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례(The Sacraments)

제 23 장 (Chapter Twenty-Three)

예수님은 교회에 두 성례를 주셨다. 물세례(마 28:19을 보라)와 주의 만찬(고전 11:23-26을 보라)이다. 먼저 물세례에 대해 살펴보자.

새 언약에서, 모든 신자는 세 가지 부동한 세례를 경험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의 세례, 물세례와 성령세례이다.

사람은 거듭날 때 자동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례를 받는다. 즉, 그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한 구성원이 된다.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고전 12:13; 롬 6:3; 엡 1:22-23; 골 1:18, 24을 보라).

성령세례는 구원받은 후에 받게 되며, 모든 신자는

이 세례를 받을 수 있으며 또한 받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모든 신자는 회개하고 주 예수를 믿은 후 가능한 한 빨리 물세례를 받아야 한다. 물세례는 새 신자의 첫 번째 순종의 행동이어야 한다.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막 16:15-16, 강조 추가).

초대 교회에서 세례를 받으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매우 중요하게 여겨졌다. 새로운 회심자는 개종한 후 거의 예외 없이 즉각적으로 세례를 받았다(행 2:37-41; 8:12-16, 36-39; 9:17-19; 10:44-48; 16:31-33; 18:5-8; 19:1-5을 보라).

세례에 대한 가지 비성경적인 생각들(Some Unscriptural Ideas About Baptism)

일부 사람들은 새 신자에게 세례를 베풀 때 몇 방울의 물을 뿌리는 것에 그치는데 이것이 과연 정확할까? 신약 성경에서 세례로 번역된 동사는 헬라어로baptizo인데 이 단어는 문자적으로 “잠긴다”는 뜻이다. 따라서 물세례를 받는 사람들은 단순히 몇 방울의 물에 뿌림 받는 것이 아니라 물속에 잠겨야 한다. 우리는 곧 살펴보게 될 기독교 세례의 상징적 의미도 잠겨야 한다는 관점을 지지한다.

일부 사람들은 유아 세례를 베푸는데, 성경에는 유아 세례에 대한 예가 없다. 이런 세례는 사람이 세례를 받은 후 거듭난다는 “세례 재생”의 교리에서 유래했다. 성경은 사람이 세례를 받기 전에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고 명확하게 가르친다. 따라서 회개하고 예수님을 따를 만큼 충분히 큰 아이들은 세례를 받을 자격이 있지만, 유아와 어린아이들은 없다.

일부 사람들은 한 사람이 예수님을 믿어도 물세례를 받기 전까지는 구원받지 못한다고 가르친다. 그것은 성경에 따르면 사실이 아니다. 사도행전 10:44-48과 11:17에서, 우리는 고넬료의 가족들은 물세례를 받기 전에 구원받고 성령세례를 받았음을 읽을 수 있다. 한 사람이 구원을 받기 전에 성령세례를 받는 것은 불가능하다(요 14:17을 보라).

일부 사람들은 사람이 그들의 특정 공식에 따라 세례를 받지 않으면 진정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고 가르친다. 성경은 올바른 세례를 위해 따라야 할 구체적인 의식을 제공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일부 사람들은 신자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마 28:19)이 아닌 “예수님의 이름”(행 8:16)으로 세례를 받아서는 구원받지 못한다고 가르친다. 이런 사람들은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 바리새인들과 다를 바 없다. 세상은 복음을 듣기를 기다리는데 그리스도인들은 세례를 받을 때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를 논쟁하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비극인가!

세례의 성경적인 상징(The Scriptural Symbolism of Baptism)

물세례는 새 신자의 삶에 이미 발생한 여러 가지 일들을 상징한다. 가장 단순하게,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죄를 씻어버렸다는 것을 나타내며, 지금은 하나님 앞에서 깨끗해졌음을 나타낸다. 아나니아는 사울(바울)이 회개한 후 그에게 가서 이렇게 말하였다.

이제는 왜 주저하느냐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행 22:16, 강조 추가).

둘째로, 물세례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장사되고 부활했음을 상징한다. 우리가 일단 거듭나고 그리스도의 몸 가운데 있다면, 우리는 그 시점부터 “그리스도 안에”있다고 하나님에 의해 간주된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우리를 대리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예수님이 성취하신 모든 것을 우리에게 돌렸다. 이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장사되었고, 새로운 사람으로 부활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도 또한 생명 가운데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 6:3-4).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골 2:12).

모든 신자는 물세례를 받을 때마다 이 중요한 진리에 대해 가르침을 받아야 하고, 예수님을 믿은 후에는 가능한 한 빨리 세례를 받아야 한다.

주의 만찬(The Lord’s Supper)

주의 만찬은 구약의 유월절에서 기원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구출하신 날 밤에, 매 가정에게 일 년 된 어린 양을 잡고 그 피를 그들의 집의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뿌리라고 지시하셨다. “죽음의 천사”가 그날 밤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면서, 애굽 땅에 있는 모든 처음 난 것을 죽일 것이며, 이스라엘 백성의 집에 묻은 피를 볼 때에 “넘어갈” 것이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 어린 양을 먹고, 또한 이레 동안 무교병을 먹으면서 그날을 기념하였다. 이 일은 이스라엘의 영원한 규례로 삼아 매년 같은 시간에 기념하도록 하였다(출 12:1-28을 보라). 분명한 것은, 유월절의 어린 양은 고린도전서 5:7에서 “우리의 유월절 양”으로 불리신 그리스도를 대표한다.

예수님께서 주의 만찬을 제정하실 때, 그분과 그분의 제자들은 유월절을 기념하였다. 예수님은 유월절 축제 기간에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써 진정으로 “세상 죄를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 1:29)으로의 부르심을 성취하셨다.

우리가 먹는 떡과 마시는 주스는 우리를 위하여 찢어진 그분의 몸과 우리의 죄 사함을 위해 흘리신 그분의 보혈을 상징한다.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마 26:26-29).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 11:23-26).

때와 방법(When and How)

성경은 주의 만찬에 얼마나 자주 참여해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않았지만, 초대 교회 때에는 그것이 가정교회 모임에서 정기적으로 진행되는 하나의 완전한 식사이었음이 분명하다(고전 11:20-34을 보라). 주의 만찬은 유월절 식사에 그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것을 완전한 식사의 한 부분으로 제정하셨으며, 초대교회 때에는 주의 만찬을 완전한 식사로 먹게 되었다. 오늘날 교회에서도 주의 만찬을 그렇게 먹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교회에서는 “사람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

우리는 마땅히 경외하는 마음으로 주의 만찬에 참여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합당하지 않게 주의 만찬에 참여하는 것은 심각한 죄라고 가르쳤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1:27-32).

우리는 주의 만찬을 취하기 전에 자신을 살펴보도록 권면 받았으며, 만일 어떠한 죄라도 발견하면 그것을 회개하고 고백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지을 수 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자유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시고 피를 흘리셨다. 우리는 고백하지 않은 죄와 함께 그분의 몸과 피를 상징하는 성찬에 참여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렇게 한다면, 고린도 그리스도인들처럼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게 되며 그로 말미암아 병들고 조기 사망에 이를 수 있다. 하나님의 징계를 피하는 방법은 “우리 자신을 살피는 것”이다. 즉, 우리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는 것이다.

고린도 그리스도인들의 주요한 죄는 사랑의 부족이었다. 그들은 서로 말다툼하고 싸우고 있었다. 실제로, 서로에 대한 헤아림이 부족한 것은 심지어 주의 만찬에서도 드러났다. 그들은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음으로 인해 어떤 사람은 시장하나 어떤 사람은 취하였다(고전 11:20-22).

우리가 먹는 떡은 지금은 교회인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한다. 우리는 떡 한 덩어리를 나누는데 그것은 우리가 한 몸임을 상징한다(고전 10:17을 보라). 그리스도의 한 몸을 나타내는 떡을 나눌 때에 한 몸 안의 다른 지체들과 싸우고 분쟁하는 것은 얼마나 큰 죄인가! 우리는 주의 만찬에 참여하기 전에, 그리스도 안의 형제 자매들과 올바른 관계에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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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How to be Led by the Spirit)

제 22 장 (Chapter Twenty-Two)

요한복음은 신자들의 삶속에서 성령님이 하시는 역할에 관한 예수님의 약속을 많이 기록하였다. 그 중 몇 가지를 읽어 보자.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6-17).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 14:26).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하였노라(요 16:7, 12-15).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님이 그들 안에 거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성령님은 또한 그들을 도와주시고, 그들을 가르치시고, 그들을 인도하시고, 그들에게 장래 일을 말씀하실 것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보면, 우리는 성령님이 우리에게 덜 해주실 것이라고 생각할 이유가 없다.

놀랍게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분이 떠나가는 것이 그들에게는 유익이며, 그렇지 않으면 성령님이 오시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예수님이 그들과 항상 함께 계셨던 것처럼 성령님과의 교제도 마찬가지로 친밀하다는 것을 그들에게 나타낸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성령님과 함께 있는 것이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보다 유익이 될 수 없다. 성령님을 통하여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 안에 거하신다.

우리는 성령님이 어떤 방식으로 우리를 인도하실 것으로 기대해야 하는가?

그분의 이름인 성령은 그분이 우리를 인도함에 있어서 가장 주된 역할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순종하고 거룩해지도록 하는 것임을 나타낸다. 이 때문에 거룩함과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에 속하는 것은 모두 성령님의 인도의 영역안에 있다. 그분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모든 일반적인 계명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부르신 독특한 사역에 관련된 그리스도의 특정 계명에도 순종하도록 인도하실 것이다. 이 때문에 당신이 당신의 특정 사역에 관해서 성령님의 인도를 받고 싶다면, 당신은 또한 거룩함으로 인도하시는 성령님께 인도받아야 하며, 둘 중 어느 하나도 없어서는 안 된다. 너무 많은 목사들은 성령님이 그들을 위대한 사역 공적과 기적으로 인도하시기를 원하지만, 거룩함의 “작은” 문제에 관해서는 무덤덤하다. 그것은 큰 오류이다. 예수님은 어떻게 제자들을 인도하셨는가? 주로 그들에게 일반적인 거룩함에 관한 가르침을 주셨다. 그것에 비하면, 그들의 사역적인 책임에 대한 구체적인 가르침은 드물었다.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도 마찬가지이다. 당신이 성령님께 인도받고 싶다면, 당신은 우선 그분의 인도를 받아 거룩해져야 한다.

사도 바울은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4)고 썼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받아야만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모두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다. 물론, 성령님의 인도에 순종할지 여부는 자유의지를 가진 우리에게 달려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그리스도인도 어떻게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지에 대해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이미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인도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반면에, 사탄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현혹하려 하고,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게 하는 육적인 본성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다른 인도로부터 성령님의 인도를 분별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것은 성숙해가는 과정이다. 하지만 기본적인 사실은 이것이다. 성령님은 항상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에 따라 우리를 인도하시고, 그분은 항상 우리가 바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하도록 인도하시며, 이런 일들은 그분의 영광을 나타낼 것이다(요 16:14을 보라).

성령님의 음성(The Voice of the Holy Spirit)

비록 성경에 의하면 성령님이 우리를 인도하실 때, 때로는 환상, 예언, 또는 들을 수 있는 음성과 같이 멋진 방법을 사용하신다고 하지만, 보다 일반적인 방법으로 성령님은 우리의 영혼을 “감동시키는” 방식을 통하여 우리를 인도하신다. 즉, 만일 성령님이 우리가 무언가를 하기를 원하신다면, 그분은 우리의 영혼을 “이끌어갈” 것이며 우리는 특정 방향을 따라 “인도”받고 있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영의 음성을 “양심”이라고 부를 수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기 양심의 소리가 어떤지를 알고 있다. 우리가 죄의 유혹을 받을 때, “그 유혹에 굴복하지 마십시오”라는 소리를 진짜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단지 우리 안의 무언가가 그 유혹을 저항하고 있음을 느낄 뿐이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그 유혹에 굴복하여 죄를 지었다면, “당신은 죄를 지었습니다! 당신은 죄를 지었습니다!”라는 소리를 진짜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우리 안에 우리의 죄를 자백하고 회개해야 한다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될 뿐이다.

동일한 방식으로, 성령님은 우리를 가르치고 일반적인 진리를 깨닫도록 인도하실 것이다. 그분은 우리 안에 갑작스러운 계시(항상 성경 말씀과 일치하다)를 주심으로써 우리를 가르치실 것이다. 그런 계시들은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기 위해서 10분 정도 걸릴 수 있지만 단 몇 초 만에 성령님에 의하여 받을 수 있다.

성령님은 사역의 문제에 있어서도 동일한 방식으로 우리를 인도하실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단순하게 이런 내적인 인도 하심과 감동에 민감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해야 하며 우리는 사역에 관한 것들에 대해서 어떻게 성령님의 인도 하심을 받을지를 천천히 (시행착오를 통하여) 배워가게 된다. 우리는 우리의 머리(우리의 합리적 또는 비합리적인 사고)가 우리의 마음(성령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곳)을 지배하게 할 때 자신이 하나님의 뜻에 관해 오류를 범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성령님이 예수님을 인도하신 방식(How the Spirit Led Jesus)

예수님은 내적인 감동으로 예수님의 인도 하심을 받았다. 예를 들어, 마가복음은 예수님이 요한의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세례를 받으신 후 발생한 일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막 1:12, 강조 추가).

예수님은 진짜 음성을 듣거나 비전을 보고 광야로 인도받으신 것이 아니다 – 그분은 단순히 몰아내심을 당한 것이다. 그것은 성령님이 일반적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방법이다. 우리는 우리 안에서 어떤 일을 하도록 우리를 끌어당기고, 인도하고, 확신 주는 것을 감지하게 된다.

예수님은 지붕을 통해 내려온 중풍 병자에게 그의 죄가 용서받았다고 말씀하실 때, 그 자리에 있던 서기관들은 그분이 신성 모독한다고 생각하는 줄을 알고 계셨다. 예수님은 어떻게 그들의 생각을 알 수 있었을까? 우리는 마가복음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을 읽을 수 있다.

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막 2:8, 강조 추가).

예수님은 그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그분의 영으로 감지하셨다. 만일 우리도 우리의 영에 민감하다면, 하나님의 일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를 알 수 있다.

바울의 사역에 대한 성령님의 인도 하심(The Spirit’s Leading in the Ministry of Paul)

적어도 20년간의 사역을 통하여, 사도 바울은 어떻게 성령님의 인도 하심을 받는지를 잘 배웠다. 어느 정도, 성령님은 그에게 미래의 사역에 “일어나게 될 일들”을 보여주셨다. 예를 들어, 바울은 에베소에서 그의 사역을 마무리한 후, 그는 앞으로 3년간 그의 삶과 사역에 일어날 일들에 대해 어느 정도 개념이 있었다.

이 일이 있은 후에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여 이르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행 19:21).

바울은 그의 생각이 아닌 영으로 의도한 방향대로 가기로 작정했음을 주목하라. 즉 성령님은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모두 지금의 그리스에 위치해 있다)에 먼저 간후, 예루살렘에 갔다가 마지막에 로마에 가도록 그의 영을 인도하셨음을 나타낸다. 그리고 그는 정확하게 그 코스대로 움직였다. 만일 당신의 성경에 바울의 세 번째 선교 여정과 로마에 가는 그의 여정을 보여주는 지도가 있다면, 당신은 그가 에베소에서부터(그곳에서 그는 자기의 영으로 선교 경로를 작정했다)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도달한 후, 몇 년 후에 로마에 도달한 그의 경로를 볼 수 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바울은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에게 해안을 돌아, 다시 한번 마게도냐에 갔다가 소아시아의 에게해 연안을 따라 내려갔다. 그 여정 동안 그는 밀레도에 이르러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과 작별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행 20:22-23, 강조 추가).

바울은 그가 “성령에 매였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성령님이 그를 예루살렘으로 인도하고 있음을 확신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는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완전히 알지는 못하지만, 그가 여정 중 머무는 각 도시마다에서 그가 결박과 환난을 받게 된다고 성령님이 증언하셨다고 말하였다. 성령님은 어떻게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결박과 환난이 있음을 증언하셨을까?

가지 (Two Examples)

사도행전 21장에서, 우리는 그 질문에 대답하는 두 사건을 찾을 수 있다. 첫 번째 사건은 바울이 지중해의 항구 도시 두로에 착륙할 때 일어났다.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행 21:4).

이 한 구절 때문에 일부 주석가들은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계속하여 간 것은 하나님께 불순종한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그러나 사도행전에서 우리에게 보여준 다른 말씀들에 비추어 보면, 우리는 당연히 그런 결론을 지을 수 없다. 이 점은 이야기가 전개됨에 따라 더욱 분명해지게 된다.

분명한 것은, 두로에 있던 제자들은 영적으로 민감하여 예루살렘에는 환난이 바울을 기다리고 있음을 분별하였다. 그 후 그들은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고 설득하려 했다. 윌리엄의 신약 성경 번역본은 이 점을 확인해 준다. 왜냐하면, 그 구절은 다음과 같이 번역되었기 때문이다. “성령의 감동으로 제자들은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고 끊임없이 경고하였다.”

그러나 두로에 있던 제자들은 성공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바울은 그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으로 향한 자신의 여행을 계속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가 영으로 받은 계시에 자신의 해석을 추가하지 않기 위해 매우 조심해야 함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바울은 환난이 예루살렘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또한 그와 관계없이 그곳으로 가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고 있었다. 만일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뭔가를 보여주셨다면, 우리는 반드시 도처에 다니면서 말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반드시 성령님이 계시하신 것에 우리 자신의 해석을 추가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가이사랴에 잠깐 들르다(Caesarea Stop Over)

예루살렘으로 가는 바울의 다음 정착역은 항구 도시 가이사랴였다.

여러 날 머물러 있더니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라 하거늘(행 21:10-11).

이것은 바울에게 “결박과 환난”이 예루살렘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다고 증언하신 성령님의 또 다른 예다. 하지만 아가보가 “그러므로 주님은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라고 말하였다”라고 말하지 않았음을 주목하라. 아니, 하나님은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이끌어가고 계셨으며 그를 기다리고 있는 환난에 대한 아가보의 예언을 통해 그를 준비시키고 계셨다. 또한, 아가보의 예언은 단순히 바울이 몇 개월 전에 이미 알고 있었던 것에 대해 확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예언에 의해 인도받아서는 안 된다. 만일 예언이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에 대해 확인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예언을 따라서는 안 된다.

우리는 아가보의 예언을 “특수한 인도 하심”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바울의 영이 받은 내적인 감동을 뛰어넘은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비전을 보거나 진짜 음성을 듣는 것과 같은 “특수한 인도 하심”을 주시는 것은 보통 그분께서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쉽지 않음을 아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특수한 인도 하심이 가져다주는 별도의 확신이 필요하게 된다. 바울의 경우를 보면, 그는 군중에 의해 거의 살해될 뻔 했고 몇 년 동안 감옥살이를 한 후에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에 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특수한 인도 하심을 받았기 때문에 좋은 결과가 있을 줄을 알고 이 모든 과정 속에서도 평안을 유지할 수 있었다.

만일 당신이 특수한 인도 하심을 받지 못했어도 근심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만일 당신이 그것이 필요하다면, 하나님은 당신에게 그것을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내적인 인도 하심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결박당하다(In Chains and in God’s Will)

바울은 예루살렘에 도착해서 잡히고 투옥되었다. 그는 다시 한 번 예수님의 비전을 보고 특수한 인도 하심을 받았다.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행 23:11).

예수님은 바울에게 “바울아, 네가 지금 여가서 무엇을 하는거야? 내가 너보고 예루살렘에 오지 말라고 경고했었잖니!”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음을 주목하라. 예수님은 실제로 바울이 몇 개월 전에 자신의 영으로 감지했던 그분의 인도 하심을 확인해 주셨다. 바울은 예수님을 대신하여 증언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있었으며 하나님의 목적의 중심에 있었다. 그는 결국 로마에서도 그리스도를 선포할 것이다.

우리는 바울의 최초의 부르심이 유대인과 이방인 앞에서 증언하는 것뿐 아니라 왕 앞에서도 증언하는 것임을 반드시 명심해야 한다(행 9:15을 보라).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투옥되고 나중에 가이사랴에 있을 때, 벨리스 총독, 보르기오 베스도, 그리고 예수님을 믿도록 “거의 설복당한”(행 26:28) 아그립바 왕 앞에서 증언할 기회를 가졌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로마의 황제 네로에게 증언하기 위해 로마로 보내졌다.

네로를 만나러 가는 길에(On the Way to See Nero)

바울이 이달리야에 가는 배에 있는 동안, 바울은 다시 한 번 자신의 영에 민감함으로써 하나님의 인도 하심을 받았다. 배의 선장과 선원들이 크레데 섬의 어느 항구에서 겨울을 지낼지를 결정할 때, 바울은 한 계시를 받았다.

여러 날이 걸려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항해하기가 위태한지라 바울이 그들을 권하여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항해가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를 끼치리라 하되(행 27:9-10, 강조 추가).

바울이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감지하고 있었다. 분명한 것은 그의 예감은 성령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었다.

불행하게도, 선장은 바울을 말을 듣지 않고 다른 항구에 접근하려 하였다. 그 결과로, 배는 두 주 동안 격렬한 폭풍에 휩싸였다. 상황은 악렬하여 졌고, 사공들은 두 번째 날에 모든 짐을 바다에 풀어 버렸고, 세 번째 날에는 심지어 배의 기구들을 바다에 내버렸다. 얼마 후, 바울은 진일보된 인도 하심을 받았다.

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라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그런즉 우리가 반드시 한 섬에 걸리리라 하더라(행 27:20-26).

나는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당면한 곤경에 비추어 특수한 인도 하심을 주신 이유가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그 시련을 넘어, 바울은 곧 배가 깨지는 곤경에 직면하게 된다. 곧이어 그는 독사에게 물리게 된다(행 27:41-28:5을 보라). 천사가 당신에게 모든 일이 다 잘 될 것이라고 미리 알려주는 것은 멋진 일이다!

가지 실용적인 조언(Some Practical Advice)

당신의 영안에서 성령님의 인도 하심 살펴보라. 당신은 아마 처음에는 그분의 인도 하심이 아닌 것을 옳다고 생각하는 실수를 범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게 정상이다. 낙심하지 말고, 계속 견지하라.

또한, 조용한 장소에서 방언기도를 하거나 성경을 읽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가 방언으로 기도할 때, 우리의 영이 기도하게 되며, 우리는 자연스럽게 우리의 영에 더 민감해지게 된다. 또한, 영적인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의 영에 더 민감해지게 된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어떤 방향으로 인도하실 때에는 그분의 인도 하심이 줄어들지 않는다. 그것은 당신이 중요한 결정을 위하여 한동안 지속적으로 기도하면서 그것이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이 아닌 하나님의 인도 하심임을 확신해야함을 의미한다. 만일 당신이 특정 방향에 대해 기도할 때 마음에 평안이 없다면, 평안이 생길 때까지 그 방향으로 움직이기 말아야 한다.

당신이 특수한 인도 하심을 받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비전을 보거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그런 방식으로 우리를 인도하시겠다고 약속하신 적이 없다(비록 그분의 주권에 따라 그런 일이 종종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우리는 그분이 내적인 증거로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것을 항상 믿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하신 말씀에 아무것도 추가하지 말라. 하나님은 당신에게 당신을 위해 준비하신 미래의 사역을 보여주실 수 있다. 하지만 당신은 그것이 몇 년 후가 될 수 있는 것을 몇 주 후라고 여길 수 있다. 나는 이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아무런 가정도 하지 말라. 바울은 자신의 미래에 대해 조금밖에 알지 못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드러내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언제나 믿음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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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th Korean » 법(How to be Led by the Spirit)

그리스도인의 가정(The Christian Family)

제 21 장 (Chapter Twenty-One)

물론, 하나님께서 가정의 개념을 만드셨다. 이 때문에 그분은 우리에게 가정의 기능에 대한 통찰력을 주실 수 있으며 가정을 파괴하는 함정에 대해서도 경고하실 수 있다. 실제로, 주님은 그분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가정의 구조와 각 구성원의 역할에 대하여 많은 원칙을 주셨다. 이러한 성경의 지침들을 준수할 때, 가족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계획하신 모든 축복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만일 그들이 위반한다면, 혼란과 상심의 결과를 맞게 될 것이다.

남편과 아내의 역할(The Role of Husband and Wife)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의 가정이 특정 구조에 적합하도록 설계하셨다. 이 구조가 가정생활에 안정성을 제공하기 때문에, 사탄은 하나님의 설계를 애써 왜곡하려 한다.

첫째, 하나님은 남편이 가정의 머리가 되도록 정하셨다. 이것은 남편에게 이기적으로 자신의 아내와 자녀들을 지배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남편이 머리로써 가족들을 사랑하고, 보호하고, 공급하고, 이끌도록 하셨다. 하나님은 또한 아내들은 자기 남편의 지도력에 복종하도록 정하셨다. 성경을 보면 이 점이 분명하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엡 5:22-24).

남편은 아내의 영적인 머리가 아니다 – 예수님만이 그 역할을 하실 수 있다. 예수님은 교회의 영적인 머리이며, 그리스도인 아내는 그녀의 그리스도인 남편처럼 교회의 한 구성원이다. 그러나 가정에서 그리스도인 남편은 아내와 자녀들의 머리이며,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그의 권위에 복종해야 한다.

