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 동안 많은 방식으로, 나는 저도 모르게 하나님이 나에게 원하시는 목표를 거스르는 일을 해왔다. 그 목표는 바로 예수님의 제자를 삼는 것이다. 를 추구하고 싶은 목표에 대해 작업 관행을 따라갔다. 그러나 점차적으로, 성령님은 은혜로 나의 눈을 열어 나의 오류들을 보게 하셨다. 내가 배운 한 가지는 바로 내가 이제까지 배워온 그리고 믿어온 것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검토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 무엇보다도 우리의 전통이 우리의 눈을 막아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한다. 더 심각한 것은 우리는 우리가 다른 그리스도인보다 진리에 대해 더 잘 아는 엘리트 그룹이라고 생각하며 전통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 교사는 이렇게 비꼬아서 말했다. “오늘날 전 세계에 32,000개의 교단이 있습니다. 당신이 정말 그중 진리의 그룹에 속해 있을 행운이 있을까요?”
우리의 자부심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저항하고 계신다. 그분은 교만한자를 막으시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더 나아가려 하고 예수님앞에 온전히 서 있을 준비가 되어 있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겸손해져야 한다. 하나님은 겸손한자들에게 긍휼을 베푸신다.
목사의 역할(The Role of the Pastor Considered)
사역자의 모든 사역은 제자를 삼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그는 지속적으로 이런 질문을 자신한테 해야 한다. “내가 하고 있는 것들이 예수님의 모든 계명에 순종하는 제자를 삼는 것에 어떠한 도움될까?” 우리가 이 간단한 질문을 솔직하게 자신한테 해본다면 많은 기독교 활동의 기치 아래 수행되는 것들을 제거할 수 있다.
우리가 특정 지역의 교회에서 섬기는 목사/장로/감독[1]들의 사역을 생각해 보자. 만일 그 사람이 예수님의 계명에 모두 순종하는 제자를 삼으려고하는 경우, 무엇이 그가 져야 할 첫 번째 책임일까? 자연스럽게 가르침이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는 가르침을 통하여 삼는다고 하셨다(마28:19-20을 보라). 장로/목사/감독의 직분의 요구조건도 가르치기를 잘하여야 한다(딤전 3:2). 설교와 가르침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은 응당 “배나 존경할 자로 알아야”한다(딤전 5:17).
그러므로 목사는 “이 설교가 어떻게 제자를 삼는 일에 도움을 줄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자신에게 하면서 모든 설교를 평가해야 한다.
주일이나 주중 설교만으로 한 목사의 가르침에 대한 책임은 끝난 것일까? 만일 그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가르침의 책임은 주로 한 사람의 본이 되는 삶에 의해 완성된다는 성경 말씀을 홀시하고 있는 것이다. 공적인 가르침은 단지 본이 되는 일상생활에 대한 보완이다. 이것이 바로 장로/목사/감독에 대해서 구두 의사소통 기교보다 그 사람의 성격과 삶에 대한 요구가 더 많은 이유이다. 디모데전서 3장 1절부터 7절까지 감독에 대한 15가지 요구가 씌어있다. 그중 14가지는 성품에 관한 것이고 1가지만 가르치는 은사에 관한 것이다. 디도서 1장 5절부터 9절까지 쓰인 장로에 대한 18가지 요구조건 중 17가지가 성품에 관한 것이고 1가지만 가르치는 은사에 관한 것이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첫째로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결에 있어서 믿는자에게 본이 되라”(딤전 4:12)고 권면하였다. 그 후 그는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딤전 4:13)고 말했다. 따라서 디모데의 성품에 대한 요구가 공적인 가르침의 사역보다 먼저 언급되었으며 그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베드로도 비슷하게 썼다.
너희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 너희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벧전 5:1-3).
누가 우리로 하여금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께 순종하라고 격려하는가? 우리가 존경하는 설교를 하고 존경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아닌가? 헌신하지 않은 “부드러운” 목회자들은 누구한테도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도전하지 못한다. 이러한 목회자가 가끔 그리스도에 대해 헌신하라는 말씀을 전한다 해도 꼭 모호한 말을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청중들이 그들의 진정성을 의심할 것이다, 우리는 과거의 위대한 기독교 지도자들에 대해서 그들의 설교가 아닌 그들의 희생을 기억한다. 그들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그들이 보여줬던 삶은 오랫동안 우리를 격려할 것이다.
