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교회(House Churches)

제4장(Chapter Four)

사람들이 처음으로 가정교회에 대해 들었을 때, 그들은 종종 가정교회와 제도적인 교회 사이의 유일한 차이점은 크기와 “사역”을 제공하는 상대적인 능력이라고 잘못 생각할 수 있다. 사람은 가끔 가정교회는 건물 교회에서 제공하는, 질 높은 사역을 제공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사역”의 정의가 제자가 되도록 돕고, 그들이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예수님을 섬기도록 도와주는 것이라고 한다면 제도적 교회는 이점이 없을 뿐 아니라 내가 이전 장에서 지적한 것처럼, 그런 교회의 조건은 더 나쁠 수 있다. 물론 가정교회가 다원적인 측면의 활동을 제도적 교회만큼의 수량은 제공할 수 없지만, 진정한 사역은 뛰어나게 제공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가정교회가 단지 실제 교회 건물이 없다는 이유로 진정한 교회로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한다. 그 사람들이 교회의 첫 삼백 년 사이에 살았었다면, 전 세계의 모든 교회를 거부했을 것이다. 사실, 예수님은 이렇게 선언하셨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 예수님은 신자들이 어느 곳에 모이라는 말씀을 하시지 않았다. 그리고 두 명의 신자들이 있더라도 그분의 이름으로 모이면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레스토랑에서 종종 식사하고, 진리에 대해 나누고, 서로를 가르치고 권면하는 모습이 일요일 아침에 많은 교회 건물 안에서 진행되는 일보다 실제로 신약의 교회 모식에 더 가깝다.

이전 장에서는, 나는 가정교회가 제도적 교회가 갖고 있지 않는 장점 일부를 열거했다. 나는 가정교회 모식이 제자를 삼는 목표를 달성함에 있어서 매우 효과적인 성경적인 대안임을 말해주는 이유를 몇 가지 더 열거하면서 이번 장을 시작하고 싶다. 그러나 말하기에 앞서 첫째로 나의 목적이 제도적 교회와 목사들을 공격하려는 것이 아님을 천명하고 싶다. 제도적 교회에는 많은 경건하고 성실한 목사가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자신의 구조 내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 나는 해마다 수천 명의 제도적 교회의 목사들을 향한 사역을 하고 있으며 개인적으로 그들을 많이 사랑하고 좋게 생각하고 있다.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들에 속한다. 나는 그들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잘 알고 있기에 그들의 고통을 줄여주는 동시에 보다 효과적이고 행복한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가정교회 모식은 성경적이며, 제자들을 삼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할 수 있다. 나는 제도적 교회 목사들의 대다수가 가정교회 모식으로 사역하면 더 효과적이고, 훨씬 더 행복해하고, 더 많은 것을 이룩하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나는 제도적 교회에서 20년 넘게 목사로 사역했으며, 그동안 나는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으로 최선을 다 해 왔다. 그러나 몇 개월 동안에 걸쳐 많은 교회의 주일예배를 방문한 뒤, 나는 처음으로 평신도로 교회에 다닌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나의 눈을 뜨게 했고, 나는 왜 수많은 사람이 이렇게 열정 없이 교회에 다니는지를 이해하기 시작하였다. 목사를 제외한 거의 모든 사람처럼 나도 정중하게 앉아 예배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예배가 끝난 뒤, 나는 적어도 지루하게 구경하기보다 참가자로 다른 사람들과 상호 교통할 수 있었다. 그 때 경험은 나로 하여금 더 나은 대안에 대해 생각하게 한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 나는 가정교회 모식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고 놀랍게도 전 세계에 가정교회가 수백만 개나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했으며 가정교회는 제도적 교회보다 몇 가지 확실한 장점을 갖고 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이 책을 읽는 목사들의 대부분은 가정교회가 아닌 제도적 교회를 관리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내가 쓴 많은 내용을 그들이 처음부터 중요하게 받아들이기에는 어려움이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이 자신에게 시간을 주어 내가 할 수밖에 없었던 말들을 고민해보기를 바란다. 나는 그들이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나는 목사들을 위하여 이 책을 썼으며, 그들과 그들의 교회에 대한 사랑에 의해 쓰게 되었다.

성경 속의 유일한 종류의 교회 (The Only Kind of Church in the Bible)

첫째로, 신약에는 특별한 건물에서 모이는 제도적 교회가 없었으나 가정교회는 명확하게 초대 교회의 표준이었다.

깨닫고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에 가니 여러 사람이 거기에 모여 기도하고 있더라(행 12:12).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분명히 교회건물이 아닌 곳)에서나 각 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행 20:20, 강조 추가)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또 저의 집에 있는 교회에도 문안하라(롬 16:3-5을 보라; 롬 16:14-15에서도 로마에 있는 또 다른 두 개의 가정교회인듯한 교회들을 언급하고 있다.)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고전 16:19).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들과 눔바와 그 여자의 집에 있는 교회에 문안하고(골4:15).

자매 압비아와 우리와 함께 병사 된 아킬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 편지하노니(몬 1:2).

초대 교회가 건물을 짓지 않은 유일한 이유가 그것이 초기 단계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논쟁이 지속하였는데 신약 성경의 역사기록에 따르면 초기 단계는 몇십 년 동안밖에 지속하지 않았었다(그리고 두 세기 이상 존속하였다). 그러므로 만일 교회 건물이 교회 성숙의 표시라면, 우리가 사도행전에서 읽었던 사도들의 교회는 종래로 성숙해본 적이 없는 셈이다.

나는 어느 한 사도도 교회 건물을 짓지 않은 이유는 그들이 최저한도로 이런 일은 하나님의 뜻을 벗어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그러한 모본이나 지시를 우리한테 남겨주신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특별한 건물이 없이 제자를 삼았고, 그는 제자를 삼으라고 그의 제자들에게 말했다. 그들은 특별한 건물에 대한 필요성을 못 느꼈을 것이다. 이것은 바로 이렇게 간단하다. 예수님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세상으로 나아가서 제자를 삼으라고 하셨을 때, 그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건물을 짓고 일주일에 한 번씩이 사람들에게 설교하는 것이다”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또한, 특별한 건물을 건설하는 것은, 이 땅에 보물을 쌓지 말고 완전히 불필요한 무언가에 돈을 낭비하지 말고, 사람의 생명을 변화시키는 사역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하나님 나라의 자원을 훔치지 말라는 그리스도의 계명을 직접적으로 위반하는 것으로 간주하였을 수도 있다.

성경적 청지기(Biblical Stewardship)

이 생각은 가정교회가 제도적 교회를 능가하는 두 번째 장점으로 연결해준다. 가정교회 모식은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 자원의 영적인 청지기가 되는 것을 제창하는 데 이는 확실히 제자도의 매우 중요한 측면이다.[1] 교회 건물을 소유하고, 임대하고, 수리하고, 확장하고, 재구축하고, 난방 또는 냉방 하기 위해 돈을 낭비하지 않는다. 따라서, 건물에 낭비될 뻔했던 돈들이 사도행전 때 사람들이 사용했던 처럼, 가난한 자들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제공하고, 복음을 전파하고, 제자를 삼는 데 사용될 수 있다. 교회 건물에 소요되는 수십억 달러가 복음을 전파하고 가난한 자들을 위해 사용된 경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얼마나 큰일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라! 거의 상상할 수 없다.

또한, 인수가 20명이 안 되는 가정교회 내에 성숙한 신자들이 있다면 실제로 “장막을 만드는”(곧 지불받지 않는) 장로/목사/감독들에 의해 감독 될 수 있다. 이러한 교회 운영에는 돈이 거의 필요 없다.

물론, 성경 말씀은 장로/목사/감독들은 자신의 노동에 비례하여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는 것 같다. 이 때문에 전직 사역자들은 응당 생계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돈을 받아야 한다(딤전5:17-18을 보라). 가정교회에서 10명이 십일조 헌금을 하면 한 명의 전직 목사가 평균수준의 생활을 유지할 만큼 지원할 수 있게 된다. 가정교회에서 5명의 십일조 헌금은 한주 노동시간의 절반을 헌신할 수 있는 목사를 확보할 수 있다.

