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기초(Fundamentals of Faith)

제 14 장 (Chapter Fourteen)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에 기초를 두며, 그분은 자기를 찾는 자들과 자기를 찾지 않는 자들을 구별하여 대하신다. 우리가 이 같은 사실을 진심으로 믿는다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시작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찾기 시작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찾는 것은 (1) 하나님의 뜻을 배우고, (2) 하나님께 순종하고, (3)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세 가지 요소는 우리의 일상에서 모두 구현되어야 한다.

이 장은 우리의 믿음의 길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불행하게도, 많은 사람은 믿음을 지나치게 비성경적으로 강조하고 있는데 특히 물질적인 번영을 강조한다. 그 이유 때문에, 일부는 이 주제에 대해 전혀 접근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강에 빠져 죽었다고 하여 우리가 물을 마시는 것을 멈출 수는 없다. 우리는 균형을 잡고 성경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 성경에는 이 주제에 대한 가르침이 많이 있으며,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많은 약속을 붙잡고 믿음을 단련하기를 바란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믿음을 둔 사람의 본보기를 보여주셨으며, 그분의 제자가 그분을 본받기를 기대하셨다. 마찬가지로, 제자 삼는 사역자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본보기가 되기 위해 노력하며 그의 제자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라고 가르치고 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믿음이 없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믿음이 없이는 기도 응답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마 21:22; 약 1:5-8을 보라). 성경은 분명히 의심하는 자는 신자가 받는 축복을 박탈당한다고 가르친다. 예수님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라고 말씀하셨다.

믿음의 정의(Faith Defined)

믿음에 대한 성경적인 정의는 히브리서 11:1에서 찾을 수 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이 정의에서, 우리는 믿음의 여러 가지 특성들을 배울 수 있다. 첫째, 믿음을 가진 사람은 확신 또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희망과는 다르다. 왜냐하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기 때문이다. 희망은 항상 의심의 여지를 둔다. 희망은 항상 “아마”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나는 “나는 오늘 비가 내려 정원을 적셔주기를 바란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비가 오기를 갈망한다. 그러나 나는 비가 올지 여부에 대해서 확신이 없다. 반대로, 믿음은 항상 확실하며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다.

사람들이 믿음 또는 신념이라고 부르는 것이 종종 성경적인 정의가 아닐 때가 있다. 예를 들어, 사람은 하늘 위의 어두운 구름을 보면서 “나는 비가 올 것을 믿는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비가 올 것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다. 그들은 단지 비가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것은 성경적인 믿음이 아니다. 성경적인 믿음에는 의심의 요소가 없으며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외의 다른 결과를 용납하지 않는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다(Faith is the Conviction of Things Not Seen)

히브리서 11:1의 믿음의 정의에 의하면 믿음은 또한,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이다. 따라서, 우리가 오감을 통하여 무엇을 볼 수 있거나 감지할 수 있다면, 믿음이 필요하지 않다.

누군가가 지금 당신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가정해보자, “나는 왜 그런지 설명할 수는 없지만, 당신의 손에 책이 있음을 믿는다.” 물론, 당신은 그 사람한테 뭔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왜? 당신은 내 손에 책이 있다는 것을 믿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당신은 내가 책을 잡고 있음을 분명하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영역에 속한다. 예를 들어, 나는 이 글을 쓰면서, 내 근처에 천사가 있다고 믿는다. 실제로, 나는 확신한다. 내가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내가 천사를 본 적이 있을까? 아니. 내가 천사가 날고 있는 것을 감지했거나 들어 본 적이 있을까? 아니. 만일 내가 천사를 보거나 듣거나 감지했다면,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사실 – 천사가 내 주위에 있다는 것을 믿을 필요가 없다.

그럼, 무엇이 나로 하여금 천사의 존재에 대해 이렇게 확신할 수 있게 할까? 나의 확신은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다. 시편 34:7에서 그분은 “여호와의 천사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 치고 그들을 건지시는도다”라고 약속하셨다. 하나님을 말씀 외에는 내가 믿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보이지 않는 것들의 실상이야말로 진정한 성경적인 믿음이다. 세상 사람은 “보는 것을 믿게 된다”는 표현을 쓰지만,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그 반대가 진실이다. “믿는 것을 보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려고 할 때, 우리는 종종 우리로 하여금 의심하게 하는 상황에 놓이거나, 우리의 상황이 변화가 없으므로 하여 하나님께서 그분의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시간을 겪게 된다. 그런 경우, 우리는 단순히 의심을 물리치고, 믿음을 지키고, 마음속으로 하나님은 항상 자신의 약속을 지키신다고 확신해야 한다. 그분이 거짓말을 하시는 것은 불가능하다(딛 1:2).

우리는 어떻게 믿음을 가지는가?(How Do We Acquire Faith?)

믿음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성경적인 믿음의 유일한 근원은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 로마서 10:17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강조 추가). 하나님의 말씀은 그분의 뜻을 드러낸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 때에만 그것을 믿을 수 있다.

때문에 당신이 믿음을 가지고 싶다면, 당신은 반드시 하나님의 약속을 듣거나 또는 읽어야 한다. 믿음은 그것을 위해 기도하거나 누군가 믿음을 받도록 안수한다고 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생기며, 당신이 들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믿겠다는 결단을 반드시 내려야 한다.

믿음의 갖는 것을 넘어서, 우리의 믿음은 더욱 강해질 수 있다. 성경은 아주 작은 믿음에서부터 산을 옮기는 믿음까지 여러 가지 믿음의 단계를 언급하고 있다. 믿음은 인간의 근육처럼 먹고 훈련하는 것에 따라 더욱더 강해진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함으로써 계속하여 우리의 믿음에 영적 양식을 공급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행동하고 모든 일에 반응해야 하기 위해 믿음을 훈련시켜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문제, 걱정과 우려를 대면하는 시간도 포함한다.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들이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고, 모든 상황 속에서 그분을 신뢰하기를 원하신다(마 6:25-34; 빌 4:6-8:1; 벧전 5:7을 보라). 염려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우리가 믿음을 훈련시키는 방법 중의 하나이다.

만일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그것이 진리인 것처럼 말하고 행동할 것이다. 만일 당신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다면, 당신은 그것을 믿는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할 것이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실 것을 믿는다면, 당신의 말과 행동도 그렇게 표현될 것이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께서 당신이 건강하기를 바라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당신의 말과 행동도 그렇게 표현될 것이다. 성경에는 수많은 사람이 역경 속에서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믿음으로 행함으로써 기적을 경험한 예로 가득하다. 우리는 나중에 이 장에서 몇 가지 예를 볼 것이며, 다음 장에서는 영적 치유에 관해 고려할 것이다(기타 좋은 예들은 왕하 4:1-7; 막 5:25-34; 눅 19:1-10; 행14:7-10을 보라).

마음으로 믿는다(Faith is of the Heart)

성경적인 믿음은 우리의 이성적인 생각이 아닌 마음으로 믿는 것이다. 바울은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구원에 이른다”(롬 10:10상)고 썼으며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막 11:23, 강조 추가).

당신이 머리로는 의심하지만, 마음으로 믿는다면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받을 수 있다. 실제로, 대부분의 경우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려고 노력할 때, 육체적 감각과 사탄의 거짓말에 영향받은 우리의 지성은 의심의 공격을 받는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는 생각 대신 믿음을 굳게 잡고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흔하게 볼 수 있는 잘못된 믿음(Common Faith Mistakes)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훈련할 때, 때로는 원하는 것을 받는 데 실패하는 데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장 많이 범하는 실수 중 하나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시지 않은 것을 믿으려고 할 때 발생한다.

예를 들어, 결혼한 부부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자녀를 주실 것을 믿는 것은 성경적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들이 근거로 삼을 수 있게 그 부분에 대해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나는 의사로부터 임신할 수 없다고 들은 한 부부를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의사 대신 하나님을 믿기로 선택하고 아래의 두 약속을 붙잡았다. 그리고 오늘날 그들은 건강한 아이들의 부모가 되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 그리하면 여호와가 너희의 양식과 물에 복을 내리고 너희 중에서 병을 제하리니 네 나라에 낙태하는 자가 없고 임신하지 못하는 자가 없을 것이라 내가 너의 날 수를 채우리라(출 23:25-26).

네가 복음 받음이 만민보다 훨씬 더하여 너희 중의 남녀와 너희의 짐승의 암수에 생육하지 못함이 없을 것이며(신 7:14).

이 약속은 자녀가 없는 부부들을 격려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특별히 아들이나 딸을 낳으려는 시도는 잘못된 것이다. 성경은 우리가 우리의 미래 아이의 성별을 선택할 수 있다고 구체적으로 약속하지는 않았다. 우리의 믿음이 효과적이 되려면, 우리는 반드시 성경의 경계 내에 있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부분만 신뢰해야 한다.

하나님의 약속 하나를 보고, 우리가 그 약속에 따라 무엇을 믿을 수 있을지 결정해보자.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살전 4:16).

이 말씀을 근거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것을 확실하게 믿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께 내일 재림하시라고 기도할 수 있을까? 아니, 왜냐하면, 이 말씀과 다른 어떤 성경 말씀도 우리에게 그것을 약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예수님은 아무도 그분이 재림하실 날과 시를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

물론, 우리는 예수님이 내일 재림하시기를 바란다고 기도할 수 있지만, 우리에게는 그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우리가 믿음으로 기도할 때, 우리는 우리가 기도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확신한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약속이 있기 때문이다.

똑같은 성경 말씀을 근거로, 우리는 죽은 신자들의 몸이 예수님의 재림 시에 부활한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중 그리스도의 재림 시에 살아남은 자들도 같은 순간에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과 같이 부활의 몸을 받을 수 있을까? 혹은 그들 전에 받을 수 있을까? 아니, 왜냐하면, 이 성경 말씀은 우리에게 그 반대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난다.” 사실, 바로 다음 구절은 계속하여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살전 4:17)진다고 했다. 따라서, 예수님의 재림 시,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부활의 몸을 가장 먼저 받지 못할 가능성은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게 약속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주실 것이라고 믿으려 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받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오직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여 확인할 수 있다.

믿음은 자연의 영역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작용한다. 당신은 사전에 나한테서 약속을 받지 않은 이상, 내가 내일 점심에 당신의 집을 방문 할 것이라고 믿지 않을 것이다.

약속의 근거가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다. 그것은 어리석음일 뿐이다. 때문에 당신이 무엇을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기 전에, 먼저 자신한테 어느 성경 말씀이 내가 원하는 것을 약속하셨는지 물어보라. 당신이 약속을 받지 못한 이상, 당신은 믿음에 대한 근거가 없다.

두 번째로 흔한 잘못된 믿음(A Second Common Mistake)

많은 경우,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약속에 부가된 모든 조건은 충족시키지 않으면서 약속이 자신의 삶 속에서 성취된다고 믿으려고 한다. 예를 들어, 나는 그리스도인이 시편 37편을 인용하며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내 마음의 소원을 들어주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내가 믿는 바이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의 소원을 들어주신다고만 말씀하지 않았다. 실제로는 아래와 같이 말씀하였다.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지 말지어다 그들은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당할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 거리로 삼을지어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시 37:1-5).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의 소원을 들어주시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사실, 나는 위의 약속에서 적어도 8가지 조건을 셀 수 있다. 우리가 그 조건들을 충족하지 않는 한, 우리에게는 약속된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권리가 없으며 우리의 믿음은 기초가 없게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또한, 빌립보서 4:19의 약속을 인용하기 좋아한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그러나 그 약속에는 조건이 있는가? 분명히 있다.

당신이 빌립보서 4:19의 약속의 문맥을 살펴보면, 당신은 그 약속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약속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오히려, 그 약속은 구제함에 자신을 헌신한 사람들에게 주신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빌립보 사람들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실 것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에게 쓸것을 보내줬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님이 명하신 대로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했으며 그분께서 약속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그들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실 것이기 때문이다(마 6:33을 보라). 성경에서 하나님이 우리의 물질적인 필요를 채워주시는 것과 관련된 많은 약속들은 우리가 먼저 우리 자신을 헌신하는 것을 조건으로 한다.

우리는 우리의 돈에 관한 그분의 명령을 순종하지 않는 한,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실 것이라고 생각할 자격이 없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들이 그분께 십일조를 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저주받았다고 하셨으며, 그들이 십일조와 봉헌물을 순종적으로 드리면 축복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셨다(말 3:8-12을 보라).

성경에서 약속하신 많은 축복들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순종에 달려 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주실 것이라고 믿으려고 하기 전에, 먼저 자신에게 물어봐야 할 것이다. “나는 그 약속에 따른 모든 조건을 만족시키고 있는가?”

세 번째로 흔한 잘못된 믿음(A Third Common Mistake)

신약 성경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매번 뭔가를 위해 기도하고 간구할 때 적용되는 조건을 말씀하셨다.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 11:22-24, 강조 추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조건에 의하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 기도할 때 이미 받은 줄로 믿어야 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잘못 이해하여 그들이 기도 응답을 보았을 때에 받았다고 믿는다. 그들이 이제 받을 것이라고 믿지 이미 받았다고 믿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을 구하고 기도할 때, 응당 이미 응답을 받았다고 믿고, 응답하여 주심에 하나님께 감사드리기 시작해야 한다. 우리는 응답하심을 본 가 아닌 보기 에 이미 받은 줄로 믿어야 한다. 우리는 바울이 쓴 것처럼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야 한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

내가 이전에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가 마음으로 믿는다면, 우리의 말과 우리의 행동도 자연스럽게 우리가 믿는 것과 일치하다. 예수님은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마 12:34)라고 말씀하셨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같은 것을 반복적으로 구하는 잘못을 범하는 데, 이것은 그들이 이미 받은 줄로 믿지 않고 있음을 드러낸다. 만일 우리가 기도할 때, 이미 받은 줄로 믿는다면, 같은 것을 반복해서 간구할 필요가 없다. 같은 것을 반복적으로 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첫 번째 간구를 들으시지 않았다고 의심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같은 간구를 두 번 이상 하시지 않았는가?(Didn’t Jesus Make the Same Request More Than Once?)

물론,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세 번 연속 같은 기도를 하셨다(마 26:39-44을 보라). 그러나 그분은 하나님이 계시하신 뜻에 따라 믿음으로 기도하지 않으셨음을 명심하라. 사실, 그분은 십자가의 고난을 피할 수 있게 해달라고 세 번 기도하셨다. 그분은 자신의 간구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남을 알고 계셨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분은 세 번의 같은 기도에서 자신을 아버지의 뜻에 복종시켰다.

예수님의 그 같은 기도는 종종 모든 기도의 모범으로 잘못 사용되고 있다. 일부 사람은 우리는 응당 모든 기도는 끝마칠 때 예수님의 예를 따라, “만일 하나님의 뜻이라면”, 또는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말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아시는 것을 간구하셨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기도할 때 예수님의 예를 따르는 것은 잘못된 것이며 믿음이 없는 표현이다. 예를 들어 “주님, 나는 당신에게 내 죄를 고백하오니 만일 주님의 뜻이라면 저를 용서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은 나의 죄를 용서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닐 수도 있음을 의미하게 된다. 물론, 우리는 우리가 자기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다는 것을 성경에서 약속하셨음을 알고 있다(요일 1:9). 따라서 이러한 기도는 하나님이 계시한 뜻에 대한 믿음의 부족으로 드러난다.

예수님은 모든 기도를 다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끝마치신 것은 아니다. 그분이 그런 방식으로 기도하신 적은 그번 한 번뿐이다. 그리고 그번도 예수님께서 그로 말미암아 자신이 겪게 될 고통을 아시면서 그분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려고 하셨던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만일 우리가 어떤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계시가 없음으로 하여 그분의 뜻을 모른다면, “만일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이란 말로 기도를 마무리하는 것이 적절하다. 야고보는 이렇게 썼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이나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약 4:13-16).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해서 간구하고 약속의 모든 조건을 다 만족시킨 후에는 무엇을 해야 할까? 우리는 우리가 간구한 것이 현실이 되기까지 이미 받은 줄로 믿고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드려야 한다. 우리는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다(히 6:12). 사탄은 반드시 우리에게 의심을 심어줌으로써 우리를 패배시키려 할 것이며,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정신이 전쟁터임을 인식해야 한다. 의심의 생각이 우리의 정신을 공격할 때, 우리는 단지 그런 생각들을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생각으로 바꾸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말해야 한다. 우리가 이렇게 할 때, 사탄은 반드시 피하게 된다(약 4:7; 벧전 5:8-9을 보라).

행동으로 믿음을 보여준 실례(An Example of Faith in Action)

행동으로 믿음을 보여준 성경의 전형적인 실례 중 하나는 물 위를 걸은 베드로의 이야기이다. 그의 이야기를 읽어보고 우리가 그것으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을지 살펴보자.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시니라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제자가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마 14:22-33).

예수님의 제자가 전에도 갈리리 바다의 배에서 큰 풍랑 속에 갇혔던 적이 있었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마 8:23-27). 그 사건에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계셨으며 제자가 믿음이 없음을 꾸짖으신 후 풍랑을 꾸짖으셔서 잔잔하게 만드셨다. 예수님은 제자가 배를 타기 전에 호수의 반대편으로 건너가는 것이 그분의 뜻이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막 4:35을 보라). 그러나 풍랑이 일어났을 때, 그들은 그들이 처한 상황에 흔들리게 되었고, 어느 시점에 가서는 그들이 다 죽을 거라고 믿었다. 예수님은 그들이 적어도 두려워하지 않기를 기대하셨다.

그러나 이번에는 예수님은 그들 절로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도록 보내셨다. 그분은 분명히 성령님의 인도 하심대로 그렇게 하셨으며 하나님도 분명히 그날 저녁 바람이 거스를 것임을 아셨다. 따라서 주님은 그들의 믿음이 작은 도전을 받도록 허락하셨다. 그 거스르는 바람 때문에 몇 시간 정도 걸릴 거리를 밤새 갔다. 우리는 제자들의 인내심을 칭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왜 그들 중 아무도 예수님이 단지 몇 일 전에 행하신 것을 보고도 바람이 잔잔해질 것이라는 믿음이 없었는지 궁금하다. 흥미롭게도,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이 바다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실 때 “지나가려고 하셨다”(막 6:48)라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은 기적적으로 바다 위를 걸으시면서 그들 곁을 지나가신 것은 그들이 어려움을 혼자 대면하기를 바라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들은 하나님께 기도하거나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았음을 나타낸다. 나는 어려움의 바람이 우리의 삶에 불어닥쳐 우리가 긴장하고 있을 때 기적을 행하시는 자가 몇 번이나 우리 곁을 지나가셨는지 궁금하다.

믿음의 원리(Principles of Faith)

예수님은 베드로의 도전에 “오라”라는 한마디 말씀으로 응답하셨다. 만일 베드로가 이 말씀 전에 물 위를 걷기를 시도했다면 즉시로 빠졌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믿음의 근거가 되는 어떤 약속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믿음이 아닌 가정으로 걸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심지어 예수님이 말씀하신 에, 다른 제자가 물 위를 걷기를 시도했더라도 모두 즉시로 빠졌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베드로에게만 그분의 약속을 주셨기 때문이다. 그들 중 누구도 베드로가 아니므로 그 약속의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려고 하기 전에 반드시 먼저 그 약속이 우리에게 적용되며, 우리가 그 약속의 조건을 만족시키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걷기 시작한 시점에 그는 예수님을 신뢰하였다. 비록 몇 초 전에 유령의 공포 때문에 소리 질렀던 그가 첫걸음을 내 디딜 때에 머리로는 의심하였음이 분명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는 기적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그의 믿음을 따라 행동하여야만 했다. 만일 그가 배의 돛대에 달라 붙어서 엄지 발가락을 물에 담가 보면서 물이 자신의 체중을 받아주는지를 실험했다면, 그는 절대로 기적을 경험하지 못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떤 기적을 경험하기 전에는 항상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믿는 대로 행동해야 한다.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는 시간이 항상 있다. 때로는 짧고 때로는 길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우리의 오감이 주는 느낌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행동해야 하는 시간을 겪게 된다.

베드로는 처음에는 잘 진행해 나갔다. 그러나 그가 자신이 하고 있는 행동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부터, 바람과 파도를 의식하게 되고 두려워하게 되었다. 아마도 그는 걷기를 멈췄고, 다른 발작을 내딛는 것을 두려워했을 수 있다. 그리고 기적을 경험했던 그는 자신이 가라앉고 있음을 발견했다. 우리가 일단 시작한 일은 믿음으로 계속해서 해나가야 한다.

베드로는 의심 때문에 물에 빠졌다. 사람은 종종 믿음이 부족한 자신을 비난하기를 싫어한다. 그들은 오히려 비난을 하나님께로 돌린다. 하지만, 배로 무사히 돌아온 베드로가 다른 제자들에게 “하나님은 내가 예수님께로 조금 나아가기만 원하셨을 뿐이다”라고 말했다면, 그 말을 들은 예수님은 어떻게 반응하셨을까?

베드로는 믿음을 잃고 두려워했기 때문에 실패한 것이다. 그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예수님은 그를 비난하시지 않았지만, 곧 베드로에게 그분의 손을 내밀어 붙잡아 주셨다. 그리고 그분은 바로 베드로에게 그가 의심한 이유에 대해 물으신다. 베드로에게는 의심할만한 좋은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의 말씀은 그 무엇보다도 확실하기 때문이다. 우리 중의 아무도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함으로써 두려워하거나 걱정할만한 좋은 이유가 없다.

성경은 믿음으로 인한 승리와 의심으로 인한 실패들로 가득하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대부분의 동료들이 의심 때문에 광야에서 죽었지만, 믿음으로 약속의 땅을 차지하게 된다(민 14:26-30을 보라). 예수님은 그분의 제자가 둘씩 짝을 지어 복음을 전하러 갔을 때에도 모든 필요를 채워주셨다(눅 22:35을 보라). 그러나 그들은 믿음이 적은 까닭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데 실패하였다(마 17:19-20을 보라).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인해 치유의 기적을 경험했지만, 그분의 고향 나사렛의 대부분 사람은 믿지 않음으로 인해 여전히 병에 시달렸다(막 6:5-6을 보라).

그들 모두와 마찬가지로, 나도 개인적으로 나의 믿음이나 의심에 따라 승리와 실패를 경험했다. 그러나 나는 나의 실패에 대해 하나님께 원한을 품거나 비난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분을 비난함으로써 자신을 정당화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복잡한 신학적 설명을 찾아내어 이미 분명하게 드러난 하나님의 뜻을 재해석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시는 것이 불가능함을 알고 있다. 그래서 내가 실패했을 때, 나는 회개하고 다시 한 번 물 위를 걷기 시작한다. 나는 예수님이 항상 나를 용서하여 주시고 침륜하지 않도록 구원하여 주신다는 것을 발견했다!

결론은 다음과 같다. 믿는 자는 축복을 받으나 의심하는 자는 축복을 받지 못한다! 제자 삼는 사역자는 예수님의 본을 따른다. 그분은 믿음으로 충만한 분이시며 그분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권면하신다. “하나님을 믿으라!”(막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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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th Korean » 믿음의 기초(Fundamentals of Faith)

사역 속의 여성(Women in Ministry)

제 12 장 (Chapter Twelve)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의 절반 이상이 여성 신자이기 때문에 그들이 지체 속에서 가진 하나님이 주신 역할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대부분의 교회와 사역 속에서, 여성들이 종종 많은 사역을 감당하기에 귀한 일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여성의 역할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여성은 교회에서 말씀과 예배 인도와 같은 특정 영역에서는 종종 제한을 받는다. 일부 교회는 여성 목사를 허용하지만, 많은 교회는 허용하지 않는다. 일부 교회는 여성이 가르칠 수 있게 하지만, 많은 다른 교회는 못하게 한다. 일부 교회는 여성이 예배 말씀을 전하지 못하도록 완전히 제한한다.

대부분의 이러한 불일치는 바울이 고린도전서 14:34-35과 디모데 전서 2:11-3:7에 기록한 여성의 역할에 대한 말씀에 대한 다양한 해석에서 비롯된다. 이 말씀들은 우리의 연구 초점이 될 것이며 특히 이 장의 끝 부분에서 논의될 것이다.

처음부터(From the Beginning)

우리가 시작할 때, 성경의 첫 페이지에 나오는 여자에 대한 말씀을 생각해 보자. 여자도 남자와 같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 1:27).

물론, 우리는 하나님은 하와를 만드시기 전에 아담을 만드셨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바울에 의하면 이것은 영적으로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딤전 2:3). 우리는 나중에 바울이 설명한 창조순서의 중요성을 고려할 것이지며, 지금은 그것이 여성에 대한 남성의 우월성을 증명하지 않는다는 것만 말해두겠다. 우리는 하나님이 인간 이전에 동물을 창조하셨으며(창 1:24-28을 보라), 아무도 동물이 사람들보다 뛰어나다고 주장하지 않음을 알고 있다.[1]

여자는 남편의 돕는 배필로 지음 받았다(창 2:18을 보라). 이 점은 다시 한 번 그녀의 열등함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결혼 생활에서의 그녀의 역할을 보여준다. 성령님은 우리를 도와주도록 주셨지만, 분명히 그분은 우리보다 열등하지 않다. 오히려, 성령님은 우리보다 뛰어나시다! 그리고 하나님이 여자를 그녀의 남편을 돕는 배필로 지으신 것은 남자가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다고 말씀하신 분이 곧 하나님이 시다(창 2:18을 보라). 이 진리는 역사 속에서 남자가 그를 돕는 아내를 잃고 혼자 남았을 때 셀 수 없이 많이 입증되었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창세기에서 첫 시작부터 첫 번째 여자는 첫 번째 남자의 육체로부터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여자는 남자의 몸에서 취한 것이며, 이것은 남자가 여자 없이는 무언가를 잃은 것이 되며, 그 둘은 원래 한 몸이었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또한, 하나님에 의해 분리된 그들은 성적 결합을 통하여 다시 한몸이 되도록 의도되었으며, 이 성적 결합은 후대를 번식할 뿐 아니라, 두 사람이 서로 필요로 하고, 사랑을 표현하고 서로 즐거워할 수 있는 방식이기도 하다.

창조에 관한 이런 교훈은 한 성별이 다른 성별보다 뛰어나다거나, 또는 한 성별이 다른 성별을 지배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다는 생각에 반대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결혼과 사역에서 여성에게 남성과 다른 역할을 주셨다고 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남녀가 평등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8).

구약 사역 속의 여성들(Women in Ministry in the Old Testament)

이런 전제하에, 구약 시대에 하나님이 그분의 거룩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사용하신 일부 여성들을 보도록 하자. 물론, 하나님께서는 신약 시대에 그러셨던 것처럼 구약시대에도 주요하게 남성들을 사역 속에 부르셨다는 것은 분명하다. 구약 성경은 모세와 아론, 여호수아, 요셉, 사무엘과 다윗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그러나 구약 시대에도 많은 여성들이 하나님은 누구든지 그분이 기뻐하시는 대로 부르시고 사용하심을 증명한다. 그리고 여성들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준비되어 있었다.

우리가 그런 여성들을 구체적으로 알아보기에 앞서, 먼저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 쓰임 받은 모든 위대한 남자들은 다 여자가 낳고 키웠음을 주목해야 한다. 요게벳이란 여자가 없었다면 모세가 있을 수 없다(출 6:20을 보라). 하나님의 다른 위대한 남자들도 모두 그들을 낳은 어머니가 없었다면 존재할 수가 없다. 여성들은 하나님에 의해 중요한 책임과 칭찬받을만한 사역을 부여받았는데 그것이 바로 주님 안에서의 자녀 양육이다(딤후 1:5).

요게벳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모세와 아론의 어머니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그들의 누이인 선지자이자 예배 인도자인 미리암의 어머니이기도 하다(출 15:20을 보라). 미가서 6:4에서, 하나님은 미리암을 모세와 아론과 같이 이스라엘의 지도자 중 한 명으로 구분하셨다.

내가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어 종 노릇하는 집에서 속량하였고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을 네 앞에 보냈느니라(강조 추가).

물론, 이스라엘에서의 미리암의 지도력이 모세처럼 지배적인 것은 분명히 아니었다. 그러나 여선지자로서 미리암은 하나님을 대변하였으므로, 나는 그녀를 통해 말씀하신 하나님의 메시지가 단지 여성들에게만 향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남성들에게도 향한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이 안전하다고 생각한다.

 

이스라엘의 여성 사사(A Female Judge Over Israel)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신 또 다른 여성은 이스라엘의 사사 시대에 살았던 드보라였다. 그녀도 역시 여선지자이었고, 기드온, 입다, 삼손처럼, 그의 생애 동안 이스라엘의 사사로 있었다. 우리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에게 나아가 재판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삿 4:5). 따라서 그녀는 여성뿐 아니라, 남성에 대한 재판을 행사하였다. 그러므로 “한 여자가 남자에게 무엇을 해야 할지 명하였으며, 하나님은 그녀가 그렇게 하도록 기름을 부으셨다“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지도자로 부르신 대부분의 여성처럼, 드보라는 여성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데 어려움을 가진 남성을 적어도 한 명은 분명히 직면했을 것이다. 그의 이름은 바락이었다. 그는 그더러 가나안의 군대 장관 시스라에게 전쟁하러 가라는 드보라의 지시를 의심하였으므로, 드보라는 시스라를 죽이는 영광은 여인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그에게 알려주었다. 그녀의 예언은 적중했으며, 성경은 야엘이라는 여인이 장막 말뚝을 잠자는 시스라의 관자놀이에 박았다고 쓰고 있다(삿 4장을 보라). 이 이야기는 바락이 드보라와 함께 노래하는 것으로 끝난다! 가사 중 일부는 드보라와 야엘에 대한 찬송으로 가득한데(삿 5장을 보라), 아마도 바락은 결국 “여성의 사역”을 신뢰하게 되었을 것이다.

세 번째 여선지자(A Third Prophetess)

구약 성경에서 존경받는 여선지자로 언급된 세 번째 여인은 훌다이다. 하나님은 한 남자 곧 곤경에 빠진 유다 왕 요시아에게 신뢰할 수 있는 예언적 통찰력과 가르침을 주시기 위하여 그녀를 사용하셨다(왕하 22장을 보라). 우리는 또다시 하나님께서 남자에게 가르침을 주기 위하여 여자를 사용하신 예를 보게 된다. 훌다는 이런 사역에 자주 하나님께 쓰임 받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요시아가 그녀가 한 말을 그토록 믿었을리가 없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미리암, 드보라와 훌다를 여선지자로 부르셨을까? 그분은 그들 대신 남자들을 부르실 수 있지 않은가?

물론 하나님은 남자를 부르셔서 그 세 여자가 했던 일을 하게 하실 수 있다. 그러나 그분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누구도 그 이유를 모른다. 우리가 이 일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사역에 부르신 사람에 따라 임의로 그분을 틀안에 가두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록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은 일반적으로 남성을 지도자로 선택하시지만, 때로는 여성을 선택하시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구약 성경에 나온 이 세 명의 걸출한 여성 사역자들은 모두 여선지자이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일부 구약 성경의 사역에서는 여성들이 부르심을 받지 못했다. 예를 들어, 제사장으로 부르심을 받은 여성은 없었다. 따라서 하나님은 남성만을 위한 일부 사역들을 떼어두셨을 수 있다.

 

신약 사역 속의 여성들(Women in Ministry in the New Testament)

흥미롭게도, 우리는 또한, 신약 성경에서도 하나님께 여선지자로 부르심을 받은 여인을 보게 된다. 예수님이 태어나신지 며칠이 안 되어, 안나는 그분을 알아보고 그분이 메시아심을 선포하였다.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가 매우 많았더라 그가 결혼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과부가 되고 팔십사 세가 되었더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마침 이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니라(눅 2:36-38, 강조 추가).

안나가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예수님에 대해 말했음을 주목하라. 거기에는 물론 남성도 포함한다. 따라서 안나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남자들을 가르쳤다고 할 수 있다.

신약 성경에는 하나님께 예언의 은사로 쓰임 받은 다른 여성들이 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그 부류에 속한다는 것은 확실하다(눅 1:46-55을 보라). 교회 예배에서 마리아의 예언적인 말씀들을 읽을 때마다, 한 여인이 교회를 가르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많은 다른 방법을 통하여 하실 수 있었지만, 여자를 통하여 그분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심으로 여성에 대한 그분의 존중을 의심할 바 없이 드러내셨다.)

이런 여성들의 목록은 계속된다. 하나님은 그분의 영을 만민에게 부어줄 때 이스라엘의 아들과 들이 예언할 것이라고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셨다(욜 2:28을 보라). 베드로는 요엘의 예언이 신약 시대에도 확실히 적용됨을 확인하였다(행 2:17을 보라).

우리는 사도행전 21:8-9에서 빌립 전도자가 여선지자인 딸이 네 명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바울은 여자가 교회 모임에서 예언함을 썼다(고전 11:5을 보라). 문맥으로 보아 그 가운데 남자들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성경에서 하나님께 여선지자 또는 예언하도록 쓰임 받은 모든 여자들을 보면,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그런 사역에 여성을 사용하실 수 있다는 생각을 반대할만한 좋은 이유가 확실히 없다! 또한, 우리에게는 여자가 하나님을 대신하여 남자에게 예언할 수 없다고 생각할만한 이유도 없다.

여성 목사?(Women as Pastors?)

여성이 목사로 섬기는 것은 어떨까? 하나님께서 남성이 목사/장로/감독의 직분을 맡도록 의도하신 것이 분명한 듯 하다.

미쁘다 이 말이여, 곧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함은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라 함이로다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딤전 3:1-2 강조 추가).

내가 너를 그레데에 남겨 둔 이유는 남은 일을 정리하고 내가 명한 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 책망할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며(딛 1:5-6, 강조 추가).