아내는 남편에게 어느 정도 복종해야 할까? 아내는 바울이 말한 대로,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 이 규칙에 대한 유일한 예외는 남편이 아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거나 그녀의 양심을 위배하는 무언가를 하기를 기대할 때이다. 물론, 어느 그리스도인 남편도 자신의 아내가 하나님의 말씀 혹은 그녀의 양심에 어긋나는 일을 하기를 바라지 않을 것이다. 남편은 아내의 주님이 아니다 – 오직 예수님만이 그녀의 주님이시다. 만일 그녀가 누구에게 순종해야 할지를 선택해야만 한다면, 그녀는 예수님을 선택해야 한다.

남편들은 하나님이 반드시 항상 “남편들의 편”만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아내 사라가 그에게 말한 대로 하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창 21:10-12을 보라). 성경은 또한 아비가일이 그녀의 어리석은 남편 나발을 거역하고 재앙을 피한 것을 기록하고 있다(삼상 25:2-38을 보라).

남편들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God’s Word to Husbands)

하나님은 남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과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누구든지 언제나 자기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함과 같이 하나니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라…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 같이 하고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경하라(엡 5:25, 28-30, 33).

남편들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자신의 아내를 사랑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것은 작은 책임이 아니다! 어떤 아내라도 자기를 예수님처럼 희생적인 사랑으로 자신의 생명을 주는 남편한테 기꺼이 복종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 된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남편도 자신과 “한 육체”가 된 여자를 사랑해야 한다(엡 5:31). 자기 아내를 제대로 사랑하는 그리스도인 남편이라면 마땅히 아내에게 공급해주고, 아내를 보살펴주고, 존중해주고, 도와주고, 격려해주고, 그녀와 함께 시간을 보내야 한다. 만일 남편이 자기의 아내를 사랑하는 책임을 다하지 못한다면, 그는 자신의 기도가 응답받는 것을 방해할 수 있다.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함이라(벧전 3:7, 강조 추가).

물론, 갈등과 불화가 완전히 없는 결혼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삶 속에서 헌신하고 성령의 열매를 맺어가는 과정을 통하여 남편과 아내는 화목하게 사는 것을 배워가고 그리스도인 결혼의 축복을 점점 더 많이 경험할 수 있다. 모든 결혼에서 발생하는 피면 할 수 없는 문제들을 통하여 사람마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은 성숙한 모습으로 성장해 가는 것을 배울 수 있다.

남편과 아내의 의무에 대한 자세한 연구를 위해, 창세기 2:15-25; 잠언 19:13; 21:9, 19; 27:15-16; 31:10-31; 고린도전서 11:3; 13:1-8; 골로새서 3:18-19; 디모데전서 3:4-5; 디도서 2:3-5; 베드로전서 3:1-7을 보라.

혼인에서의 성(Sex in Marriage)

하나님은 성을 만드신 분이며, 분명한 것은 그분은 출산뿐 아니라 즐거움을 위하여 성을 만드셨다. 그러나 성경은, 성관계는 평생의 결혼 서약을 한 사람들만이 즐길 수 있다고 명백하게 말씀한다.

결혼관계 밖에서 발생하는 성관계는 음행이나 간음으로 분류된다. 사도 바울은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한다고 말했다(고전 6:9-11을 보라). 비록 그리스도인이 유혹을 받아 음행이나 간음 행위를 저지를 수 있지만, 그는 영적으로 큰 책망을 느끼게 되어 결국 회개하게 될 것이다.

바울은 남편과 아내의 성적 책임에 관해 몇 가지 구체적인 가르침을 주었다.

음행을 피하기 위하여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남편은 그 아내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아내는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그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협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가 절제 못함으로 말미암아 사탄이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전 7:2-5).

이 구절들은 남편이나 아내가 자신의 몸에 대한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누구도 성관계를 하나의 “보상”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매우 명백하게 지적하였다.

또한, 성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며, 그것이 결혼의 범위 내에 있는 한, 부정하거나 죄 있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결혼한 그리스도인 부부들이 성관계를 가질 것을 격려했다. 또한, 우리는 잠언에서 그리스도인 남편에 대한 아래와 같은 조언을 찾을 수 있다.

네 샘으로 복되게 하라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 그는 사랑스러운 암사슴 같고 아름다운 암노루 같으니 너는 그의 품을 항상 족하게 여기며 그의 사랑을 항상 연모하라(잠 5:18-19).[1]

그리스도인 부부가 서로 만족스러운 성관계를 즐기려면, 남성과 여성이 성에 있어서 큰 차이가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여자의 성적 본능이 그녀의 감정에 연결되어 있는 반면, 남자의 성적 본능은 더 물리적인 것이다. 여자는 관계와 신체 접촉으로 성적인 흥분을 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고전 7:1을 보라), 남자는 시각적인 자극에 의해 성적으로 흥분된다(마 5:28을 보라). 남자는 시각적인 매력을 주는 여성에게 성적으로 끌리는 반면, 여자는 단지 육체적인 매력보다는 존경하는 남자에게 성적으로 끌리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지혜로운 아내는 남편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항상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준다. 현명한 남편은 아내가 하루의 끝에 갑자기 “변하기”를 기대하기보다는 항상 포옹해주고, 친절하고 사려 깊은 행동을 하는 것을 통하여 아내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보여준다.

남성의 성욕이 정액의 증가에 따라 커지는 경향이 있는 반면, 여성의 성욕은 월경주기에 따라 증가하거나 감소한다. 남성은 성적 흥분을 경험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몇 초 또는 몇 분 내에 성적 절정에 이르지만, 여성은 훨씬 오래 걸린다. 남자는 일반적으로 몇 초 내에 성교를 위해 육체적으로 준비되지만, 여자의 몸은 반 시간이 흘러도 준비되지 않을 수 있다. 따라서 현명한 남편은 아내가 성교를 위한 준비가 되기까지 그녀의 몸의 특정 부위를 애무하고, 키스하면서 전희에 시간을 들인다. 만일 그가 특정 부위가 어디인지 모른다면 그녀에게 물어야 할 것이다. 또한, 그는 자신의 단 한 번 밖에 성적 절정에 도달하지 못하지만, 그의 아내는 여러 번 도달할 수 있음을 알고 있어야 한다. 그는 그녀가 바라는 것을 얻게 해줘야 한다.

그리스도인 남편과 아내가 서로 정직하게 자신의 욕구에 대하여 논의하고, 이성에 대해 될수록 많이 알아가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몇 달에서 몇 년간의 대화를 통하여 남편과 아내 사이의 성적 관계를 알아가고 실천해가는 것은 가정에 큰 축복을 가져다준다.

그리스도인 가정의 자녀(Children of a Christian Family)

자녀들은 그리스도인 부모에게 완전히 순종하도록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만일 그들이 순종한다면, 그들에게는 장수와 다른 축복들이 약속되었다.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 6:1-3).

그리스도인 아버지들은, 가족의 머리로서, 자녀의 교육에 대한 일차적인 책임을 부여받았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엡 6:4).

아버지의 책임이 두 가지임을 주목하라. 주님의 교훈훈계로 자녀를 양육하는 것이다. 먼저 훈계의 필요성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자녀 훈계(Child Discipline)

훈계를 받은 적이 없는 아이는 성장하면 이기적이고 권위에 대해 반역적일 것이다. 아이들이 부모가 미리 세운 합리적인 규칙을 반항적으로 어길 때에는 훈계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실수 또는 유치한 행위에 대해서 처벌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들은 일반적으로 자신의 실수 또는 무책임으로 인한 결과를 대면하도록 요구받아야 한다. 그래야만 그들이 성인으로서 삶의 현실을 대면하는 것을 준비하는 데 도움이 된다.

성경의 말씀대로, 어린아이들은 체벌하는 방식으로 훈계해야 한다. 물론, 갓난아기는 때려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해서 아기들은 그냥 제멋대로 내버려 두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출생의 첫날부터 그들은 어머니와 아버지의 주관 속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들은 아주 어릴 때부터 무엇을 하고 있는 것 또는 하려는 것으로부터 제한받음으로써 단어 “아니오”의 의미를 배울 수 있다. 그들이 일단 “아니오”의 의미를 이해하기 시작하면, 그들이 순종하지 않을 때 엉덩이를 살짝 때림으로써 더 잘 이해시킬 수 있다. 이런 훈계가 일관성 있게 이뤄지면,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순종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부모들은 또한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달라고 매번 울 때마다 즉각적으로 주는 것과 같이 아이들의 바람직하지

않은 행동에 동조하는 것을 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권위를 세울 수 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울라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이 된다. 만일 부모가 아이들이 화내거나 울 때마다 그들의 요구를 들어준다면, 이런 부모들은 실제로 그와 같이 바람직하지 않은 행동을 장려하는 것이 된다. 현명한 부모는 단지 자녀의 바람직한 행동만 보상해 준다.

체벌은 육체적으로 유해하지 않아야 하지만, 확실히 불순종하는 아이가 짧은 시간 동안의 울음을 일으킬 정도로 고통을 생성해야 한다. 체벌을 통하여, 아이는 불순종에는 고통이 따른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성경도 이 점을 긍정하고 있다.

매를 아끼는 자는 그의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아이를 훈계하지 아니하려고 하지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그가 죽지 아니하리라 네가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의 영혼을 스올에서 구원하리라…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행하게 버려 둔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잠 13:24; 22:15; 23:13-14; 29:15).

부모가 규칙을 적용함에 있어서 아이들을 순종시키려고 그들을 위협할 필요는 없다. 만일 아이가 반항적으로 불순종한다면, 그 아이는 매를 맞아야 한다. 부모가 자신의 불순종하는 아이를 때리겠다는 위협만 한다면, 그는 단지 그의 아이의 지속적인 불순종만 부추기게 될 뿐이다. 그 결과로, 그 아이는 그 부모의 언성이 어느 정도 높아지지 않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됨을 배우게 된다.

매로 훈계한 후에는, 아이를 포옹해 주고 부모의 사랑을 확인시켜 주어야 한다.

자녀 교육(Train Up a Child)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강조 추가)라는 잠언 22장 6절의 말씀처럼, 그리스도인 부모들은 반드시 자녀를 가르쳐야 할 책임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교육은 불순종에 대한 처벌뿐 아니라, 좋은 행동에 대한 보상도 포함한다. 부모들은 아이들의 좋은 행동과 좋은 특성을 강화하기 위해 아이들을 지속적으로 칭찬해줘야 한다. 아이들은 그들이 부모의 사랑을 받고 부모께 받아들여지고 인정받고 있다는 것을 확인받는 것이 필요하다.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칭찬과 포옹과 키스를 해주거나,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을 통하여 그들의 사랑을 전해 줄 수 있다.

“교육”한다는 것은 “순종하게 만든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부모들은 자신의 아이들에게 교회에 다니거나 매일 기도를 할지 여부에 대해서 선택권을 주지 말아야 한다. 아이들은 자신한테 무엇이 가장 좋은지 알만큼 충분히 책임적이지 않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에게 부모를 주셨다. 우리가 잠언 22장 6절에서 읽다시피 자녀를 제대로 가르치기 위해 노력과 에너지를 투자하는 부모들에게, 하나님은 그들의 아이들이 늙어도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을 하셨다.

아이들이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그들에게 부여되는 책임도 증가해야 한다. 효과적인 양육의 목표는 아이가 점차 성인으로서의 모든 책임을 지도록 준비시키는 것이다. 아이들은 나이를 먹음에 따라, 자기 절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자유를 점점 더 많이 부여받아야 한다. 또한, 십대들은 자기가 내린 결정에 따른 책임은 자신이 져야 하며 부모가 자기를 항상 문제 속에서 건져주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부모의 가르침의 책임(Parents’ Responsibility to Instruct)

에베소서 6장 4절을 읽으면, 아버지들은 자녀를 훈계할 책임뿐 아니라 주님 안에서 가르칠 책임도 있음을 알 수 있다. 어린이들에게 성경적인 도덕관, 그리스도인의 성품, 또는 신학에 대해 가르치는 것은 교회의 책임이 아니라 아버지의 책임이다. 아이들에게 하나님에 대해 가르치는 책임을 주일학교 교사에게 모두 이관하는 부모는 매우 심각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이렇게 명령하셨다.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신 6:6-7, 강조 추가).

그리스도인 부모는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그들에게 하나님이 누구시며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알려줘야 한다. 어린아이들은 예수님의 탄생,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이야기를 배워야 한다. 많은 아이들은 다섯 살이나 여섯 살부터 복음의 메시지를 이해할 수 있으며 주님을 섬기겠다는 결정을 내릴 수 있다. 조금 지나면(여섯 살이나 일곱 살, 때로는 더 어릴 적부터), 그들은 성령세례를 받을 수 있으며 증거로 방언의 은사를 받을 수 있다. 물론, 아이마다 다르기 때문에 절대적인 규칙은 없다. 요점은 그리스도인 부모는 자녀들의 영적 양육을 그들의 우선순위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녀 사랑을 위한 10가지 규칙(Ten Rules for Loving Your Children)

1).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엡 6:4). 어린이가 어른처럼 행동할 것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만일 당신이 그들에게서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한다면, 그들은 그것이 불가능한 줄을 알고, 당신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을 그만둘 것이다.

2). 자신의 아이들을 다른 아이들과 비교하지 말라. 당신이 그들이 가진 독특한 자질과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흔상하고 있음을 그들에게 알려 주라.

3). 자녀들에게 집안일에 관한 책임을 부여하여 그들이 가족의 중요한 성원임을 알게 하라. 자존감을 높여주는 것이 곧 성취이다.

4). 자녀와 함께 시간을 보내라.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당신에게 있어서 그들이 중요한 존재라는 것을 알게 해준다. 그들에게 물질적인 것을 주는 것이 그들에게 자신을 주는 것을 대신할 수 없다. 또한, 아이들은 그들과 함께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사람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다.

5). 만일 당신이 뭔가 부정적인 말을 꼭 해야 한다면, 긍정적인 방식으로 말하라. 나는 아이들이 나를 거역했을 때 종래로 그들이 “나쁘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 대신, 나는 “너는 좋은 아이야, 그리고 좋은 아이는 네가 금방 한 것처럼 행동하지 않아”라고 내 아들에게 말할 것이다(그다음에 나는 그를 찰싹 때려줄 것이다).

6). “안돼”라는 말이 “내가 너를 관심한다”라는 말임을 인식시킨다. 아이들은 모든 일을 항상 자기가 원하는 방식대로 할 수 있는 것은 부모가 그들을 제한할 만큼 그들을 충분히 관심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7). 당신의 아이들이 당신을 모방하도록 요구하라. 아이들은 부모의 본을 통하여 배울 수 있다. 현명한 부모는 종래로 자신의 아이에게 이렇게 말하지 않을 것이다, “나의 말대로 하고 행동대로 하지 말라”

8). 아이들의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해 주지 말라. 오직 걸림돌만 제거해 주고 디딤돌은 그들의 길에 남겨두라.

9). 하나님을 전심으로 섬기라. 나는 영적으로 미지근한 부모들의 아이들이 성인이 된 후에도 계속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는 것을 발견했다. 구원받지 못한 부모와 완전히 헌신적인 그리스도인 부모를 둔 그리스도인 아이들은 일반적으로 “둥지”를 떠난 후에도 계속하여 하나님을 섬긴다.

10). 당신의 아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라. 부모들은 자녀의 교육에 우선순위를 두지만, 그들이 얻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교육, 성경의 가르침을 주는 데에는 실패한다.

사역, 결혼 및 가족의 우선순위(The Priorities of Ministry, Marriage and Family)

그리스도인 지도자가 범하는 가장 일반적인 오류는 아마도 사역에 대한 헌신 때문에 결혼과 가족을 소홀히 하는 것일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희생은 “주님의 일”을 위한 희생이라며 자신을 정당화한다.

이런 오류는 제자 삼는 사역자가 하나님께 대한 그의 진정한 순종과 헌신의 정도는 그의 배우자와 자녀와의 관계에서 반영됨을 깨달을 때 교정된다. 만일 사역자가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듯이 자신의 아내를 사랑하지 않거나, 주님 안에서 자녀를 양육하고 훈계하기 위해 자신의 아이들과 필요한 시간을 보내는 것을 무시한다면, 그는 하나님께 헌신했다고 말할 수 없다.

또한, “사역”을 위해 자신의 배우자와 자녀를 무시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자신의 힘과 능력에 의지하는 육적인 사역의 확실한 표시이다. 무거운 작업 부담을 안고 있는 많은 제도적 교회의 목사들은 이 점을 예증한다. 그들은 진행 중인 모든 교회 프로그램을 유지하다가 탈진해버린다.

예수님은 그분의 멍에는 쉽고 그분의 짐은 가볍다고 약속하셨다(마 11:30을 보라). 그분은 사역자가 자기 가족은 사랑하지 않으면서 이 세상 또는 교회에게 자신의 헌신을 보여주라고 그들을 부르신 것이 아니다. 사실, 장로에 대한 요구 사항을 보면 그는 반드시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딤전 3:4) 사람이어야 한다. 가족과의 관계는 그가 사역에 적합한지를 잘 보여줄 수 있다.

다른 곳에 다니면서 사역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집에 있을 때 가족한테 초점을 맞추고 여분의 시간을 보내야 한다.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된 동료들은 이런 안배가 가능하도록 자신의 노력을 다해 도와야 한다. 제자 삼는 사역자는 자신의 아이들이 주요 제자들임을 인식해야 한다. 만일 그가 그 일에 실패하면, 그는 자기의 집 밖에서 제자를 삼을 자격이 없다.

 


[1]하나님은 내숭을 떠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에 관한 더 많은 증거를 원하면 아 7:1-9 과 레18:1-23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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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안의 진실(In-Christ Realities)

제 19 장 (Chapter Nineteen)

신약 성경의 서신서를 살펴보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고 “그 안에서”와 같은 문구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문구들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일로 말미암아, 신자인 우리가 받게 되는 혜택을 자주 보여준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듯이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 안에서” 보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사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제자 삼는 사역자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제자들을 가르쳐서 그들로 하여금 영적으로 온전히 성숙할 수 있도록 돕고 싶을 것이다.

우선, “그리스도 안에 있다”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

우리가 거듭나면, 영적으로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게 되며 그분과 한 몸이 된다. 이 점을 확인해주는 신약 성경의 몇 가지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자.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롬 12:5, 강조 추가).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고전 6:1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 12:27, 강조 추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분과 합하였고, 그분의 몸을 이루는 지체이며, 그분의 영과 하나가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분은 우리 안에 계시며 우리는 그분 안에 거한다.

아래의 성경 구절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음으로 인해 갖게 되는 혜택들을 알려주고 있다.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고전 1:30, 강조 추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의롭게 되었으며(“정죄 받지 않았음”을 선포하고 지금은 옳은 일을 한다), 성별 되고(하나님께서 거룩하게 사용 받는다), 구속 받았다(노예의 신분에서 벗어났다). 우리는 미래의 어느 시점에 의로워지고 성별 되고 구속받을 것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지금 그 모든 축복을 누리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과거에 지은 죄로부터 용서받았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골 1:13-14, 강조 추가).

이 성경 말씀은 또한 우리가 더 이상 사탄의 나라, 흑암의 권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빛의 나라, 예수님의 나라에 있음을 알려준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강조 추가).

만일 당신이 그리스도의 추종자라면 하나님을 찬양하라. 당신은 모충이 나비로 변한 것처럼,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당신의 영은 새로운 본성을 부여받았다. 이전에 당신은 사탄의 이기적인 본성을 소유했었지만, 지금은 과거의 모든 삶에서 벗어났다.

그리스도 안의 더 많은 축복(More Blessings in Christ)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갈 3:26, 강조 추가).

우리가 실제로 하나님의 성령으로 태어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우리가 기도로 그분한테 나아갈 때, 우리는 그분을 단지 우리의 하나님으로서가 아닌 우리의 아버지로서 알아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할 하심이니라(엡 2:10, 강조 추가).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만 하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재창조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가 성취해야 할 사역들을 예비하셨다. “선한 일을 위하여…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 각자마다 영적인 운명이 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강조 추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의로움은 실제로 하나님 자신의 의로움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시고 성령님에 의해 우리를 변화시켰기 때문이다. 우리의 선한 행동은 사실은 우리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선하심이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7, 강조 추가).

바울이 쓴 “이 모든 일”은 무엇일까? 로마서에 기록된 이 구절의 앞 구절은 그것이 신자가 겪게 되는 시련과 고난임을 보여준다. 비록 세상은 우리를 패배자로 보겠지만, 우리는 순교할지라도 승리자이다. 우리는 죽을 때, 천국에 가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통하여 죽음을 정복한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강조 추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능력과 힘을 주셨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통하면, 우리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일을 무엇이든지 이룰 수 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 4:19, 강조는 추가).

만일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진정한 필요를 채워주실 것을 기대할 수 있다. 주님은 우리의 목자이시며, 그분은 그분의 양을 보살펴 주신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동의(Agreeing With What God Says)

우리 중 일부는 불행하게도, 우리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데, 그것은 우리가 성경 말씀에 어긋나는 말들을 하는 것을 통해 나타난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라고 말하는 대신, “나는 할 수 있으리라고 믿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이런 말들은 성경에서 “악평”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그런 말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다(민 13:32을 보라). 그러나 만일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득 차 있다면, 우리는 믿음으로 충만할 것이며 성경에 동의하는 말만 믿고 말하게 될 것이다.

일부 성경적인 선언들(Some Biblical Declarations)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누구라고 말씀하신 것을 믿고 말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할 수 있다고 하신 것을 믿고 말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분이 누구시라고 말씀하신 것을 믿고 말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믿고 말해야 한다.

아래의 구절들은 모든 신자가 담대하게 선언할 수 있는 몇 가지 성경적인 진술들이다. 모든 것이 다 “그리스도 안의” 실체인 것은 아니지만, 모두 성경에 근거한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고 거룩하여 지고 의롭게 되었다(고전 1:30을 보라).

나는 흑암의 권세에서 빛의 나라인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졌다(골 1:13을 보라).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죄를 용서 받았다(엡 1:7을 보라)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다 – 나의 이전 것은 지나갔다(고후 5:17을 보라).

하나님은 선한 일을 예비하셔 내가 그 가운데 행하게 하셨다(엡 2:10을 보라).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었다(고후 5:21을 보라).

나는 나를 사랑하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넉넉히 이긴다(롬 8:37을 보라).

나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빌 4:13을 보라).

나의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나의 모든 쓸 것을 채우신다(빌 4:19을 보라).

나는 성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전 1:2을 보라).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다(요 1:12, 요일 3:1-2을 보라).

내 몸은 성령의 전이다(고전 6:19을 보라).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갈 2:20).

나는 사탄의 권세에서 벗어났다(행 26:18을 보라).

하나님의 사랑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되었다(롬 5:5을 보라).

내 안에 계신 이는 세상에 있는 자(사탄)보다 크시다(요일 4:4을 보라).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받았다(엡 1:3을 보라).

나는 사탄의 영적 권세를 벗어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늘에 앉힘을 받았다(엡 2:4-6을 보라).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에, 그분은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실 것이다(롬 8:28을 보라).

만일 하나님이 나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는가?(롬 8:31을 보라).

아무것도 나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롬 8:35-39을 보라).

나는 신자이기 때문에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다(막 9:23을 보라).

나는 하나님의 제사장이다(계 1:6을 보라).

나는 그분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다(롬 8:14을 보라).

내가 주님을 따를수록, 나의 길은 더욱 빛날 것이다(잠 4:18을 보라).

하나님은 나에게 특별한 주셔서 그분을 섬기도록 하셨다(벧전 4:10-11을 보라).

나는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어 그들을 치유할 수 있다 (막 16:17-18을 보라).

하나님은 항상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신다(고후 2:14을 보라).

나는 그리스도의 대사이다(고후 5:20을 보라).

나는 영생을 얻었다(요 3:16을 보라).

내가 무엇이든지 믿고 구한 것은 다 받는다(마 21:22을 보라).

예수님이 채찍에 맞음으로, 내가 치유받았다(벧전 2:24을 보라).

나는 세상의 소금이고 빛이다(마 5:13-14을 보라).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한 하나님의 상속자이다(롬 8:17을 보라).

나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다(벧전 2:9을 보라).

나는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의 한 부분이다(고전 12:27을 보라).

주님은 나의 목자이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시 23:1을 보라).

주님은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시 27:1을 보라).

하나님은 나를 장수하게 함으로 나에게 만족을 주실 것이다(시 91:16을 보라).

그리스도는 나의 질고를 지시고 나의 슬픔을 당하셨다(사 53:4-5을 보라).

주님이 나를 도우시므로, 나는 무서워하지 않는다(히 13:6을 보라).

주님이 나를 돌보심으로, 나는 모든 염려를 다 주님께 맡긴다(벧전 5:7을 보라).

내가 마귀를 대적하면, 마귀는 나를 피한다(약 4:7을 보라).

내가 예수님을 위하여 목숨을 잃으면 도로 찾게 된다(마 16:25을 보라).

나는 주님의 종이다(고전 7:22).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다(빌 1:21을 보라).

나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빌 3:20을 보라).

하나님은 내 안에서 시작하신 착한 일을 이루실 것이다(빌 1:6을 보라).

하나님은 그분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내 안에서 행하신다(빌 2:13을 보라).

나는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받았다(갈 3:13을 보라).

이것은 단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할 수 있는 긍정적인 선언의 일부분이다. 우리는 이런 진리들이 마음속 깊이 뿌리 내릴 때까지 이 선언들을 말하는 습관을 기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들을 감찰함으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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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0 장 (Chapter Twenty)

찬양과 예배(Praise and Worship)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아버지께서 참되게 예배하는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19-24).

