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립, 용서와 화해(Confrontation, Forgiveness and Reconciliation)

제 24 장 (Chapter Twenty-Four)

우리가 이전 장에서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연구할 때, 우리는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배웠다. 만일 우리가 그들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엄숙하게 말씀하셨다(마 6:14-15을 보라).

누군가를 용서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성경의 가르침을 살펴보도록 하자.

예수님은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을 그의 빚을 탕감해주는 것에 비유했다(마 18:23-35을 보라). 누군가가 당신한테 빚을 졌는데 당신이 그 빚을 탕감해주었다고 생각해보라. 당신은 그의 빚 문서를 파기한다. 당신은 더 이상 상환받을 것을 기대하지 않으며 더 이상 그 채무자에게 화를 품지 않는다. 당신은 이제는 그를 그가 당신에게 빚졌을 때와 다르게 바라본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께 용서받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게 되면 용서해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분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실 때에는 우리에게 그분을 노하게 한 일에 대한 책임을 더 이상 지우지 않는다. 그분은 더 이상 그 죄 때문에 우리에게 화를 품지 않으신다. 그분은 우리가 한 짓에 대해 징계하거나 처벌하시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분과 화해되었다.

마찬가지로, 만일 내가 진정으로 누군가를 용서한다면, 나는 마음속으로부터 그를 풀어주며, 자비를 베풂으로써 정의 또는 복수의 욕망을 극복한다. 나는 더 이상 나에게 죄를 지은 사람에게 화를 품지 않는다. 우리는 화해하였다. 만일 내가 누군가에게 분노나 원한을 품고 있다면, 나는 아직 그를 용서하지 않았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부분에 있어서 종종 자기 자신을 속인다. 그들은 그들이 누군가를 용서하였다고 말하며,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함을 알고 있지만, 그들은 여전히 마음속 깊이 가해자에 대한 원한을 품고 있다. 그들은 가해자를 회피하는데 그것은 그들을 만나면 억제된 분노가 다시금 표면에 노출되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 왜냐하면,, 내가 바로 그렇게 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속이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은 심지어 우리가 형제에게 노하지 않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기억하라(마 5:22을 보라)

지금 내가 한 가지 질문해보자. 어느 사람을 용서하기가 더 쉬운가? 용서를 구하는 가해자인가 아니면 용서를 구하지 않는 가해자인가? 물론, 우리는 모두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가해자를 용서하기가 훨씬 쉽다는 것에 동의한다. 사실, 용서를 구하는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그렇지 않은 사람을 용서하는 것보다 무한대 쉬워 보인다. 용서를 구하지 않는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 보인다.

다른 각도에서 이 문제를 생각해 보자. 만일 회개한 가해자를 용서하기를 거부하는 것과 회개하지 않은 가해자를 용서하기를 거부하는 것이 모두 잘못된 것이라면, 어느 경우가 더 큰 죄일까? 만일 이 두 경우가 모두 잘못된 것이라면, 나는 우리가 회개한 가해자를 용서하지 않는 것이 더 큰 죄악이라는데 모두 동의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성경의 놀라운 해석(A Surprise from Scripture)

이 모든 것은 나로 하여금 다른 한 질문을 하게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죄 지은 자가 자기 자신을 낮추려 하지 않고 죄를 인정하지 않으며 용서를 구하지 않는 사람일지라도 우리가 그들을 용서하기를 원하실까?

우리가 성경을 더 가깝게 연구할수록, 우리는 대답은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놀랍게 하는 것은, 성경은 우리가 자신의 원수를 포함한 모든 사람을 사랑하라고 명령하고 있지만, 우리가 모든 사람을 용서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씀한다.

예를 들어, 예수님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형제를 단순히 용서하기를 원하실까? 아니, 그렇지 않다. 그렇지 않으면, 그분은 마태복음 18:15-17에서 화해하기 위해서는 네 가지 단계를 따르며 가해자가 회개하지 않을 때에는 교회에서 추방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네 번째 단계(추방)에 도달하면, 용서와 추방이 호환되지 않듯이 가해자에게는 용서가 주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그를 용서한 후 교회에서 추방하였다”라고 말하는 것은 이상하게 들릴 것이다. 왜냐하면, 용서의 결과는 화해이지 단절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나는 당신을 용서하지만, 지금부터 당신과 아무 상관이 없다”라고 말씀하신다면 당신은 어떤 생각이 들겠는가?) 예수님은 우리에게 추방당한 사람을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고 말씀하셨다. 이 두 부류의 사람은 유대인들이 상종하지 않는 실제로는 혐오하는 사람들이다.