바울은 여성이 직분을 갖는 것으로부터 금지되었다고 명시적으로 말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대 일괄론적으로 결론 내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특히 개발 도상국에 수많은 효과적인 여성 목사/장로/감독들이 있는 것 같다. 비록 그들은 여전히 압도적인 소수이지만 말이다. 아마도 하나님은 그분의 나라를 위해서거나 또는 자격을 갖춘 남성 지도력의 부족할 경우 이 역할에 여성을 때때로 부르시는 것 같다. 오늘날 그리스도 몸 안의 많은 여성 목사가 실제로 여선지자와 같은 성경적으로 정당한 다른 사역직분에 부르심을 받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현재의 교회 구조는 그들에게 단지 목회적인 역할밖에 허용하지 않는다.

왜 목사/장로/감독의 직분은 남성에게만 주어졌을까?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런 직분의 기능을 이해하는 것이 우리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목사/장로/감독에 대한 성경의 요구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공손함으로 복종하게 하는 자라야 할지며(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리요)(딤전 3:4-5).

우리가 신약의 장로가 작은 가정교회를 감독하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 요구조건이 매우 합리적임을 보아낼 수 있다. 그의 역할은 가족을 감독하는 아버지의 역할과 비슷하다. 이것은 우리가 왜 목사 직분을 남자가 맡아야 하는지를 이해하도록 도와준다. 왜냐하면, 가정교회는 가정의 구조와 매우 비슷하며, 만일 그것이 하나님의 설계하신 바라면, 아내가 아닌 남편이 이끌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 대해 나중에 더 설명할 것이다.

여성 사도?(Women as Apostles?)

우리는 결론적으로 여성이 여선지자로 섬길 수 있다고 확증하였다(만일 그녀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면). 다른 유형의 사역들은 어떠할까? 로마서 16장에서 바울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사역에서 섬긴 많은 여성들을 칭찬한 인사말은 우리에게 깨달음을 줄 것이다. 그 중 한 명은 심지어 사도로 기록되었을 수도 있다. 아래의 세 개의 연속된 인용에서, 나는 여성의 이름들을 강조표기 하였다.

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추천하노니 너희는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 줄지니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라(롬 16:1-2, 강조 추가).

얼마나 큰 보증인가! 우리는 뵈뵈가 어떠한 사역을 이루었는지를 정확히 모르지만, 바울은 그녀가 “겐그리아 교회의 일꾼”이며 “여러 사람의 보호자”라고 하였다. 그녀가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하였든지, 그것은 분명히 바울이 그녀를 로마의 전체 교회에 추천할 만큼 중요한 일이었음이 틀림없다.

다음 우리는 남편인 아굴라와 함께 중요한 사역을 함으로써 모든 이방인 교회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은 브리스가(브리스길라)에 대해 읽을 것이다.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 또 저의 집에 있는 교회에도 문안하라 내가 사랑하는 에배네도에게 문안하라 그는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께 처음 맺은 열매니라 너희를 위하여 많이 수고한 마리아에게 문안하라 내 친척이요 나와 함께 갇혔던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 문안하라 그들은 사도들에게 존중히 여겨지고 또한,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자라(롬 16:3-7, 강조 추가).

유니아는 “사도들 중 뛰어난 자”이었다.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그도 사도였을 것이다. 만일 올바른 번역이 율리아라면, 그녀는 여성 사도이다. 브리스가마리아는 주님의 일꾼이었다.

또 주 안에서 내 사랑하는 암블리아에게 문안하라 그리스도 안에서 인정함을 받은 아벨레에게 문안하라 아리스도불로의 권속에게 문안하라 내 친척 헤로디온에게 문안하라 나깃수의 가족 중 주 안에 있는 자들에게 문안하라 주 안에서 수고한 드루배나드루보사에게 문안하라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하고 사랑하는 버시에게 문안하라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아순그리도와 블레곤과 허메와 바드로바와 허마와 및 그들과 함께 있는 형제들에게 문안하라 빌롤로고와 율리아와 네레오와 그의 자매와 올름바와 그들과 함께 있는 모든 성도에게 문안하라(롬 16:8-15, 강조 추가).

분명히, 여성도 사역자가 될 수 있다.

여성 교사?(Women as Teachers?)

여성 교사는 어떨까? 신약 성경에는 그것에 대한 언급이 없다. 물론, 성경에는 남성이 교사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언급도 없다. 아굴라의 아내인 브리스길라(위에서 브리스가로 언급됨)는 적어도 작은 규모의 가르침 사역에 참여했다. 예를 들어, 그녀와 아굴라가 아볼로가 에베소에서 완전하지 못한 복음을 전파하는 것을 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그를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 일렀다”(행 18:26). 아무도 브리스길라가 그녀의 남편을 도와 남자인 아볼로를 가르쳤다는 것에 반박할 수 없다. 또한, 바울은 성경에서 두 번 “저의 집에 있는 교회”에 대해 쓰면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둘 다 언급하였으며(롬 16:3-5, 고전 16:19을 보라), 로마서 16:3에서 그들 둘을 “그리스도 안의 동역자”라고 불렀다. 브리스길라가 그녀의 남편을 따라 사역에서 일부 적극적인 역할을 했었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예수님께서 여자에게 남자를 가르치라고 명령하신 경우(When Jesus Commanded Women to Teach Men)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여야 하고 남자를 가르치는 것을 금지하는 바울의 말을 보기에 앞서 먼저 성경의 다른 한 말씀을 읽어 보는 것이 우리가 그 부분을 균형 잡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 한 천사가 적어도 세 명의 여자들에게 예수님의 남성 제자들을 가르치도록 위임하였다. 그 여자들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부활하셨고 갈릴리에서 그들에게 나타나시리라는 것을 알려주도록 지시받았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짧은 시간이 흐른 뒤, 예수님은 직접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제자가 갈릴리로 가도록 지시하라고 명령하셨다(마 28:1-10; 막 16:1-7).

우선, 나는 예수님이 먼저 여자에게 나타나시고 다음 남자에게 나타나시는 것을 선택하신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둘째로, 여성이 남성을 가르치는 것이 근본적으로 또는 도덕적으로 잘못된 일이라면, 사람은 예수님은 자신의 부활에 대해 여자가 남자에게 가르치라고 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이 일은 절대 하찮은 일이 아니며, 그분께서 직접 전달할 수도 있는 사안이다(그리고 실제로 나중에 그분은 그렇게 하셨다). 아무도 아래와 같은 사실에 반박할 수 없을 것이다. 주 예수님은 일부 여자들이 중요한 진리를 가르치고, 일부 남자들에게 영적인 가르침을 주도록 지시하셨다.

문제가 되는 성경 구절들(The Problem Passages)

 

이제 우리는 많은 성경 구절이 말씀하는 사역에서의 여성의 역할에 대해 이해하였으므로 바울이 쓴 “문제가 되는 성경 구절들”을 더 잘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먼저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그의 말을 생각해 보자.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그들에게는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라(고전 14:34-35).

몇 가지 복합적인 이유 때문에, 일부 사람은 이 말씀이 바울의 실제 가르침인지 아니면 고린도인들이 바울에게 쓴 내용을 그가 인용한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이 서신의 후반에서, 바울은 고린도인들이 그에게 보낸 서신에서 제기한 질문에 응답한 것이 분명하다(고전 7:1, 25; 8:1; 12:1; 16:1, 12을 보라).

또한, 바로 그다음 구절에 쓴 내용은 바울이 교회의 여성은 잠잠해야 한다는 고린도 교회의 정책에 대한 그의 반응으로 간주 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고전 14:36).

제임스 성경은 아래와 같이 번역함으로써 바울이 고린도인들의 태도에 더 놀라있음을 드러냈다.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에게서 나왔느냐 아니면 너희에게만 이르렀느냐(고전 14:36).

어느 경우에나, 바울은 분명히 두 개의 수사학적인 질문을 하고 있다. 그 두 질문에 대한 답변은 모두 “아니“이다. 고린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창시자가 아니며, 하나님의 말씀은 단지 그들에게만 주신 것도 아니다. 바울의 질문은 그들의 자부심을 겨냥한 질책임이 분명하다. 만일 앞의 두 구절에 대한 반응이 아래와 같을 것이다. “당신은 자신이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당신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말씀을 누구를 통하여 말씀하실지를 언제부터 규정하기 시작하였는가? 하나님은 그분이 원하신다면 여성을 사용하실 수 있으며, 당신이 그들을 잠잠케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이 같은 해석은 우리가 바울이 이미 같은 서신에서 여성으로 하여금 잠잠할 수 없게 하는 것인 예언함에 대해 쓴 것(고전 11:5을 보라)을 고려해보면 논리적이 돼 보인다. 또한, 그 후로 몇 구절 뒤에서, 바울은 여성을 포함한 모든 고린도인들이[2] “예언하기를 사모하기”를 촉구하였다(고전 14:39). 그러므로 만일 바울이 14:34-35에서처럼 실제로 여자들이 교회에서 잠잠하기를 주장했다면, 그는 자아모순에 빠진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다른 가능성(Other Possibilities)

하지만, 우리가 잠시 동안 고린도전서 14:34-35이 확실히 바울이 한 말이 맞고, 그는 여자들이 잠잠하기를 가르치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우리는 그가 한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다시 한 번, 우리는 바울이 같은 서신에서 여자들이 분명히 교회의 모임에서 공개적으로 기도하고 예언할 수 있다고 말했으면서 왜 그들에게 교회 모임에서 완전히 잠잠하라는 일괄적인 명령을 했는지 궁금할 것이다.

또한, 바울은 우리가 많은 성경적인 사례에서 보아왔듯이 하나님은 여성을 사용하셔서 그분의 말씀을 공개적으로 심지어 남성에게 선포하심을 이미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그는 왜 하나님께서 종종 기름 부으셔서 말하게 했던 자들을 완전히 잠잠하게 했겠는가?

상식적으로 바울은 여자들이 교회 모임 때마다 완전히 잠잠하라고 했을 리가 없다. 초대 교회는 가정집에서 모였고 함께 식사를 나눴음을 명심하라. 우리는 여자들이 모임의 시작부터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 있는가? 그들이 음식을 준비하거나 식사하는 동안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 있는가? 그들이 그들의 아이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 있는가? 이러한 생각은 터무니없다.

만일 예수님의 이름으로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에 예수님이 그들 중에 계신다면(마 18:20), 그들은 확실히 교회 모임을 구성하게 된다. 그렇다면, 두 여자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함께 모였을 때 서로 말을 하지 말아야 하는가?

아니, 만일 고린도전서 14:34-35 말씀이 실제로 바울의 가르침이라면, 그는 단순히 교회의 질서에 관한 작은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어떤 여자들은 질문함에 있어서 질서가 없었다. 바울은 여성들이 전체 모임 중에 완전히 침묵을 지켜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가 몇 구절 이전에 선지자들에게 유사한 지침을 줄 때에도 그들이 완전히 침묵을 지키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만일 곁에 앉아 있는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으면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고전 14:30, 강조 추가).

이 경우 “잠잠하라”는 단어는 “일시적으로 말하기 삼가라”는 뜻이다.

바울은 또한, 사람들에게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 방언을 삼가하라고 지시하였다.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고전 14:28, 강조 추가).

바울은 이 사람들에게 전체 모임이 진행되는 동안 완전히 잠잠하라고 지시하였는가? 아니, 그는 그들이 통역이 없을 때 방언을 하지 말라고 말하였다. 바울은 그들에게 “교회에서는 잠잠하라”고 말했음을 주목하라. 이것은 고린도전서 14:34-35에서 여자들에게 준 가르침과 같다. 그럼 왜 우리는 바울의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말을 “전체 모임 중에 잠잠해야 한다”라고 해석하고, 바울이 교회에서 질서없이 방언을 하는 자들에게 한 말을 “모임의 특정 순간에 말하기를 삼가라”는 뜻으로 해석하는가?

마지막으로, 바울은 그 구절에서 모든 여성을 상대로 말한 것이 아님을 주목하라. 그의 말은 오직 결혼한 여성에게만 적용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질문이 있을 경우 “자기 남편에게 물어보라”라고 지시받았기 때문이다.[3] 아마도 질문의 일부 또는 전부는 기혼 여성들이 자기들의 남편 이외의 다른 남자에게 한 것일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은 당연히 부적절한 것으로 간주 될 수 있으며, 그들이 자기들의 남편에 대한 불경과 불순종을 어느 정도 드러낼 수 있다. 만일 그것이 바울이 제기한 문제라면, 그것은 곧 바울이 왜 자신의 주장을 창세기부터 다방면으로 계시된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여자들은(분명히 그들의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사실에 기반을 둔 이유이다(고전 14:34을 보라).

요약하면, 만일 바울이 실제로 고린도전서 14:34-35에서, 여자들이 잠잠할 것에 관하여 지시하였다면, 그는 단지 기혼 여성들이 부적절한 때에 또는 그들의 남편을 불경하는 방식으로 질문하는 것을 삼가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그들은 예언하고, 기도하고 말할 수 있다.

또 하나의 문제가 되는 성경 구절(The Other Problem Passage)

마지막으로, 우리는 바울이 디모데에 쓴 첫 번째 서신에 기록된 두 번째 “문제가 되는 성경 구절”을 보도록 하자.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고 여자가 속아 죄에 빠졌음이라(딤전 2:11-14).

바울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남자와 여자에게 그분의 뜻을 효과적으로 가르친 네 명의 여선지자 미리암, 드보라, 훌다와 안나를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는 이스라엘의 사사인 드보라가 남자와 여자에게 어느 정도의 권한을 행사했음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는 하나님이 오순절 날 자기의 영을 부어주신 것이 말세에 하나님께서 자기의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심으로써 자녀들이 예언할 것이라는 요엘의 예언을 부분적으로 성취하였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 그는 예수님이 어떤 여성들이 남성 사도들에게 그분의 메시지를 전달하도록 위임한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는 고린도 교회에 쓴 서신에서 여자들이 교회에서 기도하고 예언하는 것에 대해 찬성한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는 고린도인들에게 그들 중 누구라도 다른 지체들과 함께 나눌 수 있는 가르침을 성령님으로부터 받을 수 있다고 말했음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고전 14:26을 보라). 그렇다면 그가 디모데에게 이런 말을 쓸 때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는 무엇일까?

바울은 자신의 가르침의 근거로 창세기에서 두 개의 관련된 사실을 인용하고 있음을 주목하라. (1) 아담은 하와 이전에 지음을 받았고 (2) 아담이 아닌 하와가 속은 것이며, 그녀는 죄에 빠졌다. 첫 번째 사실은 남편과 아내 사이의 올바른 관계를 세워준다. 창조의 순서에 따라, 바울이 다른 곳에서도 가르치듯이 남편은 머리가 된다(고전 11:3; 엡 5:23-24을 보라).

바울이 언급한 두 번째 사실은 여자가 남자보다 더 쉽게 속는다는 것을 전달하기 위함이 아니다. 왜냐하면, 남자도 쉽게 속기 때문이다. 사실, 그리스도의 지체 중에 여성이 남성보다 많다는 사실 때문에 남성이 여성보다 속임당할 가능성이 더 크다고 주장할 수 있다. 오히려 두 번째 사실은 가정에 세운 하나님의 의도된 질서가 무시 될 때, 사탄이 틈을 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인류의 전체 문제는 에덴동산에서 한 남자와 그의 아내 사이의 관계가 질서를 잃으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아담의 아내는 그에게 순종하지 않았다. 아담은 그의 아내에게 금지된 열매에 대한 하나님의 지시를 알려주었음이 틀림없다(창 2:16-17; 3:2-3). 하지만, 그녀는 그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 그녀가 아담에게 금지된 열매를 주어서 먹게 했을 때, 그녀는 모종 의미에서 아담의 권한을 넘어섰다(창 3:6을 보라). 그 경우 아담이 하와를 인도한 것이 아니라 하와가 아담을 인도한 것이다. 그 결과는 재앙이었다.

교회 – 한 가정의 모델(The Church–A Model of the Family)

가정에 대한 하나님의 의도된 질서는 마땅히 교회에 의해 보여져야 한다. 내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교회 역사상 첫 300년 동안, 교회의 회중 수가 적었다는 점을 유의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들은 집에서 만났다. 목사/장로/감독은 가정의 아버지와 같았다. 이런 하나님이 의도한 교회 구조는 가정 구조와 매우 닮았으며, 사실상 영적인 대가정이었으며, 만일 여성이 주도한다면 가정의 내부 및 교회의 외부에 잘못된 메시지를 전달했을 것이다. 여성 목사/장로/감독이 정기적으로 가정교회에서 가르치고, 그녀의 남편은 순종적으로 그곳에 앉아 그녀의 가르침을 듣고 그녀의 권위에 복종한다고 생각해보라. 그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가정의 질서를 위배하는 것이며 잘못된 본을 보여주는 것이 된다.

바울의 말이 뜻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그 말들이 장로에 대한 그의 요구 조건과 매우 가까운 곳에 있음을 주목하라. 그 중 한 요구조건은 남성이어야 한다는 것이다(딤전 3:1-7을 보라). 또한, 장로들은 교회에서 정기적으로 가르쳐야 함을 주목해야 한다(딤전 5:17을 보라).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워야 하며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고 한 바울의 말은 분명히 교회에서의 올바른 질서와 관련이 있다. 그가 설명하고자 했던 것은 여자가 부분적으로든 전체적으로든 장로/목사/감독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여자 또는 아내가 자기의 남편에게 순종하면, 기도하고, 예언하고, 간단한 가르침을 받고 지체들과 나누거나 교회 모임 중에 일반적인 말을 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이 모든 일은 여자가 하나님의 질서를 위반하지 않는다면 집에서 그 모든 일을 할 수 있듯이 교회에서도 할 수 있다. 여자가 교회에서 하지 못하도록 금지된 것은 그녀가 집에서 하지 못하도록 금지된 것과 다를 바 없다 – 바로 그녀의 남편을 주관하는 것이다.

우리는 나중의 성경 구절에서 여자들도 남자처럼 집사의 직분으로 섬길 수 있음을 알게 된다(딤전 3:12을 보라). 교회에서 집사, 또는 단어의 실제 의미인 일꾼으로 섬기려면 남편과 아내 사이에 세운 하나님의 신성한 질서를 위반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내가 디모데 전서 2:11-14의 바울의 말과 성경의 나머지 부분의 가르침을 조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우리가 보아왔던 하나님께 쓰임 받은 여성들은 아무도 가정과 교회에서 모델 역할을 한 적이 없으므로, 그들 중 아무도 하나님의 의도하신 질서를 위반하지 않았다. 우리는 가정에서 남편을 주관한 아내의 잘못된 모델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다시 한 번, 여러 가정이 모인 가정교회 모임에서 아내는 가르치고 감독하는 것을 책임진 한편, 남편은 수동적으로 앉아 그녀의 지도력에 순종하고 있는 모습을 그려보라. 이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가정을 향한 그분의 질서를 거스르기 때문이다.

드보라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것이나, 안나가 그리스도에 대해 남자들에게 말한 것이나, 마리아와 그의 친구들이 사도들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 말한 것 중 아무것도 잘못된 메시지를 보내거나 부적절한 방식으로 가정에 세우신 하나님 질서를 위반한 적이 없다. 정기적인 교회 모임 중에 만일 여성 또는 아내가 권한을 행사하고 정기적으로 남성 또는 남편을 가르칠 경우 잘못된 메시지를 전파할 위험이 존재한다.

결론(In Conclusion)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한테 “여성들이 열심과 하나님이 주신 은사로 다른 사람들을 섬기면서 사역에 참여하는 것이 잘못된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어떤 도덕적 또는 윤리적 원칙을 위반하였는가?”라고 물어본다면, 우리는 곧 유일하게 가능한 경우가 여성의 사역으로 인해 왠지 모르지만, 남성과 여성, 남편과 아내 사이의 관계에 대한 하나님의 질서를 위반 한 경우일 뿐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문제가 되는 성경 구절들” 모두에서 바울은 결혼의 신성한 질서를 우려의 근거로 호소했다.

따라서 우리는 여성들이 사역함에 있어서 매우 작은 의미에서만 제한받음을 알 수 있다. 많은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은 그분의 영광을 위해 여성을 사용하기를 원하시며, 그분은 이미 수천 년 동안 그렇게 해오셨다. 성경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여성의 긍정적인 기여를 많이 말씀하고 있으며, 우리는 그중 일부를 이미 알아보았다. 우리는 예수님의 가장 가까운 친구 중 일부는 여자였고(요 11:5를 보라), 그들은 예수님의 사역을 재정적으로 지원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눅 8:1-3 을 보라). 성경에는 남자가 이런 일을 했다는 기록은 아무 곳에도 없다. 사마리아의 우물곁에 있던 여자는 그녀의 마을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에 대해 말함으로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요 4:28-30, 39을 보라).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는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았다”고 기록되었다. 예수님의 장례를 위하여 그분께 향유를 부은 것도 여자였으며 어느 남자가 그녀에 대해 불평할 때 예수님은 그녀를 칭찬해 주셨다(막 14:3-9을 보라).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의 거리를 십자가를 지시고 걸어가신 예수님을 위해 울었던 것도 어느 남자가 아닌 여자였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사례들과 그와 비슷한 사례들은 마땅히 많은 여성들이 일어나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임명하신 사역을 성취할 수 있도록 격려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모든 여성이 필요하다!

 


[1]우리는 하나님이 처음 만드신 아담 이후의 모든 남자들은 여자가 낳았음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1:11-12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아담 이후의 모든 남자들은 여자로 말미암아 났다. 분명한 것은, 아무도 이 신성한 질서가 남자가 그들의 어머니보다 못하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주장할 수 없을 것이다.

[2]바울의 권면은 “형제들”에게 한 것인데, 그는 “형제”란 용어를 고린도전서에서 27번 사용하였다. 때문에 “형제”란 이 용어는 분명 남자뿐만이 아닌, 고린도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몸 전체를 가리킨 것이다.

[3]헬라어 원문으로 여자아내, 또는 남자남편은 같은 단어임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반드시 문맥으로부터 저자가 남자와 여자를 말하는지 아니면 남편과 아내를 말하는지를 파악해야 한다. 고려한 구절은 바울은 아내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내만이 집에서 남편에게 아무것이나 물을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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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th Korean » 사역 속의 여성(Women in Ministry)

성령세례(The Baptism in the Holy Spirit)

제 11 장 (Chapter Eleven)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거의 모든 페이지에 초대교회에서의 성령님의 역사가 기록되었다. 만일 사도행전에서 성령님의 역사를 제거한다면 거의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진실로, 성령님은 제자들에게 “천하를 어지럽게”할 권능을 주셨다(행 17:6을 보라).

오늘날 전 세계에서 교회가 가장 빠르게 확장되는 지역을 보면, 그곳의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성령님께 순종하고 그분의 능력을 받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가 놀랄 일이 아니다. 성령님은 십 초 동안에 우리가 자신의 노력으로 만 년 동안에 이룬 일보다 더 많이 이룰 수 있다. 따라서 제자 삼는 사역자가 성경이 신자의 삶과 사역에서의 성령님의 역사에 대해 무엇을 가르치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사도행전에서 우리는 신자들이 성령세례를 받고 사역할 수 있는 힘을 받는 예를 자주 보게 된다. 가능하다면 우리가 이 주제에 대해 연구함으로써 그들이 체험한 것을 우리도 체험하고, 그들이 즐겼던 성령님의 기적적인 도움을 우리도 즐기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비록 일부 사람은 이러한 기적적인 성령님의 역사는 초대 사도시기에만 국한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나는 그러한 견해를 뒷받침해주는 어떠한 성서적, 역사적 또는 논리적인 근거도 찾지 못했다. 그것은 불신 때문에 생긴 이론이다. 하나님 말씀의 약속을 믿는 자만이 약속된 축복을 받을 수 있다.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 믿음이 없는 이스라엘 사람처럼, 오늘날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는 자들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준비한 모든 것을 경험할 수 없다. 당신은 어떤 부류에 속하는가? 개인적으로, 나는 신자들에 속한다.

성령님의 두 역사(Two Works by the Holy Spirit)

주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는 모든 사람은 모두 자신의 삶 속에서 성령님의 역사를 경험했다. 그의 속사람, 또는 영은 성령님에 의해 거듭났으며(딛 3:5을 보라), 성령님은 지금 그의 안에 거하신다(롬8:9, 고전 6:19을 보라). 그는 “성령으로 난”(요 3:5) 사람이다.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한 많은 카리스마파와 오순절파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세례를 받고 방언을 말해야만 성령님이 내주하신다고 가르치는 오류를 범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적으로나 경험적으로나 오류임이 분명하다. 많은 카리스마파와 오순절파가 아닌 신자들에게는 일부 카리스마파와 오순절파 신자들보다 내주하시는 성령님에 관한 증거가 더 많다! 그들은 내주하시는 성령님이 없이는 맺을 수 없는, 바울이 갈라디아서 5:22-23에서 열거한 성령의 열매를 더 많이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사람이 성령으로 낳았다고 하여 그가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보장할 수는 없다. 성경에 따르면, 성령으로 난것과 성령세례를 받는 것은 일반적으로 두 가지 별개의 경험이다.

우리가 이 주제를 탐구하기 시작하기에 앞서, 먼저 예수님께서 어느 한 번 사마리아의 우물가에서 구원받지 못한 여자에게 성령님에 대해 말씀하신 것을 생각해 보도록 하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0, 13-14).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주하시는 생수가 믿는 자들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인 것 같다. 나중에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생수”라는 단어를 다시 사용하셨는데 그분께서 성령님에 대해 말씀하셨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요 7:37-39, 강조 추가).

이 경우에 예수님은 생수가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된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오히려, 이번에는 생수가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내면에서 흐르는 이 된다고 말씀하셨다.

요한복음의 이 두 유사한 구절은 성령으로 낳았다는 것과 성령세례를 받았다는 것의 차이를 잘 보여준다. 성령으로 낳았다는 것은 주요하게 거듭난 사람에게 혜택을 주며, 거듭난 사람은 영생을 누릴 수 있다. 사람이 성령으로 거듭나면, 그의 안에는 그에게 영생을 주는 성령님이 거하시게 된다.

그러나 성령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주로 다른 사람들에게 혜택을 준다. 왜냐하면, 그것은 신자들이 성령님의 능력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사역할 수 있게끔 장비시켜 주기 때문이다. “생수의 강”은 성령님의 능력에 의해 그들의 내면으로부터 흘러나오며,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가져다준다.

왜 성령세례가 필요할까?(Why the Baptism in the Holy Spirit is Needed)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사역하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성령님의 도움이 없다면, 우리는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려는 희망조차 품을 수 없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신자들에게 성령세례를 베푸시겠다고 약속하신 이유가 바로 전 세계 사람들이 복음을 듣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분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눅 24:49, 강조 추가).

누가도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기록하였다.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7-8 강조 추가).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늘로부터 오는 능력”을 받을 때까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하셨다. 그분은 그렇지 않으면 제자가 본질적으로 무력해지고 그분이 주신 사명을 이루지 못할 줄을 아셨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성령세례를 받은 후,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하나님께 초자연적으로 쓰임받았음을 알 수 있다.

전 세계 수백만 명의 그리스도인이 성령세례를 받은 후에, 특히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할 때에 새로운 차원의 능력을 경험했다. 그들은 자기들의 말이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고, 때로는 자기들도 모르는 성경 구절을 인용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일부 사람은 자기가 복음 전도와 같은 특정 사역에 부르심을 받고 구체적인 은사를 가졌음을 발견했다. 또 다른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분의 뜻대로 사용하셔서 성령님의 다양한 초자연적인 은사들을 발휘하게 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의 경험은 철저하게 성경적이다. 그들의 경험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는 반대에 대한 성경적인 근거가 없다. 사실상, 그들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본받도록 부르심을 받은 우리가 그분께서 성령님에 대한 경험을 본받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물론, 그분은 마리아에게 잉태되었을 때 성령으로 낳으셨다(마 1:20을 보라). 성령으로 낳으신 그분은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에 성령세례를 받으셨다(마3:16을 보라). 만일 예수님도 사역을 위해 성령세례를 받으심으로 자신을 장비하셔야 했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많이 필요할까?

성령세례의 초기 증거(The Initial Evidence of the Baptism in the Spirit)

신자가 성령세례를 받은 후 경험하게 되는 초기 증거는 그가 성경에서 “새 방언” 또는 “다른 언어”로 불리는 새로운 언어로 말하는 것이 될 것이다. 많은 성경 구절들이 이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데 아래에 그것들을 살펴보자.

먼저, 예수님은 승천하기 전 마지막 순간에, 믿는 자들을 따르는 표적 중 하나가 새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막 16:15-17, 강조 추가).

일부 주석가들은 이 구절들이 어떤 신약 성경의 고대 사본에는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의 성경 속에서 제외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대부분 고대 사본은 그 구절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내가 읽어본 어떤 영어 번역본도 그것을 생략하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이 이 구절들 속에서 말씀하신 내용은 사도행전에 기록된 초대 교회의 경험과 완벽하게 관련된다.

사도행전에는 신자들이 처음으로 성령세례를 받은 다섯 가지 사례가 있다. 이 다섯 가지 사례를 보면서 우리는 두 가지 질문을 지속적으로 물어볼 것이다. (1) 성령세례는 구원받은 후에 경험하는 것인가? (2)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은 새 방언을 말하는가? 이것은 우리가 오늘날 신자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예루살렘(Jerusalem)

첫 번째 예는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120명의 제자가 오순절 날 성령세례를 받은 사건이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 2:1-4, 강조 추가).

이 120명의 신자들이 그 시간 전에 이미 구원받고 거듭났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따라서 그들은 구원받은 후에 성령세례를 경험했음이 확실하다. 그러나 그들이 그 시간 전에 성령세례를 받는 것은 불가능한데 왜냐하면, 성령님은 그날까지 교회에 임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분명히 함께 따라온 표적은 다른 언어로 말하는 것이었다.

사마리아(Samaria)

신자들이 성령세례를 받은 두 번째 예는 사도행전 8장에 기록된 빌립이 사마리아에 내려가서 거기서 복음을 전파한 사건에서 찾을 수 있다.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그들이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그들이 내려가서 그들을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더라(행 8:12-16).

사마리아 그리스도인들은 분명히 구원을 받은 후 성령세례를 받았으며 이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이차적 경험이었다. 성경은 명백하게 베드로와 요한이 도착하기 전에, 사마리아인들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으며,” 복음을 믿고 물 세례를 받았다고 언급했다. 베드로와 요한이 그들을 위해 기도하러 내려왔을 때, 성경은 “그들이 성령을 받기를 기도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이보다 더 분명하게 말할 수 있을까?

사마리아 신자들이 성령세례를 받았을 때 방언을 말하였는가? 성경은 이 부분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았지만, 그들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났음을 밝히고 있다. 시몬이라 하는 사람은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 그리스도인들을 안수했을 때 일어난 일을 보고, 그는 그들에게서 성령을 줄 수 있는 권능을 돈 주고 사려고 하였다.

이에 두 사도가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이르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행 8:17-19).

시몬이 그토록 인상 깊게 본 것은 무엇일까? 그는 이미 사람들에게 붙었던 귀신들이 떠나가고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들이 기적적으로 낫는 등 많은 다른 표적들을 보아왔다(행 8:6-7을 보라). 그 자신도 이전에 마술을 행하여 사마리아의 모든 사람을 놀라게 한 일이 있었다(행 8:9-10을 보라).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할 때 그가 본 것은 굉장히 놀라운 광경이었음이 틀림없었다. 우리가 틀림없이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그가 사도행전에서 매번 그리스도인이 성령세례를 받은 후 나타나는 현상인 – 방언을 말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다메섹에서의 사울(Saul in Damascus)

사도행전에서 세 번째로 언급된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은 나중에 사도 바울로 알려진 다소 사람 사울이다. 그는 자기가 일시적으로 눈이 멀었던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구원받았다. 그가 회심한 후 사흘 뒤,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그를 찾아간다.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 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행 9:17-18).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와서 그를 위하여 기도하기 전에 사울이 이미 거듭났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는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주 예수님을 믿었으며, 즉각적으로 새로운 주님의 지시를 따랐다. 또한, 아나니아 사울을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사울을 “형제 사울”이라고 불렀다. 아나니아는 사울에게 그가 온 것은 사울로 하여금 다시 보게 하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했음을 유의하라. 따라서 사울에게 있어서 성령 충만 또는 성령세례를 받은 것은 그가 구원받은지 사흘 후에 발생했다.

성경은 사울이 성령세례를 받은 실제 사건을 기록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아나니아가 사울이 있던 집에 도착한 직후에 발생했음이 틀림없다. 사울이 어느 시점에 다른 방언을 말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그가 나중에 고린도전서 14:18에서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 언급하였기 때문이다.

가이사랴(Caesarea)

신자들이 성령세례를 받았다는 네 번째 언급은 사도행전 10장에서 발견된다.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의 인도 하심을 따라 가이사랴의 고넬료의 가족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고 전파하자, 그의 모든 이방인 청중들은 바로 믿음으로 응답하였으며, 성령님이 그들에게 내려오셨다.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이에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베풂을 금하리요 하고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 하니라(행 10:44-48상).

이 경우에, 예수님을 믿은 첫 이방인들인 고넬료의 가족들이 동시에 거듭나고 성령세례를 받은 것처럼 보인다.

만일 우리가 이 말씀의 상하문을 검토하고 역사적 맥락을 연구해 보면, 왜 하나님께서 베드로와 그의 동료 신자들이 이방인 신자들에게 성령을 받도록 안수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으셨는지를 알 수 있다. 베드로와 다른 유대인 신자들은 이방인들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믿기 어려워 했으며,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들은 아마도 고넬료 가족이 성령세례를 받도록 기도해 준적도 없었을 것이다. 때문에 하나님은 주권을 행하셨다. 하나님은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에게 이방인들에 대한 그분의 놀라운 은혜에 대하여 가르치셨다.

