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왜 우리를 창조하셨을까? 그분은 처음부터 몇 가지 목표를 염두에 두셨던 것일까? 그분은 모든 사람이 다 그분을 반역하게 된다는 것을 모르셨다는 말인가? 그분은 우리의 반역 결과 인류가 받게 되는 모든 고통과 슬픔을 예측하지 못하셨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왜 그분은 처음부터 사람을 창조하셨는가?
성경은 우리에게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답을 제공한다. 성경은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기 전부터 그들과 그 후의 모든 사람들이 죄를 지을 것을 알고 계셨다고 말씀한다. 놀랍게도, 그분은 이미 예수님을 통해 타락한 인류를 구원할 계획을 세우셨다. 하나님의 창조 전의 계획에 대해 바울은 이렇게 썼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 1:9, 강조 추가).
하나님의 은혜는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 전부터 우리에게 주신 바 된 것이다. 즉, 하나님은 태초부터 예수님의 희생으로 우리를 구속할 것을 계획하셨다.
마찬가지로, 바울은 에베소에 쓴 서신에서 이렇게 썼다.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엡 3:11, 강조 추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하나님께서 예상하시지 못한 것을 해결하기 위해 신속하게 고안해낸 계획이 아니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려는 영원한 목적을 가지셨을 뿐 아니라, 그분은 또한 그분의 은혜를 받을 사람들을 영원 전부터 아셨으며 심지어 그들의 이름을 책에 기록까지 하셨다.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계 13:8, 강조 추가).
아담의 타락은 하나님께 놀라운 일이 아니다. 당신과 나의 타락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지을 줄을 아셨다. 그리고 그분은 또한 누가 회개하고 주 예수님을 믿을지를 아셨다.
다음 질문(The Next Question)
만일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믿을 것이지만, 어떤 사람은 그분을 거부하리라는 것을 미리 아셨다면, 왜 그분은 예수님을 거부할 사람들을 만드셨을까? 왜 그분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을 사람들만 만드시지 않았을까?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이해하기가 어렵기는 하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첫째,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실 때 자유의지를 주셨음을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모두 하나님을 섬길지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뜻이다. 우리가 순종 또는 불순종하거나, 회개 하거나 또는 회개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예정하신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선택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모두 반드시 시험을 받아야 한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가 어떻게 할 것인지를 미리 아신다. 그러나 그분께서 미리 아시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느 시점에 반드시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모든 축구 경기가 진행되기 전에 그 결과를 미리 아신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경기 결과를 아시기 위해서는, 이런 결과가 있는 경기가 반드시 진행되어야만 한다. 하나님은 진행되지 않은 축구 경기의 결과를 아시지 못하며 아실 수도 없다. 왜냐하면, 진행되지 않은 경기에는 결과가 있을 수 없으므로 그 결과를 미리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자유의지를 가진 사람이 결정을 내릴 기회가 있고 또 결정을 내렸을 때에만 그들의 결정을 미리 아실 수 있다. 그들은 반드시 시험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이 때문에 하나님은 그분께서 미리 아시는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만 만드시지 않았다(그리고 만드실 수도 없다).
또 다른 질문(Another Question)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순종하는 사람만 원하신다면, 왜 그분은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는가? 왜 그분은 우리를 영원히 순종하는 로봇과 같이 만들지 않으셨는가?”라는 질문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그분은 우리와 부자간의 관계를 갖고 싶어 하시며 로봇과 같은 자식을 둔 아버지는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자유의지로 그분을 사랑하기로 선택한 자녀들과 영원한 가족을 이루는 것이다. 성경에 따르면, 그것은 하나님이 예정하신 계획이다.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4하-5, 강조 추가).
만일 당신이 하나님이 로봇한테서 얼마나 큰 기쁨을 얻는지를 알고 싶으면, 손에 인형을 잡고 인형에게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을 해달라고 요구해보라. 당신은 결코 마음에 따뜻함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 인형은 당신이 그에게 하라고 한 말만 할 뿐이다. 그는 당신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이 특별한 것은 그것이 자유의지를 가진 사람의 선택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인형과 로봇은 사랑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를 위해 아무 것도 결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가 마음에서부터 그분을 사랑하고 섬기기를 선택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그분은 자유의지를 가진 사람을 만들 수밖에 없다. 이러한 결정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어떤 자유의지를 가진 사람은 그분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을 선택하지 않는 위험을 감수하게 한다. 그리고 그런 자유의지를 가진 사람들은 일생 동안 그들에게 그분의 창조, 그들의 양심, 복음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드러내신 하나님을 거역하였고 결국 하나님의 진노와 의로운 심판을 대면해야 할 것이다.