만일 목사가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제자로서의 순종의 모범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그가 어떤 설교를 하더라도 시간낭비다. 목사여, 당신의 모범적인 삶은 설교보다 10배는 더 호소력이 있다. 당신은 사람들이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격려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는가?
하지만 목사가 어떻게 하면 그를 주일 아침 연설자로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의 삶을 통해 가르칠 수 있을까? 그들이 목사의 개인적인 삶을 볼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곳은 교회건물을 나갈 때 5초간의 악수를 하는 것이 전부이다. 아마도 현대의 목회방식에 뭔가 잘못된 점이 있는 것 같다.
매주 주일 아침 설교(The Weekly Sunday Morning Sermon)
만일 목사가 자신의 교육책임을 주요하게 매주 대중 설교를 하는 것으로 생각하면, 이건 또 하나의 잘못된 생각이다. 예수님의 가르침 사역은 대중 설교(그리고 대부분의 이런 설교내용은 상당히 짧아 보인다)로만 구성된 것이 아니라, 그의 호기심이 많은 제자에 의해 시작된 개인적인 대화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대화는 한 교회 건물에서 매주 한 시간 반에 한정되지 않은, 해변가에서, 집안에서, 그리고 먼지나는 도로를 걸으면서도 나눴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삶이 제자들에게 완전히 드러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 같은 가르침의 방식은 사도들에 의해 이어졌다. 오순절 이후, 열두 사도는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행5:42) 가르치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매일 신자들의 공동체와 상호 교통하였다. 바울은 또한, “공중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가르쳤다(행 20:20).
이 시점에서, 당신이 만일 목사라면, 가르침에 대해서 자신의 사역과 예수님과 첫 번째 사도들의 사역을 비교해 볼 수 있다. 당신은 아마 하나님이 당신이 하기를 원하시는 것을 해왔었는지 아니면 수백 년 동안 내려온 교회 전통을 따라 했었는지 궁금할 것이다. 당신이 지금 알고 싶어한다면 그것은 아주 좋은 것이다. 그것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첫걸음이다.
아마 당신은 더욱 멀리 생각했을 것이다. 당신은 자기 자신한테 이렇게 말했을지 모른다. “내가 집집마다 다니면서 사람들을 가르치거나, 나의 삶을 통하여 본을 보여주면서 그들에게 영향을 끼치는데 요구되는 시간을 어디에서 짜낼 수 있을까?” 이 질문은 훌륭한 질문이다. 왜냐하면, 이 질문은 당신으로 하여금 목사의 역할에 대한 현대적 개념에 더 많은 문제가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심지어 이런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나는 나 자신이 교회 사람들과 밀접하게 지내고 싶어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신학교에서 목사는 자기 회중들과 너무 가까이 지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확실하게 배웠다. 목사는 자신이 회중들로부터 전문적인 존경을 받는 것을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그는 회중들과 가까운 친구가 될 수 없다.”
이러한 생각은자주 현대 교회에서 실제로 아주 잘못된 일이 행하여 지고 있음을 나타낸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아주 가깝게 지냈었는데 제자 중 하나는 일반적인 식사자리에서 예수님의 가슴에 머리를 편안히 기대였을 정도였다(요 13:23-25을 보라). 그들은 문자 그대로 몇 년 동안 함께 살았다. 그러므로 제자들을 성공적으로 목양하기 위해 그들과 전문적인 거리를 유지하여야 한다는 생각은 그만 하여야 할 것이다!