예수님이 설명하신 네 가지 단계에서 가해자가 회개하지 않는 한, 첫 번째 두 번째 또는 세 번째 단계 이후에도 용서는 부여되지 않는다. 만일 그가 어떤 단계 이후에도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는 다음 단계로 넘어가며, 여전히 회개하지 않은 가해자로 취급된다. 오직 가해자가 당신의 말을 들을 때(즉, 회개할 때)에만, 당신이 “형제를 얻었다”고 말할 수 있다(곧 화해를 이룬 것이다).

대립의 목적은 용서해주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용서는 가해자의 회개에 따라 예견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1) 가해자가 회개하리라는 희망을 품고 그와 대립하며 (2) 그가 회개하면 (3) 용서해준다.

이 모든 것으로 보아,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형제가 대립하는 과정을 거친 후에도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를 단순히 용서하기를 바라시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이 우리에게 죄 지은 형제를 미워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것은 아니다. 반면에, 우리는 죄 지은자를 사랑하며 그들을 용서하고 그들과 화해하고 싶기 때문에 그들과 대립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설명하신 화해를 위한 세 단계의 노력을 다하였다면, 네 번째 단계는 그리스도에 대한 순종으로 그 사람과의 관계를 끝내야 한다.[1] 우리가 음행하거나 술 취하거나 동성애자인 소위 그리스도인이라 일컫는 자들과(고전 5:11을 보라) 사귐이 없듯이, 우리는 교회의 권계에도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소위 그리스도인들과도 사귀지 말아야 한다. 그런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진정한 제자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며 그분의 교회에 대한 비난을 가져온다.

하나님의 본(God’s Example)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할 우리의 책임을 더 깊이 생각해 볼수록, 우리는 왜 하나님은 그분 자신이 하시지 않은 것을 우리가 하기를 기대하시는지에 대해 의문이 생긴다. 물론 하나님은 죄인을 사랑하시고 용서하시기 위해 자비를 베푸신다. 그분은 자신의 진노를 억제하시고 그들에게 회개 할 시간을 주신다. 그러나 그들이 실제로 용서받는 것은 그들의 회개에 달려 있다. 하나님은 죄인들이 회개하지 않는 한 그들을 용서하시지 않는다. 그럼 왜 우리는 그분이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기대하신다고 생각하는가?

이로부터 보아, 사람이 용서하려 하지 않는 죄가 하나님 보시기에 통탄할 죄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용서를 구하는 사람들을 용서해주지 않는 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예수님이 교회의 규율에 관한 네 단계를 설명하신 후, 베드로가 아래와 같이 물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마 18:21-22).

베드로는 예수님이 조금 전에 하나의 죄 때문에 회개하지 않는 형제를 이방인과 세리처럼 여기라고 말씀하셨을 때 회개하지 않는 형제의 죄를 수백 번 용서하기를 바라신다고 생각했을까? 그럴 가능성은 매우 적어 보인다. 다시 말하지만, 당신은 당신이 용서한 사람을 증오의 대상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우리의 생각을 자극하는 또 다른 질문이 있다. 만일 예수님께서 우리가 절대 회개하지 않을 수백 가지의 죄를 지은 신자를 수백 번도 넘게 용서해줌으로써 그 사람과의 관계를 유지하기를 원하신다면, 왜 그분은 우리의 배우자가 그가 범한 유일한 죄인 간음 죄를 회개하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가 이혼할 수 있도록 허락하셨겠는가(마 5:32을 보라)?[2] 그것은 오히려 일관성이 없어 보인다.

예수님의 자세한 해석(An Elaboration)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형제를 사백 구십 번 용서하라는 말씀을 하신 후, 그분은 베드로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비유를 통하여 설명하셨다.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마 18:23-35).

첫 번째 종은 주인에게 용서를 구하였기 때문에 용서받았음을 주목하라. 또한, 두 번째 종도 겸손하게 첫 번째 종의 용서를 구하였음을 주목하라. 첫 번째 종은 자기가 용서받은 것처럼 두 번째 종을 용서해주지 않았으며 이것은 주인을 크게 화나게 했다. 이로 보아,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그분의 비유에서 전혀 설명되지 않은, 회개하지 않은 형제를 용서하는 것을 그에게 원하신다고 생각했을까? 그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리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회개하지 않은 형제를 대립하는 과정을 제대로 거친 후에는 그들을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대하라고 말씀하셨으므로 더욱 그래 보인다.

