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 장 (Chapter Twelve)

사역 속의 여성(Women in Ministry)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의 절반 이상이 여성 신자이기 때문에 그들이 지체 속에서 가진 하나님이 주신 역할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대부분의 교회와 사역 속에서, 여성들이 종종 많은 사역을 감당하기에 귀한 일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여성의 역할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여성은 교회에서 말씀과 예배 인도와 같은 특정 영역에서는 종종 제한을 받는다. 일부 교회는 여성 목사를 허용하지만, 많은 교회는 허용하지 않는다. 일부 교회는 여성이 가르칠 수 있게 하지만, 많은 다른 교회는 못하게 한다. 일부 교회는 여성이 예배 말씀을 전하지 못하도록 완전히 제한한다.

대부분의 이러한 불일치는 바울이 고린도전서 14:34-35과 디모데 전서 2:11-3:7에 기록한 여성의 역할에 대한 말씀에 대한 다양한 해석에서 비롯된다. 이 말씀들은 우리의 연구 초점이 될 것이며 특히 이 장의 끝 부분에서 논의될 것이다.

처음부터(From the Beginning)

우리가 시작할 때, 성경의 첫 페이지에 나오는 여자에 대한 말씀을 생각해 보자. 여자도 남자와 같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 1:27).

물론, 우리는 하나님은 하와를 만드시기 전에 아담을 만드셨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바울에 의하면 이것은 영적으로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딤전 2:3). 우리는 나중에 바울이 설명한 창조순서의 중요성을 고려할 것이지며, 지금은 그것이 여성에 대한 남성의 우월성을 증명하지 않는다는 것만 말해두겠다. 우리는 하나님이 인간 이전에 동물을 창조하셨으며(창 1:24-28을 보라), 아무도 동물이 사람들보다 뛰어나다고 주장하지 않음을 알고 있다.[1]

여자는 남편의 돕는 배필로 지음 받았다(창 2:18을 보라). 이 점은 다시 한 번 그녀의 열등함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결혼 생활에서의 그녀의 역할을 보여준다. 성령님은 우리를 도와주도록 주셨지만, 분명히 그분은 우리보다 열등하지 않다. 오히려, 성령님은 우리보다 뛰어나시다! 그리고 하나님이 여자를 그녀의 남편을 돕는 배필로 지으신 것은 남자가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다고 말씀하신 분이 곧 하나님이 시다(창 2:18을 보라). 이 진리는 역사 속에서 남자가 그를 돕는 아내를 잃고 혼자 남았을 때 셀 수 없이 많이 입증되었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창세기에서 첫 시작부터 첫 번째 여자는 첫 번째 남자의 육체로부터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여자는 남자의 몸에서 취한 것이며, 이것은 남자가 여자 없이는 무언가를 잃은 것이 되며, 그 둘은 원래 한 몸이었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또한, 하나님에 의해 분리된 그들은 성적 결합을 통하여 다시 한몸이 되도록 의도되었으며, 이 성적 결합은 후대를 번식할 뿐 아니라, 두 사람이 서로 필요로 하고, 사랑을 표현하고 서로 즐거워할 수 있는 방식이기도 하다.

창조에 관한 이런 교훈은 한 성별이 다른 성별보다 뛰어나다거나, 또는 한 성별이 다른 성별을 지배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다는 생각에 반대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결혼과 사역에서 여성에게 남성과 다른 역할을 주셨다고 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남녀가 평등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8).

구약 사역 속의 여성들(Women in Ministry in the Old Testament)

이런 전제하에, 구약 시대에 하나님이 그분의 거룩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사용하신 일부 여성들을 보도록 하자. 물론, 하나님께서는 신약 시대에 그러셨던 것처럼 구약시대에도 주요하게 남성들을 사역 속에 부르셨다는 것은 분명하다. 구약 성경은 모세와 아론, 여호수아, 요셉, 사무엘과 다윗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그러나 구약 시대에도 많은 여성들이 하나님은 누구든지 그분이 기뻐하시는 대로 부르시고 사용하심을 증명한다. 그리고 여성들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준비되어 있었다.