지옥의 사람은 아무도 하나님께 비난의 손가락질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죄의 형벌을 피할 수 있는 길을 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딤전 2:4; 벧후 3:9을 보라). 그러나 각 사람은 반드시 자신을 위해 결정해야 한다.
성경의 예정론(Biblical Predestination)
그러나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우리를 선택하시고 예정하셨다는 신약 성경의 말씀들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일부 사람들은 불행하게도 개개인의 행위와는 관계없이 하나님은 특정 사람들만 구원하시고 나머지는 멸망하도록 내버려 두셨다고 생각한다. 즉, 누가 구원받고 누가 멸망할지를 하나님이 선택하신다는 뜻이다. 이런 생각은 분명히 자유의지의 개념을 없애는 것이며 성경은 이렇게 가르친 적이 없다. 성경에서 예정에 대해 어떻게 가르치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실로,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셨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이 사실은 반드시 규명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그분의 인도하심 아래에 회개하고 복음을 믿기로 자기 절로 선택한 사람을 미리 아셨으며 창세 전 부터 그들을 구원하시려고 선택하셨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이 선택하신 사람들에 대해 말한 것을 읽어보자.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고발하되 주여 그들이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을 헐어 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그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냐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므로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롬 11:2-5, 강조 추가).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그분 자신을 위하여 칠천 명을 남겨 두었다”고 말씀하셨음을 주목하라. 그러나 그 칠천 명은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기로 먼저 선택한 사람들이다. 바울은 이와 같이 지금도 하나님의 택하심을 따라 믿는 유대인들이 남아있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렇다. 하나님은 우리를 선택하셨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기절로 먼저 올바른 선택을 한 사람들을 선택하셨다”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선택하셨으며, 그것은 그분께서 창세 전에 계획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미리 아심(God’s Foreknowledge)
이와 같은 맥락에서, 성경은 또한 하나님은 올바른 선택을 하게 될 사람들을 미리 아신다고 가르친다. 예를 들어, 베드로는 이렇게 썼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벧전 1:1-2중, 강조 추가).
우리는 하나님의 미리 아심에 따라 선택받는다. 바울은 또한 미리 아신 자들에 대해 이렇게 썼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29-30).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기로 선택한 사람들을 미리 아시며, 우리가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아 그분의 거듭난 자녀가 되도록 미리 정하셨다. 그 영원한 계획을 이루시기 위하여 그분은 복음을 통하여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를 의롭게 하시고, 궁극적으로 그분의 나라에서 영화롭게 하실 것이다.
바울은 다른 서신에서 이렇게 썼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3-6, 강조 추가).
이곳에서도 동일한 진리를 볼 수 있다 – 하나님은 창세 전부터 우리가(그분께서 미리 아신 회개하고 믿는 사람들)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거룩한 자녀가 되도록 미리 정하셨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일부 사람들은 성경의 다른 모든 가르침을 무시하고 이 말씀을 왜곡해서 해석한다. 그들은 우리가 자기의 구원에 있어서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주장한다 – 그 선택은 하나님께만 있다고 본다. 그들은 이것을 “무조건적인 택하심”의 교리라고 부른다. 하지만 누가 이렇게 아무 조건도 만족시킬 필요가 없는 “무조건적인 택하심”에 대해 들어보았는가? 자유 국가에서 우리는 자기 마음속의 조건에 근거하여 정치 후보자를 선거한다. 우리가 배우자를 선택할 때에도 매력적인 성품의 조건을 만족시키는 사람을 선택한다. 하지만 일부 신학자들은 우리가 구원받는 것이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택하심”으로 말미암은 것이지 우리가 만족시킨 조건 때문이 아님을 믿기를 요구한다. 따라서 개개인의 구원은 순전히 기회에 불과하며 잔인하고 불의하고 위선적이고 무지한 하나님이란 괴물에게 달려 있다! “무조건적인 택하심”이란 문구는 자체 모순적인데 그것은 택하심이란 단어 자체가 조건적임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만일 그것이 “무조건적인 택하심”이라면, 그것은 전혀 택하심이 아닌 순수한 기회일 뿐이다.
