”

이것은 우리가 일부 해석규칙들과 약간의 문화적 배경을 적용하여 대답할 수 있는 좋은 질문이다.

우선, 성경에서 여자가 남자의 옷을 입지 못하도록(남자도 여자의 옷을 입지 못한다)고한 말씀을 보도록 하자.

여자는 남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요 남자는 여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라 이같이 하는 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자이니라(신 22:5).

우리는 먼저 “이 계명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인가?”부터 질문해봐야 할 것이다. 여자가 바지를 입는 것을 금하는 것이 그분의 목표일까?

아니다, 그것은 그분의 의도일 수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이스라엘에는 바지를 입는 남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바지는 남성의 옷이나 사람의 옷으로 간주되지 않았었다. 사실, 사람들이 성경이 기록되었을 당시 남자들이 입은 의복들은 오늘날 대부분의 우리에게 있어서 더 많이는 여자 의복처럼 보였을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려는 바를 올바르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역사와 문화적인 정보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사람이 이성의 옷을 입는 것은 주님에 가증한 것임을 읽었다. 그것은 꽤 심각한 일이다. 만일 한 남자가 여자의 수건을 3초 동안 머리에 쓰고 있는다면, 그것만으로 그가 하나님께 가증스러운 존재가 될까? 아주 의심스럽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이성으로 보이려고 입는 것을 반대하셨을 가능성이 더 크다. 왜 사람들이 그런 짓을 하려고 할까? 그것은 사람들이 동성을 유혹하고 싶어하기 때문인데 이런 증상을 일명 복장도착증이라고 하는 데 성도착의 일종이다. 나는 우리가 그것이 왜 하나님께 가증한 것인지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한 여자가 복장도착자가 아닌 이상, 신명기 22:5을 근거로 그녀가 바지를 입는 것이 잘못됐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 그녀가 여자로 보이는 이상, 그녀가 바지를 입는 것은 죄가 되지 않는다.

물론, 성경은 여자들은 단정하게 옷을 입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으며(딤전 2:9을 보라), 몸에 꼭 맞고 노출이 심한 바지는(몸에 꼭 맞는 옷과 치마도 마찬가지다) 부적절하다고 가르치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남자들을 정욕에 빠지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많은 서양 국가들의 여성들이 공개적으로 착용하는 옷들은 완전히 부적절하며, 이런 옷들은 개발 도상국에서 매춘부들만 착용한다. 어떤 여성 그리스도인도 “섹시” 하게 보이기 위해 옷을 입지 말아야 한다.

몇 가지 그밖의 생각들(A Few Other Thoughts)

흥미로운 것은, 내가 종래로 중국의 목회자들로부터 여성이 바지를 입는 것에 관한 질문을 받은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대부분의 중국 여성들이 오랫동안 바지를 입어왔기 때문일 수 있다. 나는 단지 대부분 여성들이 바지를 입지 않는 나라의 목회자들로부터 여성과 바지에 관한 질문을 받았었다. 이것은 그들의 문화적 편견을 보여준다.

또한, 나를 흥미롭게 하는 것은, 남자들이 전통적으로 롱기라고 부르는, 우리에게는 치마처럼 보이는 의복을 입는 미얀마에서는 여성 사역자들이 종래로 이와 비슷한 질문을 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다시 한 번, 여성과 남성의 의류구성은 문화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우리의 문화적인 이해를 강요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나는 수많은 남자들이 신명기 22장5절 말씀에 따라 여자들이 바지를 착용하지 않기를 기대하면서도 왜 레위기 19장27절 말씀은 자신한테 적용하지 않는지 궁금하다.

머리 가를 둥글게 깎지 말며 수염 끝은 손상하지 말며(레 19:27).

어떻게 남자들이 자기들은, 레위기 19:27의 말씀을 거역하여, 그들을 여자들로부터 명확하게 구분시켜주는 하나님이 주신 수염을 모두 깎으면서, 남자처럼 보이기 위해 바지를 착용하는 여자들을 비난할 수 있는가? 그것은 조금 위선적으로 보일 수 있다!