우리가 그런 여성들을 구체적으로 알아보기에 앞서, 먼저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 쓰임 받은 모든 위대한 남자들은 다 여자가 낳고 키웠음을 주목해야 한다. 요게벳이란 여자가 없었다면 모세가 있을 수 없다(출 6:20을 보라). 하나님의 다른 위대한 남자들도 모두 그들을 낳은 어머니가 없었다면 존재할 수가 없다. 여성들은 하나님에 의해 중요한 책임과 칭찬받을만한 사역을 부여받았는데 그것이 바로 주님 안에서의 자녀 양육이다(딤후 1:5).

요게벳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모세와 아론의 어머니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그들의 누이인 선지자이자 예배 인도자인 미리암의 어머니이기도 하다(출 15:20을 보라). 미가서 6:4에서, 하나님은 미리암을 모세와 아론과 같이 이스라엘의 지도자 중 한 명으로 구분하셨다.

내가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어 종 노릇하는 집에서 속량하였고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을 네 앞에 보냈느니라(강조 추가).

물론, 이스라엘에서의 미리암의 지도력이 모세처럼 지배적인 것은 분명히 아니었다. 그러나 여선지자로서 미리암은 하나님을 대변하였으므로, 나는 그녀를 통해 말씀하신 하나님의 메시지가 단지 여성들에게만 향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남성들에게도 향한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이 안전하다고 생각한다.

 

이스라엘의 여성 사사(A Female Judge Over Israel)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신 또 다른 여성은 이스라엘의 사사 시대에 살았던 드보라였다. 그녀도 역시 여선지자이었고, 기드온, 입다, 삼손처럼, 그의 생애 동안 이스라엘의 사사로 있었다. 우리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에게 나아가 재판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삿 4:5). 따라서 그녀는 여성뿐 아니라, 남성에 대한 재판을 행사하였다. 그러므로 “한 여자가 남자에게 무엇을 해야 할지 명하였으며, 하나님은 그녀가 그렇게 하도록 기름을 부으셨다“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지도자로 부르신 대부분의 여성처럼, 드보라는 여성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데 어려움을 가진 남성을 적어도 한 명은 분명히 직면했을 것이다. 그의 이름은 바락이었다. 그는 그더러 가나안의 군대 장관 시스라에게 전쟁하러 가라는 드보라의 지시를 의심하였으므로, 드보라는 시스라를 죽이는 영광은 여인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그에게 알려주었다. 그녀의 예언은 적중했으며, 성경은 야엘이라는 여인이 장막 말뚝을 잠자는 시스라의 관자놀이에 박았다고 쓰고 있다(삿 4장을 보라). 이 이야기는 바락이 드보라와 함께 노래하는 것으로 끝난다! 가사 중 일부는 드보라와 야엘에 대한 찬송으로 가득한데(삿 5장을 보라), 아마도 바락은 결국 “여성의 사역”을 신뢰하게 되었을 것이다.

세 번째 여선지자(A Third Prophetess)

구약 성경에서 존경받는 여선지자로 언급된 세 번째 여인은 훌다이다. 하나님은 한 남자 곧 곤경에 빠진 유다 왕 요시아에게 신뢰할 수 있는 예언적 통찰력과 가르침을 주시기 위하여 그녀를 사용하셨다(왕하 22장을 보라). 우리는 또다시 하나님께서 남자에게 가르침을 주기 위하여 여자를 사용하신 예를 보게 된다. 훌다는 이런 사역에 자주 하나님께 쓰임 받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요시아가 그녀가 한 말을 그토록 믿었을리가 없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미리암, 드보라와 훌다를 여선지자로 부르셨을까? 그분은 그들 대신 남자들을 부르실 수 있지 않은가?

물론 하나님은 남자를 부르셔서 그 세 여자가 했던 일을 하게 하실 수 있다. 그러나 그분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누구도 그 이유를 모른다. 우리가 이 일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사역에 부르신 사람에 따라 임의로 그분을 틀안에 가두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록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은 일반적으로 남성을 지도자로 선택하시지만, 때로는 여성을 선택하시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구약 성경에 나온 이 세 명의 걸출한 여성 사역자들은 모두 여선지자이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일부 구약 성경의 사역에서는 여성들이 부르심을 받지 못했다. 예를 들어, 제사장으로 부르심을 받은 여성은 없었다. 따라서 하나님은 남성만을 위한 일부 사역들을 떼어두셨을 수 있다.