가정교회 모식을 따르면 건물에 사용될 돈이 목회자를 지원하기 위해 쓰일 수 있으므로 제도적 교회 목사가 가정교회의 확산이 자신들의 직업을 위협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대신에, 많은 형제자매들이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속에 이미 심어놓은 소원 즉 직업을 갖고 사역하라는 것을 인식할 수 있음을 의미할 수도 있다.[2] 결과적으로, 그것은 제자를 삼는 목표를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또한, 20명의 직업인으로 구성된 가정교회는 잠재적으로 그 수입의 절반을 밖으로 사역하고 가난한 자들을 돕는데 사용할 수 있다.[3]

만일 제도적 교회가 가정교회의 네트워크로 전환하는 경우, 자신의 일자리를 잃을 수 있는 사람은 교회 행정 및 프로그램 지원 직원일 것이며 아마도 일부 전문 부처직원(예를 들어, 큰 교회의 어린이나 청소년 목사)들은 성경적 근거가 있는 사역과 성경적 근거가 미약한 사역을 바꾸기를 꺼린다. 가정교회는 어린이나 청소년 목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부모들은 성경에서 그 책임을 부여받았고, 가정교회의 사람은 일반적으로 문화적 기독교 규범보다는 성경을 따르기 위해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믿지 않는 부모를 둔 청소년도 제도적 교회에 가입되듯이 가정교회에 가입되고 제자로 훈련받을 수 있다. 혹시 왜 “청소년 목회자” 또는 “어린이의 목회자”가 신약에 언급되지 않았는지 궁금한가? 이러한 사역들은 기독교 역사상 첫 1900년까지는 존재하지 않았었다. 그런 사역들이 왜 지금 부유한 서구 국가에서 갑자기 필수적이 되었을까?[4]

마지막으로, 특별히 가난한 나라들에서, 목회자들이 서양에 기독교인들의 보조를 받지 않고서 교회 건물을 임대하거나 소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의존성은 많은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를 낳았다. 사실은, 300년 이래 기독교에는 이런 문제가 존재하지 않았다. 만일 당신이 개발도상국에 있는 목사이고, 당신의 회중이 교회 건물을 지급할 능력이 없는 상황이라 해도, 방문 온 미국인들에게 지원받으려는 희망으로 아첨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이미 당신의 문제를 해결했다. 당신은 정말로 성공적으로 제자를 삼기 위해 교회 건물이 필요하지 않다. 성경 모식을 따르라.

조각난 가족들의 최후(The End of Fragmented Families)

가정교회가 가진 또 다른 장점은 어린이와 청소년을 제자로 훈련시키는 것에 뛰어나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침투된 제도적 교회들(특별히 미국의 큰 교회들)의 가장 큰 거짓말 중 하나는 바로 그들이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훌륭한 사역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흥미로운 어린이와 청소년 사역에 참석한 어린이들의 대다수가 “둥지를 떠난” 후에 다시는 교회에 돌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숨기고 있다. (아무 청소년 목회자에게 이 통계수치에 대해 물어보라 – 그 사람은 이 상황에 대해 알아야 한다.)

또한, 청소년 목회자와 어린이의 목회자들이 있는 교회들은 계속해서 부모들에게 그들은 자녀의 영적 훈련에 대한 능력이 없고 책임도 없다는 거짓말을 침투시키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가 당신들의 자녀들의 영적 훈련을 책임질 것이다, 우리는 훈련된 전문가들이다.”

이 같은 사역체계는 계속하여 늘어나는 타협의 순환을 형성하기 때문에 실패하기 마련이다. 이런 일은 부모가 자신의 자녀가 즐길 수 있는 교회를 찾는 데서 부터 시작된다. 만일 한 아이가 집으로 가는 길에 교회에서 재미있었다고 한다면 부모들은 감격해 마지 않는데, 그것은 그들이 아이가 교회에서 즐거웠다는 것과 그 아이가 영적인 일에 흥미를 느꼈다는 것을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종종 이런 잘못된 생각을 한다.

성공 중심의 담임목사들은 그들의 교회가 성장하기를 원하며, 따라서 어린이와 청소년 목회자들도 종종 회의 중 동역자들에게 아이들이 생각하기에 재미있는 “관련”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한다는 압력을 느끼게 한다. (“관련”은 “재미”에 비해 항상 부차적이고, “관련”은 반드시 “아이들을 회개, 믿음, 예수님의 계명에 대한 순종으로 인도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만일 아이들이 이런 프로그램을 좋아하게 되면, 순진한 부모들은(그들의 돈과 함께) 교회에 나오게 되며, 교회는 따라서 커지게 된다.

특히 청소년 그룹의 성공 여부는 출석 인수에 의해 측정된다. 청소년 목회자들은 출석률을 높이기 위해 그들이 할 수 모든 일을 하게 되며 이는 종종 진정한 영성을 외면하게 된다. 부모들이 자신의 아이가 청소년 목회자의 메시지가 지루하고 정죄 적이라고 불평한다며 담임목사에게 고발하는 것을 듣게 되는 청소년 목회자는 참으로 불쌍하다.

하지만 청소년 목회자들에게 있어서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가정교회의 지도자가 되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른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이미 좋은 관계성 기술과 젊음의 열정과 충만한 정력을 갖고 있다. 그들 중 많은 사람이 청소년 목회자로 있는 이유는 청소년 목회자가 점차 담임목사가 되는데 필요한 초 인간적인 기술을 습득하기 위한 첫 번째 단계이기 때문이다. 그들 중 대부분은 가정교회를 목회하기에 충분한 능력이 있다. 그들이 청소년 그룹에서 해왔던 사역들이 교회 성전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보다 더 성경적인 교회모식에 가까울 수 있다! 동일하게 어린이 목회자들에게도 말할 수 있다. 그들은 어린이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이 작은 원을 이루어 함께 음식을 나누는 가정교회에서 담임목사보다 훨씬 더 잘 섬길 수 있을 것이다.

어린이와 청소년들은 자연적으로 가정교회에서 제자로 더 잘 훈련받는다. 가정교회에서 그들은 진정한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체험하고, 참여와 질문의 기회를 갖게 되며 기타 연령층의 사람들과의 교제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의 가족의 일원이 될 수 있다. 제도적 교회에서 그들은 지속적으로 큰 쇼와 “재미”를 주는 것들에만 노출되어 있어 진정한 공동체 생활을 체험하기 어렵다. 그들은 보편적인 위선에 익숙해 있으며, 학교에서처럼 자신의 동료에 관한 것만 배운다.

그러나 모든 연령층이 다 있는 모임에서, 울고 있는 아기나 진정 못하는 어린아이들은 어떻게 할까?

그들은 항상 즐길 수 있어야 하며, 문제가 될 때에는 실제 단계를 거쳐 해결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그들을 다른 방으로 옮겨 즐겁게 놀아주거나, 또는 크레용과 종이를 주어 바닥에서 색칠하게 할 수 있다. 가정교회 모임에서, 아기와 아이들은 문젯거리가 아니며 낯선 사람한테 맡기지 않아도 된다. 그들은 가정교회 가족 안의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제도적 교회에서 울기 시작한 아기는 종종 예배의 형식에 영향을 주며 이로 말미암은 낯선 사람들의 아기를 향한 뜨거운 눈총은 부모들을 난처하게 만든다. 가정교회에 울기 시작한 아기는 그의 가족들에 둘러싸여 있어 아무도 그들이 안았었던 하나님의 작은 선물이 그들 가운데에 있음을 알리는 것을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아이들을 통제 못 하는 부모들은 그들이 알아야 할 것을 다른 부모들에 의해 부드럽게 가르쳐 질 수 있다. 다시 한 번 신자들은 진정으로 보살펴주는 관계속에 있다. 그들은 제도적 교회에서 자주 일어나는 것과 같이 서로에 대해 험담하지 않는다. 그들은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사랑해 준다.