예수님의 이 말씀은 우리가 예배의 가장 중요한 요소를 이해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그분은 “참되게 예배하는 자”의 자격조건을 설명하셨다. 이것은 예배자는 맞지만 참되게 예배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음을 보여준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께 예배 드린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요구 사항에 부합되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참된 예배자의 특징을 선언하셨다. 그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한다. 따라서 거짓 예배자를 “육과 거짓”으로 예배하는 자라고 말할 수 있다. 거짓 예배자는 육적으로 예배의 흐름을 따라갈 수는 있지만, 그것은 하나의 쇼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부터 나온 행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대한 참된 예배는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다. 따라서, 예배는 단지 우리가 교회에서 모일 때마다 하는 일이 아니라, 삶의 매 순간마다 그리스도의 계명에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삶이다. 놀랍게도, 예수님과 대화했던 여자는 다섯 번 결혼했고 지금은 한 남자와 동거하고 있었다. 그녀는 어디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적절한 장소인지에 대해 예수님과 토론하고 있었다! 그녀는 하나님께 반역하는 일상을 살면서 그분께 예배 드리려는 많은 종교적인 사람들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그들은 참된 예배자가 아니다.

예수님은 어느 한 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거짓되고 헛된 경배를 책망하셨다.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 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마 15:7-9, 강조 추가).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은 사람이 어디에서 예배할지를 크게 중시했지만, 예수님은 위치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오히려, 각 사람의 하나님을 향한 마음과 태도가 그가 드리는 예배의 품질을 결정한다.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드려지는 “예배”는 죽은 예배자들에 의해 연기되는 죽은 예식에 불과하다. 사람들은 “찬양”을 부를 때 어리석게도 다른 사람의 하나님에 대한 말을 앵무새처럼 되뇌인다. 그리고 그들의 삶의 방식이 그들의 진정한 속내를 드러내고 있기에 그들의 예배는 헛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일 아침에 “당신은 위대하십니다”라고 무심하게 읇조리는 것보다, 오히려 자신께 진정으로 순종하는 자녀가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간단하게 말하는 것을 더 듣고 싶으실 것이다.

영으로 예배하다(Worshipping in Spirit)

일부 사람들은 “영으로” 예배한다는 것은 방언으로 기도하고 노래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비추어보면, 이 해석은 다소 억지스러워 보인다. 그분은 “아버지께서 참되게 예배하는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은 “영으로 예배하는” 조건을 충족하는 사람들이 이미 있었음을 나타낸다. 물론, 아무도 오순절 날까지는 방언을 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모든 신자는 그가 방언할 수 있는지 여부를 떠나서, 영과 진리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 방언으로 기도하고 노래하는 것은 확실히 신자가 예배하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다. 하지만 방언기도도 무정한 의식이 될 수 있다.

사도행전 13:1은 초대 교회의 예배에 대한 흥미로운 통찰력을 제시하고 있다.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강조 추가).

이 구절에서 그들이 “주를 섬겼다”고 말씀하고 있음을 주목하라. 우리가 이 말씀은 그들이 주님을 예배했다는 의미라고 생각하는 것은 합리적이다, 따라서 우리는 참된 예배는 주님을 섬기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깊이 사랑하는 대상이 오직 주님일 때에만 성립된다.

예배 드리는 방법(Ways to Worship)

이스라엘의 찬송가라고도 할 수 시편은 우리가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하나님께 예배 드리도록 권면한다. 예를 들어, 시편 32편은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시 32:11 하, 강조 추가).

조용하고 공손하게 예배를 드릴 수도 있지만, 그래서 즐겁게 외치면서 예배를 드릴 수 있다.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들이 마땅히 할 바로다 수금으로 여호와께 감사하고 열 줄 비파로 찬송할지어다 새 노래로 그를 노래하며 즐거운 소리로 아름답게 연주할지어다(시 33:1-3, 강조 추가).

물론, 우리는 예배 때 주님을 찬송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노래는 즐거워야 한다. 이것은 우리의 마음 상태를 반영하는 또 다른 외적인 표시이다. 우리는 또한 다양한 악기로 즐거운 노래를 연주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많은 교회 모임에서, 전기 악기들이 종종 너무 높게 연주되어 노랫 소리를 완전히 덮어버리고 있음을 언급해야만 하겠다. 그런 악기 소리는 낮추거나 꺼버려야 한다. 시편 기자들은 종래로 그런 문제가 없었다!

이러므로 나의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의 손을 들리이다(시 63:4, 강조 추가).

항복과 존경의 표시로,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손을 들 수 있다.

온 땅이여 하나님께 즐거운 소리를 낼지어다 그의 이름의 영광을 찬양하고 영화롭게 찬송할지어다 하나님께 아뢰기를 주의 일이 어찌 그리 엄위하신지요 주의 큰 권능으로 말미암아 주의 원수가 주께 복종할 것이며 온 땅이 주께 경배하고 주를 노래하며 주의 이름을 노래하리이다 할지어다(시 66:1-4, 강조 추가).

우리는 주님께 그분이 얼마나 엄위하신 분이신지를 말해야 하며 그분의 놀라운 역사를 찬양해야 한다. 시편은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적합한 단어를 찾을 수 있는 좋은 곳이다. 우리는 “주님, 나는 당신을 찬양합니다!”라는 반복적인 고백보다 훨씬 더 많은 말들을 할 수 있다.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시 95:6, 강조 추가).

심지어 우리의 자세까지도 예배의 표현이 될 수 있다. 서 있든지, 무릎을 꿇든지, 아니면 허리를 굽히든지 다 가능하다.

성도들은 영광 중에 즐거워하며 그들의 침상에서 기쁨으로 노래할지어다(시 149:5, 강조 추가).

그러나 우리는 서 있거나 무릎을 꿇어야만 예배 드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 우리는 침상에 누워서도 예배 드릴 수 있다.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시 100:4, 강조 추가).

감사 드리는 것은 마땅히 우리의 예배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춤 추며 그의 이름을 찬양하며(시 149:3, 강조 추가).

우리는 심지어 춤을 추면서 주님을 찬양할 수 있다. 그러나 육적이고, 관능적이거나 순전히 오락적인 춤은 추지 말아야 한다.

나팔 소리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할지어다 소고 치며 춤 추어 찬양하며 현악과 퉁소로 찬양할지어다 큰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하며 높은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할지어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시 150:3-6).

음악적으로 재능 있는 사람들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 드린다. 그들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악기를 연주한다면 그들의 은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데 쓰임 받을 수 있다.

신령한 노래(Spiritual Songs)

새 노래로 여호와께 찬송하라 그는 기이한 일을 행하사(시 98:1 상, 강조 추가).

옛 노래를 부르는 것이 의식적이만 않다면 아무 문제가 없다. 만일 그런 경우 라면, 우리는 마음으로부터 나온 새 노래가 필요하다. 신약 성경에서, 우리는 성령님이 우리가 새 노래를 부르도록 도와주심을 알게 된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골 3:16).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엡 5:18-20).

바울은 우리가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해야 한다고 썼다. 그러므로 이 세 가지는 서로 차이가 있음이 분명하다. 헬라어 원어에 대한 공부가 약간의 도움이 될 수는 있지만, “시”는 아마도 악기의 연주에 따라 성경의 시편을 노래하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반면에, “찬송”은 교회의 여러 신자에 의해 만들어진 일반적인 감사의 노래들일 것이다. “신령한 노래”는 성령님에 의해 즉흥적으로 부르는 노래이며, 불러진다는 점을 제외하면, 예언의 은사와 비슷하다.

찬양과 예배는 우리가 교회에서 모일 때 하는 무언가가 아니라, 우리의 일상 생활의 일부분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매 하루를 통하여 주님을 섬길 수 있으며 그분과의 친밀한 교제를 경험할 수 있다.

찬양 – 믿음의 행동(Praise–Faith in Action)

찬양과 예배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의 정상적인 표현이다. 만일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말씀의 약속을 믿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으로 가득한 즐거운 사람이 될 것이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먼저 소리쳐야만 했었다. 그러자 벽이 무너졌다. 성경은 우리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고”(빌 4:4),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8 상)라고 훈계한다.

역대하 20장에는 찬양의 능력에 관한 가장 뛰어난 사례 중 하나가 기록되었으며, 때는 유다가 모압과 암몬 군대의 침략을 받을 때였다. 여호사밧 왕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아래와 같이 지시하셨다.

너희는 이 큰 무리로 말미암아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내일 너희는 그들에게로 내려가라…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대열을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 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 (대하 20:15 하-17).

이야기는 계속된다.

이에 백성들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드고아 들로 나가니라 나갈 때에 여호사밧이 서서 이르되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들아 내 말을 들을지어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의 선지자들을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 하고 백성들과 더불어 의논하고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진하며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게 하였더니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유다를 치러 온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산 주민들을 치게 하시므로 그들이 패하였으니 곧 암몬과 모압 자손이 일어나 세일 산 주민들을 쳐서 진멸하고 세일 주민들을 멸한 후에는 그들이 서로 쳐죽였더라 유다 사람이 들 망대에 이르러 그 무리를 본즉 땅에 엎드러진 시체들뿐이요 한 사람도 피한 자가 없는지라 여호사밧과 그의 백성이 가서 적군의 물건을 탈취할새 본즉 그 가운데에 재물과 의복과 보물이 많이 있으므로 각기 탈취하는데 그 물건이 너무 많아 능히 가져갈 수 없을 만큼 많으므로 사흘 동안에 거두어들이고(대하 20:20-25, 강조 추가).

믿음으로 가득한 찬양은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공급하심을 경험하게 한다!

찬양의 능력에 관한 주제에 대한 자세한 연구를 위해 빌립보서 4:6-7(찬양은 평화를 가져온다), 역대하 5:1-14(찬양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한다), 사도행전 13:1-12(찬양은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을 보게 한다), 사도행전 16:22-26(찬양은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탈옥을 경험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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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th Korean » 제 20 장 (Chapter Twenty)

사역의 은사(The Ministry Gifts)

제 18 장 (Chapter Eighteen)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 4:7, 11-13, 강조 추가).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서로 돕는 것다스리는 것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고전 12:28, 강조 추가).

사역의 은사는 특정 신자들을 향한 부르심과 그들에게 주어지는 여러 가지 능력을 말하는데 이는 그들로 하여금 사도, 선지자, 복음 전도자, 목사 또는 교사의 직분을 감당할 수 있게 해준다. 아무도 이런 직분을 자기 절로 감당할 수 없으며 반드시 하나님의 부르심과 은사를 받아야 한다.

한 사람이 다섯 가지 직분 중 한 가지 이상을 감당할 수는 있지만, 특정 조합이어야만 가능하다. 예를 들어, 신자는 목사와 교사, 또는 선지자와 교사의 직분에 부르심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목사와 복음 전도자로 부르심을 받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왜냐하면, 목사의 사역은 한 지역의 사람들을 목양할 것을 요구하므로 자주 여행해야만 하는 복음 전도자의 소명을 목사가 이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비록 이 다섯 가지 직분이 서로 다른 목적을 위해 다른 은사를 받았지만, 그것들은 모두 하나의 총체적인 목적인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엡 4:12)[1] 하기 위해 교회에 주어졌다. 모든 사역의 목표는 거룩한 사람들을(“성도”의 의미)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너무 자주, 사역자들은 그들이 거룩한 백성을 봉사를 위해 온전하게 하기 위해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니라 교회의 봉사 가운데 앉아 있는 육적인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부르심을 받은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 이 다섯 가지 직분 중의 하나에 부르심을 받은 모든 사람은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하는 데 대한 자신의 공헌을 항상 평가해야 한다.

일부 사역의 은사는 초대 교회만 위한 것일까?(Were Some Ministry Gifts Only for the Early Church?)

이런 사역의 은사는 교회에 얼마나 오랫동안 주어질까? 예수님은 그분의 거룩한 백성이 봉사를 위해 온전하게 될 때까지, 적어도 그분께서 재림하실 때까지는 이런 은사를 주실 것이다. 교회에는 항상 성장해야 할 새롭게 태어난 그리스도인들이 있으며, 나머지 그리스도인들도 항상 영적으로 성숙해야 할 공간이 있다.

일부 사람들은 불행하게도 하나님이 그분의 계획을 변경하신 것처럼, 오늘날에는 오직 목사와 복음 전도자 두 종류의 사역만이 존재한다고 결론지었다. 아니, 우리는 초대 교회가 그랬던 것처럼 여전히 사도, 선지자, 교사를 필요로 한다. 우리가 전 세계 많은 교회 가운데서 이런 은사의 예를 볼 수 없는 이유는 예수님이 이런 은사를 가짜 교회, 거룩하지 않은 교회, 거짓 복음 교회가 아닌, 그분의 교회에만 주셨기 때문이다. 가짜 교회에서는 단지 일부 사역의 은사들(대부분 목사와 몇 명의 복음 전도자)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한 미약한 시도를 하지만, 예수님께서 그분의 교회에 주신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고 기름 부음을 받은 사역의 은사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다. 그들은 거룩한 사람들을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이 선포하는 복음은 사람을 거룩하게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사람들로 하여금 용서받았다는 생각을 하게끔 기편한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온전하게 되어 봉사의 일을 하려는 소원이 없다. 그들은 자신을 부인하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려고 하지 않는다.

당신이 부르심을 받았는지 여부를 어떻게 있을까? (How do You Know if You are Called?)

한 사람이 교회에서 이런 직분으로 부르심을 받았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무엇보다도 우선, 그는 하나님이 부르신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그는 자신이 특정 사역을 수행해야 한다는 부담을 받을 수 있다. 이런 부담은 단순히 어떤 필요가 보이는 것보다는 훨씬 더 큰 것이다. 오히려 그 안에는 그로 하여금 특정 사역에 투입하려는 하나님께서 주신 굶주림이 있다. 만일 그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면, 그는 자신의 부르심대로 살기 전까지는 만족할 수 없다. 이것은 사람들에 의해 임명되는 것과는 상관이 없다. 하나님만이 그를 부르시는 유일한 분이시다.

둘째로, 진정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이루기 위한 준비가 되어 있음을 발견한다. 다섯 가지 직분을 맡은 사람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신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초자연적인 기름부음을 받았다. 부르심에 따라 기름부음도 받게 된다. 만일 기름부음이 없다면, 부르심도 없다. 한 사람이 특정 사역에 참여하려는 뜻을 품고 그 사역을 위해 신학교에서 4년 동안 교육받으면서 자신을 준비시켜도 하나님의 기름부음이 없다면, 그는 진정한 성공을 이룰 수 없다.

셋째로,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특정 은사를 훈련시키기 위해 이미 여러 가지 기회를 주셨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이러한 방식을 통하여 그는 자기가 더 큰 기회, 책임, 그리고 은사를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

만일 한 사람이 하나님의 내적 충동과 다섯 가지 사역 은사 중 하나에 대한 부르심을 느끼지 못했거나, 하나님이 주신 임무를 완성하기 위한 어떠한 기름부음도 받지 못했거나, 자신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은사를 훈련할만한 어떠한 기회도 만나지 못했다면, 그는 하나님이 부르심이 없는 무언가를 하려고 시도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그는 지역 교회의 지체들과 그의 이웃들과 자신의 직장에서 축복의 통로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비록 그가 “다섯 가지” 사역에 부르심을 받지 못했다 할지라도,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은사를 사용하여 봉사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으며, 그는 자신의 신실함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성경에서 다섯 가지 사역의 은사를 언급했다고 하여, 특정 직분을 맡은 사람마다 모두 같은 사역의 은사를 가졌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바울은 “사역은 여러 가지”(고전 12:6)라고 썼는데, 이것은 같은 직분을 가진 사역자라도 사역이 다를 수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이런 직분을 맡은 사람들이 기름부음을 받은 정도가 다양해 보이기에, 우리는 기름부음을 받은 정도에 따라 각 직분을 분류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일부 교사들은 다른 교사보다 특정 방면에서 기름부음을 더 많이 받은 것으로 나타난다. 다른 사역의 은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어떤 사역자라도 일정 기간 자신의 신실함을 증명하고 하나님께 자신을 철저하게 성별함으로써 그의 사역에 대한 하나님의 기름부음이 더하게 할 수 있다고 믿는다.

사도의 직분을 살펴보다(A Closer Look at the Office of Apostle)

사도로 번역된 헬라어는 apostolos이며 문자적인 의미는 “보냄을 받은 사람”이다. 신약 성경의 진정한 사도는 교회를 세우기 위해 하나님에 의해 특정 장소에 보내진 신자이다. 그는 사도인 바울이 쓰다시피 하나님의 “집”의 영적인 터를 닦아놓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다.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라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매(고전 3:9-10상, 강조 추가).

“지혜로운 건축자”는 건물의 전반 건축 과정을 감독하며 완성된 모습을 구상한다. 그는 목수 또는 벽돌공 같은 전문가가 아니다. 그는 목수나 벽돌공의 일을 할 수는 있으나 아마 그들처럼 잘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도는 복음 전도자나 목사의 작업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은 갖고 있지만, 교회를 세우는 제한된 시간 동안만 가능하다(사도 바울은 일반적으로 한 곳에 6개월에서 3년 동안 남아 있었다).

사도는 교회를 세우고 그곳에 하나님의 질서를 세우도록 감독하는데 가장 뛰어나다. 사도는 회중들을 목양하기 위해 장로/목사/감독을 교회에 세울 책임이 있다(행 14:21-23; 딛 1:5).

진정한 사도와 거짓 사도(True and False Apostles)

오늘날, 교회에서의 권위를 갈망하는 일부 사역자들이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성급하게 선포하는데, 그들 중 대부분에게는 큰 문제가 있다. 그들은 세운 교회가 없고(한두 개의 교회를 세웠을 수 있다), 성경적인 사도가 가져야 할 은사와 기름부음이 없기에, 그들이 교회에 대한 권한을 가지도록 허용하는 속기 쉬운 목사를 반드시 찾아야만 한다. 만일 당신이 목사라면, 이러한 자고하고 권력에 목마른 거짓 사도들에 의해 속지 말기를 바란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양의 탈을 쓴 늑대이다. 그들은 종종 돈을 추구한다. 성경은 거짓 사도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고후 11:13; 계 2:2을 보라). 만일 그들이 당신에게 자신이 사도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면, 그것은 대개 그들이 사도가 아니라는 표시이다. 그들이 맺은 열매가 그들에 대해 말해줄 것이다.

자신만의 교회를 세운 후 그 교회에 수년 동안 목사로 있는 사람은 사도가 아니다. 이러한 목사들을, 아마도, “사도적 목사”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만의 교회를 개척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지속적으로 교회를 세워가지 않기 때문에 사도는 아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고 기름부음을 받은, 오늘날 “선교사”로 불려지는, 교회를 세우는 것이 주된 부르심인 사람들은 사도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신학교를 세우거나 목사들을 훈련시키는 일을 하는 선교사들은 사도가 아니라 교사이다.

진정한 사도의 사역은 교회를 세우는 것을 돕기 위해 나타나는 초자연적인 표적과 기사에 의해 특징 지을 수 있다. 바울은 이렇게 썼다.

내가 아무 것도 아니나 지극히 크다는 사도들보다 조금도 부족하지 아니하니라 사도의 표가 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고후 12:11하-12).

한 사람의 사역에 표적과 기사가 동반하지 않는다면, 그는 사도가 아니다. 분명한 것은, 진정한 사도는 드물며, 거짓되고, 거룩하지 않은, 거짓 복음의 교회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주로 이 세계에서 여전히 복음을 접해보지 못한 곳에서 그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사도의 높은 지위(The High Rank of the Apostle)

신약 성경에서 사역의 은사에 관한 나열에서 두 번 모두 사도의 직분을 첫 번째로 나열하였는데, 이것은 사도의 직분이 최고의 부르심임을 나타낸다(엡 4:11; 고전 12:28).

아무도 자신의 사역을 사도로서 시작하지 않는다. 한 사람이 궁극적으로 사도로 부르심을 받을 수 있지만, 처음부터 사도의 직분으로 시작할 수는 없다. 그는 반드시 몇 년간의 복음 전파와 가르침을 통하여 자신의 신실함을 증명한 후에야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그에게 예비하신 직분을 감당하게 된다. 바울은 어머니의 태로부터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지만, 사도의 직분을 감당하기까지 오랜 시간 동안 전직 사역을 하였다(갈 1:15-2:1을 보라). 그는 실제로 교사와 선지자로 시작하였으며(행 13:1-2을 보라), 나중에 성령님에 의해 보내심을 받고 사도로 된 것이다(행 14:14을 보라).

우리는 바울과 최초의 열두 사도 이외의 사도들에 대한 언급을 사도행전 1:15-26; 14:14; 로마서 16:7; 고린도후서 8:23; 갈라디아서 1:17-19; 빌립보서 2:25; 데살로니가전서 1:1과 2:6에서 찾을 수 있다. (고린도후서 8:23과 빌립보서 2:25에서 사자로 번역된 헬라어는 apostolos이다.) 이것은 사도적 직분은 열두 사도한테만 한정한다는 이론을 뒤엎어 버린다.

그러나 열두 사도만이 “어린 양의 사도”로 분류될 수 있으며, 그들만이 그리스도의 천 년 통치에 특별한 지위를 갖게 될 것이다(마 19:28; 계 21:14을 보라). 성경의 계시가 끝났기 때문에 우리는 독특하게 성령님의 영감을 받아 성경을 기록한 베드로, 야고보, 요한과 같은 사도들이 더는 필요가 없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여전히 사도행전에 기록된 바울과 다른 사도들이 했던 것처럼 성령님의 능력으로 교회를 세워갈 사도가 필요하다.

선지자의 직분(The Office of Prophet)

선지자란 초자연적인 계시를 받고 하나님의 영감으로 말하는 사람을 말한다. 선지자는 종종 예언의 은사뿐 아니라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영들을 분별하는 것과 같은 계시의 은사에도 쓰임 받는다.

모든 신자는 성령님이 뜻하시면 예언의 은사로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선지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선지자는, 우선, 기름 부음이 있는 설교를 하거나 가르칠 수 있는 사역자이다. 왜냐하면, 선지자는 두 번째로 높은 부르심인 것으로 보이며(고린도전서 12:28에 나열된 순서를 참조하라), 비록 전직 사역자라 할지라도 수년 동안의 사역을 하기 전에는 선지자의 직분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한 사람이 선지자의 직분을 감당한다면 그에게는 초자연적인 능력도 따르게 될 것이다.

신약 성경에서 선지자로 칭함을 받은 두 사람은 유다와 실라이다. 우리는 사도행전 15:32에서 그들이 안디옥 교회에 긴 예언을 하였음을 읽게 된다.

유다와 실라도 선지자라 여러 말로 형제를 권면하여 굳게 하고

신약 성경에서 또 다른 선지자의 예는 아가보가 될 것이다. 사도행전 11:27-28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읽게 된다.

그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아가보는 지혜의 말씀을 받았음을 주목하라. 그에게 미래에 대한 무언가가 계시된 것이다. 물론, 아가보는 미래에 일어날 모든 일을 알았던 것이 아니다. 그는 단지 성령님이 그에게 보여주시고자 하는 일들만 알았다.

사도행전 21:10-11을 보면 아가보의 사역을 통해 지혜의 말씀이 나타난 또 다른 예가 나온다. 이번에는 바울에 관한 예언이었다.

여러 날 머물러 있더니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 하거늘

새 언약 아래에서 선지자에게 개인적인 지도를 구하는 것이 성경적일까? 아니다. 그 이유는 모든 신자들 안에는 그들을 인도하시는 성령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선지자는 마땅히 신자가 하나님 안에서 알고 있는 것을 확인해 주어야 한다. 예를 들어, 아가보가 바울에게 예언했을 때, 그는 바울이 무엇을 해야 할지에 관해서는 어떤 지시도 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바울이 이미 알고 있던 것을 확인해 주었을 뿐이다.

이전에 언급한 바와 같이, 바울은 사도의 사역에 부르심을 받기 전에 선지자(그리고 교사)로 있었다(행 13:1을 보라). 우리는 갈라디아서 1:11-12으로부터 바울이 주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았으며 또한 많은 비전을 보았음을 알고 있다(행 9:1-9; 18:9-10; 22:17-21; 23:11; 고후 12:1-4을 보라).

진정한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거짓 교회에서 진정한 선지자를 찾을 수 없다. 거짓 교회는 실라, 유다, 아가보와 같은 진정한 선지자를 피할 것이다(피하고 있다). 그 이유는 진정한 선지자는 그들의 불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계시하기 때문이다(계시록의 처음 두 장에서 소아시아의 대부분의 교회에 대한 요한의 계시처럼). 거짓 교회는 그런 계시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교사의 직분(The Office of Teacher)

고린도전서 12:28에 나열된 순서에 따르면, 교사의 직분은 세 번째로 높은 부르심이다. 교사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기 위해 초자연적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이다. 사람이 성경을 가르친다고 해서 그가 신약 성경의 교사인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단순히 자기가 좋아서 가르치거나 또는 의무적으로 가르치지만, 교사의 직분을 맡은 사람은 가르침에 있어서 초자연적인 은사를 받았다. 그는 종종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초자연적인 계시를 부여받으며 그것을 사람들이 이해하고 적용할 수 있게끔 설명할 수 있다.

아볼로는 이 직분을 맡은 신약 성경의 한 예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그의 사도적 사역과 아볼로의 가르침의 사역을 비교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고전 3:6, 10중, 강조 추가).

아볼로는 처음부터 심거나 터를 닦은 것이 아니다. 대신, 그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씨앗에 물을 주었으며 기존의 터 위에 하나님의 집을 지었다.

아볼로는 사도행전 18:27에서도 언급되었다.

아볼로가 아가야로 건너가고자 함으로 형제들이 그를 격려하며 제자들에게 편지를 써 영접하라 하였더니 그가 가매 은혜로 말미암아 믿은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니 이는 성경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언하여 공중 앞에서 힘있게 유대인의 말을 이김이러라.