 

신약 사역 속의 여성들(Women in Ministry in the New Testament)

흥미롭게도, 우리는 또한, 신약 성경에서도 하나님께 여선지자로 부르심을 받은 여인을 보게 된다. 예수님이 태어나신지 며칠이 안 되어, 안나는 그분을 알아보고 그분이 메시아심을 선포하였다.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가 매우 많았더라 그가 결혼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과부가 되고 팔십사 세가 되었더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마침 이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니라(눅 2:36-38, 강조 추가).

안나가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예수님에 대해 말했음을 주목하라. 거기에는 물론 남성도 포함한다. 따라서 안나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남자들을 가르쳤다고 할 수 있다.

신약 성경에는 하나님께 예언의 은사로 쓰임 받은 다른 여성들이 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그 부류에 속한다는 것은 확실하다(눅 1:46-55을 보라). 교회 예배에서 마리아의 예언적인 말씀들을 읽을 때마다, 한 여인이 교회를 가르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많은 다른 방법을 통하여 하실 수 있었지만, 여자를 통하여 그분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심으로 여성에 대한 그분의 존중을 의심할 바 없이 드러내셨다.)

이런 여성들의 목록은 계속된다. 하나님은 그분의 영을 만민에게 부어줄 때 이스라엘의 아들과 들이 예언할 것이라고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셨다(욜 2:28을 보라). 베드로는 요엘의 예언이 신약 시대에도 확실히 적용됨을 확인하였다(행 2:17을 보라).

우리는 사도행전 21:8-9에서 빌립 전도자가 여선지자인 딸이 네 명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바울은 여자가 교회 모임에서 예언함을 썼다(고전 11:5을 보라). 문맥으로 보아 그 가운데 남자들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성경에서 하나님께 여선지자 또는 예언하도록 쓰임 받은 모든 여자들을 보면,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그런 사역에 여성을 사용하실 수 있다는 생각을 반대할만한 좋은 이유가 확실히 없다! 또한, 우리에게는 여자가 하나님을 대신하여 남자에게 예언할 수 없다고 생각할만한 이유도 없다.

여성 목사?(Women as Pastors?)

여성이 목사로 섬기는 것은 어떨까? 하나님께서 남성이 목사/장로/감독의 직분을 맡도록 의도하신 것이 분명한 듯 하다.

미쁘다 이 말이여, 곧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함은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라 함이로다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딤전 3:1-2 강조 추가).

내가 너를 그레데에 남겨 둔 이유는 남은 일을 정리하고 내가 명한 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 책망할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며(딛 1:5-6, 강조 추가).

바울은 여성이 직분을 갖는 것으로부터 금지되었다고 명시적으로 말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대 일괄론적으로 결론 내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특히 개발 도상국에 수많은 효과적인 여성 목사/장로/감독들이 있는 것 같다. 비록 그들은 여전히 압도적인 소수이지만 말이다. 아마도 하나님은 그분의 나라를 위해서거나 또는 자격을 갖춘 남성 지도력의 부족할 경우 이 역할에 여성을 때때로 부르시는 것 같다. 오늘날 그리스도 몸 안의 많은 여성 목사가 실제로 여선지자와 같은 성경적으로 정당한 다른 사역직분에 부르심을 받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현재의 교회 구조는 그들에게 단지 목회적인 역할밖에 허용하지 않는다.

왜 목사/장로/감독의 직분은 남성에게만 주어졌을까?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런 직분의 기능을 이해하는 것이 우리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목사/장로/감독에 대한 성경의 요구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공손함으로 복종하게 하는 자라야 할지며(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리요)(딤전 3:4-5).

우리가 신약의 장로가 작은 가정교회를 감독하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 요구조건이 매우 합리적임을 보아낼 수 있다. 그의 역할은 가족을 감독하는 아버지의 역할과 비슷하다. 이것은 우리가 왜 목사 직분을 남자가 맡아야 하는지를 이해하도록 도와준다. 왜냐하면, 가정교회는 가정의 구조와 매우 비슷하며, 만일 그것이 하나님의 설계하신 바라면, 아내가 아닌 남편이 이끌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 대해 나중에 더 설명할 것이다.

여성 사도?(Women as Apostles?)