기쁜 목사들(Happy Pastors)

20여 년간 교회에서 목회하면서, 전 세계 수만 명의 목회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또 많은 목회자들과 개인적으로 친구가 되면서, 나는 내가 현대 교회를 목회하는 데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제도적 교회의 모든 목사처럼 나도 사역의 “어두운 면”을 경험했다. 어떤 때에는 매우 암흑할 수 있다. 사실, “잔인하다”라는 표현이 그것을 더 잘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대부분의 목회자는 사람들의 기대 때문에 자연스럽게 놀라운 압력을 받고 있으며 때로는 자신의 가족관계까지 파괴한다. 목사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낙담한다. 그들은 정치인, 판사, 고용주, 심리학자, 활동 감독자, 건설 계약자, 결혼 상담가, 대중 강사, 관리자, 심리 전문가, 행정가여야 한다. 그들은 종종 자신이 그리스도의 몸의 더 큰 조각을 얻기 위해 다른 목회자와 치열한 경쟁 속에 있음을 발견한다. 그들에게는 개인적인 영성훈련을 위한 시간이 거의 없다. 그들 중 대부분은 자신의 직업에 갇혀 있으며 봉급이 적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회중은 그들의 고객이자 고용주이다. 어떤 때에는 그 고용주들과 고객들이 목회자의 삶을 아주 어렵게 할 수도 있다.

비교해보면, 가정교회 목사는 쉬운 축이다. 첫째, 만일 그가 진정한 제자로서 본이 되는 삶을 살고, 예수님의 계명에 타협이 없는 순종을 가르치면, 아주 적은 무리의 염소들만이 그 그룹의 일부가 되는 것에 관심을 두게 될 것이다. 사실, 가정집에서 모임을 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염소가 떠나게 하는 데 충분하다. 그렇게 함으로 그는 온전한 양들만을 목양할 수 있다.

둘째로, 그는 자기의 모든 양을 개개인의 수준으로 사랑하고 제자 삼을 수 있다. 그가 감독하는 성인은 12-20명뿐이기 때문이다. 그는 가족의 아버지처럼 그들과 함께 진실한 친밀감을 즐길 수 있다, 그는 그들에게 그들이 응당 받아야 할 시간을 내줄 수 있다. 나는 제도적 교회의 목사였을 때, 종종 고독감을 느꼈다. 나는 회중 중의 어떤 사람과도 가깝게 지내지 못했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그런 친구처럼 나와 가깝게 지내지 못함으로 인해 화를 내거나 또는 그런 친구들을 질투하지 않게끔 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다른 신자들과 진실한 친밀함을 바랐으나, 진정한 친구를 얻음으로 인해 치러야 할 값은 감수하지 못했다.

가정교회의 관계가 긴밀한 가족안에서, 지체들은 자연스럽게 목사가 책임 적이 되도록 도울 것이다. 그것은 목사가 그들의 친한 친구이지 무대 위의 배우가 아니기 때문이다.

가정교회 목사는 미래 가정교회 지도자들을 키우기 위해 시간을 보낼 수 있다. 그렇게 하면 때가 되어 배가할 때에 지도자들이 이미 준비되어 있게 된다. 그는 자기의 가장 유망한 미래 지도자들이 그들의 은사를 갖고 다른 곳에 있는 신학교에 가는 것을 보지 않아도 된다.

그는 자신의 지역 회중 이외에 다른 사역들을 개발하는 데 충분한 시간이 있을 것이다. 아마도 그는 감옥이나 개인요양원에 가서 사역할 수 있고, 난민들이나 사업가들에게 일대일 전도에 참여할 수 있다. 그는 사역경험을 토대로, 다른 가정교회를 개척하거나, 자신의 사역을 통하여 성장한 젊은 가정교회 목회자들을 지도하는 데에 그의 시간을 할 수 있는 대로 바칠 수 있다.

그는 주일 아침 출연자가 되어야 한다는 압력을 느끼지 않는다. 그는 토요일 밤에 3점 식의 설교를 준비할 필요가 없으며 어떻게 하면 영적 성장이 다른 수준에 있는 많은 사람을 만족하게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5]그는 모임에서 성령님이 모든 사람을 사용하시는 것을 즐겁게 볼 수 있으며, 그들이 자신의 은사를 사용하도록 격려할 수 있다. 그가 모임에 참가하지 않을 수도 있으며, 심지어 그가 없이도 모든 것은 제대로 진행될 것이다.

그에게는 그를 괴롭히는 건물도, 그가 관리해야 하는 직원도 없다.

그는 다른 지역 목회자들과 경쟁할 이유가 없다.

그의 삶을 비참하게 만드는, 정치적 내분이 보편화해가는 “교회 구조”는 없다.

즉, 그는 문화적 기독교가 그에게 부여한 신분이 아닌 하나님이 그를 부르신 모습이 될 수 있다. 그는 주연배우, 회사의 회장, 또는 사역의 중심이 아니다. 그는 제자 삼는 사역자이며, 성도들을 영적으로 무장시켜주는 사람이다.

기쁜 양들 (Happy Sheep)

진실하고 성경적인 가정교회에 관한 모든 것은 모든 진정한 신자가 소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다.

모든 진정한 신자들은 다른 신자들과 진정한 관계를 갖기를 원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이미 그들의 마음속에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계는 가정교회의 중요 부분이다. 그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공동체다. 다른 형제자매와 자신의 진실한 삶을 나누는 것을 말한다. 가정교회는 신자들이 마땅히 해야 하는 것들 즉 많은 신약 성경에 쓰인 “서로에게”란 구절 중에 말씀하는 것들을 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 준다. 가정교회 모식에서 신자들은 권면하고, 격려하고, 고양해주고, 위로해주고, 가르치고, 봉사하고 서로를 위해 기도할 수 있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고 좋은 일을 하도록 자극하고, 자신의 죄를 서로 고백하고, 서로의 짐을 부담해주고, 시편, 찬송가와 영적인 노래로 피차 권면할 수 있다. 그들은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며 우는 사람들과 함께 눈물을 흘릴 수 있다. 이러한 일은 제도적 교회의 주일 아침 예배에서는 자주 발생하지 않는다. 신자들은 그냥 앉아서 보고 있기만 할 뿐이다. 한 가정교회 성도가 나한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우리 지체 가운데 누군가가 병 들었을 때, 나는 단지 음식사역에 등록했기 때문에 낯선 사람의 집에 음식을 보내주지 않는다. 나는 자연스럽게 내가 알고 있고 사랑하는 사람한테 음식을 가져다준다.”

진정한 신자들은 상호 작용하고 서로 참여하는 것을 즐긴다. 수년 동안 수동적으로 앉아서 관련이 없거나 중복적인 설교를 듣는 것은 그들의 지성과 영성에 대한 모욕감을 준다.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관한 자신의 통찰력을 공유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을 선호하고 가정교회가 그런 기회를 제공한다. 무화적인 모식이 아닌 성경적인 모식을 따를 때 각 사람은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다”(고전 14:26). 가정교회에서는 아무도 무리 속에서 길을 잃거나 교회 당파에 의해 배척되지 않는다.

진정한 신자들은 하나님께 쓰임 받기를 원한다. 가정교회에서 사람마다 다른 사람을 축복할 기회와 책임이 있으므로 아무도 제도적 교회의 헌신적인 신자들에게 공통으로 나타나는 소진되는 현상을 경험하지 않는다. 그렇게 최소한 모두가 일반적인 식사를 나누기 위해 음식을 가져올 수 있으며, 이것이 바로 성경에서 나오는 “애찬”(유 1:12)과 같은 것이다. 많은 가정교회의 경우, 그 식사는 실제 유월절 식사의 일부인 주의 만찬의 예를 따른다. 주의 만찬은 내가 목회했던 교회의 어린 소년이 말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간식”이 아니다. 교회 예배때 몇 초 동안을 들여 모르는 사람들과 작은 제병을 먹고 약간의 주스를 마시는 방식은 성경과 성경적인 가정교회에 있어서는 완전히 생소한 것이다. 서로를 사랑하는 제자가 함께 모여 나누는 식사는 성찬의 성례적인 의미를 여러모로 더하여 준다.

가정교회에서 예배는 간단하고 신실하고 참여적이지 하나의 쇼가 아니다. 진정한 신자는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기를 원한다.