아볼로는 이미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었으며”, 그의 가르침은 “힘 있었음”을 주목하라. 기름부음을 받은 가르침은 항상 힘 있다.

교회에서, 가르침의 사역은 심지어 기적을 행하거나 병을 고치는 은사보다 더 중요하다. 바로 그 때문에 고린도전서 12:28에서 가르침의 은사를 먼저 나열하였다.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강조 추가).

불행하게도, 신자들은 때때로 자신의 삶에 영적 성장과 거룩함을 가져다주는 말씀의 분명한 가르침을 듣는 것보다는 병 고침을 받는 것을 더 추구한다.

성경은 설교와 가르침 모두에 대해 말씀한다. 설교가 더 많은 영감과 동기부여를 주는 반면 가르침은 더 논리적이고 교육적이다. 복음 전도자는 일반적으로 설교한다. 교사와 목사는 일반적으로 가르친다. 사도들은 설교도 하고 가르치기도 한다. 신자가 가르침의 가치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일부 사람들은 심지어 강사들이 기름부음을 받은 유일한 시간은 그들이 큰 소리로 빠르게 설교할 때뿐이라고 생각한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예수님은 기름부음을 받은 교사의 가장 좋은 예이다. 가르침은 그분의 사역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였으며 많은 사람은 그분을 “선생님”이라고 불렀다(마 8:19; 막 5:35; 요 11:28).

교사와 가르침에 대한 자세한 연구를 위해서 사도행전 2:42; 5:21, 25, 28, 42; 11:22-26; 13:1; 15:35; 18:11; 20:18-20; 28:30-31; 로마서 12:6-7; 고린도전서 4:17; 갈라디아서 6:6; 골로새서 1:28; 디모데전서 4:11-16; 5:17; 6:2; 디모데후서 1:11; 2:2와 야고보서 3:1을 보라. 마지막에 나열된 성경 말씀은 우리에게 교사들은 더 큰 심판을 받게 되므로 그들은 자신이 가르치는 것에 대해 매우 신중해야 함을 알려준다. 그들은 단지 말씀만을 가르쳐야 한다.

복음 전도자의 직분(The Office of Evangelist)

복음 전도자란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을 말한다. 그의 메시지는 사람들로 하여금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믿음을 갖게 인도한다. 불신자의 관심을 끌고 메시지의 참됨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복음 전도자들에게는 종종 기적이 동반한다.

초대 교회 때에 많은 복음 전도자가 있었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사도행전에 복음 전도자로 기록된 사람은 오직 한 명뿐인데 그의 이름은 빌립이다.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머무르니라”(행 21:8, 강조 추가).

빌립이 처음에 접대하면서 일꾼(또는 “집사”)으로서의 사역을 시작했다(행 6:1-6을 보라). 그는 스데반이 순교하고 교회가 박해를 받을 시기에 전도자로 세움을 받았다. 그는 사마리아에서 처음으로 복음을 전하였다.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이 나으니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행 8:5-8).

빌립은 하나의 메시지 곧 그리스도만을 전파했음을 주목하라. 그의 목표는 제자 곧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추종자들을 삼는 것이었다. 그는 그리스도가 기적을 행하시는 자, 하나님의 아들, 주님, 구주, 곧 오실 심판자라고 선포하였다. 그는 사람들이 회개하고 주님을 따를 것을 촉구하였다.

또한, 빌립에게는 자신의 메시지를 입증하는 초자연적인 표적과 기사가 함께했음을 주목하라. 복음 전도자의 직분을 맡은 사람은 병 고치는 은사와 다른 영적인 은사로 기름부음을 받게 될 것이다. 거짓 교회에는 단지 거짓 복음을 선포하는 거짓 복음 전도자가 있을 뿐이다. 오늘날 전 세계는 이런 거짓 복음 전도자들로 가득하며,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기적과 치유로 그들의 메시지를 확증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분의 복음을 전파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전파하지 않는다. 그들은 보통 사람들의 필요와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풍요로운 삶을 제공 할 수 있는지를 전파하거나, 회개가 없는 구원의 공식만을 전파한다. 그들은 사람들이 죄책감은 없애지만, 구원은 이루지 못하는 거짓 결단만 하게 한다. 그들의 복음 전파 결과는 그들이 거듭날 기회마저도 적어지게 하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이 생각하기에 이미 소유하고 있는 것을 더는 받을 필요가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러한 복음 전도자는 실제로 사탄의 왕국을 세우는 것을 돕고 있다.

고린도전서 12:28에서는 에베소서 4:11에서처럼 복음 전도자의 직분이 다른 사역의 은사들과 함께 나열되지 않았지만, 나는 능력을 행하는 자와 병 고치는 은사가 복음 전도자의 직분에 적용된다고 추측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복음 전도자 빌립의 특징이며, 모든 복음 전도자의 사역에 자연스럽게 따르게 되는 초자연적인 입증이기 때문이다.

교회에서 교회로 옮겨 다니면서 스스로 복음 전도자라고 자칭하는 많은 사람들은 진정한 복음 전도자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교회 건물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만 설교하며, 병 고치는 은사나 능력을 행하는 은사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일부 사람들은 이 같은 은사를 가지고 있는 척하지만, 그들은 단지 순진한 바보들만 속일 수 있다. 그들의 가장 큰 기적은 사람들을 일시적으로 무너뜨리는 것뿐이다.) 이런 옮겨 다니는 사역자들은 교사거나 설교자거나 권사일 수 있다(롬 12:8을 보라). 하지만 그들은 복음 전도자의 직분을 맡은 자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 사람이 권사 또는 설교자로 사역을 시작하게 하고 나중에 그에게 복음 전도자의 직분을 맡길 수 있으시다.

복음 전도자의 직분에 관한 자세한 연구를 위해 빌립의 사역을 기록한 사도행전 8:4-40을 읽어보기 바란다. 사역의 은사들이 상호 의존하는 것의 중요성과(특히 14-25절을 보라) 빌립이 무리에게 복음을 전파하였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로 개별적인 사람을 향한 사역도 하였음을 주목하라(행 8:25-39).

복음 전도자들이 그들의 회심자에게 세례를 줄 수는 있어 보이지만, 그들이 반드시 새 신자에게 성령세례를 줘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주로 사도나 목사/장로/감독의 책임이 될 것이다.

목사의 직분(The Office of Pastor)

이전의 두 장에서, 나는 목사의 성경적인 역할과 제도적 교회 목사의 역할을 비교한 바가 있다. 그러나 목사의 사역에 대해 아직 할 말이 많이 남아 있다.

목사의 직분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세 개의 핵심 헬라어 단어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헬라어로 그들은 (1) poimen, (2) presbuteros (3) episkopos이다. 그들을 순서대로 번역하면 (1) 목자나 목사, (2) 장로, (3) 감독 또는 주교이다.

단어 poimen은 신약 성경에서 열여덟 번 나오는데, 열일곱 번은 목자로, 한 번은 목사로 번역되었다. 동사의 형태 poimaino는 열한 번 나오는데 목자로 가장 많이 번역되었다.

헬라어 presbuteros는 신약 성경에서 육십 여섯 번 나오며, 육십 번은 장로 또는 장로들로 번역되었다.

마지막으로, 헬라어 episkopos은 신약 성경에서 다섯 번 나오며, 그 중 네 번은 감독으로 번역되었다. 킹 제임스 버전은 주교로 번역하였다.

이 네 단어 중의 세 단어는 교회에서 같은 위치를 가리키며, 그들은 서로 교체되어 씌어졌다. 사도 바울은 교회를 설립하고 떠날 때마다, 장로들(presbuteros)을 임명하여 교회의 회중들을 보살피게 하였다(행 14:23, 딛 1:5을 보라). 그들의 책임은 감독자(episkopos)로서 그들의 양 떼를 보살피는(poimaino) 것이었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 20:17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을 읽게 된다.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presbuteros] 청하니(강조 추가).

그리고 바울은 그 교회의 장로들에게 무슨 말을 했는가?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episkopos]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poimaino] 하셨느니라(행 20:28, 강조 추가).

세 개의 헬라어 단어가 서로 대체하여 사용됨을 주목하라. 그것들은 세 가지 다른 직분이 아니다. 바울은 장로들에게 그들은 목자처럼 행하여야 할 감독이라고 말했다.

베드로는 그의 첫 번째 서신에서 이렇게 썼다.

너희 중 장로들[presbuteros]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poimaino]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벧전 5:1-4, 강조 추가).

베드로는 장로들이 그들의 양떼를 치라고 말했다. 여기에서 치라고 번역된 동사는 에베소서 4:11에서 (명사의 형태인) 목사로 번역되었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강조 추가).

이것은 또한 우리로 하여금 장로와 목사가 같은 의미임을 믿게 한다.

바울은 디도서 1:5-7에서 장로(presbuteros)와 감독(episkopos)을 의미하는 단어를 서로 교환하여 사용하였다.

내가 너를 그레데에 남겨 둔 이유는 남은 일을 정리하고 내가 명한 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강조 추가)

따라서 목사, 장로, 그리고 감독의 직분이 같은 직분이라는 것을 합리적으로 부인할 수 없다. 그러므로 신약 성경의 서신서에서 감독과 장로에 대해 쓴 모든 것은 목사에게도 적용된다.

교회 관리(Church Governance)

위에서 인용한 성경 말씀에서 보다시피, 장로/목사/감독에게는 교회에 대한 영적인 감독권이 주어졌을 뿐 아니라 또한 교회를 관리할 수 있는 권한도 부여되었음이 매우 분명하다. 간단하게 말하면, 장로/목사/감독이 교회를 담당하고, 교회의 구성원들은 그들에게 복종하여야 한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히 13:17).

물론, 어떤 그리스도인도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목사에게는 복종하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그 또한 어떤 목사도 완벽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목사/장로/감독은 아버지가 자기 가족에 대한 권한을 가진 것처럼 교회에 대한 권한을 가지고 있다.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공손함으로 복종하게 하는 자라야 할지며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리요)(딤전 3:2-5, 강조 추가).

바울은 계속하여 말하였다.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리할 것이니라(딤전. 5:17, 강조 추가).

분명히, 장로는 교회를 관리할 것이다.

비성경적인 장로(Unscriptural Elders)

많은 교회들은 장로들로 구성된 관리 그룹이 있어 그들의 관리 구조가 성경적이라고 생각하지만, 문제는 그들의 장로에 대한 개념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의 장로는 정기적으로 선출되고 교회 내에서 교대한다. 그들은 종종 “장로 위원회”로 불려진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은 성경의 정의에 의하면 장로가 아니다. 우리가 바울이 장로가 될 수 있는 사람을 위해 열거한 요구 사항을 살펴보면, 이것은 아주 분명해진다. 바울은 장로는 전직으로 섬고 삯을 받으며 교회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교회를 다스리는 위치에 있다고 썼다(딤전 3:4-5; 5:17-18; 딛1:9). 교회의 “장로 위원회”에 앉아 있는 사람들 중에 이 자격에 부합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들은 삯을 받지 않는다; 그들은 설교하거나 가르치지 않는다; 그들은 교회에서 전직으로 섬기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은 교회를 어떻게 다스릴지를 잘 알지 못한다.

비성경적인 교회 관리는 다른 어떤 것보다도 교회에 많은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원인이 될 수 있다. 잘못된 사람들이 교회를 다스릴 때, 문제가 오는 것이다. 그것은 다툼과 타협을 일으키며 교회를 완전히 무너뜨릴 수도 있다. 비성경적인 교회 관리 구조는 악마에 대한 환영 인사와도 같다.

나는 제도적 교회뿐 아니라 가정교회의 목사들에게도 이 글을 쓰고 있음을 알고 있다. 일부 제도적 교회 목사들은 교회에서 장로들을 선출하는 비성경적인 관리 구조를 가진 교회에서 목회할 수 있다. 이러한 비성경적인 관리 구조는 일반적으로 투쟁이 없이는 변경될 수 없다.

이러한 목사들에 대한 나의 충고는 그들이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관리 구조를 변경하여야 하며 불가피한 일시적인 충돌을 견뎌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그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정기적인 충돌이 불가피하게 될 것이다. 만일 그가 일시적인 충돌을 견디는 데 성공한다면, 모든 미래의 충돌을 피면하게 될 것이지만, 만일 실패한다면, 그는 새로운 교회를 개척하고 처음부터 성경적으로 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고통이 따르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더 많은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만일 현재 자신의 교회를 관리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진정한 제자라면, 그에게는 그들이 현재의 구조에 대한 필요한 변화를 가져오게끔 설득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장로는 다수제인가? (The Plurality of Elders?)

일부 사람들은 성경에서 장로에 대하여 항상 복수상태로 언급했기 때문에 그대로라면, 한 명의 장로/목사/감독이 회중을 인도하는 것은 비성경적인 것이라고 지적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이것은 결정적인 증거가 되지 않는다. 성경은 분명히 특정 도시에서 한 명 이상의 장로가 교회를 감독한다고 언급했지만, 그 장로들이 같은 회중을 공동으로 감독했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바울이 에베소의 장로들을 청하였을 때(행 20:17을 보라), 그들은 전체 인구가 수천 또는 수만 명의 사람들이 있는 도시에서 왔음이 분명하다(행 19:19을 보라). 따라서, 에베소에는 많은 무리들이 있었을 것이며 매 장로마다 하나의 가정교회를 감독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어떤 위원회를 부르셔서 일을 시키신 사례가 없다. 그분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시고자 하셨을 때, 그분은 한 사람, 모세를 부르시고 지도자로 세우셨다. 다른 사람들은 모세를 돕기 위해 부르심을 받았지만, 모두 그에게 종속되었고, 모세와 같이, 그들도 각각 특정 하위 그룹을 책임지고 있었다. 이 양식은 성경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은 이루시고자 하는 일이 있을 때, 한 사람을 부르시며, 다른 사람을 부르셔서 그 사람을 돕게 한다.

따라서 하나님은 장로 위원회를 부르셔서 스무 명 규모의 매 작은 가정 교회를 모두 감독하게 하실 것 같지 않다. 그것은 분쟁에 유발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모든 가정 교회는 오직 한 명의 장로에 의해 감독 되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교회에 한 명 이상의 장로가 있으면, 젊고 영적으로 덜 성숙한 장로(들)은 가장 나이가 많고 영적으로 성숙한 장로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말이다. 성경적으로, 신학교가 아닌, 교회가 젊은 목사/장로/감독들을 훈련하는 장소가 되어야 하며, 한 가정교회에 여러 명의 장로/목사/감독이 있고 영적으로 미숙한 장로가 성숙한 장로의 제자 훈련을 받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고 바람직할 수 있다.

나는 “같은 지위”의 장로들에 의해 감독 되는 교회에서도 이런 현상이 있음을 발견했다. 거기에는 항상 다른 장로들에게 존중받는 한 장로가 있었거나 다른 장로들이 수동적인 반면 지배적인 한 명의 장로가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사실, 위원회에서조차 항상 한 명의 의장을 선출한다. 같은 지위의 사람들이 어떤 일을 할 때에도, 한 명의 지도자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인식을 하게 된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디모데전서 3:4-5에서 바울은 장로의 책임을 아버지의 책임에 비교했다. 장로들은 반드시 자기 집을 잘 다스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교회를 관리할 자격이 없다. 그러나 같은 지위의 두 아버지가 어떻게 한 가정을 다스릴 수 있겠는가? 나는 분명히 문제가 생길 것으로 생각한다.

장로/목사/감독들은 더 넓은 범위 지역의 지체들에 의해 서로 연결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동료 장로들 사이에 상호 책임을 지고 문제가 생겼을 때 서로 도울 수 있다. 바울은 “장로의 회”(딤전 4:14을 보라)를 언급한 적이 있는데, 그것은 장로들의 모임이 틀림없으며, 가능하게 사역의 은사를 가진 다른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만일 설립 사도가 있으면 그는 장로의 오류로 말미암아 생긴 지역교회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을 도울 수 있다. 제도적 교회의 목사가 타락하면, 교회의 구조 때문에 항상 큰 문제가 발생한다. 거기에는 건물과 각종 프로그램들을 유지해야 하는 문제가 있다. 그러나 가정교회는 즉시 해산시킬 수 있으며 회원들은 다른 모임에 참여하면 된다.

봉사할 수 있는 권한(Authority to Serve)

하나님은 목사에게 교회에서의 영적 및 관리 권한을 부여하셨지만, 그에게 자신의 양떼를 지배할 수 있는 권한은 부여하시지 않았다. 목사는 그들의 주님이 아니며 예수님만이 그들의 주님이시다. 그들은 목사의 양떼가 아닌 하나님의 양떼이다.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벧전 5:2, 강조 추가).

각 목사는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자신의 사역에 대하여 언젠가 회계하여야 할 것이다.

또한, 재정적인 문제에 있어서, 목사/장로/감독은 독립적으로 행동하지 말아야 한다. 교회에서 어떤 이유로 정기적으로 또는 간헐적으로 모금하고 있다면, 교회 내의 다른 지체들이 재정을 책임져야 한다. 그래야만 헌금을 관리하는 것에 대한 불신이 생기지 않을 수 있다(고후 8:18-23을 보라). 재정을 맡은 사람들은 선출하거나 임명할 수 있다.

장로에 대한 지급(Paying Elders)

장로/감독/목사들이 교회에서 전직으로 사역하기 때문에, 성경은 그들이 삯을 받아야 함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바울은 이렇게 썼다.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리할 것이니라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은 마땅하다 하였느니라(딤전 5:17-18).

이 주제는 명확하다. 바울은 심지어 이란 단어를 사용한다. 바울의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아야 한다는 말은 앞뒤 문맥을 살펴보면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앞 구절들을 보면, 바울은 도움을 받을 수 없는 과부들을 재정적으로 도와주어야 할 교회의 책임을 명백하게 썼으며, “참 과부인 과부를 존대하라”(딤전 5:3-16을 보라)라는 같은 표현으로 쓰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이 문맥을 보았을 때 “존대하라”는 표현은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것을 의미한다.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여김을 받아야 하며, 적어도 과부에게 지원하는 것의 두 배는 받아야 하며 자녀가 있으면 그 이상을 받아야 할 것이다.

세계 각곳의 대부분(심지어 가난한 국가)의 제도적 교회들에서는 목사들을 지원하지만, 전 세계의 많은 가정교회, 특히 서방의 가정교회들에서는 지원하지 않는다. 나는 그 이유가 부분적으로는 가정교회에 다니려는 서양 세계의 많은 사람들의 마음 상태가 반역적이고, 그들이 이 세상에서 요구가 가장 적은 기독교 형식을 찾으려 하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그들은 제도적 교회의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정교회에 다닌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그들은 그리스도께 대한 모든 헌신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그들은 아무런 재정적인 헌신도 요구하지 않는,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기대하신 것과는 매우 대조적인 교회를 찾았다.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지 않고 땅에 쌓아 두며 재물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가 아니다(마 6:19-24; 눅 14:33을 보라). 만일 한 사람의 기독교 신앙이 돈에 대한 영향력을 잃는다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성경적이라고 주장하는 가정교회는 목사들을 지원할 뿐 아니라, 가난한 자들을 돌봐주고 선교사역에 후원해 주어야 한다. 그들은 재정적인 방면에 있어서, 제도적 교회를 훨씬 능가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지불이 필요한 건물과 프로그램을 위한 직원들이 없기 때문이다. 한 명의 목사를 지원하기 위해 열 명의 신자가 십일조를 내면 된다. 소득의 20%를 헌금하는 열 명의 신자는 한 명의 목사와 한 명의 선교사를 목사와 같은 수준에서 지원할 수 있다.

목사는 무엇을 하는가?( What do Pastors do?)

교회의 평범한 출석자에게 “다음과 같은 일들은 누구의 직업인가?”고 묻는다고 상상해보자.

누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들려주고 거룩한 삶을 살고 기도해야 하는가? 누가 다른 신자들을 권계하고 격려하고 병든 자를 방문하고 안수하고 치유해줘야 하는가? 누가 다른 사람의 짐을 함께 져야 하는가? 누가 지체를 위하여 은사를 사용해야 하는가? 누가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희생하는가? 누가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고 그리스도의 계명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가?

많은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은 주저함이 없이 “이 모든 것은 목사의 책임이다”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진짜 그럴까?

성경에 따르면, 모든 신자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벧전 3:15).

모든 신자는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벧전 1:15-16).

모든 신자는 기도하여야 한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6-17).

모든 신자는 다른 신자를 권계하고 격려하고 도와주어야 한다.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살전 5:14, 강조 추가).

모든 신자는 병든 자를 방문하여야 한다.

헐벗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 25:36).

많은 책임(More Responsibilities)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모든 신자는 병든 자에게 안수하고 치유하여 한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 즉 나으리라 하시더라(막 16:17, 강조 추가).

모든 신자는 지체들의 짐을 서로 져야 한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 6:2).

모든 신자는 다른 사람을 위하여 자신의 은사를 사용해야 한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롬 12:6-8).

모든 신자는 자기를 부인하고 복음을 위해서 희생하여야 한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막 8:34-35, 강조 추가).

그리고 모든 신자들은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풀어야 하며 그들을 가르쳐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게 해야 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마 5:19, 강조 추가).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히 5:12, 강조 추가).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9-20, 강조 추가).[2]

이러한 책임은 모든 신자에게 다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회 출석자들은 이런 일들은 단지 목사들에게만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아마도 목사 스스로 너무 자주 이런 일들은 전적으로 자신의 책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목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So What are Pastors Supposed to do?)

만일 이러한 책임들이 모든 신자에게 주어졌다면, 목사는 무엇을 해야 할까? 간단히 말해서, 그들은 거룩한 신자들이 그런 일들을 할 수 있도록 세워주기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엡 4:11-12을 보라). 그들은 거룩한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모든 계명을 지키게 하기 위해(마 28:19-20을 보라) 교훈과 본을 통하여 가르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딤전 3:2; 4:12-13; 5:17; 딤후 2:2; 3:16-4:4; 벧전 5:1-4을 보라).

성경은 이것에 대해 더 이상 명확할 수가 없다. 목사의 성경적인 역할은 주일 아침 예배에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모아놓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하게 세워가는 것”(골 1:28)이다. 성경적인 목사는 사람들의 귀를 자극하는 것이 아니라(딤후 4:3을 보라),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사람들을 가르치고, 훈련시키고, 권면하고, 경책하고, 바로 잡고, 책망한다(딤후 3:16-4:4을 보라).

바울은 디모데전서에서 한 사람이 목사의 직분을 감당하기 위한 일부 자격 조건을 나열하였다. 열다섯 가지 중의 열네 가지는 성품에 관련된 것인데 이것은 모범이 되는 삶이 가장 중요함을 보여준다.

미쁘다 이 말이여, 곧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함은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라 함이로다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신중하며 단정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며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공손함으로 복종하게 하는 자라야 할지며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리요) 새로 입교한 자도 말지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 또한 외인에게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라(딤전 3:1-7).

이러한 자격 조건들과 제도적 교회에서 종종 새로운 목사를 찾을 때 명시하는 조건들을 비교해보면 많은 교회들의 주요 문제가 보인다. 그들은 직원 관리일꾼/즐겁게 해주는 사람/연설을 짧게 하는 사람/행정가/심리학자/활동 및 프로그램이 감독/모금 전문가/인맥이 넓은 사람/불평이 없는 사람을 찾고 있다. 그들은 “교회의 사역을 끌어갈” 사람을 찾고 있다. 그러나, 성경적인 감독은 무엇보다도 좋은 성품을 가진 그리스도께 헌신된 진정한 일꾼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의 목표는 자신과 같은 사람을 만들어 내는 것이기때문이다. 그는 그의 무리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도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 11:1).

목사의 직분에 관한 진일보의 연구를 위하여 사도행전 20:28-31; 디모데전서 5:17-20; 및 디도서 1:5-9을 보라.

집사의 직분(The Office of Deacon)

끝으로, 나는 집사에 대한 언급을 조금 하겠다. 집사의 직분은 지역교회에서 다섯 가지 사역의 은사에 속하지 않는 유일한 직분이다. 집사는 장로처럼 교회에서 관할 권한이 없다. 집사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diakonos인데 문자적인 의미는 “종”이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과부들을 구제하는 일에 임명된 일곱 명의 남자들은 최초의 집사로 간주된다(행 6:1-6을 보라). 그들은 교회 회중에 의해 택함을 받고 사도들에 의해 임명되었다. 그들 중 적어도 두 사람, 빌립과 스데반은 나중에 하나님의 의해 능력 있는 복음 전도자로 세움을 받았다.

디모데전서 3:8-13과 빌립보서 1:1에도 집사에 대한 언급이 있다. 분명한 것은, 이 직분은 남자와 여자가 모두 맡을 수 있다(딤전 3:11을 보라).

 


[1]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를 삼기 위함이다”라는 것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2]만일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들의 제자들도 그분께서 그들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지키게끔 가르쳤다면, 그들도 결국 그들의 제자들에게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풀고 그리스도의 계명을 가르쳐 지키게 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풀고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은 모든 제자들이 따라야 할 영원한 계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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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th Korean » 사역의 은사(The Ministry Gifts)

예수님의 치유사역(The Healing Ministry of Jesus)

제 16 장 (Chapter Sixteen)

사람은 종종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그분은 원하시면 언제든지 기적을 행하거나 사람을 치유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면밀하게 살펴보면, 예수님은 확실히 신성을 지니셨지만 공생애 기간 동안 분명히 자기 제한적이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분은 어느 한 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요 5:19)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분명히 예수님이 자기 제한적이고 그분의 아버지께 의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바울에 따르면, 예수님은 사람으로 되셨을 때 자기를 비우셨으며, 그분이 비우신 것은 전에 하나님처럼 소유하셨던 것이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빌 2:5-7, 강조 추가).

