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으로 보면, 제자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믿는 신자이며 그분의 말씀안에 거하여 죄로부터 최종적으로 자유케 된 사람이다. 제자는 그리스도의 모든 계명을 지키기를 배우는 사람이며 예수님을 그의 가족과 그만의 만족, 그의 소유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며 그 사랑을 그의 삶을 통하여 드러낸다.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는 서로 사랑하며 그 사랑을 실천을 통하여 보여준다. 그들은 열매를 맺어간다.2 이런 사람들이 바로 예수님이 원하시는 사람들이다.
분명한 것은 그분의 제자가 아닌 사람은 그분을 위하여 제자를 삼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의 제자를 삼으려고 하기 전에 반드시 먼저 우리 자신이 그분의 제자임을 확신해야 한다. 많은 사역자가 제자란 무엇인가의 성경적인 정의에 재보면 부족하다. 이런 사역자가 제자를 삼을 것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희망이 없다. 그리고 그들은 사실상 시도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제자를 삼으므로 인해 오는 어려움을 인내할만큼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충분히 헌신하지 않았다.
이 시점부터 나는 이 책을 계속 읽어가는 사역자들은 예수님의 계명에 순종하기 위해 온전히 헌신된 제자가라고 가정하겠다. 만약 당신이 그렇지 않다면, 진정한 제자가 되기 위해 필요한 헌신을 하기전까지는 이 책을 계속 읽는 것은 의미가 없다. 더는 기다지 말라! 무릎을 꿇고 회개하라! 그분의 놀라운 은총으로, 하나님은 당신을 용서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실 것이다.
제자도에 대한 재해석(Redefining Discipleship)
비록 예수님이 제자란 무엇인가에 대해 명확하게 말씀하셨지만, 많은 사람은 그분의 정의를 자기만의 것으로 대체한다. 예를 들어, 어떤사람들에게 있어서 제자란 단어는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하는 막연한 정의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제자란 단어는 성경적 의미가 모두 제거된 것이다.
다른 사람은 제자도는 천국을 약속받은 신자에게 있어서 선택적인 두 번째 헌신단계라고 여긴다. 그들은 한 사람이 예수님안에서 천국을 약속받은 신자이기는 하지만 예수님의 제자는 아닐수 있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성경에 쓰여 있는 제자도에 대한 예수님의 요구사항을 단수히 무시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두 수준의 그리스도인이 있다고 가르쳐진다 – 예수님을 믿는 신자와 예수님을 믿고 그분께 헌신된 제자. 이러한 관념 때문에, 많은 신자와 적은 제자가 있지만 둘다 천국에 간다고 말하여 진다.
이 교리는 제자를 삼으라는 그리스도의 계명을 효과적으로 중화시킨다. 만일 제자가 된다는 것이 자기부인과 헌신 그리고 심지어 고난을 의미한다면, 그리고 제자가 된다는 것이 하나의 선택사항이라면, 대부분의 사람은 제자가 되는 것을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특별히 그들이 제자가 아닌 신분으로도 천국에서 환대를 받을 수 있다고 여긴다면 말이다.
그래서 우리가 물어야 할 몇 가지 아주 중요한 질문이 있다. 성경은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이 꼭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고 가르치는가? 신자에게 있어서 제자도란 하나의 선택사항인가? 헌신되지 않은 신자와 헌신된 신자란 두 레벨의 그리스도인이 존재하는가?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은 아니다이다. 신약 성경에서 그리스도인을 신자와 제자 두 부류로 나눈적이 없다.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제자들에 대한 반복적으로 거론하는 것을 읽을 수 있는데 여기에 나오는 제자는 더 높은 계급의 보다 더 헌신된 신자들을 가리키는 것이 결코 아니다.[1] 매 개인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제자이다. 사실상 “제자가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다”(행 11:26).
신약 성경에서 제자로 번역된 헬라어(mathetes)가 261번 기록된 반면 신자로 번역된 헬라어(pistos)는 9번 밖에 기록되지 않았다(New American Standard 번역본에서는 신자로 번역되었다). 그리스도인으로 번역된 헬라어(Christianos)는 3번밖에 기록되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만으로도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을 충분히 설득시킬 수 있다. 초대교회 때 예수님을 믿었던 사람은 모두 그분의 제자로 여겨졌다.
예수님의 지적(Jesus’ Commentary)
예수님은 신자에게 있어서 제자로 되는 것이 차요적인, 선택적인 단계라고 절대로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누가복음 14장에서 읽었던 예수님이 제자도에 관한 세 가지 요구조건은 신자들에게 더 높은 단계의 헌신으로 향해 초청하는 것이 아니다. 반면, 그분의 말씀은 무리 중에 있는 매개 인을 향한 것이다. 제자가 되는 것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첫 번째 단계이다. 더욱이 요한복음 8장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읽을 수 있다.