또한, 베드로가 예수님은 우리가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우리를 징계하신다는 말씀에 비추어 그가 회개하지 않은 형제를 용서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은 더욱 적다. 예수님은 우리가 탕감받은, 영원히 갚지 못할 모든 빚을 다시 갚을 때까지 옥졸들에게 넘기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이것이 하나님도 용서하지 않은 형제를 용서하지 않은 그리스도인에게 과연 정당한 징계가 될 수 있을까? 만일 한 형제가 나에게 죄를 범하면, 그는 하나님께 죄를 범한 것이 되며 그가 회개하지 않는 한, 하나님은 그를 용서하시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내가 그분도 용서하시지 않은 형제를 용서하지 않았다고 하여 나에게 정당한 처벌을 내리실 수 있을까?

용서의 개요(A Synopsis)

예수님께서 우리가 형제를 용서할 것에 대한 기대는 누가복음 17:3-4에 기록된 그분의 말씀에서 간결하게 명시되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강조 추가).

더 이상 명확할 수가 없다. 예수님은 우리가 형제가 회개할 때 그들을 용서해주기를 기대하셨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주시옵고”라고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다른 사람을 대한 것 처럼 우리를 대하시기를 간구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간구하기 전에는 그분께서 우리를 용서하시기를 기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 왜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가 우리에게 용서를 구하지 않은 사람을 용서하기를 기대하신다고 생각하는가?

다시 말하지만, 이 모든 것이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그리스도 안의 형제 자매에 대하여 원한을 품을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리는 우리에게 죄 지은 형제와 대립하도록 명령받았으며, 그렇게 해야만 그와의 화해가 있을 수 있으며, 그 또한 죄 지은 대상인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하는 것이야말로 사랑이다. 그러나 너무 자주, 그리스도인들은 자기에게 죄 지은 신자를 용서했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단지 대립을 피하기 위한 변명일 뿐이다. 그들은 실제로는 용서하지 않았으며 이는 그들의 행동에서 잘 드러난다. 그들은 가해자를 피하기 위해 애쓰며 종종 자신이 받은 상처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들은 화해하지 않았다.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은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와 대립하시는데 그것은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용서하고 싶어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분을 본받아, 우리에게 죄 지은 신자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립함으로써, 회개와 용서와 화해가 이루어지게 해야 한다.

하나님은 항상 그분의 백성이 서로 진심으로 사랑하기를 바라신다. 이러한 사랑은 책망은 허용하나 원한을 품는 것은 용납하지 않는다. 모세의 율법에도 이러한 계명이 있다.

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네 이웃을 반드시 견책하라 그러면 네가 그에 대하여 죄를 담당하지 아니하리라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 19:17-18, 강조 추가).

이의(An Objection)

그러나 마가복음 11:25-26에서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시는가? 그것은 우리가 용서를 구하는 것과는 관계없이 모든 사람의 모든 죄를 용서해야 함을 의미하지 않는가?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

이 한 구절이 우리가 이 주제에 관해 고려했던 다른 모든 구절을 대체할 수는 없다. 우리는 이미 우리가 우리에게 용서를 구하는 사람을 거부하는 것이 하나님께 얼마나 슬픈 일인지를 알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구절을 잘 확립된 사실에 비추어 해석 할 수 있다. 예수님은 여기에서 단지 우리가 하나님께 용서받기를 원한다면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함을 강조하셨다. 그분은 우리에게 용서의 구체적인 기교나 용서받기 위해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관하여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분께 용서받기 위해 반드시 하나님께 용서를 구해야한다고도 말씀하시지 않았음을 주목하라.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가 우리의 간구함에 입각한다는 성경의 다른 모든 가르침을 무시할 수 있을까(마 6:12; 요일 1:9을 보라)? 우리는 예수님께서 여기서 그점을 언급하시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지 않아도 된다고 가정할 수 있는가? 그것은 성경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현명하지 못한 가정이다. 또한, 우리의 용서가 그들이 용서를 구하는 것에 입각한다는 성경의 그 밖의 가르침을 무시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현명하지 못한 것이다.