고대와 현대 방법들의 비교(A Comparison of Methods, Ancient and Modern)
만일 예수님께 순종하고 제자 삼는 것이 목표라면, 우리가 제자를 삼는 예수님의 방법을 따르는 것이 지혜롭지 않을까? 그 방법들은 예수님께 아주 효과적이었고 또한, 예수님을 따랐던 사도들한테도 아주 효과적이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모든 계명에 순종하는 제자들을 삼음에 있어서 현대의 방법들은 얼마나 효과적이었는가? 미국의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연구가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바에 의하면, 대부분의 자칭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방식은 비그리스도인들에 비해 실질적인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이젠 아마도 몇 가지 질문을 제기하고 성경 말씀을 다시 검토해야 시점이 온 것 같다.
아래 질문을 자신한테 물어보기 바란다. 어떻게 초대 교회는 교회건물, 전문적으로 훈련된 성직자, 신학교와 세미나, 찬송가와 오버 헤드 프로젝터, 무선 마이크와 테이프 복제기, 주일학교 교육과정과 청소년 사역, 예배 팀과 합창단, 컴퓨터와 복사기, 기독교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국, 수십만 권의 기독교서적, 그리고 심지어 개인 소유의 성경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제자를 삼는 일에 성공했을까? 그들은 제자를 삼기 위해 그런 것들이 필요 없었고, 예수님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것들 중 어느 하나도 필수적이지 않았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것들은 도움이 될 수 있지만 필수적이지는 않다. 사실, 그것들의 대부분은 실제로 제자를 삼는 데 있어서 우리를 방애 할 수 있으며 또한, 그렇게 하고 있다. 두 가지 실례를 들어보겠다.
현대 교회에서는 신학원에서 훈련받은 목회자만이 교회를 인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관념은 바울 한테는 생소한 것이다. 일부 도시에서 그는 교회를 개척한 후 몇 주 또는 몇 달 동안 떠나 있다가 돌아와서는 장로를 임명하여 교회를 감독하게 하였다(행 13:14-14:23의 예를 보라). 이 사실은 몇 주 또는 몇 달동안 교회에는 바울과 정식식적인 장로들의 관리가 없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장로들이 임명되었을 때 그들 중 대부분은 상당히 젊은 신자였으며 자신의 직분을 감당하기 위해 2 ~ 3 년의 정규 교육을 받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따라서, 성경은 목사/장로/감독들이 자신의 사역을 효과적으로 감당하기 위해서는 2~ 3 년의 정규 교육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가르치고 있다. 아무도 그 사실에 대해 반박할 수 없다. 그러나 현대의 요구사항은 지속적으로 모든 신자에게 “당신이 교회를 이끌어가려는 한, 몇 년 동안의 정규 교육이 필요하다”[2]는 메시지를 보낸다. 이는 리더를 배출하는 과정을 느리게 하며, 따라서 제자를 삼는 속도가 늦춰지며, 이는 교회의 성장을 늦춰지게 한다. 나는 이븐과 암웨이 같은 미국회사들이 매 영업 사원에게 비누나 향수를 판매하기 전에 자기들의 가족을 떠나 다른 도시에서 3년 동안의 정규교육을 받도록 요구했더라면 어떻게 목표시장을 점유했을지 궁금하다.
“하지만 목회사역은 너무나 어렵고 복잡한 일이다!” 그리고 “성경은 새로 입교한자를 감독직에 놓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다”고 일부는 말할 것이다(딤전 3:6을 보라).
첫째로, 새로 입교한 자에 대한 정의를 내려야 하는 데, 바울의 개념은 우리와 달랐다. 왜냐하면, 그는 장로/목사/감독직에 신자가 된 지 몇 달밖에 되지 않은 사람들을 세웠다는 것이다.
둘째로, 현대의 목회가 그렇게 어렵고 복잡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성경적인 모식과는 너무 멀어진 복잡한 교회구조와 사역체계 때문이다. 우리는 이 체계를 너무 복잡하게 만들어서 실제로 소수의 초인간적인 사람들만이 그 요구를 만족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교회를 신학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사람은 감독하지 못하게 하셨다!” 그리고 “훈련받지 않은 감독은 사람들을 거짓 가르침으로 인도할 수 있다!” 라고 다른 사람은 말한다.