이 말씀을 하시매 많은 사람이 믿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0-32).
그 누구도 예수님이 새 신자들에게 그분의 제자가 되라고 말씀하고 계신다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을 반박할 수 없을 것이다. 예수님은 새 신자들에게 “다음 단계 곧 나의 제자로 헌신하는 일은 앞으로 훗날에 고려해야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그렇지 않다. 예수님은 새 신자들이 이미 제자가 될 것으로 예상한 것처럼, 신자 와 제자란 단어가 동의어인 것처럼 말씀하셨다. 그분은 새 신자들에게 그들이 그분의 제자인 것을 증거할 수 있는 것은 곧 그들이 죄로부터 자유케 하는 그분의 말씀안에 거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 8:34-36을 보라).
예수님은 사람들의 신앙고백만으로는 그들이 진정으로 믿는다고 보장할 수 없음을 아셨다. 그분은 또한, 그분을 하나님의 독생자로 진정으로 믿는 사람은 그분의 제자가 되기를 원하며 그분께 순종하고 그분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행동할 것이라는 것도 아셨다. 이런한 신자 또는 제자들은 자연히 그분의 말씀안에 거하여 살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예수님의 계명을 배우면서 그분의 뜻을 알아가는 과정속에 그들은 점차적으로 죄로부터 자유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예수님은 그분의 신자가 되려는 사람들을 즉각적으로 시험하신 것이다. “너희가 참으로 내 제자라면”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들이 참 제자가 아닌 고백만 하는 제자일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들은 스스로 속일 수 있다. 예수님의 시험을 통과해야만 그들이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임을 알 수 있다(그리고 요한복음 8:37-59의 남은 말씀을 읽어보면 예수님이 그들의 신실성을 의심하는 이유가 있음을 보아낼 수 있다).[2]
우리들의 주요 말씀인 마태복음 28:18-20은 제자는 헌신된 신자들의 더 높은 차원이라는 이론을 자체적으로 배제한다. 예수님은 지상명령에서 제자는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요구하신다. 물론, 사도행전에서도 사도들이 새 신자에게 세례를 주기 전 그들이 “철저하게 그리스도께 헌신하는 두 번째 단계”가 있기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반면, 사도들은 모든 새 신자들에게 그들이 회심한 후 거의 즉각적으로 세례를 베풀었다. 그들은 모든 진정한 신자는 제자라고 믿었다.
이런 점에서 제자들은 특별히 헌신된 신자들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들만의 이론과 일관성이 없다. 그들 중 대부분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은 아무나 세례를 주었다. 결코 그들이 제자신분에 맞는 헌신수준에 도달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는다. 그들이 진정으로 그들이 가르치는 것을 믿는다면 그들은 응당 제자신분의 단계에 도달한, 극소수의 사람들한테만 세례를 주어야 할 것이다.
아마도 이 무도한 교리에 대한 마지막 일격은 충분할 것이다. 만약 제자가 신자들과 다르다면, 요한은 왜 형제를 향한 사랑이 진정으로 거듭난 신자들의 증표라고 썼으며(요일 3:14을 보라), 예수님은 형제를 향한 사랑이 진정한 제자들의 증표라고 말씀하셨겠는가(요 13:35)?
이 거짓 교리의 기원(The Origin of this False Doctrine)
그리스도인을 신자와 제자 두 계급으로 나누는 생각이 성경적 근거가 없다면, 이 교리가 어떻게 옹호될 수 있을까? 그 답은 바로 이 교리가 전적으로 구원에 대한 또 다른 거짓 교리에 기인한다. 그 교리는 제자에 대한 요구 조건이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는 사실과 호환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 논리에 따르면, 제자에 대한 요구 조건이 구원을 얻는 요구 조건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받아 천국에 갈 수 있는 사람에게 있어서, 제자가 된다는 것은 반드시 하나의 선택적인 헌신단계라고 그들은 말한다.