예수님이 자기를 비우신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그의 신성이 아니다. 그것은 그분의 거룩하심이 아니다. 그것은 그분의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그분의 초자연적인 능력이었음이 틀림없다. 분명한 것은 그분은 더는 무소부재하시지 않다. 마찬가지로, 그분은 더는 전지하시지 않으며 전능하시지 않다. 예수님은 사람이 되셨다. 그분의 사역 속에서, 그분은 성령님의 기름 부음을 받으신 사람으로 활동하신다. 우리가 사복음서를 자세히 살펴보면 이것은 더욱 명백해진다.

예를 들어, 우리는 만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분이 30세가 되어 사역을 시작하실 때 왜 성령세례가 필요했는지 의문스러울 수 있다. 왜 하나님하나님의 세례를 받아야 하는가?

분명히 예수님은 사역을 위한 성령세례가 필요하셨다. 때문에 우리는 그분이 세례 받으신 후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 4:18, 강조 추가).

그것은 베드로가 아래와 같이 설교한 이유이기도 하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행 10:38, 강조 추가).

그것은 또한, 예수님이 30세에 성령세례를 받기 전까지 기적을 행하시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그분이 25세 때에도 하나님의 아들이었을까? 물론이다. 그렇다면 왜 그분은 30세 때까지 기적을 행하시지 않았는가? 그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이 가지신 초자연적인 능력을 자기에게서 비우셨고, 성령님의 능력을 받을 때까지 기다려야 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성령님의 기름 부음을 받으신 사람으로 사역하셨다는 더 많은 증거들(More Proof that Jesus Ministered as a Man Anointed by the Spirit)

우리는 복음서를 읽으면서 예수님께서 초자연적인 지식을 가지셨을 때와 그렇지 않으셨던 때가 있음을 보게 된다. 사실, 예수님은 종종 정보를 얻으시기 위해 질문을 하셨다.

예를 들어, 예수님은 사마리아 우물가의 여자에게 그녀는 남편이 다섯이 있었고 지금 함께 사는 남자도 그녀의 남편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요 4:17-18을 보라). 예수님은 어떻게 아셨을까? 그분이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일까? 아니, 만일 그 경우라면, 예수님은 일관성 있게 그분의 능력을 보여주셨을 것이다. 비록 그분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지만, 예수님은 사람으로 되실 때 전지의 자기를 비우셨다. 예수님이 우물가 여자의 결혼사를 아는 것은 그 순간에 성령님이 그분에게 “지식의 말씀”(고전 12:8)을 주셨기 때문이다. 그것은 현재 또는 과거의 무언가를 알 수 있는 초자연적인 능력이다. (우리는 다음 장에서 성령의 은사에 대하여 자세히 다룰 것이다.)

예수님은 항상 모든 것을 알고 계셨을까? 아니, 혈루증으로 앓던 여자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댔을 때 예수님은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아시고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막 5:30 하)라고 물으셨다. 마가복음 11:13에서 예수님이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셨을 때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서 보셨다.”

왜 예수님은 누가 그분을 다쳤는지 모르셨을까? 왜 그분은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맺혔는지 여부를 모르셨을까? 그것은 예수님이 성령님의 기름 부음을 받으신, 성령의 은사를 사용하는 사람으로 행하셨기 때문이다. 성령의 은사는 성령님의 뜻대로 주어진다(고전 12:11; 히 2:4을 보라). 예수님은 성령님이 뜻하시고 그분께 “지식의 말씀”을 주지 않으면 초자연적으로 무언가를 아실 수 없다.

예수님의 치유 사역도 마찬가지다. 성경은 예수님이 아무 때나 누구든지 치유할 수 없다고 명백히 말씀하고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이 자신의 고향인 나사렛을 방문하셨을 때, 그분이 원하셨던 일을 아무것도 이루실 수 없었음을 읽게 된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따르니라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 하시며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막 6:1-6, 강조 추가).

마가는 예수님이 거기에서 권능을 행하시지 않은 것이 아니라 행하실 수 없었다고 했음을 주목하라. 왜서일까? 왜냐하면, 나사렛 사람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기름 부음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동네 목수의 아들로 받아들였다.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막 6:4)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같았다. 그 결과로, 그분이 성취하신 일은 다만 소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시는 것뿐이었다. 확실한 것은, 만일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시고 사람들을 치유하고 싶으셨던 곳이 있었다면, 그곳은 분명히 그분이 삶 대부분을 사셨던 마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곳에서 그분은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으셨다고 말씀한다.

누가에 대한 더 많은 통찰력(More Insight from Luke)

예수님은 주로 두 가지 방법으로 치유하였다. (1)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심으로 병든 자들이 치유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갖도록 격려하셨다. (2) 성령님의 뜻에 따라 “치유의 은사”를 사용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치유의 사역을 하심에 있어서 두 가지 요인의 제한을 받으셨다. (1) 병든 자들이 믿지 않는 것과 (2) “치유의 은사”를 통해 그분 자신을 나타내는 것이 성령님의 뜻인지 여부이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의 대다수는 그분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비록 그들이 예수님이 다른 도시에서 치유의 기적을 행하신 것을 들었다 하더라도, 그들은 그분이 치유의 능력이 있다고 믿지 않았으며, 결과적으로 그분은 그들을 치유할 수 없으셨다. 또한, 성령님은 나사렛에서 예수님께 “치유의 은사”를 명백히 주시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누가는 예수님이 나사렛을 방문하셨을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마가보다 보다 자세히 기록했다.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눅 4:16-22).

예수님은 그분이 이사야가 예언한 대로 기름 부음을 받은 자임을 청중들이 믿기를 원하셨고, 그들이 그분의 기름 부음으로 인한 모든 혜택을 믿고 받을 수 있기를 원하셨는데 이사야에 의하면 포로 된 자가 자유를 얻고, 눈 먼 자가 다시 보게 된다.[1]그러나 그들은 믿지 않았고, 비록 그들이 그분의 말씀의 능력에 깊은 인상을 받았지만 요셉의 아들이 특별하다고는 믿으려 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그들이 마음에 의심을 품은 것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 하는 하는 속담을 인용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가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눅 4:23-24).

예수님의 고향 사람은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서 행하셨던 일을 하실는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태도는 믿음으로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회의적이었다. 그들이 믿음이 없음으로 하여 예수님을 어떤 기적이나 치유도 행하실 수 없도록 제한하였다.

나사렛에서 예수님이 받은 다른 제한성(Jesus’ Other Limitation in Nazareth)

나사렛 사람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다음 말씀은 그분께서 또한, “치유의 은사”를 통해 자신을 나타내게 하는 성령님의 뜻에 제한받음을 보여준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 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었느니라(눅 4:25-27).

예수님의 요점은 엘리야가 이스라엘의 3년 기근 동안 어떤 과부든지 그가 원하면 기름과 가루가 떨어지지 않게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왕상 17:9-16을 보라). 비록 그 당시 이스라엘에 수많은 고통 받는 과부가 있었지만, 성령님은 엘리야가 심지어 이스라엘 사람도 아닌 한 명의 과부만 도와주도록 하였다. 마찬가지로, 엘리사도 그가 원하면 어떤 나병환자든지 깨끗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나아만이 깨끗게 함을 받을 당시 이스라엘에는 많은 나병 환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에 의해 입증된다. 그것이 순전히 엘리사 자신의 선택이었다면, 그가 우상 숭배자인 나아만을 깨끗게 하기 전에 자연스럽게 이스라엘의 다른 나병환자들도 깨끗게 하였을 것이다(왕하 5:1-14을 보라).

엘리야와 엘리사는 모두 성령님의 뜻대로 성령의 다양한 은사에 쓰임 받은 성령님께 기름 부음 받은 선지자들이다. 왜 하나님은 엘리야를 다른 과부에게 보내시지 않았을까? 나는 모른다. 왜 하나님은 엘리사를 사용하셔서 다른 나병 환자들을 치유하시지 않았을까? 나는 모른다.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이 두 익숙한 구약 성경 이야기는 모든 과부의 필요를 제공하거나 모든 나병 환자를 치유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은 증명하지 못한다. 엘리야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과 그들의 사악한 왕(아합)이 그들의 죄를 회개하기만 했어도 자신들의 기근을 끝낼 수 있었다. 그 기근은 하나님 심판의 한 형태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모든 나병 환자들이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육체적인 치유를 포함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였더라면 치유받았을 것이다.

예수님은 나사렛에서 청중들에게 엘리야와 엘리사가 제한 받았던 것처럼 그분도 같은 제한을 받고 계심을 보여주셨다. 성령님은 나사렛에서 모종 이유 때문에 예수님께 어떤 “치유의 은사”도 주지 않았다. 그 사실과 나사렛 사람들의 불신앙 때문에 예수님은 그분의 고향에서 큰 기적을 행하시지 못하였다.

예수님이 행하신 “치유의 은사”를 보다(A Look at One “Gift of Healing” Through Jesus)

우리가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행하신 다양한 치유를 살펴보면, 대부분의 치유받은 사람은 “치유의 은사”가 아닌 그들의 믿음 때문에 치유 받았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유형의 치유가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각자의 예를 통하여 살펴보자. 먼저 자신의 믿음으로가 아닌 예수님의 “치유의 은사”로 치유받은 베데스다 못의 다리 저는 사람의 이야기를 연구해보자.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 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요 5:2-9).

우리는 어떻게 이 사람이 자신의 믿음으로가 아닌 “치유의 은사”로 치유받았는지를 알 수 있을까?

첫째로, 이 사람은 예수님을 찾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예수님이 그 사람이 못가에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하셨다. 만일 그 사람이 예수님을 찾고 있었다면, 그에게 믿음이 있었다는 표시가 될 것이다.

둘째로,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을 치유하셨을 때처럼 그 사람에게 그의 믿음이 그를 치유하였다는 말씀을 하시지 않았다.

셋째로, 나중에 예수님께서 그 고침을 받은 사람에게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한 사람이 누군가고 물었을 때, 그 사람은 심지어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고 대답했다. 때문에 그 사람은 분명히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 치유 받은 것이 아니다. 이것은 성령님의 뜻에 따라 “치유의 은사”를 통하여 치유받은 명확한 사례이다.

또한, 많은 병자들이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예수님은 한 사람만 치유하셨고 나머지 사람은 병든 채로 남겨 두셨음을 알 수 있다. 왜서일까? 다시 말하지만, 나는 모른다. 그러나 이 사건은 어떤 사람은 병든 채로 있어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이 뜻이라고 증명할 수 없다. 병든 사람은 누구든지 그리고 모두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 치유받을 수 있다. 사실, 그 사람이 기적적으로 치유받은 것은 병든 사람들을 그들이 믿기만 하면 치유해 주시는 예수님께 집중시키기 위함일 수 있다.

많은 경우, “치유의 은사”는 예수님에 대한 관심을 끌기 위해 설계된 “표적과 기사”의 범주에 속한다. 때문에 빌립과 같은 신약 성경 속의 복음 전도자는 다양한 “치유의 은사들”로 장비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행한 표적은 설교를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복음에 관심을 갖게 하기 때문이다(행 8:5-8을 보라).

그리스도인이 병들었을 때, “치유의 은사”를 가진 사람이 와서 치유해주기를 기다리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과 은사는 결코 오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 치유받는 것은 가능하다. 비록 모든 사람이 다 치유의 은사로 치유받는 것은 아니지만, 누구나 자신의 믿음으로 치유받을 수는 있다. 교회에 치유의 은사를 주신 것은 주로 믿지 않는 사람들이 치유받음으로 인해 복음에 주의를 기울이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은 치유의 은사를 통해 치유받을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들이 믿음으로 치유받기를 기대하신다.

자신의 믿음으로 치유받은 사람의 한 예(One Example of a Person Healed By His Faith)

바디매오는 예수님에 대한 자신의 믿음으로 치유 받은 한 맹인이었다. 마가복음에 기록된 그의 이야기를 읽어 보자.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막 10:46-52).

우선 예수님이 바디매오를 찾지 않으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이것은 베데스다 못가의 그 사람에게 일어났던 일과는 정반대이다). 사실, 예수님은 그 사람을 스쳐 지나가고 계셨다. 그리고 만일 바디매오가 부르짖지 않았다면, 예수님은 계속하여 걸어가셨을 것이다. 즉, 바디매오는 치유받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 아래의 가정에 대해 생각해보자. 만일 바디매오가 그 자리에 앉아 “그래, 내가 치유받는 것이 예수님의 뜻이라면, 그분은 나에게로 오셔서 나를 치유하여 주실 거야”라고 자신한테 말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비록 이 이야기에서 예수님이 바대매오를 치유하시기를 뜻하셨다 할지라도, 그는 절대로 치유될 수 없을 것이다. 바디매오의 믿음을 보여주는 첫 번째 행동은 곧 예수님께 부르짖은 것이다.

둘째로, 바디매오는 그에게 잠잠하라고 꾸짖는 사람들에 의해 좌절하지 않았음을 주목하라. 사람들이 그를 잠잠하게 하려고 할 때, 그는 “더욱 크게” 소리 질렀다(막 10:48). 그것은 그의 믿음을 보여준다.

셋째로, 예수님은 바디매오의 “최초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시지 않았음을 주목하라. 물론, 예수님이 바디매오의 “최초의 부르짖음”을 듣지 못하셨을 수 있다. 그러나 만일 그분이 들으셨다 할지라도 응당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즉, 예수님은 그 사람의 믿음이 시험받게 하실 수 있다.

만일 바디매오가 한 번만 부르짖고 포기했다면, 그는 치유받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도 반드시 때로는 믿음으로 인내해야 한다. 왜냐하면, 많은 경우, 우리의 기도가 응답받지 못할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럴 때면 우리의 믿음은 시험받게 되며, 우리는 계속하여 굳게 서야 하여 역경 때문에 낙담하지 말아야 한다.

바디매오의 믿음에 관한 추가 암시(Further Indications of Bartimaeus’ Faith)

예수님이 마침내 그를 부르셨을 때, 성경은 바디매오가 “겉옷을 내버렸다”고 말씀한다. 나의 이해에 의하면 예수님의 시대에 맹인들은 대중들이 맹인임을 알아볼 수 있게 하기 위해 특별한 겉옷을 입었다. 확인 망토의 특정 종류를 착용 한 나의 이해이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예수님이 그를 부르셨을 때 바디매오가 겉옷을 내버린 것은 그가 더는 맹인으로 인식될 필요가 없다고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때문에라면, 그의 믿음은 다시 한 번 분명해진다.

또한, 바디매오가 자신의 겉옷을 내버렸을 때, 성경은 그가 “뛰어 일어났다”고 했는데 이것은 그에게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흥분된 기대감을 표시한다. 치유받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진 사람은 그가 하나님께 치유해 달라고 기도할 때 흥분하는 데 그것은 그들이 치유받을 것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바디매오가 그분 앞에 섰을 때 그의 믿음을 한 번 더 시험하셨음을 주목하라. 바디매오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는가 하고 물으신 예수님께 드린 바디매오의 대답으로부터 보아, 그가 예수님이 그를 능히 치유하실 수 있으며 또 치유하여 주시리라는 것을 믿었음이 분명하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그에게 그의 믿음이 그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셨다. 만일 바디매오가 믿음으로 치유받을 수 있었다면, 누구든지 다 치유받을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일보된 연구(For Further Study)

아래에 나는 사복음서에 기록된 바와 같이 예수님이 행하신 21가지 치유의 사례들을 나열하였다. 물론, 예수님은 21명의 사람보다 더 많은 사람을 치유하셨지만, 아래의 경우에서 우리는 병자 개개인과 그들이 어떻게 치유받았는지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있다.

나는 이 사례들을 믿음으로 치유된 사람과 치유의 은사를 통해 치유된 사람에 따라 두 가지 부류로 나누었다. 나는 사람들이 믿음으로 치유받은 경우, 예수님은 그들에게 치유받은 것에 대해 잠잠하라고 말씀하셨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것은 진일보 그들이 치유받은 것이 “치유의 은사”에 의한 것이 아님을 표시한다. 왜냐하면, 병든 자들이 예수님이거나 복음을 선전하기 위해 치유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앙이나 믿음으로 치유받았다고 언급한 사례들:(Cases Where Faith or Believing is Mentioned as the Cause of Healing:)

1. 백부장의 하인(또는 종): 마 8:5-13; 눅 7:2-10 “네가 믿는 대로 될지어다.”

2. 중풍병자를 지붕을 뚫고 달아 내리다. 마 9:2-8; 막 2:3-11; 눅 5:18-26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내가 네게 이르노니… 집으로 가라”

3. 야이로의 딸: 마 9:18-26; 막 5:22-43; 눅 8:41-56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그들을 많이 경계하셨다.”

4. 혈루증으로 앓은 여자: 마 9:20-22; 막 5:25-34; 눅 8:43-48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5. 두 맹인: 마 9:27-31 “너희 믿음대로 되라…삼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6. 맹인 바디매오: 막 10:46-52; 눅 18:35-43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7. 열 명의 나병 환자: 눅 17:12-19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8. 왕의 신하의 아들: 요 4:46-53 “그 사람은 예수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을 믿었다.”

다음 4가지 사례에서, 병든 자의 믿음이 특별히 언급되지는 않지만, 그의 말이나 행동으로부터 보아낼 수 있다. 예를 들어, 10번째 사례에 나오는 두 맹인도 바디매오가 한 것처럼 예수님이 지나가실 때 예수님께 부르짖었다. 다음의 4가지 예에서 나오는 모든 병든 자들은 주동적으로 예수님을 찾았는데 이것은 그들의 믿음을 명확히 나타낸다. 다음의 4가지 사례 중 3가지에서, 예수님은 그분이 치유하신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이들이 “치유의 은사”로 치유받은 경우가 아님을 나타낸다.

9.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는 나병 환자: 마 8:2-4; 막 1:40-45; 눅 5:12-14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10. 두 맹인(아마 한 명은 바디매오였을 것이다): 마 20:30-34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11. 귀머거리와 벙어리: 막 7:32-36 “예수께서 그들에게 경고하사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되.”

12. 한 맹인: 막 8:22-26 “마을에는 들어도 가지 말라.”

마지막 두 사례에서, 믿음으로 치유받기를 간구한 사람은 실제로 치유받은 것이 아니라 귀신의 속박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이 그들의 구원에 영향 줬다고 칭찬하셨다.

13. 귀신 들린 아이: 마 17:14-18; 막 9:17-27; 눅 9:38-42 “예수께서 이르시되…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하더라.”

14. 수로보니게 여자의 딸: 마 15:22-28; 막 7:25-30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치유의 은사”를 통해 치유받은 사람의 사례:(Cases of People Healed Through “Gifts of Healings”:)

아래의 7가지 사례들은 명백히 치유의 은사를 통해 치유받은 사람들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처음 3가지 사례에서는, 병든 자가 치유받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특정 명령에 순종해야만 했다. 이러 경우에. 예수님은 치유받은 자들에게 치유받은 것에 대해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으며, 병든 자가 예수님을 먼저 찾은 적도 없다.

15. 손 마른 사람: 마 12:9-13; 막 3:1-5; 눅 6:6-10 “일어나 한가운데 서라…네 손을 내밀라.”

16. 베데스다 못가의 남자: 요 5:2-9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17.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 요 9:1-38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18. 베드로의 장모: 마 8:14-15; 막 1:30-31; 눅 4:38-39

19. 열여덟 해 동안이나 꼬부라진 여자: 눅 13:11-16

20. 수종병 든 남자: 눅 14:2-4

21. 대제사장의 종: 눅 22:50-51

위의 스물하나의 모든 사례에서, 성인이 전적으로 다른 성인의 믿음으로 치유받은 경우가 없음을 알 수 있다. 누군가가 다른 사람의 믿음으로 치유 받았던 모든 경우를 보면, 그것은 항상 아이가 그 부모의 믿음을 통해 치유받은 경우였다(사례 1, 3, 8, 13, 14를 보라).

유일하게 가능한 예외는 백부장의 하인의 사례와 중풍 병자를 지붕을 뚫고 예수님께로 내려온 사례가 될 것이다. 백부장의 하인의 사례에서, 하인으로 번역된 헬라어는pais 인데 이 단어는 마태복음 17:18에서 “아이가 그때부터 나으니라” (강조 추가) 라고 번역된 것처럼 아이로 번역될 수도 있다.

실제로 그가 백부장의 아이가 아니라 하인이라 할지라도, 그의 하인은 어린아이었음에 틀림없다. 따라서, 백부장은 그 아이의 법적 보호자로서 그 아이에 대한 책임을 지며, 부모가 자신의 아이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처럼 그 아이를 대신하여 믿음을 행사할 수 있다.

중풍병자를 지붕을 뚫고 달아 내린 경우에서, 중풍병자 자신이 반드시 믿음을 소유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자기의 친구들이 그를 지붕을 통해 달아 내리게 허락했을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전적으로 친구들의 믿음으로 치유 받은 것이 아니다.

이 모든 것으로 보아, 만일 병든 성인 자신이 믿음이 없다면, 다른 성인의 믿음이 그로 하여금 치유되게 할 수 없다. 물론 한 성인이 치유가 필요한 성인과 함께 기도할 수는 있지만, 병든 성인의 불신은 잠재적으로 다른 성인의 믿음의 효과를 무효화시킬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아이들은 특정 나이까지는 우리의 믿음을 통해 치유받을 수 있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의 믿음에 근거하여 주시기를 바라는 나이에 도달할 것이다.

나는 당신이 주님의 치유에 대한 믿음을 튼튼히 하기 위해 위에 열거한 매 사례마다 자세히 공부할 것을 권장한다.

치유의 기름 부음(The Healing Anointing)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공생애 기간 동안 감지할 수 있는 치유 능력을 기름 부음 받으셨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즉, 그분은 실제로 치유의 능력이 그분의 몸에서 나가는 것을 느끼실 수 있으며, 어떤 경우에는 치유받고 있는 병자도 그 능력이 자기 몸으로 들어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누가복음 6:19은 이렇게 말씀한다. “온 무리가 예수를 만지려고 힘쓰니 이는 능력이 예수께로부터 나와서 모든 사람을 낫게 함이라”

분명한 것은, 치유의 기름 부음이 심지어 예수님의 옷에도 흐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만일 병든 사람이 그분의 옷을 믿음으로 만지면, 치유의 기름 부음은 그 사람의 몸으로 흐를 것이다. 아픈 사람이 믿음으로 그분의 옷을 만진 경우, 기름 부음 치유 자신의 몸에 흐를 것이다. 마가복음 6장 56절은 이렇게 쓰고 있다.

아무 데나 예수께서 들어가시는 지방이나 도시나 마을에서 병자를 시장에 두고 예수께 그의 옷 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니라.

혈루증으로 앓던 여자(막 5:25-34을 보라)는 그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해도 치유될 수 있기를 믿음으로 기대했으며 또 믿는 대로 치유받았다.

예수님뿐 아니라 사도 바울도 그의 사역의 후년에 감지할 수 있는 치유의 기름 부음을 받았다.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시니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행 19:11).

바울의 몸이 닿았던 옷은 모두 감지할 수 있는 치유의 기름 부음을 갖고 있었는데, 이것은 옷이 치유의 능력을 전달하는 좋은 도체임을 분명하게 나타낸다!

하나님은 예수님이나 바울의 시대 이후로 변하시지 않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바울에게 주셨던 치유의 기름 부음을 오늘날 그분의 일부 종들에게 부어주셨다고 해서 놀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은사들은 새 신자들에게는 주어지지 않고, 오직 일정 기간 동안 신실함과 이기적인 동기가 없음이 검증된 사람들에게만 주어진다.

 


[1]이 모든 것은 육체적인 치유로 볼 수 있으며 병도 눌린것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행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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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th Korean » 예수님의 치유사역(The Healing Ministry of Jesus)

성령의 은사(The Gifts of the Spirit)

제 17 장 (Chapter Seventeen)

성경에는 남자와 여자가 성령님으로부터 갑작스럽게 초자연적인 능력을 부여받았다는 사례들로 가득하다. 신약 성경에서 이런 초자연적인 능력은 “성령의 은사”라고 불린다. 이런 은사들은 획득할 수 없다는 점에서 선물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분이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을 사용하셨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 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눅 16:10)라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우리는 성령의 은사는 하나님 앞에 자신의 신뢰성을 입증한 사람들에게 주어질 가능성이 더 크다고 예상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그런 종류의 사람들을 초자연적으로 사용하실 가능성이 더 크므로 온전히 성별 되고 성령님께 복종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른 한 면으로, 하나님은 어느 한 번 당나귀를 예언자로 사용하셨는데 그분은 원하시면 누구든지 사용하실 수 있다. 만일 그분께서 우리가 완벽하게 되어야만 사용하실 수 있다면 우리 중 누구도 사용하실 수 없을 것이다!

성령의 은사는 신약 성경 고린도전서 12장에 나열되어 있는데 모두 9가지다.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고전 12:8-10).

각각의 은사를 분별할 수 있는 것이 하나님께 성령의 은사로 쓰임 받는 것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구약의 선지자, 제사장, 왕, 그리고 초대 신약 교회의 목회자들은 성령의 은사를 분류하거나 정의하는 방법에 대한 지식이 없었지만 모두 성령의 은사대로 쓰임 받았다. 그럼에도, 신약 성경에서 성령의 은사를 분류한 것으로 보아,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기를 바라신다는 것이 분명하다. 사실, 바울은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고전 12:1)라고 썼다.

