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7 장 (Chapter Twenty-Seven)

내세(The Afterlife)

대부분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이 죽을 때, 천국이 아니면 지옥에 간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천국이 의인의 최종 거주지가 아니며 음부가 악인의 최종 거주지가 아니라는 것을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이 죽을 때에, 그들의 영과 혼은 즉시 하나님이 거하시는 천국에 올라간다(고후 5:6-8; 빌 1:21-23; 살전 4:14을 보라). 그러나 미래의 어느 시점에 하나님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지으실 것이며 새 예루살렘이 하늘로부터 내려올 것이다(벧후 3:13; 계 21:1-2을 보라). 그곳에서 의인은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악인은 죽으면 즉시 음부로 내려간다. 그러나 음부는 그들의 몸이 부활할 때까지 일시적으로 대기하는 장소이다. 그 날이 되면,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이며 그다음에는 성경에서 게헨나라고 하는 불과 유황으로 불타는 호수에 던져질 것이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이 모든 것에 대해 더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악인이 죽을 때(When the Unrighteous Die)

악인이 죽은 후에 어떻게 되는지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구약 성경의 한 히브리어 단어와 신약 성경의 세 헬라어 단어를 공부해야 한다. 비록 이 히브리어와 헬라어 단어들이 실제로 세 가지 다른 장소를 설명하지만, 그것들은 어떤 성경에서 종종 모두 지옥으로 번역됨으로써 독자들에게 오해의 소지가 될 수 있다.

먼저, 구약 성경의 히브리어 스올에 대해 알아보자.

스올이란 단어는 구약 성경에서 60번 이상 언급되었다. 그것은 분명히 악인들의 죽음 뒤의 거처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고라와 그의 추종자들이 광야에서 모세를 거역했을 때, 하나님은 땅이 입을 열어 그들과 그들의 모든 소유물을 삼키게 함으로써 그들을 처벌하셨다. 성경은 그들이 스올에 빠졌다고 말씀한다.

그들과 그의 모든 재물이 산 채로 스올에 빠지며 땅이 그 위에 덮이니 그들이 회중 가운데서 말하니라(민 16:33, 강조 추가).

나중에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하나님은 스올에 그분의 진노의 불이 일어난다고 경고하셨다.

그러므로 내 분노의 불이 일어나서 스올의 깊은 곳까지 불사르며 땅과 그 소산을 삼키며 산들의 터도 불타게 하는도다(신 32:22, 강조 추가).

다윗 왕은 이렇게 선언하였다.

악인들이 스올로 돌아감이여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든 이방 나라들이 그리하리로다(시 9:17, 강조 추가).

그리고 그는 악인들을 대적하여 아래와 같이 기도하였다.

사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임하여 산 채로 스올에 내려갈지어다 이는 악독이 그들의 거처에 있고 그들 가운데에 있음이로다(시 55:15, 강조 추가).

현명한 솔로몬은 젊은이에게 창녀의 간계에 대하여 경고하였다.

그의 집은 스올의 길이라 사망의 방으로 내려가느니라…그 어리석은 자는 죽은 자들이 거기 있는 것과 그의 객들이 스올

깊은 곳에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잠 7:27; 9:18, 강조 추가).

솔로몬의 다른 잠언들은 우리로 하여금 의인은 결국 스올에서 끝장나지 않는다는 것을 믿게 한다.

지혜로운 자는 위로 향한 생명 길로 말미암음으로 그 아래에 있는 스올을 떠나게 되느니라(잠 15:24, 강조 추가).

네가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의 영혼을 스올에서 구원하리라(잠 23:14, 강조 추가).

마지막으로, 이사야는 지옥에 대한 예수님의 묘사를 예시하여 바벨론 왕에게 그가 스스로 높아지려 했지만 결국 스올에 떨어지게 됨을 말하였다.