베드로와 다른 유대인 신자들이 고넬료 가족들이 진정으로 성령을 받은 것을 무엇으로 확신 했을까? 누가는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임이러라”(행 10:46)고 썼다. 베드로는 이방인들이 오순절 날 성령을 받은 120명 같이 성령을 받았다고 선언했다(10:47을 보라).

에베소(Ephesus)

신자가 성령세례를 받았다는 다섯 번째 언급은 사도행전 19장에서 발견된다. 에베소에 와서 사도 바울은 일부 제자들을 만나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였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행 19:2).

신약 서신서의 대부분을 쓴 사람으로서 바울은 분명히 모종 의미에서 성령을 받지 않고도 예수님를 믿는 것이 가능함을 믿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그런 질문을 할 리가 없다.

그 제자들은 자신들이 성령이 계심도 들어보지 못했다고 대답했다. 사실, 그들은 그들에게 세례를 베푼 세례 요한을 통해 단지 오실 메시아에 대해서만 들어봤다. 바울은 즉시 그들에게 물 세례를 다시 베풀었으며, 이번에 그들은 진정한 기독교의 세례를 경험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그들이 성령을 받게끔 그들에게 안수하였다.

그들이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행 19:5-7).

이 열두 사람이 바울을 만나기 전에 거듭났는지 여부를 떠나서, 성령세례는 구원을 받은 후에 받는 것임이 분명하다. 또한, 다시 한 번, 그들의 성령세례를 따랐던 표적은 방언을 말하는 것이었다(이 경우에는 예언도 하였다).

평결(The Verdict)

이 다섯 가지의 실례를 검토해 보자. 그 중 최소한 네 가지 중 성령세례는 구원 이후에 발생한 경험이었다.

그 중 세 가지에서, 성경은 명백하게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이 방언 하였다고 말한다. 또한, 아나니아와 바울의 만남에서, 성령세례를 받은 바울의 경험은 실제로 기록되지 않았지만, 우리는 그가 결과적으로 방언을 말했음을 알고 있다. 그것이 네 번째 실례이다.

나머지 사례에서, 사마리아의 신자들이 성령을 받을 때 뭔가 초자연적인 일이 일어났는데, 왜냐하면, 시몬이 성령을 줄 수 있는 권능을 갖기 위해 돈 주고 사려고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증거는 매우 분명하다. 초대 교회에서, 거듭난 신자들은 성령님에 관한 두 번째 경험을 하였고, 그들이 성령을 받았을 때 방언을 말하였다. 이것은 우리가 놀랄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그분을 믿는 자들이 새 방언을 말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모든 거듭난 사람은 또한, 성령님의 또 다른 역사인 성령세례를 받게 된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있다. 또한, 모든 신자는 자신이 성령세례를 받을 때 다른 방언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해야 한다.

성령세례를 받는 방법(How to Receive the Baptism in the Holy Spirit)

모든 하나님의 선물처럼, 성령도 믿음으로 받는다(갈 3:5을 보라). 성령세례를 받을 믿음을 갖기 위해서, 신자는 반드시 먼저 성령세례를 받는 것이 그를 위한 하나님의 뜻임을 확신해야 한다. 만일 그가 의심하거나 믿지 못한다면, 그는 성령을 받을 수가 없다(약 1:6-7을 보라).

어떤 신자도 성령을 받는 것이 그를 위한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생각할 좋은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 일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명백하게 언급하셨기 때문이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 11:13).

예수님의 이 약속은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성령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할 것이다.

이 구절은 또한, 성령세례를 받는 것이 구원 이후에 발생한다는 사실을 뒷받침 해준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여기서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들이(오직 하나님을 그들의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 여기는 사람들) 성령을 구하면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명백하게, 만일 신자가 성령님을 경험하는 것이 구원 받는 순간 거듭날 때가 전부라면, 예수님의 이 약속은 무의미 하게 된다. 현대 신학자들과는 달리, 이미 거듭난 사람이 하나님께 성령을 구하는 것은 매우 적절하다고 믿으셨다.

예수님에 따르면, 한 사람이 성령을 받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 하나님은 반드시 그 사람의 아버지여야 한다. 만일 당신이 거듭났다면 하나님은 곧 당신의 아버지이다. 둘째, 당신은 반드시 하나님께 성령을 구해야 한다.

비록 안수를 통해 성령을 받는 것이 성경적이지만(행 8:17; 19:6을 보라),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아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도 자신이 기도하던 자리에서 성령을 받을 수 있다. 그는 단순히 구하고, 믿음으로 받으면, 성령님이 그에게 주시는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할 것이다.

일반적인 두려움(Common Fears)

어떤 사람은 그들이 성령을 구하는 기도를 할 때, 악령에 노출될까 봐 우려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에 대한 근거는 없다. 예수님은 이렇게 약속하셨다.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 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는 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 11:11-13).

우리가 성령을 구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주실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다른 무엇을 받을까 봐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일부 사람은 그들이 다른 방언을 말할 때, 성령님이 주신 초자연적인 언어보다는 단지 무의미한 언어를 만들어 낼까 봐 우려한다. 그러나 당신은 성령세례를 받기 전에는 확실한 언어를 만든다는 것이 불가능함을 알게 될 것이다. 반면에, 당신은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당신의 입술, 혀와 성대를 사용해야한다는 점을 알고 있어야 한다. 성령님은 당신을 대신해 말씀하시지 않는다 – 그분은 단지 당신으로 하여금 말하게 하신다. 그분은 우리의 도움이지 일꾼이 아니다. 당신은 반드시 성경이 가르치는대로 사실대로 말해야 한다.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 2:4, 강조 추가).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행 19:6, 강조 추가).

신자가 성령의 선물을 구한 후, 그는 방언할 수 있다고 믿어야 하며 또한, 기대해야 한다. 왜냐하면, 성령은 믿음으로 받기에, 받는 사람은 특정 감정이나 신체적 감각을 체험하기를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그는 단순히 그의 입을 열고 성령님이 그에게 말하게 하신 언어로 새로운 소리와 음절로 말하기 시작해야 한다. 그 신자가 믿음으로 말하지 않는 한, 어떤 말도 그의 입에서 나올 수 없다. 그는 반드시 말해야 하며, 성령님은 말할 것을 주실 것이다.

말씀의 원천(The Source of the Utterance)

바울에 따르면, 신자가 방언기도를 할 때, 그의 마음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영이 기도한다고 한다.

내가 만일 방언기도를 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고전 14:14-15).

바울은 자신이 방언기도를 하면 그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 뜻인즉 그의 마음은 방언기도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그는 방언기도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방언으로 줄곧 기도하기 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언어로, 마음으로 기도하는 데에도 시간을 보냈다. 그는 방언으로 찬송했을뿐 아니라 자신의 언어로도 찬송하였다. 이 두 가지 기도와 찬송은 각기 적합한 상황이 있으며, 우리에게는 바울의 균형 잡힌 모범을 따를 수 있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바울은 자신의 언어로 말하는 것을 제어하듯이 방언도 자기의 의지대로 제어할 수 있었음을 유의하라. 그는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라고 말했다. 비평가들은 종종 현대적인 방언이 진정으로 성령님의 선물이라면, 사람은 방언 말하는 것을 제어할 수 없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그는 하나님을 지배하는 죄를 범하는 것이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근거가 없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것처럼 현대와 고대의 방언도 그것을 말하는 사람들의 통제 아래에 있었다. 비평가들은 또한, 사람의 두 손도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확실하기에 사람은 그것에 대한 제어권이 없으며, 사람이 의식적으로 자신의 손을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을 지배하려는 시도와 같다고 말할 수도 있다.

당신이 일단 성령세례를 받고 나면, 방언이 마음이 아닌 영에서 나옴을 자신한테 쉽게 증명할 수 있다. 먼저, 이 책을 읽는 동시에 다른 사람과 대화하기를 시도해보라. 당신은 이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할 수 없음을 발견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이 책을 읽으면서 방언도 계속적으로 할 수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그 이유는 당신이 자신의 마음으로 방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방언은 당신의 영으로부터 나온다. 그러므로 당신은 영으로 기도하는 동시에 마음으로 읽고 이해할 수 있다.

당신이 성령세례를 받았기 때문에(Now That You Are Baptized in the Holy Spirit)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성령세례를 베푸신 주요 이유를 명심하라 – 당신으로 하여금 성령의 열매와 은사를 나타내는 그분의 증인이 되도록 권능을 주시기 위함이다(고전 12:4-11; 갈5:22-23을 보라). 하나님은 당신이 그리스도를 닮은 삶을 살고 그분의 사랑, 희락, 그리고 화평을 이 세상에 드러내고, 성령님의 초자연적인 은사를 나타내는 것을 사용하셔서 다른 사람들을 그분께로 인도하실 것이다. 방언할 수 있는 능력은 내면으로부터 흐르는 “생수의 강”의 일종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님을 주신 것은 우리가 이 땅의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들고 나아가도록 하기 위함임을 기억하라(행 1:8을 보라). 우리는 다른 방언으로 말할 때, 우리가 말하는 언어가 멀리 떨어진 부족 또는 외국 국가의 모국어일 수도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우리는 매번 방언기도를 할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언어의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 들어보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예수님의 지상 명령을 이루기 위해 우리가 어떻게 하기를 원하시는지를 물어야 한다.

우리는 될수록 방언을 많이 말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영적 거장인 바울은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 썼다. 그는 이 말을 방언을 많이 하는(비록 늘 적절하지 않은 시간에 하는) 교회에 썼다. 따라서, 바울은 그들보다 방언을 더 많이 하였음이 틀림없다. 방언기도를 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을 감찰하고, 바울이 데살로니가 전서 5:17에서 가르친 것처럼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게끔 도와준다.

바울은 또한,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운다고 가르쳤다(고전 14:4을 보라). 그것은 방언이 우리를 영적으로 세워간다는 의미이다. 방언기도를 함으로써, 우리는 어느 정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우리의 속사람을 강건하게 한다. 다른 방언을 말하는 것은 모든 신자의 영적인 삶을 풍성하게 해야 하며, 단지 처음 성령 충만을 받았을 때의 일회적인 경험에 머물지 말아야 한다.

일단 당신이 성령세례를 받았다면, 나는 당신이 날마다 시간을 내어 하나님께 당신의 새로운 언어로 기도하기를 권장한다. 그것은 당신의 영적인 삶과 성장을 크게 향상시킬 것이다.

몇 가지 일반적인 질문에 대한 답변(Answers to a Few Common Questions)

우리는 방언을 말한 적이 없는 모든 사람은 성령세례를 받은 적이 없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개인적으로,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나는 내가 사람들이 성령세례 받기를 위해 기도할 때 항상 그들에게 방언으로 말하기를 기대하라고 격려한다. 그리고 그들 중 아마 95%는 내가 기도한지 몇 초 내에 방언을 받게 된다. 지난 몇 년 동안 그 인수는 수천 명에 달한다.

그러나 나는 성령세례 받기를 기도한 그리스도인이 방언을 받지 못했다고 해서 그가 성령세례를 받지 못했다고 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성령세례는 믿음으로 받으며 방언은 자원적으로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내가 성령세례 받기를 기도했으나 방언으로 말한 적이 없는 신자와 교제할 기회가 있다면, 나는 먼저 그에게 이 주제에 관한 사도행전의 모든 말씀을 보여줄 것이다. 그다음에 나는 또한, 그에게 바울이 방언을 말할지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고 썼음을 보여줄 것이다. 나는 바울처럼, 내가 원할 때 수시로 방언으로 말할 수 있으며, 따라서 나는 내가 원한다면 영원히 방언으로 말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릴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성령세례를 받고도 성령님과 동역하지 않은 채 처음부터 방언을 말할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다시 한 번, 나는 성령세례를 받기 위하여 믿음으로 기도했지만, 방언을 말한 적이 없는 그리스도인과 교제할 때마다, 나는 그가 성령세례를 받지 못했다고 말하지 않는다(또한, 그렇다고 믿지도 않는다). 나는 그저 그에게 방언을 말하는 것이 성령님이 우리를 떠나서 하는 일이 아님을 설명해 준다. 나는 성령님이 말씀을 주시지만, 우리가 자기의 언어로 말을 할 때와 같이 우리도 반드시 입을 열어 말을 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그다음에 나는 그 사람이 성령님과 동역하여 방언을 말할 수 있도록 권장한다. 거의 예외 없이, 모든 사람이 방언을 말하게 된다.

바울은 모든 사람이 다 방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는가?(Didn’t Paul Write that Not All Speak with Tongues?)

바울의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고전 12:30)는 수사학적 질문에 대한 명백한 대답은 “아니”이며, 그것은 반드시 신약의 나머지 부분과 조화되어야 한다. 그의 질문은 성령님의 뜻에 따라 나타나는 영적 은사들에 대한 그의 가르침에서 찾을 수 있다(고전 12:11을 보라). 바울은 특별히 “각종 방언 말함”(고전 12:10)은 반드시 항상 방언을 통역하는 영적 은사와 함께 동반되어야 한다고 썼다. 이 특별한 은사는 고린도 교회 신자들이 자신들의 교회에서 아무런 통역도 없이 공개적으로 했던 방언의 은사가 아니다. 우리는 왜 성령님이 공중 집회에서 한 사람에게 방언의 은사는 주시면서 다른 한 사람에게 통역의 은사는 주시지 않는지에 대해 물어야 할 것이다. 답은 성령님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성령님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 무언가를 추진하고 있는 것이 된다.

고린도 신자들은 예배시간에 통역이 없이 방언기도를 큰소리로 했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우리는 방언을 말하는 것이 두 가지 용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는 바울이 개인적으로 해야 한다고 했던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바울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고 말한 것처럼 그런 방언기도의 용도는 통역이 동반되지 않았다. 분명한 것은, 바울이 그가 한 방언의 내용을 항상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이해할 수 없었으며 통역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교회의 대중 집회를 위한 방언의 용도도 있는데, 그것은 항상 통역의 은사를 동반한다. 그것은 성령님이 그분의 뜻을 따라 한 사람에게 방언의 은사를 줄 때 발생한다. 그 사람은 대중적으로 방언하게 되며, 그다음에 통역이 주어진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다 그렇게 사용하시지는 않는다. 그것이 바로 바울이 모든 사람이 다 방언을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 이유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통역의 은사를 주셔서 사용하시지 않는 것처럼 모든 사람이 다 갑지가 방언을 받고 사용받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성경의 나머지 부분의 가르침과 바울의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는 수사학적 질문을 조화시키는 유일한 방법이다.

나는 바울처럼, 원하면 언제든지 방언으로 말할 수 있다. 때문에 바울이나 나 자신이나 누구도 우리가 방언을 말할 때마다, 그것이 “오직 성령님의 뜻”대로 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것은 우리의 뜻대로 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원할 때마다 하는 방언은 오직 “성령님의 뜻”에 따라 하는 방언의 은사일 수 없다. 또한, 바울은, 나처럼, 그가 한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개인적으로 방언을 말하였으므로, 그것은 그가 고린도전서에서 쓴 항상 통역의 은사를 동반한 방언의 은사일 수 없다.

내가 대중 집회에서 방언을 말한 적은 매우 드물다. 비록 내가(고린도 신자들이 했던 것처럼) 원할 때마다 교회에서 어떤 통역도 없이 큰 소리로 방언기도를 할 수 있지만, 나는 성령님의 감동이 있을 때에만 그렇게 하였다. 내가 성령님의 감동을 감지했을 때마다, 항상 통역이 있음으로 하여 지체를 세워갔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균형을 잡아야 한다. 때문에 고린도전서 12:30에 기록된 바울의 수사학적 질문으로 인하여 다 방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결론짓는 사람은 그들의 해석과 조화되지 않는 다른 많은 성경 말씀들을 무시하고 있다. 그들의 오류로 말미암아, 그들은 하나님의 큰 축복을 놓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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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th Korean » 성령세례(The Baptism in the Holy Spirit)

예수님이 좋아하신 설교자(Jesus’ Favorite Preacher)

제 9 장 (Chapter Nine)

당신은 예수님도 좋아하시는 설교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면 놀랄 수 있다. 그리고 당신을 더 놀라게 하는 것은 예수님이 가장 좋아하신 설교자는 루터교, 감리교, 오순절 파, 성공회, 또는 장로교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히려, 그는 침례교였다! 물론, 우리는 그를 세례 요한으로 알고 있다! 예수님은 그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마 11:11 상).

모든 사람이 다 “여자가 낳은 자”이므로 이 말의 뜻인즉 예수님이 보시기에 세례 요한은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왜 이렇게 생각하셨는지는 추측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요한의 영적 자질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를 높이 생각하셨다고 보는 것은 합리적이다. 이 경우, 우리는 그러한 영적 자질에 대해 공부하고 본받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나는 세례 요한에게서 적어도 7가지 칭찬할 만한 영적 자질을 발견했다. 비록 요한의 사역이 전도자의 사역을 가장 잘 나타내지만, 7가지 영적 자질은 복음의 모든 사역자들에게 적용된다. 먼저 첫 번째 영적 자질을 생각해 보자.

요한의 첫 번째 자질(John’s First Quality)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과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언이 이러하니라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또 묻되 그러면 누구냐 네가 엘리야냐 이르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또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이르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요 1:19-23).

요한은 자신의 소명을 알고 그것을 추구하였다.

사역자에게 있어서 자신의 소명을 알고 그것을 추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만일 당신이 전도자라면, 목사가 되려고 해서는 안 된다. 만일 당신이 교사라면, 선지자 노릇 하려 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좌절감만 느낄 것이다.

어떻게 당신의 소명을 알 수 있을까? 먼저, 당신을 부르신 주님께 구하라. 둘째로, 당신의 은사를 점검하라. 만일 하나님께서 당신을 전도자로 부르셨다면, 그분은 당신이 그 사명을 감당하게끔 당신을 준비시키실 것이다. 그리고 셋째로, 다른 사람들을 통하여 당신의 은사를 확실하게 확인한다.

당신이 일단 소명을 확신한다면, 당신은 그것을 전심으로 추구해야 하며, 아무런 장애물도 방애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많은 사람은 단지 하나님이 그분께서 그들이 하기를 바라시는 일을 해주시기만 기다리고 있다. 노아는 하나님이 방주를 만들어주시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사람은 사역이라고 생각한다. 사탄은 반드시 당신이 소명을 이루지 못하도록 애쓸 것이지만, 당신은 그를 물리치고 믿음으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비록 성경이 우리에게 말해주지 않았더라도, 당신은 요한이 처음으로 요단 지역 주변에서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했을 때, 처음 모인 청중이 나중의 청중보다 훨씬 적었고, 그는 사람들의 조롱과 박해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멈추지 않았다. 그의 유일한 목표는 자신의 사역에 그를 부르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었다. 궁극적으로, 그는 성공했다.

우리가 본받아야 할 요한의 첫 번째 영적 자질은 바로 요한은 자신의 소명을 알았고 그것을 추구하였다는 것이다.

요한의 두 번째 자질(John’s Second Quality)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말하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마 3:1-2).

예수님은 요한의 단순한 메시지를 의심할 여지 없이 매우 흡족히 여기셨는데, 그것은 그 메시지가 예수님이 어디로 가시든지 늘 전파하셨던 메시지와 같았기 때문이다(마 4:17을 보라). 요한은 사람들이 회개 – 죄의 삶에서 의로운 삶으로 돌이키는 것 – 하라고 전파하였다.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는 회개로 시작하며,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지옥에 던져진다는 것을 알았다.

수많은 현대적인 복음 전도자들과는 달리, 요한은 종래로 하나님의 사랑을 언급하지 않았다. 또한, 그는 의미 없는 “예수님을 영접하는” 기도를 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느낌의 욕구”에 대해 말하지 않았으며, 그 기도를 하면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이 단지 행위로써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만 인정한다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천국에 데려가고 싶을 만큼 기본적으로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끔 인도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이 그들을 보시는 것처럼 그들을 보았다 — 그들은 모두 하나님께 반역하고, 죄 때문에 영원한 형벌을 받아야 할 위험에 놓여 있었다. 그는 엄숙하게 그들에게 다가올 진노에 대해 경고했다. 그는 그들이 자신의 마음과 행동을 변경하지 않을 경우 멸망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했다.

그러므로 모든 제자 삼는 사역자들이 본받아야 할 요한의 두 번째 영적 자질은 바로 요한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회개가 첫 번째 단계임을 선포했다는 것이다.

요한의 세 번째 자질(John’s Third Quality)

이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마 3:4).

요한은 확실히 현대의 “성공적인 설교자”의 그림과는 맞지 않다. 사실, 그들은 절대로 요한과 같은 설교자를 그들의 교회에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성공의 옷을 입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한은 진정으로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며, 땅의 보물을 추구하거나 겉모습으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사람이 아니며, 하나님은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이심을 아는 사람이다. 그는 소박한 삶을 살았고, 그의 생활방식은 누구도 실족하게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의 동기가 돈이 아님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개인의 이득을 위해 복음을 이용하는 전 세계 많은 현대적인 사역자들과 큰 대조를 이룬다. 그들이 예수님을 잘못 전한 탓에 그리스도의 사역에 큰 피해를 주었다.

예수님이 좋아하시는 설교자가 될 수 있는 요한의 세 번째 자질은 바로 세례 요한은 검소한 생활을 했다는 것이다.

요한의 네번째 자질(John’s Fourth Quality)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아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눅 3:7-8).

요한은 사역이 전개됨에 따라 더욱 많은 사람을 만나기 시작하였지만, 그는 분명히 자신의 메시지를 타협하지 않았다. 세례가 인기를 얻기 시작함으로 인해, 요한은 심지어 사람들이 세례를 받는 동기를 의심했을 수도 있다. 심지어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요단까지 찾아왔다(마 3:7). 그는 많은 사람이 단지 분위기에 편승할까 봐 두려웠다. 그래서 그는 그들이 자기 자신을 속이지 않게 하려고 최선을 다했으며 그들의 모든 속임수를 까밝히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누구도 단지 세례를 받음으로 구원받거나 회개를 입으로 한다고 하여 지옥으로부터 구해준다고 생각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는 진정한 회개는 순종의 열매를 맺는다고 경고했다.

또한, 많은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혈통으로 인해 구원받는다고 여겼기 때문에 요한은 그런 생각의 오류를 폭로하였다.

요한의 네번째 칭찬할만한 자질은 바로 그는 사람들을 사랑하기에 진실을 말할 수 있었으며, 종래로 회개하지 않은, 거룩하지 않은 사람에게 천국을 보장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요한의 다섯 번째 자질(John’s Fifth Quality)

요한은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세례를 주지 않았으며 그들의 자기기만을 북돋아 주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들의 죄를 자복한” 사람들에게만 세례를 베풀었다(마 3:6). 그는 그에게 나아온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에게 이렇게 경고하였다.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 3:10, 12).

요한은 지옥에 관한 진실을 말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의 영혼을 얻는 데 노력하기보다 사람들의 인기를 더 원하는 설교자들에 의해 종종 회피된다. 요한은 오직 거룩한 자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한다는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주제를 선포하는 데 실패하지 않았다.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자들은 불에 던져질 것이다.

만일 요한이 오늘날 살아 있다면, 그는 많은 자칭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어둠과 죽음의 선지자”, “지옥의 유황불 설교자”, “구도자 맞춤형”이 아닌 “부정적”이고 “비판적”이며, “율법주의”이거나 “독선적”이라고 비난받았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요한은 예수님이 가장 좋아하신 설교자이었다. 그의 다섯 번째 자질은 바로 요한은 지옥에 대해 설교했으며 어떤 종류의 사람들이 지옥에 가는지를 명확하게 밝혔다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누가는 요한의 메시지를 “좋은 소식”이라고 하였다(눅 3:18).

요한의 여섯 번째 자질(John’s Sixth Quality)

비록 요한은 하나님께 크게 쓰임받고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었지만, 그는 예수님에 비하면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항상 그의 주님을 높였다.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마 3:11).

요한의 자기 평가는 오늘날 “사역자들”에 의해 너무 자주 과시되는 교만과는 많은 대조를 이룬다. 그들의 다채로운 사역 잡지는 온통 그들의 사진으로 가득하며 예수님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다. 그들은 마치 공작새처럼 교회 강단에서 으스대며, 회중들 앞에서 스스로를 높인다. 그들은 거만함으로 가득 차 있으며 사람들과 거리를 두려 한다. 일부는 심지어 천사들과 하나님까지 명령한다! 그러나 요한은 자신을 예수님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할 존재라고 생각했다. 당시 그것은 비천한 노예의 행동으로 간주되었다. 그는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러 그에게 나아오셨을 때 세례 베풀기를 거절하였으며,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안 즉시로 모든 사람에게 그분을 가리키며 그분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라고 선언하였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30)는 요한의 겸손한 좌우명이 되었다

요한으로 하여금 예수님이 좋아하시는 설교자가 되도록 한 여섯 번째 자질은 바로 요한은 자신을 낮추고 예수님을 높이셨다는 것이다. 그는 자기를 높이려는 욕구가 없었다.

 

요한의 일곱 번째 자질(John’s Seventh Quality)

현대의 설교자들은 다른 사람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기 위해 종종 모호한 말로 설교한다. 이 설교하는 것이 얼마나 쉬운 “하나님은 우리가 옳은 일을 하기를 원하신다!”고 설교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진짜와 가짜 그리스도인은 모두 그 같은 설교에 “아멘”으로 응답할 것이다. 많은 설교자들은 또한, 세상의 수치스러운 죄는 지속적으로 되풀이하면서 교회 내의 유사한 죄에 대한 언급은 피하려 한다. 예를 들어, 그들은 포르노에 대해서는 호되게 꾸짖지만, 교구민들이 준성인 영화와 부도덕한 비디오를 관람하고 심지어 수집하는 것에 대해서는 언급하기를 두려워한다. 사람에 대한 두려움은 그들을 함정에 빠뜨린다.

그러나 요한은 구체적으로 설교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누가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무리가 물어 이르되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대답하여 이르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이르되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 하고 군인들도 물어 이르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이르되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눅 3:10-14).

요한의 여섯 가지 특정된 지침 중 다섯 가지는 돈이나 물질에 관련된 것이라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요한은 청지기직에 대해 설교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황금률과 두 번째 큰 계명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요한은 새로운 “신자”가 이렇게 “어려운”개념을 받아들일 준비가 될 때까지 몇 년 동안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는 것이 불가능하기에, 청지기직은 처음부터 아주 중요한 것이라고 믿었다.

이것은 또 다른 요점을 이끌어낸다. 요한은 사소한 것 때문에 큰 것을 잃지 않고, 의복과 외적인 거룩함에 대한 문제를 되풀이하지 않았다. 그는 “율법의 더 중한 바”(마 23:23)에 초점을 두었다. 그는 우리가 우리의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하고 우리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해야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함을 알았다. 그 의미인즉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기본적인 필수품이 부족한 사람들과 나누고, 다른 사람들을 성실하게 대하고, 자기가 소유한 것에 만족하라는 뜻이다.

요한의 예수님께 사랑받는 일곱 번째 자질은 다음과 같다. 요한은 모호한 일반론식 설교를 하지 않았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해야 할 일, 심지어 청지기 직분에 대해서까지 구체적으로 언급하였다. 그리고 그는 초점을 가장 중요한 것에만 두었다.

 

결론(In Conclusion)

물론, 목사나 교사의 사역은 요한의 주제보다 더 광범위한 특징이 있다. 요한은 회개하지 않은 자들에게 설교하였다. 목사들과 교사들은 주로 이미 회개한 사람들을 가르치는 경우가 많다. 그들의 가르침은 예수님께서 그분의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들과 신약의 서신서 기록에 기반을 둔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우리의 청중들을 정확하게 분별하지 못한다. 그리고 오늘날 목사들은 죄인들을 마치도 성도처럼 여기고 설교한다. 단지 사람들이 교회 건물 안에 앉아 있다고 해서 그들에게 구원을 확신시켜주는 것이 우리의 일인 것은 아니다. 특히 그들의 삶이 세상 사람들의 삶과 본질적인 구별이 없다면 말이다. 오늘날 우리는 수백만 명의 “세례 요한”같은 설교자가 교회강단에서 설교하기를 절박하게 수요하고 있다. 당신은 이 도전에 응할 것인가? 당신은 예수님이 좋아하시는 설교자 중 한 명이 되고 싶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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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th Korean » 예수님이 좋아하신 설교자(Jesus’ Favorite Preacher)

새 생명(The New Birth)

제 10 장 (Chapter Ten)

사람들이 회개하고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면, 그들이 “거듭났다”고 한다. 거듭났다는 것은 정확히 무슨 뜻일까? 이 장에서 그 의미에 대해 알아볼 것이다.

거듭남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사람의 본성을 이해하는 것이 도움된다. 성경은 우리가 단지 육적인 존재가 아닌 영적인 존재라고 말씀한다. 예를 들어, 바울은 이렇게 썼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희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 5:23, 강조 추가).

바울이 지적한 것처럼, 우리는 자신을 영, 혼, 몸 세 부분으로 구성된 존재로 간주할 수 있다. 성경에는 이 세 부분에 대한 정확한 정의가 없기에, 우리는 될 수 있는 한 그 단어들이 가지고 있는 원래의 의미에 근거하여 그들 사이를 구분 지었다. 우리는 보통 우리 을 우리의 육적인 존재 – 육체, 뼈, 혈액 등으로 보고, 우리의 은 우리의 지성과 감성적인 존재 – 우리의 마음으로 본다. 우리의 은 분명히 우리의 영적인 존재 또는 사도 베드로가 묘사한 것처럼 “마음에 숨은 사람”(벧전 3:4)으로 볼 수 있다.

육적인 눈으로는 영을 볼 수 없기에,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그것의 존재의 믿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모두 영적인 존재임을 매우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성경은 우리에게 사람이 죽으면 몸은 기능을 중단하나 영과 혼은 계속하여 살아 있음을 알려준다. 사람이 죽을 때에는 몸을 떠나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되며(히 9:27을 보라), 심판 후에는, 천국 혹은 지옥으로 가게 된다. 결국, 모든 사람의 영과 혼은 부활 시에 자신의 몸과 다시 재결합하게 될 것이다.

인간의 영에 대한 더 자세한 정의(The Human Spirit More Defined)

베드로 전서 3:4에서, 베드로는 영을 “마음에 숨은 사람”이라고 표현하며 영도 사람임을 나타냈다. 바울 역시 영을 “속사람”으로 표현하며, 인간의 영은 단지 개념이나 힘이 아닌 한 사람임을 나타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강조 추가).

“겉사람”은 분명히 육적인 몸을 설명한 반면, “속사람”은 영에 대한 정의이다. 몸은 날로 낡아지지만, 영은 날로 새로워진다.

바울이 몸과 영을 모두 사람이라고 한 점을 다시 유의하라. 따라서 당신이 자신의 영을 상상할 때 영적인 구름 따위는 상상하지 말라. 당신과 같은 형상을 가진 사람을 상상하는 것이 더 좋다. 그러나 만일 당신의 몸이 늙었다고 해서 당신의 영도 늙어 보인다고 생각하지 말라. 자신이 가장 혈기왕성했을 때의 모습을 상상하라, 왜냐하면, 당신의 영은 영원히 늙지 않기 때문이다. 당신의 영은 날로 새로워지고 있다.

만일 당신이 주 예수님을 믿고 거듭났다면 당신의 영도 거듭나게 된다. 당신의 영은 하나님의 성령님과 합하여 지며(고전 6:17을 보라), 성령님은 당신이 예수님을 따르도록 인도해준다(롬 10:14을 보라).

성경은 하나님이 영이시라고(요 4:24을 보라) 가르치며, 천사와 마귀도 영이다. 그들은 모든 형태가 있으며 모두 영적인 영역에 존재한다. 그러나 영적인 영역은 우리의 육체적 감각으로는 감지할 수 없다. 우리의 육체적 감각으로 영적 세계를 감지하려는 것은 손으로 라디오 신호를 느끼려는 것과도 같다. 우리가 육체적 감각으로 객실 안의 라디오 전파를 감지할 수는 없다고 해서 라디오 전파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라디오를 청취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라디오를 켜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영적인 영역에도 해당된다. 육체적인 감각으로 영적인 영역을 감지할 수 없다고 해서 그것의 존재를 부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영적인 영역은 분명히 존재하며, 사람들이 알든 모르든, 그들도 영적인 존재이기에 이 영적인 영역에 속해 있다. 그들은 영적으로 사탄과 관련되어 있거나(그들은 회개하지 않은 경우), 또는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다(그들이 거듭난 경우). 일부 심령술사들은 자신의 영을 통해 어떻게 영적인 세계와 접촉하는지를 배웠다. 하지만, 그들은 사탄의 지배 영역인 어둠의 나라와 연락하고 있다.

영원한 몸(Eternal Bodies)

이 주제에 들어가기 전에 나는 우리의 몸에 대한 언급을 잠깐 하도록 하겠다. 비록 우리의 몸은 죽기 마련이지만, 우리의 육체적 죽음은 영구적이지 않다. 하나님께서 언젠가는 모든 죽은 사람의 몸을 부활시키실 것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8-29).

사도 요한은 계시록에서 의인의 몸이 부활한 뒤 적어도 천 년이 지난 후에야 불의한 자들의 몸이 부활할 것이라고 썼다.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노릇 하니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 번째 부활이라[1]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계 20:4 중-6).

성경은 또한,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교회를 데려가실 때, 모든 의인의 몸이 부활하고, 예수님과 함께 천국에서 내려온 그들의 과 결합할 것임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처럼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4:14-17).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최초의 사람을 지으셨으므로, 그분께서 모든 사람의 몸의 요소를 재결성하여 같은 물질로 구성된 새로운 몸을 만드시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 몸의 부활에 관해 바울은 이렇게 썼다.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고전 15:42-44상, 50-53).