부수적으로, 약간의 역사적인 자료는 우리가 레위기 19:27의 말씀 속에 담긴 하나님의 의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얼굴 주위의 수염을 깎는 것은 이교도의 우상 숭배 의식의 일부였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이 이방 우상에 헌신한 것으로 나타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누가 말하고 있는가?(Who is Speaking?)

우리는 항상 주어진 성경 구절에서 말하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유의해야 하는 데 그런 문맥에 관한 정보는 우리가 정확하게 해석하는 데 도움이 된다. 비록 성경의 모든 말씀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이지만, 성경 안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말씀은 아니다. 무슨 뜻일까?

성경의 많은 구절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사람의 말이 기록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 속의 사람들이 한 말들이 모두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욥과 그의 친구들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처럼 인용하는 오류를 범한다. 그것이 오류라고 하는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로, 욥과 그의 친구들은 서른네 장에 걸쳐 변론했다. 그들은 서로 다른 주장을 하였다. 하나님은 자신을 부정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분명한 것은 그들이 한 말들을 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만이라고 할 수 없다.

둘째로, 욥기의 마지막 부분에, 하나님 그분께서 말씀하시는데, 그분은 욥과 그의 친구들이 옳지 못한 말을 한 것에 대해 질책하셨다(욥38-42을 보라).

신약 성경을 읽을 때에도, 우리는 똑같이 주의하여야 한다. 바울은 자신의 서신 중, 몇 곳에서 어떤 부분은 자기만의 견해라고 명백하게 밝혔다(고전 7:12,25-26,40).

누구에게 한 말인가?(Who is Being Addressed?)

우리는 주어진 성경 구절에서 누가 말하고 있는지를 물어야 할뿐 아니라, 또한, 그 말은 누구에게 한 것인지를 주목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그것을 주의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해당하지 않는 것을 적용해야 한다고 잘못 해석할 수 있거나, 또는 우리에게 해당되는 말씀을 적용되지 않는다고 해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일부는 시편 37:4의 약속이 그들에게 적용된다고 주장한다.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시 37:4).

하지만, 그 약속은 그것을 읽거나 알고있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까? 아니다. 우리가 문맥을 읽어보면, 겨우 다섯 조건을 충족시키는 사람들에게만 적용됨을 알 수 있다.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 거리로 삼을지어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시 37:3-4).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에게 말한 것인가를 주목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다.

또 다른 예를 보자.

베드로가 여짜와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막 10:28-30).

일부 교회권에서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을 물질로 지원하는 사람은 “백배를 돌려받는다”고 주장하는 것이 유행하고 있다. 하지만, 이 약속이 그런 사람들에게 적용될까? 아니다. 이 약속은 예수님께 그와 다른 제자가 받을 상이 무엇인가 하고 여쭸던 베드로처럼,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실제로 가족, 전토, 집을 떠난 사람들에게 하신 것이다.

흥미롭게도, 항상 백배를 돌려받는다고 설교하는 사람은 초점을 주로 집과 전토에 두지, 자식이나 박해에 두지 않는다! 물론, 예수님은 집을 떠난 사람은 대가로 백 개의 주택을 보상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그들이 그들의 가족과 집을 떠나면, 그들의 새로운 영적인 가족들은 그들의 집을 개방하여 그들에게 숙박을 제공할 것이라는 뜻이다. 진정한 제자들은 소유권에 대해 신경 쓰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무것도 소유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 그들은 단지 하나님의 청지기일 뿐이다.

마지막 예(A Final Example)

 

사람들이 예수님의 “감람산 강론”으로 알려진 마태복음 24-25장의 말씀을 읽을 때, 일부는 그분이 구원받지 못한 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이라고 잘못 생각함으로써 그 말씀들이 자기들에게 아무런 적용거리가 없다고 결론 내린다. 그들이 악한 종의 비유와 열 처녀의 비유를 구원받지 못한 자들에게 하신 것처럼 생각하며 읽는다. 하지만, 내가 이미 말했듯이, 두 비유는 모두 예수님의 가장 가까운 제자 중의 일부에게 하신 것이다(마 24:3; 막 13:3을 보라). 그러므로 만일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는 그들이 예수님의 재림에 준비되어 있지 않을 가능성에 대해 경고받을 필요성이 있으며, 우리도 마찬가지다. 감람산 강론에서의 예수님의 경고는 모든 신자에게 적용되며, 또한, 예수님이 누구에게 말씀하신 것인지를 깨닫지 못함으로 인해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적용된다.

