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 장 (Chapter Eleven)

성령세례(The Baptism in the Holy Spirit)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거의 모든 페이지에 초대교회에서의 성령님의 역사가 기록되었다. 만일 사도행전에서 성령님의 역사를 제거한다면 거의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진실로, 성령님은 제자들에게 “천하를 어지럽게”할 권능을 주셨다(행 17:6을 보라).

오늘날 전 세계에서 교회가 가장 빠르게 확장되는 지역을 보면, 그곳의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성령님께 순종하고 그분의 능력을 받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가 놀랄 일이 아니다. 성령님은 십 초 동안에 우리가 자신의 노력으로 만 년 동안에 이룬 일보다 더 많이 이룰 수 있다. 따라서 제자 삼는 사역자가 성경이 신자의 삶과 사역에서의 성령님의 역사에 대해 무엇을 가르치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사도행전에서 우리는 신자들이 성령세례를 받고 사역할 수 있는 힘을 받는 예를 자주 보게 된다. 가능하다면 우리가 이 주제에 대해 연구함으로써 그들이 체험한 것을 우리도 체험하고, 그들이 즐겼던 성령님의 기적적인 도움을 우리도 즐기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비록 일부 사람은 이러한 기적적인 성령님의 역사는 초대 사도시기에만 국한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나는 그러한 견해를 뒷받침해주는 어떠한 성서적, 역사적 또는 논리적인 근거도 찾지 못했다. 그것은 불신 때문에 생긴 이론이다. 하나님 말씀의 약속을 믿는 자만이 약속된 축복을 받을 수 있다.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 믿음이 없는 이스라엘 사람처럼, 오늘날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는 자들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준비한 모든 것을 경험할 수 없다. 당신은 어떤 부류에 속하는가? 개인적으로, 나는 신자들에 속한다.

성령님의 두 역사(Two Works by the Holy Spirit)

주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는 모든 사람은 모두 자신의 삶 속에서 성령님의 역사를 경험했다. 그의 속사람, 또는 영은 성령님에 의해 거듭났으며(딛 3:5을 보라), 성령님은 지금 그의 안에 거하신다(롬8:9, 고전 6:19을 보라). 그는 “성령으로 난”(요 3:5) 사람이다.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한 많은 카리스마파와 오순절파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세례를 받고 방언을 말해야만 성령님이 내주하신다고 가르치는 오류를 범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적으로나 경험적으로나 오류임이 분명하다. 많은 카리스마파와 오순절파가 아닌 신자들에게는 일부 카리스마파와 오순절파 신자들보다 내주하시는 성령님에 관한 증거가 더 많다! 그들은 내주하시는 성령님이 없이는 맺을 수 없는, 바울이 갈라디아서 5:22-23에서 열거한 성령의 열매를 더 많이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사람이 성령으로 낳았다고 하여 그가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보장할 수는 없다. 성경에 따르면, 성령으로 난것과 성령세례를 받는 것은 일반적으로 두 가지 별개의 경험이다.

우리가 이 주제를 탐구하기 시작하기에 앞서, 먼저 예수님께서 어느 한 번 사마리아의 우물가에서 구원받지 못한 여자에게 성령님에 대해 말씀하신 것을 생각해 보도록 하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0, 13-14).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주하시는 생수가 믿는 자들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인 것 같다. 나중에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생수”라는 단어를 다시 사용하셨는데 그분께서 성령님에 대해 말씀하셨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요 7:37-39, 강조 추가).

이 경우에 예수님은 생수가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된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오히려, 이번에는 생수가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내면에서 흐르는 이 된다고 말씀하셨다.

요한복음의 이 두 유사한 구절은 성령으로 낳았다는 것과 성령세례를 받았다는 것의 차이를 잘 보여준다. 성령으로 낳았다는 것은 주요하게 거듭난 사람에게 혜택을 주며, 거듭난 사람은 영생을 누릴 수 있다. 사람이 성령으로 거듭나면, 그의 안에는 그에게 영생을 주는 성령님이 거하시게 된다.