많은 성경 구절은 이 이론의 치명적인 잘못을 반대하고 있다. 예를 들어, 산상수훈 중, 많은 계명을 열거하신 후 마지막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보다 더 분명한 것이 있을까?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이 말씀과 다른 여러 말씀 속에서 예수님은 명백하게 순종과 구원을 연관시켰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수많은 이런 말씀들과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성경 말씀을 조화시킬 수 있을까? 이것은 아주 간단하다. 하나님은, 그분의 놀라운 은혜로, 모든 사람에게 회개하고, 믿고, 거듭나고, 성령의 감동으로 순종의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일시적으로 주고 있다. 그러므로 구원은 은혜로 받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그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기 때문이다. 죄인들은 구원을 받을 자격이 없다. 때문에 그들이 구원을 받으려면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
우리의 구원에 관하여 하나님의 은혜는 많은 방식으로 드러났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의 죽으심, 복음으로 우리를 부르시고, 그리스도에게로 이끌어주심, 우리로 하여금 죄를 인정하게 하시고, 회개할 기회를 주시고,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우리에게 그분의 성령으로 충만케 하시고, 우리 삶 속의 죄의 능력을 폐하시고, 거룩한 삶을 살도록 힘을 주시며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 그분이 훈계하시는 등 방식을 통하여 드러냈다. 이 중 그 어떠한 축복도 우리의 힘으로 얻은 것이 없다. 우리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은혜로 구원받은 것이다.
성경 말씀을 보면, 구원은 “은혜에 의하여”만 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게 된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나니”(엡2:8상). 이 두 구성 요소가 필요하며 그들은 분명히 호환되지 않는다. 사람이 구원을 받으려면 은혜와 믿음 모두 필요하다. 하나님은 그분의 은혜를 우리에게 베푸시고, 우리는 믿음으로 응답한다. 진정한 믿음은 당연히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순종을 일으킨다. 야고보가 신자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두 번째 장에 썼던 것처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며 아무 유익이 없으며 자기를 구원하지 못한다(약 2:14-26을 보라).[3]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는 누구에게도 죄에 대해 허용한 적이 없다.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들에게 회개하고 거듭나게끔 임시적인 기회를 제공한다. 죽은 후에는 이 회개하고 거듭나는 기회는 더는 없게 되며 하나님의 은혜를 더는 받을 수 없게 된다. 따라서 그분의 구원의 은혜는 반드시 임시적이다.
예수님의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한 여인(A Woman Whom Jesus Saved by Grace Through Faith)
구원은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어진다는 완벽한 그림은 예수님과 간음 중에 잡힌 여자와의 만남의 이야기에서 발견된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이것이 바로 은혜이다. 그 여자는 정죄 받아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 8:11). 예수님은 그녀가 죽어야 마땅한 상황에서 그녀에게 자유를 주셨다. 그분은 그녀를 보내셨다. 하지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경고하셨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이 세상 모든 죄인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 “나는 지금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너는 죽어 마땅하고 지옥에서 영원한 심판을 받아 마땅하지만 난 너에게 은혜를 베풀고 있다. 그러나 내 은혜는 일시적이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더는 죄를 짓지 말라. 내 은혜가 끝나고 네가 죄인의 모습으로 내 심판대 앞에 서 있기 전에.”
우리가 간음한 여자가 예수님의 지시에 따라 회개했다고 가정해 보자. 그녀가 그렇게 했다면, 그녀는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되었다. 그녀는 은혜에 의하여 구원받았다. 왜냐하면, 그녀는 죄인으로서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구원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의 공로로 구원을 받았다고 말할 수 없다. 그리고 그녀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된다. 왜냐하면, 그녀는 예수님을 믿었고 따라서 그분의 말씀을 믿었으며 그분의 경고를 주의했으며 더 늦기 전에 자신의 죄에서 돌이켰다. 예수님안에서 진정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회개하게 된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한다고 경고하셨기 때문이다(눅 13:3을 보라). 예수님은 또한, 엄숙하게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만이 천국에 들어간다고 선언했다(마 7:21). 한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다면 그분의 경고를 믿고 주의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간음한 여자가 자신의 죄를 회개하지 않았다고 가정해 보자. 그녀는 죄를 지속적으로 짓게 되고 죽은 후에는 예수님의 심판대에 서게 된다. 그녀가 예수님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상상해보자, “세상에! 여기서 당신을 만나니 너무 좋습니다! 나는 내가 당신앞에 오기 전 땅 위에 있을 때 당신이 나를 정죄하지 않으셨던 것을 기억합니다. 확실히 당신은 아직도 여전히 은혜로우십니다. 그 때 저를 정죄하지 않으셨던 것처럼 지금도 당신은 저를 정죄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예수님은 그녀를 천국으로 환영 하실까? 답은 분명하다. 바울은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간음하는 자나…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 경고했다(고전 6:9-10).