9가지 은사에 대한 분류(The Nine Gifts Categorized)

성령의 9가지 은사는 현대에 와서 사람들에 의해 세 그룹으로 분류되었다: (1) 말하는 은사, 즉 각종 방언을 말함, 방언의 통역, 예언; (2) 계시의 은사: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영들을 분별하는 은사; 그리고 (3) 능력의 은사: 기적을 행함, 특별한 믿음, 치유의 은사이다. 그 중 세 가지 은사는 뭔가를 말하는 것이고; 세 가지는 뭔가를 계시하는 것이고; 세 가지는 뭔가를 행하는 것이다. 이 은사 중 각종 방언을 말하는 은사와 통역하는 은사를 제외한 모든 은사는 구약에서 볼 수 있다. 그 두 가지는 신약에만 있는 독특한 은사이다.

신약 성경에는 “능력의 은사”를 어떻게 적절하게 사용할지에 대한 가르침이 없으며 “계시의 은사”를 어떻게 적절할지에 대한 가르침도 아주 적다. 그러나 “말함의 은사”의 적절한 사용법에 대해서는 상당한 양의 가르침이 바울을 통하여 주어진다. 그 이유는 아마도 두 가지가 있을 것이다.

첫째로, 교회 모임에서 “말함의 은사”가 가장 많이 나타나고, “계시의 은사”는 적게 나타나며, “능력의 은사”는 가장 드물게 나타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 모임에서 가장 많이 나타나는 은사에 대한 가르침을 제일 많이 필요로 할 것이다.

둘째로, “말함의 은사”는 사람들 사이의 협력에 대한 요구가 가장 높아 보이기 때문에 잘못 다뤄지기 가장 쉽다. 치유의 은사를 파괴하기보다는 예언을 파괴하기가 훨씬 쉽다.

성령님의 뜻을 따라 (As the Spirit Wills)

성령의 은사가 사람이 아닌 성령님의 뜻을 따라 주어진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성경은 이것에 대해 명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고전 12:11 강조 추가).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의 뜻을 따라 성령이 나누어 주신 것으로써 그들과 함께 증언하셨느니라(히 2:4 강조 추가).

사람이 특정 은사로 자주 쓰임 받을 수는 있으나 어떤 은사도 소유할 수는 없다. 당신이 어느 한 번 기적을 행하도록 기름 부음을 받았다고 하여 당신이 원할 때마다 기적을 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당신이 앞으로 기적을 행할 수 있음을 보장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각 은사에 대한 성경의 몇 가지 예를 간단히 알아볼 것이다. 그러나 명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은 무한한 방법으로 그분의 은혜와 능력을 나타낼 수 있기 때문에 각각의 은사가 매번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정확하게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또한, 성경에서 이 9가지 성령의 은사에 대해 정의 내린 적도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다만 그것들의 명칭일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단지 성경의 예를 살펴보고 각각의 은사가 어느 부류에 속하는지를 결정함으로써 표면적인 차이에 의해 그것들을 정의 내릴 수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성령님이 초자연적인 은사를 통하여 그분 자신을 나태내는데에는 수많은 방법이 있기에 우리가 내린 정의에 지나치게 엄격한 것은 지혜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일부 은사들은 실제로 몇 가지 은사들의 조합과 같을 수도 있다.이러한 맥락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썼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4-7, 강조 추가).

능력의 은사(The Power Gifts)

1) 치유의 은사: 치유의 은사는 분명히 아픈 사람을 치유하는 것과 관계된다. 그들은 종종 갑작스럽게 육체적으로 아픈 사람들을 치유할 수 있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부여받으며, 나는 그것에 대한 어떠한 이의도 제기할 수 없다. 이전 장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베데스다 못 가의 앉은뱅이를 치유할 때 그분을 통해 치유의 은사가 나타난 예를 살펴본 적이 있다(요 5:2-17을 보라).

하나님은 엘리사를 사용하셔서 우상 숭배자인 나병 환자 나아만을 치유하셨다(왕하 5:1-14을 보라). 우리가 누가복음 4장 27절에서 나아만이 치유받은 것에 관해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살펴보면, 엘리사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어떤 나병환자든지 치유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는 갑자기 초자연적인 영감을 받아 나아만에게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고 지시했던 것이며 나아만은 결과적으로 순종함으로 인해 나병으로부터 깨끗해졌다.

하나님은 베드로를 사용하셔서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앉아 있는 앉은뱅이를 치유하셨다(행 3:1-10). 이 초자연적인 기적은 앉은뱅이를 치유하였을 뿐 아니라,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베드로가 선포한 복음을 듣도록 인도하였으며, 그날 약 오천 명의 사람이나 교회에 추가되었다. 치유의 은사는 종종 병든 사람을 치유하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두 가지 목적을 이루는데 사용된다.

베드로는 그날 모인 사람들에게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할 때 이렇게 말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행 3:12).

베드로는 하나님이 이 앉은뱅이를 치유하신 이유가 그의 개인적인 권능이나 경건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이 기적을 행하기 두 달 전만 하여도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고백했었을 기억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도행전의 첫 부분에서 베드로를 기적적으로 사용하셨기 때문에 그분께서 원하시면 우리도 사용하실 것이라는 신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베드로가 그 사람이 치유받은 이유를 설명하려 할 때, 그것을 “치유의 은사”로 분류했을 가능성은 매우 적어 보인다. 베드로가 알고 있었던 것은 그와 요한이 앉은뱅이 곁을 걸어 지나가려고 할 때 갑자기 자신한테 그 사람이 치유될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다는 것뿐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앉은뱅이에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명하고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러자 앉은뱅이는 곧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면서 하나님을 찬송하였다.” 베드로는 이 상황을 아래와 같이 설명하였다.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 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행 3:16).

앉은뱅이의 손을 잡아 일으키면서 그가 걷기를 기대하는 것에는 특별한 믿음이 필요하다! 이런 특별한 치유의 은사와 함께 믿음을 받는 것도 필요하다.

어떤 사람들은 치유의 은사가 복수인 것은(치유의 “은사들”을 가리킴) 다른 병을 치유하는 은사도 다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치유의 은사로 자주 쓰임 받은 사람들은 때때로 자신의 사역 속에서 특정한 병을 다른 병보다 더 자주 치유했음을 발견한다. 예를 들어, 복음 전도자 빌립은 특별히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행 8:7)을 치유하는데 성공적인 것으로 보인다. 또한, 지난 몇 세기 동안, 어떤 복음 전도자들에게는 치유의 은사가 실명과 난청, 그리고 심장 질환과 같은 병을 고치는 데에 가장 자주 나타났다.

2) 믿음과 기적을 행하는 은사: 믿음과 기적을 행하는 은사는 매우 유사해 보일 것이다. 이 두 은사를 받은 사람은 갑자기 불가능한 일에 대한 믿음을 가지게 된다. 이 두 은사의 차이점은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믿음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자기가 기적을 경험하게 된다는 믿음을 갖게 되지만, 기적을 행하는 은사를 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을 위해 기적을 베풀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된다.

믿음의 은사를 때로는 “특별한 믿음”이라고도 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일반적인 믿음을 뛰어넘은 갑작스럽게 받은 믿음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을 들음에서 생기지만, 특별한 믿음은 성령님에 의한 갑작스러운 전이에서 생긴다. 특별한 믿음을 경험한 사람들은 그들이 생각하기에 불가능한 일들이 갑자기 가능해 보였다고 말하고 있는데, 사실, 그들은 의심 자체를 할 수가 없었음을 발견한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기적을 행하는 믿음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의 이야기는 “특별한 믿음”이 어떻게 사람으로 하여금 의심할 수 없게 만드는지를 잘 보여주는 예이다. 그들이 왕의 우상 앞에 절하기를 거부함으로 인해 불타는 풀무불에 던져질 때, 그들은 모두 특별한 믿음의 은사를 받았다. 풀무불에 던져져도 살 수 있다는 믿음은 일반적인 믿음을 초월한 것이다! 이 세 젊은이가 왕 앞에서 보여준 믿음을 살펴 보도록 하자.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신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 3:16-18, 강조 추가).

그들이 풀무불에 던져지기 전에 믿음의 은사를 받았음을 주목하라. 그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건져내실 것에 대한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엘리야가 아합 왕의 통치 시절 3년 반 동안의 기근 속에서 날마다 까마귀들이 날라온 음식을 먹고 살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특별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왕상 17:1-6). 하나님께서 새를 사용하셔서 아침저녁으로 음식을 날라오게 한다는 것을 믿는 것은 일반적인 믿음을 초월한 것이다. 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까마귀가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날라다 줄 것이라고 말씀으로 약속하신 적은 없지만, 우리는 일반적인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신다는 것을 믿을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분의 약속이기 때문이다(마 6:25-34을 보라).

기적을 행하는 믿음은 모세의 사역 속에 꽤 자주 나타났다. 모세는 애굽 홍해를 가를 때(출 14:13-31을 보라)와 애굽에 여러 재앙을 내릴 때 이 은사를 사용하였다.

예수님은 물고기 몇 마리와 떡 몇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실 때 기적을 행하는 은사를 사용하셨다(마 14:15-21을 보라).

바울이 실루기아 섬에서 사역을 방해하는 엘루마라 하는 마술사를 얼마 동안 맹인이 되게 한 것도 기적을 행하는 믿음의 예이다(행 13:4-12을 보라)

계시의 은사(The Revelation Gifts)

1). 지식의 말씀과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의 은사는 종종 과거 또는 현재의 특정 정보에 대한 갑작스럽고 초자연적인 전이로 정의된다. 모든 지식을 소유하신 하나님은 어떤 때에 사람에게 지식의 작은 부분을 나누어 주시는데 아마도 이 때문에 그것을 지식의 말씀이라고 부를 것이다. 한 단어가 문장의 단편적인 부분인 것 처럼, 지식의 말씀도 하나님의 지식의 단편적인 부분일 것이다.

지혜의 말씀은 지식의 말씀과 매우 비슷하지만, 그것은 종종 미래의 사건에 대한 갑작스럽고 초자연적인 전이로 정의된다. 지혜의 개념은 일반적으로 미래에 관한 것을 포함한다. 하지만, 이러한 정의는 다소 추측 적이다.

지식의 말씀에 관한 구약 성경의 예를 살펴보자. 엘리사가 시리아인 나병환자 나아만을 치유한 후, 나아만은 그를 치유해준 것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엘리사에게 큰 금액의 돈을 주었다. 엘리사는 그 예물을 거절하였는데 그것은 사람들이 나아만이 하나님의 은혜로 치유받은 것이 아니라 돈을 주고 샀다는 생각을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엘리사의 종 게하시는 개인적인 재물을 얻을 기회를 엿보았고 비밀리에 나아만의 의도된 돈을 받았다. 게하시가 자신의 거짓 획득은 숨겨둔 후, 엘리사 앞에 나타나며 우리는 다음 구절을 읽게 된다.

게하시야 네가 어디서 오느냐 하니 대답하되 당신의 종이 아무데도 가지 아니하였나이다 하니라 엘리사가 이르되 한 사람이 수레에서 내려 너를 맞이할 때에 내 마음이 함께 가지 아니하였느냐(왕하 5:25하-26상).

게하시의 추한 행위를 다 아시는 하나님은 그 사실을 엘리사에게 초자연적으로 드러내셨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엘리사가 지식의 말씀의 은사를 가지지 않았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즉, 그가 항상 모든 사람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만일 그런 경우였다면, 게하시가 자신의 죄를 은폐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엘리사는 하나님께서 때때로 그에게 그런 일들을 계시하실 때에만 알 수 있었다. 그 은사는 성령님의 의지대로 나타난다.

예수님은 지식의 말씀으로 사마리아 우물가의 여자에게 그녀가 다섯 남편이 있다고 말씀하셨던 것이다(요 4:17-18을 보라).

베드로가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땅을 판 돈 전부를 교회에 바쳤다고 회중들에게 거짓말한 것을 알았던 것도 이 은사로 쓰임 받은 것이다(행 5:1-11을 보라).

지혜의 말씀의 은사에 관해서, 우리는 구약의 모든 선지자를 통하여 이 은사가 자주 나타남을 볼 수 있다. 그들이 미래의 사건을 예측할 때마다 지혜의 말씀으로 한 것이다. 예수님도 꽤 자주 이 은사를 받으셨다. 그분은 예루살렘의 파괴와 그분의 십자가 처형과 그분이 재림하시기 전에 이 땅에 일어날 일들에 대해 예언하셨다(눅 17:22-36, 21:6-28을 보라).

사도 요한은 환난의 심판을 계시받을 때 이 은사로 쓰임받았다. 그는 요한 계시록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2). 영들을 분별하는 은사: 영들을 분별하는 은사는 종종 영적인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거나 분별하는 갑작스럽고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정의된다.

신자가 눈과 마음을 통해 본 비전도 영들을 분별하는 은사로 분류될 수 있다. 이 은사는 바울이 여러 가지 상황 속에서 경험한 것처럼(행 18:9-10; 22:17-21; 23:11을 보라) 신자로 하여금 천사, 마귀, 심지어 예수님 자신도 볼 수 있게 해준다.

엘리사와 그의 사환이 아람 군대에 쫓겨 도단에 갇혀있을 때, 그의 사환이 나가보니 군사와 말과 병거가 성읍을 에워쌌음을 보고 근심에 잠겼었다.

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 하고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왕하 6:16-17).

당신은 천사가 영적인 말과 영적인 병거를 타고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가? 당신은 언젠가는 천국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엘리사의 사환은 그것을 이 땅에서 볼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았다.

이 은사를 통하여, 신자는 사람을 억압하는 악령을 분별할 수 있으며 그 영이 어떤 종류의 영인지도 알아낼 수 있다.

이 은사는 영적인 영역의 일들을 볼 수 있게 할 뿐 아니라 영적인 영역을 분별할 수도 있게 한다. 예를 들어, 그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처럼, 영적 영역에서 무언가를 듣는 것을 포함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일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이 은사는 “분별의 은사”가 아니다. 이 은사를 가졌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종종 다른 사람들의 동기를 분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들의 은사는 더 정확히 말하자면 “비판의 은사이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은사”이다. 사실은, 구원받기 전에 당신은 그 “은사”를 가졌을 수 있지만, 구원받은 지금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그것으로부터 영원히 건져내고 싶어하신다.

말함의 은사(The Utterance Gifts)

1). 예언의 은사: 예언의 은사는 말하는 자가 자신의 언어로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말하는 갑작스럽고 초자연적인 능력이다. 그것은 “주님이 말씀하시기를”이라는 말로 자주 시작한다.

이 은사는 설교하거나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영감을 받은 설교와 가르침은 성령님의 기름 부음을 받았기에 예언의 요소를 포함하지만, 엄격한 의미에서 예언은 아니다. 많은 경우, 기름 부음을 받은 설교자나 교사는 그들이 계획하지 않은 말을 갑작스러운 영감에 의해 말하게 되는데 그것은 예언이 아니다. 비록 나는 그것을 예언적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말이다.

예언의 은사는 덕을 세우고 권면하고 위로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요(고전 14:3).

따라서 예언의 은사 그 자체에는 어떠한 계시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즉, 그것은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과 달리 과거, 현재, 또는 미래에 대해 아무것도 계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이전에 언급한 바와 같이, 성령의 은사는 서로 함께 작용할 수 있다. 그래서 지혜의 말씀이나 지식의 말씀은 예언을 통해 전달될 수 있다.

우리가 누군가가 집회에서 미래의 사건을 예언하는 것을 들었을 때, 예언을 들은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예언의 은사를 통해 지혜의 말씀을 들었다. 예언의 은사는 마치 사람이 “너희는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라, 나는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할 것이라”라는 성경 속의 권면을 읽는 것처럼 들려진다.

일부 사람들은 신약 성경의 예언은 “부정적인 것”은 무엇이든지 포함하지 말아야 한다고 확신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덕을 세우고 권면하고 위로하여야 한다는 특성에 맞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에게 하시려는 말씀을 제한하기 위해서 그들은 자기들이 책망을 받아 마땅한 것이라도 하나님께서 그들이 생각하기에 “긍정적인” 것만 말씀하시도록 허용하는 것은 하나님보다 자기를 더 높이는 것이다. 책망은 확실히 덕을 세우고 권면하는 범주에 속한다. 나는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향한 주님의 메시지 속에 확실히 책망의 요소가 포함되어 있음을 주목하게 된다. 우리는 그런 책망들을 버려야 할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2). 각종 방언과 통역의 은사: 각종 방언의 은사란 갑자기 초자연적으로 자신이 알 수 없는 언어로 말하는 능력을 말한다. 이 은사에는 일반적으로 통역의 은사가 동반되는데 통역의 은사란 알 수 없는 언어로 말한 것을 갑자기 통역할 수 있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말한다.

이 은사는 방언의 번역이 아닌 방언의 해석이라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방언의 메시지를 단어마다 번역하기를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그 이유 때문에 짧은 “방언의 메시지”와 긴 통역이 있을 수 있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통역의 은사는 예언과 매우 비슷하다. 왜냐하면, 그것 자체도 계시를 포함하지 않으며 일반적으로 덕을 세우고, 권면하고, 위로하는데 사용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고린도전서 14장 5절에 따라 방언에 통역의 은사를 더하면 예언과 같다고 말할 수 있다.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내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성경에는 능력의 은사를 어떻게 사용할지에 대한 가르침이 없으며 계시의 은사를 사용하는 것에 대한 가르침도 매우 적으나 말함의 은사에 대한 가르침은 매우 많다. 왜냐하면, 말함의 은사에 있어서 고린도 교회에 약간의 혼동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 문제에 대해서 거의 고린도전서14장 전부를 할애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방언의 적절한 사용에 관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우리가 성령 세례에 대한 장에서 배운 것처럼, 성령 세례를 받은 모든 신자는 원하면 언제든지 방언으로 기도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고린도 교인들은 교회 예배 중에 방언을 많이 하고 있었는데 대부분은 질서가 없었다.

방언의 다른 용도(The Different Uses of Other Tongues)

우리가 알 수 없는 방언에 대한 공용 사용과 개인 사용 사이의 차이를 이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비록 성령 세례를 받은 모든 신자가 언제든지 방언으로 말할 수는 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대중적인 방언의 은사로 사용하시리라는 것은 의미하지 않는다. 방언의 기본 용도는 각 신자의 개인적인 신앙생활이다. 그러나 고린도인들은 함께 모여 통역이 없이 동시에 방언을 말하였다. 물론, 아무도 그것을 통하여 도움을 받거나 덕을 세우지 못했다(고전 14:6-12, 16-19, 23, 26-28을 보라).

방언의 공용 사용과 개인 사용을 구별하는 방법 중 하나는 개인 사용을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으로, 공용 사용을 방언으로 말하는 것으로 분류하는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두 가지 사용에 대해 모두 언급하고 있다. 차이점이 무엇일까?

우리가 방언으로 기도할 때,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다(고전 14:2, 14을 보라). 그러나 누군가가 각종 방언의 은사를 갑자기 받았을 때,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교회를 향한 메시지이며 일단 통역이 주어지면 이해할 수 있게 된다(고전 14:5을 보라).

성경에 따르면, 우리가 원하면 방언으로 기도할 수 있지만(고전 14:15을 보라), 각종 방언의 은사는 성령님의 뜻대로 주신다(고전 12:11을 보라).

각종 방언의 은사에는 일반적으로 통역의 은사가 동반된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하는 방언 기도는 일반적으로 통역되지 않는다. 바울은 그가 방언으로 기도할 때에는 그의 마음이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말했다(고전 14:14).

한 개인이 방언으로 기도할 때에는 단지 만이 덕을 세우게 된다(고전 14:4을 보라). 그러나 각종 방언의 은사가 통역과 동반하여 나타날 때에는 전체 회중이 덕을 세우게 된다(고전 14:4후-5을 보라).

모든 신자는 주님과의 일상적인 교제의 일환으로 매일 방언으로 기도해야 한다. 방언기도에 대한 놀라운 것들 중 하나는 그것이 당신이 마음을 사용할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 당신의 마음이 직장이나 다른 것들에 점유되어 있을 때에도 방언으로 기도 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바울이 고린도인들에게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전 14:18, 강조 추가)라고 말했다. 그가 방언을 말하는데 보낸 시간이 전체 고린도 교회를 능가했음이 틀림없다!

바울은 또한 우리가 방언으로 기도할 때, 종종 “주님을 축복하게 된다”(고전 14:16-17)라고 썼다. 내가 방언으로 기도할 때 현장에 있던 다른 사람이 내가 “기도하는 언어”를 이해했던 적이 세 번 있었다. 나는 세 번 모두 일본어로 말하고 있었다. 한 번은 내가 일본어로 주님께 “당신은 아주 좋습니다”라고 말했고 다른 한 번은 “매우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 또 다른 한 번은 “어서 오십시오, 어서 오십시오, 내가 기다리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놀랍지 않은가? 나는 일본어를 배운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지만 적어도 세 번이나 일본어로 “주님을 축복하였다!”

방언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Paul’s Instructions for Speaking in Tongues)

고린도 교회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은 매우 구체적이었다. 어떠한 모임에서든지 대중적으로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허용된 사람의 인수는 두 명 또는 세 명에 국한되었으며 방언을 할 때 모두 한 번에 말하지 말고 차례를 따라 기다렸다가 말해야 한다(고전 14:27을 보라).

바울은 단지 세 “방언의 메시지”만 허용된다고 의미한 것이 아니라 세 명 이상의 사람이 특정 예배에서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음을 의미하였다. 일부 사람들은 각종 방언의 은사로 자주 쓰임 받는 사람이 세 명 이상이라면, 그 중의 누구라도 성령님께 순복하여 성령님이 교회에 나타내고자 하는 “방언의 메시지”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바울의 가르침은 실제로 특정 모임에 나타날 수 있는 방언의 메시지를 제한함으로써 성령님을 제한하게 된다. 만일 성령님이 한 모임에서 세 명 이상에게 각종 방언의 은사를 주시지 않는다면, 바울이 이런 가르침을 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방언의 통역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람들은 회중 중에 아마도 한 명 이상은 성령님께 순복하고 “방언의 메시지”를 통역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런 사람들은 통역의 은사로 자주 쓰임 받기 때문에 “통역하는 자”로 간주된다(고전 14:28을 보라).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바울이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고전 14:27)라고 가르칠 때 아마도 그런 의미에서였을 것이다. 아마도 그는 단지 한 사람만이 모든 방언의 메시지를 통역해야 한다고 말한 것이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는 같은 메시지에 대해 “경쟁적인 통역”을 하는 것에 대해 경고한 것이다. 만일 한 통역하는 자가 하나의 방언의 메시지를 해석했으면, 다른 통역하는 자는 자기가 더 나은 통역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도 같은 메시지를 통역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교회 모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적절하고 질서 있게” 진행되어야 하며 동시적이고 혼란스럽고, 심지어 경쟁적인 발언으로 뒤죽박죽이 되어서는 안 된다. 또한, 신자들은 바울이 쓴 것처럼, 그들의 모임에 함께 있을 수 있는 모든 불신자들에 대해 민감해야 한다.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고전 14:23).

그것은 정확히 고린도 교회의 문제점이었다 – 사람마다 동시에 방언을 하였으며 거기에는 종종 어떠한 통역도 없었다.

계시의 은사에 관한 몇 가지 지침(Some Instruction Concerning Revelation Gifts)

바울은 선지자를 통해 나타나는 “계시의 은사”에 관해 몇 가지 지침을 주었다.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 만일 곁에 앉아 있는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으면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고전 14:29-33).

고린도 교회의 지체 중에 통역의 은사로 자주 쓰임 받는 “통역하는 자”들이 분명히 있듯이, 거기에는 예언과 계시의 은사로 자주 쓰임 받는 “선지자”로 여겨지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은 구약 성경의 선지자거나 신약 성경의 아가보(행 11:28; 21:10을 보라)와 같은 선지자와 같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들의 사역은 지역 교회의 지체들에게 국한되었을 것이다.

비록 교회 모임에 이 같은 선지자가 세 명 이상 있을 수 있지만, 바울은 예언 사역을 하는 인수를 “둘이나 셋”으로 제한하였다. 이것은 다시 한 번 성령님이 모임에서 성령의 은사를 주실 때, 한 명 이상의 사람이 순복함으로써 그런 은사들을 받을 수 있음을 암시한다. 만약 그렇다면, 바울의 지침은 어떤 신자들로 하여금 성령의 은사를 사용하지 못하게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얼마나 많은 선지자가 말할 수 있는지를 제한했기 때문이다.

만일 모임에 세 명 이상의 선지자가 있었다면, 다른 사람들은 비록 말하는 것으로부터 억제당했지만, 말해지는 내용을 분별함으로 도울 수 있었다. 이것은 또한 그들이 성령님의 말씀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나타내며 어쩌면 그들이 다른 선지자를 통해 나타나는 예언의 은사에 쓰임을 받도록 성령님께 순복했음을 암시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성숙한 신자가 할 수 있듯이, 단지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이미 보여주신 계시와 맞는지를 확인하는 것과 같은 일반적인 방법으로 예언과 계시를 분별할 수 있다.

바울은 이러한 선지자들이 차례대로 모두 예언할 수 있으며(고전 14:31을 보라), “예언하는 자들의 영은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는다”(고전 14:32)라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각 선지자가 성령님으로부터 회중들과 함께 나눠야 할 예언과 계시를 받았을 때에도 다른 선지자를 방해하지 않도록 자신을 억제할 수 있음을 나타낸다. 이것은 성령님이 모임 중에 있는 여러 선지자에게 동시에 은사를 주실 수 있으며 각 선지자가 이런 계시거나 예언을 지체들과 나눌 때에는 자신을 제어할 능력이 있으며 또 그렇게 해야 함을 보여준다.