이것은 분명히 바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사실, 오늘날 우리에게는 동정녀 출산을 믿지 않고 동성애를 승인하는,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고급 승용차를 운전하기를 원하신다고 가르치는, 어떤 사람들의 멸망은 하나님이 이미 예정했다는, 그리고 그리스도께 순종하지 않고도 천국에 가는데 아무 문제 없다고 말하는 신학훈련을 받은 성직자들로 가득하다. 현대 신학원들은 종종 거짓 교리를 생성하고, 전문 성직자들은 거짓교리를 전파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교회의 “서민들”은 그들에게 도전하기 두려워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신학원을 나온 전문가들이며 더 많은 “말씀 증거”를 내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독특한 교리들로 자기들의 교회를 정의하고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서 분리되어 나갔다. 그들은 기존 교회와 구별된다는 것을 광고하기 위해 교회 건물 앞의 표지에 그 차이를 게재하여 “우리는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다르다”라는 메시지를 세상에 보낸다. 타격을 더 주기 위해서, 그들은 그들의 도전할 수 없는, 그리고 분열적인 교리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교회 분열자”로 취급한다. 오늘날까지 이단재판소는 여전히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으며, 성직자들에 의해 조종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원하시는, 서로 사랑함으로 세상에 알려진 제자들을 삼아야 할 사역자들이 보여줘야 할 모습이란 말인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특정 교리에 따라 교회를 선택하고, 올바른 신학 교리를 갖는 것을 올바른 삶을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여긴다. 이 모든 것은 성경적인 모식이 버려졌기 때문이다.
선택 가능한 하나의 성경적인 대안(A Biblical Alternative)
내가 지금 믿은 지 3개월 된 신자들에게 교회를 맡기라고 주장하고 있는가(바울이 했던 것처럼)? 그렇다, 하지만 그 신자들이 반드시 장로/감독에 대한 성경적 요구 사항을 충족하고, 오직 그들이 감독하는 교회가 성경적인 모식을 따를 때에만 가능하다. 즉, 그 교회들은 먼저 일부 감독 직능을 할 수 있는 사도와 같은 성숙한 교회 설립자에게 복종하는 새로 개척된 교회 모임이어야 한다.[3] 그렇게 되어야만 새로 부임된 장로가 전적으로 감당하게 되는 일이 없다.
둘째로, 초대교회가 그랬던 것처럼 회중인수는 가정집에서 모일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적어야 한다.[4] 그래야만 교회관리가 훨씬 더 잘 된다. 그것은 아마도 장로/감독의 요구사항 중 하나가 자기 가정을 잘 관리하는 것이라고 한 이유일 것이다(딤전3:4-5을 보라). 한 가족을 관리하는 것은 하나의 작은 가정교회를 관리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다.
셋째로, 회중은 반드시 성경적 복음을 받아들이고 회개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제자가 된 사람들로 구성되어야 한다. 누군지 명으로 구성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양처럼 보이는 염소들을 목회함으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문제를 제거해준다.
그리고 넷째로, 목사/장로/감독들은 반드시 문화적인 역할보다는 성경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그들은 반드시 현대 교회에서 쥐고 있었던 가장 중심적인, 가장 중요한, 가장 주목받는 위치에서 물러나야 한다.[5] 오히려, 그들은 전체 몸의 한 부분으로서, 주일 아침 설교자가 아닌, 예수님의 방법을 따라 제자를 삼기 위해 본이 되는 삶과 교훈으로 가르치는 겸손한 종이 되어야 한다.
그런 모식대로 따라한다면, 3 개월 된 신자 중 일부는 교회를 감독 할 수 있다.
교회 건물(Church Buildings)
교회 건물은 어떠한가? 초대 교회 때에는 건물 없이도 잘 되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건물이 또 다른 하나의 현대의 “필수”가 되었다. 제자를 삼는 과정에 교회 건물이 과연 도움될까?