그러나 성령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주로 다른 사람들에게 혜택을 준다. 왜냐하면, 그것은 신자들이 성령님의 능력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사역할 수 있게끔 장비시켜 주기 때문이다. “생수의 강”은 성령님의 능력에 의해 그들의 내면으로부터 흘러나오며,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가져다준다.

왜 성령세례가 필요할까?(Why the Baptism in the Holy Spirit is Needed)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사역하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성령님의 도움이 없다면, 우리는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려는 희망조차 품을 수 없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신자들에게 성령세례를 베푸시겠다고 약속하신 이유가 바로 전 세계 사람들이 복음을 듣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분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눅 24:49, 강조 추가).

누가도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기록하였다.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7-8 강조 추가).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늘로부터 오는 능력”을 받을 때까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하셨다. 그분은 그렇지 않으면 제자가 본질적으로 무력해지고 그분이 주신 사명을 이루지 못할 줄을 아셨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성령세례를 받은 후,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하나님께 초자연적으로 쓰임받았음을 알 수 있다.

전 세계 수백만 명의 그리스도인이 성령세례를 받은 후에, 특히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할 때에 새로운 차원의 능력을 경험했다. 그들은 자기들의 말이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고, 때로는 자기들도 모르는 성경 구절을 인용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일부 사람은 자기가 복음 전도와 같은 특정 사역에 부르심을 받고 구체적인 은사를 가졌음을 발견했다. 또 다른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분의 뜻대로 사용하셔서 성령님의 다양한 초자연적인 은사들을 발휘하게 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의 경험은 철저하게 성경적이다. 그들의 경험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는 반대에 대한 성경적인 근거가 없다. 사실상, 그들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본받도록 부르심을 받은 우리가 그분께서 성령님에 대한 경험을 본받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물론, 그분은 마리아에게 잉태되었을 때 성령으로 낳으셨다(마 1:20을 보라). 성령으로 낳으신 그분은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에 성령세례를 받으셨다(마3:16을 보라). 만일 예수님도 사역을 위해 성령세례를 받으심으로 자신을 장비하셔야 했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많이 필요할까?

성령세례의 초기 증거(The Initial Evidence of the Baptism in the Spirit)

신자가 성령세례를 받은 후 경험하게 되는 초기 증거는 그가 성경에서 “새 방언” 또는 “다른 언어”로 불리는 새로운 언어로 말하는 것이 될 것이다. 많은 성경 구절들이 이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데 아래에 그것들을 살펴보자.

먼저, 예수님은 승천하기 전 마지막 순간에, 믿는 자들을 따르는 표적 중 하나가 새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막 16:15-17, 강조 추가).

일부 주석가들은 이 구절들이 어떤 신약 성경의 고대 사본에는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의 성경 속에서 제외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대부분 고대 사본은 그 구절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내가 읽어본 어떤 영어 번역본도 그것을 생략하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이 이 구절들 속에서 말씀하신 내용은 사도행전에 기록된 초대 교회의 경험과 완벽하게 관련된다.

사도행전에는 신자들이 처음으로 성령세례를 받은 다섯 가지 사례가 있다. 이 다섯 가지 사례를 보면서 우리는 두 가지 질문을 지속적으로 물어볼 것이다. (1) 성령세례는 구원받은 후에 경험하는 것인가? (2)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은 새 방언을 말하는가? 이것은 우리가 오늘날 신자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예루살렘(Jerusalem)

첫 번째 예는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120명의 제자가 오순절 날 성령세례를 받은 사건이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 2:1-4, 강조 추가).

이 120명의 신자들이 그 시간 전에 이미 구원받고 거듭났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따라서 그들은 구원받은 후에 성령세례를 경험했음이 확실하다. 그러나 그들이 그 시간 전에 성령세례를 받는 것은 불가능한데 왜냐하면, 성령님은 그날까지 교회에 임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분명히 함께 따라온 표적은 다른 언어로 말하는 것이었다.

사마리아(Samaria)

신자들이 성령세례를 받은 두 번째 예는 사도행전 8장에 기록된 빌립이 사마리아에 내려가서 거기서 복음을 전파한 사건에서 찾을 수 있다.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그들이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그들이 내려가서 그들을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더라(행 8:12-16).