이 모든 것은 제자에 대한 예수님의 요구가 그분 안의 진정한 믿음–무엇이 구원의 믿음인지를 말해준다. 그리고 구원의 믿음을 가진 모든 사람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되었다. 구원은 은혜로 받기 때문에 제자에 대한 예수님의 요구 조건이 구원에 대한 그의 요구 조건과 호환되지 않는다는 주장에 대한 성경적 근거는 없다. 제자가 되는 것은 천국을 약속받은 신자를 위한 선택 단계가 아니라 오히려, 제자의 신분은 진정한 구원받는 믿음의 증거이다.[4]
이 때문에, 하나님 보시기에 성공한 사역자가 되려면 진정한 복음을 전파하여 제자 삼는 과정을 정확하게 시작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순종의 믿음을 갖게 해야 한다. 사역자가 제자신분은 천국을 약속받은 신자를 위한 선택적인 단계라는 거짓 교리를 선언할 때, 그들은 제자를 삼으라는 그리스도의 계명을 거역하고 있으며 거짓 은혜와 거짓 복음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라고 약속하신 것처럼 오직 그리스도의 진정한 제자만이 구원의 믿음을 소유하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새 거짓 복음(The New False Gospel)
하나님 구원의 은혜에 대한 잘못된 개념 때문에 현대의 복음은 종종 가장 중요한 성경적 요소들을 은혜의 메시지와 맞지 않다고 간주하여 제거한다. 그러나 거짓 복음이 바로 대부분의 현대의 새로운 “회심자”들이 “예수님을 영접”한 후 몇 주 지나지 않아 곧 교회에서 찾아볼 수 없는 이유이다. 또, 교회에 다니는 사람 중 많은 사람이 매우 자주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과 구별되지 않고 그들과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보수적인 이웃처럼 똑같은 죄를 짓고 있다. 이것은 그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믿지 않고 실제로 거듭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현대 복음에서 제거된 이러한 필수 요소 중 하나가 회개를 촉구하는 것이다. 많은 사역자는 그들이 사람들에게 죄를 짓지 말라고 말하면(예수님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에게 했던 것처럼) 그것이 그들에게 구원은 은혜로 받는 것이 아니라 공로로 받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동등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 예수님, 베드로와 바울은 모두 회개가 구원에 절대적 필요하다고 선포했기 때문이다. 회개를 촉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부정하는 것이라면 세례 요한, 예수님, 베드로와 바울 모두가 구원의 은혜를 부정한 것이 된다.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사람들이 회개하도록 주신 일시적인 기회이지, 지속적으로 죄를 지으라는 기회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예를 들어, 세례 요한이 누가가 말한 “복음”을 선포할 때, 그의 중심 메시지는 회개였다(눅3:1-18을 보라). 회개 하지 않은 사람은 지옥으로 가게 된다(마 3:10-12; 눅3:17을 보라).
예수님은 그의 사역의 첫 시작부터 회개를 역설했다(마 4:17을 보라). 그분은 사람들에게 그들이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한다고 경고했다(눅 13:3,5을 보라).
예수님이 열두 제자들을 여러 곳에 보내셔 복음을 전파하게 하셨을 때, “제자가 나가서 회개하라고 전파하였다”(막 6:12).
부활 후, 예수님은 열두 제자에게 회개의 메시지를 전 세계에 전파하라고 하셨다. 왜냐하면, 그것이 용서에 문을 여는 열쇠이기 때문이다.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 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눅 24:46-47).
사도들은 예수님의 지시에 순종했다. 베드로가 오순절 날에 설교할 때, 회중들은 십자가에 못 박은 한 남자에 대한 진실을 인식한 후, 마음이 찔려 베드로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물었다. 베드로는 그들이 먼저 회개해야 한다고 답했다(행 2:38을 보라).
솔로몬의 행각에서 한 베드로의 두 번째 대중 설교는 같은 메시지가 포함되어 있다. 죄는 회개가 없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5]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없이 함을 받으라(행 3:19 상)
바울이 아그립바왕 앞에서 증언할 때, 그는 자기의 복음은 항상 회개의 메시지를 포함했다고 선언했다.
아그립바 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르지 아니하고 먼저 다메섹과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과 유대 온 땅과 이방인에게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하라 전하므로(행 26:19-20).
아테네에서 바울은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반드시 서야 하고, 회개치 않는 사람은 그날에 대해 준비되지 않았다고 회중들을 경고했다.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행 17:30-31).
에베소 장로들에게 한 고별 설교에서, 바울은 그의 메시지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믿음과 함께 회개를 들었다.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행 20:20,21).
이 성경 말씀은 회개의 필요성이 선포하지 않는 한 진정한 복음이 전파되지 않는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설득하기에 충분하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는 회개로부터 시작한다. 그것 없이는 죄의 용서는 없다.