아래의 스올이 너로 말미암아 소동하여 네가 오는 것을 영접하되 그것이 세상의 모든 영웅을 너로 말미암아 움직이게 하며 열방의 모든 왕을 그들의 왕좌에서 일어서게 하므로 그들은 다 네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도 우리 같이 연약하게 되었느냐 너도 우리 같이 되었느냐 하리로다 네 영화가 스올에 떨어졌음이여 네 비파 소리까지로다 구더기가 네 아래에 깔림이여 지렁이가 너를 덮었도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하는도다 그러나 이제 네가 스올 곧 구덩이 맨 밑에 떨어짐을 당하리로다 너를 보는 이가 주목하여 너를 자세히 살펴보며 말하기를 이 사람이 땅을 진동시키며 열국을 놀라게 하며 세계를 황무하게 하며 성읍을 파괴하며 그에게 사로잡힌 자들을 집으로 놓아 보내지 아니하던 자가 아니냐 하리로다(사 14:9-17, 강조 추가).

이런 말씀들과 이와 같은 다른 말씀들은 우리로 하여금 스올은 악인들이 죽은 뒤 고통받는 장소임을 믿게 해준다. 그리고 거기에는 더 많은 증거가 있다.

하데스(Hades)

신약 성경의 헬라어 하데스(Hades)는 구약 성경의 히브리어 스올(Sheol)과 같은 장소를 가리키는 것은 분명하다.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 우리는 시편 16:10과 사도행전 2:27을 비교하는 일만 남았다.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시 16:10, 강조 추가).

이는 내 영혼을 음부(Hades)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행 2:27, 강조 추가).

이로부터 보아, 신약 성경에서 하데스가 언급된 모든 열 번의 경우가 항상 부정적인 의미로 씌어졌으며 종종 악인들이 죽은 뒤 감금되어 고통당하는 장소로 씌어졌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마 11:23; 16:18; 눅 10:15; 16:23; 행 2:27; 2:31; 계 1:18; 6:8; 20:13-14을 보라). 다시 말하지만, 이 모든 것은 스올이나 하데스가 악인들이 죽은 뒤에 가는 곳이며 고통 받는 장소임을 보여준다.[1]

예수님은 스올이나 하데스에 가신 적이 있는가? (Did Jesus Go to Sheol/Hades?)

우리가 시편 16:10과 그것을 바울이 사도행전 2:27에 인용한 부분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두 곳에서 스올과 하데스는 같은 장소를 가리키고 있다. 베드로가 오순절 날 한 설교에 따르면, 다윗의 몸은 그리스도의 몸과는 달리 부패하기 때문에, 다윗은 시편 16:10에서 자신을 가리킨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예언적으로 가리킨 것이라고 하였다(행 2:29-31을 보라). 이 때문에, 우리는 시편 16:10은 실제로는 예수님이 그분의 아버지께 하신 말씀이며, 그분의 아버지가 그분의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그분의 몸이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선포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일부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 선언이 그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기 전 3일 동안, 그분의 영혼이 스올 또는 하데스에 갔었다는 증거로 해석한다. 그러나 그것이 암시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그분의 아버지께 하신 말씀을 다시 꼼꼼하게 살펴보라.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시 16:10).

예수님은 아버지께 “나는 내 영혼이 스올/하데스에서 며칠 보낼 것이지만 주께서 내 영혼을 그곳에 버리시지 않는다는 것을 믿습니다”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나는 내가 죽을 때, 주께서 나를 악인들을 대하듯이 나의 영혼을 스올/하데스에 버리시지 않는다는 것을 믿습니다. 나는 단 한 순간도 그곳에서 보내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당신께서 나를 사흘 만에 부활시키시며 나의 몸이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라고 말씀하셨을 것이다.