세 번째 규칙: 정직하게 읽기. 당신의 신학을 말씀에 강제적으로 주입하지 말라. 만일 당신이 믿는 것과 모순되는 말씀을 읽었다면, 그 말씀을 바꾸려 하지 말고, 당신이 믿고 있던 것을 바꾸라.

우리는 모두 사전에 형성된 편견을 가지고 성경에 접근한다. 그 이유 때문에, 우리는 종종 성경을 정직하게 읽기를 매우 어려워한다. 우리는 성경이 우리의 신학을 다듬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우리의 믿음을 성경 말씀에 강요하는 것으로 끝난다. 우리는 때론 심지어 우리의 교리를 뒷받침해줄 말씀을 성경에서 사냥하며 우리의 믿음과 위배되는 것은 무시한다. 이렇게 하는 것을 “제멋대로 갖다 붙이기”(proof-texting)라고 한다.

아래의 것은 내가 최근에 부딪힌 신학을 말씀에 강요한 사례이다. 한 교사가 먼저 예수님의 말씀인 마태복음 11:28-29을 읽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 11:28-29).

그리고는 교사는 계속하여 예수님이 두 가지 서로 다른 쉼을 주신다고 설명했다. 첫 번째 쉼(아마도)은 11장 28절의 구원을 받음으로 얻는 쉼이고, 두 번째 쉼은 11장 29절의 제자가 받는 쉼이라고 했다. 첫 번째 쉼은 예수님 나아 감으로 받고, 두 번째 쉼은 그분을 주님으로 삼거나, 그분의 멍에를 짐으로 받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것이 예수님이 의미하는 바일까? 아니, 말씀을 보면 그런 의미가 명시되지도 않았고 암시되지도 않았다. 예수님은 두 가지 쉼을 준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그분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에게 한 가지 쉼을 주시며, 그 쉼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님의 멍에를 지는 것이며, 그것은 바로 그분께 순종하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예수님의 명백한 의미이다.

왜 그 교사는 그러한 해석을 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그 말씀의 명백한 의미가 천국을 약속받은 그리스도인은 신자와 제자 두 가지 종류가 있다는 자신의 믿음과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이 말씀 구절을 정직하게 해석하지 않았다.

물론, 우리가 전에 이 책에서 인용한 많은 성경 말씀을 보면서 그 교사의 신학을 고려해보면 그의 해석은 예수님이 가르치신 나머지 부분과 맥락이 맞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약 성경 아무 데도 천국을 약속받은 그리스도인은 신자와 제자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가르쳐주지 않는다. 모든 진정한 신자들은 제자다. 제자가 아닌 사람은 신자도 아니다. 제자가 되는 것은 진정한 믿음의 열매이다.

우리 모두 순결한 마음으로, 정직하게 성경을 읽기 위해 노력하자. 만일 우리가 그렇게 하면, 그 결과 그리스도께 더 큰 헌신과 순종을 하게 될 것이다.

 


[1]분명한 것은, 바울은 무조건적인 영생보장을 믿지 않았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구원받은 디모데가 자신의 구원을 보장하기 위해서 뭔가를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2]모세도 하나님이 “지나가실” 때 그분의 등을 본 적이 한 번 있다. 하나님은 그분의 손으로 모세를 덮었다가 손을 거둠으로써 모세가 그분의 얼굴을 보지 못하게 하셨다. 출 33:18-23을 보라.

[3]또한, 예수님이 그분의 청중들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그들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좀전의 설교 중에 말씀하셨음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마 5:20을 보라). 예수님은 계속하여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구체적인 부족점을 드러내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