우리의 새로운 몸은 썩지 않고 죽지 않는 뛰어난 특성들을 갖고 있음을 유의하라. 새로운 몸은 결코 늙거나, 병 들거나, 죽지 않는다! 우리의 새로운 몸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받은 새로운 몸처럼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화게 하시리라(빌 3:20-21, 강조 추가).

사도 요한도 이 놀라운 사실에 대해 단언하고 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요일 3:2, 강조 추가).

비록 우리의 생각으로 이것을 완전히 이해하기가 불가능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믿고 앞에 일어날 일에 대해 기뻐할 수 있다![2]

예수님께서 중생을 논하시다 (Jesus on the New Birth)

어느 한 번, 예수님은 니고데모란 유대인 지도자에게 인간의 영은 반드시 성령님에 의하여 거듭날 수 있음을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요 3:3-7).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거듭나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니고데모가 처음 들었을 때에, 그는 육체적인 중생에 대해 말씀하시는 줄로 알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적인 거듭남을 말씀하셨음을 명확히 하셨다. 바로 사람의 영은 반드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영적인 거듭남이 필요한 이유는 바로 우리의 영이 죄악에 물든 본성에 감염되었기 때문이다. 죄의 본성은 성경에서 종종 죽음으로 언급되어 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우리는 죄의 본성을 영적 죽음으로 볼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영적 죽음과 육체적 죽음(육체적인 몸이 기능을 멈출 때)을 구별할 수 있게 된다.

영적 죽음의 정의(Spiritual Death Defined)

바울은 에베소서 2:1-3에서 영적 죽음이 무슨 의미인지를 설명하였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강조 추가).

바울은 분명히 육체적 죽음을 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육체적으로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이 편지를 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그들이 “허물과 죄로 죽었었다”고 말했다. 그 죄가 바로 영적 죽음으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롬 5:12을 보라). 영적으로 죽어 있다는 것은 영에 죄의 본성이 있다는 의미이다. 바울이 그들을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고 한 점을 유의하라.

또한, 영적으로 죽어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영이 사탄의 본성을 지니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바울은 “공중의 권세 잡은 자”의 영이 영적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 역사한다고 말했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는 의심의 여지 없이 마귀이며(엡 6:12을 보라), 그 악의 영들은 모든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 가운데 역사한다.

예수님은 거듭나지 못한 유대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요 8:44).

영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 사탄의 본성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영적 아버지가 바로 사탄이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마귀처럼 행동한다. 그들은 살인자들이며 거짓말쟁이들이다.

모든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살인을 한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살인자와 같은 증오를 품고 있으며, 살인의 대가를 치르지 않는다면 그들도 살인할 수 있다. 많은 나라에서 이루어지는 낙태의 합법화가 그 사실을 증명한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심지어 자신의 태아조차 살해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영적인 거듭납을 경험해야 하는 이유이다. 영적으로 거듭나면 죄의, 사탄의 본성은 그의 영에서 제거되며 하나님의 거룩한 본성으로 대체된다. 하나님의 성령님은 그의 영에 오셔서 그와 함께 거하신다. 그는 더는 “영적으로 죽은”자가 아니며, “영적으로 살아 있는”자로 거듭났다. 그의 영은 하나님에 대하여 더는 죽은 것이 아닌 산 것이 되었다. 그는 사탄의 영적 자녀 대신, 하나님의 영적 자녀가 되었다.

변화는 거듭남의 대체물이 아니다(Reformation is No Substitute for Regeneration)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영적으로 죽어있기에, 그들이 자기변화를 어떻게 열심히 하든 상관없이 구원을 받지 못한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단지 외적인 행위변화가 아닌 새로운 본성을 필요로 한다. 당신이 돼지를 아무리 깨끗하게 목욕시키고, 향수를 뿌려주고, 목에 분홍색 리본을 달아준다 해도 돼지는 돼지일 뿐이다! 돼지의 본성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그리고 당신은 얼마 지나지 않아 곧 더러운 냄새를 맡게 되며 돼지가 다시 진흙위에 누워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거듭나지 않은 종교인에게서도 볼 수 있다. 그들은 겉으로는 좀 깨끗해 보일 수 있지만, 속은 여전히 더러운 모습 그대로이다. 예수님은 일부 종교적인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눈 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처럼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마 23:25-28).

예수님의 이 말씀은 종교적이지만 성령님에 의한 거듭남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적절한 설명이다. 새롭게 거듭나면 겉사람뿐 아니라 속사람도 깨끗하게 해준다.

영이 거듭나면 혼은 어떻게 될까?(What Happens to the Soul When the Spirit is Reborn?)

사람의 영이 거듭나면, 그의 혼은 처음에는 본질적인 영향을 받지 않는다(그가 마음속으로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결정을 이미 내린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일단 그분의 자녀가 되면, 우리가 우리의 혼에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하기를 기대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대로 우리가 생각하기 위해서 우리의 혼(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새롭게 함을 받아야 한다. 우리가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삶 속에 지속적인 외적인 변화가 일어나며 우리는 점진적으로 예수님을 닮아가게 된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 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강조 추가).

야고보도 신자의 삶 속에 일어나게 되는 똑같은 과정을 썼다.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약 1:21하).

야고보가 영이 이미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에게 썼음을 유의하라. 그들의 혼도 구원을 필요로 하며, 그것은 오직 그들이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을 때에만 일어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새 신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반드시 가르쳐야 하는 이유이다.

남아 있는 옛 본성(The Residue of the Old Nature)

새롭게 태어난 후에,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두 본성을 가진 사람임을 발견하게 되는데, 곧 바울이 말한 “성령과 육체”사이의 전쟁을 경험하게 된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갈 5:17).

바울이 “육체”라고 부른 것은 바로 옛 죄의 본성을 말한다. 우리안에 있는 이 두 가지 본성은 부동한 소욕을 산생하며, 각각 다른 행동과 생활방식을 낳게 된다.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에 대한 바울의 대조적인 비유를 유의하라.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19-23).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은 육체의 소욕을 따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바울은 그들이 육체의 일을 행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경고하지 않았을 것이다. 로마서에서도, 바울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가지고 있는 두 본성에 대해 썼으며, 육신대로 살면 똑같은 결과를 가져온다고 경고하였다.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라…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0, 12-14, 강조 추가).

이것은 분명히 그리스도인에 대한 경고이다. 육신대로 살면(이것은 상습적인 행위를 나타낸다) 죽음의 결과를 낳게 된다. 바울은 영적 죽음에 대해 경고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결국 육체적으로 죽기 마련이며,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인” 그리스도인들도 육체적인 죽음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일시적으로 바울이 언급한 죄 중의 하나에 빠질 수 있다. 그러나 신자는 죄를 지었을 때에 죄책감을 느끼며 회개하기를 원할 것이다. 누구든지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는 자는 당연히 깨끗하게 될 것이다(요일 1:9을 보라).

그리스도인이 죄를 지었다고 해서 그와 하나님사이의 관계가 파괴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만 그와 하나님사이의 교제를 파괴한 것이다. 그는 여전히 하나님의 자녀이나 불순종하는 자녀이다. 만일 신자가 자신의 죄를 자백하지 않는다면, 그는 주님의 징계를 받게 될 처지에 놓이게 된다.

전쟁(The War)

만일 당신이 잘못된 일임을 분명히 알면서도 그 일을 하기를 원한다면, 당신은 “육체의 소욕”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당신은 육신의 유혹을 받아 잘못을 저지르려고 할 때, 당신안에 그 유혹에 저항하는 무언가가 있음을 발견했음이 틀림없다. 그것이 바로 “성령의 소욕”이다. 그리고 당신이 유혹을 받을 때 내면으로부터 오는 정죄감을 느꼈다면, 당신은 당신의 영의 음성을 들은 것이며 우리는 그것을 “양심”이라고 부른다.

하나님은 우리가 육체의 소욕의 유혹을 받아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을 잘 아신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육체의 소욕에 굴복하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는 변명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가 순종과 거룩함으로 행동하고 육체의 본성을 극복하기를 바라신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

육체의 소욕을 극복하기 위한 마법의 공식 같은 것은 없다. 바울은 그저 우리가 “성령을 따라 행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할 것이라”고만 말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어떤 그리스도인도 다른 그리스도인에 비해 우세가 없다. 성령님을 따라 행하는 것은 우리 각자가 반드시 내려야 할 결정이며, 주님에 대한 우리의 헌신 정도는 우리가 육체의 소욕을 따르지 않는 정도에 의해 측정될 수 있다.

바울은 이와 비슷한 내용을 썼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

바울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은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말한다. 그것은 우리가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을 때 발생하였다. 우리는 죄의 본성을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께 순종하고 죄를 거부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래서 지금은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는 문제가 아니라 육체가 십자가에 못 박혀 있도록 유지하는 문제이다.

육체가 십자가에 못 박혀 있도록 유지하기가 쉽지는 않지만 가능하다. 만일 우리가 속사람의 인도를 따라 행하고 육체의 충동에 굴복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나타내게 되며 그분 앞에서 거룩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우리의 재창조된 영의 본성(The Nature of our Recreated Spirits)

우리의 재창조된 영의 본성을 가장 잘 표현한 단어가 있는데 그 단어가 바로 그리스도시다. 예수님과 같은 본성을 가진 성령님을 통해, 사실 예수님의 본성은 우리안에 거하신다. 바울은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 2:20)고 말했다.

우리가 그분의 능력과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처럼 살 수 있는 놀라운 가능성이 있다. 우리는 실제로 더 많은 사랑, 인내, 또는 자제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우리안에는 가장 많은 사랑과 인내와 자제력을 가지신 분이 살아계신다! 우리가 해야 할 모든 것은 다만 그분께서 우리를 통해 사시게 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예수님의 본성과 맞서 싸우며, 예수님의 본성이 우리를 통해 드러나지 못하도록 방애하고 있는 하나의 큰 적수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의 육체이다. 우리가 반드시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고 바울이 말할 만도 하다. 육체를 다루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며, 하나님께 그것에 대해 뭔가를 해달라고 간구하는 것은 시간 낭비이다. 바울도 역시 그의 육체적 본성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으나, 그는 자신이 책임지고 극복하였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당신도 주님 앞에 거룩한 모습으로 나아가려면 역시 당신의 몸을 영의 노예로 삼아야만 한다. 당신은 할 수 있다!

 


[1]요한이 이것이 “첫째 부활”이라는 말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이 부활 전에 다른 대규모의 부활이 없었음을 믿게 한다. 그것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세계적인 환란의 끝에 일어나기 때문에, 환란전 휴거와 모순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데살로니가 전서 4:13-17의 기록에 따라 예수님이 강림하셔서 교회가 휴거할 때 대량의 부활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에 대하여 휴거와 마지막 때에 관한 장에서 더 자세하게 다룰 것이다.

[2]부활의 주제에 대한 자세한 연구를 위해 단 12:1-2; 요 11:23-26; 행 24:14-15; 고전 15:1-57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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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th Korean » 새 생명(The New Birth)

산상수훈(The Sermon on the Mount)

8 장 (Chapter Eight)

제자를 삼고, 그들을 그리스도 모든 계명에 순종하게끔 가르치려는 소망 때문에 제자 삼는 사역자는 예수님의 산상수훈에 매우 깊은 관심을 둘 것이다. 산상수훈은 예수님의 가장 긴 설교이며, 그분의 계명으로 가득 찼다. 제자 삼는 사역자라면 예수님이 설교 중 명령하신 모든 것을 자신이 순종할 뿐 아니라 제자들에게 가르치기를 원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 기록된 그 설교에 대해 내가 이해하고 있는 것을 나눌 것이다. 나는 사역자들이 그들의 제자들에게 산상수훈을 강해식으로 가르치기를 권장한다. 바라건대, 내가 쓴 것들이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아래의 것은 산상수훈의 윤곽인데, 우리에게 전반적인 개관을 보여주고 주제를 강조하고 있다.

I.) 예수님이 그분의 청중을 모으시다(5:1-2)

II.) 서론(5:3-20)

A.) 복이 있는 사람들의 성격특성과 축복(5:3-12)

B.) 계속해서 소금과 빛이 되라는 훈계(5:13-16)

C.)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과 율법의 관계(5:17-20)

III) 설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보다 더 의롭게 살라(5:21-7:12)

A.)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달리, 서로 사랑하라(5:21-26)

B.)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달리, 성적으로 순결하라(5:27-32)

C.)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달리, 정직하라(5:33-37)

D.)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같이, 원수를 갚지 말라(5:38-42)

E.)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같이, 네 원수를 미워하지 말라(5:43-48)

F.)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달리, 올바른 동기로 선을 행하라(6:1-18)

1.) 올바른 동기로 구제하라(6:2-4)

2.) 올바른 동기로 기도하라(6:5-6)

3.) 기도와 용서에 대한 교훈(6:7-15)

a.) 기도에 관한 지침(6:7-13)

b.) 용서의 필요성(6:8-15)

4.) 올바른 동기로 금식하라(6:16-18)

G.)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처럼, 재물을 섬기지 말라(6:19-34)

H.) 형제의 작은 결함을 비판하지 말라(7:1-5)

I.) 감상할줄 모르는 자들과 진리를 담론하는 데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7:6)

J.) 기도에 대한 격려(7:7-11)

IV) 결론: 설교의 요약

A.) 요약 문(7:12)

B.) 순종에 대한 훈계(7:13-14)

C.) 거짓 선지자와 거짓 신자를 알아내는 방법(7:15-23)

D.) 불순종에 대한 마지막 경고와 요약(7:24-27)

예수님이 그분의 청중을 모으시다(Jesus Gathers His Audience)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가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마 5:1-2).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무리”에서 빠져나와 산에 올라가심으로 그분의 청중들의 크기를 줄인 것 같다. 우리는 “제자가 나아왔다”는 것을 읽게 되는데, 그것은 마치도 그분의 말씀을 듣기에 굶주린 사람들만이 그분을 따라 헉헉거리며 산을 오르기를 원했음을 보여준다. 분명한 것은 사람들이 꽤 많았다는 것이다; 7장 28절을 보면 그들을 “무리”라고 표현했다.

그 뒤 예수님은 그분의 제자들에게 설교하기 시작하셨는데, 처음부터 우리는 그분의 가장 중요한 주제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었다. 그분은 그들에게 어떤 특징을 소유하면 복이 있는 사람인지를 알려주셨다. 왜냐하면, 그런 특징은 천국을 약속받은 사람한테만 나타나기 때문이다. 오직 거룩한 자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것이라는 것이 곧 그분 설교의 전반적인 주제가 될 것이다. 사람들은 5:3-12의 말씀을 팔복이라 하는 데 모두 이 주제를 드러낸다.

예수님은 복이 있는 사람들의 부동한 특성들을 열거하시면서, 그들에게 많은 구체적인 축복들을 약속하셨다. 무심한 독자들은 종종 각 그리스도인은 팔복중의 한 가지, 오직 한 가지만 소유할 수 있다고 가정하지만, 세심한 독자들은 예수님이 서로 다른 축복을 받게 될 부동한 종류의 그리스도인들을 열거하신 것이 아니라, 모든 진정한 신자들이하나의 포괄적인 미래의 축복인 천국을 상속받게 된다는 것을 뜻하심을 인식한다. 그분의 말씀에 대한 다른 방법의 해석은 있을 수 없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3-12).

축복과 성격특성(The Blessings and Character Traits)

먼저, 약속받은 모든 축복을생각해 보자. 예수님은 복이 있는 사람은 (1) 천국을 상속받을 것이고, (2) 위로를 받을 것이고, (3)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고, (4) 배부를 것이고, (5)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고, (6) 하나님을 볼 것이고, (7)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며, (8) 천국을 상속받을 것이다(첫 번째 약속을 반복함).

예수님은 우리가 심령이 가난한 자와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들만이 천국을 상속받는다고 생각하기를 원하셨을까?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이고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지만, 둘 다 하나님이 나라는 상속받지 못할까? 화평케 하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긍휼히 여기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지 못할까? 이것들은 분명히 잘못된 결론일 것이다. 따라서 오직 약속받은 많은 축복은 하나의 큰 축복인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는 것 안의 다양한 축복이라고 결론짓는 것만이 안전하다.

이번에는 예수님이 묘사한 서로 다른 특성들을 생각해 보자. (1) 심령이 가난하고, (2) 애통하고, (3) 온유하고, (4) 의에 주리고 목마르고, (5) 긍휼히 여기고, (6) 마음이 청결하고, (7) 화평하며, (8) 박해를 받았다.

예수님은 우리가 한 사람이 마음은 청결하지만, 무자비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를 원하실까? 한 사람이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지만, 의에 주리고 목마르지 않을 수 있을까? 다시 말하지만, 그럴 수 없다. 복이 있는 사람들의 성격특성들은 모든 복이 있는 사람들에 의해 어느 정도 다양하게 공유되고 있다.

분명히, 팔복은 예수님을 진정으로 따르는 자들의 성격특성을 묘사한다. 그런 성격특성을 제자들에게 열거하는 것을 통하여, 예수님은 그들에게 그들은 구원받은, 언젠가는 천국에서 기쁨을 누릴, 복이 있는 사람들임을 확인시켜 주셨다. 현재, 그들은 받고 있는 고통 때문에 스스로 축복받았다고 느끼지 못할 수 있고, 그들을 지켜보는 세상 사람은 그들에게 복이 없다고 여길 수도 있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그들은 복이 있다.

예수님의 묘사에 부합되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는 사람이 아니며 천국을 상속받지 못할 것이다. 모든 제자 삼는 목사들은 그들이 목회하고 있는 무리 내의 사람들로 하여금 이 점을 알게 할 의무를 느껴야 한다.

복이 있는 사람들의 성격특성(The Character Traits of the Blessed)

복이 있는 사람의 8가지 성격특성은 해석에 따라 어느 정도 달라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어떤 도덕적 미덕을 드러내는가? 나는 예수님이 구원받는 사람이 소유해야 할 첫 번째 필요한 특성을 설명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 그는 반드시 자신의 영적 빈곤을 인식해야 한다. 사람은 구원받기 전에 반드시 구주에 대한 그의 필요를 가장 먼저 볼 수 있어야 하며, 예수님의 청중들 사이에는 바로 그런 자신의 불쌍함을 인식한 사람들이 있었다.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한 이스라엘의 교만한 자들에 비해 그들은 얼마나 복된 가!

첫 번째 특성은 모든 구원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고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제외한다. 진정으로 복이 있는 사람은 자기에게는 하나님께 드릴만 한 것이 아무것도 없고 자기의 의는 다 “더러운 옷”(사 64:6)과 같음을 깨달은 사람이다.

예수님은 누구도 순전히 자신의 노력으로만 복이 있는 사람들의 특성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기를 원하지 않으셨다. 아니, 만일 사람들이 이런 특성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그들이 복이 있는 사람이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축복하셨기 때문이다.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온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이 있는 사람은 단지 천국의 축복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어서 뿐 아니라,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그들의 삶 속에 이룩하신 일 때문이다. 매번 내 삶 속에 있는 복이 있는 사람들의 특성을 볼 때마다, 그것은 나로 하여금 내가 이룬 것이 아닌, 하나님께서 그분의 은혜로 내안에서 이루신 일을 생각나게 한다.

애통하는 자(The Mournful)

만일 첫 번째 특성이 제일 먼저 나열된 이유가 그것이 천국에 갈 수 있는 제일 필요한 특성이라면, 아마도 두 번째 특성도 의미 있게 나열된 것 같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마5:4). 예수님께서 진심의 회개와 양심의 가책을 묘사하고 계셨을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특별히 성경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룬다고 명확히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고후 7:10을 보라). 예수님께서 어느 한 번 말씀하신 슬픔에 잠긴 세리가 바로 이런 종류의 복이 있는 사람의 예이다. 그는 성전에서 겸손하게 머리를 숙이고, 가슴을 치며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며 울부짖었다.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며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한다고 하나님께 자랑하스럽게 기도하던 인근의 바리새인과는 달리, 그 세리는 자신의 죄를 용서받고 그곳을 떠났다. 그 이야기에서 세리는 복이 있는 사람이었으나 바리새인은 아니었다(눅 18:9-14을 보라). 나는 예수님의 청중들가운데 성령님의 질책을 받고 애통하는 자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그들은 곧 성령님의 위로를 받게 될 것이다!

만일 예수님께서 그분께 나아오는 회개 한 사람들이 처음 느끼게 되는 애통을 말씀하시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분은 진정한 신자들이 세상 사람들이 그들을 사랑하는 하나님에 대한 반역을 지속적으로 대면하면서 느끼는 슬픔을 설명했을 것이다. 바울은 그것을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다”(롬 9:2)고 표현하였다.

온유한 자(The Gentle)

세 번째 특성인, 온유함은 성경에서 또한, 성령의 열매 중 하나로 열거되었다(갈 5:22-23을 보라). 온유함은 자체생성 된 속성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성령님이 내주하시는 사람은 온유하게 변화 받도록 축복받았다. 그들은 언젠가는 이 땅을 기업으로 받게 되는데, 그것은 오직 의인만이 하나님이 지으신 새 땅에 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거칠고, 폭력적인 자칭 그리스도인들은 조심해야 한다. 그들은 복이 있는 사람 중 속하지 않는다.

의에 주린 자(Hungering for Righteousness)

네 번째 특성인, 의에 주리고 목 마른 것은 모든 진실로 거듭난 사람들이 소유한 하나님이 주신 내적 갈망이다. 의에 주린 자는 이 세상과 자신한테 남아 있는 모든 불의를 슬퍼한다. 그는 악을 미워하고(시 97:10; 119:128,163) 의를 사랑한다.

우리가 성경 속에서 정의란 단어를 읽을 때마다, 자주 즉각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전가한 법적인 입장”으로 번역하지만, 그것은 정확한 해석이 아니다. 많은 경우에, 그것은 “하나님의 기준으로 의롭게 살아가려는 소질”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여기에서 분명히 그러한 의도로 말씀하셨는데,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이 이미 소유하고 있는 것에 굶주려 있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성령님에 의해 거듭난 사람은 의롭게 살 수 있기를 갈망하며, 그들은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 “배부를” 확신이 있는데(마 5:6), 그것은 그들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이루실 것이기 때문이다(빌1:6).

여기서 예수님은 “의가 있는 곳인”(벧후 3:13) 새 땅의 시간을 예견하셨다. 그때가 되면 죄가 없을 것이다. 모든 사람은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지금 의에 주리고 목말라 있는 우리는 배부를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진심으로 된 기도는 모두 응답받을 것이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이다”(마 6:10).

긍휼히 여기는 자(The Merciful)

다섯 번째 특성인 긍휼도 모든 거듭난 사람들이 그들안에 살아계시는 자비의 하나님에 의해 자연스럽게 소유하고 있는 미덕이다. 긍휼을 소유하지 않은 자들은 하나님께 축복받지 못했고, 그분의 은혜를 받지 못했음을 드러낸다. 사도 야고보도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약 2:13)라고 말했다. 만일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긍휼이 없는 심판을 받는다면, 당신은 그가 가야 할 곳이 천국이라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지옥이라고 생각하는가?[1] 답은 분명하다.

어느 한 번, 예수님은 주인에게 큰 긍휼을 받은 하인이 그의 동료 하인한테는 긍휼을 베풀지 않은 이야기를 말씀하셨다. 주인은 이 사실을 알게 된 후,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겼다”(마 18:34). 모든 이전에 탕감받은 빚은 다시 계산되었다. 그 후 예수님은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처럼 하시리라”(마18:35)고 그분의 제자들을 경고하셨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에게 용서를 구하는 그리스도 안의 형제나 자매를 용서하기를 거부한다면, 하나님은 우리가 전에 용서받은 죄를 다시금 계산하실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영원히 갚을 수 없는 빚을 갚을 때까지 고문당할 것이다. 나에게 그것은 천국을 말하는 것 같지 않다. 다시 말하지만, 긍휼을 베풀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을 수 없다. 그들은 복이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The Pure in Heart)

천국을 약속받은 사람들의 여섯 번째 특성은 마음의 청결함이다. 많은 자칭 그리스도인들과는 달리,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따르는 자들은 단지 겉으로만 거룩하지 않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들의 마음은 청결해졌다. 그들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것은 자신의 묵상과 동기에 영향을 미친다. 예수님은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을 약속하셨다.

나는 다시 한 번 이런 질문을 하고 싶다. 우리는 마음이 청결하지 않음으로 인해 하나님을 볼 수 없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당신은 나를 보지 못하고도 천국에 올 수 있다”라고 말씀하실까? 아니, 분명히 모든 진정으로 천국을 약속받은 사람이라면 청결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화평하게 하는 자(Peacemakers)

화평하게 하는 자는 다음과 같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예수님은 다시 한 번 모든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따르는 자들을 가리키는데, 그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이다(갈 3:26),

성령님에 의해 거듭난 사람은 최소한 다음 세 가지 방면에서 화평하게 하는 자들이다.

첫째로, 전에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던 그들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롬 5:10을 보라).

둘째로, 그들은 될수록 다른 사람들과 화평하게 지낸다. 그들에게는 분쟁과 싸움이 적다. 바울은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것이라고 썼다(갈 5:19-21을 보라). 진정한 신자들은 싸움을 피하고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십 리를 더 걸을 수도 있다. 그들은 자기들의 형제는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나님과 화목하다고 주장하지 않는다(마 5:23-24; 요일 4:20을 보라).

셋째로, 복음을 전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따르는 자들은 다른 사람이 하나님과 그리고 그들의 동료와 화목할 수 있게 도와준다. 아마도 산상수훈의 이 말씀 때문에 야고보가 이렇게 썼을 수 있다.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약 3:18).

박해를 받은 자(The Persecuted)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의를 위하여 박해 받은 자들을 축복하셨다. 물론, 그분은 단지 그리스도의 의로움이 그들에게 전가 된 것으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닌, 의롭게 사는 사람들을 말씀하셨다.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불신자들의 박해를 받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할 것이다.

예수님은 어떤 종류의 박해를 말씀하셨을까? 고문? 순교? 아니, 그분은 특별히 그분의 연고로 모욕당하는 것을 말씀하셨다. 이것은 다시 한 번 한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불신자와 확연히 다를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불신자들이 그들을 향해 악한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소위 그리스도인이 불신자와 하나도 구별되지 않음으로 하여 한 명의 불신자도 그들을 대적하여 말하지 않을까? 그들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처럼 하였느니라”(눅 6:26)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당신에 대해 좋게 말하고 있다는 것은 당신이 가짜 신자임을 나타낸다. 이 세상은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한다(요 15:18-21; 갈 4:29; 딤후 3:12; 요일 3:13-14).

소금과 빛(Salt and Light)

일단 예수님께서 그분의 순종하는 제자들에게 그들이 확실히 천국을 상속받을, 변화 받고 축복받은 사람들에 속한다고 보증하셨다면, 그것은 곧 그들에 대한 경고이다. 영적 염소들에게 그들은 영원히 그들이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구원을 상실하지 않을 것이라고 지속적으로 보증하는 수많은 현대적인 설교자들과 달리,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이 실제로 복이 있는 사람들의 범주에서 자신을 제거할 수도 있다는 것을 경고할 수 있을 만큼 그분의 제자들을 충분히 사랑하신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3-16).

예수님은 그분의 제자가 소금이 되거나 빛이 되라고 훈계하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비유적으로) 그들은 이미 소금이 되었다고 말씀하셨으며, 그들이 맛을 잃지 말라고 훈계하셨다. 그분은(비유적으로) 그들은 이미 빛이 되었다고 말씀하셨으며, 그들의 빛을 숨기지 말고, 계속하여 비추라고 훈계하셨다. 예수님의 말씀은 자칭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이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할 필요에 대해 했던 수많은 설교와 다르다. 만일 한 사람이 이미 소금과 빛이 되어 있지 않다면, 그들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니다. 그들은 복이 있는 사람들에 속하지 않는다. 그들은 천국에 갈 수 없다.

예수님의 시대에, 소금은 고기의 방부제로 주로 사용되었다. 그리스도의 순종하는 제자로서, 우리는 이 죄로 가득한 세상을 완전히 썩어가고 부패해지는 데로부터 보존해 준다. 하지만, 우리의 행함이 이 세상과 같아진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아무 쓸데없어”(13절)질 것이다. 예수님은 복이 있는 자들에게 맛을 잃지 말고 자신의 유일한 특성을 보존하기를 경고하셨다. 그들은 반드시 주위의 세상과 구별되어야 하며, “맛을 잃지 말아야” 하는 데 그렇지 않으면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히게 된다.” 이것은 진정한 신자들이 뒤로 후퇴하지 말라는 신약 성경의 여러 분명한 경고 중의 하나이다. 만일 소금이 진짜라면, 짠맛을 낼 것이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따르는 사람은 예수님을 따르는 자답게 행동해야 하는 데, 그렇지 않으면 심지어 이전에 그리스도인이었던 사람도 지금은 그리스도인이 아닐 수 있다.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따르는 자는 또한, 세상의 빛이다. 빛은 항상 빛난다. 만일 빛을 낼 수가 없다면 빛이 아니다. 이 비유에서, 빛은 우리의 착한 행실을 상징한다(마 5:16). 예수님은 착한 행실이 없는 사람들이 착한 행실을 억지로 짜내라는 뜻이 아니라, 착한 행실이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착한 행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숨기지 말라는 뜻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그들의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릴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께서 그들안에서 행하셨기에 그들이 착한 행실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하심과 우리의 그분과의 동역이 아름다운 균형을 이루는 것을 보게 된다, 누구든지 거룩하여지기 원하는 사람에게는 이 두 가지가 모두 필요하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과 율법의 관계(The Law’s Relationship to Christ’s Followers)

이제 우리는 새로운 단락을 보도록 하겠는데, 이것은 아주 중요한 부분이며, 그리스도의 대부분의 나머지 설교말씀에 대한 서론이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17-20).

만일 예수님께서 자신이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는 그분의 청중들을 경고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적어도 그분의 청중 중 일부가 확실히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었음을 결론 내릴 수 있다. 그들이 왜 이러한 가정을 했는지를 우리는 추측할 수밖에 없다. 아마도 그것은 일부 사람들을 미혹하여 예수님이 율법과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게 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엄격한 질책일 것이다.

어쨌든지, 예수님은 그분의 제자가 이러한 가정의 오류를 인식하기를 명확하게 원하셨다. 그분께서 전체 구약 성경을 묵시하셨기에, 그분은 모세와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모든 것을 절대로 폐할 수가 없다. 그와 반대로, 그분은 말씀하신 바와 같이, 율법과 선지자를 완전하게 하실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떻게 율법과 선지자를 완전하게 하실까? 일부는 예수님께서 단지 메시아의 예언에 대한 성취만 말씀하셨다고 생각한다. 비록 예수님께서 확실히 모든 메시아의 예언을 성취하셨지만(또는 하실 것이지만), 그분께서 뜻하신 바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문맥을 보면, 그분께서는 분명히 모든 율법과 선지서에 의해 쓰인 “일점 일획”(18절)과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19절)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루실 것을 말씀하셨다.

기타 사람은 예수님께서 그분의 순종적인 삶과 희생적인 죽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셨다고 추측한다(롬 8:4을 보라). 그러나 문맥을 살펴보면, 그것이 예수님께서 뜻하신 바가 아님을 알 수 있다. 18절에서 예수님은 율법을 완전하게 하기 위한 참조점으로써 그분의 삶이나 죽음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씀하시지 않았다. 오히려, 바로 그다음 구절에서, 그분은 율법은 적어도 “천지가 없어지기 전까지는” 우리와 관련이 있으며, “다 이루어 질 것”이다고 말씀하셨는데 이 참조 점은 그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시점에 비해 훨씬 후의 일이다. 그 후 그분은 율법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는 심지어 그들의 천국에서의 위치에도 영향을 미친며(19절), 사람들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율법을 더 잘 지켜야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선언하셨다(20절).

물론, 메시아 예언, 유형, 율법의 그림자, 그리고 율법의 요구가 우리에게 이루어지는 것을 성취하는 것 외에도, 예수님은 그분의 청중들이 율법의 계명을 지키고, 선지자의 말씀을 행할 수 있기를 바랐다.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은 율법에 대한 하나님의 진정한 그리고 원래의 의도를 드러냄으로써 율법을 완전하게 하고, 율법을 완전하게 긍정하고 해석하며, 율법에 대한 청중의 부족한 이해를 완전하게 하실 수 있다.[2] 17절에서 완전하게 한다는 헬라어 단어는 신약 성경에서, 온전하다, 이루다, 충만하다, 다 하다로 번역되어 있다. 이런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해석하시고자 했던 것이었으며, 네 구절 뒤부터 실현하시기 시작한다.

예수님은 율법과 선지자를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시기 위해 오셨으며, “충만할 때까지 완전하게 하셨다.” 내가 산상수훈의 이 부분을 가르칠 때, 종종 사람들에게 물이 절반 담긴 컵을 하나님께서 율법과 선지자에게 주신 계시의 예로 보여준다. 예수님은 율법과 선지자를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다(이 말을 할 때, 나는 물이 절반 담긴 컵의 물을 쏟아 버릴 것처럼 행동한다). 오히려, 그분은 율법과 선지자를 완전하게 하려고 위해 오셨다(이때 나는 물 한 병을 가져다가 그 컵이 찰 때까지 물을 붇는다). 그렇게 하면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무엇을 뜻하셨는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율법을 지키는 것의 중요성(The Importance of Keeping the Law)

율법과 선지서에 기록된 계명을 지키는 것에 대하여, 예수님은 더는 강하게 말씀하실 수가 없었다. 그분은 그분의 제자가 계명을 지키기를 바라셨다. 그것들은 여전히 매우 중요했다. 사실, 사람들이 계명을 어떻게 대하는가가 천국에서의 그들의 상태를 결정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5:19).