교리적 균형과 관용(Doctrinal Balance and Toleration)

작은 교회의 모임 중 부담 없고 열린 토론은 글을 읽을 수 있는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가르침에 대한 의견을 나눌 수 있게 된다. 서로를 알고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은 그들 것과 다른 관점들을 신중하게 고려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설사 그룹이 어떠한 합의에 도달하지 않을지라도, 교리가 아닌 사랑은 그들로 하여금 여전히 같이 결속되어 있게 한다. 장로/목사/감독을 포함한 모든 사람의 어떠한 가르침도 모두 다른 사람들 사랑의 검증을 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가르치는 자가 우리 모두에게 내주하시기 때문이다(요일 2:27을 보라). 내적인 견제와 균형 잡힌 성경적인 모식은 교회가 교리적으로 탈선하는 것을 방지해준다.

이것은 현대 제도적 교회의 규범에 비해 매우 대조적이다. 제도적 교회의 교리는 처음부터 설립되었고 도전할 수 없었다. 따라서, 잘못된 교리는 부단히 연속되어 갔고, 교리는 수용에 대한 리트머스 시험이 되었다. 같은 이유 때문에, 한 설교 중의 하나의 요점도 “같은 생각을 하는 신자들”을 찾아 나서는 반대자들의 즉각적인 출교를 유발할 수 있다. 그들은 목사와 교리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안다. 심지어 목사가 자신의 입장을 변경하도록 설득당했다 하더라도, 그는 교회의 많은 곳에서뿐 아니라 자신의 교단 내의 높은 사람들에게 이 부분을 감출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제도적 교회에서 교리적인 차이는 이 세상에서 가장 숙련된 정치인과 모호하게 얼버무리는 연설가와 같은 목회자들을 배출한다. 그들은 논쟁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모든 사람이 그들이 자기편이라고 생각하게 하려고 한다.

하나의 현대적 흐름(A Modern Trend)

흥미롭게도, 점점 더 많은 제도적 교회들에서 제도적 모식내에서 소그룹 구조를 개발하고 있으며 제자 훈련함에 있어서의 소그룹 구조의 가치를 인식하고 있다. 일부 교회들에서는 더 나아가서 그들의 핵심구조를 소그룹에 두며, 소그룹을 그들의 사역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보고 있다고 한다. 큰 “축하 모임들”은 소그룹들보다 차요적이라고 한다(적어도 이론적으로는).

이런 것들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발걸음들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러한 발걸음들을 축복하시는데, 그것은 우리를 향한 그분의 축복이 우리가 그분의 뜻에 얼마나 맞는지에 따라 정비례하기 때문이다. 사실, 제자 삼는 데 있어서 제도적 교회보다 “셀 교회들”이 더 잘 구성되어 있다. 셀 교회는 제도적 교회 모식과 가정교회 모식사이에 있으며 두 가지 교회모식의 요소들이 결합되어 있다.

소그룹 구조를 가진 현대 제도적 교회와 고대와 현대 가정교회를 비교해보면 어떨까? 약간의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제도적 교회 내의 소그룹들은 불행하게도 때때로 제도적 교회 내에서 많은 잘못을 빚어내는데 특히 소그룹사역을 시작한 실제 동기가 담임목사가 자신의 교회 왕국을 구축하는 것이라면 말이다. 그는 결과적으로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사람들을 이용하게 되고, 소그룹은 그 계획에 잘 맞춰주게 된다. 이런 문제가 발생하면, 소그룹 지도자들은 모 교회에 대한 충성심을 근거로 선출되게 되며, 마귀가 그들의 머리에 그들이 스스로 할 수 있다는 생각을 주입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은사가 너무 많거나 카리스마가 넘쳐서는 안 된다. 이러한 종류의 정책들은 소그룹의 효과성을 방애하고, 다른 모든 제도적 교회에서처럼, 진정으로 부르심 받고 열심 있는 지도자들을 신학원으로 몰아내고, 교회의 은사들을 강탈하여, 그들을 강의만 듣고 실제 재직훈련이 없는 곳으로 데려간다.

제도적 교회의 소그룹은 종종 교회모임의 성격을 벗어날 때가 있다. 제자 삼는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 사람들이 아마도 주일 아침에 영적 양식을 공급받는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소그룹은 때때로 하나님의 말씀 외의 다른 것들에 초점을 두려 하고 주일 아침의 반복을 원하지 않는다.

제도적 교회의 소그룹들은 종종 교회의 직원으로 구성된 것이며 성령의 역사로 생긴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교회의 다른 많은 프로그램 중 하나가 된다. 사람은 연령, 사회적 지위, 배경, 취미, 결혼 여부 또는 지리적 위치에 따라 분배된다. 염소는 종종 양들과 함께 섞여 있게 된다. 이 육적인 조직은 신자들이 서로의 차이를 용납하고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초대 교회는 많은 유대인과 이방인들의 혼합물이었다는 것을 기억하라. 그들은 정기적으로 함께 식사하였다. 비록 유대인의 전통에 의해 금지되는 것들이 있었지만 말이다. 이런 모임은 서로 배우는 좋은 경험임에 틀림없었을 것이다! 사랑으로 행하는 아주 좋은 기회였다! 복음의 능력을 얼마나 증거하는지를 보여준다! 그럼 왜 우리는 반드시 같은 종류의 그룹으로 모두 나누어져야만 소그룹의 성공을 보장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소그룹을 가진 제도적 교회는 여전히 주일 오전 쇼를 하고 있으며 관중은 프로들의 연기를 보고 있다. 제도적 교회에서 가장 중요함을 나타내는 “진정한” 예배가 있을 경우 소그룹 모임은 진행되지 않는다. 이런 메시지 때문에 주일 아침 참석자 중 절대다수가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은 비록 소그룹 모임에 참여하도록 격려받지만 참석하지 않으려 하며 그것을 단지 선택사항으로 보고 있다. 그들은 그들이 가장 중요한 주일 예배에 참석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 그래서 소그룹 개념은 다소 중요한 것으로 홍보되고 있지만, 주일 제도적 활동만큼은 중요하지는 않다. 진실한 공동체, 제자 훈련과 영적 성장을 위한 가장 좋은 기회가 경시된 것이다. 잘못된 메시지가 전달되었다. 제도적 활동은 여전히 우선시되고 있다.

더 많은 차이점들(More Differences)

소그룹을 가진 제도적 교회는 여전히 모든 사람이 계급 구조에서 자신의 위치를 알 수 있는 피라미드식 기업구조로 구성되어 있다. 상단에 있는 사람은 스스로 “섬기는 지도자”라고 자칭할 수 있지만, 더 많이는 경영진 의사결정 책임을 진 최고 경영자와 같다. 더 큰 교회일수록, 목사는 그의 회중들과 더 멀리 떨어져 있다. 만일 그가 진정한 목사라면 당신은 무실 결에 그가 밝히는 진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는 보통 작은 무리를 목회할 때 더 행복하다고 말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소그룹을 가진 제도적 교회는 여전히 교목과 평신도 사이의 분리를 조성하고 있다. 소그룹 지도자는 지불받는 전문가들의 하위 계층에 항상 있다. 소그룹 지도자에게 너무 많은 권한을 부여할 만큼 신뢰받지 못하기 때문에 성경 공부는 종종 교목들에 의해 계승하거나 승인된다. 소그룹은 주의 만찬을 진행하거나 침례를 주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이 신성한 의무는 명목과 학위가 있는 엘리트들이 집행하게 되어 있다. 교회 지체 중 전직 사역에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반드시 신학원에 가야만 엘리트 그룹에 가입할 수 있는 “진짜”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

제도적 교회 내의 소그룹 예배는 60-90분 정도 진행되고, 한 은사 있는 사람이 예배를 인도하고 다른 은사 있는 사람이 검증된 가르침을 주는 소규모의 교회 예배에 지나지 않는다, 성령님이 다른 사람을 사용하고 은사를 주고 사역자들을 개발할 공간이 거의 없다.

사람은 종종 제도적 교회의 소그룹에 진지하게 헌신하지 않으며, 산발적으로 참석한다. 그리고 그룹들은 때때로 임시로 설계되어 그 깊이가 가정교회보다 얕다.