다른 이의(Another Objection)

예수님은 그의 옷을 나누는 군인들을 위해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라고 기도하시지 않았는가?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이 용서를 구하지 않아도 용서해주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지 않는가?

예수님은 단지 어느 정도까지만 그들을 용서하셨다. 그것은 무지한 자에게 베푸신 자비를 보여준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완전히 공의로우신 분이시기에 자기가 죄를 짓고 있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만 책임을 물으시기 때문이다.

군인을 위한 예수님의 기도가 그들이 천국에 갈 것이라는 것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 그것은 단지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옷을 나눈 것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는 것만 보장할 뿐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해 무지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단지 사형을 집행해야 할 또 한 명의 죄수로만 간주했었다. 하나님은 그들이 실제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아시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셨으며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심판을 면해주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그분께 고통을 가져다준 모든 사람을 다 용서하시기를 기도하셨는가? 아니, 그분은 그러지 않으셨다. 예를 들어, 유다에 대하여 예수님은 그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을 뻔하였다고 말씀하셨다(마 26:24을 보라). 예수님은 분명히 그분의 아버지께서 유다를 용서하시기를 기도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우리가 시편 69편과 109편을 예수님의 예언 기도로 본다면, 베드로가 분명하게 말했던 것처럼(행 1:15-20을 보라), 절대 용서하셨을리가 없다. 예수님은 무지한 범법자가 아닌 유다에게 심판이 떨어지기를 기도하셨다.

그리스도를 본받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으로서 우리는 마땅히 예수님의 옷을 나눈 무지한 군인과 같은 불신자들처럼 우리에게 한 짓에 대해 무지한 자들에 대해서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가 우리의 원수를 사랑하고 우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 하며 우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우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바라신다(눅 6:27-28을 보라). 우리는 우리의 사랑으로 그들의 증오를 녹이고, 선으로 악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점은 심지어 모세의 율법에도 기록되었다.

네가 만일 네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보거든 반드시 그 사람에게로 돌릴지며 네가 만일 너를 미워하는 자의 나귀가 짐을 싣고 엎드러짐을 보거든 그것을 버려두지 말고 그것을 도와 그 짐을 부릴지니라(출 23:4-5)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음식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게 하라 그리 하는 것은 핀 숯을 그의 머리에 놓는 것과 일반이요 여호와께서 네게 갚아 주시리라(잠 25:21-22).

흥미로운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가 원수를 사랑하고 우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고 우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고 우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명령하셨지만(눅 6:27-28을 보라), 그들을 용서하라고 말씀하신 적은 없다. 사실상, 우리는 그들을 용서하지 않고도 사랑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용서하시지 않은 상태에서 사랑하실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들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행동으로 나타나야 한다.

예수님이 하나님께 그분의 옷을 나눈 군인을 용서하시기를 기도하셨다고 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주제에 대해 살펴본 성경의 다른 모든 사항을 무시하고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다 용서하기를 기대하신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단지 우리가 자신의 죄를 모르고 죄 지은 사람을 자동적으로 용서해주어야 하며 불신자들에게 특별한 자비를 베풀어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

요셉은 어떠한가? (What About Joseph?)

자신을 노예로 팔아버린 형제들을 은혜롭게 용서한 요셉은 종종 용서를 구하는 여부와는 관계없이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다 용서해야 한다는 본보기로 사용된다. 그러나 요셉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이 과연 이것일까?

아니, 그렇지 않다.

요셉은 그들을 회개의 장소로 이끌기 위해 그들에게 적어도 일 년 동안의 연속적인 시련과 시험을 주었다. 그는 심지어 그 중의 한 형제를 애굽에 몇 달 동안 감금까지 하였다(창 42:24을 보라). 그의 모든 형제들이 마침내 자신의 죄를 깨달았을 때(창 42:21; 44:16을 보라), 그리고 그 중 하나가 자신의 아버지가 가장 아끼는 아들의 대신하여 자기가 종으로 머무르겠다고 할 때(창 44:33을 보라), 요셉은 그들이 더이상 자신을 팔 때처럼 질투와 이기심이 많은 형제들이 아님을 알아냈다. 바로 그다음에야 요셉은 자신의 신분을 공개하고 자기에게 죄 지은 형제들에게 은혜를 베풀었다. 요셉이 즉각적으로 그들을 “용서”하였다면,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모든 사람에게 즉각적인 용서를 하라”는 가르침의 결함 중의 하나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형제와 대립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그들을 용서해주는 것은 두 가지 결과를 낳는다. (1) 거짓 용서를 하게 되고 화해를 이루지 못한다 (2) 죄 지은 자가 회개하지 않고 영적으로 성장하지 않는다.