이것은 말하는 은사가 어느 신자를 통해 나타나든지에 관하여도 마찬가지다. 만일 한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방언이나 예언의 메시지를 받았다면, 그는 모임에서 말하기 적절한 때까지 기다릴 수 있다. 다른 사람의 예언이나 가르침을 방해하면서 자신의 예언을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바울이 “너희는 다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고전 14:31)라고 주장할 때, 그는 예언을 받은 선지자의 맥락에서 말한 것임을 기억하라. 일부 사람들은 불행하게도 문맥을 무시하고 바울의 말이 모든 신자는 신자들의 모든 모임에서 다 예언할 수 있다는 뜻이라고 말한다. 예언의 은사는 성령님의 뜻을 따라 주어진다.

오늘날, 교회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성령님의 도우심과 능력과 임재와 은사가 필요하다. 바울은 고린도 신자들에게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전 14:1)라고 가르쳤다. 이것은 우리의 사모하는 정도가 성령의 은사를 받는 것과 연관이 있음을 나타낸다. 그렇지 않으면 바울은 이러한 가르침을 주지 않았을 것이다. 제자 삼는 사역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분께 쓰임 받기를 사모하며, 진심으로 영적인 은사를 사모할 것이며 그들의 제자들도 똑같이 하라고 가르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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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th Korean » 성령의 은사(The Gifts of the Spirit)

신유(Divine Healing)

제 15 장 (Chapter Fifteen)

비록 신유의 주제가 다소 논란이 있지만, 성경은 이 주제에 대하여 매우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 사실, 사복음서의 기록 중 십 분의 일은 예수님의 치유 사역에 관한 것이다. 구약 성경, 사복음서, 신약 서신 모두에 신유에 대한 약속이 있다. 병든 사람은 믿음 위에 세워진 말씀 속에서 큰 격려를 받을 수 있다.

전 세계의 교회들에 대한 나의 관찰에 의하면, 헌신적인 신자(진정한 제자)가 많은 교회일수록 신유가 보편적으로 일어나고, 교회가 미지근하고 순전하지 않을수록 신유가 드물게 일어난다.[1] 이런 일이 우리를 놀라게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믿는 자들에게는 그들이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아지는 표적이 따른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막 16:18을 보라). 만일 우리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믿는 자들에게 따르는 표적으로 교회를 판단한다면, 우리는 많은 교회가 불신자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될 것이다.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막 16:15-18).

그리스도의 완전한 사역을 본받는 제자 삼는 사역자는 자신이 영향 줄 수 있는 영역에서 신유의 사역을 촉진하기 위해 자신의 은사를 당연히 사용할 것이다. 그는 신유가 적어도 두 가지 방면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첫째로, 복음서 또는 사도행전을 읽어본 아이들은 다 이해할 수 있듯이(그러나 높은 학위를 가지고 있는 많은 사역자들은 이해할 수 없는 듯 보인다) 치유의 기적은 복음을 위한 훌륭한 광고이다. 둘째로, 건강한 제자들은 사역함에 있어서 개인적인 질병으로 인한 방애를 받지 않는다.

제자 삼는 사역자는 또한, 치유받기를 원하지만, 치유 받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그리스도 안의 지체들에 대해 민감해야 한다. 그들은 종종 부드러운 가르침과 온유한 격려가 필요한데 특히 그들이 어떤 치유의 메시지에 대해서도 반대한다면 말이다. 제자 삼는 사역자는 선택에 직면해 있다. 그는 신유의 주제에 대해 가르치는 것을 피함으로 아무도 거스르지 않거나 아무도 치유받지 못하게 할 수 있다. 또는 그 주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르침으로 하여 사람들이 치유를 경험하게 하면서 동시에 다른 사람들을 거스르는 위험을 감수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나는 두 번째를 선택할 것이며 그것이 예수님의 본을 따르는 것이라고 믿는다.

십자가에서의 치유(Healing on the Cross)

신유에 대해 연구하기 가장 좋은 곳은 보편적으로 메시아에 대한 예언으로 간주되는 이사야서 53장이다. 성령님을 통하여, 이사야는 예수님의 희생적인 죽음과 그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실 일에 대하여 생생하게 묘사하였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화평을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4-6).

성령님의 감동으로, 이사야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슬픔질고를 담당하셨다고 선언하였다. 히브리어 본문의 뜻을 더 잘 번역하면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아픔을 담당하신 것이 된다. 많은 신뢰할 수 있는 성경 번역본에서도 이 부분을 주석으로 나타내고 있다.

이사야서 53:4에서 질고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choli 란 단어이다. 이 단어는 신명기 7:15; 28:61; 열왕기상 17:17; 열왕기하 1:2; 8:8과 역대하 16:12; 21:15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상의 모든 경우에서 그 단어는 으로 번역되었다.

슬픔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makob는 욥기 14:22과 33:19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두 경우에서도 그 단어는 아픔으로 번역되었다.

이 때문에, 이사야서 53:4을 “그는 실로 우리의 아픔을 지고 우리의 을 당하였거늘”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이 사실은 마태가 자신이 쓴 복음서에서 직접 인용한 이사야서 53:4을 통해서도 보증된다.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마 8:17).

이러한 사실에서 벗어나지 못하자, 일부 사람은 이사야가 우리의 “영적 질병”을 언급한 것이라고 우리를 설득하려 한다. 그러나 마태는 자신이 인용한 이사야서 53:4은 이사야가 말 그대로 육체적인 질병을 언급하였음을 의심의 여지가 없이 보여준다. 그 성경 말씀을 읽어보도록 하자.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 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마 8:16-17, 강조 추가).

마태는 예수님이 행하신 육체적인 병의 치유가 이사야서 53장 4절 말씀의 성취라고 분명하게 주장하였다. 따라서 이사야서 53:4이 그리스도가 우리의 육체적인 연약함과 병을 짊어지셨다는 증거임이 틀림없다.[2] 예수님이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셨다는 성경 말씀처럼(사 53:11을 보라), 그분은 또한, 우리의 육체적 인 연약함과 병을 담당하셨다. 그것은 아픈 사람이 마땅히 기뻐해야 할 소식이다. 예수님은 속죄의 희생을 통하여 우리에게 구원과 치유를 주셨다.

제기된 한 가지 질문(A Question Asked)

그러나 일부 사람은 그것이 진실이라면 왜 모든 사람이 다 치유받지 못하는가 하고 묻는다. 그 질문은 “왜 모든 사람이 다 거듭나지 못하는가?”라는 질문으로 가장 잘 대답 될 수 있다. 모든 사람이 다 거듭나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복음을 들어보지 못했거나 들었지만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사람마다 자기의 믿음에 합당한 치유를 받게 된다. 많은 사람은 아직도 예수님께서 그들의 병을 담당하신다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으며, 어떤 사람은 들어보았지만 거절했다.

병에 대한 하나님 아버지의 태도는 그분의 사랑하시는 아들의 사역을 통하여 분명하게 드러났다. 예수님은 자신에 대하여 이렇게 증거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요 5:19).

우리는 히브리서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아버지)의 본체의 형상”(히 1:3)이심을 읽게 된다. 따라서, 병을 향한 예수님의 태도가 아버지께서 병을 향한 태도와 동일하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예수님의 태도는 무엇인가? 예수님은 누구라도 자신한테 나아와서 치유를 간구한 사람은 한 번도 외면하신 적이 없다. 그분은 치유받기를 갈망하는 병든 사람에게 한 번도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없다. “안돼, 당신이 치유받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므로 당신은 계속 병을 앓아야 한다.” 예수님은 그분한테 온 병든 사람들을 항상 치유하여 주셨으며, 그들이 일단 치유되면 그들에게 그들의 믿음이 그들을 치유하였다고 말씀해 주셨다. 또한, 성경은 하나님은 절대 변하시지 않으며(말 3:6을 보라),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히 13:8)고 선언한다.

선포된 치유(Healing Proclaimed)

불행하게도, 오늘날 구원은 단지 죄의 용서로만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구원”으로 가장 자주 번역되는 헬라어는 용서뿐 아니라 완전한 해방과 치유의 의미도 나타낸다.[3]이러한 의미에서의 구원을 경험한 성경 속의 한 인물을 생각해 보자. 그는 자신의 도시에서 바울이 전파한 복음을 들었을 때 믿음으로 치유되었다.

그들이 알고 도망하여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와 그 근방으로 가서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앉아 있는데 나면서 걷지 못하게 되어 걸어본 적이 없는 자라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큰 소리로 이르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일어나 걷는지라(행 14:6-10).

바울은 “복음”을 전파하였지만, 그 사람은 육체적인 치유를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하는 무언가를 들었다. 최소한, 그는 바울이 예수님의 치유사역에 관해 말하는 것을 들었을 것이며, 예수님께 치유받게 해달라고 믿음으로 간구한 사람들이 어떻게 치유받았는지도 들었을 것이다. 아마도 바울도 예수님이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다는 이사야의 예언을 말했을 수 있다. 우리가 모르지만, “믿음은 들음에서 나기”(롬 10:17) 때문에, 그 병자가 마음속으로부터 치유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한 무언가를 들었음이 틀림없다. 바울이 한 말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그가 계속 마비상태에 있는 것을 원하시지 않음을 확신하게 하였다.

바울 자신도 하나님께서 그 사람이 치유되기를 원하신다고 믿었음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말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치유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할 수가 없으며, 바울도 그 사람에게 일어나라고 말했을리가 없다. 만일 바울이 많은 현대 설교자들이 하는 말을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만일 그가 “모든 사람이 치유받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고 설교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 사람은 치유받을 만한 믿음을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이것이 왜 오늘날 많은 사람이 치유받지 못하는지를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사람들에게 치유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줘야 할 설교자들이 정작 그들의 믿음을 파괴하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이 사람은 자신의 믿음으로 치유되었음을 주목하라. 비록 그가 치유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에도 불구하고, 만일 그가 믿지 않았다면 여전히 걸을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그날 거기에 있던 무리 중에 그 사람 외에 아픈 사람들이 분명히 있었을 터이나, 그들 중 누구도 치유받았다는 기록이 없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들은 왜 치유받지 못했을까? 그날 무리 속에 있던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 중 많은 사람은 같은 이유 때문에 거듭나지 못했다. 그것은 그들이 바울의 메시지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사람들이 치유받지 못했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다 치유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된다. 그것은 어떤 사람들이 거듭나지 못했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거듭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결론짓는 것과 같다. 구원받으려는 사람마다 반드시 복음을 믿어야 하며, 치유받으려는 사람마다 반드시 믿음을 가져야 한다.

사람마다 치유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진일보 증거하다(Further Proof of God’s Will to Heal)

구약에서, 육체적인 치유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에 포함되어 있다. 출애굽한 후 며칠 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이 약속을 하셨다.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출 15:26).

정직한 사람이라면 사람들의 순종을 조건으로 하는 치유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에 포함되었음을 인정할 것이다. (덧붙여, 바울은 고린도전서 11:27-31에서 신약에서의 육체적인 건강도 우리의 순종에 달려 있음을 분명하게 밝혔다.)

하나님은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약속하셨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 그리하면 여호와가 너희의 양식과 물에 복을 내리고 너희 중에서 병을 제하리니 네 나라에 낙태하는 자가 없고 임신하지 못하는 자가 없을 것이라 내가 너의 날 수를 채우리라(출 23:25-26, 강조 추가).

네가 복을 받음이 만민보다 훨씬 더하여 너희 중의 남녀와 너희의 짐승의 암수에 생육하지 못함이 없을 것이며 여호와께서 또 모든 질병을 네게서 멀리 하사 너희가 아는 애굽의 악질에 걸리지 않게 하시고 너를 미워하는 모든 자에게 걸리게 하실 것이라(신 7:14-15, 강조 추가).

사람은 만일 육체적인 치유가 구약에 포함되었다면, 또한, 성경에서 주장한 것처럼 신약이 구약보다 더 좋은 약속이라면, 왜 신약에는 육체적인 치유가 포함되지 않았느냐고 물을 수 있다.

그러나 이제 그는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그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시라(히 8:6, 강조 추가).

더 진일보된 증거(Yet Further Proof)

성경에는 모든 사람이 치유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명백히 보여주는 말씀들이 많이 있다. 그중에서 가장 좋은 세 가지를 나열하겠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시 103:1-3, 강조 추가).

어느 그리스도인이 우리의 모든 죄악을 용서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다윗의 선언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은 마찬가지로 우리의 모든 병을 고치시기를 원하신다고 믿었다.

내 아들아 내 말에 주의하며 내가 말하는 것에 네 귀를 기울이라 그것을 네 눈에서 떠나게 하지 말며 네 마음속에 지키라 그것은 얻는 자에게 생명이 되며 그의 온 육체의 건강이 됨이니라(잠 4:20-22, 강조 추가).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약 5:14-15, 강조 추가).

이 마지막 약속은 모든 병든 자들에게 한 것임을 주목하라. 그리고 장로나 기름 때문에 치유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기도”로 치유받음을 주목하라.

이 믿음은 장로의 믿음일까 아니면 병든 자의 믿음일까? 이 믿음은 장로와 병든 자 모두의 믿음이다. 병든 자가 교회의 장로를 청함으로써 그의 믿음을 적어도 부분적으로 표현하였다. 병든 자의 불신은 장로의 기도를 폐할 수도 있다. 야고보가 쓴 이 기도는 예수님이 마태복음 18:19에서 언급하신 “합심의 기도”의 좋은 예이다. 두 당사자는 이 기도를 함에 있어서 반드시 “합심”하여야 한다. 만일 한 사람은 믿고 다른 사람은 믿지 않는다면, 그들은 합심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또한, 성경의 여러 말씀에서 병의 이유를 사탄에게 돌린 것을 알고 있다(욥 2:7; 눅 13:16; 행 10:38; 고전 5:5을 보라).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자녀들의 몸에 사탄이 일하는 것을 막아주실 거라고 충분히 믿을 수 있다. 우리의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이 세상의 어떤 아버지보다도 그분의 자녀를 더 사랑하신다(마 7:11을 보라). 그리고 나는 아직까지 자신의 자녀가 병들기를 원하는 아버지를 만난 적이 없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사역하실 동안, 행하신 치유의 역사와 사도행전에 기록된 모든 치유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건강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믿도록 격려해준다. 예수님은 자주 그분께 치유받기를 구했던 사람들을 치유해 주셨으며, 그들의 믿음이 치유의 기적을 만들어냈다고 칭찬해주셨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특정한 사람만 골라서 치유해 주시는 것이 아님을 증명한다. 어떤 병든 사람이라도 믿음으로 그분께 나아오면 치유받을 수 있다. 예수님은 그들 모두를 치유하기를 원하시나 그들에게 믿음을 가질 것을 요구하신다.

몇 가지 보편적인 반론에 대한 답변(Answers to Some Common Objections)

아마도 이 모든 것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반대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것이 아닌 사람들의 경험에 근거한 것일 것이다. 그런 반대 입장을 가진 사람은 보통 이런 식으로 말한다. “나는 암이 치유받기 위해 기도했던 훌륭한 그리스도인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죽었다. 이 사실은 모든 사람이 치유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증명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다른 것으로 하나님의 뜻을 결정하려 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만일 당신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이스라엘 사람들이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이 바로 요단 강 건너편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광야에서 40년 동안 헤매는 것을 보았다면, 당신은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성경을 알고 있다면, 결코 그렇지 않음을 알 것이다.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은 확실히 하나님의 뜻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믿지 않음으로 능히 들어가지 못했다(히 3:19을 보라).

지금 지옥에 있는 모든 사람은 어떨까?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천국에 가는 것이었으나 그들은 회개하고 주 예수님을 믿는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때문에, 우리는 아픈 사람을 보고 치유에 관한 하나님의 뜻을 결정할 수 없다. 한 그리스도인의 치유를 위한 기도가 응답받지 못했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치유받기를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만일 그 그리스도인이 모든 조건을 만족시켰는데도 치유받지 못했다면 하나님은 거짓말쟁이이다. 우리가 치유받지 못하고 치유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변명하며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은 광야에서 죽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우리는 자신의 자부심을 내려놓고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내가 믿음에 대해 이전 장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많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치유에 대한 기도를 믿음을 파괴하는 “만일 그것이 당신의 뜻이라면”이란 문구로 부당하게 마무리한다. 이것은 그들이 믿음으로 기도하고 있지 않음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확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앞서 우리가 보았 둣이, 치유에 관한 하나님의 뜻은 매우 명백하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께서 당신을 치유하고 싶어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만일 그것이 당신이 뜻이라면”이란 말을 치유의 기도에 추가할 이유가 없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주님께 “주님, 나는 당신께서 저를 치유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을 압니다. 하지만, 만일 당신이 거짓말을 하셨을지도 모르니까, 오직 그것이 당신의 뜻일 때에만 저를 치유하여 주십시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하나님은 불순종하는 신자들을 훈계하시기 위해 그들에게 질병을 허락하시며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그들이 죽음의 변두리까지 가도록 허락하실 수도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신자들은 치유받기 전에 회개하는 것이 분명히 필요하다(고전 11:27-32을 보라). 또한, 자신의 몸을 돌보는 것을 홀시함으로 병든 신자들도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건강한 식단을 유지하기 위해 적당히 먹고, 정기적으로 운동하고, 필요한 휴식을 취할 만큼 충분히 지혜로워야 한다.

두 번째 보편적인 반론(A Second Common Objection)

사람은 종종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가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치유해주시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바울의 가시가 질병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신학 이론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그의 가시가 사탄의 사자라고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했기 때문이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고후 12:7-9, 강조 추가).

사자라고 번역된 그리스 단어 “aggelos”는 신약 성경에서 160여 곳에서 천사로 번역되었다. 바울의 육체의 가시는 사탄이 바울을 타격하기 위해 보낸 천사이지 질병이 아니다.

또한, 바울이 치유받기 위해 기도를 했다는 언급이 없으며 하나님께서 그를 치유하기를 거부하셨다는 표시가 없었음을 주목하라. 세 가지 경우에, 바울은 단지 사탄의 사자를 제거해주시기를 하나님께 간구했지만, 하나님은 그분의 은혜가 족하다고 말씀하셨다.

그럼 누가 바울에게 이 가시를 주었을까? 어떤 사람은 그 가시가 “사탄의 사자”라고 불려지기에 그것을 준 것도 사탄이라고 믿는다. 다른 사람은 가시를 주신 분이 하나님이라고 믿는다. 왜냐하면, 바울은 그 가시로 인해 교만해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바울 자신도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말했다.

킹 제임스 번역본은 이 구절을 조금 다르게 번역했다. “너무 자만하지 않게”를 “내가 자고하지 않도록”으로 번역하였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차이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높아지는 것을 반대하시지 않는다. 사실 그분은 우리가 자신을 낮추면 우리를 높여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때문에 하나님은 높여주시는 분이시지만, 사탄은 바울이 어디로 가든지 교란시키는 사자를 보내어 문제를 일으킴으로써 그가 높임을 받는 것을 막았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상황을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그분의 능력은 바울의 약한 데서 더 잘 나타나기 때문이다.

어쨌든, 병든 바울을 하나님이 치유해주기를 거부하셨다고 말하는 것은 성경에 대한 왜곡이다. 육체의 가시에 대한 성경 말씀에서, 바울은 어떤 질병도 언급한 적이 없으며 하나님이 그를 치유해주시지 않았다는 언급도 한 적이 없다. 만일 정직한 사람이 바울이 고린도후서 11:23-30에 열거한 모든 시련을 읽어보면, 그 가운데 질병에 관한 언급은 단 한 번도 없음을 발견할 것이다.

같은 주제에 대한 자세한 설명(An Elaboration on the Same Theme)

어떤 사람은 바울의 가시에 대한 나의 설명에 대해 “그러나 바울 자신이 처음으로 갈라디아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육체가 약하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가 육체의 가시를 말한 것이 아닌가?”라고 말하면서 반대한다.

아래의 말씀은 바울이 갈라디아인들에게 쓴 편지의 실제 내용이다.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갈 4:13-14).

갈라디아서 4:13에서 약함으로 번역된 헬라어는asthenia 이다. 이 단어의 문자적인 의미는 “약함”이다. 약함은 병 때문일 도 있지만 다른 이유 때문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바울은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다”(고전 1:25, 강조 추가)고 썼다. 이 구절에서 약하심으로 번역된 단어도asthenia 이다. 번역가가 “하나님의 병이 사람보다 강하다”고 번역했다면 말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마 26:41과 벧전 3:7에서 asthenia 는 모두 약함으로 번역되었으며 으로 번역될 수 없다).

사도행전의 기록처럼, 바울이 갈라디아를 처음 방문했을 때, 그가 병들었다는 언급은 없었다. 오히려 사람들이 그를 돌로 치고 죽은 줄로 알고 내버려 두었으며 그는 죽음에서 부활했거나 기적적으로 치유받았다는 언급은 있다(행 14:5-7, 19-20을 보라). 돌로 친 후 죽은 줄로 알고 내쳐둔 바울의 몸은 분명히 온통 상처로 뒤덮인 끔찍한 상태이었을 것이다.

바울이 갈라디아에서 병들지 않았다는 것은 그의 청중들에 대한 시험이었다. 오히려, 그의 몸이 약해진 것은 돌에 맞았기 때문이다.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쓸 때, 갈라디아에서 받았던 박해로 인한 몸의 상처를 여전히 지니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의 서신을 이렇게 마무리하였기 때문이다.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갈 6:17).

또 다른 반론: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고통 받는다”(Another Objection: “I’m Suffering for the Glory of God”)

이 반론은 나사로가 부활한 이야기 중의 한 말씀을 가지고 그들이 병을 앓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의해 제기된다. 예수님은 나사로에 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요 11:4).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나사로의 병의 결과 때문에 영광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나사로가 치유받고 죽음에서 일어나므로 인해 영광 받으신다고 하셨다. 즉, 병의 최종 결과는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병 때문에 영광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치유 때문에 영광 받으신다(마 9:8; 15:31; 눅 7:16; 13:13; 17:15을 보라. 거기서 사람은 치유받음으로 인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또 다른 반론: “바울은 그가 밀레도에 드로비모를 병든채로 남겨두었다고 했다” (Another Objection: “Paul Said He Left Trophimus Sick at Miletum”)

내가 이 부분을 쓰고 있을 당시 마침 독일의 한 도시에 있었다. 지난주 내가 미국의 고향을 떠날 때에, 많은 아픈 사람들을 남겨뒀다. 나는 병원에 수많은 병든 자들을 남겨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 모두가 치유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은 아니다. 바울이 방문한 도시에 병든 사람 한 명을 두고 떠났다고 해서 그 사람이 치유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증명할 수 없다. 바울은 또한, 많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두고 떠났는데 그 사람은 어떠한가?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증명할 수 있는가? 절대 할 수 없다.

또 다른 반론: “나는 욥과 같다!”(Another Objection: I’m Just Like Job!”)

 

주님을 찬양하라! 당신이 욥기를 끝까지 읽은 적이 있다면, 당신은 그가 치유받았음을 알고 있을 것이다. 욥이 병든 상태로 있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며, 당신이 병든 상태로 있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욥의 이야기는 치유가 하나님의 뜻임을 재확인시켜 준다.

또 다른 반론: 바울이 디모데의 위장에 대해 한 조언(Another Objection: Paul’s Advice to Timothy About His Stomach)

우리는 바울이 디모데에게 위장과 자주 나는 병을 위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고 말한 것을 알고 있다(딤전 5:23을 보라).

사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물을 마시는 것을 중지하고 위장과 자주 나는 병을 위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고 말했다. 이것은 물에 뭔가 문제가 있음을 나타내는 것 같다. 분명한 것은, 만일 당신이 오염 된 물을 마셨다면, 당신은 그 물을 마시기를 중지하고 다른 뭔가를 마시기 시작 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아마 디모데와 같은 위장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또 다른 반론: “예수님은 단지 그분의 신성을 증명하기 위해 치유하셨다”(Another Objection: “Jesus Only Healed to Prove His Deity.”)

어떤 사람은 우리가 예수님이 치유하신 유일한 이유는 그분의 신성을 증명하기 위함이라고 믿기를 원한다. 지금은 그분의 신성이 이미 확립되었기에, 그분은 더는 치유하시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예수님의 기적이 그분의 신성을 입증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이유만으로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 사람들을 치유하신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치유 받은 사람들에게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여러 번 당부하셨다(마 8:4; 9:6, 30; 12:13-16; 막 5:43; 7:36; 8:26을 보라). 만일 예수님이 사람들을 치유한 목적이 단지 그분의 신성을 증명하기 위함이라면, 그분은 치유받은 사람들이 모든 사람에게 그분이 행하신 일을 말하도록 했을 것이다.

예수님이 치유하신 동기는 무엇일까? 성경은 예수님이 그들을 치유하신 것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이라고 여러 번 말씀한다(마 9:35-36; 14:14; 20:34; 막 1:41; 5:19; 눅 7:13을 보라). 예수님이 치유하신 이유는 그분께서 사람을 사랑하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이후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적어졌는가? 그분의 사랑이 적어졌는가? 절대 아니다!

또 다른 반론: “하나님은 모종 이유 때문에 내가 병들기를 원하신다”(Another Objection: “God Wants Me to be Sick for Some Reason.”)

그것은 우리가 고려했던 모든 성경 말씀에 비추어 보았을 때 불가능하다. 만일 당신이 지속적으로 불순종한다면, 하나님은 당신을 회개로 이끌기 위해 당신의 병을 허용하실 수는 있다. 그러나 당신이 병든 상태로 있는 것이 여전히 하나님의 뜻은 아니다. 그분은 당신이 회개하고 치유받기를 원하신다.

또한, 만일 하나님이 당신을 병들게 하시고자 한다면, 왜 당신은 의사에게 가서 약을 복용하고 치유받기를 원하고 있는가? 당신은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려고 시도하려는가?