제도적 교회에서 소그룹들은 보통 주중에 만나게 함으로 토요일의 다른 교회모임들과 충돌되지 않게 한다. 따라서, 주중 소그룹 모임은 일반적으로 참석할 수 있는 사람들을 위해 시간상으로 두 시간 이상 진행할 수 없으며 집에 학생이 있거나 거리 적으로 먼 곳에 있는 사람은 다니기 어렵다.

제도적 교회에서 소그룹 사역을 추진할 때에도, 돈을 낭비하는 건물은 여전히 존재한다. 사실, 만일 소그룹 프로그램이 교인들을 증가시킨다면 더 많은 돈이 건물을 짓는데 낭비될 수 있다. 또한, 제도적 교회 내의 소그룹들은 적어도 한 명의 추가 유료 직원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더 많은 돈이 또 다른 교회 프로그램에 쓰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마도 최악의 상황은, 소그룹을 가진 제도적 교회 목사가 종종 개인적으로 제자를 삼는 일에 매우 제한받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많은 책임 때문에 너무 바쁜 삶을 살고 있으며, 일대일 제자 훈련을 할 시간이 거의 없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제자 훈련이라고는 소그룹 지도자들을 훈련시키는 것뿐이지만, 그것마저도 종종 한 달에 한 번씩 모이는 것으로 제한된다.

내 생각에는, 이 모든 것은 가정교회가 제자나 제자 삼는 자를 삼고 배가하는 데 있어서 더 성경적이고 효과적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나는 내 의견이 수백 년간의 교회 전통을 매우 빠르게 변경하기에는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제도적 교회 목사가 그들의 교회를 제자를 삼는 성경적인 모식으로 이동하기 위해 뭔가를 하기를 촉구한다.[6] 그들은 개인적으로 미래의 지도자들을 훈련시키거나 또는 소그룹사역을 다시 시작하는 것을 고려해볼 수 있다. 그들은 “초대교회 주일”을 개최하여 교회건물을 닫고 모든 사람이 처음 3세기 동안 그리스도인이 했던 것처럼 집에서 식사를 나누고 만나는 것을 시도해볼 수 있다.

자신의 교회에 소그룹이 있는 목사들은 일부 소그룹들을 풀어서 가정교회를 구성하고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지켜볼 수 있다. 만일 소그룹이 건전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목사/장로/감독들에 의해 인도될 때 그 소그룹들은 자체적으로 운영할 수 있게 된다. 그들은 부속되지 않은 젊은 교회보다 더 모교회를 필요로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을 풀어주는 것이 어떨까?[7] 회원들이 모 교회에 헌금하는 돈으로 가정교회의 목사를 지원할 수 있다.

내가 가정교회를 지지한다고 해서 제도적 교회에는 좋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일까? 절대 그렇지 않다. 제도적 교회에서도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제자가 양성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칭찬할 만 하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목표를 달성하는 데 있어서 그들의 관행과 구조들은 때론 도움보다는 방애가 될 수 있으며, 그들은 종종 목사의 살인범이다.

가정교회 모임에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가?(What Happens at a House Church Gathering?)

모든 가정교회들이 같게 구성되어야 할 필요는 없으며, 거기에는 다양성을 위한 많은 공간이 있다. 매 가정교회마다 자신의 문화적 사회적 차이를 반영하게 된다 –이것은 가정교회가 특히 기독교 문화와 전통이 없는 나라에서 전도에 매우 효과적일 수 있는 이유이다. 가정교회 회원들은 그들의 이웃들을 그들에게는 완전히 낯선 교회건물로 초대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완전히 낯선 의식에 참여시키지 않을 것이다. 이런 것들은 의사소통의 주요 장애물들이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의 이웃들을 그들의 친구들과 함께 식사에 초대한다.

일반적인 식사는 보통 가정교회의 주요 구성요소이다. 많은 가정교회들에서, 그 음식들은 주의 만찬이거나 그것을 포함하며, 각각의 가정교회는 어떻게 하면 그것이 가지는 영적인 의미를 가장 잘 드러낼 수 있을지를 결정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원래의 주의 만찬은 실제로 유월절 식사로 시작했으며 그 자체가 영적인 의미로 가득했다. 주의 만찬을 기념하는 것은 식사 식사의 일부로서 명백히 초대 교회 신자들이 모였을 때 가진 형식을 따른 것이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었다(행 2:42,46).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말 그대로 떡 덩어리를 떼고 함께 나누었는데 이것은 그들의 문화 속에서 거의 매 식사때마다 해왔던 것들이다. 식사하는 동안 떡을 떼는 것이 그리스도인에게 어떤 영적인 의미가 있을까? 성경에는 확실한 대답이 없다. 그러나 윌리엄 바클리는 그의 책, “주의 만찬”에서 “주의 만찬이 가족 식사거나 개인 집에서 친구와의 식사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하나의 작은 떡 조각과 한 모금의 포도주에 관한 생각은 원래의 주의 만찬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주의 만찬은 원래 집에서 친구들과 함께 하는 가족식사였다.” 놀라운 것은 모든 현대 성경학자들이 바클리에 관점에 동의함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여전히 이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전통을 따르고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분이 그들에게 명령하신 것을 그들의 제자들에게 가르치라고 명령하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떡을 먹고 포도주를 마실 때 그분을 기억하라고 명령하셨을 때 제자들도 그들의 제자들에게 똑같이 가르치기를 원하셨다. 일반적인 식사에서 주의 만찬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우리가 고린도 신자들에게 쓴 바울의 서신을 읽을 때 그것에 대해 확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여기서 그는 교회건물에서 모이는 것을 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교회건물이 없었기 때문이다)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함이라(고전 11:20-21, 강조 추가).

만일 주의 만찬이 현대 교회방식으로 진행된다면 바울의 말들은 엉터리가 아닌가? 당신은 혹시 현대 교회에서 누군가가 자신의 만찬을 먼저 먹으므로 인해 어떤 사람은 주의 만찬과 함께 취하였는데 어떤 사람은 시장함을 일으키는 문제에 대해 들어 본 적 있는가? 이런 말들은 오직 주의 만찬이 실제 식사와 함께 시행되었을 때에야 이해된다. 바울은 계속하여 썼다.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바울은 교회건물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인 사람들의 모임을 말하고 있음을 기억하라)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고전 11:22).

이런 일이 실제 식사과정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면 빈궁한 자들이 왜 부끄러워했겠는가? 바울은 그들의 모임 중에 먼저 도착한 고린도 신자 중 일부가 다른 사람들이 도착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자신의 만찬을 먹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일부 아마도 너무 가난하여 식사에서 같이 나눌 음식을 가져오지 못한 사람은 배고픔을 당할 뿐 아니라 그들이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았음이 너무 분명하게 드러나서 부끄러움을 당했을 것이다.

바로 이후, 바울은 “주께 받은”(고전 11:23) 성례인 주의 만찬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썼으며 첫 번째 주의 만찬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자세히 적었다(고전 11:24-25을 보라). 그 후 바울은 고린도 신자들에게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에 대해 경고하고, 스스로를 살피지 않는자는 실제로 자기들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며 허약함, 질병, 심지어 조기사망까지 일으킬 수 있다고 말했다(고전11:26-32을 보라).

그리고나서 그는 결론 지었다.

그런즉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 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판단 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전 11:33-34).

문맥상으로 보아서는 주의 만찬을 범한다는 것은 다른 신자들을 고려하지 않는 것이다. 바울은 다시 같이 나누었어야 할 식사임에도 자신의 만찬을 먼저 먹은 사람은 하나님께 심판(또는 훈계)을 받을 위험에 있다고 경고했다. 이 해결방법은 간단했다. 만일 한 사람이 다른 사람 기다릴 수 없을 정도로 시장하다면 그 모임에 오기 전에, 그는 뭔가를 먹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주의 만찬에 먼저 도착한 사람은 늦게 도착하는 사람들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전체 문맥을 봤을 때, 바울은 주의 만찬을 같이 나눈다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식으로 하여야 하며, 서로에게 대한 사랑과 배려가 반영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어떠 상황에서도, 초대 교회에서 성직자 없이 가정에서 일반적인 식사의 목적으로 주의 만찬을 연습했던 것이 분명하다. 왜 우리는 그렇게 못하고 있는가?