회개의 재정의(Repentance Redefined)
비록 많은 성경 말씀이 구원은 회개에 근거함을 증거하지만, 일부 사역자들은 여전히 회개의 명확한 의미를 왜곡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그들의 거짓된 개념에 부응하기 위해 회개의 필요성을 무효로 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그들의 새로운 정의에 의하면, 회개는 예수님이 누구인지에 대한 마음의 변화에 지나지 않으며, 그리고 놀랍게도, 한 사람의 행위에 영향을 줘야 한다는 필요성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약 설교자들이 사람들에게 회개 하라고 촉구할 때 무엇을 기대했겠는가? 그들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누구인지에 대한 자신의 마음의 변화만을 원했는가 아니면 자신의 행위상의 변화를 원한 것인가?
바울은 진정한 회개는 행위의 변화를 요구한다고 믿었다. 우리는 이미 바울의 아그립바 왕앞에서의 선언을 통하여 그의 수십년간의 사역에 관한 증언을 읽었다.
아그립바 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르지 아니하고 먼저 다메섹과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과 유대 온 땅과 이방인에게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하라 전하므로(행 26:19-20).
세례 요한도 회개는 특정 신학 사실에 대한 마음의 변화 이상이라고 믿었다. 회중들이 회개하라는 요한의 촉구에 대해 어떻게 해야 되냐고 물었을 때, 그는 행위의 특정 변화를 열거하였다(눅 3:3, 10-14을 보라). 그는 또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단지 표면상의 회개만 함을 비웃으며 진정한 회개가 없으면 지옥의 불에 던져질 것임을 그들에게 경고하였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마 3:7-10).
예수님도 세례요한이 전파했던 회개와 같은 메시지를 설교하셨다(마3:2; 4:17을 보라). 그는 어느 한 번 니느웨 사람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한 것을 말씀하셨다(눅 11:32을 보라). 요나서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니느웨 사람들이 자신 마음의 변화보다 더 많은 일을 했음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또한, 죄로부터 돌이켜 자신 행위의 변화를 가져왔다. 예수님은 이것을 회개라고 말씀하셨다.
성경적인 회개는 마음속으로부터 생긴 진정한 믿음에 대한 자원적인 행위변화의 응답이다. 사역자가 진정한 회개임을 증명하는 행위변화의 필요성을 언급하지 않고 복음을 전파한다면, 그는 실제로 제자들을 향한 그리스도의 염원을 대적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는 자기의 청중들이 회개 없이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미혹하는 것이며, 따라서 사역자에 대한 믿음은 그들로 하여금 지옥으로 향하게 할 수도 있다. 그 사역자는 인식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을 대적하고 사탄을 위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사역자가 예수님이 명하신 대로 제자를 삼으려고 할 경우, 그는 반드시 정확하게 시작해야 한다. 그가 사람들로 하여금 회개와 순종의 믿음으로 나아오게 하는 진정한 복음을 전파하지 않을 경우, 그는 사람들의 눈에는 큰 성공을 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는 큰 회중들을 거느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구축하고 있으며, 그의 공적은 앞으로 불의 시험을 받을 때에 드러나게 되어 있다. 그들은 불에 타 없어질 것이다(고전 3:12-15을 보라).
헌신하라는 예수님의 부르심(Jesus’ Calls to Commitment)
예수님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죄로부터 돌아서라고 요구하셨을 뿐 아니라 또한, 그들이 즉각적으로 그분을 따르고 순종하기를 원하셨다. 그분은 종래로 이보다 더 낮은, 오늘날 종종 일어나는 구원의 조건을 제공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종래로 사람들을 그분을 “영접”하라고 초대하고, 용서를 약속하고, 나중에 그분께 순종하도록 제안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제일 첫 번째 단계로서 전심으로 헌신하라고 요구하셨다.
슬프게도, 예수님께로의 희생적인 헌신은 종종 자칭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쉽게 무시된다. 또는 그것이 인정된다고 해도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아닌 이미 하나님 구원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을 향한 더 깊은 관계로의 부르심으로 해석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이들 중 많은 부분은 예수님의 헌신으로의 부르심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아닌 이미 구원받은 그들을 향한 것이라고는 말하고 있지만, 자신들이 해석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의 이 부르심에 따르지 않는다. 그들은 마음속으로 이 부르심에 순종으로 응답하지 않을 수 있다고 여기며, 그들 또한, 종래로 순종한 적이 없다.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가정한 사람들에게는 종종 예수님께 더 깊게 나아가는 것으로 해석되는 구원으로의 초대 중 하나를 생각해 보도록 하자: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는냐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막 8:34-38).
이 구원으로 초대는 불신자들을 향한 것인가 아니면 신자들을 향한 더 헌신적인 관계로의 초대인가? 우리가 정직하게 읽었다면, 답은 명확해진다.