마지막 반론: “우리가 질병의 고통이 없이 어떻게 죽을 수 있겠는가?” (A Final Objection: “If We Never Suffer Disease, How Will We Die?”)

우리는 성경이 우리의 육체적인 몸은 부패해진다고 가르치고 있음을 알고 있다(고후 4:16을 보라). 우리가 머리카락이 희어지고 몸이 늙어가는 가는 것을 막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결국, 우리의 시각과 청각은 우리가 젊었을 때처럼 좋지 못하게 된다. 우리는 젊었을 때처럼 빨리 달리지 못하고 우리의 심장도 튼튼하지 못하다. 우리는 천천히 낡아가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병으로 죽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몸은 완전히 낡아질 수 있으며, 그때가 되어 하나님이 천국의 본향으로 우리를 부르시면 우리의 영은 우리의 몸을 떠나게 된다. 많은 신자들이 그렇게 죽음을 맞이한다. 왜 당신이라고 안 되겠는가?

 


[1]북미의 어떤 교회에서 목사가 이 주제를 가르치기 위해서는 소위 신자들에 의해 큰 저항을 받게 되는 위험을 감수해야 할 수 있다. 예수님도 그분의 치유사역에 대한 저항과 불신을 만나셨다(막 6:1-6을 보라).

[2]일부 사람들은 불신에 매달리기 위해 어떤 것이라도 잡으려고 한다. 그들은 예수님이 가버나움에서 저녁에 사람들을 치유하심으로 이사야서 53:4의 말씀을 완전히 성취하셨다고 우리를 설득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사야는 예수님이 상하신 것이 우리의 죄악때문이라고 한 것처럼 그분은 우리의 질고를 지셨다고 말하였다(사 53:4, 5을 비교하라). 예수님은 질고를 지신 사람들의 죄악때문에 상하셨다. 따라서, 마태는 가버나움에서의 예수님의 치유 사역은 그분이 우리의 죄악과 질고를 담당하실 이사야서 53장의 메시야임을 입증한다는 것만 나타냈다.

[3]예를 들어, 예수님은 자신이 치유하신 혈루증에 걸린 여자에게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막 5:34)고 말씀하셨다. “구원하였다”고 번역된 헬라어는(sozo)는 신약성경에서 열 번 나타나는데 그 중 여덟 번은 “구원” 또는 “구원받았다”로 번역되었다. 예를 들어, 에베소서 2:5에서 같은 단어는 “구원을 받은 것”으로 번역되었다.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따라서 우리는 육체적인 치유를 뜻하는 헬라어 단어가 “구원을 받은 것”으로 가장 많이 번역됨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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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th Korean » 신유(Divine Healing)

믿음의 기초(Fundamentals of Faith)

제 14 장 (Chapter Fourteen)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에 기초를 두며, 그분은 자기를 찾는 자들과 자기를 찾지 않는 자들을 구별하여 대하신다. 우리가 이 같은 사실을 진심으로 믿는다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시작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찾기 시작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찾는 것은 (1) 하나님의 뜻을 배우고, (2) 하나님께 순종하고, (3)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세 가지 요소는 우리의 일상에서 모두 구현되어야 한다.

이 장은 우리의 믿음의 길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불행하게도, 많은 사람은 믿음을 지나치게 비성경적으로 강조하고 있는데 특히 물질적인 번영을 강조한다. 그 이유 때문에, 일부는 이 주제에 대해 전혀 접근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강에 빠져 죽었다고 하여 우리가 물을 마시는 것을 멈출 수는 없다. 우리는 균형을 잡고 성경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 성경에는 이 주제에 대한 가르침이 많이 있으며,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많은 약속을 붙잡고 믿음을 단련하기를 바란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믿음을 둔 사람의 본보기를 보여주셨으며, 그분의 제자가 그분을 본받기를 기대하셨다. 마찬가지로, 제자 삼는 사역자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본보기가 되기 위해 노력하며 그의 제자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라고 가르치고 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믿음이 없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믿음이 없이는 기도 응답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마 21:22; 약 1:5-8을 보라). 성경은 분명히 의심하는 자는 신자가 받는 축복을 박탈당한다고 가르친다. 예수님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라고 말씀하셨다.

믿음의 정의(Faith Defined)

믿음에 대한 성경적인 정의는 히브리서 11:1에서 찾을 수 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이 정의에서, 우리는 믿음의 여러 가지 특성들을 배울 수 있다. 첫째, 믿음을 가진 사람은 확신 또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희망과는 다르다. 왜냐하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기 때문이다. 희망은 항상 의심의 여지를 둔다. 희망은 항상 “아마”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나는 “나는 오늘 비가 내려 정원을 적셔주기를 바란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비가 오기를 갈망한다. 그러나 나는 비가 올지 여부에 대해서 확신이 없다. 반대로, 믿음은 항상 확실하며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다.

사람들이 믿음 또는 신념이라고 부르는 것이 종종 성경적인 정의가 아닐 때가 있다. 예를 들어, 사람은 하늘 위의 어두운 구름을 보면서 “나는 비가 올 것을 믿는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비가 올 것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다. 그들은 단지 비가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것은 성경적인 믿음이 아니다. 성경적인 믿음에는 의심의 요소가 없으며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외의 다른 결과를 용납하지 않는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다(Faith is the Conviction of Things Not Seen)

히브리서 11:1의 믿음의 정의에 의하면 믿음은 또한,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이다. 따라서, 우리가 오감을 통하여 무엇을 볼 수 있거나 감지할 수 있다면, 믿음이 필요하지 않다.

누군가가 지금 당신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가정해보자, “나는 왜 그런지 설명할 수는 없지만, 당신의 손에 책이 있음을 믿는다.” 물론, 당신은 그 사람한테 뭔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왜? 당신은 내 손에 책이 있다는 것을 믿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당신은 내가 책을 잡고 있음을 분명하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영역에 속한다. 예를 들어, 나는 이 글을 쓰면서, 내 근처에 천사가 있다고 믿는다. 실제로, 나는 확신한다. 내가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내가 천사를 본 적이 있을까? 아니. 내가 천사가 날고 있는 것을 감지했거나 들어 본 적이 있을까? 아니. 만일 내가 천사를 보거나 듣거나 감지했다면,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사실 – 천사가 내 주위에 있다는 것을 믿을 필요가 없다.

그럼, 무엇이 나로 하여금 천사의 존재에 대해 이렇게 확신할 수 있게 할까? 나의 확신은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다. 시편 34:7에서 그분은 “여호와의 천사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 치고 그들을 건지시는도다”라고 약속하셨다. 하나님을 말씀 외에는 내가 믿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보이지 않는 것들의 실상이야말로 진정한 성경적인 믿음이다. 세상 사람은 “보는 것을 믿게 된다”는 표현을 쓰지만,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그 반대가 진실이다. “믿는 것을 보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려고 할 때, 우리는 종종 우리로 하여금 의심하게 하는 상황에 놓이거나, 우리의 상황이 변화가 없으므로 하여 하나님께서 그분의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시간을 겪게 된다. 그런 경우, 우리는 단순히 의심을 물리치고, 믿음을 지키고, 마음속으로 하나님은 항상 자신의 약속을 지키신다고 확신해야 한다. 그분이 거짓말을 하시는 것은 불가능하다(딛 1:2).

우리는 어떻게 믿음을 가지는가?(How Do We Acquire Faith?)

믿음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성경적인 믿음의 유일한 근원은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 로마서 10:17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강조 추가). 하나님의 말씀은 그분의 뜻을 드러낸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 때에만 그것을 믿을 수 있다.

때문에 당신이 믿음을 가지고 싶다면, 당신은 반드시 하나님의 약속을 듣거나 또는 읽어야 한다. 믿음은 그것을 위해 기도하거나 누군가 믿음을 받도록 안수한다고 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생기며, 당신이 들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믿겠다는 결단을 반드시 내려야 한다.

믿음의 갖는 것을 넘어서, 우리의 믿음은 더욱 강해질 수 있다. 성경은 아주 작은 믿음에서부터 산을 옮기는 믿음까지 여러 가지 믿음의 단계를 언급하고 있다. 믿음은 인간의 근육처럼 먹고 훈련하는 것에 따라 더욱더 강해진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함으로써 계속하여 우리의 믿음에 영적 양식을 공급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행동하고 모든 일에 반응해야 하기 위해 믿음을 훈련시켜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문제, 걱정과 우려를 대면하는 시간도 포함한다.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들이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고, 모든 상황 속에서 그분을 신뢰하기를 원하신다(마 6:25-34; 빌 4:6-8:1; 벧전 5:7을 보라). 염려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우리가 믿음을 훈련시키는 방법 중의 하나이다.

만일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그것이 진리인 것처럼 말하고 행동할 것이다. 만일 당신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다면, 당신은 그것을 믿는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할 것이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실 것을 믿는다면, 당신의 말과 행동도 그렇게 표현될 것이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께서 당신이 건강하기를 바라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당신의 말과 행동도 그렇게 표현될 것이다. 성경에는 수많은 사람이 역경 속에서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믿음으로 행함으로써 기적을 경험한 예로 가득하다. 우리는 나중에 이 장에서 몇 가지 예를 볼 것이며, 다음 장에서는 영적 치유에 관해 고려할 것이다(기타 좋은 예들은 왕하 4:1-7; 막 5:25-34; 눅 19:1-10; 행14:7-10을 보라).

마음으로 믿는다(Faith is of the Heart)

성경적인 믿음은 우리의 이성적인 생각이 아닌 마음으로 믿는 것이다. 바울은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구원에 이른다”(롬 10:10상)고 썼으며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막 11:23, 강조 추가).

당신이 머리로는 의심하지만, 마음으로 믿는다면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받을 수 있다. 실제로, 대부분의 경우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려고 노력할 때, 육체적 감각과 사탄의 거짓말에 영향받은 우리의 지성은 의심의 공격을 받는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는 생각 대신 믿음을 굳게 잡고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흔하게 볼 수 있는 잘못된 믿음(Common Faith Mistakes)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훈련할 때, 때로는 원하는 것을 받는 데 실패하는 데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장 많이 범하는 실수 중 하나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시지 않은 것을 믿으려고 할 때 발생한다.

예를 들어, 결혼한 부부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자녀를 주실 것을 믿는 것은 성경적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들이 근거로 삼을 수 있게 그 부분에 대해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나는 의사로부터 임신할 수 없다고 들은 한 부부를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의사 대신 하나님을 믿기로 선택하고 아래의 두 약속을 붙잡았다. 그리고 오늘날 그들은 건강한 아이들의 부모가 되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 그리하면 여호와가 너희의 양식과 물에 복을 내리고 너희 중에서 병을 제하리니 네 나라에 낙태하는 자가 없고 임신하지 못하는 자가 없을 것이라 내가 너의 날 수를 채우리라(출 23:25-26).

네가 복음 받음이 만민보다 훨씬 더하여 너희 중의 남녀와 너희의 짐승의 암수에 생육하지 못함이 없을 것이며(신 7:14).

이 약속은 자녀가 없는 부부들을 격려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특별히 아들이나 딸을 낳으려는 시도는 잘못된 것이다. 성경은 우리가 우리의 미래 아이의 성별을 선택할 수 있다고 구체적으로 약속하지는 않았다. 우리의 믿음이 효과적이 되려면, 우리는 반드시 성경의 경계 내에 있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부분만 신뢰해야 한다.

하나님의 약속 하나를 보고, 우리가 그 약속에 따라 무엇을 믿을 수 있을지 결정해보자.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살전 4:16).

이 말씀을 근거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것을 확실하게 믿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께 내일 재림하시라고 기도할 수 있을까? 아니, 왜냐하면, 이 말씀과 다른 어떤 성경 말씀도 우리에게 그것을 약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예수님은 아무도 그분이 재림하실 날과 시를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

물론, 우리는 예수님이 내일 재림하시기를 바란다고 기도할 수 있지만, 우리에게는 그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우리가 믿음으로 기도할 때, 우리는 우리가 기도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확신한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약속이 있기 때문이다.

똑같은 성경 말씀을 근거로, 우리는 죽은 신자들의 몸이 예수님의 재림 시에 부활한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중 그리스도의 재림 시에 살아남은 자들도 같은 순간에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과 같이 부활의 몸을 받을 수 있을까? 혹은 그들 전에 받을 수 있을까? 아니, 왜냐하면, 이 성경 말씀은 우리에게 그 반대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난다.” 사실, 바로 다음 구절은 계속하여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살전 4:17)진다고 했다. 따라서, 예수님의 재림 시,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부활의 몸을 가장 먼저 받지 못할 가능성은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게 약속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주실 것이라고 믿으려 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받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오직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여 확인할 수 있다.

믿음은 자연의 영역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작용한다. 당신은 사전에 나한테서 약속을 받지 않은 이상, 내가 내일 점심에 당신의 집을 방문 할 것이라고 믿지 않을 것이다.

약속의 근거가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다. 그것은 어리석음일 뿐이다. 때문에 당신이 무엇을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기 전에, 먼저 자신한테 어느 성경 말씀이 내가 원하는 것을 약속하셨는지 물어보라. 당신이 약속을 받지 못한 이상, 당신은 믿음에 대한 근거가 없다.

두 번째로 흔한 잘못된 믿음(A Second Common Mistake)

많은 경우,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약속에 부가된 모든 조건은 충족시키지 않으면서 약속이 자신의 삶 속에서 성취된다고 믿으려고 한다. 예를 들어, 나는 그리스도인이 시편 37편을 인용하며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내 마음의 소원을 들어주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내가 믿는 바이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의 소원을 들어주신다고만 말씀하지 않았다. 실제로는 아래와 같이 말씀하였다.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지 말지어다 그들은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당할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 거리로 삼을지어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시 37:1-5).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의 소원을 들어주시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사실, 나는 위의 약속에서 적어도 8가지 조건을 셀 수 있다. 우리가 그 조건들을 충족하지 않는 한, 우리에게는 약속된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권리가 없으며 우리의 믿음은 기초가 없게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또한, 빌립보서 4:19의 약속을 인용하기 좋아한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그러나 그 약속에는 조건이 있는가? 분명히 있다.

당신이 빌립보서 4:19의 약속의 문맥을 살펴보면, 당신은 그 약속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약속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오히려, 그 약속은 구제함에 자신을 헌신한 사람들에게 주신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빌립보 사람들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실 것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에게 쓸것을 보내줬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님이 명하신 대로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했으며 그분께서 약속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그들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실 것이기 때문이다(마 6:33을 보라). 성경에서 하나님이 우리의 물질적인 필요를 채워주시는 것과 관련된 많은 약속들은 우리가 먼저 우리 자신을 헌신하는 것을 조건으로 한다.

우리는 우리의 돈에 관한 그분의 명령을 순종하지 않는 한,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실 것이라고 생각할 자격이 없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들이 그분께 십일조를 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저주받았다고 하셨으며, 그들이 십일조와 봉헌물을 순종적으로 드리면 축복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셨다(말 3:8-12을 보라).

성경에서 약속하신 많은 축복들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순종에 달려 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주실 것이라고 믿으려고 하기 전에, 먼저 자신에게 물어봐야 할 것이다. “나는 그 약속에 따른 모든 조건을 만족시키고 있는가?”

세 번째로 흔한 잘못된 믿음(A Third Common Mistake)

신약 성경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매번 뭔가를 위해 기도하고 간구할 때 적용되는 조건을 말씀하셨다.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 11:22-24, 강조 추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조건에 의하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 기도할 때 이미 받은 줄로 믿어야 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잘못 이해하여 그들이 기도 응답을 보았을 때에 받았다고 믿는다. 그들이 이제 받을 것이라고 믿지 이미 받았다고 믿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을 구하고 기도할 때, 응당 이미 응답을 받았다고 믿고, 응답하여 주심에 하나님께 감사드리기 시작해야 한다. 우리는 응답하심을 본 가 아닌 보기 에 이미 받은 줄로 믿어야 한다. 우리는 바울이 쓴 것처럼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야 한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

내가 이전에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가 마음으로 믿는다면, 우리의 말과 우리의 행동도 자연스럽게 우리가 믿는 것과 일치하다. 예수님은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마 12:34)라고 말씀하셨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같은 것을 반복적으로 구하는 잘못을 범하는 데, 이것은 그들이 이미 받은 줄로 믿지 않고 있음을 드러낸다. 만일 우리가 기도할 때, 이미 받은 줄로 믿는다면, 같은 것을 반복해서 간구할 필요가 없다. 같은 것을 반복적으로 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첫 번째 간구를 들으시지 않았다고 의심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같은 간구를 두 번 이상 하시지 않았는가?(Didn’t Jesus Make the Same Request More Than Once?)

물론,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세 번 연속 같은 기도를 하셨다(마 26:39-44을 보라). 그러나 그분은 하나님이 계시하신 뜻에 따라 믿음으로 기도하지 않으셨음을 명심하라. 사실, 그분은 십자가의 고난을 피할 수 있게 해달라고 세 번 기도하셨다. 그분은 자신의 간구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남을 알고 계셨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분은 세 번의 같은 기도에서 자신을 아버지의 뜻에 복종시켰다.

예수님의 그 같은 기도는 종종 모든 기도의 모범으로 잘못 사용되고 있다. 일부 사람은 우리는 응당 모든 기도는 끝마칠 때 예수님의 예를 따라, “만일 하나님의 뜻이라면”, 또는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말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아시는 것을 간구하셨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기도할 때 예수님의 예를 따르는 것은 잘못된 것이며 믿음이 없는 표현이다. 예를 들어 “주님, 나는 당신에게 내 죄를 고백하오니 만일 주님의 뜻이라면 저를 용서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은 나의 죄를 용서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닐 수도 있음을 의미하게 된다. 물론, 우리는 우리가 자기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다는 것을 성경에서 약속하셨음을 알고 있다(요일 1:9). 따라서 이러한 기도는 하나님이 계시한 뜻에 대한 믿음의 부족으로 드러난다.

예수님은 모든 기도를 다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끝마치신 것은 아니다. 그분이 그런 방식으로 기도하신 적은 그번 한 번뿐이다. 그리고 그번도 예수님께서 그로 말미암아 자신이 겪게 될 고통을 아시면서 그분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려고 하셨던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만일 우리가 어떤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계시가 없음으로 하여 그분의 뜻을 모른다면, “만일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이란 말로 기도를 마무리하는 것이 적절하다. 야고보는 이렇게 썼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이나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약 4:13-16).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해서 간구하고 약속의 모든 조건을 다 만족시킨 후에는 무엇을 해야 할까? 우리는 우리가 간구한 것이 현실이 되기까지 이미 받은 줄로 믿고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드려야 한다. 우리는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다(히 6:12). 사탄은 반드시 우리에게 의심을 심어줌으로써 우리를 패배시키려 할 것이며,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정신이 전쟁터임을 인식해야 한다. 의심의 생각이 우리의 정신을 공격할 때, 우리는 단지 그런 생각들을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생각으로 바꾸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말해야 한다. 우리가 이렇게 할 때, 사탄은 반드시 피하게 된다(약 4:7; 벧전 5:8-9을 보라).

행동으로 믿음을 보여준 실례(An Example of Faith in Action)

행동으로 믿음을 보여준 성경의 전형적인 실례 중 하나는 물 위를 걸은 베드로의 이야기이다. 그의 이야기를 읽어보고 우리가 그것으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을지 살펴보자.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시니라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제자가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마 14:22-33).

예수님의 제자가 전에도 갈리리 바다의 배에서 큰 풍랑 속에 갇혔던 적이 있었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마 8:23-27). 그 사건에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계셨으며 제자가 믿음이 없음을 꾸짖으신 후 풍랑을 꾸짖으셔서 잔잔하게 만드셨다. 예수님은 제자가 배를 타기 전에 호수의 반대편으로 건너가는 것이 그분의 뜻이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막 4:35을 보라). 그러나 풍랑이 일어났을 때, 그들은 그들이 처한 상황에 흔들리게 되었고, 어느 시점에 가서는 그들이 다 죽을 거라고 믿었다. 예수님은 그들이 적어도 두려워하지 않기를 기대하셨다.

그러나 이번에는 예수님은 그들 절로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도록 보내셨다. 그분은 분명히 성령님의 인도 하심대로 그렇게 하셨으며 하나님도 분명히 그날 저녁 바람이 거스를 것임을 아셨다. 따라서 주님은 그들의 믿음이 작은 도전을 받도록 허락하셨다. 그 거스르는 바람 때문에 몇 시간 정도 걸릴 거리를 밤새 갔다. 우리는 제자들의 인내심을 칭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왜 그들 중 아무도 예수님이 단지 몇 일 전에 행하신 것을 보고도 바람이 잔잔해질 것이라는 믿음이 없었는지 궁금하다. 흥미롭게도,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이 바다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실 때 “지나가려고 하셨다”(막 6:48)라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은 기적적으로 바다 위를 걸으시면서 그들 곁을 지나가신 것은 그들이 어려움을 혼자 대면하기를 바라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들은 하나님께 기도하거나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았음을 나타낸다. 나는 어려움의 바람이 우리의 삶에 불어닥쳐 우리가 긴장하고 있을 때 기적을 행하시는 자가 몇 번이나 우리 곁을 지나가셨는지 궁금하다.

믿음의 원리(Principles of Faith)

예수님은 베드로의 도전에 “오라”라는 한마디 말씀으로 응답하셨다. 만일 베드로가 이 말씀 전에 물 위를 걷기를 시도했다면 즉시로 빠졌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믿음의 근거가 되는 어떤 약속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믿음이 아닌 가정으로 걸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심지어 예수님이 말씀하신 에, 다른 제자가 물 위를 걷기를 시도했더라도 모두 즉시로 빠졌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베드로에게만 그분의 약속을 주셨기 때문이다. 그들 중 누구도 베드로가 아니므로 그 약속의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려고 하기 전에 반드시 먼저 그 약속이 우리에게 적용되며, 우리가 그 약속의 조건을 만족시키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걷기 시작한 시점에 그는 예수님을 신뢰하였다. 비록 몇 초 전에 유령의 공포 때문에 소리 질렀던 그가 첫걸음을 내 디딜 때에 머리로는 의심하였음이 분명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는 기적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그의 믿음을 따라 행동하여야만 했다. 만일 그가 배의 돛대에 달라 붙어서 엄지 발가락을 물에 담가 보면서 물이 자신의 체중을 받아주는지를 실험했다면, 그는 절대로 기적을 경험하지 못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떤 기적을 경험하기 전에는 항상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믿는 대로 행동해야 한다.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는 시간이 항상 있다. 때로는 짧고 때로는 길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우리의 오감이 주는 느낌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행동해야 하는 시간을 겪게 된다.

베드로는 처음에는 잘 진행해 나갔다. 그러나 그가 자신이 하고 있는 행동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부터, 바람과 파도를 의식하게 되고 두려워하게 되었다. 아마도 그는 걷기를 멈췄고, 다른 발작을 내딛는 것을 두려워했을 수 있다. 그리고 기적을 경험했던 그는 자신이 가라앉고 있음을 발견했다. 우리가 일단 시작한 일은 믿음으로 계속해서 해나가야 한다.

베드로는 의심 때문에 물에 빠졌다. 사람은 종종 믿음이 부족한 자신을 비난하기를 싫어한다. 그들은 오히려 비난을 하나님께로 돌린다. 하지만, 배로 무사히 돌아온 베드로가 다른 제자들에게 “하나님은 내가 예수님께로 조금 나아가기만 원하셨을 뿐이다”라고 말했다면, 그 말을 들은 예수님은 어떻게 반응하셨을까?

베드로는 믿음을 잃고 두려워했기 때문에 실패한 것이다. 그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예수님은 그를 비난하시지 않았지만, 곧 베드로에게 그분의 손을 내밀어 붙잡아 주셨다. 그리고 그분은 바로 베드로에게 그가 의심한 이유에 대해 물으신다. 베드로에게는 의심할만한 좋은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의 말씀은 그 무엇보다도 확실하기 때문이다. 우리 중의 아무도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함으로써 두려워하거나 걱정할만한 좋은 이유가 없다.

성경은 믿음으로 인한 승리와 의심으로 인한 실패들로 가득하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대부분의 동료들이 의심 때문에 광야에서 죽었지만, 믿음으로 약속의 땅을 차지하게 된다(민 14:26-30을 보라). 예수님은 그분의 제자가 둘씩 짝을 지어 복음을 전하러 갔을 때에도 모든 필요를 채워주셨다(눅 22:35을 보라). 그러나 그들은 믿음이 적은 까닭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데 실패하였다(마 17:19-20을 보라).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인해 치유의 기적을 경험했지만, 그분의 고향 나사렛의 대부분 사람은 믿지 않음으로 인해 여전히 병에 시달렸다(막 6:5-6을 보라).

그들 모두와 마찬가지로, 나도 개인적으로 나의 믿음이나 의심에 따라 승리와 실패를 경험했다. 그러나 나는 나의 실패에 대해 하나님께 원한을 품거나 비난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분을 비난함으로써 자신을 정당화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복잡한 신학적 설명을 찾아내어 이미 분명하게 드러난 하나님의 뜻을 재해석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시는 것이 불가능함을 알고 있다. 그래서 내가 실패했을 때, 나는 회개하고 다시 한 번 물 위를 걷기 시작한다. 나는 예수님이 항상 나를 용서하여 주시고 침륜하지 않도록 구원하여 주신다는 것을 발견했다!

결론은 다음과 같다. 믿는 자는 축복을 받으나 의심하는 자는 축복을 받지 못한다! 제자 삼는 사역자는 예수님의 본을 따른다. 그분은 믿음으로 충만한 분이시며 그분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권면하신다. “하나님을 믿으라!”(막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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