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기초(Fundamentals of Faith)

제 14 장 (Chapter Fourteen)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에 기초를 두며, 그분은 자기를 찾는 자들과 자기를 찾지 않는 자들을 구별하여 대하신다. 우리가 이 같은 사실을 진심으로 믿는다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시작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찾기 시작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찾는 것은 (1) 하나님의 뜻을 배우고, (2) 하나님께 순종하고, (3)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세 가지 요소는 우리의 일상에서 모두 구현되어야 한다.

이 장은 우리의 믿음의 길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불행하게도, 많은 사람은 믿음을 지나치게 비성경적으로 강조하고 있는데 특히 물질적인 번영을 강조한다. 그 이유 때문에, 일부는 이 주제에 대해 전혀 접근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강에 빠져 죽었다고 하여 우리가 물을 마시는 것을 멈출 수는 없다. 우리는 균형을 잡고 성경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 성경에는 이 주제에 대한 가르침이 많이 있으며,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많은 약속을 붙잡고 믿음을 단련하기를 바란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믿음을 둔 사람의 본보기를 보여주셨으며, 그분의 제자가 그분을 본받기를 기대하셨다. 마찬가지로, 제자 삼는 사역자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본보기가 되기 위해 노력하며 그의 제자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라고 가르치고 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믿음이 없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믿음이 없이는 기도 응답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마 21:22; 약 1:5-8을 보라). 성경은 분명히 의심하는 자는 신자가 받는 축복을 박탈당한다고 가르친다. 예수님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라고 말씀하셨다.

믿음의 정의(Faith Defined)

믿음에 대한 성경적인 정의는 히브리서 11:1에서 찾을 수 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이 정의에서, 우리는 믿음의 여러 가지 특성들을 배울 수 있다. 첫째, 믿음을 가진 사람은 확신 또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희망과는 다르다. 왜냐하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기 때문이다. 희망은 항상 의심의 여지를 둔다. 희망은 항상 “아마”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나는 “나는 오늘 비가 내려 정원을 적셔주기를 바란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비가 오기를 갈망한다. 그러나 나는 비가 올지 여부에 대해서 확신이 없다. 반대로, 믿음은 항상 확실하며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다.

사람들이 믿음 또는 신념이라고 부르는 것이 종종 성경적인 정의가 아닐 때가 있다. 예를 들어, 사람은 하늘 위의 어두운 구름을 보면서 “나는 비가 올 것을 믿는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비가 올 것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다. 그들은 단지 비가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것은 성경적인 믿음이 아니다. 성경적인 믿음에는 의심의 요소가 없으며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외의 다른 결과를 용납하지 않는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다(Faith is the Conviction of Things Not Seen)

히브리서 11:1의 믿음의 정의에 의하면 믿음은 또한,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이다. 따라서, 우리가 오감을 통하여 무엇을 볼 수 있거나 감지할 수 있다면, 믿음이 필요하지 않다.

누군가가 지금 당신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가정해보자, “나는 왜 그런지 설명할 수는 없지만, 당신의 손에 책이 있음을 믿는다.” 물론, 당신은 그 사람한테 뭔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왜? 당신은 내 손에 책이 있다는 것을 믿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당신은 내가 책을 잡고 있음을 분명하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영역에 속한다. 예를 들어, 나는 이 글을 쓰면서, 내 근처에 천사가 있다고 믿는다. 실제로, 나는 확신한다. 내가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내가 천사를 본 적이 있을까? 아니. 내가 천사가 날고 있는 것을 감지했거나 들어 본 적이 있을까? 아니. 만일 내가 천사를 보거나 듣거나 감지했다면,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사실 – 천사가 내 주위에 있다는 것을 믿을 필요가 없다.