그리고 20절을 보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새로운 생각이 아니라, “그러므로“란 접속사로 이전 구절과 연결된 결론적인 구절임을 알 수 있다. 계명을 지키는 것이 얼마만큼 중요할까? 한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율법을 더 잘 지켜야 한다. 다시 한 번 우리는 예수님은 오직 거룩한 자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는다는 그분의 주제를 견지하신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스도를 대적하지 않기 위해서는, 제자 삼는 사역자는 어떤 사람이라도 그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낫지 않다면 그의 구원을 보증하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은 어떤 종류의 의를 말씀하셨을까?(Of What Kind of Righteousness Was Jesus Speaking?)

예수님께서 우리의 의는 반드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나아야 한다고 말씀하실 때, 그분은 우리에게 선물로 주실 법적인 의를 말씀하셨을까? 아니, 예수님은 그것을 가리키지 않으셨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문맥으로 보았을 때 이 해석은 적합하지 않다. 이 말씀의 전후 구절(그리고 전체 산상수훈)을 보면, 예수님은 계명을 지키는 것, 즉 의롭게 사는 것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분의 말씀에 대한 가장 자연스러운 해석은 바로 우리가 반드시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의롭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자신의 제자들에게는 적용하지 않는 기준을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요구하신다고 보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예수님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정죄하시면서 같은 죄를 지은 그분의 제자들은 정죄하시지 않는데 그 이유가 단순히 그들이 “구원받는 기도”를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가?[3]

우리의 문제는 율법주의자로 보여지지 않기 위해서 말씀의 명백한 의미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진짜 문제는 우리가 예수님이 우리에게 전가한 의와 우리의 행위상의 의가 상호 분리할 수 없는 관계가 있다는 것을 모른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도 요한은 그것을 이해했으며 이렇게 썼다.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다”(요일 3:7). 또한, 우리는 새롭게 태어난 사람과 의롭게 사는 사람의 상호관계를 몰랐지만, 요한은 알고 있었다.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요일 2:29).

예수님은 5장 20절의 말씀에 다음과 같이 추가하실 수 있었다, “만일 너희가 회개하고, 진정으로 거듭났다면, 산 믿음으로 내가 주는 의를 받게 되며, 네가 내주하시는 성령님과 동역하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보다 더 의롭게 살 수 있다.”

어떻게 하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보다 더 거룩해질까?(How to be Holier than the Scribes and Pharisees)

5장 20절의 말씀에 대한 응답으로 자연스럽게 다음과 같은 질문이 든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정확히 어느 정도로 의로운가? 그 대답은, 별로이다.

다른 한 번, 예수님은 그들이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마 23:27)고 말씀하셨다. 즉, 그들은 겉으로는 의로워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악하다. 그들은 율법을 문자적으로는 잘 지키지만, 영적인 의미를 무시하고, 종종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말씀을 왜곡하거나 심지어 하나님의 계명을 고치기까지 한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이 본질적인 결함은 실제로 예수님의 산상수훈 중 남은 부분의 주요 초점이 되었다. 우리는 그분께서 하나님의 잘 알려진 계명들을 많이 인용하셨고, 인용하신 후 문자적으로 순종하는 것과 영적으로 순종하는 것의 차이를 설명하셨음을 볼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분은 반복적으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거짓 가르침과 위선을 폭로하셨고, 그분의 제자들을 향한 진실한 기대를 밝히셨다.

예수님은 매번 예를 드시기 전마다 “너희가 들었으나”란 말씀을 하셨다. 그분은 구약성경을 가능하게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는, 단지 회당에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듣기만 했던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그것은 그분의 청중들이 모든 삶 속에서 거짓 가르침만 받아왔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말만 들어왔고, 그들의 거짓된 삶만 보아왔었기 때문이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달리, 서로를 사랑하라(Love Each Other, Unlike the Scribes and Pharisees)

예수님은 그분의 여섯 번째 계명을 시점으로, 그분의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기대를 가르치기 시작하셨는데 그와 동시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폭로하셨다.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 5:21-22).

먼저, 예수님께서 한 사람을 지옥으로 이끌 수도 있는 것들에 대해 경고하신 점을 유의하라. 그것은 그분의 주제인데 바로 오직 거룩한 자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는다는 것이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여섯 번째 계명을 인용하며 살인을 반대하였는데, 살인은 한 사람으로 하여금 법정에서 심판을 받아야 함을 분명히 경고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분의 제자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인식하지 못한듯한 “작은” 위반도 법정에서 심판을 받아야 하며, 더욱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함을 알게 하고 싶으셨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것(두 번째 큰 계명)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가 형제에게 화를 낼 때에는 우리 자신이 벌써 하나님의 법정에서 정죄당했음을 알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그 형제에게 악한 말을 하여 분노를 말로 표현한다면, 우리의 죄는 더욱 심각해지며, 하나님의 최고 법정에서 봤을 때 자신은 이미 유죄 선언을 받았음을 인식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그보다 더하여, 재차 악한 말로 형제에게 증오를 뿜어 낸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이미 지옥에 던져질만큼 충분히 죄를 지은 것이다.[4] 그것은 심각한 일이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는 우리와 형제와의 관계에 의해 보아낼 수 있다. 만일 우리가 형제를 미워하면, 그것은 우리가 영생을 소유하지 못했음을 드러낸다. 요한은 이렇게 썼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요일 3:15).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 4:20).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예수님이 명하신 대로,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자와 화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마 18:15-17을 보라).

예수님은 계속하여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 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

이것은 우리가 형제와의 관계가 좋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관계도 좋지 않다는 말씀이다. 바리새인들은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킨다”(마 23:23-24)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사소한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중요한 것은 사소하게 생각한다. 그들은 십일조와 예물을 드리는 것의 중요성은 강조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서로 사랑하라는, 두 번째 큰 계명의 중요성은 무시한다. 예수님의 두 번째로 중요한 계명은 지키지 않으면서, 예물을 드리는 것으로 하나님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은 얼마나 위선적인가! 예수님은 바로 이런 것을 경고하고 계셨다.

예수님은 계속하여 하나님 심판의 엄중성을 말씀하셨다.

너는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마 5:25-26).

하나님의 법정에서 벗어나, 될 수 있는 한, 우리의 형제들과 평화롭게 사는 것이 가장 좋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우리에게 화를 냈을 때, 우리가 “법정으로 가는 길” 곧 하나님의 앞에 설 때까지, 삶 속에서 그들과 화해하기를 고집스럽게 거부한다면, 우리는 분명히 후회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마태복음 18:23-35에서 나오는 용서하기를 거부하는 종의 모습과 매우 유사하다. 용서받았지만, 용서하기를 거부한 그 종은 빚을 다시 갚도록 되었으며, 그는 “빚을 다 갚을 때까지” 옥졸들에게 넘겨졌다(마 18:34). 여기서 예수님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 무서운 영원한 결과를 맞이할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달리, 성적으로 순결하라(Be Sexually Pure, Unlike the Scribes and Pharisees)

일곱째 계명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어떻게 율법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지만, 영적인 의미를 무시하는지에 대한 예수님의 두 번째 예의 주제이다. 예수님은 그분의 제자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보다 성적으로 더 순결하기를 바라셨다.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마 5:27-30).

다시 한 번, 예수님께서는 오직 거룩한 자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는다는 주제를 유지하고 계심을 유의하라. 그분은 지옥과 그곳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할 일에 대해 경고하셨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일곱 번째 계명을 무시할 수 없으므로, 겉으로는 자신의 아내에게 충실한 척한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여성과 사랑을 나누는 상상을 한다. 그들은 시장에서 여자들을 보면 옷을 벗은 모습을 상상한다. 그들은 마음속으로 간음했으며, 따라서 일곱째 계명의 영적인 의미를 어겼다. 오늘날 교회 안의 상황은 얼마나 다를까?

물론, 하나님은 사람들이 성적으로 완전히 순결하기를 바라신다. 분명한 것은, 만일 이웃의 아내와 성관계를 맺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면, 그녀와 성관계를 맺는 것을 상상하는 것도 잘못된 것이다. 예수님은 이미 모세의 율법에 의해 요구된 것에 더 엄격한 법을 추가하지 않으셨다. 열 번째 계명은 명확하게 정욕에 대한 금지를 포함하고 있다. “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출 20:17).

예수님의 청중 중에 정죄받은 사람이 있었는가? 아마 있었을 수 있다. 그들은 무엇을 했야 했는가? 예수님의 지시를 따라 그들은 즉시 회개해야 한다. 정욕에 빠진 사람은 무슨 일이 있든지, 어떤 대가를 치르든지, 음행을 멈춰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옥에 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합리적인 사람은 예수님께서 문자 그대로 음욕을 품은 사람들의 눈을 뽑아 내버리거나 손을 찍어 내버리라는 뜻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한 사람이 음욕을 품어 한눈을 뽑힌다 해도 그는 애꾸눈인 호색자일 뿐이다! 예수님은 극적이고 엄숙하게 일곱 번째 계명의 영적인 의미를 순종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계셨다. 영생은 그것에 달려 있다.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서, 제자 삼는 사역자도 그의 제자들에게 그들로 하여금 실족하게 하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모두 찍어 내버리라고 훈계하여야 할 것이다. 만일 그것이 케이블 TV라면, 케이블 연결을 끊어야 하고, 그것이 일반TV라면, 텔레비전을 제거해야 한다. 만일 그것이 구독하고 있는 잡지라면, 구독을 취소해야 한다. 만일 그것이 인터넷이라면, 인터넷 접속을 끊어야 한다. 만일 그것이 열려 있는 창문이라면, 닫아야 한다. 그런 일은 지옥에서 영원히 보내야 할 가치가 없으며, 제자 삼는 사역자는 그의 양 떼를 진심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그들에게 진실을 말하고 경고할 것이다.

간음의 또 다른 방식(Another Way to Commit Adultery)

예수님의 다음 예는 우리가 금방 고려했던 내용과 많이 관련되어 있는데, 아마도 그 이유 때문에 다음 순서에 언급했을 수 있다. 그것은 새로운 주제보다 오히려 앞의 주제에 대한 진일보 심화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 주제는 “바리새인들의 또 다른 방식의 간음”이다.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 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마 5:31-32).

다음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왜곡하여 자기들의 죄로 물든 삶의 방식에 부응시킨 예이다.

예수님 시절의 바리새인을 상상해보자. 길 건너편에 그가 음욕을 품은 매력적인 여자가 살고 있다. 그는 매일 그녀를 볼 적마다 그녀와 새롱거린다. 그녀는 그에게 매력을 느끼기 시작한 것 같고, 그녀를 향한 그의 정욕은 날로 불타오른다. 그는 그녀의 벗은 모습을 보고 싶어하고, 정기적으로 그녀에 대한 성적환상을 한다. 오, 그가 그녀를 소유할 수만 있다면!

그러나 문제가 있다. 그는 결혼했고, 그의 종교는 간음을 금지한다. 그는 일곱 번째 계명을 어기고 싶지 않다(비록 그가 매번 음욕을 품을 적마다 이미 계명을 어겼지만). 그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한 가지 해결책이 있다! 만일 그가 현재의 배우자와 이혼한다면, 그는 자신의 마음속의 연인과 결혼할 수 있다! 그러나 이혼을 하는 것이 합법적일까? 동료 바리새인은 그에게 “합법적이다“고 말해준다. 그것에 대한 성경 말씀도 있다! 신명기 24:1을 보면 아내와 이혼할 때 이혼증서를 주는 것에 대한 말씀이 있다. 이혼은 특정 상황에서 반드시 합법적으로 해야 한다! 그러나 그 상황은 무엇인가? 그 바리새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세히 읽어본다.

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신 24:1).

아! 그는 아내에게서 그에게 수치가 되는 것을 발견하기만 하면, 아내와 이혼할 수 있다! 그리고 그는 발견했다! 그녀는 길 건너편의 여자만큼 매력이 없다는 것이다!(이것은 억지스러운 예가 아니다. 예수님 시절 이혼에 대해 가장 인기 있는 가르침을 주었던 랍비 힐레에 따르면, 한 남자는 자기의 아내보다 더 매력적인 여자를 발견하면 합법적으로 아내와 이혼할 수 있었는데, 왜냐하면, 다른 매력적인 여자가 현재 아내로 하여금 그의 눈에 “수치스럽게” 보이게 하였기 때문이다. 랍비 힐레는 또한, 만일 아내가 그의 음식에 소금을 너무 많이 넣거나, 그에게 아들을 낳아주지 못하면, 그가 아내와 이혼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러므로 이 음욕을 품은 바리새인은 아내에게 필요한 증서를 주고 합법적으로 이혼할 수 있으며 환상 속의 여인과 빨리 결혼할 수 있다. 그리고 그는 한치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아도 되는데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율법을 지켰기 때문이다.

부동한 관점(A Different View)

물론, 하나님은 사물을 부동한 관점으로 보실 수 있다. 그분은 결코 신명기 24:1-4에 언급된 “수치되는”일이 실제로 무엇이며, 심지어 그것이 이혼을 위한 정당한 이유인지 여부를 규정하신 적이 없다. 사실, 그 단락은 이혼이 합법적인지에 대한 말씀이 아니다. 그 단락에는 두 번 이혼하거나 한 번 이혼한 과부가 그녀의 첫 남편과 재혼하는 것에 대한 금지가 포함되어 있다. 이 단락의 말씀만 보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수치되는”일은 이혼을 합법화한다고 결론짓는 것은 강제적으로 의미를 주입하는 것이다.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의 마음속에서, 내가 금방 묘사한 가상의 사람은 간부와 차별이 없다. 그는 일곱 번째 계명을 어기었다. 사실, 그는 일반적인 간부보다 더 간악하다. 왜냐하면, 그는 “이중간음”을 범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된 일인가? 먼저, 그는 자신한테 간음죄를 지었다. 예수님은 나중에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 드는 자는 간음함이라”(마 19:9)고 말씀하셨다.

둘째로, 그의 이혼당한 아내는 생존하기 위해 반드시 다른 남편을 찾아야 하는 데, 이것이 하나님께는 바리새인이 그의 아내가 다른 남자와 섹스를 하게끔 강요한 것으로 보이신다. 따라서, 그는 그녀가 “간음”[5]하게 한 죄를 지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마5:32, 강조 추가)라고 말씀하셨다.

만일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라”(마 5:32)는 예수님의 말씀이 하나님께서 바리새인이 그의 전 부인의 새 남편이 범한 “간음”에 대해 책임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면,[6]예수님은 그 음탕한 바리새인을 “삼중 간음”으로 고소하실 것이다.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어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마 19:3)라고 질문하는 것으로 보아, 예수님 시절에 이것이 뜨거운 논쟁거리였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의 질문은 그들의 속내를 드러낸다. 분명한 것은, 적어도 그들 중 일부는 합법적으로 이혼할 수 있는 이유가 있다고 믿었다.

나는 그리스도인들이 이혼에 대한 이 말씀을 잘못 해석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무거운 족쇄를 채우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에 대해 반드시 더 말해야겠다. 예수님은 여기에서 아직 거듭나기 전에 이혼한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훌륭한 짝을 찾아 결혼하는 것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것은 간음에 해당되 않는다. 만일 그것이 예수님의 뜻이었다면, 죄인들의 모든 죄에 대한 용서가 더는 제공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복음을 변경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지금부터 우리는 이렇게 설교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은 당신을 위해 죽으셨다. 만일 당신이 회개하고 그분을 믿는다면, 당신은 당신이 지은 모든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이혼 했다면, 당신은 재혼하지 말아야 하는 데 그렇지 않으면 간음하며 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성경은 간음한 사람은 지옥에 갈 것이라고 말씀한다. 또한, 만일 당신이 이혼한 재혼했다면, 당신은 그리스도께 나아오기 전에, 한 번 더 죄를 범하고 현재 배우자와 이혼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계속하여 간음하며 살게 되고 간음한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다.”[7]이것이 복음이란 말인가?[8]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달리, 정직하라(Be Honest, Unlike the Scribes and Pharisees)

예수님의 세 번째 예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불의한 행위 및 성경 말씀에 대한 오용은 진실을 말하라는 하나님의 계명과 관련된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거짓말을 할 수 있는 매우 독창적인 방법을 개발했다. 우리는 마태복음 23:16-22에서 보다시피 그들은 성전으로, 제단으로, 하늘로 맹세하면 자신의 맹세를 지켜야 할 의무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이 성전의 이나, 제단 위의 예물이나 하늘 위의 하나님으로 맹세하면, 그들은 자신의 맹세를 지킬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람은 어린아이들같이 손가락을 끼고 뒷짐을 지면, 진실을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예수님은 그분의 제자가 진실을 말하기를 원하신다.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네 머리로도 하지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마 33:37).

맹세에 관한 하나님의 원래 계명을 보면, 다른 무엇으로 맹세하라는 언급이 없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이 항상 진실을 말하기를 원하셨기에, 따라서 맹세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맹세는 서약이나 약속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맹세하는 것은 아무 잘못이 없다. 사실, 하나님께 순종하겠다는 맹세는 아주 좋다. 구원은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맹세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 다른 무엇으로 맹세할 수밖에 없을 때, 그것은 그들이 거짓말한다는 간접적인 시인이다. 항상 진실을 말하는 사람은, 맹세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교회는 거짓말쟁이로 가득하며, 사역자들은 종종 거짓과 기만의 선두 주자들이다.

제자 삼는 사역자는 정직한 모범을 보이고, 그의 제자들에게 항상 진실을 말하라고 가르친다. 그는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질 것이라는 요한의 경고를 알고 있다(계 21:8을 보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같이, 원수를 갚지 말라(Don’t Take Revenge, as do the Scribes and Pharisees)

예수님의 불만목록 중의 다음 항목은 구약 성경의 매우 잘 알려진 구절에 대한 바리새인의 남용이다. 우리는 이미 이 구절을 성경적 해석에 관한 장에서 살펴보았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마 5:38-42).

모세의 율법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줬다고 유죄판결을 받았으면, 그는 그 피해에 상응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선언했다. 만일 그가 다른 사람의 이를 부숴버렸다면, 공정성과 정의에 의해, 그의 이도 부서져야 할 것이다. 이 계명은 법정에서 주요 범죄에 대한 정의를 확보하기 위해 주어졌다. 하나님은 율법에 따라 법정과 재판관의 제도를 만드셔서 범죄를 억제하고, 정의를 확보하고, 원수를 갚는 것을 막으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재판관은 공정해야 한다고 명령하셨다. 그들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라는 계명을 따르지만, 그 문구와 계명은 항상 법정에서 정의에 관한 구절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다시 한 번 계명을 왜곡하여 개인적인 원수를 갚는 것을 거룩한 의무로 만들어 버렸다. 분명한 것은, 그들은 관용이라곤 전혀 없이, 작은 침해에 대해서도 원수를 갚으려 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에게 항상 더 많은 걸 기대하신다. 원수를 갚는 것은 그분이 명시적으로 금지하신 것이다(신 32:35을 보라). 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은 자신의 원수에게 자비를 보여줘야 한다고 가르친다(출 23:4-5; 잠 25:21-22을 보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악인을 상대할 때에는 한 뺨을 때리면 다른 뺨을 돌려대고,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라고 가르치시면서 이 점을 확인하셨다. 사람들이 우리에게 잘못하였을 때, 하나님은 우리가 선으로 악을 갚고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이용하고, 원하는 대로 우리의 삶을 파괴하도록 허용하기를 기대하실까? 우리가 불신자들을 법정에 고소하고 우리에게 저지른 불법 행위에 대한 정의를 추구하는 것이 잘못된 것일까? 아니, 예수님은 법정에서 큰 범죄에 대한 정당한 정의를 취득하는 것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사소한 침해에 대한 개인적인 복수를 말씀하셨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등을 찌른 사람에게 목을 졸라매도록 우리의 목을 내어주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분은 누군가가 우리에게 자동차를 요구하면, 그 사람에게 집까지 주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예수님은 단순히 우리에게 우리가 매일 겪게 되는 사소한 침해와 이기적인 사람들을 대면하면서 발생하는 문제들에 대해 높은 수준의 관용과 자비를 보여줘야 함을 말씀하셨다. 그분은 우리가 이기적인 사람들의 기대 이상으로 친절하기를 원하신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그 기준과는 거리가 멀다.

왜 수많은 자칭 그리스도인이 이렇게 쉽게 침해를 받는가? 왜 그들은 뺨을 맞는 것보다는 열 배나 더 작은 침해에 대해서도 이렇게 쉽게 화를 내는가? 이들은 과연 구원받았을까? 제자 삼는 사역자는 다른 뺨을 돌려대는 모범을 보여주며, 그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도록 가르친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같이, 네 원수를 미워하지 말라(Don’t Hate Your Enemies, as do the Scribes and Pharisees)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들의 증오의 마음을 수용하기 위해 고쳐버린 하나님이 주신 계명을 나열하셨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3-48).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레 19:18)라고 말씀하셨지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편리하게 이웃은 자기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이고 다른 사람은 다 원수라고 보며,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웃만 사랑하라고 하셨기에 우리가 우리의 원수를 미워하는 것은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예수님에 따르면, 그것은 전혀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나중에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가 응당 모든 사람을 이웃으로 생각해야 함을 가르치셨다.[9]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원수를 포함한 모든 사람을 사랑하기를 원하신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분의 자녀를 위한 기준이며, 그분 자신이 살아가는 삶의 기준이다. 그분은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신다. 우리는 응당 그분을 본받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에게 친절을 보여줘야 한다. 우리가 그같이 할 때, 그것은 우리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아들”(마 5:45)임을 보여준다. 정통적인 거듭난 사람은 그들의 아버지처럼 행동한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우리의 원수들을 향해 보여주기를 원하시는 사랑은 감정이거나, 그들의 불의에 대한 승인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에게 대항하는 이들에 대해 따뜻한 감정을 배양하라고 요구하시지 않는다. 그분은 우리가 우리의 적들이 정말 멋진 사람들이라고 거짓말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하지만, 그분은 우리가 그들을 향해 자비를 베풀고, 적어도 그들에게 문안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등 자원적인 행동을 하기를 기대하셨다.

예수님께서 다시 한 번 오직 거룩한 자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한다는 그분의 주제를 강조하셨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분은 제자들에게 만일 그들이 단지 그들을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한다면, 그들이 모든 유대인의 보기에 지옥으로 갈 것 같은 두 부류의 사람인 이교도 이방인과 세리보다 나을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단지 그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사람은 지옥에 갈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달리, 올바른 동기로 선을 행하라(Do Good for the Right Motives, Unlike the Scribes and Pharisees)

예수님은 그분을 따르는 자들이 거룩하기를 기대하셨을 뿐 아니라 그들이 올바른 동기로 거룩해지기를 기대하셨다. 한 사람이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해도 만일 그의 순종이 잘못된 동기에서 비롯되면 여전히 그분을 매우 불쾌하게 할 수 있다.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질책하셨는데, 그것은 그들이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하였기 때문이다(마 23:5을 보라). 그분은 그분의 제자들은 다르기를 기대하신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 6:1-4).

예수님은 그분을 따르는 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할 것을 기대하셨다. 하나님은 율법을 통해 그것을 명령하셨고(출 23:11; 레 19:10; 23:22; 25:35; 신 15:7-11),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나팔을 불며 표면적인 구제를 하였는데, 가난한 자들을 모아 공개적인 배급을 받게 하였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자칭 그리스도인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는지 모른다. 그들은 구제해본 적이 없기에 그 동기를 점검해볼 필요조차 없다. 만일 이기심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로 하여금 그들의 구제를 광고하게 했다면, 자칭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가난한 사람들의 곤경을 무시하게 한 것은 무엇일까? 이런 점에서, 그들의 의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를 능가했는가?

바울이 고린도전서 3:10-15에서 되풀이한 것처럼, 우리는 잘못된 동기로 선행을 할 수도 있다. 만일 우리의 동기가 순수하지 않다면, 우리의 선행은 상을 받지 못할 것이다. 바울은 불순한 동기로 복음을 전파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밝혔다(빌1:15-17을 보라). 예수님께서 지시하신 것처럼, 우리가 구제하는 동기가 순전한지를 확인하는 좋은 방법은 구제할 때에 될수록 은밀하게 하여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이다. 제자 삼는 사역자는 그의 제자들에게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라고(그들이 할 수 있다면) 가르치며, 그도 자신이 가르치는 대로 조용하게 실천한다.

올바른 동기로 기도하고 금식하라(Prayer and Fasting for the Right Reasons)

예수님은 또한, 그분을 따르는 자들이 기도하고 금식하기를 기대하시고, 그들이 그것을 하는 이유가 사람에게 보이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기 위함이기를 바라신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지옥에 가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다를 바가 없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기도하고 금식하는 유일한 이유는 매우 일시적인 보상인 사람들의 칭찬을 받기 위함이다. 예수님은 그분을 따르는 자들에게 이렇게 권고하셨다.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 6:5-6, 16-18).

얼마나 많은 자칭 그리스도인들이 기도 생활을 하지 않고, 금식해본 적이 없는지 모른다.[10]이런 점에서, 그들의 의가 이 모든 것을 행하는(잘못된 이유임에도 불구하고)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

기도와 용서의 주제로 돌아오다(A Digression Regarding Prayer and Forgiveness)

기도의 주제를 말씀하시는 동안, 예수님은 본제를 조금 벗어나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방법에 관하여 더욱 구체적인 지침을 주셨다. 예수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 그분께서 자신에 대해 계시한 것을 우리가 부정함으로 그분의 아버지를 모욕하지 않기를 원하셨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께 간구하기 전에 이미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그분은 모든 것을 아신다), 우리가 기도할 때 무의미한 반복을 할 이유가 없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마 6:7-8).

진실로, 우리의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을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를 드러낸다. 그분이 말씀 속에서 자신을 계시함으로 그분을 아는 사람은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고 그분께 영광을 돌린다. 그들의 가장 큰 소원은 거룩하여져서 온전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모범적인 기도에서 반영되는데 우리는 그 기도를 주님의 기도라고 부른다. 그것은 우리의 우선순위와 헌신에 대한 그분의 기대를 드러낸다.[11]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마 6:9-11).

그리스도의 제자가 가져야 할 최고의 관심사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고, 존경받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사람은 그들 자신이 거룩해 짐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위선적이다. 따라서 이 기도는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하나님께 복종하기를 원하는 우리의 소원을 반영한다.

모범기도의 두 번째 간구도 비슷하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나라에 대한 생각은 그 나라를 지배하는 한 왕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 제자는 그의 삶을 주관하시고, 온 땅을 지배하시는 그의 왕을 볼 수 있기를 소망한다. 아, 모든 사람이 순종의 믿음으로 왕이신 예수님께 무릎을 꿇고 경배드려야 할 것이다!

세 번째 간구는 첫 번째와 두 번째 간구의 되풀이이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다시 한 번, 우리가 자신의 삶 속에서 하나님께 복종하지 않고 어떻게 이러한 기도를 진심으로 할 수 있겠는가? 진정한 제자는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완전하게 이루어지기를 갈망한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며,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고, 그분의 나라가 임하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일용 할 양식”을 얻는 것보다 더 중요해야 한다. 이 네 번째 간구가 네 번째에 배치된 것은 그럴만 한 이유가 있다. 이 간구는 우리가 가져야 할 정확한 우선순위를 반영하며 탐욕에 대한 언급은 한마디도 찾아볼 수 없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재물이 아닌 하나님을 섬긴다. 그들은 초점을 이 땅에 보물을 쌓아두는 것에 두지 않는다.

그리고 이 네 번째 간구는 모범기도는 우리가 매일 하루를 시작할 때마다 해야함을 보여주는 듯 하다.

모범기도는 계속하다(The Model Prayer Continues)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종래로 죄를 짓지 않을까? 그들도 분명히 때로는 죄를 지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그들의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하도록 가르쳤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6:12-15).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들의 불순종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고, 그들이 죄를 지으면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얼룩을 제거하려 하고, 고맙게도 은혜로우신 하늘 아버지께서 기꺼이 용서해 주신다. 그러나 그들은 반드시 용서를 구해야 하는 데 그것은 곧 주님의 기도의 다섯 번째 간구이다.

그러나 그들이 용서받는 것은 그들이 다른 사람들에 대한 용서를 조건으로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많이 용서받았기에 그들도 그들에게 용서를 구하는 모든 사람을 용서해줄 의무가 있다(그리고 용서를 구하지 않는 사람도 사랑하고 그들과 화해하기를 힘써야 한다). 만일 그들이 용서하기를 거부하면 하나님은 그들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여섯 번째이자 마지막인 간구도 분명히 진정한 제자가 거룩해지려는 소원을 반영하였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그러므로 진정한 제자는 거룩함을 추구하기에 하나님께 그가 유혹될 수 있거나 실족할 수 있는 상황에 놓이지 않게 해달라고 간구한다. 또한, 그는 하나님께서 그가 빠질 수 있는 모든 악에서 구원해 달라고 간구한다. 물론, 이것은 우리가 악하고 유혹으로 가득한 이 세상으로 나아가기 전에 하루를 시작하면서 할 수 있는 좋은 기도이다. 그리고 우리는 당연히 그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이 기도를 응답해 주실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왜 이 기도의 여섯 가지 간구가 적절한지를 이해한다. 그 이유는 기도의 마지막 줄에 공개되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마 6:13). 하나님은 그분의 나라를 통치하시는 위대하신 왕이며 우리는 그분의 종이다. 그분은 전능하시며 아무도 그분의 뜻을 거역할 수 없다. 모든 영광은 영원히 그분께 있다. 그분은 우리의 순종을 받을만한 분이시다.

주님의 기도의 지배적인 주제는 무엇일까? 거룩함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고, 그분의 통치가 이 땅 위에 세워짐으로 하여 그분의 뜻이 모든 곳에 완전하게 이루어지기를 소망한다. 이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자신의 일용할 양식보다 더 중요하다. 그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원하며, 그들이 실패했을 때, 그들은 그분께 용서를 구한다. 용서받은 사람으로서, 그들은 다른 사람도 용서해준다. 그들은 완벽하게 거룩해지기를 원한다. 그들은 유혹을 피하기를 소원하는 데, 그것은 유혹은 그들이 죄를 지을 가능성을 커지게 하기 때문이다. 제자 삼는 사역자는 그분의 제자들에게 이런 것들을 가르치고 있다.

제자와 그의 물질적 소유(The Disciple and His Material Possessions)

산상수훈의 다음 주제는 물질의 축적을 삶의 주요동력으로 삼는 자칭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매우 큰 불쾌감을 줄 수 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이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19-24).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위하여 땅에 보물을 쌓아 두지 말라고 명령하셨다. 그렇다면 “보물”은 무엇을 의미할까? 문자 그대로 보물은 보물 상자에 넣어서 어딘가에 보관되며 실제로 어떤 곳에도 사용되지 않는다. 예수님은 그것들은 좀벌레와 동록과 도둑을 끌어온다고 말씀하셨다. 다른 말로 하면 그것은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좀벌레는 우리가 자주 입는 옷이 아닌 옷장의 맨 끝 부분을 해한다. 동록도 우리가 거의 사용하지 않는 것들을 해한다. 많은 선진국에서, 도둑들은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이 필요로 하지 않는 예술품, 보석, 비싼 장치, 그리고 저당 잡힐 수 있는 물건과 같은 것들을 훔친다.

진정한 제자들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린다”(눅 14:33을 보라). 그들은 단순히 하나님의 재물을 관리할 청지기이기 때문에 재물을 지출하는 모든 결정은 영적인 결정이다. 우리가 우리의 재물을 어떻게 관리하는가를 보면 누가 우리의 삶을 주관하는지를 보아낼 수 있다. 우리가 “보물”을 쌓아두며, 재물을 저축하고 필수적이지 않은 물건들을 구매하고 있다면, 그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주관하고 계시지 않음을 드러내는데, 만일 그분이 주관하셨다면,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에게 위임하신 재물로 더 나은 일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더 나은 일이란 무엇인가?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늘에 보물을 쌓아 두라고 명령하셨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 그분은 누가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둑도 가까이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눅 12:33).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고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우리는 하늘에 보물을 쌓아둔다. 예수님은 우리가 가치를 잃고 쓸모없어지기 마련인 것들을 영원히 가치가 떨어지지 않을 것들에 투자하라고 말씀하신다. 제자 삼는 사역자가 하는 일이 바로 그런 것들이며, 그분 역시 제자들에게 똑같이 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나쁜 눈(The Bad Eye)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고, 나쁜 눈을 가진 사람은 온 몸이 어두울 것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무슨 의미일까? 그분의 말씀은 꼭 돈과 물질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은 전 후 구절에서 모두 그 부분에 대해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6장 23절에서 “나쁘면”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마태복음 20장 15절에서 “악하게(부러워하는)”로 번역되었다. 거기서 우리는 한 주인이 한 품꾼에게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또는 내가 후하니까 네 눈이 부러워하느냐)”고 말하는 것을 읽을 수 있다. 분명히 눈은 문자 그대로 부러워 할 수 없다. 따라서 “부러워 하는(또는 나쁜) 눈”이란 표현은 탐욕스러운 사람을 가리킨다.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마태복음 6:22-23에서 의미하신 바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성한 눈을 가진 사람이란 진리의 빛이 그에게 들어오게 하는, 순수한 마음을 가진 사람을 말한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를 섬기며, 땅이 아닌 그의 마음이 있는 하늘에 보물을 쌓아둔다. 나쁜 눈을 가진 사람은 진리의 빛이 그에게 들어오지 못하도록 마음을 닫았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가 이미 진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어둠으로 가득하며 거짓말을 믿는다. 그는 자기의 마음이 있는 땅에 보물을 쌓아두며, 그의 삶의 목적은 자기만족이라고 믿는다. 돈이 그의 신이다. 그는 천국을 상속받지 못한다.