내가 목사로 있을 때, 나는 가끔 자신이 부동산 업자, 은행원, 일반 계약자 또는 전문 기금 모금 자처럼 느껴진다. 나는 건물을 꿈 꿨고, 건물을 찾아다녔고, 낡은 건물을 고쳤고, 건물을 임대했었고, 새로운 건물을 건축하고 벽에 금이 가 누수가 생기면 수리하기도 했다. 건물은 많은 시간과 정력을 소모한다. 내가 건물 주위를 맴돌았던 이유는 대부분의 목사처럼, 교회모임을 위한 건물 외에는 목회를 성공하게 할 다른 길이 없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건물 또한, 많은 돈을 소모한다(미국의 일부 교회들은 교회 건물에 수백만 달러의 돈을 지출한다). 건물을 소유하는 꿈이 이뤄진 후, 나는 건물의 은행 대부금을 다 지불하는 날을 꿈꿨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사역에 모든 돈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때 나는 회중들에게 좋은 청지기가 되어야 하며 부채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가르치면서 회중들을 함께 빚더미에 몰아넣었던 적이 있다!(나는 분명히 본을 보여주면서 가르치고 있었다.)
대부분의 교회 건물들은 한 주일에 몇 시간씩 한두 번 사용된다. 전 세계에서 어떤 조직의 건물들이 이렇게 사용되는 시간이 적은가?(답: 오직 이단과 거짓 종교만 그렇다.)
그 돈 먹는 구멍은 수많은 문제를 일으킨다. 교회 건물이 있는 목사는 항상 돈을 필요로 하고 이는 그가 하는 일에 영향을 미친다. 그는 부자들한테(이런 사람은 종종 아무런 희생도 하지 않는다) 잘 보이기 위해 그들을 불쾌하게 하는 가르침은 하지 않으려 하며, 성경을 자기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왜곡하는 유혹에 놓여 있다. 목사들은 자금흐름과 증가를 가로막는 설교는 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때때로 신자가 되는 가장 중요한 측면이 (1) 십일조를 바치는 것과(덧붙여 말하자면, 예수님은 이것을 차요한 계명으로 보셨다.) (2) 교회에 참석하는 것이다(여기서 주일마다 십일조가 거둬들여 진다). 이것은 제자 삼는 모습이 아니다. 비록 많은 목사가 모든 회중이 그 두 가지를 해주기를 꿈꾸지만 말이다. 만일 한 목사가 이끄는 회중 중 절반만이 그 두 가지를 하기 원하기만 해도 그 목사는 자신의 비결을 책으로 써서 수백만 명의 다른 목사들에게 팔 수 있다!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볼 수 있다. 사도행전에 회중들이 교회 건물을 구매하거나 건축했다는 기록은 아무 곳에도 없다. 대부분의 경우, 신자들은 가정집에서 정기적으로 모임을 했다.[6] 교회 건물을 짓기 위한 모금을 한 적도 없다. 서신서도 교회당 건축에 관한 어떠한 지침도 없다. 또한, 교회가 콘스탄틴의 칙령에 따라 이 세상과 결혼하는, 기독교사가 300년이 되기 전까지, 사람은 교회 건물을 건축하는 것은 생각도 해보지 않았다. 300 년! 그것이 얼마나 오랜 세월인지 생각해 보라! 그리고 교회는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하였는데 심지어 건물이 없는 강렬한 박해의 시기에도 그러했다. 이러한 현상은 다음 몇 세기에도 여러 번 반복되었다. 최근에도 오히려 중국에서 이런 현상이 발생했다. 중국에는 아마도 백만 개가 넘는 가정교회가 있을 것이다.
일요일 오전 열한시는 가장 분리된 시간이다(Eleven O’Clock Sunday is the Most Segregated Hour)
미국 교회모식을 따른 현대 교회의 시설은 별도로 진행되는 모든 연령별 사역에 별도의 공간을 제공하기 위해, 충분한 별도의 공간이 설계될 것이다. 하지만 초대 교회에는 남성, 여성, 그리고 모든 연령별 어린이들을 위해 특별히 분리된 사역들은 없었다. 교회는 모든 방면에서 통합되었으며, 분해되지 않았다. 초대교회에서는 가족 단위는 함께 있도록 되었고, 부모의 영적인 책임이 강화되었으나 현대의 교회 구조에서는 오히려 침식되었다.