사마리아 그리스도인들은 분명히 구원을 받은 후 성령세례를 받았으며 이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이차적 경험이었다. 성경은 명백하게 베드로와 요한이 도착하기 전에, 사마리아인들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으며,” 복음을 믿고 물 세례를 받았다고 언급했다. 베드로와 요한이 그들을 위해 기도하러 내려왔을 때, 성경은 “그들이 성령을 받기를 기도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이보다 더 분명하게 말할 수 있을까?

사마리아 신자들이 성령세례를 받았을 때 방언을 말하였는가? 성경은 이 부분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았지만, 그들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났음을 밝히고 있다. 시몬이라 하는 사람은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 그리스도인들을 안수했을 때 일어난 일을 보고, 그는 그들에게서 성령을 줄 수 있는 권능을 돈 주고 사려고 하였다.

이에 두 사도가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이르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행 8:17-19).

시몬이 그토록 인상 깊게 본 것은 무엇일까? 그는 이미 사람들에게 붙었던 귀신들이 떠나가고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들이 기적적으로 낫는 등 많은 다른 표적들을 보아왔다(행 8:6-7을 보라). 그 자신도 이전에 마술을 행하여 사마리아의 모든 사람을 놀라게 한 일이 있었다(행 8:9-10을 보라).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할 때 그가 본 것은 굉장히 놀라운 광경이었음이 틀림없었다. 우리가 틀림없이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그가 사도행전에서 매번 그리스도인이 성령세례를 받은 후 나타나는 현상인 – 방언을 말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다메섹에서의 사울(Saul in Damascus)

사도행전에서 세 번째로 언급된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은 나중에 사도 바울로 알려진 다소 사람 사울이다. 그는 자기가 일시적으로 눈이 멀었던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구원받았다. 그가 회심한 후 사흘 뒤,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그를 찾아간다.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 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행 9:17-18).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와서 그를 위하여 기도하기 전에 사울이 이미 거듭났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는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주 예수님을 믿었으며, 즉각적으로 새로운 주님의 지시를 따랐다. 또한, 아나니아 사울을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사울을 “형제 사울”이라고 불렀다. 아나니아는 사울에게 그가 온 것은 사울로 하여금 다시 보게 하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했음을 유의하라. 따라서 사울에게 있어서 성령 충만 또는 성령세례를 받은 것은 그가 구원받은지 사흘 후에 발생했다.

성경은 사울이 성령세례를 받은 실제 사건을 기록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아나니아가 사울이 있던 집에 도착한 직후에 발생했음이 틀림없다. 사울이 어느 시점에 다른 방언을 말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그가 나중에 고린도전서 14:18에서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 언급하였기 때문이다.

가이사랴(Caesarea)

신자들이 성령세례를 받았다는 네 번째 언급은 사도행전 10장에서 발견된다.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의 인도 하심을 따라 가이사랴의 고넬료의 가족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고 전파하자, 그의 모든 이방인 청중들은 바로 믿음으로 응답하였으며, 성령님이 그들에게 내려오셨다.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이에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베풂을 금하리요 하고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 하니라(행 10:44-48상).

이 경우에, 예수님을 믿은 첫 이방인들인 고넬료의 가족들이 동시에 거듭나고 성령세례를 받은 것처럼 보인다.

만일 우리가 이 말씀의 상하문을 검토하고 역사적 맥락을 연구해 보면, 왜 하나님께서 베드로와 그의 동료 신자들이 이방인 신자들에게 성령을 받도록 안수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으셨는지를 알 수 있다. 베드로와 다른 유대인 신자들은 이방인들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믿기 어려워 했으며,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들은 아마도 고넬료 가족이 성령세례를 받도록 기도해 준적도 없었을 것이다. 때문에 하나님은 주권을 행하셨다. 하나님은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에게 이방인들에 대한 그분의 놀라운 은혜에 대하여 가르치셨다.