우리는 결론적으로 여성이 여선지자로 섬길 수 있다고 확증하였다(만일 그녀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면). 다른 유형의 사역들은 어떠할까? 로마서 16장에서 바울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사역에서 섬긴 많은 여성들을 칭찬한 인사말은 우리에게 깨달음을 줄 것이다. 그 중 한 명은 심지어 사도로 기록되었을 수도 있다. 아래의 세 개의 연속된 인용에서, 나는 여성의 이름들을 강조표기 하였다.

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추천하노니 너희는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 줄지니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라(롬 16:1-2, 강조 추가).

얼마나 큰 보증인가! 우리는 뵈뵈가 어떠한 사역을 이루었는지를 정확히 모르지만, 바울은 그녀가 “겐그리아 교회의 일꾼”이며 “여러 사람의 보호자”라고 하였다. 그녀가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하였든지, 그것은 분명히 바울이 그녀를 로마의 전체 교회에 추천할 만큼 중요한 일이었음이 틀림없다.

다음 우리는 남편인 아굴라와 함께 중요한 사역을 함으로써 모든 이방인 교회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은 브리스가(브리스길라)에 대해 읽을 것이다.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 또 저의 집에 있는 교회에도 문안하라 내가 사랑하는 에배네도에게 문안하라 그는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께 처음 맺은 열매니라 너희를 위하여 많이 수고한 마리아에게 문안하라 내 친척이요 나와 함께 갇혔던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 문안하라 그들은 사도들에게 존중히 여겨지고 또한,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자라(롬 16:3-7, 강조 추가).

유니아는 “사도들 중 뛰어난 자”이었다.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그도 사도였을 것이다. 만일 올바른 번역이 율리아라면, 그녀는 여성 사도이다. 브리스가마리아는 주님의 일꾼이었다.

또 주 안에서 내 사랑하는 암블리아에게 문안하라 그리스도 안에서 인정함을 받은 아벨레에게 문안하라 아리스도불로의 권속에게 문안하라 내 친척 헤로디온에게 문안하라 나깃수의 가족 중 주 안에 있는 자들에게 문안하라 주 안에서 수고한 드루배나드루보사에게 문안하라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하고 사랑하는 버시에게 문안하라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아순그리도와 블레곤과 허메와 바드로바와 허마와 및 그들과 함께 있는 형제들에게 문안하라 빌롤로고와 율리아와 네레오와 그의 자매와 올름바와 그들과 함께 있는 모든 성도에게 문안하라(롬 16:8-15, 강조 추가).

분명히, 여성도 사역자가 될 수 있다.

여성 교사?(Women as Teachers?)

여성 교사는 어떨까? 신약 성경에는 그것에 대한 언급이 없다. 물론, 성경에는 남성이 교사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언급도 없다. 아굴라의 아내인 브리스길라(위에서 브리스가로 언급됨)는 적어도 작은 규모의 가르침 사역에 참여했다. 예를 들어, 그녀와 아굴라가 아볼로가 에베소에서 완전하지 못한 복음을 전파하는 것을 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그를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 일렀다”(행 18:26). 아무도 브리스길라가 그녀의 남편을 도와 남자인 아볼로를 가르쳤다는 것에 반박할 수 없다. 또한, 바울은 성경에서 두 번 “저의 집에 있는 교회”에 대해 쓰면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둘 다 언급하였으며(롬 16:3-5, 고전 16:19을 보라), 로마서 16:3에서 그들 둘을 “그리스도 안의 동역자”라고 불렀다. 브리스길라가 그녀의 남편을 따라 사역에서 일부 적극적인 역할을 했었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예수님께서 여자에게 남자를 가르치라고 명령하신 경우(When Jesus Commanded Women to Teach Men)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여야 하고 남자를 가르치는 것을 금지하는 바울의 말을 보기에 앞서 먼저 성경의 다른 한 말씀을 읽어 보는 것이 우리가 그 부분을 균형 잡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 한 천사가 적어도 세 명의 여자들에게 예수님의 남성 제자들을 가르치도록 위임하였다. 그 여자들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부활하셨고 갈릴리에서 그들에게 나타나시리라는 것을 알려주도록 지시받았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짧은 시간이 흐른 뒤, 예수님은 직접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제자가 갈릴리로 가도록 지시하라고 명령하셨다(마 28:1-10; 막 16:1-7).