떡과 포도주(Bread and Wine)

주의 만찬의 구성 요소의 특성이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다. 만일 우리가 원래의 주의 만찬을 완벽하게 모방하려면, 우리는 떡의 정확한 재료와 원래의 포도주를 만드는 데 쓰인 포도의 정확한 종류를 알고 있어야 한다. (처음 몇 세기 동안 일부 교부들은 포도주를 반드시 물에 희석하여야 한다고 엄격하게 규정하였는데, 그렇지 않으면 성찬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떡과 포도주는 고대 유대인들 식사의 가장 일반적인 요소 중의 일부였다. 예수님은 거의 모든 사람이 날마다 먹는 매우 일반적인 두 가지 음식에 깊은 의미를 주셨다. 그분이 만일 역사의 다른 시간에 다른 문화를 방문했었다면, 첫 번째 주의 만찬은 치즈, 염소 젖, 또는 쌀 케이크, 파인애플 주스로 구성되었을 수도 있다. 따라서 그분이 제자들과 함께 나눴던 식사의 모든 음식과 음료는 잠재적으로 그분의 몸과 피를 나타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영적 의미이다. 우리가 율법을 문자적으로 잘 지키는 동시에 율법의 영적인 의미를 무시하지 말자.

사람들이 일반적인 식사를 할 때 꼭 엄숙해야 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이미 읽은 바와 같이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었다”(행 2:46). 그러나 예수님의 희생을 기억하며 식사를 하는 동안에는 반드시 진지하여야 할 것이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1:17-34에서 엄숙하게 지적했듯이 주의 만찬을 먹기 전에는 자기를 살피는 것은 항상 절절하다. 서로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징계를 자초한다. 모든 다툼과 분열은 식사하기 전에 해결하여야 한다. 모든 신자는 자기를 살피고 모든 죄를 자백하여야 하는 데 이것이 바로 바울이 말한 “자기를 살피라”라는 뜻일 것이다.

성령님은 지체를 통하여 나타나신다(The Spirit Manifested Through the Body)

일반적인 식사는 예배와 가르침과 성령의 은사들을 나누는 모임 전이나 후에 진행할 수 있다. 각각의 가정교회마다 진행형식을 결정할 수 있으며, 그 형식은 같은 가정교회에서도 모임마다 다를 수 있다.

성경을 보면 초대 교회의 모임이 현대 제도적 교회의 예배와 매우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특히, 고린도전서 11장부터 14장까지 초기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모였는지에 대해 우리에게 풍부한 통찰력을 주고 있으며, 오늘날 우리가 그 같은 형식은 따를 수 없거나 따르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할 이유가 없다. 그리고 바울이 기술한 초대 교회 모임에서 일어난 일은 오직 소그룹 모임에서만 일어날 수 있음이 분명하다. 바울이 형용한 모임들은 큰 모임에서 일어날 수 없다.

나는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기술한 네 장절의 내용을 모두 이해하지 못함을 먼저 인정한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1장부터14장에서 묘사된 모임의 가장 뛰어난 특징은 그들 중에 함께 하신 성령님의 임재하심과 그분이 제체들을 통해 자신을 나태내셨다는 것이다. 그분은 그분의 몸을 세우는 모든 지체들에게 은사를 주셨다.

바울은 적어도 아홉 가지 성령의 은사들을 나열하였다. 예언, 방언, 방언의 통역, 지식의 말씀, 지혜의 말씀, 영적 분별력, 병 고치는 은사, 믿음, 그리고 능력 행함. 바울은 이 모든 은사가 모임을 할 때마다 나타난다고 하지 않았지만, 그 은사들이 나타날 가능성을 암시하고 있었으며, 고린도전서 14:26에서는 자주 나타나는 성령의 역사에 대해 요약한 것 같다.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먼저 이 다섯 가지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은사들을 살펴보고, 다음 장에서 고린도전서 12:8-10에 나와 있는 성령의 아홉 가지 은사들을 더 철저하게 고려해 보자.

목록 중 첫 번째 은사는 찬송시다. 바울은 다른 두 서신서에서도 성령님이 주신 찬송시가 교회 모임에서의 갖는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엡 5:18-19).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골 3:16).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의 차이는 불분명하지만, 요점은 그것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말씀에 근거한 것이며,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이며, 서로 가르치고 권면하기 위해 신자들에 의해 불려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신자들이 교회 역사 속에서 신자들에 의해 불린 많은 찬송가와 노래들은 이 세 가지 종류중의 하나에 해당한다. 불행하게도, 너무 많은 현대의 찬양과 노래들은 성경적인 깊이가 빠졌으며 성령님이 주신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너무 얕으므로 신자들을 가르치고 권면할만한 가치가 없다. 그럼에도 가정교회에 모인 신자들은 성령님이 개개인한테 영감을 주어 과거와 현재에 잘 알려진 기독교 노래들을 인도할 뿐 아니라 일반적으로 덕을 세우는 데 활용될 수 있게끔 구성원 중의 일부에게 특별한 노래를 제공해주기를 기대한다. 교회가 성령님이 주신 자기만의 노래를 갖는다는 것은 얼마나 특별한 일인가!

가르침 (Teaching)

바울의 목록 중 두 번째는 가르침이다. 이는 다시 한 번 모임 중에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은 아무나 가르칠 수 있음을 나타낸다. 물론, 모든 가르침은 그것이 사도들의 가르침에 맞는지에 따라 판단되어야 하며(왜냐하면, 그들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이다: 행 2:42을 보라), 오늘날 우리도 똑같이 하여야 한다. 그러나 신약 성경 어디에도 지역교회 모임에서 매주 같은 사람이 설교해야 하고 모임을 지배해야 한다는 말씀이 없다는 것을 주의하라.

예수살렘에서는 사도들은 큰 모임은 사원에서 가르쳤다. 우리는 장로들도 교회에서 가르침의 책임이 주어졌고 그들 중 일부는 교육사역에 부르심을 받았음을 알고 있다. 바울은 공개적으로 또는 집집마다 다니면서 많은 사람을 가르쳤다(행 20:20을 보라). 그러나 신자들의 작은 모임에서 성령님은 사도, 장로나 교사 외의 사람들을 사용하여 가르치게 할 수도 있다.

가르침에 있어서, 우리가 모임에 개인 성경사본 가지고 다닐 수 있으므로 초대 교회 때보다 훨씬 우세가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반면에, 아마도 성경에 대한 우리의 접근이 쉬움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의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것보다 교리를 더 우선시하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려는 생명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우리는 죽음으로 교리화 되어가고 있다. 많은 소그룹 성경 공부는 주일 아침 설교처럼 삶과는 관련이 없이 지루하기만 하다. 가정교회의 가르침을 따르는 다음과 같은 좋은 규칙이 있다. 큰 아이들이 지루함을 숨기지 않는다면, 어른들은 아마도 그들의 지루함을 숨기고 있을 것이다. 아이들은 아주 좋은 진리의 지침이다.

계시(Revelation)

세 번째로 바울은 “계시”를 나열하였다. 그것은 예수님의 몸의 일부 지체들에게 하나님이 드러내신 무언가를 의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바울은 특별히 불신자가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을 들어왔을 때 예언의 은사로 그들의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된다고 하였다. 그 결과로 그는 “책망을 들으며, 판단을 받을 것이며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신다 전파할 것이다”(고전 14:24-25).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성령님의 실제 임재가 교회 모임의 예상 기능이며 그런 초자연적인 일은 예수님의 임재로 발생함을 알 수 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라는 예수님의 약속을 믿었다. 만일 예수님 자신이 그들 중에 있다면, 기적은 일어날 수 있다. 그들은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였다”(빌 3:3).

어떤 경우라도, 예언은, 그것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곧 말하겠지만, 사람들의 마음에 대한 계시를 포함하고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계시는 다른 것들에 관한 것일 수 있고 다른 것을 통해 받을 수 있다. 예를 들어 꿈이나 비전을 통해 계시를 받을 수 있다(행2:17 을 보라).