이 해석은 확실한 보증이 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을 예수님의 몸이 사흘 동안 점점 부패해지다가 부활하실 때에 회복된다고 해석할 수 없다. 오히려, 우리는 그 말씀은 그분의 몸이 죽으시고 부활하실 사이에 어떠한 부패도 겪은 적이 없음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마찬가지로, 그분의 영혼이 스올/하데스에 버려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분께서 스올/하데스에 며칠 동안 머무를 것이나, 궁극적으로 그곳에 버려지지 않는다고 해석할 필요가 없다.[2] 오히려, 그것은 그분의 영혼은 스올/하데스에 버려지는 악인들이 영혼처럼 취급되지 않는다는 의미로 해석 되어야 한다. 그분의 영혼은 그곳에서 단 일 분도 머무르지 않으실 것이다. 또한, 예수님은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 버리지 아니하시며”라고 말씀하셨지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안에 버리지 아니하시며”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음을 주목하라.

이 사흘 동안 예수님의 영혼은 어디에 계셨을까? (Where Was Jesus’ Soul During the Three Days?)

예수님께서 그분은 사흘 동안 땅속에 계실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마 12:40을 보라). 그분의 몸이 사흘 동안 무덤 속에 있었다고 보는 것은 합당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무덤을 “땅속”으로 간주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오히려, 예수님은 그분의 영혼이 땅속 깊은 곳에 계셨음을 뜻하셨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의 영혼이 죽으시고 부활하시기 전까지는 천국에 계신 것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을 때 마리아에게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다”(요 20:17을 보라)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이 점을 확인하셨다.

예수님은 또한 십자가에서 회개한 도둑에게 그날 그가 그분과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라고 알려주셨음을 명심하라(눅 23:43을 보라). 이러한 사실들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영혼이 땅속에서 밤낮 사흘 동안 계셨음을 알 수 있다. 그분은 그 동안 적어도 얼마 동안은 “낙원”이라 부르신 곳에 계셨다. 이 곳은 확실히 고통받는 곳인 스올이나 하데스와 같아 보이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은 나로 하여금 땅속에 스올/하데스 외에 반드시 낙원이라는 곳이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이 생각은 예수님께서 어느 한 번 하신 불의한 사람과 의로운 사람, 부자와 나사로에 관한 이야기에 의해 뒷받침된다.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그가 음부(하데스)에서 고통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수도 없게 하였느니라(눅 16:19-26, 강조 추가).

물론, 나사로와 부자 모두가 죽은 뒤에 몸속에 있지 않고 영/혼으로 그들이 가야할 곳으로 갔다.

나사로는 어디에 있었는가? (Where Was Lazarus?)

부자는 자신이 음부(하데스)에 있음을 발견 하지만, 아브라함과 같이 다른 장소에 있는 나사로를 볼 수 있었음을 주목하라. 사실, 나사로는 어떤 장소가 아닌 “아브라함의 품”에 있었다고 했는데 그것은 가능하게 나사로가 그곳에서 아브라함의 위로를 받았음을 나타내려는 것 같다.

부자와 나사로가 죽은 후, 그들 사이의 거리는 얼마나 되었을까?

성경에서 부자는 나사로가 멀리 있는 것을 보았다고 했으며 그들 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들 사이의 거리는 추측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들 사이의 거리가 땅속에서 천국까지의 거리만큼은 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인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부자가 (신적인 도움이 없이는) 나사로를 볼 수가 없을 것이며, 두 곳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다는 언급을 하여 누구도 두 곳 사이를 오갈 수 없음을 밝힐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또한, 부자는 아브라함을 향해 울부짖었고 아브라함은 그에게 대답하였다. 그들이 “큰 구렁텅이”를 사이 두고 서로 대화할 수 있었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두 곳 사이가 매우 가까웠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이 모든 것은 나로 하여금 나사로가 우리가 천국이라 부르는 곳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땅속의 독립된 곳에 있었다는 것을 믿게 한다.[3] 이 곳은 예수님이 회개한 도둑에게 말씀하셨던 낙원이라 불리는 곳이었음에 틀림없다. 그것은 구약 속의 의인들도 죽은 후에 땅속의 낙원으로 갔다. 그 곳은 나사로가 간 곳이며 예수님과 회개한 도둑이 간 곳이었다.