교회 건물이 제자를 삼는 사역에 과연 도움될까 아니면 저애가 될까? 역사적으로, 수 세기에 걸친 제자 삼는 사역은 교회 건물이 없이 더 나은 성공을 이뤄냈다. 거기에는 많은 좋은 원인이 있다.
처음 3세기 동안 초대교회에서 진행된 가정집에서의 모임은 3시간에서 5시간 동안 지속하였는데 기쁨이 가득한 식사, 가르침, 찬송, 그리고 성령의 교통으로 넘치는 나눔의 시간은 신자들에게 진정한 영적 성장을 위한 환경을 마련해줬다. 그리스도의 몸 된 지체들은 현대 교회 참석자들처럼 극장에서 서로의 머리 뒤통수를 바라보며 무대에서의 장면을 놓치지 않고 보려는 관객처럼 앉아 있을 때 보다 서로 마주 보며 앉아 있을 때 참여하는 기분이 더 들 것이다. 일반적인 식사 자리에서의 자연스러운 분위기는 서로 투명해지고, 진실한 관심하는 관계와 진정한 교제로 이어진다. 이는 목사의 인도하에 옆자리에 앉은 완전히 낯선 사람과 악수하는 것과 같이 피상적인 현대의 “교제”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
가르침은 예의 바른(그리고 종종 지루해하는) 관중 위에 높이 서서 이상한 옷을 입고 연극을 하는 목소리로 하는 강연이 아닌, 오히려 질문과 답변, 그리고 공개적인 토론에 더 가깝다. 목사가 “매주 설교를 준비”하지 않아도 모든 사람은(물론 장로/목사/감독을 포함한다) 성령님이 주시는 가르침을 받게 될 것이다.
가정교회로 하기에 집이 좁아 보일 때, 장로(들)은 더 큰 건물을 얻어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그들이 두 개의 가정교회 모임으로 나눠져야 된다고 여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단지 새로운 모임장소를 어디로 정하고, 누가 감독을 맡아야 할지에 대한 성령님의 인도 하심을 구하는 일일 뿐이다. 다행히, 그들은 철학적 또는 교리적인 관점을 조사하기 위해 낯선 사람들과 교회성장 이론가들의 이력서를 수집해야 할 필요는 없다; 그들 중에는 이미 열심 있고 훈련된, 그리고 자기가 돌봐야 할 어린 양들을 이미 알고 있는 감독이 있다. 그 새로운 가정교회는 새로운 지역에 복음 전파하고, 불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임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불신자들을 식사 초대하는 것처럼 쉽게 그들의 모임에도 초대할 수 있다.
축복받은 목사(The Blessed Pastor)
어떠한 가정교회의 목사/장로/감독도 현대 교회에 널리 퍼져 있는 목회책임의 중압감으로 말미암은 탈진으로 고통당하고 있지 않다. (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미국에서 달마다 약 1,800명의 목회자가 사역을 그만둔다고 한다.) 가정교회 목사는 적은 무리를 돌보고 성도들이 목사의 재정적인 공급을 해준다면 그는 전직으로 섬길 수 있기 때문에 실제로 기도와 묵상을 하고, 불신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가난한 자들을 돕고, 병든 자를 방문하고 기도해줄 수 있는 시간이 있으며 새로운 제자가 우의 일을 그와 함께 하게끔 그들을 훈련시키는데 시간을 보낼 수 있다. 교회 관리는 간단했다.
그는 자신의 지역에서 다른 장로/목사/감독들과 함께 한마음으로 일했다. 그는 “마을에서 가장 큰 교회”가 되거나 또는 동료 목사들과 “최고의 청소년 사역”이나 “가장 흥미로운 어린이 교회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 경쟁하지 않아도 된다. 사람은 교회에서 예배팀이 얼마나 잘했고 목사가 얼마나 재미있었는지를 평가하지 않았다. 그들은 거듭났고 예수님과 그분의 백성을 사랑한다. 그들은 함께 먹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은사들을 나누기를 즐겼다. 그들의 목표는 예수님께 순종하고 그분의 심판대 앞에 서 있을 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물론 가정교회에도 문제점은 있었고, 서신서에서 그 문제점들이 제기된다. 하지만 불가피하게 현대 교회를 괴롭히고 제자 삼는 사역을 방애하는 문제들은 초대교회 때에는 없었다. 그것은 그들의 지역 교회모식이 3세기 이후 중세시대부터 변화된 교회모식과는 많이 달랐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아래 사실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4세기 초까지 그 어떠한 교회 건물도 존재하지 않았다. 만일 당신이 처음 3세기 동안에 살았었다면, 자신의 사역이 지금 것보다 어떻게 달랐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요약하면, 우리가 더 밀접하게 성경적인 모식을 따를수록, 우리는 제자를 삼으라는 하나님의 목표를 더 효과적으로 달성할 것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제자 삼는 것을 방애하는 가장 큰 장애는 바로 비성경적인 교회구조와 관행이다.