그럼, 무엇이 나로 하여금 천사의 존재에 대해 이렇게 확신할 수 있게 할까? 나의 확신은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다. 시편 34:7에서 그분은 “여호와의 천사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 치고 그들을 건지시는도다”라고 약속하셨다. 하나님을 말씀 외에는 내가 믿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보이지 않는 것들의 실상이야말로 진정한 성경적인 믿음이다. 세상 사람은 “보는 것을 믿게 된다”는 표현을 쓰지만,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그 반대가 진실이다. “믿는 것을 보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려고 할 때, 우리는 종종 우리로 하여금 의심하게 하는 상황에 놓이거나, 우리의 상황이 변화가 없으므로 하여 하나님께서 그분의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시간을 겪게 된다. 그런 경우, 우리는 단순히 의심을 물리치고, 믿음을 지키고, 마음속으로 하나님은 항상 자신의 약속을 지키신다고 확신해야 한다. 그분이 거짓말을 하시는 것은 불가능하다(딛 1:2).

우리는 어떻게 믿음을 가지는가?(How Do We Acquire Faith?)

믿음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성경적인 믿음의 유일한 근원은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 로마서 10:17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강조 추가). 하나님의 말씀은 그분의 뜻을 드러낸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 때에만 그것을 믿을 수 있다.

때문에 당신이 믿음을 가지고 싶다면, 당신은 반드시 하나님의 약속을 듣거나 또는 읽어야 한다. 믿음은 그것을 위해 기도하거나 누군가 믿음을 받도록 안수한다고 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생기며, 당신이 들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믿겠다는 결단을 반드시 내려야 한다.

믿음의 갖는 것을 넘어서, 우리의 믿음은 더욱 강해질 수 있다. 성경은 아주 작은 믿음에서부터 산을 옮기는 믿음까지 여러 가지 믿음의 단계를 언급하고 있다. 믿음은 인간의 근육처럼 먹고 훈련하는 것에 따라 더욱더 강해진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함으로써 계속하여 우리의 믿음에 영적 양식을 공급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행동하고 모든 일에 반응해야 하기 위해 믿음을 훈련시켜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문제, 걱정과 우려를 대면하는 시간도 포함한다.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들이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고, 모든 상황 속에서 그분을 신뢰하기를 원하신다(마 6:25-34; 빌 4:6-8:1; 벧전 5:7을 보라). 염려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우리가 믿음을 훈련시키는 방법 중의 하나이다.

만일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그것이 진리인 것처럼 말하고 행동할 것이다. 만일 당신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다면, 당신은 그것을 믿는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할 것이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실 것을 믿는다면, 당신의 말과 행동도 그렇게 표현될 것이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께서 당신이 건강하기를 바라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당신의 말과 행동도 그렇게 표현될 것이다. 성경에는 수많은 사람이 역경 속에서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믿음으로 행함으로써 기적을 경험한 예로 가득하다. 우리는 나중에 이 장에서 몇 가지 예를 볼 것이며, 다음 장에서는 영적 치유에 관해 고려할 것이다(기타 좋은 예들은 왕하 4:1-7; 막 5:25-34; 눅 19:1-10; 행14:7-10을 보라).

마음으로 믿는다(Faith is of the Heart)

성경적인 믿음은 우리의 이성적인 생각이 아닌 마음으로 믿는 것이다. 바울은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구원에 이른다”(롬 10:10상)고 썼으며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막 11:23, 강조 추가).

당신이 머리로는 의심하지만, 마음으로 믿는다면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받을 수 있다. 실제로, 대부분의 경우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려고 노력할 때, 육체적 감각과 사탄의 거짓말에 영향받은 우리의 지성은 의심의 공격을 받는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는 생각 대신 믿음을 굳게 잡고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흔하게 볼 수 있는 잘못된 믿음(Common Faith Mistakes)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훈련할 때, 때로는 원하는 것을 받는 데 실패하는 데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장 많이 범하는 실수 중 하나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시지 않은 것을 믿으려고 할 때 발생한다.