마태복음 18:15-17의 실천(The Practice of Matthew 18:15-17)

예수님께서 나열하신 화해의 네 단계는 매우 간단해 보여도 실제로 실천하기에는 훨씬 복잡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네 단계를 설명하실 때에 갑형제는 을형제가 자기에게 죄를 지었다고 확신한다는 전제를 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갑형제가 잘못 생각했을 수 있다. 그럼 아래에 모든 가능한 상황을 고려해보자.

만일 갑형제가 을형제가 자기에게 죄를 지었다고 확신한다면, 그는 먼저 자기가 눈의 티를 찾듯이 을형제에게 지나치게 비판적이지 않은지 확인해야 한다. 많은 작은 잘못에 대해서는 그냥 간과하거나 너그럽게 받아주어야 한다(마 7:3-5을 보라). 그러나 만일 갑형제가 자신이 중요한 범죄에 대해 을형제에게 분노를 느끼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면, 그는 을형제와 대립해야 한다.

그는 예수님의 계명대로 개인적으로 을형제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보여줘야 한다. 그의 동기는 사랑이어야 하고 화해가 목표여야 한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을형제의 잘못에 대해 말하지 말아야 한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벧전 4:8).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면 그 사람의 죄를 폭로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 죄들을 덮어줄 것이다.

그의 대립은 온유해야 하며 그의 사랑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그는 아래 말과 비슷한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을형제, 나는 우리의 관계를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당신에 대해 내가 마음의 벽을 쌓게 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나는 우리 사이에 그런 장벽이 있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왜 당신이 나에게 죄를 지었다고 느끼는지를 반드시 말해야 합니다. 그리고 만일 내가 이 문제를 일으킨 점이 있다면 당신이 나에게 알려주기를 바랍니다.” 그리고서 그는 을형제에게 그가 죄 지은 점이 무엇인지를 온유하게 알려줘야 한다.

대부분의 경우에, 을형제는 자기가 갑형제에게 죄 지었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일단 그가 깨닫게 되면 용서를 구할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갑형제는 을형제를 즉시 용서해주어야 하며 그 둘은 화해하게 된다.

다른 하나의 가능한 상황은 을형제는 갑형제가 자기에게 범한 잘못을 말함으로써 갑형제에게 범한 자기의 죄를 정당화하려 할 것이다. 그런 경우라면, 을형제는 언녕 갑형제와 대립했어야 한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결국 대화가 오가기에 화해의 희망이 보인다.

이러한 경우에, 서로에게 죄 지은 당사자들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하고 각각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서로 용서하고 또 용서를 받아야 한다. 두 사람은 화해하게 된다.

세 번째는 갑형제와 을형제가 서로 화해 할 수 없는 상황이다. 따라서 그들은 도움이 필요하고, 두 번째 단계로 나아가게 된다.

두 번째 단계(Step Two)

갑형제와 을형제가 지금 그들의 화해를 돕기 위해 누가 개입해야 할지에 대해 서로 합의를 보는 것이 가장 좋다. 이상적인 것은, 갑형제와 을형제를 잘 알고 또 사랑해주는 병형제와 정형제가 참여하는 것이 좋다. 그래야만 그들의 공정성을 보증할 수 있다. 그리고 병형제와 정형제만 이 분쟁에 대해 알아야 하는데 그것은 그들이 갑형제와 을형제를 사랑하고 존중해주기 때문이다.

만일 을형제가 이 점에 대해 협조하지 않는다면, 갑형제는 다른 도울 수 있는 사람을 찾을지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

만일 병형제와 정형제가 현명하다면, 그들은 갑형제와 을형제 모두의 관점을 듣기 전까지는 판단을 내리지 않을 것이다. 병형제와 정형제가 일단 판단을 내린 후에는, 갑형제와 을형제는 그들의 결정에 복종하여야 하며, 그들 중 일방 또는 쌍방은 권유받은 대로 서로에게 사과하고 배상해야 한다.