방언과 통역(Tongues and Interpretation)

넷째로, 바울은 함께 사용되는 은사인 방언과 통역을 나열했다. 고린도 교회에서는 방언이 과도하게 사용되고 또 남용되는 현상이 있었다. 즉, 사람은 교회 모임 중에 방언을 말하지만 통역하는 사람이 없으므로 아무도 방언의 내용을 알 수가 없었다. 이 일은 어쩌면 사람들에게 통역의 은사를 주지 않은 채 방언의 은사만 주신 성령님의 잘못으로 보일 수 있고 고린도 교회는 왜 비난받아야 하는지 궁금해할 수 있다. 나는 이 질문에 대한 만족스러운 대답을 나중에 다시 다룰 것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바울은 방언을 금지한 적은 없었다(많은 제도적 교회에서는 금지하고 있지 않는 것처럼). 오히려, 그는 방언을 금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주님의 계명이었다고 선언하였다(고전14:37-39을 보라)![8] 그것은 제대로 사용되기만 하면, 교회의 덕을 세우고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임재를 확정할 수 있는 하나의 은사가 된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분의 진리와 그분의 의지를 사람들을 통해 말씀하시는 것이다.

제14장에서 바울은 예언이 통역되지 않은 방언보다 나음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는 고린도 신자들이 예언하기를 소망하도록 강력히 권장하였는데, 이것은 성령의 은사는 그것을 원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드러날 가능성이 더 큼을 나타낸다. 마찬가지로, 바울은 데살로니가 신자들에게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살전 5:19)라고 권면하였다. 이는 신자들의 예언 은사에 대한 잘못된 태도는 성령의 감동을 “소멸”할 수 있음을 나타낸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오늘날 대부분의 신자 사이에서 예언의 은사는 아주 드물게 나타난다.

어떻게 시작할까?(How to Start)

가정교회는 가정교회 개척자 또는 하나님이 주신 가정교회에 대한 비전을 받은 장로/목사/감독들에 의해 시작된다. 성경적인 장로/목사/감독은 제도적 교회가 말하는 성숙한 평신도를 말할 수 있음을 명심하라. 가정교회 개척자는 정식적인 사역교육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성령님에 의해 가정교회의 비전을 받은 개척자는 누구와 함께 동역해야 할지를 주님께 간구해야 한다. 주님은 그를 비슷한 비전을 가진 사람들과 만나게 하며, 그분이 인도하고 계심을 확인시켜 주신다. 또는 주님은 그에게 믿음을 가질 불신자들을 붙여주셔서 그들이 가정교회에서 제자로 훈련받게 할 수도 있다.

금방 가정교회를 시작하는 사람은 서로 편하게 느끼고, 성령님과 관계를 갖고 그분의 인도를 따르는 것을 배우기 위해서는 시간을 들여야 함을 예상해야 한다. 이 길을 따라가다 보면 많은 시행착오가 겪을 것이다. 모든 성원이 동참해야 한다는 개념, 성경적인 섬김의 지도력, 장로들을 장비하고, 성령님의 인도와 은사, 함께 식사를 나누는 것, 편하면서도 영적인 분위기 등 이런 것들은 제도적 교회에만 익숙해 있던 사람들에게는 매우 생소할 것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가정교회가 개척할 때에는 은혜와 인내로 하는 것이 지혜롭다. 처음 시작할 때 형식은 한 사람이 예배를 인도하고, 또 다른 사람이 준비한 말씀을 가르친후에 함께 기도하고, 교제하고 식사하는 것으로 마칠수 있다. 하지만 가정교회의 성경적인 진행방식은 매 개인에 의해 부단히 연구되어야 하며 장로/ 목사/감독들은 회원들이 하나님께 최선을 다하도록 격려해야 하며 그 과정을 즐겨야 할 것이다.

가정교회 모임은 매주 한 회원의 집에서 다른 회원의 집으로 바꿔가며 진행하거나, 한 사람이 매주 자기 집을 모임장소로 열수 있다. 날씨가 화창할 때에는 어떤 가정교회들은 가끔 아름다운 야외장소로 이동한다. 모임 시간과 장소는 반드시 주일 아침이어야 할 필요가 없으며, 구성원들의 시간에 맞출 수 있다. 마지막으로, 가정교회는 열두 명의 회원을 초과하지 않게, 작게 시작하는 것이 가장 좋다.

어떻게 제도적 교회를 가정교회로 전환할 수 있을까?(How to Transition from Institution to House Church)

이 책을 읽는 대부분 목사들은 제도적 교회에 소속되어 있을 것이며, 아마 당신도 그중의 한 명일 것이다. 내가 설명한 교회의 종류가 당신이 바라던 교회의 모습이라면, 당신은 이미 어떻게 하면 전환할 수 있는지를 궁금할 것이다. 서두를 필요가 없다. 기존의 구조와 틀 안에서 성경적인 진리만 가르치고, 예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제자를 만들기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일을 시작하라. 진정한 제자들은 그들이 일단 이해만 되면 성경적인 교회구조로 전환하고 싶어할 것이다. 염소와 종교적인 사람은 이러한 전환을 거부할 가능성이 훨씬 더 많다.

둘째로, 이 주제에 대한 성경 말씀을 공부하고 가정교회 구조와 그것이 가진 축복에 대해 회중에게 가르친다. 당신은 성숙한 신자들의 감독하에 가정집에서 매주 셀 모임을 시작하기 위해 평일이나 주일 저녁 예배를 취소할 수 있다. 그리고 모두사람이 참석하도록 권장하라. 점차적으로 이런 모임들이 가능한 한 가정교회의 성경적인 모식을 따르도록 하여야 한다. 그런 다음, 사람들로 하여금 소그룹이 주는 축복을 만끽할 수 있도록 시간을 들인다.

모든 사람이 가정교회 모임을 즐기게 되면 다음 달의 어느 한 주일날을 택하여 “초대 교회의 주일”로 정할 수 있다. 그 주일날에는, 교회 건물을 닫고, 모든 사람은 가정집으로 가서 초대교회가 했던 것처럼 모임을 하고, 함께 식사를 나누고, 주의 만찬, 교제, 기도, 예배, 가르침과 성령의 은사들을 즐길 수 있다. 만일 그것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면, 이런 모임들을 한 달에 한 번씩 가질 수 있으며, 점차 두 번, 세 번씩 가질 수 있다. 결국, 당신은 모든 그룹을 독립적인 가정교회로 풀어주며 몇 달에 한 번씩 함께 모여 연합예배를 드릴 수 있다.

내가 설명한 이 모든 전환 과정은 1-2년의 세월이 걸릴 수 있다.

당신이 더 조심스럽게 진해하려면, 자신이 인도하는 가정교회에 대해 가장 관심이 있는 몇 명 회원들과 함께 하나의 모임부터 시작할 수 있다(다시 반복하지만, 가정교회는 주일 아침에 모일 필요가 없다). 그것은 실험적으로 진행될 수 있으며 모두에게 좋은 학습경험이 될 것이다.

만일 그것이 성공하면 그 그룹에 감독을 임명하며 독립적인 교회로 풀어주며 한 달에 한 번씩만 제도적 주일예배에 참석하게끔 한다. 이렇게 하면 새로운 교회가 아직도 모교회의 한 부분으로 되어 있기에 여전히 제도적 교회에 소속된 회중들에게 부정적인 인상을 주지 않을 수 있다. 또한, 회중들로 하여금 제도적 교회가 개척하는 다른 가정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을 고려할 수 있게끔 영향 주는데 도움이 된다.

만일 첫 번째 그룹이 성장하면, 기도하면서 그것을 두 그룹으로 나눠 두 그룹 모두 좋은 지도자들과 충분한 은사가 있는 회원들로 구성되게 할 수 있다. 두 그룹은 달마다 혹은 3개월에 한 번씩 큰 행사에 함께 모일 수 있도록 합의할 수 있다.

당신이 어떠한 방식을 택하든지 목표에서 눈을 떼지 말고 실망하지 말라. 가정교회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람은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절대 포기하지 말라.