첫째, 예수님이 대화를 한 사람은 “무리와 제자들”(34절)로 구성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무리”들은 그의 제자들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그들은 사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도록 그분께 소환당했다. 예수님은 그분이 가르치려는 진리를 모든 사람, 그분을 추종하는 사람이나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나 모두 이해하기를 원하셨다. 그분은 곧이어 “누구든지”(34절)라는 말씀으로 시작하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그분의 말씀은 누구에게나 또한,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
우리가 계속 읽어내려 갈수록, 예수님이 누구한테 말씀하시는지 명확해진다. 특히, 그분의 말씀은 (1)그분을 따르고, (2)자기 목숨을 구하고, (3)영혼을 상실하지 않으려는, (4)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오실 그분 앞에서 부끄러워하지 않을 사람이 되려는 열망 중에 있는 모든 사람을 향한 것이다. 예수님이 묘사한 이 네 가지 부류의 사람은 모두 구원을 갈망하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천국에 약속받았다고 하는 사람이 “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예수님을 따르기”를 원치 않는다고 생각하는가? 우리는 진정한 신자들이 “그들의 영혼을 상실”하고 예수님과 그분의 말씀을 부끄러워하며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에 그분의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분명한 것은, 예수님은 이 성경본문속에서 영원한 구원을 얻기에 대해 말씀하셨다.
이 다섯 구절로 된 본문의 마지막 네 구절은 모두 단어 “누구든지”로 시작됨을 주목하라. 따라서 각 구절은 이전 구절에 대해 설명하고 확장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 본문 중의 어떤 구절도 다른 구절들의 조명을 떠나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이 부분을 염두에 두고 예수님의 말씀을 한 구절씩 해석해보자.
첫 번째 구절(Sentence #1)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 8:34).
다시 말하지만, 예수님은 누구든지 그분을 따르기를 원하고 그분의 추종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제일 처음 맺으려고 했던 관계는 바로 사람들이 그분의 추종자가 되는 것이었다.
많은 사람은 그분의 추종자가 아닌 그분의 친구가 되기를 원하지만, 이런 선택은 존재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그분을 순종하지 않는 한 그들은 친구로 여기지 않으셨다. 그분은 어느 한 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 15:14)고 말씀하셨다.
많은 사람이 그분의 추종자는 되려 하지 않고 그분의 형제가 되기만을 원하는 데 예수님은 그런 선택을 제공하지 않았다. 그분은 순종하지 않는 자는 아무도 형제로 여기지 않으셨다.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마 12:50).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추종자가 되는 것에는 관심이 없이 하늘나라에서 그분과 함께하고자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일이 불가능함을 보여주셨다. 오직 그분께 순종하는 사람들만이 천국을 약속받았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이 구절 속에서 예수님은 그분을 따르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서는 그분을 따를 수 없다고 알려주셨다. 그들은 반드시 자기의 욕망을 내려놓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여야 한다. 자기 부인과 순종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의 본질이다. 그것이 바로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뜻이다.
두 번째 구절(Sentence #2)
예수님의 두 번째 구절은 그의 첫 번째 구절의 의미를 더 명확하게 해준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막 8:35).
다시 한 번, 이 구절도 “누구든지”로 시작하여 첫 번째 구절과 관련하여 추가설명을 하고 있음을 주의하길 바란다. 이 구절에서 예수님은 두부류의 사람들을 대조하고 있다. 첫 구절에서 암시했던 두부류의 사람, 자기를 부인하고 그분을 따라 자기 십자가를 지려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다. 지금은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려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로 대조된다. 우리가 이 두부류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보면 아래와 같은 결론을 얻게 된다. 첫 번째 구절에서 자기 부인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두 번째 구절의 자기 생명을 구하고자하는 사람들과 맞물리고 첫 번째 구절에서 자기를 부인하려는 사람들이 두 번째 구절에서 자기 생명을 잃지만 최종적으로 구원을 얻게 되는 사람들과 맞물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한 사람이 육체적인 생명을 잃고 얻는 것을 말씀하시지 않았다. 이 구절의 뒷부분은 예수님이 영원한 손실과 이득을 마음에 두고 있음을 보여준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2장 25절에서도 유사한 표현을 하셨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첫 번째 구절에서 자기를 부인하지 않은 사람은 두 번째 구절에서 자기 생명을 구하고자 했던 사람과 같은 사람이다. 따라서 우리는 합리적 “한 사람의 생명을 구원한다”는 것은 “자기 삶을 위해 자기만의 계획을 세우는” 것과 같다고 결론 지을 수 있다. 우리가 대조했었던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잃은 사람”을 생각해볼 때 이것은 더 명확해진다. 그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만의 계획을 내려놓고 이제는 그리스도의 계획과 복음전파의 실현을 목적으로 사는 사람이다. 그는 궁극적으로 “자기의 생명을 구원”할 것이다. 자기보다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기 위해 사는 사람은 궁극적으로 천국의 기쁨을 누릴 것이나, 계속하여 자기를 기쁘게 하기 위해 사는 사람은 자기만의 계획을 좇을 수 있는 모든 자유를 잃은 채 지옥에서 처참한 최후를 맞이할 것이다.