우선, 나는 예수님이 먼저 여자에게 나타나시고 다음 남자에게 나타나시는 것을 선택하신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둘째로, 여성이 남성을 가르치는 것이 근본적으로 또는 도덕적으로 잘못된 일이라면, 사람은 예수님은 자신의 부활에 대해 여자가 남자에게 가르치라고 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이 일은 절대 하찮은 일이 아니며, 그분께서 직접 전달할 수도 있는 사안이다(그리고 실제로 나중에 그분은 그렇게 하셨다). 아무도 아래와 같은 사실에 반박할 수 없을 것이다. 주 예수님은 일부 여자들이 중요한 진리를 가르치고, 일부 남자들에게 영적인 가르침을 주도록 지시하셨다.

문제가 되는 성경 구절들(The Problem Passages)

 

이제 우리는 많은 성경 구절이 말씀하는 사역에서의 여성의 역할에 대해 이해하였으므로 바울이 쓴 “문제가 되는 성경 구절들”을 더 잘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먼저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그의 말을 생각해 보자.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그들에게는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라(고전 14:34-35).

몇 가지 복합적인 이유 때문에, 일부 사람은 이 말씀이 바울의 실제 가르침인지 아니면 고린도인들이 바울에게 쓴 내용을 그가 인용한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이 서신의 후반에서, 바울은 고린도인들이 그에게 보낸 서신에서 제기한 질문에 응답한 것이 분명하다(고전 7:1, 25; 8:1; 12:1; 16:1, 12을 보라).

또한, 바로 그다음 구절에 쓴 내용은 바울이 교회의 여성은 잠잠해야 한다는 고린도 교회의 정책에 대한 그의 반응으로 간주 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고전 14:36).

제임스 성경은 아래와 같이 번역함으로써 바울이 고린도인들의 태도에 더 놀라있음을 드러냈다.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에게서 나왔느냐 아니면 너희에게만 이르렀느냐(고전 14:36).

어느 경우에나, 바울은 분명히 두 개의 수사학적인 질문을 하고 있다. 그 두 질문에 대한 답변은 모두 “아니“이다. 고린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창시자가 아니며, 하나님의 말씀은 단지 그들에게만 주신 것도 아니다. 바울의 질문은 그들의 자부심을 겨냥한 질책임이 분명하다. 만일 앞의 두 구절에 대한 반응이 아래와 같을 것이다. “당신은 자신이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당신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말씀을 누구를 통하여 말씀하실지를 언제부터 규정하기 시작하였는가? 하나님은 그분이 원하신다면 여성을 사용하실 수 있으며, 당신이 그들을 잠잠케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이 같은 해석은 우리가 바울이 이미 같은 서신에서 여성으로 하여금 잠잠할 수 없게 하는 것인 예언함에 대해 쓴 것(고전 11:5을 보라)을 고려해보면 논리적이 돼 보인다. 또한, 그 후로 몇 구절 뒤에서, 바울은 여성을 포함한 모든 고린도인들이[2] “예언하기를 사모하기”를 촉구하였다(고전 14:39). 그러므로 만일 바울이 14:34-35에서처럼 실제로 여자들이 교회에서 잠잠하기를 주장했다면, 그는 자아모순에 빠진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다른 가능성(Other Possibilities)

하지만, 우리가 잠시 동안 고린도전서 14:34-35이 확실히 바울이 한 말이 맞고, 그는 여자들이 잠잠하기를 가르치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우리는 그가 한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다시 한 번, 우리는 바울이 같은 서신에서 여자들이 분명히 교회의 모임에서 공개적으로 기도하고 예언할 수 있다고 말했으면서 왜 그들에게 교회 모임에서 완전히 잠잠하라는 일괄적인 명령을 했는지 궁금할 것이다.

또한, 바울은 우리가 많은 성경적인 사례에서 보아왔듯이 하나님은 여성을 사용하셔서 그분의 말씀을 공개적으로 심지어 남성에게 선포하심을 이미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그는 왜 하나님께서 종종 기름 부으셔서 말하게 했던 자들을 완전히 잠잠하게 했겠는가?