베드로와 다른 유대인 신자들이 고넬료 가족들이 진정으로 성령을 받은 것을 무엇으로 확신 했을까? 누가는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임이러라”(행 10:46)고 썼다. 베드로는 이방인들이 오순절 날 성령을 받은 120명 같이 성령을 받았다고 선언했다(10:47을 보라).

에베소(Ephesus)

신자가 성령세례를 받았다는 다섯 번째 언급은 사도행전 19장에서 발견된다. 에베소에 와서 사도 바울은 일부 제자들을 만나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였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행 19:2).

신약 서신서의 대부분을 쓴 사람으로서 바울은 분명히 모종 의미에서 성령을 받지 않고도 예수님를 믿는 것이 가능함을 믿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그런 질문을 할 리가 없다.

그 제자들은 자신들이 성령이 계심도 들어보지 못했다고 대답했다. 사실, 그들은 그들에게 세례를 베푼 세례 요한을 통해 단지 오실 메시아에 대해서만 들어봤다. 바울은 즉시 그들에게 물 세례를 다시 베풀었으며, 이번에 그들은 진정한 기독교의 세례를 경험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그들이 성령을 받게끔 그들에게 안수하였다.

그들이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행 19:5-7).

이 열두 사람이 바울을 만나기 전에 거듭났는지 여부를 떠나서, 성령세례는 구원을 받은 후에 받는 것임이 분명하다. 또한, 다시 한 번, 그들의 성령세례를 따랐던 표적은 방언을 말하는 것이었다(이 경우에는 예언도 하였다).

평결(The Verdict)

이 다섯 가지의 실례를 검토해 보자. 그 중 최소한 네 가지 중 성령세례는 구원 이후에 발생한 경험이었다.

그 중 세 가지에서, 성경은 명백하게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이 방언 하였다고 말한다. 또한, 아나니아와 바울의 만남에서, 성령세례를 받은 바울의 경험은 실제로 기록되지 않았지만, 우리는 그가 결과적으로 방언을 말했음을 알고 있다. 그것이 네 번째 실례이다.

나머지 사례에서, 사마리아의 신자들이 성령을 받을 때 뭔가 초자연적인 일이 일어났는데, 왜냐하면, 시몬이 성령을 줄 수 있는 권능을 갖기 위해 돈 주고 사려고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증거는 매우 분명하다. 초대 교회에서, 거듭난 신자들은 성령님에 관한 두 번째 경험을 하였고, 그들이 성령을 받았을 때 방언을 말하였다. 이것은 우리가 놀랄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그분을 믿는 자들이 새 방언을 말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모든 거듭난 사람은 또한, 성령님의 또 다른 역사인 성령세례를 받게 된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있다. 또한, 모든 신자는 자신이 성령세례를 받을 때 다른 방언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해야 한다.

성령세례를 받는 방법(How to Receive the Baptism in the Holy Spirit)

모든 하나님의 선물처럼, 성령도 믿음으로 받는다(갈 3:5을 보라). 성령세례를 받을 믿음을 갖기 위해서, 신자는 반드시 먼저 성령세례를 받는 것이 그를 위한 하나님의 뜻임을 확신해야 한다. 만일 그가 의심하거나 믿지 못한다면, 그는 성령을 받을 수가 없다(약 1:6-7을 보라).

어떤 신자도 성령을 받는 것이 그를 위한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생각할 좋은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 일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명백하게 언급하셨기 때문이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 11:13).

예수님의 이 약속은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성령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할 것이다.

이 구절은 또한, 성령세례를 받는 것이 구원 이후에 발생한다는 사실을 뒷받침 해준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여기서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들이(오직 하나님을 그들의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 여기는 사람들) 성령을 구하면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명백하게, 만일 신자가 성령님을 경험하는 것이 구원 받는 순간 거듭날 때가 전부라면, 예수님의 이 약속은 무의미 하게 된다. 현대 신학자들과는 달리, 이미 거듭난 사람이 하나님께 성령을 구하는 것은 매우 적절하다고 믿으셨다.