세 번째와 네 번째 구절(Sentences #3 & 4)
이제 세 번째와 네 번째 구절을 보도록 하자: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는냐(막 8:36-37).
이 두 구절에서 자기를 부인하지 않는 사람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또한, 자신의 생명을 구원하고자 하지만, 궁극적으로 그것을 잃게 되는 사람이다. 지금 이 세상이 주는 것들을 추구하지만 궁극적으로 “자신의 영혼을 상실”하게 된다. 예수님은 온 천하의 가치와 한 영혼의 가치를 비교하여 이런 사람의 어리석음을 보여 주셨다. 물론, 비교조차 할 수 없다. 한 사람이 이론적으로 온 천하를 가질 수 있지만, 죽음 뒤에는 지옥에서의 영원한 삶이 기다린다면, 그는 치명적인 착오를 범한 것이다.
이 세 번째와 네 번째 구절 속에서 우리는 무엇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추종자가 되는 것한테서 멀어지게 하는지에 대한 통찰력을 얻게 된다. 그것은 바로 이 세상이 주는 자기만족을 위한 그들의 욕망이다. 자기 사랑에 의해 그들은 그리스도를 따르기를 거부하고, 죄가 주는 쾌락을 추구한다. 그리스도의 진정한 추종자들은 그분에 대한 사랑과 순종 때문에 죄가 주는 쾌락을 피한다. 세상을 좇는 사람들이 부와 권력과 명예를 추구 반면 그리스도의 진정한 추종자들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한다.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그들은 자신이 얻은 부, 권력, 명예를 그분의 영광을 위해 사심없이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섯 번째 구절(Sentence #5)
마지막으로, 다섯 번째 구절을 생각해 보도록 하자. 이 구절 역시 “누구든지”란 단어로 시작하며 다른 구절들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주목하라.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막 8:38).
이 사람 역시 자기를 부인하려 하지 않고, 자기만의 계획을 좇아가고, 세상이 주는 것들을 추구하여 궁극적으로 자신의 생명을 잃고 영혼을 상실한다. 지금 이 사람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씀을 부끄러워한다고 묘사되고 있다. 그가 부끄러워하는 이유는 물론 자신의 불신 때문이다. 그가 진정으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었더라면, 그는 절대로 그분과 그분의 말씀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 속하며, 예수님은 재림하셨을 때에 그를 부끄러워 할 것이다. 분명히 예수님은 구원받은 사람을 묘사하고 있지 않다.
이 모든 것의 결론은 무엇일까? 전반 단락은 이미 천국을 약속받은 사람에게 보내는 더 헌신적인 삶으로의 부르심으로 간주할 수 없다. 그것은 분명히 진정으로 구원받은 사람과 구원받지 못한 사람을 비교하는 방식을 통하여 구원받는 길을 보여준 것이다. 진정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그분을 위하여 자기를 부인하지만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순종의 믿음을 보일 수가 없다.
헌신하라는 또 다른 부르심(Another Call to Commitment)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성경 말씀이 많이 있지만, 또 다른 하나의 헌신에 관한 예수님의 부르심을 보도록 하자, 이 부르심은 구원으로의 부르심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8-30).
복음 전도자는 종종 자신의 복음 전도 초대에서 이 성경 말씀을 사용하며,이렇게 하는 것은 잘못된 점이 없다. 이 말씀은 분명히 구원으로의 초대이다. 여기서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들에게 쉼을 주신다. 그분은 그분의 말씀처럼 육체적으로 힘든 사람들에게 육체적인 쉼이 아닌 영혼의 안식을 주셨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죄책감, 두려움과 죄로 중압감을 느끼며 그들이 그로 말미암아 지쳐 있을 때에 구원의 말씀을 전하기에 좋은 대상이 된다.
이러한 사람들이 예수님이 주시는 안식을 받기를 원한다면 그들은 반드시 예수님에 의하며 두 가지를 수행해야 한다. 그들은 반드시 (1) 그분께로 나아오고, (2) 그분의 멍에를 메야 한다.