병형제와 정형제는 일방의 잘못임에도 불구하고 쌍방이 모두 회개하기를 권유함으로써 지나친 공평을 주장하여 개인적인 위험을 적게 감수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갑형제나 을형제 중 누구라도 그들의 재판을 거부한다면, 그것을 전체 교회 이전에 항소하게 되며, 그들의 비겁한 재판이 모든 사람에게 분명하게 드러나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병형제와 정형제는 갑형제와 을형제와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진실과 타협하려는 유혹을 받게 되는데 이것은 왜 두 명의 재판관이 한 명보다 나은지를 잘 보여준다. 왜냐하면, 두 명의 재판관은 진실을 밝히는 데 있어서 서로를 강화하기 때문이다. 또한, 두 명의 결정은 갑형제와 을형제에게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할 가능성이 크다.

세 번째 단계(Step Three)

갑형제 또는 을형제 중 한 명이 병형제와 정형제가 내린 결론을 거부할 경우, 이 문제를 전체 교회에 반영해야 한다. 이 세 번째 단계는 제도적 교회에서 종래로 실행된 적이 없는데 왜냐하면, 이렇게 하면 사람들의 의견이 갈라지면서 교회의 분열을 가져올 수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종래로 지역교회를 가정교회의 크기보다 더 크게 의도하신 적이 없다. 모든 사람이 갑형제와 을형제에 대해 잘 알고 아껴주는 작은 규모의 교회가 세 번째 단계가 의도된 성경적인 설정이다. 제도적 교회에서 세 번째 단계는 모든 사람이 갑형제와 을형제를 잘 알고 사랑해주는 작은 그룹 안에서 진행되어야 한다. 만일 갑형제와 을형제가 서로 다른 두 지역의 그룹에 소속되었다면, 두 그룹에서 각각 가장 적합한 구성원들 몇 명씩 의사결정 그룹으로 섬길 수 있다.

교회가 일단 그 판결을 내리면, 갑형제와 을형제는 모두 그 판결에 복종해야 하며, 복종하지 않는 것의 결과를 알아야 한다. 사과하고 용서를 베풀고 화해가 이루어져야 한다.

만일 갑형제나 을형제가 권장받은대로 사과하기를 거부한다면, 그를 교회에서 쫓아내야 하며 교인들은 누구도 더 이상 그와 함께 교제하지 말아야 한다. 통상적으로, 이 지경에 이르면, 회개하지 않은 사람은 이미 자발적으로 교회를 떠났거나, 이런 단계를 밟기 전에 이미 떠났을 것이다. 이는 그가 자신의 영적 가족을 사랑하는데 진정으로 헌신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보편적인 문제점(A Common Problem)

제도적 교회에서, 분쟁을 해결할 때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단순히 한 교회를 떠나 다른 교회로 가는데 이런 교회에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자신의 왕국을 세우고 싶어하는 목사가 있으며 그런 목사는 다른 목사들과 진정한 관계를 세우지 않았으며 그런 사람들을 환영하고 그들 편을 들어주며 그들이 하는 비참한 이야기를 들어준다. 이렇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명령하신 화해를 위한 단계를 효과적으로 폐해버린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이런 목사들이 교회로 환영했던 상처 받은 자들은 불과 몇 달 또는 몇 년 사이에 또다시 상처받고 다른 교회로 떠나간다.

예수님은 교회가 가정의 크기에 맞게 충분히 작고 그 지역의 목사 / 장로 / 감독들이 한 몸 안에서 협력하기를 바라셨다. 따라서 한 교회에서 축출당한 사람은 그 지역의 모든 교회에서 축출당한 것과 같다. 새로 교회에 들어온 사람에게 그가 전에 소속되었던 교회의 배경에 대해 물어보고 이전 교회의 지도자와 문의하여 그런 사람들을 환영해야 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각 목사 / 장로 / 감독의 책임이다.

거룩한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의도(God’s Intention for a Holy Church)

제도적 교회의 또 다른 보편적인 문제점은 교회가 종종 예배만 드리기 위해 모이고 개인적인 관계가 순전히 사회성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서로에게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으려는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아무도, 특히 목사들은 그들이 어떠한 삶을 살고 있는지를 모르고 거룩하지 못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다니는 교회에 지속적으로 얼룩을 가져다준다. 그리고 외부인들은 그들이 그리스도인으로 간주하는 사람들이 불신자들과 다를 바가 없다고 판단한다.