예를 들어, 결혼한 부부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자녀를 주실 것을 믿는 것은 성경적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들이 근거로 삼을 수 있게 그 부분에 대해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나는 의사로부터 임신할 수 없다고 들은 한 부부를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의사 대신 하나님을 믿기로 선택하고 아래의 두 약속을 붙잡았다. 그리고 오늘날 그들은 건강한 아이들의 부모가 되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 그리하면 여호와가 너희의 양식과 물에 복을 내리고 너희 중에서 병을 제하리니 네 나라에 낙태하는 자가 없고 임신하지 못하는 자가 없을 것이라 내가 너의 날 수를 채우리라(출 23:25-26).

네가 복음 받음이 만민보다 훨씬 더하여 너희 중의 남녀와 너희의 짐승의 암수에 생육하지 못함이 없을 것이며(신 7:14).

이 약속은 자녀가 없는 부부들을 격려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특별히 아들이나 딸을 낳으려는 시도는 잘못된 것이다. 성경은 우리가 우리의 미래 아이의 성별을 선택할 수 있다고 구체적으로 약속하지는 않았다. 우리의 믿음이 효과적이 되려면, 우리는 반드시 성경의 경계 내에 있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부분만 신뢰해야 한다.

하나님의 약속 하나를 보고, 우리가 그 약속에 따라 무엇을 믿을 수 있을지 결정해보자.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살전 4:16).

이 말씀을 근거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것을 확실하게 믿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께 내일 재림하시라고 기도할 수 있을까? 아니, 왜냐하면, 이 말씀과 다른 어떤 성경 말씀도 우리에게 그것을 약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예수님은 아무도 그분이 재림하실 날과 시를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

물론, 우리는 예수님이 내일 재림하시기를 바란다고 기도할 수 있지만, 우리에게는 그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우리가 믿음으로 기도할 때, 우리는 우리가 기도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확신한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약속이 있기 때문이다.

똑같은 성경 말씀을 근거로, 우리는 죽은 신자들의 몸이 예수님의 재림 시에 부활한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중 그리스도의 재림 시에 살아남은 자들도 같은 순간에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과 같이 부활의 몸을 받을 수 있을까? 혹은 그들 전에 받을 수 있을까? 아니, 왜냐하면, 이 성경 말씀은 우리에게 그 반대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난다.” 사실, 바로 다음 구절은 계속하여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살전 4:17)진다고 했다. 따라서, 예수님의 재림 시,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부활의 몸을 가장 먼저 받지 못할 가능성은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게 약속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주실 것이라고 믿으려 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받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오직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여 확인할 수 있다.

믿음은 자연의 영역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작용한다. 당신은 사전에 나한테서 약속을 받지 않은 이상, 내가 내일 점심에 당신의 집을 방문 할 것이라고 믿지 않을 것이다.

약속의 근거가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다. 그것은 어리석음일 뿐이다. 때문에 당신이 무엇을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기 전에, 먼저 자신한테 어느 성경 말씀이 내가 원하는 것을 약속하셨는지 물어보라. 당신이 약속을 받지 못한 이상, 당신은 믿음에 대한 근거가 없다.

두 번째로 흔한 잘못된 믿음(A Second Common Mistake)

많은 경우,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약속에 부가된 모든 조건은 충족시키지 않으면서 약속이 자신의 삶 속에서 성취된다고 믿으려고 한다. 예를 들어, 나는 그리스도인이 시편 37편을 인용하며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내 마음의 소원을 들어주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내가 믿는 바이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의 소원을 들어주신다고만 말씀하지 않았다. 실제로는 아래와 같이 말씀하였다.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지 말지어다 그들은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당할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 거리로 삼을지어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시 37:1-5).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의 소원을 들어주시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사실, 나는 위의 약속에서 적어도 8가지 조건을 셀 수 있다. 우리가 그 조건들을 충족하지 않는 한, 우리에게는 약속된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권리가 없으며 우리의 믿음은 기초가 없게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또한, 빌립보서 4:19의 약속을 인용하기 좋아한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그러나 그 약속에는 조건이 있는가? 분명히 있다.