은혜를 전파하는 거짓교사들은 종종 “예수님의 멍에를 지라”는 표현의 명백한 의미를 왜곡한다. 일부는 실제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멍에는 반드시 그분의 목에 씌워진 것이어야 한다고 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예수님이 “나의 멍에”라고 할 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멍에는 반드시 쌍 멍에이며 멍에의 한쪽은 그분의 목에 씌워져 있고 나머지 한쪽은 비워져 있으며 우리의 목에 걸어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이 모든 쟁기를 당기는 작업을 하시겠다고 한 약속을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그분의 멍에는 쉽고 그분의 짐은 가볍다고 말씀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유일한 임무는, 이러한 거짓교사들에 의하면, 우리가 그분이 우리의 구원을 위한 모든 것을 하게끔 믿음으로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지면서 그분의 은혜로 인한 혜택을 누리는 것이라고 한다. 이런 해석은 분명히 아주 억지다.
아니, 예수님이 지친 사람들에게 그분의 멍에를 지라는 말씀은 그들이 그분께 순종하고 그분을 그들의 주권자로 모시고 그분이 그들의 삶을 주관하도록 하여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그들에게 그분의 멍에를 메고 그분께 배우라고 한 이유이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그들만의 길을 가고 그들만의 삶을 지배하는 야생 황소들과 같다. 그들이 예수님의 멍에를 멜 때, 그들은 그분에게 지배권을 내려놓는다. 예수님의 멍에가 쉽고 그분의 짐이 가벼운 것은 바로 그분이 우리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을 통하여 우리로 하여금 그분께 순종할 수 있는 힘을 주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이 지친자들에게 쉼을 주는 상징적 표현을 통하여 사람들을 구원으로 부르시고 그분께 순종하고 그분을 그들의 주님으로 모시도록 하고 있음을 다시 한 번 볼 수 있다.
요약(In Summary)
이 모든 것은 진정 성공한 사역자는 예수님의 계명에 순종하여 제자를 삼고, 회개와 헌신에 대해 알며, 제자가 되는 것이 천국을 약속받은 신자들을 위한 선택사항이 아님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그것이야말로 구원의 믿음을 표현하는 유일하고 진정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성공적인 사역자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성경적인 복음을 전한다. 그는 그들로 하여금 회개하고 예수님을 따르게 할 것이며 헌신하려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구원을 보장하지 않는다.
[1]제자는 사도행전6:1, 2, 7; 9:1, 10, 19, 25, 26, 36, 38; 11:26, 29; 13:52; 14:20, 21, 22, 28; 15:10; 16:1; 18:23, 27; 19:1, 9, 30; 20:1, 30; 21:4, 16에서 언급되었다. 신자는 사도행전 5:14; 10:45, 16:1에서만 언급되었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 14:21에서 누가는 이렇게 썼다, “[바울과 바나바는]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따라서 바울과 바나바는 복음을 전함으로 제자를 삼았고, 사람들은 회심한 후 즉각적으로 제자가 되었으며 선택적인 시간을 가진 후 제자가 된 것이 아니다.
[2]이 성경 구절은 새로운 회심자에게 구원을 보장해주는 현대의 잘못된 관행을 드러낸다. 예수님은 새롭게 회심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구원을 보장해 주시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짧은 기도거나 말로 된 믿음만 고백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분은 그들에게 자신의 고백이 진실한지를 확인해보기를 도전하셨다. 우리는 그분의 모범을 따라야 한다.
[3]또한, 아무 행함이 없어도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과 달리, 야고보는 믿음으로만 구원받을 수 없다고 말했다.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진정한 믿음은 결코 혼자가 아니다. 믿음에는 항상 행함이 따른다.
[4]바울이 종종 구원은 행함이 아닌 믿음으로 받는 것이라고 확인했던 이유가 그 당시 그가 끊임없이 충실한 율법주의자들과 싸우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명심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바울은 천국에 가기 위해서는 거룩함이 중요하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을 바로잡으려 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자신도 그 사실을 믿고 종종 긍정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개념이 없고 예수님이 왜 죽으셨는지를 모르고 있는 유대인들을 바로잡기 위함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이방인들이 구원받지 못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가 구원을 가능하게 한다는 개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일부 사람들은 할례, 육체적인 혈통, 또는 율법을 지키는 것(어쨌든 그들은 지키지 않았다)이 한 사람의 구원을 이룬다고 생각했으며,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폐하였다.
[5]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이방인도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베드로에게 계시하셨을 때,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사람들에게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고 선언하였다. 베드로는 사도행전 5:32에서 하나님은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성령님을 주신다고 말하였다. 모든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성령님이 거하신다(롬 8:9; 갈 4:6을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