돈을 자신의 신으로 모신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그것은 당신의 마음에 오직 하나님만이 계셔야할 자리에 돈이 자리잡고 있는 것을 말한다. 돈이 당신의 삶을 주도하고 있는 것이다. 돈은 당신의 에너지, 생각과 시간을 소모한다. 돈만이 당신의 기쁨의 주요 원천이다. 당신은 돈을 사랑한다.[12] 그 이유 때문에 바울은 탐하는 자와 우상 숭배자를 동일시하였고, 탐하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한다고 하였다(엡 5:5; 골 3:5-6을 보라).

하나님과 재물은 모두가 우리 삶의 주인이 되고 싶어하며, 예수님의 말씀처럼 우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 다시 한 번, 우리는 예수님께서 “오직 거룩한 자만이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는다”라는 그분의 주제를 유지하고 계심을 볼 수 있다. 그분은 어둠으로 가득한 사람은, 돈을 신으로 삼고, 땅에 마음을 두고 땅위에 보물을 쌓아두고 있으며, 생명으로 통하는 좁은길로 가지 않음을 분명하게 지적하셨다.

탐욕스러운 가난한 자(The Covetous Poor)

사치품을 탐내는 것만이 사람들을 물질에 빠지게 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일은 기본 필수품일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은 계속하여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 6:25-34).

이 책의 많은 독자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람들과 많이 다를 것이다. 당신이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위해 마지막으로 염려해본 것은 언제인가?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확실히 우리 모두에게 적용된다. 만일 우리가 생활 필수품을 추구하는 데에 신경쓰고 있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면, 필수품이 아닌 것을 추구하는 데에 신경을 쓰는 것은 얼마나 더 잘못된 것일까? 예수님은 그분의 제자가 두 가지 일을 추구하는 데에 집중하기를 바라셨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이다. 자칭 그리스도인이 십일조(구약의 계명임)는 낼 수 없지만, 많은 필요하지 않은 물질적인 것들을 살수 있다면, 그는 과연 그리스도의 기준인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계명대로 살았는가? 답은 분명하다.

흠잡는 사람이 되지 말라 (Don’t be a Fault-Finder)

예수님께서 그분을 따르는 자들에게 주신 다음 계명은 비판과 흠 잡는 죄에 관한 것이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 7:1-5).

비록 예수님은 이 구절에서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가리키지는 않으셨지만, 그들은 확실히 그런 죄를 짓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들은 예수님의 흠을 잡으려 하였다!

다른 사람을 비판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이 경고는 무엇을 의미할까?

먼저, 그분의 뜻이 아닌 것을 생각해 보자. 그분은 우리가 사람들의 행동을 관찰함으로써 그들의 성격에 대한 기본적인 판단을 하고 분별하지 말아야함을 의미하시지는 않았다. 그것은 아주 분명하다. 바로 이 말씀을 하신 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의 진주를 돼지앞에 던지지 말고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라고 지시하셨다(7:6을 보라). 그분은 분명히 특정 부류의 사람들을 돼지와 개에 비유하심으로써 그들이 받은 “진주”와 같은 거룩한 것들의 가치를 인식하지 못함을 말씀하셨다. 그들은 분명히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 계명을 지키려 한다면 반드시 사람들이 돼지나 개인지를 판단해야 한다.

또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양의 옷을 입은 이리”와 같은 거짓 교사(7:15을 보라)는 그들이 맺은 열매로써 판단할 수 있다고 알려주셨다. 분명히, 우리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람들의 생활방식을 관찰하고 판단을 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바울은 고린도 신자들에게 이렇게 썼다.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욕을 부리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모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속여 빼앗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고전 5:11).

이 가르침에 순종하기 위해서 우리는 사람들의 생활방식을 검토하고 우리의 관찰을 근거로 그들에 대한 판단을 내려야 한다.

사도 요한은 또한, 우리에게 누가 하나님께 속한 자이고 누가 악마에게 속한 자인지를 쉽게 분별할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사람들의 생활방식을 보면 누가 구원받고 누가 구원받지 못했는지가 분명하다(요일 3:10을 보라).

이 모든 것으로 보아, 한 사람이 하나님께 속한 자인지 아니면 악마에게 속한 자인지를 판단하기 위해 그 사람의 행동을 살펴보고 분별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경고하신 비판하는 죄가 아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무엇을 의미하셨을까?

우리는 예수님께서 형제의 작은 결함, 얼룩을 찾는 것에 대해 말씀하고 계심을 확인할 수 있다(예수님은 이 단락에서 형제란 단어를 세 번 사용하셨는다는 점을 유의하라). 예수님은 우리가 사람들의 명백한 결함을 관찰함으로 그들이 불신자라고 판단하는 것에 대해 경고하시지 않았다(왜나하면 그분은 그 부분에 대해 바로 이 설교에서 우리에게 곧 지시할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을 대하는 방법에 관한 가르침이다. 그들은 서로의 흠을 잡으려 해서는 안되는데, 특별히 자신의 큰 결함은 보지 못할 때 더욱 그러하다. 이러한 경우, 그들은 위선적이 된다. 예수님께서 한 번은 위선적인 재판관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 8:7).

사도 야고보의 서신서는 산상수훈과 아주 유사한데, 그는 이렇게 썼다.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약 5:9). 아마도 이것 또한, 우리가 신자끼리 서로 흠을 잡고, 그것에 대해 서로 원망하는 것에 대한 예수님의 경고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이것은 교회 속에 가장 널리 퍼져있는 죄 중 하나이며, 이런 죄를 지은 사람은 판단을 받는 위험한 위치에 놓여지게 된다. 우리가 다른 동료 신자들을 비판하며, 그의 잘못을 다른 사람들에게 지적한다면, 우리는 황금률을 위반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도 다른 사람들이 우리가 없을 때 우리의 나쁜말을 하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랑하는 마음으로 동료 신자의 잘못을 지적할 수 있는데, 오직 우리가 위선이 없고, 우리가 대면하는 사람과 같은 죄(또는 더 심한 죄)를 짓지 않았을 경우에만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러나 불신자와 이렇게 하는 것은 완전히 시간 낭비이다. 예수님의 다음 말씀은 그것을 말해주는 듯하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마 7:6).

마찬가지로, 잠언을 보면, “거만한 자를 책망하지 말라 그가 너를 미워할까 두려우니라 지혜 있는 자를 책망하라 그가 너를 사랑하리라”(잠 9:8)고 한다. 예수님은 딴 때에 제자들에게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라고 말씀하셨다. 제자가 일단 이런 사람들이 진리를 알아보지 못하는 “개”들임을 분별했다면,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도 아직 복음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그분의 종들이 이런 사람들에게 자신의 시간을 낭비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는다.

기도에 대한 격려(Encouragement to Pray)

마지막으로 우리는 예수님의 설교 본문의 마지막 부분에 와 있는데 그것은 기도를 격려하는 약속으로 시작한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 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 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7-11).

“아!” 어떤 독자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산상수훈 중 이 부분의 말씀은 거룩함과 관계가 없다.”

그것은 우리가 기도중에 무엇을 구하고, 두드리고, 찾는지에 달려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로서 우리는 예수님의 설교에서 명령하신 모든 것을 순종하기를 원하며, 그 갈망은 우리의 기도에도 확실히 반영된다. 사실 예수님께서 전에 이 설교에서 하신 모범기도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과 거룩함에 대한 열망의 표현이었다.

또한, 누가복음을 보면, 이처럼 기도를 격려하는 약속은 다음과 같이 마무리 된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 11:13). 예수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을 약속 하실 때 고급스러운 것을 생각하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마음속으로 성령이야말로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셨는데, 왜냐하면, 성령님은 우리로 하여금 거룩해 지게 하며 복음을 전파하는 것을 도와 다른 사람들을 거룩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룩한 사람은 천국에 간다.

다른 “좋은 것”은 하나님의 뜻안에 있는 모든 것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은 분명히 그분의 뜻과 그분의 나라에 가장 깊은 관심을 가지셨으며,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더 쓰임받기 위해 하는 기도는 항상 응답 받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맺음말(A Summarizing Statement)

이제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 시점까지 하신 모든 말씀을 요약하는 구절에 도착한다. 많은 주석가들은 이 구절을 놓치지만,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란 단어로 시작하는 이 구절은 분명히 맺음말이다. 따라서 그것은 이전의 가르침과 연결되는데, 그렇다면 이러한 질문이 들 것이다. 이 구절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들을 얼마만큼 요약하고 있는가? 한 번 읽어보고 생각해 보자.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 7:12).

이 구절은 단지 그 전의 기도에 관한 몇 구절의 말씀에 대한 요약이 아닌데, 그렇지 않으면 이치에 맞지 않다.

예수님께서 설교 초기에 그분이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잘못 생각하는 것에 대해 경고하셨음을 기억하라(마 5:17을 보라). 그 시점부터 지금 도착한 이 구절에 이르기까지 그분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구약 성경의 계명들을 긍정하고 해석하셨다. 따라서, 그분은 지금 자신의 모든 명령을 요약하고 계시며, 이 모든 것은 율법과 선지자로부터 유래되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7:12).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란 문구는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17부터 7:12까지 하신 모든 말씀을 연결시켜 준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그분의 설교를 마무리 짓기 시작하면서 다시 한 번 오직 거룩한 자만이 천국을 상속받는다는 그분의 주제를 되풀이 하셨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 7:13-14).

분명히 찾는 자가 적으며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과 협착한 길은 구원의 상징이다. 대부분 사람들이 찾는 멸망으로 인도하는 큰 문과 넓은 길은 지옥의 상징이다. 만일 예수님이 이 말씀 전에 한 모든 말씀이 모종의 의미를 지니고, 이 설교가 논리적으로 전개되었고, 예수님이 이성적으로 의사전달을 했다면, 좁은 길에 대한 가장 자연스러운 해석은 바로 그것은 예수님을 따르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길을 의미할 것이다. 넓은 길은 정 반대일 것이다. 얼마나 많은 자칭 그리스도인이 이 설교에서 묘사한 좁은 길에 서 있을까? 제자 삼는 사역자는 당연히 좁은 길에 서 있으며, 그는 자기의 제자들도 같은 길을 갈 수 있도록 이끌어 가고 있다.

이 설교가 자칭 그리스도인들을 곤혹스럽게 하는 것은 바로 예수님은 구원과 멸망에 관해 많은 말씀을 하셨지만,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 관해서는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았다는 점이다. 하지만, 믿음과 행동은 분리할 수 없음을 이해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 설교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 예수님께 순종하는 사람은 자신의 행동을 통하여 믿음을 보여준다. 그분께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의 구원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의 징표일 뿐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 일어나는 변화도 그분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다. 우리의 거룩함인즉 그분의 거룩함이다.

거짓 종교 지도자를 분별하는 방법(How to Recognize False Religious Leaders)

예수님은 그분의 결론 발언을 계속하시면서, 그분의 제자들에게 거짓 선지자들이 분별없는 자들을 넓은 길로 인도하여 멸망에 이르게 함을 경고하셨다. 그들은 진정으로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이 아니다. 비록 그런 것처럼 위장하지만 말이다. 모든 거짓 교사들과 지도자들은 이 부류에 속한다. 어떻게 그들을 알아낼 수 있을까?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처럼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15-23).

분명히 예수님은 거짓 교사가 매우 기만적임을 지적하셨다. 그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진실해 보인다. 그들은 예수님을 그들의 주님으로 부르고, 선자자 노릇을 하며, 귀신을 쫓아 내며, 권능을 행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양의 옷을 입은 탐욕스러운 이리들이다. 그들은 진정한 양이 아니다. 그들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들의 진정한 신분은 그들의 “열매”로 알 수 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열매는 무엇인가? 분명히, 그것은 권능의 열매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에 대한 순종의 열매이다. 진정한 양들은 아버지의 뜻대로 행할 것이다. 가짜는 “불법을 행한다”(7:3). 그렇다면, 우리의 책임은 그들의 삶을 예수님이 가르치고 명령하신 것에 비교해 보는 것이다.

거짓 교사들은 오늘날 교회 속에 편만해 있으며, 우리는 그로 말미암아 놀랄 필요가 없는데 왜냐하면, 예수님과 바울은 우리가 말세가 다가옴에 따라 이런 사람들이 나타날 것을 예견해야 함을 미리 경고하셨다(마 24:11; 딤후 4:3-4을 보라). 우리 시대의 가장 널리 알려진 거짓 선지자는 천국은 거룩하지 않은 사람을 기다린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수백만 명이 영원한 지옥살이를 하는 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존 웨슬리는 그들에 대해 이렇게 썼다

이것은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 하나님의 대사가 마귀의 대리인이 되고- 가르치는 일에 헌신한 사람들이 천국으로 가는 길이 아닌 지옥으로 가는 길을 가르치고 있다…만약 누군가 나에게 “왜, 누가 이런 일을 했는가?”고 묻는다면, 나는 수만 명의 현명하고 존경받는 사람들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들은 교파를 불문하고 교만한 자, 빈들거리는 자, 정욕에 빠진 자, 세상을 사랑하는 자, 쾌락을 추구하는 자, 불의하거나 박정한 자, 안일하고, 부주의하고, 악의 없고, 쓸모없는 존재, 그리고 의로움 때문에 비난을 받은 적이 없는 사람들을 부추겨 그들로 하여금 자기들이 천국으로 갈 수 있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거짓 선지자들이다. 이들은 하나님을 배신하고 또한, 사람을 배신한다… 이들은 지속적으로 사람들을 어두움의 세계로 끌어간다; 그리고 이들을 따라간 자들은 불쌍한 영혼마저 파멸된다. “지옥이 땅 밑에서 올라와 이들을 삼켜 버렸으면 좋겠다!”[13]

흥미롭게도, 웨슬리는 특별히 예수님이 마태복음 7:15-23에서 경고하신 거짓 교사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많은 거짓 교사가 가르치는 것과는 달리,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자는 지옥에 던져진다고 명백하게 말씀하셨음을 확인할 수 있다(7:19을 보라). 또한, 이 말씀은 교사와 선지자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 예수님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고 말씀하셨다. 선지자뿐 아니라 모든 사람도 마찬가지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주제이다–오직 거룩한 자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한다. 예수님께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지옥에 갈 수밖에 없다.

또한, 예수님은 사람의 내면과 외면을 연결시키고 있음을 유의하라. “좋은” 나무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외적으로 드러나는 아름다운 열매의 원천은 사람의 본성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분은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는 사람들의 본성을 변화시켰다.[14]

마지막 경고 및 요약(A Final Warning and Summary)

예수님은 마지막에 하나의 경고 및 요약의 예로 그분의 설교를 결론 지었다. 당신이 예상한 것처럼, 그것은 오직 거룩한 자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한다는 그분의 주제에 대한 예증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마 7:24-27).

예수님의 마지막 예는 일부 사람들이 생각하는 “성공적인 인생”에 대한 공식이 아니다. 문맥을 보면 그분은 어떻게 하면 어려운 시기에 그분의 약속을 믿음으로써 물질적인 번영을 이룰 것인가에 대한 조언을 주신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하신 산상수훈의 모든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그분의 말씀대로 행한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며 무너지지 아니할 것이며;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그분께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며 엄청난 고통을 겪게 되며,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게 된다(살후1:9).

질문에 대한 답변(Answer to an Question)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그분의 희생과 죽음, 그리고 부활 이전에 살았던 그분의 추종자들에게만 적용될 가능성은 없을까? 그들은 율법아래 있음으로 임시적으로 구원 받았다가, 예수님이 그들의 죄를 위해 죽은 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므로 이 설교의 주제를 폐하여도 되지 않을까?

이런 이론은 잘못된 것이다. 아무도 자신의 행위로써 구원받은 사람은 없다. 구약 시대에도, 그 이전에도 항상 믿음으로 구원받았다. 바울은 로마서 4장에서 아브라함(구약 전)과 다윗(구약시대)은 모두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것이지 행위로써 의롭게 된 것이 아님을 주장하였다.

또한, 예수님의 청중들 중 아무도 행위로써 구원받을 수 없었는데 그것은 그들이 모두 죄를 범하였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롬 3:23).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그들을 구원할 수 있으며,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

불행하게도, 오늘날 교회에는 너무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계명을 단지 우리가 죄인임을 인식하게 하는 것만으로 여김으로써 우리가 행위로써 구원을 받을 수 없고, 지금 우리가 “복음을 들었으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기에 우리는 그분의 대부분의 계명을 무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계명을 다시 꺼내서 사람이 얼마나 죄악스러운지를 보여주며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해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전 세계로 나아가서 제자를 삼고 일단 그들이 죄책감을 느끼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되면, 내 계명은 그들의 삶에서의 목적을 다 하였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오히려, 그분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20, 강조 추가). 제자 삼는 사역자는 바로 그 일을 행한다.

 


[1]흥미롭게도, 야고보서의 그 다음 구절은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약 2:14)이다.

[2]비록 예수님이 의식법을 이루신 것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이 성령님을 통하여 예수님의 부활후 사도들에게 주어질 것이지만, 사람들이 “율법의 도덕적 측면”과 “율법의 의식적 측면”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맞는 말일 것이다. 우리는 지금 신약에서 왜 동물을 희생시킬 필요가 없는지 알고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 양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님이 모든 음식물은 깨끗하다고 선언 하셨기에 구약의 음식법을 따를 필요가 없다(막 7:19을 보라). 우리는 지상의 대제사장의 중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의 대제상장은 예수님이기 때문이다. 의식법과는 달리, 도덕법의 어떠한 부분도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전후에 예수님에 의해 변경된 것은 없다. 오히려 예수님은 도덕법을 자세히 설명하시고 또 긍정하셨다. 그분이 부활하신 후에 사도들도 성령님의 감동으로 그렇게 행하였다. 모세의 율법의 도덕적 측면은 모두 그리스도의 새 언약의 율법에 포함되어 있다. 또한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유대인들에게 말씀하고 계셨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마태복음 5:17-20에 기록된 그분의 말씀은 신약 성경에서 발견된 그분의 지속적인 계시에 따라 해석해야 한다.

[3]또한, 만일 예수님이 우리가 그분을 믿음으로 인해 선물로 전가 받게 되는 율법적인 의를 말씀하셨다면, 그분은 왜 그것에 대해 암시조차 하시지 않았을까? 그분은 왜 교육받지 못한 청중들이 쉽게 오해할 수 있는 말씀을 하셨을까? 그들은 그분께서 전가한 의에 대해 말씀하실 줄을 짐작조차 못할 것이다.

[4]이것은 우리와 그리스도안에 있는 형제 자매들과의 관계에 적용된다. 예수님은 성경이 보편적으로 말씀하듯이(잠 1:7; 13:20을 보라) 일부 종교 지도자들이 어리석다고 말씀하셨다(마 23:17을 보라).

[5]물론, 하나님은 그녀가 재혼 할 때 그녀가 간음을 범했다고 보지 않으셨다. 그녀는 단지 남편의 죄로 인한 피해자였다. 분명한 것은, 그녀가 재혼하지 않는 한, 예수님의 말씀은 의미가 없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녀가 간음을 범했다고 보는 것은 의미가 없다.

[6]다시 한 번, 하나님은 그녀의 새로운 남편이 간음을 범했다고 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는 선한 일을 하고 있으며 이혼 당한 여자와 재혼하고 그녀의 생활을 돌봐주고 있다. 그러나 만일 한 남자가 한 여자가 자기와 결혼하게 하기 위해서 그녀를 남편과 이혼하도록 부추긴다면, 그는 간음 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아마도 그런 죄를 염두에 두셨을 것이다.

[7]물론, 다른 상황도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구원받지 못한 남편에게서 이혼 당한 그리스도인 여자가 그리스도인 남자와 결혼하는 것은 간음을 범한 것이 아니다.

[8]이혼과 재혼에 관한 장에서, 나는 이 문제를 좀 더 철저하게 다룰 것이다.

[9]어떤 율법교사가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님께 “내 이웃이 누구이니까?”라고 물었다. 당신은 그가 이미 정답을 아는 줄로 생각했음을 보아낼 수 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미움 받는 종족인 한 사마리아인이 강도를 만난 유대인에게 자신이 이웃임을 증명한 이야기를 통하여 그에게 답하셨다(눅 10:25-37을 보라).

[10]이 책의 뒷부분에서, 나는 금식의 주제에 관해 전체 장을 통하여 다루었다.

[11]불행하게도, 일부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은 이 기도를 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그 이유는 이 기도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논리를 적용하면, 우리는 사도행전과 서신서에 기록 된 사도들의 많은 기도가 “그리스도인의 기도”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수 밖에 없다.

[12]다른 경우에도, 예수님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에 관해 같은 말씀을 하셨으며 누가는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었다”(눅 16:14)고 썼다. 때문에 다시 한 번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바리새인들의 행함과 가르침에 대하여 분명하게 폭로하셨다.

[13] The Works of John Wesley (Baker: Grand Rapids, 1996), by John Wesley, reprinted from the 1872 edition issued by the Wesleyan Methodist Book Room, London, pp. 441, 416.

[14]나는 이 기회에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죄를 위해 변명할 때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표현인 “우리는 그들의 마음을 모른다”는 말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말과는 상반되게, 예수님은 여기에서 외적으로 들어나는 것이 내면을 보여준다고 말씀하셨다. 다른 곳에서, 그분은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한다”(마 12:34)고 말씀하셨다. 한 사람이 미워하는 말을 할 때, 그것은 그의 마음이 미움으로 가득 차 있음을 나타낸다. 예수님은 또한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라”(막 7:21-22)고 우리에게 말씀하셨다.한 사람이 간음을 범했을 때 우리는 그가 마음속으로도 간음을 범했음을 분명히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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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th Korean » 산상수훈(The Sermon on the Mount)

가르침의 사역(The Ministry of Teaching)

제 6 장 (Chapter Six)

이 장에서 우리는 가르침의 사역의 여러 측면을 고려할 것이다. 우리가 모두 그리스도의 모든 계명에 순종하는 제자를 삼고 가르치기 위해서는[1] 사도, 선지자, 복음 전도자,[2] 목사/장로/감독, 교사(물론), 그리고 어느 정도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라면 모두 가르침의 책임을 져야 한다.

내가 이전에 강조한 바와 같이, 제자 삼는 목사거나 사역자는 가르칠 때 먼저 자신이 본을 보여준 후 말로 가르쳐야 한다. 그는 자신이 설교하는 것을 실천해야 한다. 매우 성공적인 제자 삼는 사역자인 사도 바울은 이렇게 썼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자가 되라(고전 11:1).

이것은 모든 사역자의 목표여야 한다 — 자신이 인도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정직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나를 본받으십시오. 만일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은 어떠한 인생을 사는지 알고 싶다면, 저를 바라보기만 하면 됩니다.”

대조적으로, 나는 전에 목회했던 교회에서 했던 말이 기억난다, “나를 따라 하지 마십시오…그리스도를 따르십시오!” 비록 그 당시 사람들이 나를 따르지는 않았지만, 나는 내가 따라야 할 좋은 본이 되지 못했음을 인정했다. 사실, 나는 내가 그리스도를 제대로 따르지 않았음을 인정하였고, 내가 하지 않는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요구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바울이 했던 말과는 너무 달랐다. 사실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본받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우리를 본받지 말라고 한다면 우리는 사역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그들의 사역자들을 그들의 본보기로 삼기 때문이다. 지도자들의 모습이 교회의 모습을 반영한다.

 

연합의 본을 보여주며 가르치라(Teaching Unity by Example)

본을 보여주며 가르치라는 개념을 하나의 특정 주제인 연합의 주제에 적용해보자. 모든 목사/장로/감독들은 그들이 인도하는 양들이 연합할 것을 원한다. 그들은 그들의 지역 내 지체들 사이의 분열을 싫어한다. 그들은 당을 짓는 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결국, 예수님은 그분이 우리를 사랑한 것처럼 우리가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하셨다(요13:34-35을 보라). 서로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우리를 지켜보는 세상 앞에서 우리가 그분의 제자임을 보여주는 증표이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지도자는 그들의 양 떼가 서로 사랑하고 연합을 이루기 위해 노력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그러나 가장 먼저 자신이 본을 보여줌으로써 가르쳐야 할 사역자인 우리는 자주 삶 속에서 사랑과 연합에 대한 우리의 가르침에 훨씬 미치지 못하고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다른 목회자들을 사랑하고 그들과 연합하는 데 있어서 부족함을 보여줄 때, 우리는 교회에서 설교하는 것과는 대조되는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다. 우리는 회중들에게 그들이 우리가 하지 않는 일을 하기를 기대한다.

사실, 예수님의 연합에 관한 가장 중요한 말씀은 지도자들에게 하신 것으로 다른 지도자들과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예를 들어,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후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13-15)[예수님이 본을 보여주면서 가르치셨다는 점을 주목하라]

목사들은 종종 이 성경 구절을 사용하여 자신의 회중들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치는 데 이것은 적절하지 않다. 오히려, 이 구절의 말씀은 지도자들인 12명의 사도를 향한 것이다. 예수님은 그분의 미래 교회들이 분열되거나 서로 경쟁하는 경우 교회가 자기의 사명을 다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 그래서 그분은 지도자들이 겸손하게 서로를 섬기기를 바라신다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주셨다.

그 시대 문화적인 맥락에서, 예수님은 가정 하인들의 가장 낮은 작업 중의 하나인, 발을 씻어주는 것으로써 겸손한 섬김의 본을 보여 주셨다. 만일 그분이 역사의 다른 시간에 다른 문화를 방문했었다면, 그분은 화장실을 파거나 제자들의 쓰레기통을 청소했을 수도 있다. 그분의 현대 지도자 중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러한 사랑과 겸손함을 보여주기를 원할까?

예수님은 한 시간도 흐르기 전 그곳에서 이 중요한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강조하셨다. 그분은 그들의 발을 씻어주신 몇 분 후, 예수님은 그분의 미래 교회 지도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4-35).

이 말씀들은 확실히 그리스도의 모든 제자에게 적용될 수 있지만, 원래는 다른 지도자들과의 관계에 관해서 지도자들에게 한 말씀이었다.

다시 한 번, 단 몇 분 후, 예수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 15:12-13).

예수님은 다시 한 번 지도자들에게 말씀하고 계신다는 것을 주목하라.

몇초 후,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요 15:17).

그 뒤로 몇 분이 지난 후,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분이 그들을 위하여 기도 하시는 것을 듣게 된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요 17:11, 강조 추가).

마지막으로, 불과 몇 초 후에, 예수님이 계속적으로 기도하시는 중에 제자들은 그분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듣게 된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안에, 내가 아버지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요 17:20-23, 강조 추가).

따라서 같은 공간에서 한 시간도 안 되는 사이에, 예수님은 여섯 번이나 그분의 미래 지도자들에게 연합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으며 서로 겸손하게 사랑하고 섬기는 것을 통하여 연합을 이루라는 것을 보여주셨다. 이것은 분명히 예수님께 매우 중요했다. 그들의 연합은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중요한 요소였다.

우리는 얼마나 잘 하고 있는가?(How Well Are We Doing?)

불행하게도, 우리가 우리의 양들이 사랑으로 연합되기를 바랄 때, 우리 중 많은 사람은 서로 경쟁하고 다른 교회의 대가로 비윤리적인 방식으로 교회를 세우고 있다. 우리 중 대부분은 교리가 다른 목회자들과의 교제를 피한다. 우리는 심지어 교회 건물 앞에 표어를 써 붙여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가 연합되지 않음을 광고하고 있으며 “우리는 다른 교회 그리스도인들과 다르다”라는 메시지를 보낸다. (그리고 우리는 세상사람들에게 우리가 연합되지 않음을 잘 교육하고 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불신자들은 기독교를 매우 분열된 기관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말만하고 실행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의 실제모습은 우리의 설교보다 회중들에게 연합에 관해 더 많은 것들을 가르친다. 지도자들의 언행이 일치하지 않을 때 보통 그리스도인이 연합하고 서로 사랑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유일한 해결책 또는 방법은 회개이다. 우리는 신자들과 세상 사람들에게 잘못된 본을 보여준 것에 대해 회개해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우리를 분열하는 장벽들을 제거하고 예수님이 명령하신 대로 서로를 사랑하기 시작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먼저 교리적으로 서로 다른 목회자들을 포함한 다른 목회자들과 사역자들과 만나야 함을 의미한다. 나는 거듭나지 않았거나, 예수님께 순종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거나, 또는 개인 이익을 위해 사역하는 목회자들과 교제하라는 뜻이 아니다. 그들은 양의 탈을 쓴 늑대들이며, 예수님은 어떻게 그들을 알아낼지 분명하게 알려주셨다. 그들은 그들이 맺은 열매로 알아낼 수 있다.

오히려, 나는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목사들과 사역자들, 그리스도안에 있는 진정한 형제자매들을 가리킨다. 만일 당신이 목사라면, 당신은 다른 목사들을 사랑하고, 당신의 양들 앞에서 그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것을 시작하는 한 가지 방법은 주위의 다른 목회자들한테 가서 자신이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은 것에 대해 용서를 구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가로막힌 벽들을 부숴야 한다. 그런 다음 정기적으로 함께 만나서 식사를 나누고, 서로를 격려하고, 권면하고, 기도하는 위한 모임들을 가지도록 한다. 그렇게 되면, 당신은 궁극적으로 분열의 경향이 있는 교리들에 대해 논의하기를 즐기게 되고, 논의하는 것들에 대해 동의 여부를 떠나 연합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게 될 것이다. 내가 결과적으로 교리가 부동한 사역자들의 말들을 기꺼이 듣기 시작하였을 때, 나의 삶과 사역은 크게 풍성하게 되었다. 나는 마음의 문을 닫음으로 인해 수년 동안 많은 축복을 놏쳤다.

당신은 또한, 당신의 교회거나 가정교회 모임에 다른 목회자들을 초대하여 설교하게 하거나, 당신의 교회에서 다른 교회거나 가정교회 모임들과 합동예배를 드림으로써 당신의 사랑과 연합을 보여줄 수 있다.

당신은 당신 교회의 이름을 변경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나머지 지체들과의 불통일을 세상에 광고하지 않을 수 있다. 당신은 당신이 소속된 교단이거나 특정한 단체에서 퇴출하고 오직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로 알고, 당신은 예수님이 서로 어울리지 않는 많은 다른 교회들이 아닌, 하나의 교회를 세우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믿는다는 메시지를 모든 사람에게 보낼 수 있다.

이것이 급진적으로 들린다는 것을 나도 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 종래로 분명하게 의도하신 적이 없는 것들을 지켜야만 하는가? 왜 그분을 불쾌하게 하는 일에 관여하고 있는가? 성경에는 교단 또는 특별한 단체에 관한 언급이 없다. 고린도교회가 자신이 좋아하는 교사들에 따라 분열되었을 때, 바울은 그들의 분열은 그들이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들이며 영적으로 어린아이임을 드러냈다고 단호하게 질책하였다(고전 3:1-7). 우리의 분열도 그 점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우리 사이를 벌어지게 하는 모든 것은 피해야 한다. 가정교회는 교회이름을 짓거나 어떠한 단체에 가입하는 것을 피면 해야 한다. 성경을 보면, 개별적인 교회들은 오직 그들이 만나는 집에 의해 식별되었다. 교회 안의 그룹들은 오직 그들이 위치한 도시들에 의해 식별되었다. 그들은 모두 자신들을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한 교회의 지체로 여겼다.

우리한테는 오직 한 왕과 한 나라가 있다. 누구든지 신자들이거나 교회들이 그를 알아주도록 스스로 높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서 자신의 나라를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내 영광은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사 48:11)라고 말씀하신 왕앞에 설 준비를 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다시금 사역자들은 모든 사람 앞에 응당 그리스도에 대한 순종의 좋은 본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그들의 본을 따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 앞에 보여준 그들의 본은 가장 영향력 있는 가르침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바울이 빌립보에 있는 신자들에게 썼던 것처럼.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빌 3:17, 강조 추가).

가르침의 내용(What to Teach)

바울처럼, 제자 삼는 사역자는 목표가 있다. 그 목표는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골 1:28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또한, 바울처럼,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칠“(골 1:28 상,강조 추가) 것이다. 바울이 단지 사람들을 교육하거나 대접만 하라고 가르친 것이 아님을 주목하라.

제자 삼는 사역자는 바울과 함께 “이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다”(딤전 1:5)라고 말할 수 있다. 즉, 그는 그가 섬기는 사람들의 삶 속에 진정한 그리스도의 형상과 거룩함이 나타나기를 원하는 데 그것이 바로 그가 그리스도의 모든 계명을 지키는 신자들을 가르치는 이유이다. 그는 진리를 가르치고, 청중들에게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 12:14)라고 권면한다.

제자 삼는 사역자는 예수님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그들의 제자들도 예수님이 그들에게 명령하신 모든 것을 순종하게끔 가르쳐야 한다고 명령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다(마 28:19-20을 보라). 그는 그리스도가 명령하신 것은 아무것도 홀시하지 않고 가르쳤다고 확신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그는 정기적으로 예수님의 계명이 기록되고 재강조된 복음서와 서신서를 통해 구절마다 가르친다.

이런 강해식 가르침은 그의 가르침을 균형 잡아준다. 우리가 주제별 메시지만 가르친다면,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주제에만 집중하고 그렇지 않은 주제는 홀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강해식 교사는 단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뿐 아니라, 그분의 훈계와 진노에 대해서도 가르친다. 그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받는 축복뿐 아니라 져야 할 책임에 대해서도 가르친다. 그가 사소한 주제를 크게 다루고, 덜 중요한 것을 강조하고, 가장 중요한 것을 무시할 가능성이 작다. (예수님에 의하면, 이것은 바리새인들이 범했던 잘못이었다; 마 23:23-24.)