당신이 빌립보서 4:19의 약속의 문맥을 살펴보면, 당신은 그 약속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약속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오히려, 그 약속은 구제함에 자신을 헌신한 사람들에게 주신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빌립보 사람들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실 것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에게 쓸것을 보내줬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님이 명하신 대로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했으며 그분께서 약속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그들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실 것이기 때문이다(마 6:33을 보라). 성경에서 하나님이 우리의 물질적인 필요를 채워주시는 것과 관련된 많은 약속들은 우리가 먼저 우리 자신을 헌신하는 것을 조건으로 한다.

우리는 우리의 돈에 관한 그분의 명령을 순종하지 않는 한,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실 것이라고 생각할 자격이 없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들이 그분께 십일조를 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저주받았다고 하셨으며, 그들이 십일조와 봉헌물을 순종적으로 드리면 축복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셨다(말 3:8-12을 보라).

성경에서 약속하신 많은 축복들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순종에 달려 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주실 것이라고 믿으려고 하기 전에, 먼저 자신에게 물어봐야 할 것이다. “나는 그 약속에 따른 모든 조건을 만족시키고 있는가?”

세 번째로 흔한 잘못된 믿음(A Third Common Mistake)

신약 성경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매번 뭔가를 위해 기도하고 간구할 때 적용되는 조건을 말씀하셨다.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 11:22-24, 강조 추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조건에 의하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 기도할 때 이미 받은 줄로 믿어야 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잘못 이해하여 그들이 기도 응답을 보았을 때에 받았다고 믿는다. 그들이 이제 받을 것이라고 믿지 이미 받았다고 믿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을 구하고 기도할 때, 응당 이미 응답을 받았다고 믿고, 응답하여 주심에 하나님께 감사드리기 시작해야 한다. 우리는 응답하심을 본 가 아닌 보기 에 이미 받은 줄로 믿어야 한다. 우리는 바울이 쓴 것처럼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야 한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

내가 이전에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가 마음으로 믿는다면, 우리의 말과 우리의 행동도 자연스럽게 우리가 믿는 것과 일치하다. 예수님은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마 12:34)라고 말씀하셨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같은 것을 반복적으로 구하는 잘못을 범하는 데, 이것은 그들이 이미 받은 줄로 믿지 않고 있음을 드러낸다. 만일 우리가 기도할 때, 이미 받은 줄로 믿는다면, 같은 것을 반복해서 간구할 필요가 없다. 같은 것을 반복적으로 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첫 번째 간구를 들으시지 않았다고 의심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같은 간구를 두 번 이상 하시지 않았는가?(Didn’t Jesus Make the Same Request More Than Once?)

물론,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세 번 연속 같은 기도를 하셨다(마 26:39-44을 보라). 그러나 그분은 하나님이 계시하신 뜻에 따라 믿음으로 기도하지 않으셨음을 명심하라. 사실, 그분은 십자가의 고난을 피할 수 있게 해달라고 세 번 기도하셨다. 그분은 자신의 간구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남을 알고 계셨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분은 세 번의 같은 기도에서 자신을 아버지의 뜻에 복종시켰다.

예수님의 그 같은 기도는 종종 모든 기도의 모범으로 잘못 사용되고 있다. 일부 사람은 우리는 응당 모든 기도는 끝마칠 때 예수님의 예를 따라, “만일 하나님의 뜻이라면”, 또는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말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아시는 것을 간구하셨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기도할 때 예수님의 예를 따르는 것은 잘못된 것이며 믿음이 없는 표현이다. 예를 들어 “주님, 나는 당신에게 내 죄를 고백하오니 만일 주님의 뜻이라면 저를 용서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은 나의 죄를 용서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닐 수도 있음을 의미하게 된다. 물론, 우리는 우리가 자기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다는 것을 성경에서 약속하셨음을 알고 있다(요일 1:9). 따라서 이러한 기도는 하나님이 계시한 뜻에 대한 믿음의 부족으로 드러난다.