예수님에 따르면, 한 사람이 성령을 받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 하나님은 반드시 그 사람의 아버지여야 한다. 만일 당신이 거듭났다면 하나님은 곧 당신의 아버지이다. 둘째, 당신은 반드시 하나님께 성령을 구해야 한다.

비록 안수를 통해 성령을 받는 것이 성경적이지만(행 8:17; 19:6을 보라),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아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도 자신이 기도하던 자리에서 성령을 받을 수 있다. 그는 단순히 구하고, 믿음으로 받으면, 성령님이 그에게 주시는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할 것이다.

일반적인 두려움(Common Fears)

어떤 사람은 그들이 성령을 구하는 기도를 할 때, 악령에 노출될까 봐 우려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에 대한 근거는 없다. 예수님은 이렇게 약속하셨다.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 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는 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 11:11-13).

우리가 성령을 구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주실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다른 무엇을 받을까 봐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일부 사람은 그들이 다른 방언을 말할 때, 성령님이 주신 초자연적인 언어보다는 단지 무의미한 언어를 만들어 낼까 봐 우려한다. 그러나 당신은 성령세례를 받기 전에는 확실한 언어를 만든다는 것이 불가능함을 알게 될 것이다. 반면에, 당신은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당신의 입술, 혀와 성대를 사용해야한다는 점을 알고 있어야 한다. 성령님은 당신을 대신해 말씀하시지 않는다 – 그분은 단지 당신으로 하여금 말하게 하신다. 그분은 우리의 도움이지 일꾼이 아니다. 당신은 반드시 성경이 가르치는대로 사실대로 말해야 한다.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 2:4, 강조 추가).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행 19:6, 강조 추가).

신자가 성령의 선물을 구한 후, 그는 방언할 수 있다고 믿어야 하며 또한, 기대해야 한다. 왜냐하면, 성령은 믿음으로 받기에, 받는 사람은 특정 감정이나 신체적 감각을 체험하기를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그는 단순히 그의 입을 열고 성령님이 그에게 말하게 하신 언어로 새로운 소리와 음절로 말하기 시작해야 한다. 그 신자가 믿음으로 말하지 않는 한, 어떤 말도 그의 입에서 나올 수 없다. 그는 반드시 말해야 하며, 성령님은 말할 것을 주실 것이다.

말씀의 원천(The Source of the Utterance)

바울에 따르면, 신자가 방언기도를 할 때, 그의 마음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영이 기도한다고 한다.

내가 만일 방언기도를 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고전 14:14-15).

바울은 자신이 방언기도를 하면 그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 뜻인즉 그의 마음은 방언기도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그는 방언기도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방언으로 줄곧 기도하기 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언어로, 마음으로 기도하는 데에도 시간을 보냈다. 그는 방언으로 찬송했을뿐 아니라 자신의 언어로도 찬송하였다. 이 두 가지 기도와 찬송은 각기 적합한 상황이 있으며, 우리에게는 바울의 균형 잡힌 모범을 따를 수 있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바울은 자신의 언어로 말하는 것을 제어하듯이 방언도 자기의 의지대로 제어할 수 있었음을 유의하라. 그는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라고 말했다. 비평가들은 종종 현대적인 방언이 진정으로 성령님의 선물이라면, 사람은 방언 말하는 것을 제어할 수 없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그는 하나님을 지배하는 죄를 범하는 것이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근거가 없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것처럼 현대와 고대의 방언도 그것을 말하는 사람들의 통제 아래에 있었다. 비평가들은 또한, 사람의 두 손도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확실하기에 사람은 그것에 대한 제어권이 없으며, 사람이 의식적으로 자신의 손을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을 지배하려는 시도와 같다고 말할 수도 있다.

당신이 일단 성령세례를 받고 나면, 방언이 마음이 아닌 영에서 나옴을 자신한테 쉽게 증명할 수 있다. 먼저, 이 책을 읽는 동시에 다른 사람과 대화하기를 시도해보라. 당신은 이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할 수 없음을 발견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이 책을 읽으면서 방언도 계속적으로 할 수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그 이유는 당신이 자신의 마음으로 방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방언은 당신의 영으로부터 나온다. 그러므로 당신은 영으로 기도하는 동시에 마음으로 읽고 이해할 수 있다.