강해식 가르침을 두려워하지 말라(Overcoming Fears of Expository Teaching)

많은 목사는 강해식으로 가르치는 것을 두려워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성경 안의 많은 부분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고 또한, 그들의 회중들이 그들이 얼마나 모르는지를 아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잘난 척 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누구도 성경의 모든 내용을 완벽하게 알 수는 없다. 심지어 베드로도 바울이 쓴 몇 가지가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한 적이 있다(벧후 3:16을 보라).

강해식으로 가르치는 목사가 이해하지 못하는 구절에 부딪쳤을 때, 그는 단순히 그 부분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그의 회중들에게 알려주어야 하며 다음 구절로 이동하여야 한다. 그는 또한, 그의 회중들이 성령님께 그의 이해를 도와주시도록 기도드리도록 부탁할 수 있다. 그의 겸손은 회중들에게 좋은 본이 되며 그 자체가 설교가 된다.

가정교회의 목사/장로/감독은 비공식적인 분위기 속에서 소그룹을 가르칠 때 추가 이점이 있는데 그것은 그의 가르침 중에 질문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령님이 연구되고 있는 말씀에 대해 그룹의 다른 사람들에게 통찰력을 줄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준다. 그 결과 모두가 더 효과적인 학습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리스도의 계명을 가르칠 때에는 마태복음 5-7장의 산상수훈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다. 예수님은 많은 계명을 주셨고, 그분은 유대인 추종자들이 모세를 통해 주어진 율법을 바로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잠시 후 이 책에서, 나는 산상수훈을 어떻게 강해식으로 가르칠지를 보여줄 것이다.

설교준비(Sermon Preparation)

신약 성경 어디에도 목사/장로/감독들이 많은 현대 사역자들의 관행대로, 개요 양식에 조리 정연한 중점과 실례를 적은 주간 연설/설교를 준비했다는 증거는 없다. 물론 우리 중 누구도 예수님이 그런 일을 하셨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 초대교회에서 가르치는 방식은 교회가 제도화되면서 채택된 전통적인 그리스와 로마의 강론식보다는 유대인 방식을 따라 더 자연스럽고 상호 작용적이었다. 만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법정에 호출되었을 때 어떻게 변호할지 준비하지 말라고 하시고 성령님이 그들에게 자연스럽게, 반박할 말씀들을 주실 거라고 약속하신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교회의 모임에서 목회자들을 어느 정도 도울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할 수도 있다!

이것은 목사가 기도하고 공부하면서 자신을 준비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권면하였다.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 2:15).

바울의 가르침을 따라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골 3:16)려는 사역자들은 그들안에 가득 차서 흘러넘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칠 수 있다. 그러므로 친애하는 목사여, 중요한 문제는 당신 자신이 성경에 빠져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당신이 당신의 설교주제에 대해 지식과 열정으로 넘쳐 있다면, 하나님의 진리를 전달함에 있어서 더 준비해야 할 다른 것은 거의 없다. 또한, 당신이 강해식 설교를 한다면, 연속적인 구절을 개요로 삼을 수 있다. 그런 다음 당신이 해야 할 준비는 가르칠 구절들을 기도하면서 묵상하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가정교회 목사라면, 상호작용적인 분위기 때문에 설교개요에 대한 필요성을 줄일 수 있다.

하나님이 그가 가르칠 때 도와주시라는 것을 믿는 사역자는 하나님의 도움을 보상받을 것이다. 그래서 자기 자신, 자기만의 준비, 자신의 노트를 적게 의지하고 주님을 더 의지해야 한다. 점차 당신은 믿음과 신심을 갖게 되며, 설교 노트를 적게 준비하게 되며, 개요만 준비하거나 개요를 준비하지 않아도 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자의식이 강한 사람은 공공 실수를 너무 두려워하기 때문에 설교 할 때 준비된 노트에 의존할 가능성이 크다. 그는 자신의 두려움은 자존심에 뿌리내린 불안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는 자신이 사람들의 눈에 어떻게 보이는지에 대해서는 덜 근심하고 그와 그의 청중들이 하나님의 눈에 어떻게 보여지는지에 대해 더 관심 두어야 할 것이다. 어떠한 준비된 설교도 성령의 기름 부음이 있는 가르침보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을 것이다. 모든 사람이 준비된 노트대로만 대화한다면 얼마나 많은 교통이 저애받을지 생각해보라! 대화는 죽을 것이다! 준비하지 않은 대화형 방식은 준비된 연설보다 더 진실해 보인다. 가르치는 것은 연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진리를 부여하고 있다. 우리가 연설을 듣고만 있을 때에는 자동적으로 집중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이밖의 네 가지 생각들(Four More Thoughts)

(1) 일부 사역자들은 앵무새같이 다른 사람들이 쓴 책들에서 모든 설교 자료를 뽑아낸다. 그들은 개인적으로 성령님께 가르침을 받는 놀라운 축복을 놏치고 있으며 또한, 그들이 베낀 작가들의 오류를 전파할 가능성이 크다.

(2) 많은 목사는 종종 전통적인 다른 설교자들의 설교와 가르침의 방식을 모방한다. 예를 들어, 설교는 높고 빠르게 진행할 때 기름 부음 받는다고 일부 교회권에서는 주장한다. 그래서 교회 참석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소리치는 설교를 들어야만 한다. 현실은, 사람들이 단조로운 연설처럼, 과도한 고함에 집중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양한 목소리가 훨씬 더 매혹적이다. 또한, 설교는 훈계이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큰소리로 하지만 가르침은 교육이기 때문에 보통 대화방식으로 한다.

(3) 수백 차례의 교회예배에서 설교 청취자들을 관찰한 결과, 나를 놀라게 한 것은 너무 많은 설교자와 교사들은 사람들이 지루해하거나 또는 청취하지 않고 있는 상황을 의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목사여, 지루해 보이는 사람은 정말로 지루해하고 있다! 당신이 말하는 동안 당신을 바라보고 있지 않는 사람은 듣고 있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설교 말씀을 듣지 않는 사람은 최소한의 도움도 받지 못하게 된다. 만일 신실한 사람들이 사람들마저 지루해하거나 말씀을 듣고 있지 않다면, 당신의 설교는 개선되어야 한다. 더 많은 실례를 들어보라. 관련 예화를 들려주라. 비유를 들어보라. 단순하게 하라. 당신의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을 가르치라. 진심으로 하라. 자기 자신이 되라. 다양한 목소리로 진행하라. 가능한 한 많은 청취자와 시선을 맞추라. 얼굴 표정을 사용하라. 두손을 사용하라. 주변을 이동하면서 진행하라. 너무 길게 말하지 말라. 그룹이 작으면 적절한 시간에 사람들에게 질문할 기회를 주라.

(4) 모든 설교는 세 가지 중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인간적인 발상이다. 목표는 현대 설교이론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제자를 삼는 것이다. 예수님은 “내 양을 먹이라”라고 하셨지, “내 양을 감동시키라”라고 하지 않으셨다.

가르침의 대상(Whom to Teach)

예수님의 모식에 따르면, 제자 삼는 사역자는 그가 가르치는 대상을 어느 정도 선택할 수 있다. 그것이 당신을 놀라게 할 수 있지만, 사실이다. 예수님은 종종 비유로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는데, 그렇게 하신 이유가 있었다. 그분은 모든 사람이 그분의 말씀을 이해하기를 원하지 않으셨다. 성경을 보면 이점은 분명하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어찌하여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마 13:10-13).

그리스도의 비유를 깨달을 수 있는 권한은 오직 회개하고 그분을 따르기로 결단한 사람들한테만 있다. 회개할 기회를 거절하고, 자신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에 반항하는 자들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거절 받는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주신다(벧전 5:5을 보라).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그분의 추종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마 7:6). 물론, 예수님은 비유적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그분의 뜻은 “값진 것을 그것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주지 말라는 것이다”이다. 돼지는 진주의 귀중함을 모르며 마찬가지로 영적인 돼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그것이 값진 것임을 알지 못한다. 만일 그들이 실제로 듣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믿었다면, 그들은 그 말씀을 최고로 생각하고 순종하려 할 것이다.

한 사람이 영적인 돼지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가 가는 길에 진주 하나를 던져보고 그가 그 진주를 어떻게 하는지를 보면 된다. 만일 그가 그것을 무시한다면, 이 사람이 영적인 돼지임을 알 수 있다. 만일 그 사람이 순종한다면, 그 사람은 영적인 돼지가 아님을 알게 된다.

불행하게도, 너무 많은 목사는 예수님이 그들에게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을 하고 있다. 그들은 계속해서 돼지에게 진주를 던져주며, 하나님의 말씀을 저항 하거나 거부한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런 사역자들은 하나님이 주신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이 명하신 대로, 발에서 먼지를 털어버리고 진작 떠났어야 했다.

, 염소, 돼지(The Sheep, Goats and Pigs)

사실, 당신은 예수님께 순종하지 않고 제자로 훈련받으려 하지 않는 사람은 제자로 삼을 수가 없다. 많은 교회는 이와 같은 사람들로 가득하다, 그들은 단지 문화적인 그리스도인이며, 그들 중 대부분은 예수님이나 기독교에 대한 몇 가지 신학적 사실에 정신적인 동의를 함으로써 거듭났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들은 돼지나 염소이지, 양이 아니다. 그러나 많은 목사는 그들이 영적으로 돕고 섬겨야 할 진정한 양들은 정작 무시하면서, 이러한 돼지와 염소들을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자신의 시간의 90%를 사용하고 있다! 목사여, 예수님은 당신이 염소나 돼지가 아닌 그분의 양들을 먹이라고 하셨다(요 21:17을 보라)!

하지만 당신은 누가 양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들은 교회에 가장 먼저 오고 가장 늦게 떠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진리를 배우기에 갈급해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이 자신의 주님이고 그분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 싶기 때문이다. 그들은 주일 뿐 아니라 언제든지 모임이 있을 때마다 교회에 온다. 그들은 소그룹에 소속되어 있다. 그들은 종종 질문한다. 그들은 주님을 기뻐한다. 그들은 섬길 기회를 찾고 있다.

목사여, 당신의 대부분 시간과 관심을 그 사람들에게 쏟아부으라. 그들은 제자이다. 당신의 교회에 참석하는 염소와 돼지들에게는 그들이 참을 수 있는 한 계속하여 복음을 전파하라. 만일 당신이 진정한 복음을 전파한다면, 그들은 오래 버틸 수 없을 것이다. 그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거나 그들이 힘이 있다면 당신을 교회에서 제거해버리려고 시도할 것이다. 만일 그들이 성공하면 당신이 떠날 때에는 발의 먼지를 털어버리라(가정교회 모식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다, 특별히 당신의 집에서 모이는 교회에서는!).

마찬가지로, 복음 전도자들은 복음을 반복적으로 거부하는 같은 사람들에게는 계속해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의무를 느낄 필요가 없다(눅 9:60 을 보라). 당신은 왕들의 왕으로부터 가장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그리스도의 대사이다! 당신의 위치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매우 높으며 당신의 책임은 위대하다! 모든 사람이 복음을 한 번씩 듣기 전까지는 누구에게도 복음을 두 번씩 말하는 데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만일 당신이 제자 삼는 사역자가 되려면, 당신은 누구한테 가르쳐야 할지 선택해야 하며, 당신의 소중한 시간을 예수님께 순종하려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낭비하지 말아야 한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썼다.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딤후 2:2, 강조 추가).

목표에 도달하다(Reaching the Goal)

예수님의 사역에서는 일어날 수 없었지만, 현대 교회에서 늘 일어나는 일이 무엇인가를 잠깐 상상해보라. 예수님이 부활 후 이 땅에 머물면서 현대 제도적 교회 같은 교회를 시작하고 그곳에서 30년간 목회했다고 상상해보라. 그분이 같은 회중들에게 주일마다 설교하신다고 상상해보라. 베드로, 야고보와 요한이 20년 동안 매주 주일마다 가장 앞자리에 앉아 예수님의 설교를 듣는다고 생각해보라. 베드로가 요한한테 기대어 “우리가 똑같은 설교를 이미 열 번은 들었다”라고 귀에 속삭이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우리는 그런 장면이 말도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님이 절대로 그분 자신이거나 사도들을 그런 상황에 놓이게 하지 않으실 것을 알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특정한 시간 내에 특정한 방식으로 몇 명의 제자들을 삼으셨다. 약 3년의 기간 동안, 그분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몇 명의 다른 제자들을 삼으셨다. 그분은 교회 건물에서 매주 주일마다 한 번씩 그들에게 설교하는 방식으로 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그들과 함께 살면서 가르치고, 그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그들에게 섬길 수 있는 기회를 주는 방식으로 제자를 삼으셨다. 그분은 그분의 사명을 다하셨다.

그럼 왜 우리는 예수님이 하시지 않을 일을 하고 있을까? 왜 우리는 수십 년 동안 같은 사람들에게 설교하는 것을 통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이루려고 시도하는가? 언제면 우리의 사명을 성취할 수 있을까? 왜 몇 년이 지나도, 우리의 제자들은 그들만의 또 다른 제자를 삼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는가?

나의 요점은 만일 우리가 우리의 작업을 제대로 하고 있다면, 우리의 제자들은 정말로 더는 우리의 사역을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성숙해질 때가 올 것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제자를 삼지 못하는 상황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앞에 설정한 목표를 달성할 것이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할지를 보여 주셨다. 덧붙여, 성장하고 있는 가정교회는 지속적으로 제자를 삼고 지도자들을 개발하는 것이 필요하다. 건강한 가정교회는 수십 년 동안 같은 설교자가 같은 사람들에게 설교하는 끝없는 순환에 빠지지 않는다.

정확한 동기(Right Motives)

제자를 삼도록 가르치는 데 성공하려면, 정확한 동기를 갖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 누군가가 그릇된 동기로 사역하고 있을 때, 그는 그릇된 일을 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 교회가 수많은 거짓과 편면적인 가르침으로 가득 찬 이유이다. 사역자의 동기가 인기를 얻어 다른 사람들 보기에 성공적이 되는 것이거나, 돈을 많이 버는 것이라면, 그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실패하기 마련이다. 가장 슬픈 것은 그가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는 데 성공하여 인기를 누리고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성공하고, 많은 돈을 벌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잘못된 동기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는 날이 올 때에, 그는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아무런 상급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만일 그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허용된다면,[3] 모두가 그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천국에서 그는 상을 받지 못했고 낮은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천국에 계급차이가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예수님은 이렇게 경고하셨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마 5:19).

물론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고 가르치는 사역자들은 그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 고통을 당할 것이다. 예수님은 그분께 순종하는 자들에게 고통을 약속하셨다(마 5:10-12; 요 16:33을 보라). 그들은 세상적인 성공, 인기와 부를 얻을 가능성이 작다. 그들이 얻는 것은 앞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상급과 칭찬이다. 어떤 것을 얻기를 더 원하는가? 이것에 관하여 바울은 이렇게 썼다.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 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 이 닦아 둔 것 외에는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고전 3:5-15).

바울은 자신을 터를 닦은 지혜로운 건축자에 비유했다. 아볼로는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세운 후 그곳에 온 교사이고, 바울은 그를 이미 닦아 놓은 터 위에 세우는 자에 비유했다.

바울과 아볼로는 모두 궁극적으로 자신의 공적의 이 아닌 에 따라 보상될 것이라고 한 것을 주목하라(3:13을 보라).

비유적으로 말할 때, 바울과 아볼로는 여섯 가지 부동한 재료로 하나님의 건물을 세울 수 있는데, 그중 세 가지 재료는 일반적이고, 상대적으로 저렴하고 불에 타기 쉬우나, 나머지 세 가지는 흔치 않으며, 매우 비싸고 및 불에 타지 않는다. 어느 날, 각각의 건축 재료는 하나님의 심판의 불을 받을 것이며, 나무, 풀과 짚은 불에 타 없어질 것이며 그들의 가치 없음과 현세적인 품질을 드러내게 된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소중하고 영원한 공적을 대표하는 금, 은, 보석은 심판의 불길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비성경적인 가르침은 그리스도의 심판의 불에 타서 재가 될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육체의 능력, 방법, 또는 지혜로 한 모든 일과 잘못된 동기로 한 모든 일도 같은 결과를 맞이할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사람들의 칭찬에 대한 욕구에 의해 하는 모든 일은 보상되지 않는다고 경고하셨다(마 6:1-6,16-18을 보라). 이런 쓸모없는 일이 지금은 인간의 눈에 잘 보이지 않을 수 있지만, 미래에는 반드시 모든 사람에게 드러나게 될 것이라고 바울이 경고했다. 개인적으로, 만일 나의 공적이 나무, 풀 및 짚과 같은 종류에 속한다면, 나는 나중이 아닌 바로 지금 발견하고 싶다. 지금은 회개할 시간이 있다; 그때가 되면 너무 늦을 것이다.

우리의 동기를 점검하라(Checking Our Motives)

우리 동기에 대해서 자신을 기만하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다. 나도 분명히 그랬었다. 우리는 자신의 동기가 순수한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가장 좋은 방법은 우리의 동기가 잘못되었는지를 하나님께 물어보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점검해본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기도하는 것과 은밀한 중에 가난한 자들을 도와주는 것과 같은 선한 일을 하라고 하셨는데, 그것은 우리 자신이 선한 일을 하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의 하나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람들의 칭찬보다 하나님의 칭찬을 더 바라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사람들이 우리를 지켜볼 때만 하나님께 순종한다면, 그것은 무언가가 매우 잘못된 일이다. 또는, 만일 우리가 사람들한테 잡히면 명성을 흐리는 수치스러운 죄들은 피하려 하지만, 아무도 알아낼 수 없는 죄들은 방종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동기가 잘못되었음을 보여준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모든 생각, 말과 행동을 아시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기쁘시게 하려 한다면, 우리는 매 순간 일이 크든지 작든지 다른 사람들이 알든지 모르든지 그분께 순종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만일 우리의 동기가 올바르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계명을 모두 순종하는 제자를 삼는 것을 희생시키면서 교회출석만을 향상 시키기 위한 교회성장 유행은 따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가르칠 것이며, 단지 세상적이고 영적이지 못한 사람들을 끌기 위한 인기주제에만 초점을 두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거나 또는 성경을 가르칠 때 전반 성경내에서의 문맥을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자신을 위한 지위와 명예를 추구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명성을 추구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부자들의 비위를 맞추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 땅에 보물을 쌓아두지 않을 것이며 단순하게 살고 우리의 양 떼들에게 좋은 청지기의 본을 수립하기 위해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바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설교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보다 하나님이 어떻게 보시는가에 더 치중할 것이다.

당신의 동기는 어떠한가?

제자 삼는 것을 타격하는 하나의 교리(A Doctrine that Defeats Disciple-Making)

제자 삼는 사역자는 결코 제자를 삼는 목표를 위배하는 것은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는다. 따라서, 그는 결코 사람들로 하여금 주 예수님께 불순종하면서도 편안한 느낌이 들게 하는 말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는 결코 하나님의 은혜를 죄를 짓고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는 수단으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죄를 회개하고 승리의 삶을 살아가는 수단으로 보았다. 성경은, 우리가 알다시피, 오직 이기는 자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한다고 선언한다(계 2:11;3:5;21:7을 보라).

일부 현대 목사들은, 불행하게도, 제자를 삼는 목표에 큰 피해를 주는 비성경적인 교리들을 붙잡고 있다. 이런 교리들 중 미국에서 매우 큰 인기를 누리고 있는 하나가 무조건적인 영생보장, 또는 “한 번 받은 구원은 영원하다”는 것이다. 이 교리는 거듭난 사람은 그들이 어떻게 사는가와는 관계없이 그들의 구원은 절대로 박탈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구원은 은혜로 받는 것이기에, 구원을 받기 위해 기도했던 사람은 은혜로 구원을 받으며, 똑같은 은혜는 그들의 구원을 유지해줄 것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그들은 기타 관점들은 모두 사람들이 자신들의 공로로 구원을 받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본다.

물론, 이러한 관점은 거룩함에 대한 큰 손해이다.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것이 한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는 데 있어서 중요하지 않다고 본다면 예수님께 순종할만한 동기는 없게 되는데 특히 순종이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할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내가 이 책의 앞부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은혜는 그분께 순종해야 할 책임은 면해주지 않는다. 성경에 의하면 구원은 단지 은혜에 의해서만 아니라 또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는다고 하였다(엡 2:8을 보라).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은혜와 믿음이 모두 필요하다.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적절한 응답이며, 진정한 믿음은 항상 회개와 순종을 낳는다.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고 아무 유익이 없으며 자기를 구원할 수 없다고 하였다(약 2:14-26을 보라).

그것은 성경이 반복적으로 지속적인 구원은 지속적인 믿음과 순종에 의존한다고 선언한 이유이다. 이 점을 증거하는 많은 성경 말씀들이 있다. 예를 들어, 바울은 골로새 신자들에게 쓴 편지에서 이렇게 주장하였다.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골 1:21-23, 강조 추가).

그것보다 더 명확할 수 없다. 오직 신학자만이 바울의 뜻을 오해하거나 왜곡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계속하여 믿음안에 거하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흠 없음을 확인해 주실 것이다. 이 같은 진리는 로마서 11:13-24, 고린도전서 15:1-2과 히브리서3:12-14, 10:38-39에서도 쓰여 있는데 그것은 최종적인 구원은 지속적인 믿음에 달려 있음을 명백하게 나타내고 있다. 이 같은 말씀들은 모두 만일이라는 조건적인 단어를 포함하고 있다.

거룩함의 필요성(The Necessity of Holiness)

신자가 죄를 범함으로 영생을 잃을 수 있을까? 그에 대한 답은 많은 성경 말씀 속에서 찾을 수 있는데 아래와 같은 말씀들은 모두 각종 죄를 짓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하지 못함을 확인하고 있다. 만일 한 신자가 다음의 바울이 나열한 죄들을 다시금 짓는다면, 그는 궁극적으로 구원을 상실할 수 있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아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전 6:9-10, 강조 추가).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수로가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갈 5:19-21, 강조 추가).

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엡 5:5-6, 강조 추가).

모든 경우마다, 바울은 서신으로 신자들을 경고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두 번씩 그들에게 미혹받지 말라고 경고하였는데 이는 그가 어떤 신자들은 그가 나열한 죄들을 지으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을 걱정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예수님은 그의 가장 가까운 제자들인,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에게 만일 그들이 그분의 재림을 맞이하기 위해 준비하지 않는다면 그들도 지옥에 던져질 수 있음을 경고하였다. 불신자들의 무리가 아닌 제자들에게(막 13:1-4을 보라) 했던 다음의 말씀들을 확인해보라.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둑이 어느 시각에 올 줄을 알았더라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이러므로 너희도[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의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동료들을 때리며 술친구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마 24:42-51, 강조 추가).

이 이야기는 무엇을 말해주는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야, 이 비유에서 나오는 믿음이 없는 종처럼 되지 말라.”[4]

예수님은 가장 가까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강조하기 위하여 인츰 열 처녀의 비유를 계속했다. 열 명의 처녀들은 처음에는 신랑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마지막에 그중 다섯 명은 준비하지 않으므로 결혼잔치에서 제외되었다. 예수님은 “그런즉 깨어 있으라[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 너희[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마 25:13)는 말씀으로 이 비유를 마치셨다. 즉,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야, 다섯 명의 어리석은 처녀들처럼 되지 말라”는 뜻이다. 만일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가 준비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없었다면 예수님이 경고하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 후 예수님은 인츰 그들에게 달란트 비유를 하셨다. 그것 또한, 같은 메시지였다. “주인한테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처럼 그의 주인이 돌아왔을 때에 주인이 그에게 위탁한 것을 아무것도 보여줄 것이 없는 모습이 되지 말라”는 내용이다. 비유의 끝에서, 주인은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마 25:30)고 선언한다. 예수님은 그분의 메시지를 더는 명확하게 할 수가 없었다. 오직 신학자만이 그의 의미를 왜곡할 수 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도 예수님이 재림했을 때 순종하지 않았다면 결과적으로 모두 지옥에 던져질 수 있는 위험에 놓여 있다. 만일 그런 가능성이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에게 존재한다면 우리 모두에게도 존재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마 7:21을 보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5]

무조건적인 영생보장의 거짓 교리를 가르치는 사람은 분명히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사탄에 동조하고 있는 것이며, 예수님과 사도들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그들은 예수님의 모든 말씀을 순종하려는 제자를 삼으라는 예수님의 계명을 효과적으로 무효화시키고, 천국으로 향하는 좁은 길을 차단하고, 지옥으로 통하는 넓은 고속도로를 확대해가고 있다.[6]

제자 삼는 것을 방애하는 또 하나의 현대 교리(Another Modern Doctrine that Defeats Disciple-Making)

 

거룩함이 궁극적인 구원에 중요하지 않다고 사람들을 미혹하는 것은 단지 무조건적인 영생보장을 가르치는 것뿐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종종 제자 삼는 것을 저애하는 방식으로 사용된다. 설교자들이 종종 회중들에게 “하나님은 당신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사람은 그 말을 “하나님은 나의 순종 여부를 떠나서 나를 받아주고 열납하신다”고 해석한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진실이 아니다.

대부분의 그 같은 설교자들은 하나님께서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지옥으로 보낸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들의 믿음은 확실히 정확하다. 그것에 대해 한 번 생각해보자. 분명히, 하나님은 그분이 지옥으로 보낸 사람은 열납하지 않는다. 그럼 어떻게 그분이 그들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지옥으로 던져진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 맞는가? 그들이 당신한테서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한다고 말할 것 같은가? 당연히 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그분께 혐오스러운 존재들이며 그 때문에 그들은 지옥에서 벌을 받게 된것이다. 그분은 그들을 열납하거나 사랑하시지 않는다.

그렇게 때문에, 이 세상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분명히 잠시적인 자비로운 사랑이지 열납하는 사랑이 아니다. 그분은 죄인들에게 자비를 베풀고 심판을 늦추었으며 그들이 회개할 기회를 주셨다. 예수님은 그들을 위하여 죽으심으로 그들에게 용서받는 방법을 제공하셨다. 이로부터 봤을 때 우리는 하나님이 죄인들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분은 결코 그들을 열납 하지는 않으셨다. 그분은 그들에게 아버지가 자식을 향한 사랑 같은 것은 느끼신 적은 없다. 오히려, 성경은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신다”(시 103:13, 강조 추가)고 선언한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분을 경외하지 않는 자한테는 같은 긍휼을 베풀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법관이 살인범에게 사형이 아닌 종신형을 선고하는 자비에 더 가깝다.

사도행전을 보면 복음을 전파했던 그 누구도 구원받지 못한 청중한테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한다고 말한 적이 없다. 오히려, 성경적인 설교자들은 종종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 그들의 청중들을 경고하고 그들이 회개하기를 촉구했으며, 하나님이 그들을 열납하시지 않으며 그들은 위험에 직면해 있으며 그들의 생명은 극적인 변화가 필요함을 알려주었다. 만일 그들이 청중들에게 단지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한다는 말만 했다면(수많은 현대 사역자들이 하고 있는 것처럼), 그들은 그들의 청중들로 하여금 자신은 하나님의 진노를 사지 않으며 위험에 놓여 있지 않기에 회개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빠지게 할 수 있다.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미움(God’s Hatred of Sinners)

 

오늘날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자주 선언되는 반면, 성경은 종종 하나님이 죄인들을 미워함을 말씀한다.

오만한 자들이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하리이다 주는 모든 행악자를 미워하시며 거짓말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시리이다 여호와께서는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와 속이는 자를 싫어하시나이다(시 5:5-6, 강조 추가).

여호와는 의인을 감찰하시고 악인과 폭력을 좋아하는 자를 마음에 미워하시도다(시 11:5, 강조 추가).

내가 내 집을 버리며 내 소유를 내던져 내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을 그 원수의 손에 넘겼나니 내 소유가 숲속의 사자 같이 되어서 나를 향하여 그 소리를 내므로 내가 그를 미워하였음이라(렘 12:7-8, 강조 추가).

그들의 모든 악이 길갈에 있으므로 내가 거기에서 그들을 미워하였노라 그들의 행위가 악하므로 내 집에서 그들을 쫓아내고 다시는 사랑하지 아니하니라 그들의 지도자들은 다 반역한 자니라(호 9:15).

위의 모든 성경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사람들의 행함을 미워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을 미워한다고 하셨음을 주목하라. 이로부터 우리는 하나님이 죄인은 사랑하지만, 죄는 미워한다는 말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한사람을 그의 행위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그의 행위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드러내기 마련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죄가 아닌 죄를 지은 사람을 미원하는 것이 맞다. 만일 하나님이 그분이 미워하는 죄를 지은 사람들을 열납하신다면, 그분은 자기모순에 빠지게 된다. 인간의 법정에서, 사람은 자신의 죄행에 대한 재판을 받게 되며, 그들은 응당한 보응을 받게 된다. 우리는 죄행은 미워하면서, 범죄자를 열납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사람들(People Whom God Abhors)

성경은 하나님이 특정 개인들을 미워하신다고 단언할 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이 몇 종류의 죄인들을 싫어하시며, 그들은 그분께 가증스럽다고 선언한다. 다음의 인용된 성경 말씀들이 사람들의 행위가 하나님께 가증스러운 것이 아니라, 그들 자체가 하나님께 가증스럽다고 했음을 다시 한 번 주목하라. 그 말씀들을 보면 하나님이 그들의 죄를 싫어하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을 싫어하신다고 하였다.[7]

여자는 남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요 남자는 여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라 이같이 하는 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자이니라(신 22:5, 강조 추가).

이런 일을 행하는 모든 자, 악을 행하는 모든 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하니라(신 25:16, 강조 추가).

너희가 아들의 살을 먹을 것이요 딸의 살을 먹을 것이며 내가 너희의 산당들을 헐며 너희의 분향단들을 부수고 너희의 시체들을 부숴진 우상들 위에 던지고 내 마음이 너희를 싫어할 것이며(레 26:29-30, 강조 추가).

오만한 자들이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하리이다 주는 모든 행악자를 미워하시며 거짓말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시리이다 여호와께서는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와 속이는 자를 싫어하시나이다(시 5:5-6, 강조 추가).

대저 패역한 자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 정직한 자에게는 그의 교통하심이 있으며(잠 3:32, 강조 추가).

마음이 굽은 자는 여호와께 미움을 받아도 행위가 온전한 자는 그의 기뻐하심을 받느니라(잠 11:20, 강조 추가).

무릇 마음이 교만한 자를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니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하지 못하리라(잠 16:5, 강조 추가).

악인을 의롭다 하고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 사람은 다 여호와께 미움을 받느니라(잠 17:15, 강조 추가).

우리는 어떻게 이 말씀들과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는 사람들을 조화시킬 수 있을까? 하나님이 죄인들을 싫어하고 미워한다면서 또한, 동시에 그들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반드시 모든 사랑이 다 같은 것이 아님을 인식해야 한다. 일부 사랑은 조건적이다. 그것을 “자비로운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사랑은 “…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과 같다. 그것은 사람들의 행위와는 관계없이 사랑하는 사랑이다. 바로 그런 사랑이 하나님이 죄인을 향한 사랑이다.

자비로운 사랑과 대조적인 사랑은 조건적인 사랑이다. 그것은 “열납하는 사랑”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것은 얻거나 받은 것이다. 조건적인 사랑은 “나는…때문에 당신을 사랑한다”라고 말한다.

일부 사람은 사랑이 조건적이 되면 더는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이런 사랑을 하찮게 생각하는 데 그것은 순전히 이기적이며, 하나님의 사랑과 다르다고 말한다.

하지만, 사실은 우리가 곧 성경에 볼 수 있겠지만, 하나님도 조건적인 사랑을 소유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열납하는 사랑은 멸시되지 말아야 한다. 열납하는 사랑은 하나님이 그분의 진정한 자녀를 향해 가지고 있는 첫 번째 사랑이다. 우리는 그분의 자비로운 사랑보다 열납하는 사랑을 더 소망해야 할 것이다.

열납하는 사랑은 열등한 사랑인가? (Is Approving Love an Inferior Love?)

 

잠깐 멈추고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해보라: “사람들이 나한테 어떤 사랑을 하기를 더 원하는가? – 자비로운 사랑인가 아니면 열납하는 사랑인가?” 나는 당신이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에도 불구하고” 사랑하기보다는 “…때문에” 당신을 사랑하기를 더 원함을 확신한다.

당신은 당신의 배우자가 당신에게 “나는 당신을 사랑할 이유가 없으며, 당신에게는 내가 당신을 좋아할만 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라는 말을 듣고 싶은가? 아니면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데에는 많은 이유가 있다. 당신에게는 내가 존경하는 부분이 너무 많다”는 말을 듣고 싶은가? 당연히 우리는 우리의 배우자가 열납하는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기를 원할 것이며, 그 사랑이야말로 연인들이 함께할 수 있도록 유지해주는 기본적인 사랑이다. 한 사람이 그의 배우자에 대해 존경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 때에, 모든 열납하는 사랑이 더는 존재하지 않을 때에, 그 혼인은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만일 그 혼인이 지속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에서 유래된 자비로운 사랑의 덕분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열납하는 또는 조건적인 사랑은 열등한 사랑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자비로운 사랑줄 수 있는 가장 칭찬할만한 사랑이라면, 받을 수 있는 가장 칭찬할만한 사랑은 열납하는 사랑이다. 또한, 열납하는 사랑이 하나님이 예수님께 가졌던 유일한 종류의 사랑이라는 사실은 그것을 정당한 존경을 받게끔 한다. 하나님 아버지는 종래로 예수님께 한 방울의 자비로운 사랑도 품으신 적이 없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안에 사랑받지 못할 만한 일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증언하셨다.