예수님은 모든 기도를 다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끝마치신 것은 아니다. 그분이 그런 방식으로 기도하신 적은 그번 한 번뿐이다. 그리고 그번도 예수님께서 그로 말미암아 자신이 겪게 될 고통을 아시면서 그분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려고 하셨던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만일 우리가 어떤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계시가 없음으로 하여 그분의 뜻을 모른다면, “만일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이란 말로 기도를 마무리하는 것이 적절하다. 야고보는 이렇게 썼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이나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약 4:13-16).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해서 간구하고 약속의 모든 조건을 다 만족시킨 후에는 무엇을 해야 할까? 우리는 우리가 간구한 것이 현실이 되기까지 이미 받은 줄로 믿고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드려야 한다. 우리는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다(히 6:12). 사탄은 반드시 우리에게 의심을 심어줌으로써 우리를 패배시키려 할 것이며,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정신이 전쟁터임을 인식해야 한다. 의심의 생각이 우리의 정신을 공격할 때, 우리는 단지 그런 생각들을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생각으로 바꾸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말해야 한다. 우리가 이렇게 할 때, 사탄은 반드시 피하게 된다(약 4:7; 벧전 5:8-9을 보라).

행동으로 믿음을 보여준 실례(An Example of Faith in Action)

행동으로 믿음을 보여준 성경의 전형적인 실례 중 하나는 물 위를 걸은 베드로의 이야기이다. 그의 이야기를 읽어보고 우리가 그것으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을지 살펴보자.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시니라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제자가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마 14:22-33).

예수님의 제자가 전에도 갈리리 바다의 배에서 큰 풍랑 속에 갇혔던 적이 있었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마 8:23-27). 그 사건에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계셨으며 제자가 믿음이 없음을 꾸짖으신 후 풍랑을 꾸짖으셔서 잔잔하게 만드셨다. 예수님은 제자가 배를 타기 전에 호수의 반대편으로 건너가는 것이 그분의 뜻이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막 4:35을 보라). 그러나 풍랑이 일어났을 때, 그들은 그들이 처한 상황에 흔들리게 되었고, 어느 시점에 가서는 그들이 다 죽을 거라고 믿었다. 예수님은 그들이 적어도 두려워하지 않기를 기대하셨다.

그러나 이번에는 예수님은 그들 절로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도록 보내셨다. 그분은 분명히 성령님의 인도 하심대로 그렇게 하셨으며 하나님도 분명히 그날 저녁 바람이 거스를 것임을 아셨다. 따라서 주님은 그들의 믿음이 작은 도전을 받도록 허락하셨다. 그 거스르는 바람 때문에 몇 시간 정도 걸릴 거리를 밤새 갔다. 우리는 제자들의 인내심을 칭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왜 그들 중 아무도 예수님이 단지 몇 일 전에 행하신 것을 보고도 바람이 잔잔해질 것이라는 믿음이 없었는지 궁금하다. 흥미롭게도,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이 바다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실 때 “지나가려고 하셨다”(막 6:48)라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은 기적적으로 바다 위를 걸으시면서 그들 곁을 지나가신 것은 그들이 어려움을 혼자 대면하기를 바라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들은 하나님께 기도하거나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았음을 나타낸다. 나는 어려움의 바람이 우리의 삶에 불어닥쳐 우리가 긴장하고 있을 때 기적을 행하시는 자가 몇 번이나 우리 곁을 지나가셨는지 궁금하다.

믿음의 원리(Principles of Faith)