선지자 사무엘도 죽은 후에 그 곳에 갔음이 명백하다. 사무엘상 28장을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죽은 선지자 사무엘의 영이 사울에게 나타나서 예언하게 허락하실 때, 엔돌의 여인은 사무엘을 “땅에서 올라온 영”(삼상 28:13, 강조 추가)으로 묘사하였다. 사무엘 자신도 사울에게 “네가 어찌하여 나를 불러 올려서 나를 성가시게 하느냐?”(삼상 28:15, 강조 추가)라고 말했다. 분명히, 사무엘의 영/혼은 땅속의 낙원에 갔었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부활 때 낙원이 비워지고 구약 시대에 죽은 의로운 사람들이 예수님과 함께 천국에 올라갔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것 같다. 성경은 예수님이 땅의 낮은 곳에서 천국으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혔던 자들을 사로잡으셨다”고 말씀한다(엡 4:8-9; 시 68:18). 나는 그 사로잡혔던 자들이 낙원에서 살던 모든 사람들이라는 가정을 했다. 예수님은 당연히 스올/하데스의 사람들은 풀어주시지 않았을 것이다![4]

예수님은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설교하셨다(Jesus Preached to Spirits in Prison)

성경은 또한 예수님께서 죽음과 부활사이의 어느 시점에서 육체를 떠난 영들에게 설교하셨다고 우리에게 알려준다. 베드로전서 3장에서 다음의 말씀을 읽게 된다.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벧전 3:18-20).

이 성경 말씀들은 분명히 내가 해답을 가지고 있지 않는 몇 가지 문제를 제기한다. 왜 예수님은 특별히 노아의 홍수 때 죽은 일부 불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선포하셨을까? 예수님은 그들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을까?

어쨌든,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부활까지 밤낮 사흘 동안 낙원에서 보내지 않았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것 같다.

게헨나(Gehenna)

오늘날, 의로운 사람들이 죽을 때에는 그들의 영/혼은 천국으로 바로 올라간다(고후 5:6-8; 빌 1:21-23; 살전 4:14를 보라).

불의한 사람들은 여전히 스올/하데스에서 고통당하고 몸의 부활과 최종 심판, 그리고 스올/하데스와는 다르고 구별된 “불못”에 던져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이 불못으로 묘사된 단어는 자주 지옥으로 번역되는 세 번째 헬라어 단어 게헨나이다. 이 단어는 예루살렘의 외곽에 위치한 힌놈 골짜기의 쓰레기장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그곳은 벌레와 구더기가 욱실거리는 쓰레기 더미이며 어떤 곳은 끊임없이 불타고 연기 난다.

예수님이 게헨나를 말씀하셨을 때, 그분은 사람의 몸이 던져질 장소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다. 예를 들어, 그분은 마태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또한 만일 네 오른 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 5:30, 10:28, 강조 추가).

게헨나와 하데스는 동일한 장소가 아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악인은 몸을 떠난 영/혼의 형태로 하데스에 간다고 말씀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천 년 동안 다스리신 후에야만, 악인들은 몸이 부활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후 불못 또는 게헨나에 던져지게 된다(계 20:5, 11-15을 보라). 또한, 하데스 자체도 언젠가는 불못에 던져지게 된다(계 20:14을 보라). 그러므로 하데스는 반드시 불못이 아닌 다른 장소여야 한다.

타르타로스(Tartaros)

성경에서 지옥으로 번역되는 네 번째 단어는 헬라어 타르타로스이다. 신약 성경에서 그 단어를 단 한 번만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벧후 2:4).