당신이 성령세례를 받았기 때문에(Now That You Are Baptized in the Holy Spirit)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성령세례를 베푸신 주요 이유를 명심하라 – 당신으로 하여금 성령의 열매와 은사를 나타내는 그분의 증인이 되도록 권능을 주시기 위함이다(고전 12:4-11; 갈5:22-23을 보라). 하나님은 당신이 그리스도를 닮은 삶을 살고 그분의 사랑, 희락, 그리고 화평을 이 세상에 드러내고, 성령님의 초자연적인 은사를 나타내는 것을 사용하셔서 다른 사람들을 그분께로 인도하실 것이다. 방언할 수 있는 능력은 내면으로부터 흐르는 “생수의 강”의 일종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님을 주신 것은 우리가 이 땅의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들고 나아가도록 하기 위함임을 기억하라(행 1:8을 보라). 우리는 다른 방언으로 말할 때, 우리가 말하는 언어가 멀리 떨어진 부족 또는 외국 국가의 모국어일 수도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우리는 매번 방언기도를 할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언어의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 들어보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예수님의 지상 명령을 이루기 위해 우리가 어떻게 하기를 원하시는지를 물어야 한다.

우리는 될수록 방언을 많이 말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영적 거장인 바울은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 썼다. 그는 이 말을 방언을 많이 하는(비록 늘 적절하지 않은 시간에 하는) 교회에 썼다. 따라서, 바울은 그들보다 방언을 더 많이 하였음이 틀림없다. 방언기도를 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을 감찰하고, 바울이 데살로니가 전서 5:17에서 가르친 것처럼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게끔 도와준다.

바울은 또한,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운다고 가르쳤다(고전 14:4을 보라). 그것은 방언이 우리를 영적으로 세워간다는 의미이다. 방언기도를 함으로써, 우리는 어느 정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우리의 속사람을 강건하게 한다. 다른 방언을 말하는 것은 모든 신자의 영적인 삶을 풍성하게 해야 하며, 단지 처음 성령 충만을 받았을 때의 일회적인 경험에 머물지 말아야 한다.

일단 당신이 성령세례를 받았다면, 나는 당신이 날마다 시간을 내어 하나님께 당신의 새로운 언어로 기도하기를 권장한다. 그것은 당신의 영적인 삶과 성장을 크게 향상시킬 것이다.

몇 가지 일반적인 질문에 대한 답변(Answers to a Few Common Questions)

우리는 방언을 말한 적이 없는 모든 사람은 성령세례를 받은 적이 없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개인적으로,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나는 내가 사람들이 성령세례 받기를 위해 기도할 때 항상 그들에게 방언으로 말하기를 기대하라고 격려한다. 그리고 그들 중 아마 95%는 내가 기도한지 몇 초 내에 방언을 받게 된다. 지난 몇 년 동안 그 인수는 수천 명에 달한다.

그러나 나는 성령세례 받기를 기도한 그리스도인이 방언을 받지 못했다고 해서 그가 성령세례를 받지 못했다고 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성령세례는 믿음으로 받으며 방언은 자원적으로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내가 성령세례 받기를 기도했으나 방언으로 말한 적이 없는 신자와 교제할 기회가 있다면, 나는 먼저 그에게 이 주제에 관한 사도행전의 모든 말씀을 보여줄 것이다. 그다음에 나는 또한, 그에게 바울이 방언을 말할지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고 썼음을 보여줄 것이다. 나는 바울처럼, 내가 원할 때 수시로 방언으로 말할 수 있으며, 따라서 나는 내가 원한다면 영원히 방언으로 말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릴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성령세례를 받고도 성령님과 동역하지 않은 채 처음부터 방언을 말할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다시 한 번, 나는 성령세례를 받기 위하여 믿음으로 기도했지만, 방언을 말한 적이 없는 그리스도인과 교제할 때마다, 나는 그가 성령세례를 받지 못했다고 말하지 않는다(또한, 그렇다고 믿지도 않는다). 나는 그저 그에게 방언을 말하는 것이 성령님이 우리를 떠나서 하는 일이 아님을 설명해 준다. 나는 성령님이 말씀을 주시지만, 우리가 자기의 언어로 말을 할 때와 같이 우리도 반드시 입을 열어 말을 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그다음에 나는 그 사람이 성령님과 동역하여 방언을 말할 수 있도록 권장한다. 거의 예외 없이, 모든 사람이 방언을 말하게 된다.