제도적 교회의 모든 회중이 이러한 전환을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당신은 개인적으로 언제쯤 제도적 교회를 떠나 가정교회에 자신을 완전히 헌신하기 시작해야 할지를 결정해야 한다. 그날은 당신에게 있어서 뜻깊은 날이 될 것이다!

이상적인 교회(The Ideal Church)

하나님 보시기에 가정교회의 목사가 실제로 거대한 건물과 주일마다 수많은 참석자를 거느리는 대형교회의 목사보다 더 성공적일까? 그렇다, 만일 그가 일주일에 한 번씩 쇼를 감상하고 문맥을 무시한 몇 구절 성경 말씀으로 거룩해 보이고 재미를 선사하는 설교를 듣는 단순한 영적인 염소가 아니라, 예수님을 따라 순종하는 제자들과 제자 삼는 자들을 배가시키고 있다면 말이다.

가정교회 모식을 따르기로 한 목사는 자기만의 많은 회중을 거느릴 수 없다. 그러나 긴 안목으로 보면, 그는 자기의 제자가 또 제자를 삼으므로 말미암아 많은 지속적인 열매를 맺을 수 있다. 40명에서 50명의 “적은” 회중들을 거느리면서 더 많은 무리를 얻고자 애쓰고 있는 목사들은 생각을 바꿔야 한다. 그들의 교회는 이미 너무 커져 있을 수 있다. 아마도 그들은 더 큰 건물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멈추고 두 개의 새로운 가정교회를 이끌 수 있는 사람들을 세워달라는 기도를 시작해야 할 것이다. (제발, 그렇게 되면, 새로운 교파를 만들거나 자신을 그 교회의 “주교”라고 칭하지 말기를 바란다!)

우리는 교회는 클수록 좋다는 생각을 근절해야 한다. 우리가 성경을 기준으로 순수하게 판단했을 경우, 특별한 건물 안에서 모이는 수백 명의 제자가 아닌 관객으로 구성된 하나의 교회는 매우 이상하다고 여겨질 것이다. 초대 사도 중 누구라도 현대 제도적 교회를 방문하면 머리를 긁적이게 될 것이다!

마지막 반대 이유(A Final Objection)

사람은 종종 기독교가 이미 문화의 한 부분이 된 서양 세계에서 집에서 만나는 교회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우리는 반드시 제도적 모식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먼저, 가정교회 운동이 서양 세계에서 급속한 추진력을 얻는 것으로 봐서는 그런 관점이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둘째, 사람은 이미 기꺼이 집에서 파티를 열고, 식사를 나누고, 교제하고, 성경공부와 셀 모임을 하기를 원한다. 조금만 생각을 조정하면 가정교회모식을 받아들일 수 있다.

셋째, 종교적인 사람들 즉 “영적 염소들”은 가정교회의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으리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들은 그들의 이웃들에게 이상하게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제자들은 그들이 일단 성경적인 기준을 이해하기만 하면 가정교회의 개념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그들은 인츰 교회 건물들이 불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할 것이다. 만일 당신이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고전 3:12) 큰 교회를 세우려면, 당신은 건물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 날에 이 모든 것은 다 타버릴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제자들과 제자를 삼는 자들을 배가시키려 하고 “금이나, 은이나, 보석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려 한다면, 건물에 돈과 정력을 낭비하지 않아도 된다.

오늘날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원주민 복음 전도운동인, 중국 가정교회의 “백투 예루살렘” 운동이 10/40 창을 전도한다는 특정 전략을 세웠다는 사실은 아주 흥미롭다. 그들은 “우리는 어디에도 교회 건물을 세울 생각이 없다! 이렇게 함으로 복음이 빠르게 전파될 수 있으며, 당국이 감지하는 데 어려움을 주며, 그리고 우리가 복음 사역에 우리의 모든 자원을 직접 사용할 수 있게끔 해준다.”[9] 이것은 실로 우리가 따라야 할 지혜롭고 성경적인 모범이다.

 


[1] www.shepherdserve.org싸이트의 홈 페이지에서 Biblical Topics목록아래의 “Jesus on Money” 를 보라.

[2]비록 이것이 급진적으로 들리지 모르겠지만, 교회 건물이 필요한 진짜 이유는 작은 가정교회를 감독할 지도자가 결핍하기 때문이다. 이는 제도적 교회 내에서 잠재적인 지도자에 대한 제자 훈련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결과이다. 큰 제도적 교회의 목사들이 실제로 그들의 회중들 가운데 하나님께 목사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의 정당한 사역의 권리를 박탈하는 죄를 범하고 있지는 않을까? 그렇다.

[3]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삼은 성경적인 모델과 모세가 십부장을 삼아 백성들을 재판한 모델(출 18:25을 보라)에 비추어 보면 일 대 십 또는 일 대 이십의 비율을 지나치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대부분의 제도적 교회의 목사들은 그들 자신이 효과적으로 제자 삼을 수 있는 인수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을 감독하고 있다.

[4]우리는 성경에서 왜 “담임목사”, “협동목사” 또는 “부목사”에 대한 언급이 없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 할 수도 있다. 현대교회에 있어서 구조때문에 매우 중요하게 여겨지는 이런 직함들은 초대 교회에서는 구조때문에 필요 없었다. 이십명 규모의 가정교회는 담임목사, 협동목사, 부목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5]비록 많은 목사들이 그리스도의 종들을 보살피도록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지만, 훌륭한 연설자는 되지 못했다. 사실, 사람들이 목사들의 많은 설교가 지루하다고 말하거나, 적어도 때론 지루하다고 말하는 것이 너무 가혹한 것일까? 한 교회 비평가는 회중들이 집중하지 못하는 것은 아주 보편적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이런 지루했던 연설자도 종종 아주 좋은 대화 상대가 되며, 사람들이 그들과 대화할 때에는 지루함을 거의 느끼지 못한다. 그것이 바로 가정교회에서의 대화형 가르침이 항상 흥미로운 이유이다. 이런 시간은 빨리 흐르는데, 이것은 교회에서 설교하는 동안 손목시계에서 왔다갔다하는 눈짓과 대조를 이룬다. 가정교회 목사들은 사람들이 지루해할까봐 걱정할 필요가 없다.

[6]미친 짓에 대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정의중 하나는 바로 반복적으로 같은 일을 하면서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것이다. 목사들이 모든 사람들의 제자 삼는 것에 관한 책임에 대해 수 년동안 가르칠 수 있지만, 그들이 교회의 형식이나 구조를 개변하지 않는 한, 사람들은 계속해서 교회당에 와서 앉아서 듣기만 하다가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목사들이여, 만일 당신이 과거에 사람을 개변시키지 못한 일을 계속해서 한다면, 그것은 앞으로도 사람들을 변화시키지 못할 것이다. 당신이 하고 있는 일부터 변화하라!

[7]물론, 많은 목사들이 이 생각을 반대하는 주된 이유가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아닌 자신의 왕국을 짓고 있기 때문이다.

[8]물론, 나는 어떤 사람들은 성령님의 모든 초자연적인 나타나심은 첫 세기에만 한정되며 그 시점에서 멈췄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따라서, 그들에 의하면 우리는 초대 교회가 경험 한 것을 추구 할 이유가 없고,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더는 유효하지 않게 된다. 나는 현대의 사두개인과 같은 그런 사람들에 대해 약간의 동정심이 생긴다. 나의 한 일본인 친구는 내가 일본어를 배운 적이 없지만 몇 번이나 일본어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나는 이런 은사들이 성령님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중단되지 않았음을 알고 있다. 나는 또한 이런 사두개인들이 왜 성령님이 여전히 죄인들을 부르시고 그들이 죄를 깨닫고 거듭나게 하신다는 주장은 유지하면서 성령님의 그런 기적들 이상의 역사는 부정하는 지 궁금하다. 이런 종류의 “신학”은 인간의 불신앙과 불순종의 산물이며 성경적인 근거가 없으며 실제로 그리스도의 목표를 위배한다. 이것은 바울이 고린도전서 14:37에 쓴 내용에 따르면, 이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직접적인 불순종이다.

[9] Brother Yun, Back to Jerusalem, p. 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