타르타로스는 일반적으로 죄를 지은 천사들을 위한 특별한 감옥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그것은 스올/하데스 또는 게헨나가 아니다. 유다 또한 결박당한 천사에 대해 썼다.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유 1:6).

지옥의 공포(The Horrors of Hell)

회개하지 않은 사람이 죽으면, 그는 더 이상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한다. 그의 운명은 봉인되었다. 성경은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히 9:27)고 말씀한다.

지옥은 영원한 것이기에 거기에 갇혀 있는

사람들은 탈출할 희망이 없다. 악인에 대한 미래의 심판에 대하여 예수님은 “그들은 영벌에, 의인은 영생에 들어가리라”(마 25:46, 강조 추가)라고 말씀하셨다. 악인이 지옥에서 받게 되는 형벌은 의인이 받게 되는 영생만큼 영원하다.

마찬가지로, 바울은 이렇게 썼다.

너희로 환난을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환난을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자기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살후 1:6-9, 강조 추가).

지옥은 끝없는 형벌이기에 그곳은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의 장소이다. 그곳에 영원히 갇힌 악인들은 영원한 죄책감을 안고 꺼지지 않는 불속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겪게 된다 .

예수님은 지옥은 “바깥 어두운 데”이며, “울며 이를 갈게 될” 곳이며, “거기에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마 22:13; 막 9:48)고 말씀하셨다. 아, 우리가 사람들에게 그곳에 대하여 경고하고 그리스도에게만 구원이 있음을 알리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가!

어떤 교단에서는 연옥의 개념에 대하여 가르치는데 그 곳에서 신자는 한동안 고통을 받음으로써 자신의 죄를 제거하고 천국에 합당한 존재가 된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에 대한 가르침은 성경 아무곳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죽음 후의 의인(The Righteous After Death)

신자가 죽을 때에, 그의 영혼은 즉시 천국에 올라가며 주님과 함께 있는다. 바울은 자신의 죽음에 대해 쓸 때 이 사실을 분명하게 썼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빌 1:21-23, 강조 추가).

바울은 자신이 세상을 떠나기를 원하며 세상을 떠나면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될 것이라고 말했음을 주목하라. 그의 영혼은 어떤 무의식 상태에 빠져 부활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불행하게도 일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한다).

또한, 바울은 그에게 있어서 죽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고 말했음을 주목하라. 하지만 그가 죽은 후에 천국에 갈 수 있을 때에만 그럴 것이다.

바울은 또한 고린도에 쓴 두 번째 서신에서 만일 신자의 영혼이 그의 몸을 떠나면, 그는 “주와 함께 있게 된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으로 있을 때에는 주와 따로 있는 줄을 아노니…우리가 담대히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고후 5:6-8).

더 나아가서, 바울은 이렇게 썼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살전 4:13-14).

만일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자는 자들과 함께 오시려면, 그들은 반드시 지금 그분과 함께 천국에 있어야 한다.

천국에 대한 예견(Heaven Foreseen)

천국은 어떤 모습일까? 우리의 유한한 생각으로는 결코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영광을 모두 파악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성경은 우리에게 천국에 대해 흘끗 보여주었을 뿐이다. 신자들에게 있어서 천국에 대한 가장 흥미로운 사실은 우리가 주님과 구주가 되신 예수님과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아버지의 집”에 살게 될 것이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2-3).

우리가 천국에 가면, 우리의 마음은 지금은 이해할 수 없는 많은 신비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바울은 이렇게 썼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요한 계시록은 우리에게 천국의 모습에 대한 최고의 그림을 보여주었다. 천국은 축제와 아름다움, 무한한 변화, 그리고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충만한 곳으로 묘사되었다. 천국은 사람들이 종일 구름 위에 앉아서 하프나 치는 곳이 아니다!

천국에 대한 비전을 보여준 요한은 제일 먼저 하나님의 보좌, 우주의 중심을 주목하였다.