큰 그림(The Big Picture)
이제 우리는 큰 그림을 보도록 하자.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지을 것을 아셨고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우리를 구속하실 계획을 세우셨다. 그 계획은 그분의 죄 없는 독생자가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죽을 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그분의 놀라운 사랑과 정의를 드러낸다. 바울이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 2:20)라고 말한 것처럼, 하나님은 회개하고 믿는 우리가 용서받을 뿐 아니라 그분의 아들 예수님처럼 될 것이라고 예정하셨다.
하나님의 거듭난 자녀가 된 우리는 언젠가 불멸의 몸을 받게 될 것이며 완벽한 사회에서 살면서 서로 섬기고 사랑하며 하나님 아버지와 교제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새 땅과 새 예루살렘에서 살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의 희생적인 죽음을 통해 가능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런 계획을 예정하심을 찬양한다!
현재의 삶(This Present Life)
일단 우리가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을 이해하게 되면, 우리는 현재의 삶에 대해 좀 더 완전하게 이해할 수 있다. 주요하게, 이 세상의 삶은 모든 사람을 시험하는 역할을 한다. 각 사람의 선택은 그가 하나님과 함께 영생을 누리게 되는 그분의 자녀가 받는 축복과 특권을 누릴 수 있는 여부를 결정한다. 스스로 자기를 낮추고 하나님의 그림에 복종하여 회개하고 믿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눅 18:14을 보라). 현재의 삶은 주요하게 미래의 삶을 위한 시험이다.
이것은 또한 우리가 현재의 삶 속에 존재하는 일부 오묘함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예를 들어, 많은 사람들이 “왜 사탄과 마귀들이 사람을 시험하도록 허용되었는지?” 또는 “사탄이 천국에서 쫓겨날 때 왜 이 땅에 올 수 있도록 허용되었는지?”에 대해 궁금해한다.
우리는 심지어 사탄이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그분의 목적을 위해 사용됨을 볼 수 있다. 사탄은 주요하게 인간에게 선택사항으로 제공된다. 만일 예수님을 섬기는 것이 우리의 유일한 선택이라면, 모든 사람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예수님을 섬길 것이다.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투표를 요구하지만, 후보가 한 명밖에 없는 선거와 같다. 그 후보는 만장일치로 선출 될 것이지만, 그를 선거한 사람들로부터 사랑 심지어 호감을 받는지에 대해 확신을 가질 수 없다! 그들은 그에게 투표하는 것 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만일 사람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하나님과 경쟁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하나님도 비슷한 상황에 놓이게 될 것이다.
이런 각도에서 고려해보자. 만일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아무런 금지사항도 없는 동산에 두셨다면 어떠했을까? 그러면 아담과 하와는 그들의 환경 때문에 로봇과 같이 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택하심을 받았다”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께 불순종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나는 아담과 하와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라고 말씀하실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 순종할 기회가 없음으로 하여 그분을 향한 그들의 사랑을 입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반드시 자유의지를 가진 사람에게 그분께 불순종할 기회를 주셔야만 그가 그분께 순종하기를 원하는지를 아실 수 있다. 하나님은 아무나 시험하시는 것은 아니다(약 1:13을 보라). 하지만 그분은 모든 사람을 연단하신다(시 11:5; 잠 17:3을 보라). 그분께서 시험하시는 한 가지 방법은 사람들이 사탄의 유혹을 받도록 허용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사탄은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 속에서 그분의 목적을 위해 사용 받게 된다.
완벽한 예(A Perfect Example)
우리는 신명기 13:1-3에서 아래의 말씀을 읽게 된다.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 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 그가 네게 말한 그 이적과 기사가 이루어지고 너희가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따라 섬기자고 말할지라도 너는 그 선지자나 꿈 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강조 추가).