상식적으로 바울은 여자들이 교회 모임 때마다 완전히 잠잠하라고 했을 리가 없다. 초대 교회는 가정집에서 모였고 함께 식사를 나눴음을 명심하라. 우리는 여자들이 모임의 시작부터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 있는가? 그들이 음식을 준비하거나 식사하는 동안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 있는가? 그들이 그들의 아이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 있는가? 이러한 생각은 터무니없다.

만일 예수님의 이름으로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에 예수님이 그들 중에 계신다면(마 18:20), 그들은 확실히 교회 모임을 구성하게 된다. 그렇다면, 두 여자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함께 모였을 때 서로 말을 하지 말아야 하는가?

아니, 만일 고린도전서 14:34-35 말씀이 실제로 바울의 가르침이라면, 그는 단순히 교회의 질서에 관한 작은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어떤 여자들은 질문함에 있어서 질서가 없었다. 바울은 여성들이 전체 모임 중에 완전히 침묵을 지켜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가 몇 구절 이전에 선지자들에게 유사한 지침을 줄 때에도 그들이 완전히 침묵을 지키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만일 곁에 앉아 있는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으면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고전 14:30, 강조 추가).

이 경우 “잠잠하라”는 단어는 “일시적으로 말하기 삼가라”는 뜻이다.

바울은 또한, 사람들에게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 방언을 삼가하라고 지시하였다.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고전 14:28, 강조 추가).

바울은 이 사람들에게 전체 모임이 진행되는 동안 완전히 잠잠하라고 지시하였는가? 아니, 그는 그들이 통역이 없을 때 방언을 하지 말라고 말하였다. 바울은 그들에게 “교회에서는 잠잠하라”고 말했음을 주목하라. 이것은 고린도전서 14:34-35에서 여자들에게 준 가르침과 같다. 그럼 왜 우리는 바울의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말을 “전체 모임 중에 잠잠해야 한다”라고 해석하고, 바울이 교회에서 질서없이 방언을 하는 자들에게 한 말을 “모임의 특정 순간에 말하기를 삼가라”는 뜻으로 해석하는가?

마지막으로, 바울은 그 구절에서 모든 여성을 상대로 말한 것이 아님을 주목하라. 그의 말은 오직 결혼한 여성에게만 적용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질문이 있을 경우 “자기 남편에게 물어보라”라고 지시받았기 때문이다.[3] 아마도 질문의 일부 또는 전부는 기혼 여성들이 자기들의 남편 이외의 다른 남자에게 한 것일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은 당연히 부적절한 것으로 간주 될 수 있으며, 그들이 자기들의 남편에 대한 불경과 불순종을 어느 정도 드러낼 수 있다. 만일 그것이 바울이 제기한 문제라면, 그것은 곧 바울이 왜 자신의 주장을 창세기부터 다방면으로 계시된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여자들은(분명히 그들의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사실에 기반을 둔 이유이다(고전 14:34을 보라).

요약하면, 만일 바울이 실제로 고린도전서 14:34-35에서, 여자들이 잠잠할 것에 관하여 지시하였다면, 그는 단지 기혼 여성들이 부적절한 때에 또는 그들의 남편을 불경하는 방식으로 질문하는 것을 삼가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그들은 예언하고, 기도하고 말할 수 있다.

또 하나의 문제가 되는 성경 구절(The Other Problem Passage)

마지막으로, 우리는 바울이 디모데에 쓴 첫 번째 서신에 기록된 두 번째 “문제가 되는 성경 구절”을 보도록 하자.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고 여자가 속아 죄에 빠졌음이라(딤전 2:11-14).

바울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남자와 여자에게 그분의 뜻을 효과적으로 가르친 네 명의 여선지자 미리암, 드보라, 훌다와 안나를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는 이스라엘의 사사인 드보라가 남자와 여자에게 어느 정도의 권한을 행사했음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는 하나님이 오순절 날 자기의 영을 부어주신 것이 말세에 하나님께서 자기의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심으로써 자녀들이 예언할 것이라는 요엘의 예언을 부분적으로 성취하였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 그는 예수님이 어떤 여성들이 남성 사도들에게 그분의 메시지를 전달하도록 위임한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는 고린도 교회에 쓴 서신에서 여자들이 교회에서 기도하고 예언하는 것에 대해 찬성한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는 고린도인들에게 그들 중 누구라도 다른 지체들과 함께 나눌 수 있는 가르침을 성령님으로부터 받을 수 있다고 말했음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고전 14:26을 보라). 그렇다면 그가 디모데에게 이런 말을 쓸 때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는 무엇일까?