[1]목사 (헬라어로 poimain이며 목자를 의미한다)가 장로 (헬라어로 presbuteros이다), 감독(헬라어로 episkopos이며, KJV에서는 주교로 번역되었다)과 동등하다는 것이 분명하다. 예를 들어, 바울은 성령님이 감독자(episkopos)로 삼으신 에베소 장로(presbuteros)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교회를 보살피게(헬라어로 동사인poimaino) 하였다(행 20:28을 보라). 그는 또한 디도서 1:5-7에서 장로 (presbuteros)와 감독(episkopos) 이란 용어를 동의어로 사용하였다. 베드로도 장로(presbuteros)들에게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라고(poimaino) 권하였다(벧전 5:1-2을 보라). 주교(episkopos의 KJV 번역)가 목사와 장로보다 더 높은 지위에 있으며 수많은 교회를 감독한다는 생각은 인간의 발상이다.
[2]전문훈련을 받은 성직자에 대한 현대적인 강조는 많은 방면으로 보아 큰 교회가 병든 증상을 나타낸다. 그것은 지식의 습득을 영적인 성장과 동일시 한다. 많이 아는 사람일 수록 영적으로 더 성숙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 사람은 도리여 자신의 배운 것을 뽐내는 덜 성숙한 사람일 수 있다. 바울은 “지식은 교만하게 한다”(고전 8:1)고 분명하게 썼다. 그리고 2 ~ 3 년 동안 날마다 지루한 강의를 듣는 사람은 앞으로 분명히 매주 지루한 설교를 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3]디모데전서와 디도서에는 바울이 디모데와 디도가 교회의 장로와 감독을 임명하도록 위임하였다는 언급이 있다. 따라서 디모데와 디도는 한 동안 장로들과 감독들을 감독하였으며 그들은 아마 바울이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딤후 2:2)고 말한 것처럼 주기적으로 장로들과 감독들을 만나면서 제자 훈련을 시켰을 것이다.
[4]행 2:2, 46; 5:42; 8:3; 12:12; 16:40; 20:20; 롬 16:5; 고전 16:19; 골 4:15; 몬 1:2; 요일 1:10을 보라.
[5]바울의 서신서가 장로나 감독들만 대상한 것이 아니라 여러 교회의 모든 사람을 대상한 것이라는 것은 주목할만하다. 바울은 두 서신에서만 장로/목사/감독을 언급하였다. 한 번은 그가 교회에 대한 인사말에서 감독을 언급하였는데 그것은 바울이 그들이 인사에서 제외되었다고 생각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처럼 보인다(빌 1:1을 보라). 다른 한 번은 바울이 성도들을 온전하게 할 사역자들의 목록에서 목사를 언급하였다(엡 4:11-12을 보라). 또한 바울이 우리의 생각에는 장로가 포함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들에서 장로들의 역할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도 특별히 주목할 만 하다. 예를 들어, 주님의 만찬을 관리하거나, 그리스도인들간의 갈등을 해결하는 것과 같은 것들이다. 이 모든 것은 현대 교회에서 장로와 목사가 모든 중요한 역할을 잡고 있는 것과는 달리, 그 당시 그들은 중심에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6]행 2:2, 46; 5:42; 8:3; 12:12; 16:40; 20:20; 롬 16:5; 고전 16:19; 골 4:15; 몬 1:2; 요이 1:10을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