이로부터 우리는 하나님께서 거짓 선지자에게 이적과 기사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 것이 아니라 사탄이 한 짓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허용하시고 사탄의 유혹을 그분 백성들의 마음에 대한 시험으로 사용하셨다.
이 같은 원칙은 사사기 2:21-3:8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순종 여부를 확인하시기 위해 그들이 이방 민족들의 유혹을 받도록 허용하실 때에도 반영되었다. 예수님도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에 가셨다(마 4:1을 보라). 따라서 그분도 하나님께 시험받으셨다. 그분은 죄가 없으시다는 것을 입증받아야만 했으며 유일한 방법은 유혹을 받아 시험받는 것이었다.
사탄이 모든 비난을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Satan Does Not Deserve All the Blame)
사탄은 이미 전 세계 많은 사람들의 마음의 눈을 멀게 하여 복음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도록 기만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사탄이 아무 사람이나 다 속일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반드시 인식해야 한다. 사탄은 단지 자기 자신을 속임수에 빠지도록 허용하고 진리를 거절한 사람들만 속일 수 있다.
바울은 불신자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엡 4:18) 무지해졌다고 선언하였으며 그 근본적인 이유를 밝혔다.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엡 4:17하-19, 강조 추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단지 슬프게도 사탄의 속임수에 빠진 불행한 사람들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인하여 의도적으로 무지해지고 속임 당하기를 원하는 완고한 죄인들이다.
아무도 속임당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자신의 생명이 증명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향한 당신의 마음이 일단 부드러워지면, 사탄은 당신을 계속하여 속일 수 없다.
궁극적으로, 사탄은 그리스도의 천 년 통치 동안에 결박당할 것이며 그때에는 다시는 아무도 미혹하지 못할 것이다.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 잡아서 천 년 동안 결박하여 무저갱에 던져 넣고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 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그 후에는 반드시 잠깐 놓이리라(계 20:2-3).
사탄이 결박당하기 전에는 “만국을 미혹했음”을 주목하라. 그러나 그가 결박당할 때에는 아무도 미혹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일단 놓이게 되면, 그는 만국을 또다시 미혹하게 된다.
천 년이 차매 사탄이 그 옥에서 놓여 나와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리니 그 수가 바다의 모래 같으리라 그들이 지면에 널리 퍼져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두르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태워버리고(계 20:7-9, 강조 추가).
하나님은 왜 사탄을 잠깐 놓아 주실까? 그것은 마음속으로 그리스도를 미워하지만, 그분의 통치 동안 겉으로 순종하는 체했던 사람들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그때에 그들은 공정하게 심판받을 수 있다. 그것은 마지막 시험이 될 것이다.
같은 이유로, 사탄이 지금 이 땅에 영향을 주는 것이 허용된다 – 마음속으로 그리스도를 미워하는 사람들이 드러나게 되며 궁극적으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목적을 성취하시는 데 사탄이 더 이상 필요 없게 되면, 그는 불못에 던져질 것이며 그곳에서 영원한 괴로움을 받게 될 것이다(계 20:10을 보라).
내세를 위한 준비(Preparing For the Future World)
만일 당신이 회개하고 복음을 믿었다면, 당신은 이생에서의 가장 첫 번째인 그리고 가장 중요한 시험을 통과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당신의 지속적인 헌신과 믿음을 결정하시기 위해 당신을 더 이상 시험하시지 않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말라. 오직 “계속하여 믿음에 거하는” 사람들만이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설 수 있다(골 1:22-23).
이 외에도, 성경을 보면 우리가 모두 언젠가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이며 그때에 각 사람이 이 땅에서 순종한 대로 상을 받으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받게 될 미래의 특별한 상급에 합당한지를 결정하기 위해 여전히 시험을 받고 있다. 바울은 이렇게 썼다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롬 14:10-12, 강조 추가).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전 4:5, 강조 추가).
무슨 상급을 받을까?(What Will be the Rewards?)
예수님께 대한 자신의 사랑과 헌신을 증명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상급은 무엇일까?