이 점을 보더라도 제도적 교회의 구조가 하나님이 의도하신 그분의 거룩한 교회가 아니라는 것을 충분히 증명할 수 있다. 거룩하지 않고 위선적인 사람들은 종종 큰 제도적 교회에 숨어 있으며 그리스도께 치욕을 가져다준다. 그러나 우리가 마태복음 18:15-17에서 읽은 것처럼, 예수님은 그분의 교회가 자결하고 헌신 되고 거룩한 사람들로 이루어지기를 분명하게 의도하셨다. 세상은 교회를 바라보게 되며 그분의 순결한 신부를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그들은 남편에게 부정한 큰 창녀를 보게 된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심각한 상황을 말할 때, 하나님은 교회가 자결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뜻함이 분명하다. 교회에 이미 받아들여진 지체가 실제로 자신의 계모와 불륜 관계 속에서 살고 있었다.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그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서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 같이 이런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노라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 내가 너희에게 쓴 편지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이나 속여 빼앗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너희가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욕을 부리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모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속여 빼앗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밖에 있는 사람들을 판단 하는 것이야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하지 아니하랴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쫓으라(고전 5:1-5, 9-13).

이런 사람은 화해의 단계를 거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는 분명히 진정한 신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를 “소위 형제”와 같은 “악한 사람”이라고 언급했다. 또한, 몇 구절 후, 바울은 이렇게 썼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전 6:9-10).

분명한 것은,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사람들처럼 부도덕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거짓된 믿음을 배반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었다. 그런 사람들은 형제로 취급할 수 없으며 화해의 네 단계를 거칠 필요가 없다. 그들은 교회에서 쫓겨나야 하며, 사탄에게 내주어야 한다. 그래야만 교회가 그들의 자기기만을 부추기지 않게 되고 그들은 회개해야 할 필요를 볼 수 있어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고전 5:5).

오늘날, 전 세계의 대형 교회에서, 수백 명의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인체 하는데 그들은 성경의 기준으로 볼 때 불신자들이며 마땅히 교회에서 축출당해야 한다. 성경은 교회가 회개하지 않은 음행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를 교회 내에서 쫓아내야 할 책임이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오늘날 종종 “은혜”의 기치 아래에 비슷한 문제를 가진 다른 “신자”들에 의해 격려받도록 교회에 배치된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삶의 변화시키는 능력에 대한 모욕이다.

타락한 지도자(Fallen Leaders)

마지막으로, (간음 죄와 같이) 심각한 죄에 빠졌던 지도자가 회개하는 즉시로 원래의 위치에 복원되어야 할까? 비록 주님은 회개한 지도자를 즉시 용서하시지만(교회도 그래야 한다), 타락한 지도자는 그가 사역했던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잃게 될 것이다. 신뢰는 그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타락한 지도자들은 자발적으로 지도자 위치에서 물러나고 자신의 신뢰성을 입증할 수 있을 때까지 영적인 감독 아래에 복종해야 한다. 그들은 반드시 다시 시작해야 한다. 겸손하게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작은 일부터 섬기기를 꺼리는 사람은 교회 내의 아무에게도 지도자로서 복종 받을 수 없다.

요약(In Summary)

제자 삼는 사역자는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도록”(딤후 4:2)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부르심에 대해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제자들에게 항상 자비로운 관용의 방식으로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필요할 때에는 온유하게 대립하고, 필요하다면 다른 사람의 도움을 통하여 대립하며, 언제든지 용서를 구하면 용서해주어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은 거짓 용서를 함으로써 깨진 관계에 진정한 치유를 가져오지 못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의 교회를 순수하고 거룩하게 유지하기 위해 모든 면에서 주님께 순종하기 위해 노력하며 그분의 이름을 찬양을 찬양하자!

대립과 교회 규율에 관한 보다 많은 연구를 하려면, 로마서 16:17-18; 고린도후서 13:1-3; 갈라디아서 2:11-14; 데살로니가후서 3:6, 14-15; 디모데전서 1:19-20, 5:19-20; 디도서 3:10-11; 야고보서 5:19-20; 요한이서10장-11장을 참고하라.

 


[1]교회에서 추방당한 사람이 후에 회개하면, 예수님은 사람들이 그를 용서해주기를 바라신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2]간음을 범한 배우자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그 배우자와 이혼하기 전에 먼저 예수님께서 설명하신 화해의 세 가지 단계를 거쳐야 한다. 그 부정한 배우자가 회개하면, 우리는 예수님의 계명에 따라 그를 용서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