바울은 자신의 가르침의 근거로 창세기에서 두 개의 관련된 사실을 인용하고 있음을 주목하라. (1) 아담은 하와 이전에 지음을 받았고 (2) 아담이 아닌 하와가 속은 것이며, 그녀는 죄에 빠졌다. 첫 번째 사실은 남편과 아내 사이의 올바른 관계를 세워준다. 창조의 순서에 따라, 바울이 다른 곳에서도 가르치듯이 남편은 머리가 된다(고전 11:3; 엡 5:23-24을 보라).

바울이 언급한 두 번째 사실은 여자가 남자보다 더 쉽게 속는다는 것을 전달하기 위함이 아니다. 왜냐하면, 남자도 쉽게 속기 때문이다. 사실, 그리스도의 지체 중에 여성이 남성보다 많다는 사실 때문에 남성이 여성보다 속임당할 가능성이 더 크다고 주장할 수 있다. 오히려 두 번째 사실은 가정에 세운 하나님의 의도된 질서가 무시 될 때, 사탄이 틈을 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인류의 전체 문제는 에덴동산에서 한 남자와 그의 아내 사이의 관계가 질서를 잃으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아담의 아내는 그에게 순종하지 않았다. 아담은 그의 아내에게 금지된 열매에 대한 하나님의 지시를 알려주었음이 틀림없다(창 2:16-17; 3:2-3). 하지만, 그녀는 그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 그녀가 아담에게 금지된 열매를 주어서 먹게 했을 때, 그녀는 모종 의미에서 아담의 권한을 넘어섰다(창 3:6을 보라). 그 경우 아담이 하와를 인도한 것이 아니라 하와가 아담을 인도한 것이다. 그 결과는 재앙이었다.

교회 – 한 가정의 모델(The Church–A Model of the Family)

가정에 대한 하나님의 의도된 질서는 마땅히 교회에 의해 보여져야 한다. 내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교회 역사상 첫 300년 동안, 교회의 회중 수가 적었다는 점을 유의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들은 집에서 만났다. 목사/장로/감독은 가정의 아버지와 같았다. 이런 하나님이 의도한 교회 구조는 가정 구조와 매우 닮았으며, 사실상 영적인 대가정이었으며, 만일 여성이 주도한다면 가정의 내부 및 교회의 외부에 잘못된 메시지를 전달했을 것이다. 여성 목사/장로/감독이 정기적으로 가정교회에서 가르치고, 그녀의 남편은 순종적으로 그곳에 앉아 그녀의 가르침을 듣고 그녀의 권위에 복종한다고 생각해보라. 그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가정의 질서를 위배하는 것이며 잘못된 본을 보여주는 것이 된다.

바울의 말이 뜻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그 말들이 장로에 대한 그의 요구 조건과 매우 가까운 곳에 있음을 주목하라. 그 중 한 요구조건은 남성이어야 한다는 것이다(딤전 3:1-7을 보라). 또한, 장로들은 교회에서 정기적으로 가르쳐야 함을 주목해야 한다(딤전 5:17을 보라).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워야 하며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고 한 바울의 말은 분명히 교회에서의 올바른 질서와 관련이 있다. 그가 설명하고자 했던 것은 여자가 부분적으로든 전체적으로든 장로/목사/감독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여자 또는 아내가 자기의 남편에게 순종하면, 기도하고, 예언하고, 간단한 가르침을 받고 지체들과 나누거나 교회 모임 중에 일반적인 말을 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이 모든 일은 여자가 하나님의 질서를 위반하지 않는다면 집에서 그 모든 일을 할 수 있듯이 교회에서도 할 수 있다. 여자가 교회에서 하지 못하도록 금지된 것은 그녀가 집에서 하지 못하도록 금지된 것과 다를 바 없다 – 바로 그녀의 남편을 주관하는 것이다.