예수님은 베드로의 도전에 “오라”라는 한마디 말씀으로 응답하셨다. 만일 베드로가 이 말씀 전에 물 위를 걷기를 시도했다면 즉시로 빠졌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믿음의 근거가 되는 어떤 약속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믿음이 아닌 가정으로 걸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심지어 예수님이 말씀하신 에, 다른 제자가 물 위를 걷기를 시도했더라도 모두 즉시로 빠졌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베드로에게만 그분의 약속을 주셨기 때문이다. 그들 중 누구도 베드로가 아니므로 그 약속의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려고 하기 전에 반드시 먼저 그 약속이 우리에게 적용되며, 우리가 그 약속의 조건을 만족시키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걷기 시작한 시점에 그는 예수님을 신뢰하였다. 비록 몇 초 전에 유령의 공포 때문에 소리 질렀던 그가 첫걸음을 내 디딜 때에 머리로는 의심하였음이 분명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는 기적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그의 믿음을 따라 행동하여야만 했다. 만일 그가 배의 돛대에 달라 붙어서 엄지 발가락을 물에 담가 보면서 물이 자신의 체중을 받아주는지를 실험했다면, 그는 절대로 기적을 경험하지 못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떤 기적을 경험하기 전에는 항상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믿는 대로 행동해야 한다.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는 시간이 항상 있다. 때로는 짧고 때로는 길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우리의 오감이 주는 느낌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행동해야 하는 시간을 겪게 된다.

베드로는 처음에는 잘 진행해 나갔다. 그러나 그가 자신이 하고 있는 행동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부터, 바람과 파도를 의식하게 되고 두려워하게 되었다. 아마도 그는 걷기를 멈췄고, 다른 발작을 내딛는 것을 두려워했을 수 있다. 그리고 기적을 경험했던 그는 자신이 가라앉고 있음을 발견했다. 우리가 일단 시작한 일은 믿음으로 계속해서 해나가야 한다.

베드로는 의심 때문에 물에 빠졌다. 사람은 종종 믿음이 부족한 자신을 비난하기를 싫어한다. 그들은 오히려 비난을 하나님께로 돌린다. 하지만, 배로 무사히 돌아온 베드로가 다른 제자들에게 “하나님은 내가 예수님께로 조금 나아가기만 원하셨을 뿐이다”라고 말했다면, 그 말을 들은 예수님은 어떻게 반응하셨을까?

베드로는 믿음을 잃고 두려워했기 때문에 실패한 것이다. 그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예수님은 그를 비난하시지 않았지만, 곧 베드로에게 그분의 손을 내밀어 붙잡아 주셨다. 그리고 그분은 바로 베드로에게 그가 의심한 이유에 대해 물으신다. 베드로에게는 의심할만한 좋은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의 말씀은 그 무엇보다도 확실하기 때문이다. 우리 중의 아무도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함으로써 두려워하거나 걱정할만한 좋은 이유가 없다.

성경은 믿음으로 인한 승리와 의심으로 인한 실패들로 가득하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대부분의 동료들이 의심 때문에 광야에서 죽었지만, 믿음으로 약속의 땅을 차지하게 된다(민 14:26-30을 보라). 예수님은 그분의 제자가 둘씩 짝을 지어 복음을 전하러 갔을 때에도 모든 필요를 채워주셨다(눅 22:35을 보라). 그러나 그들은 믿음이 적은 까닭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데 실패하였다(마 17:19-20을 보라).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인해 치유의 기적을 경험했지만, 그분의 고향 나사렛의 대부분 사람은 믿지 않음으로 인해 여전히 병에 시달렸다(막 6:5-6을 보라).

그들 모두와 마찬가지로, 나도 개인적으로 나의 믿음이나 의심에 따라 승리와 실패를 경험했다. 그러나 나는 나의 실패에 대해 하나님께 원한을 품거나 비난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분을 비난함으로써 자신을 정당화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복잡한 신학적 설명을 찾아내어 이미 분명하게 드러난 하나님의 뜻을 재해석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시는 것이 불가능함을 알고 있다. 그래서 내가 실패했을 때, 나는 회개하고 다시 한 번 물 위를 걷기 시작한다. 나는 예수님이 항상 나를 용서하여 주시고 침륜하지 않도록 구원하여 주신다는 것을 발견했다!

결론은 다음과 같다. 믿는 자는 축복을 받으나 의심하는 자는 축복을 받지 못한다! 제자 삼는 사역자는 예수님의 본을 따른다. 그분은 믿음으로 충만한 분이시며 그분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권면하신다. “하나님을 믿으라!”(막 1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