성경은 적어도 두 가지 상급에 대해 말씀한다 – 하나님의 칭찬과 그분을 섬길 수 있는 더 많은 기회이다. 이 두 가지 상급은 예수님이 하신 귀족의 비유에서 나온다.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그 종 열을 불러 은화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 하니라 그런데 그 백성이 그를 미워하여 사자를 뒤로 보내어 이르되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나이다 하였더라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돌아와서 은화를 준 종들이 각각 어떻게 장사하였는지를 알고자 하여 그들을 부르니 그 첫째가 나아와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 그 둘째가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의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만들었나이다 주인이 그에게도 이르되 너도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이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보소서 당신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 두었었나이다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 주인이 이르되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심판하노니 너는 내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로 알았느냐 그러면 어찌하여 내 돈을 은행에 맡기지 아니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와서 그 이자와 함께 그 돈을 찾았으리라 하고 곁에 섰는 자들에게 이르되 그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 하니 그들이 이르되 주여 그에게 이미 열 므나가 있나이다 주인이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리고 내가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하였느니라(눅 19:12-27).
분명한 것은, 예수님은 먼 나라로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귀인으로 그려졌다. 예수님이 돌아오셨을 때, 우리는 비유에서 귀인이 각 종에게 주신 므나처럼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사, 능력, 사역 그리고 기회에 대해 책임져야 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충성했다면, 우리는 그분의 칭찬을 받게 될 것이며, 비유에서 충성된 종들이 고을을 다스리는 권세를 받은 것처럼 우리도 그분을 도와 이 땅을 다스리는 권세를 받게 될 것이다(딤후 2:12; 계 2:26-27; 5:10; 20:6을 보라).
우리가 받게 되는 미래 심판의 공정성(The Fairness of Our Future Judgment)
예수님이 말씀하신 다른 한 비유는 우리가 미래에 받게 되는 심판의 공정성이 완벽함을 보여준다.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그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 또 제삼시에 나가 보니 장터에 놀고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하니 그들이 가고 제육시와 제구시에도 또 나가 그와 같이 하고 제십일시에도 나가 보니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 이르되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 제십일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이르되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마 20:1-16).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하나님의 모든 종들이 마지막에 다 똑같은 상급을 받게 된다고 가르치신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지 불공평한 것뿐 아니라 많은 다른 말씀들과 모순되기 때문이다(예를 들어, 눅 19:12-27; 고전 3:8을 보라).
오히려 예수님은 하나님의 종들이 받는 상급은 그들이 하나님을 위해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얼마나 많은 기회를 주셨는가에 근거한다고 가르치셨다. 비유에서 한 시간 동안 일한 품꾼도 집 주인이 기회를 주면 하루 종일 일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한 시간 동안 최선을 다해 일한 사람과 하루 종일 일할 기회를 가진 사람은 동일한 상급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분의 종들에게 각각 다른 기회를 주신다. 일부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놀라운 은사를 사용하여 수천 명의 사람들을 섬기고 축복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다. 다른 사람들은 그보다 적은 기회와 은사를 받았지만 충성 되게 주님을 위해 일한다면, 그들은 결국 같은 상급을 받을 수 있다.[1]
결론(The Conclusion)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언젠가는 모든 사람이 이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현명한 사람들은 지금 알고 있으며 그에 따라 행동한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전 12:13-14).
제자 삼는 사역자는 하나님께 전심으로 순종하며 그의 제자들도 똑같이 하도록 동기부여 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
우리가 받게 될 미래의 심판이라는 이 중요한 주제에 관해 진일보 연구하기 위해 아래의 성경 구절을 참고하라. 마 6:1-6, 16-18; 10:41-42; 12:36-37; 19:28-29; 25:14-30; 눅 12:2-3; 14:12-14; 16:10-13; 고전 3:5-15; 딤후 2:12; 벧전 1:17; 계 2:26-27; 5:10; 20:6.
[1]이 비유는 젊어서 회개하고 오랜 세월 동안 하나님을 충실하게 섬긴 사람과 생의 마지막 년에 회개하고 하나님을 일 년밖에 섬기지 않은 사람이 같은 보상을 받게 된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그것은 불공평하며 하나님께서 매 개인에게 주신 기회에 기초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그들의 전체 생애를 통해 회개할 기회를 주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많이 일한 사람은 적게 일한 사람보다 더 많은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