바울은 모든 사람이 다 방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는가?(Didn’t Paul Write that Not All Speak with Tongues?)

바울의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고전 12:30)는 수사학적 질문에 대한 명백한 대답은 “아니”이며, 그것은 반드시 신약의 나머지 부분과 조화되어야 한다. 그의 질문은 성령님의 뜻에 따라 나타나는 영적 은사들에 대한 그의 가르침에서 찾을 수 있다(고전 12:11을 보라). 바울은 특별히 “각종 방언 말함”(고전 12:10)은 반드시 항상 방언을 통역하는 영적 은사와 함께 동반되어야 한다고 썼다. 이 특별한 은사는 고린도 교회 신자들이 자신들의 교회에서 아무런 통역도 없이 공개적으로 했던 방언의 은사가 아니다. 우리는 왜 성령님이 공중 집회에서 한 사람에게 방언의 은사는 주시면서 다른 한 사람에게 통역의 은사는 주시지 않는지에 대해 물어야 할 것이다. 답은 성령님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성령님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 무언가를 추진하고 있는 것이 된다.

고린도 신자들은 예배시간에 통역이 없이 방언기도를 큰소리로 했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우리는 방언을 말하는 것이 두 가지 용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는 바울이 개인적으로 해야 한다고 했던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바울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고 말한 것처럼 그런 방언기도의 용도는 통역이 동반되지 않았다. 분명한 것은, 바울이 그가 한 방언의 내용을 항상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이해할 수 없었으며 통역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교회의 대중 집회를 위한 방언의 용도도 있는데, 그것은 항상 통역의 은사를 동반한다. 그것은 성령님이 그분의 뜻을 따라 한 사람에게 방언의 은사를 줄 때 발생한다. 그 사람은 대중적으로 방언하게 되며, 그다음에 통역이 주어진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다 그렇게 사용하시지는 않는다. 그것이 바로 바울이 모든 사람이 다 방언을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 이유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통역의 은사를 주셔서 사용하시지 않는 것처럼 모든 사람이 다 갑지가 방언을 받고 사용받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성경의 나머지 부분의 가르침과 바울의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는 수사학적 질문을 조화시키는 유일한 방법이다.

나는 바울처럼, 원하면 언제든지 방언으로 말할 수 있다. 때문에 바울이나 나 자신이나 누구도 우리가 방언을 말할 때마다, 그것이 “오직 성령님의 뜻”대로 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것은 우리의 뜻대로 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원할 때마다 하는 방언은 오직 “성령님의 뜻”에 따라 하는 방언의 은사일 수 없다. 또한, 바울은, 나처럼, 그가 한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개인적으로 방언을 말하였으므로, 그것은 그가 고린도전서에서 쓴 항상 통역의 은사를 동반한 방언의 은사일 수 없다.

내가 대중 집회에서 방언을 말한 적은 매우 드물다. 비록 내가(고린도 신자들이 했던 것처럼) 원할 때마다 교회에서 어떤 통역도 없이 큰 소리로 방언기도를 할 수 있지만, 나는 성령님의 감동이 있을 때에만 그렇게 하였다. 내가 성령님의 감동을 감지했을 때마다, 항상 통역이 있음으로 하여 지체를 세워갔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균형을 잡아야 한다. 때문에 고린도전서 12:30에 기록된 바울의 수사학적 질문으로 인하여 다 방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결론짓는 사람은 그들의 해석과 조화되지 않는 다른 많은 성경 말씀들을 무시하고 있다. 그들의 오류로 말미암아, 그들은 하나님의 큰 축복을 놓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