우리는 나중의 성경 구절에서 여자들도 남자처럼 집사의 직분으로 섬길 수 있음을 알게 된다(딤전 3:12을 보라). 교회에서 집사, 또는 단어의 실제 의미인 일꾼으로 섬기려면 남편과 아내 사이에 세운 하나님의 신성한 질서를 위반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내가 디모데 전서 2:11-14의 바울의 말과 성경의 나머지 부분의 가르침을 조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우리가 보아왔던 하나님께 쓰임 받은 여성들은 아무도 가정과 교회에서 모델 역할을 한 적이 없으므로, 그들 중 아무도 하나님의 의도하신 질서를 위반하지 않았다. 우리는 가정에서 남편을 주관한 아내의 잘못된 모델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다시 한 번, 여러 가정이 모인 가정교회 모임에서 아내는 가르치고 감독하는 것을 책임진 한편, 남편은 수동적으로 앉아 그녀의 지도력에 순종하고 있는 모습을 그려보라. 이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가정을 향한 그분의 질서를 거스르기 때문이다.

드보라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것이나, 안나가 그리스도에 대해 남자들에게 말한 것이나, 마리아와 그의 친구들이 사도들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 말한 것 중 아무것도 잘못된 메시지를 보내거나 부적절한 방식으로 가정에 세우신 하나님 질서를 위반한 적이 없다. 정기적인 교회 모임 중에 만일 여성 또는 아내가 권한을 행사하고 정기적으로 남성 또는 남편을 가르칠 경우 잘못된 메시지를 전파할 위험이 존재한다.

결론(In Conclusion)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한테 “여성들이 열심과 하나님이 주신 은사로 다른 사람들을 섬기면서 사역에 참여하는 것이 잘못된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어떤 도덕적 또는 윤리적 원칙을 위반하였는가?”라고 물어본다면, 우리는 곧 유일하게 가능한 경우가 여성의 사역으로 인해 왠지 모르지만, 남성과 여성, 남편과 아내 사이의 관계에 대한 하나님의 질서를 위반 한 경우일 뿐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문제가 되는 성경 구절들” 모두에서 바울은 결혼의 신성한 질서를 우려의 근거로 호소했다.

따라서 우리는 여성들이 사역함에 있어서 매우 작은 의미에서만 제한받음을 알 수 있다. 많은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은 그분의 영광을 위해 여성을 사용하기를 원하시며, 그분은 이미 수천 년 동안 그렇게 해오셨다. 성경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여성의 긍정적인 기여를 많이 말씀하고 있으며, 우리는 그중 일부를 이미 알아보았다. 우리는 예수님의 가장 가까운 친구 중 일부는 여자였고(요 11:5를 보라), 그들은 예수님의 사역을 재정적으로 지원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눅 8:1-3 을 보라). 성경에는 남자가 이런 일을 했다는 기록은 아무 곳에도 없다. 사마리아의 우물곁에 있던 여자는 그녀의 마을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에 대해 말함으로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요 4:28-30, 39을 보라).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는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았다”고 기록되었다. 예수님의 장례를 위하여 그분께 향유를 부은 것도 여자였으며 어느 남자가 그녀에 대해 불평할 때 예수님은 그녀를 칭찬해 주셨다(막 14:3-9을 보라).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의 거리를 십자가를 지시고 걸어가신 예수님을 위해 울었던 것도 어느 남자가 아닌 여자였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사례들과 그와 비슷한 사례들은 마땅히 많은 여성들이 일어나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임명하신 사역을 성취할 수 있도록 격려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모든 여성이 필요하다!

 


[1]우리는 하나님이 처음 만드신 아담 이후의 모든 남자들은 여자가 낳았음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1:11-12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아담 이후의 모든 남자들은 여자로 말미암아 났다. 분명한 것은, 아무도 이 신성한 질서가 남자가 그들의 어머니보다 못하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주장할 수 없을 것이다.

[2]바울의 권면은 “형제들”에게 한 것인데, 그는 “형제”란 용어를 고린도전서에서 27번 사용하였다. 때문에 “형제”란 이 용어는 분명 남자뿐만이 아닌, 고린도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몸 전체를 가리킨 것이다.

[3]헬라어 원문으로 여자아내, 또는 남자남편은 같은 단어임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반드시 문맥으로부터 저자가 남자와 여자를 말하는지 아니면 남편과 아내를 말하는지를 파악해야 한다. 고려한 구절은 바울은 아내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내만이 집에서 남편에게 아무것이나 물을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