내가 곧 성령에 감동되었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또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쓰고 앉았더라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우렛소리가 나고 보좌 앞에 켠 등불 일곱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뒤에 눈들이 가득하더라 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데 네 생물은 각각 여섯 날개를 가졌고 그 안과 주위에는 눈들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시라 하고 그 생물들이 보좌에 앉으사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돌릴 때에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리며 이르되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음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계 4:2-11).

요한은 지구 위의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천국을 땅의 언어로 설명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직접 천국을 직접 보기 전 까지는 모든 것을 다 이해할 방법이 없다. 그러나 요한의 기록은 확실히 그것을 읽는 사람에게 영감을 줄 것이다.

천국에 관한 말씀 중 가장 감격스러운 구절은 요한 계시록 21장과 22장에서 요한이 새 예루살렘을 묘사하는 부분이다. 새 예루살렘은 현재는 천국에 있지만, 그리스도의 천 년 통치 후에 이 땅에 내려올 것이다.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두 천사가 있고 … 내게 말하는 자가 그 성과 그 문들과 성곽을 측량하려고 금 갈대 자를 가졌더라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길이와 너비가 같은 지라 그 갈대 자로 그 성을 측량하니 만 이천 스다디온이요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같더라…그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그 열두 문은 열두 진주니 각 문마다 한 개의 진주로 되어 있고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라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이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21:10-22:5).

예수님의 모든 추종자들은 계속하여 믿음을 지킨다면 이 모든 경이로움을 기대할 수 있다. 의심할 여지 없이, 우리는 천국에서 서로에게 “아! 이것이 바로 요한이 계시록에서 설명하려고 했던 것이었구나!”라고 말하면서 며칠 동안 보낼 것이다.

 


[1]어떤 사람들은 창세기 37:35, 욥기 14:13, 시편 89:48, 에스겔 9:10과 이사야 38:9-10과 같은 성경 말씀에 근거하여 의인도 죽은 후에 음부에 내려간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런 주장에 사용된 성경 구절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만일 음부가 악인과 의인이 죽은 후에 모두 가는 곳이라면, 음부는 반드시 두 개의 별도의 장소가 있어야 하는데 한 곳은 지옥이고 한 곳은 낙원이어야 한다. 이것은 이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이다.

[2]이 해석에 동의하지 않는 자들은 다음 두 이론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 한 가지 이론은 스올/하데스는 악인 의인의 죽은 후의 거처인데 두 구획으로 나뉘며 한 곳은 고통받는 곳이고, 한 곳은 예수님이 가셨던 낙원이라는 것이다. 다른 한 가지 이론은 예수님이 3일 동안 밤낮 저주를 받아 고통당하여 우리를 대신하여 죄의 형벌을 받으셨다는 것이다. 이 두 이론은 모두 성경에서 증거를 찾기 어렵다. 그리고 예수님이 스올/하데스에서 가신 적이 없다면, 이 두 이론은 모두 필요 없게 된다. 그것이야말로 그분의 선언이 실제로 의미하는 것이다. 두 번째 이론에서처럼 예수님은 죽음과 부활 사이에 3일 동안 밤낮 고통을 당하시지 않았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분께서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으로 속량받은 것이지 스올/하데스에서 받은 고통으로 속량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골 1:22을 보라).

[3]나사로와 부자가 모두 그들의 몸에서 분리하였지만 모두 의식이 있었고 시각, 촉각, 청각과 같은 모든 기능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주목하라. 그들은 고통과 편안함을 경험할 수 있고 과거의 경험을 기억할 수 있었다. 이것은 사람이 죽으면 무의식 상태로 들어가며, 몸이 부활할 때 의식을 되찾는다는 “영혼이 잠잔다”는 이론을 반증한다.

[4]일부 사람들은 에베소서 4:8-9에서 말한 사로잡혔던 자들이 죄에 사로잡혔지만, 지금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하여 자유롭게 된 우리 모두를 가리킨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