내가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요 10:17).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가 예수님을 사랑하신 이유는 예수님이 죽기까지 순종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열납하는 사랑은 아무 잘못된 점이 없으며 모든 것이 마땅하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사랑을 얻었으며 또한, 받기에 합당하셨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계명을 지킴으로써 그분의 사랑안에 거하셨다고 말씀하셨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 15:9-10, 강조 추가).

이 성경 말씀처럼, 우리도 예수님의 계명을 지킴으로써 그분의 본을 따르고, 그분의 사랑안에 거할 수 있다. 그분은 이 구절에서 열납하는 사랑에 대해 분명하게 말씀하셨으며 우리가 능히 그리고 응당 그분의 사랑을 얻어야 하며, 우리가 그분의 계명을 지키지 않음으로 인해 그분의 사랑 밖으로 나올 수도 있음을 알려주셨다. 우리가 그분의 계명을 지켜야만 그분의 사랑안에 거할 수 있다. 오늘날 이러한 것들은 거의 가르쳐지지 않고 있으나,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기에 응당 가르쳐야 한다.

예수님은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열납하는 사랑을 받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 믿었으므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요 16:27, 강조 추가).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요 14:21,23, 강조 추가).

두 번째 인용구절에서, 예수님은 헌신하지 않은 신자들이 그분의 말씀을 지키기 시작하면 그분이 그들에게 특별한 방식으로 가까이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지키기 시작하면, 그분의 아버지께서 그들을 사랑하실 것이고, 그분과 그분의 아버지께서 그 사람안에 들어와서 함께 사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는데 이것은 분명히 거듭남을 가리키고 있다. 모든 거듭난 사람들의 안에는 아버지와 아들의 성령이 함께 거하신다(롬 8:9을 보라). 그러므로 우리는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은 회개하고 예수님께 순종하기 시작한 사람들이고, 그들은 유일하게 아버지로부터 열납하는 사랑을 얻은 사람들임을 다시 한 번 알게 된다.

물론, 예수님은 그분을 믿는 자들에 대한 자비로운 사랑을 여전히 보유하고 계신다. 그들이 불순종할 때, 그분은 그들이 자신들의 죄를 자백하고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면, 그들을 용서할 준비되어 계신다.

결론(The Conclusion)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그분의 순종의 자녀를 사랑하시는 것이 그분이 죄인을 사랑하시는 것과 다름을 말하기 위함이다. 그분은 죄인들을 단지 자비로운 사랑으로 사랑하시며 그 사랑은 일시적이며 그들이 이 땅에 살아 있을 동안만 지속된다. 비록 그분이 자비로운 사랑으로 그들을 사랑하시는 동시에, 그분은 그들의 성품을 열납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을 미워하신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가르치는 것이다.

한편, 하나님은 그분의 거듭난 자녀를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훨씬 더 사랑하신다. 그분은 그들이 회개하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기 때문에 주로 열납하는 사랑으로 그들을 사랑한다. 그들이 거룩하게 성장해갈 때, 그분은 자비로운 사랑으로 그들을 사랑하실 이유가 점점 적어지고, 갈수록 열납하는 사랑으로 그들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곧바로 그들이 원하는 사랑이다.

이것은 또한, 많은 현대 설교자들과 교사들에 의해 묘사되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은 오류가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잠깐 시간을 내어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다음의 익숙한 표현들을 성경 말씀에 비추어 평가해보기 바란다.

1.) 당신은 하나님이 당신을 지금보다 더 많거나 적게 사랑하시게 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2.) 당신이 하나님이 당신을 향한 사랑을 멈추시게 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3.)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이다.

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신다.

5.) 하나님은 죄인은 사랑하시지만, 죄는 미워하신다.

6.) 당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얻거나 받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7.)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행위를 근거로 하지 않는다.

위의 표현들은 사람들을 잘못 인도할 수 있거나 완전히 거짓이다. 왜냐하면, 대부분은 하나님의 열납하는 사랑을 완전히 부정하고 많은 부분에서 그분의 자비로운 사랑을 잘못 표현했기 때문이다.

(1)에 관해서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열납하는 사랑을 더 많이 하시게 하기 위해서 신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그들은 더 많이 순종하면 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열납하는 사랑을 더 적게 하시게 하기 위해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도 있다. 불순종하면 된다. 죄인들에게는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시게 할 수 있는 것이 있는데 바로 회개이다. 회개 후 그들은 하나님의 열납하는 사랑을 얻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들을 덜 사랑하시게 하는 것은 죽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향해 가지고 계신 유일한 사랑인 자비로운 사랑을 잃게 된다.

(2)에 관해서는,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옛 죄로 돌아감으로 하나님의 열납하는 사랑을 잃게 되고 다시금 하나님의 자비로운 사랑만 받는 처지가 될 수 있다. 그리고 불신자들이 죽게 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향한 유일한 사랑인 자비로운 사랑은 중지된다.

(3)에 관해서는, 하나님의 열납하는 사랑은 당연히 조걱적인다. 심지어 그분의 자비로운 사랑도 조건적으로 육체적으로 살아 있는 사람한테만 적용된다. 죽은 후에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사랑이 끝나므로 그 사랑은 일시적이고 조건적이다.

(4)에 관해서는,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시지 않을 가능성은 더욱 높다. 왜냐하면, 모든 죄인이나 성도들에 대해서 그분은 부동한 정도의 반대와 열납을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물론, 죄인들과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도 같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5)에 관해서는, 하나님은 죄인들 그들의 죄를 미워하신다. 그분이 죄인들을 자비로운 사랑으로 사랑하시고 그들의 죄는 미워하신다고 말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 그분의 열납하는 사랑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분은 그들을 미워하신다.

(6)에 관해서는, 누구든지 그리고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열납하는 사랑을 쟁취해야 한다. 물론 아무도 그분의 자비로운 사랑은 쟁취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사랑은 무조건적으로 주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7)에 관해서, 하나님의 자비로운 사랑은 행위에 근거한 것이 아니지만, 하나님의 열납하는 사랑은 확실히 그러하다.

이 모든 것은 제자 삼는 사역자는 응당 하나님의 사랑을 성경에서 묘사한 것처럼 정확하게 제시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그분은 누구도 속임 당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께 열납하는 사랑을 받은 사람만이 천국에 갈 수 있으며, 그리고 하나님은 오직 거듭나고 예수님께 순종하는 사람들만 열납하신다. 제자 삼는 사역자는 사람들이 거룩함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은 아무것도 가르치지 말아야 한다. 그의 목표는 하나님의 목표와 같으며, 그리스도의 모든 계명을 지키는 제자를 삼는 것이다.

 


[1]모든 신자는 대중적으로 사람들을 가르쳐야 할 책임은 없으나, 그들이 제자를 삼을 때에는 일대일로 가르칠 책임은 있다(마 5:19; 28:19-20; 골 3:16; 히 5:12을 보라).

[2]복음 전도자가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가르침의 한 형태로 간주되며 복음 전도자는 반드시 성경적으로 정확한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3]내가 “만일”이라고 말한 이유는 이기적인 동기에 의해 사역하는 사람들은 양의 탈을 쓴 늑대들이며 그들은 분명히 지옥에 던져질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을 잘못된 동기를 가진 진정한 사역자들과 구별되게 하는 것은 잘못된 동기의 정도라고 생각한다.

[4]놀랍게도, 예수님께서 자신의 가장 가까운 제자들에게 경고했으며 믿음이 없는 종은 신자를 가리킨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는 일부 교사들은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장소가 천국의 외각이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거기에서 믿음이 없는 신자들은 예수님이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천국으로 그들을 환영 할 때까지 상급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해 일시적으로 슬퍼할 것이라는 것이다!

[5]물론, 그리스도인이 하나의 작은 죄를 지었다고 해서 즉각적으로 구원을 상실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사람들은 용서받는다(만일 그들이 그들에게 죄를 지은 사람들을 용서한다면).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훈계받을 위험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속적인 훈계에도 마음이 강퍅해진다면, 그들은 구원을 상실할 수 있다.

[6]그리스도인이 구원을 상실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아직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다음의 신약 성경의 말씀을 읽어야 할 것이다. 마 18:21-35; 24:4-5, 11-13, 23-26, 42-51, 25:1-30; 눅 8:11-15; 11:24-28; 12:42-46; 요 6:66-71; 8:31, 51; 15:1-6; 행 11:21-23; 14:21-22; 롬 6:11-23; 8:12-14, 17, 11:20-22; 고전 9:23-27; 10:1-21; 11:29-32; 15:1-2; 고후 1:24; 11:2-4; 12:21-13:5; 갈 5:1-4, 6:7-9; 빌 2:12-16; 3:17-4:1; 골 1:21-23; 2:4-8, 18-19; 살전 3:1-8; 딤전 1:3-7, 18-20; 4:1-16; 5:5-6, 11-15, 6:9-12, 17-19, 20-21; 딤후 2:11-18; 3:13-15; 히 2:1-3; 3:6-19; 4:1-16; 5:8-9, 6:4-9, 10-20; 10:19-39; 12:1-17, 25-29; 약 1:12-16; 4:4-10; 5:19-20; 벧후 1:5-11; 2:1-22; 3:16-17; 요일 2:15-28; 5:16; 요이 6-9; 유 20-21; 계 2:7, 10-11, 17-26; 3:4-5, 8-12, 14-22; 21:7-8; 22:18-19. 무조건적인 영생보장의 거짓 교리를 가르치는 사람들이 증거로 제출하는 말씀들을 보면 단순히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만 강조하고 인간의 책임에 대한 언급은 없다. 따라서 그런 말씀들은 내가 나열한 말씀들과 조화를 이루게끔 해석해야 한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사람들의 신실함을 보장하지 않는다. 그것은 내가 나의 아내에게 나는 영원히 그녀를 떠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 그 약속을 지킨다고 해서 그녀가 나를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보장할 수는 없는 것과 같다.

[7]어떤 사람들은 죄인에 향한 하나님의 미움과 혐오를 보여주는 성경 구절은 모두 구약에 있다고 주장할 수있다. 그러나 구약부터 신약까지,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태도는 변함이 없다. 마태복음 15:22-28에 기록된 예수님과 가나안 여자와의 만남은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태도를 잘 보여주는 신약의 한 예이다. 예수님은 처음에 그녀의 간구에 대답조차 하지 않으셨으며 심지어 그녀를 개라고 부르기까지 하셨다. 그녀의 지속적인 믿음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그녀에게 자비를 베푸시게 하였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한 예수님의 태도를 열납하는 사랑의 일종이라고 간주 할 수 없다(마태복음 23장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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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th Korean » 가르침의 사역(The Ministry of Teaching)

성경적 해석(Biblical Interpretation)

제 7 장 (Chapter Seven)

바울은 서신에서 디모데에게 이렇게 썼다.

네가 네 자신가르침을 살펴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딤전 4:16, 강조 추가).

사역자마다 이 권면을 마음속에 새기고, 우선 먼저 자신을 살펴 경건의 좋은 본을 세워야 한다.

둘째, 그는 응당 자신의 가르침에 각별히 주의 기울여야 한다. 왜냐하면, 바울이 위의 인용구절에 쓴 것처럼 대로 그의 구원과 그의 말을 듣는 자들의 구원은 그가 가르치는 것에 의존하기 때문이다.[1] 만일 사역자가 거짓 교리를 포용하고 사람들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면, 그 결과는 그와 타인에게 영원한 불행을 줄 수 있다.

제자 삼는 사역자가 거짓 교리를 가르치는 것은 변명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성령님과 그분의 말씀을 주셔서 그를 진리로 인도하셨기 때문이다. 대조적으로, 잘못된 동기를 가진 사역자들은 종종 앵무새처럼 다른 인기 있는 사람들의 가르침을 되풀이 하거나, 스스로 말씀을 공부하지 않고, 그들의 교리와 가르침에 오류를 범하는 경향이 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 사역자는 그의 마음을 깨끗이 하고 그의 동기가 (1)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2) 사람들을 개인적으로 부유하고, 힘 있고, 인기를 누리는 것이 아닌 마지막 날에 예수님 앞에 온전히 설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되어야 한다. 또한, 그는 말씀에 대해 철저하고 균형 잡힌 이해를 갖기 위해서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연구해야 한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또한, 이렇게 썼다.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 2:15).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공부하고, 묵상하는 것은 사역자가 지속적으로 연습해야 할 학문이 되어야 한다. 성령님은 그가 말씀을 열심히 연구할수록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므로 그는 “진리의 말씀을 정확하게 다룰 수” 있게 된다. 오늘날 교회의 가장 큰 문제점 중 하나가 사역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해석하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그들이 가르치는 사람들을 잘못 인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이다. 야고보는 이렇게 경고했다.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약 3:1).

이런 이유 때문에 제자 삼는 사역자가 어떤 성경 구절이든지 정확하게 이해하고 뜻하는 바를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할지를 아는 것은 필수적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해석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말을 정확하게 해석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만일 우리가 어떤 저자 또는 강사가 의도하는 바를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우리는 반드시 상식을 기반으로 한 특정 규칙을 적용해야 한다. 이 장에서 우리는 성경 해석의 세 가지 가장 중요한 규칙을 고려할 것이다. 그 세 가지는, (1)지능적으로 읽기, (2)문맥으로 읽기, 그리고 (3)정직하게 읽기이다.

첫 번째 규칙: 지능적으로 읽기. 당신이 읽은 것이 비유나 상징적으로 이해하도록 분명히 의도되지 않았다면 문자 그대로 해석한다.

성경은 모든 문학처럼, 비유, 과장법의인법 등 수사법으로 가득하다. 그들은 이런 방법으로 해석해야 한다.

비유는 기본적으로 다른 두 가지 사물의 유사성을 비교한 것이다. 성경에는 많은 비유가 포함되어 있다. 최후의 만찬 때 그리스도의 말씀에서도 하나의 비유를 찾을 수 있다.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6-28).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주신 떡이 문자 그대로 그분의 몸이고, 그들이 마신 포도주가 문자 그대로 그분의 피라고 뜻하셨을까? 상식적으로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성경은 명백하게 예수님이 그들에게 주신 것은 떡과 포도주라고 말씀하시며, 어느 시점에도 떡과 포도주가 몸과 피로 변화되었다는 말씀은 없다. 최후의 만찬에 참석한 베드로와 요한도 그들의 서신서에서 그런 변화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었으며, 제자가 이렇게 쉽게 식인종이 되었을 가능성은 더더욱 없다.

일부는 “하지만, 예수님이 떡과 포도주는 그분의 몸과 피라고 말씀하셨기에 나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믿겠다!”라고 반박한다.

예수님은 그분이 문이라고 하신 적이 있다(요 10:9을 보라). 그분은 문자 그대로 경첩과 손잡이가 있는 문이 되었는가? 예수님은 그분은 포도 나무이고 우리는 가지라고 하신 적이 있다(요 15:5을 보라). 예수님은 문자 그대로 포도 나무가 되셨는가? 우리는 문자 그대로 포도 나무 가지가 되었는가? 예수님은 그분은 세상의 빛이며 하늘에서 내려 온 떡이라고 하신 적이 있다(요 9:5; 6:41을 보라). 예수님은 또한, 햇빛이고 한 덩어리의 떡이신가?

분명히, 이러한 표현들은 모두 비유라는 수사법을 사용한 것이며, 기본적으로 다른 두 가지 사물의 유사한 부분을 비교한 것이다. 어떤 면에서 예수님은 문과 포도나무와 같다. 최후의 만찬에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도 분명히 비유이다. 포도주는 그분의 피(어떤 면에서)와 같았고, 떡은 그분의 몸(어떤 면에서)과 같았다.

그리스도의 비유(Christ’s Parables)

그리스도의 비유는 모두 직유이다. 직유는 은유와 비슷하지만, 항상 같이, 처럼, 듯이 등 단어들과 함께 쓰인다. 그들은 본질적으로 다른 두 가지 사물의 유사성을 비교하여 영적인 교훈을 가르친다. 그것은 우리가 비유를 해석함에 있어서 기억해야 할 중요한 점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모든 비유의 세세한 부분까지 중요하게 생각하는 오류에 빠질 수 있다. 은유와 직유는 항상 유사성이 끝나고 차이점의 시작하는 곳에 도달한다. 예를 들어, 내가 아내에게 “당신의 눈은 호수 같다”고 했을 때, 나는 그녀의 눈이 푸르고 깊어 매력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그곳에 물고기가 헤엄치고, 새들이 앉으며, 그리고 겨울에는 그곳이 얼음으로 꽁꽁 얼어 붙을거라는 뜻이 아니다.

아래에 예수님이 직유로 하신 세 가지 비유를 고려해보겠는데, 먼저 그물의 비유부터 보도록 하자.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 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버리느니라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리라(마 13:47-50).

천국과 그물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그들은 매우 많이 다르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몇 가지 유사성이 있다. 사람들이 그물 안의 물고기를 좋은 것과 못된 것으로 가르는 것처럼 천국에서도 그러할 것이다. 어느 날인가 현재 함께 살고 있던 악인과 의인은 분리될 것이다. 하지만 유사성은 그곳에서 끝난다. 물고기는 헤엄치나 사람은 걸어 다닌다. 어부들은 물고기를 가려내나 천사들은 의인과 악인을 가려낸다. 물고기는 조리 한 후에 맛을 얼마나 잘 내느냐에 의해 판단되지만, 사람은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순종과 불순종에 의해 판단된다. 좋은 물고기는 그릇에 담지만, 나쁜 물고기는 버려진다. 의인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만, 악인은 지옥에 던져진다.

이 비유는 비교되는 사물들이 기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모든 은유와 직유가 궁극적으로 불완전한 비교임을 보여주는 완벽한 예이다. 우리는 말하는 사람의 의도를 넘어서 차이점이 실제로 닮은 점이라고 가정하지 말아야 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모두 “좋은 물고기”는 실제로 불에 구워져 조리되지만, “나쁜 물고기”는 물속으로 돌아가 한동안 더 살수 있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다. 예수님은 그런 의미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분의 목적을 파괴하는 것이다.

이 특별한 비유는, 우리가 좋은 사람이나 나쁜 사람이든지, 원하든 원하지 않던 간에 교회로 사람들을 끌어 오려는 “그물식 전도”전략을 가르치지 않는다! 이 비유는 해변이 전도하기 가장 좋은 곳이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이 비유는 교회의 휴거가 환란 기간의 끝에서 발생한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는다. 이 비유는 선택당한 물고기들은 그들 자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이 선택받았기에 우리의 구원도 순전히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이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예수님의 비유에 부당한 중요성을 강제적으로 부여하지 말라!

항상 준비되어 있으라(Remaining Ready)

예수님의 또 하나의 비유인 열 처녀의 비유를 보도록 하자.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그 중의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신랑이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새 미련한 자들은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달라 하거늘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마 25:1-13).

이 비유의 기본적인 교훈은 무엇인가? 그것은 마지막 구절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그것이 전부다.

내가 이전 장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예수님은 이 비유를 그 당시 그분께 순종하며 따랐던 가장 가까운 제자 중 일부에게만(마 24:3; 막 13:3을 보라)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이 비유는 예수님이 재림하셨을 때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도 준비되어 있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암시한다. 바로 그 때문에 예수님은 그들을 경고하셨다. 따라서 이 비유는 지금 그리스도의 재림을 위한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도 그분이 실제로 재림하실 때에는 준비되어 있지 않을 가능성이 있음을 가르치고 있다. 열 처녀는 처음에는 모두 준비되어 있었지만, 그중 다서명은 나중에 준비되어 있지 못했다. 만일 신랑이 빨리 돌아 왔더라면, 열명 모두 혼인 잔치에 참석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섯 명의 미련한 자와 다섯 명의 슬기 있는 자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자칭 그리스도인 중 절반만이 그리스도가 재림할 때 준비되어 있을 거라는 것을 증명하는가? 아니다.

기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성령님을 나타내는가? 아니다. 그것은 단지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만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가? 아니다.

신랑이 밤중에 돌아왔으므로 예수님도 한밤중에 재림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가? 아니다.

왜 신랑은 슬기 있는 처녀들에게 문에서 그들의 미련한 친구들을 찾아보라고 하시지 않았을까? 만일 신랑이 그렇게 하였다면, 미련한 자들이 궁극적으로 혼인 잔치에 참여하게 되므로 이 비유의 전체 중점을 망치게 된다.

아마도 그것은 미련한 처녀들이 등불이 꺼지므로 잠이 든 것처럼 미련한 신자들도 영적인 어둠 속에서 걷다가 영적으로 잠들게 되면 궁극적으로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아마도 이 비유에 나오는 혼인 잔치가 미래의 어린 양의 혼인 잔치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비유 혹은 세부적인 내용에 따른 의미를 강요하지 않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은 그 정도까지이다.

열매를 맺으라(Bearing Fruit)

아마도 내가 들었던 그리스도의 비유에 대한 최악의 해석은 한 목사의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에 대한 해석일 것이다. 먼저 이 비유를 읽어 보자.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주인이 이르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마 13:24-30).

한 목사의 해석을 보도록 하자.

곡식과 가라지가 자랄 때에는 모습이 똑같다. 아무도 어느 것이 곡식이고 어느 것이 가라지인지 알 수 없다. 이 세상과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아무도 누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며, 누가 불신자인지 알 수 없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불신자보다 그리스도께 더 많이 순종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삶만 보아서는 구별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들의 마음을 아시기에, 그분은 마지막에 신자들을 구별해 낼 것이다.

물론, 그것은 곡식과 가라지 비유의 요점이 아니다! 현실 속에서 보면, 신자들은 실제로 불신자와 매우 많이 구별됨을 알 수 있다. 종들이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가 심어졌음을 깨달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가라지는 열매를 맺지 못하므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이 열매 맺지 못하는 가라지를 선택하여 마지막에 거두어 내어 지옥에 던져질 악인들에 비유하신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비유의 중점은 분명하다. 진정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열매를 맺으나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 비록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사람들 속에 사는 악인들을 즉각적으로 심판하시지는 않지만, 언젠가는 그들을 의인들 가운데서 거두어 내어 지옥에 던져 넣으실 것이다.

예수님은 실제로, 이 비유에 대한 해석을 제공하셨다. 그러므로 누구도 그분의 해석 이외의 어떠한 의미도 찾을 필요가 없다.

이에 예수께서 무리를 떠나사 집에 들어 가시니 제자가 나아와 이르되 밭의 가라지의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소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 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그 때에 의인들이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마 13:36-43).

과장법(Hyperbole)

성경에서 두 번째로 자주 사용된 수사법은 과장법이다. 과장법은 특정 사물을 강조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지나치게 표현하는 것이다. 어머니가 그녀의 아이에게 “나는 너에게 집에 돌아와 저녁 식사를 하라고 천 번 전화 하였다”라고 말하는 것은 과장법이다. 성경에서 과장법의 예로 오른손을 찍어 내버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 수 있다.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마 5:30).

만일 예수님께서 문자 그대로 우리 중에 오른손으로 죄를 지은 사람은 모두 그 손을 잘라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셨다면, 우리는 모두 오른손을 잃어야 할 것이다! 물론, 죄의 문제는 사실 우리 손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도, 예수님은 죄는 우리를 지옥으로 보낼 수 있으며, 죄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유혹과 우리로 하여금 넘어지게 하는 것들을 제거하는 것임을 가르치셨다.

의인법(Anthropomorphism)

 

우리가 성경에서 만나게 되는 세 번째 수사법은 의인법이다. 의인법은 우리가 그분을 이해하도록 돕기 위해서 하나님께 인간의 속성을 부여하는 은유적인 표현이다. 예를 들어, 창세기 11:5은 이렇게 썼다.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창 11:5).

이것은 틀림없이 비유이다. 왜냐하면, 전지하신 하나님께서 문자 그대로 하늘나라에서 바벨로 내려오셔서 사람들이 무엇을 건설하는지 조사하셨을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많은 성경학자들은 팔, 손, 코, 눈과 머리카락처럼 하나님의 몸의 부분들을 묘사하는 매 성경 말씀마다 의인법을 사용하였다고 본다. 물론, 전능하신 하나님은 실제로 인간처럼 이러한 부분들이 없다.

하지만, 나는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그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첫째, 왜냐하면, 성경은 명백하게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되었다고 가르친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 1:26, 강조 추가).

일부 사람은 우리는 자기 인식, 도덕적 책임, 이성의 능력 등 면에서만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만들어졌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창세기 1:26과 아주 유사한 말씀을 몇 장 뒤에서 보게 된다.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창 5:3, 강조 추가).

이 말씀은 틀림없이 셋이 그의 아버지와 신체적인 외모가 비슷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그것이 창세기 5:3의 의미라면, 창세기 1:26의 같은 표현도 같은 의미일 것이다. 상식적이고 온전한 해석은 그 같은 결론을 얻게 된다.

또한, 일부 하나님을 본 성경 저자들의 그분에 관한 묘사들이 있는데, 예를 들어, 모세는 73명의 다른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나님을 보았다.

모세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 인이 올라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보니 그의 발 아래에는 청옥을 편 듯하고 하늘 같이 청명하더라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들의 존귀한 자들에게 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뵙고 먹고 마셨더라(출 24:9-11).

만일 당신이 모세에게 하나님이 손과 발을 가지셨는지를 묻는다면, 그는 무슨 말을 했을까?[2]

선지자 다니엘도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환상을 보았다.

내가 보니 왕좌가 놓이고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성부 하나님] 좌정하셨는데 그의 옷은 희기가 눈 같고 그의 머리털은 깨끗한 양의 털과 같고 그의 보좌는 불꽃이요 그의 바퀴는 타오르는 불이며 불이 강처럼 흘러 그의 앞에서 나오며 그를 섬기는 자는 천천이요 그 앞에서 모셔 선 자는 만만이며 심판을 베푸는데 책들이 펴 놓였더라…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성자 하나님]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단 7:9-10, 13-14).

만일 당신이 다니엘에게 하나님이 하얀 머리털과 형체가 있어 왕좌에 앉을 수 있지 않는가 하고 묻는다면, 그는 무슨 말을 했을까?

이 모든 것으로 보아, 나는 성부 하나님은 비록 육과 피가 아닌 영이시지만(요 4:24을 보라), 인간의 모습과 비슷한 영광스러운 형체를 가지셨다고 확신한다.

성경 말씀을 해석함에 있어서 어느 부분은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어느 부분은 비유적 또는 상징적으로 해석해야 할지를 분별할 수 있을까? 그것은 논리적인 사로를 가진 사람에게는 쉬운 일이다. 우리는 비유적 또는 상징적으로 쓰인 것을 다른 방법으로 해석할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한 모든 것은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예를 들어, 구약의 예언서들과 계시록은 상징으로 가득한데, 어떤 부분은 해석되었고, 어떤 부분은 해석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상징적으로 쓰인 부분을 알아보기는 어렵지 않다.

두 번째 규칙: 문맥으로 읽으라. 모든 단락은 앞뒤 단락과 성경 전체에 비추어 해석되어야 한다. 가능한 한 역사와 문화적인 배경도 고려되어야 한다.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주요 원인은 앞뒤 문맥과 성경적인 배경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경을 문맥을 떠나서 해석한다면,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을 성경이 하게 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성경은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을 알고 있는가? 시편 14편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없다”(시 14:1)라는 말씀을 읽게 된다. 하지만, 만일 우리가 그 말씀을 정확하게 해석하려면, 우리는 그 말씀의 문맥을 읽어야 한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시 14:1, 강조 추가). 이제 이 구절은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또 다른 예를 들면: 나는 어느 한 번 한 목사가 그리스도인들은 “불의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설교를 들었다. 그 목사는 마태복음 3:11의 말씀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란 세례 요한의 말씀을 읽으면서 설교를 시작하였다.

이 구절을 근거로, 그는 설교하였다. 나는 그가 설교 중에 “당신이 성령으로 세례 받은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세례 요한이 선포한 것처럼 예수님은 당신에게 불로 세례를 베푸시기를 원하신다”라고 말한 것을 기억한다. 그리고 그는 계속하여 우리가 “불의 세례를 받기”만 하면, 우리는 주님을 위해 일하려는 열심으로 가득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불의 세례”를 받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제단앞으로 불렀다.

불행하게도, 그 목사는 문맥을 떠나 성경을 해석하는 전형적인 실수를 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은 불의 세례를 베푸실 것이라고 말한 것은 무슨 의미였을까? 답을 찾기 위해서 우리가 모두 해야 할 일은 해당 구절 앞의 두 구절과 뒤의 한 구절을 읽는 것이다. 먼저 앞의 두 구절부터 시작하자. 요한은 이렇게 말했다.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마 3:9-10, 강조 추가).

우선 먼저, 우리는 적어도 요한의 청중들 가운데는 자신들의 혈통으로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 유대인들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요한은 복음을 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또한, 요한이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불 속에 던져질 위험이 있다고 경고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요한이 10절에서 말한 “불”은 11절에서 말한 불과 같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우리가 12절을 읽어보면 이 사실은 더욱 명확해진다.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 3:12, 강조 추가).

10절과 12절에서 요한이 말한 불은 지옥의 불이었다. 12절에서 그는 예수님이 사람들을 두 그룹 – “곳간에 모아 들일” 알곡과, “꺼지지 않는 불로 태울” 쭉정이로 나눌것이라고 비유적으로 말하였다.

앞뒤 구절에 비추어 보면, 요한은 11절에서 예수님이 신자들에게는 성령의 세례를, 불신자들에게는 불의 세례를 베푸실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였음이 틀림없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도 그리스도인들에게 불의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설교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 구절의 앞뒤 문맥뿐 아니라 신약의 나머지 말씀들도 살펴봐야 한다.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그리스도인이 “불의 세례”를 받았었다는 예를 찾을 수 있는가? 없다. 가장 흡사한 사건은 오순절 날 제자가 성령의 세례를 받고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의 머리위에 나타났다는 누가의 묘사일 것이다. 하지만, 누가는 종래로 그것이 “불의 세례”라고 말한 적이 없다. 또한, 우리는 서신서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불의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권고나 지시를 찾을 수 있는가? 없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불의 세례를 추구하지 말하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은 매우 안전하다.

성경에서 나온 거짓 복음(A False Gospel Derived From Scripture)

문맥을 고려하지 않고 성경을 해석하는 목사와 교사들 때문에 종종 복음이 잘못 전파되고 있다. 이 이유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거짓 가르침은 도처에 널려 있다.

예를 들어,구원은 행위가 아닌 은혜에 의하여 받은 것이라는 에베소서 2:8의 말씀은 거짓 복음을 홍보하기 위해 악용되고 있는데 그것은 모두 앞뒤 문맥을 무시하였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렇게 썼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8-9).

많은 사람은 바울이 진술한 구원에 관해서 단지 은혜에 의하고, 하나의 선물이며, 행위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에만 초점을 두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성경의 수백개의 증언에 반해서 구원과 거룩함 사이에는 아무 연결이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일부는 심지어 구원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까지 말한다. 이것은 문맥이 무시됨으로써 성경이 잘못 해석되는 전형적인 예이다.

우선, 이 성경 말씀이 전반적으로 무엇을 말씀하시려는지 생각해보자. 바울은 우리가 은혜에 의하여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지 않고, 우리가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고 하였다. 믿음은 구원을 이루는 등식에서 은혜와 같은 위치에 있다. 성경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유익이 없고, 죽은 것이며, 구원할 수 없다고 하였다(약2:14-26을 보라). 따라서 바울은 거룩함이 구원과 관계없다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우리의 노력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우리 구원의 기초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우리가 결코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 구원을 받을 수 없지만, 오직 우리가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믿음으로 응답할 때에만 구원이 실제로 이루어진다. 구원의 결과는 항상 순종과 진정한 믿음의 열매이다. 다음 구절을 보더라도 이 점을 입증할 수 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우리가 성령님에 의해 재창조된 모든 이유는 바로, 지금 그리스도의 새로운 피조물이 된, 우리가 순종함으로 선한 일을 행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바울의 구원 등식은 다음과 같다.

은혜 + 믿음 = 구원 + 순종

즉, 은혜 더하기 믿음은 구원 더하기 순종과 같다. 하나님의 은혜가 믿음에 의해 응답받는 경우, 그 결과는 항상 구원과 선한 일이다.

그러나 바울의 말을 문맥으로 해석하지 않는 사람은 아래와 같은 등식을 지어낸다.

은혜 + 믿음 – 순종 = 구원

즉, 은혜에 순종이 없는 믿음을 더하면 구원과 같다. 그것은 성경에 관한 한 어디까지나 이단이다.

만일 우리가 바울의 말의 맥락을 조금 더 읽는다면, 우리는 곧 에베소의 상황은 바울이 설교했던 모든 곳과 같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유대인들은 바울의 새롭게 회심한 이방인들에게 그들이 구원받으려면 반드시 할례를 받고 모세의 율법의 의식들을 지켜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었던 것이다. 바울이 “행위”가 사람을 구원할 수 없다고 쓸 때 마음속에 생각했던 것이 바로 할례와 율법적인 의식이었다(엡 2:11-22을 보라).

만일 우리가 에베소 교회에 쓴 바울의 서신을 좀 더 전체적인 맥락에서 읽는다면, 우리는 바울이 거룩함이 구원에 필수적이라고 믿었다는 것을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 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엡 5:3-6, 강조 추가).

만일 바울이 하나님의 은혜가 회개하지 않는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들을 궁극적으로 구원한다고 믿었다면, 그는 이러한 내용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에베소서 2:8-9에 기록된 말씀 속에 담긴 바울의 의도된 의미는 오직 그가 에베소에 쓴 서신을 전체적인 맥락에서 해석할 때에만이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갈라디아인의 패배(The Galatian Fiasco)

바울이 쓴 갈라디아서도 마찬가지로 문맥을 떠나 해석되었다. 그 결과 복음이 왜곡되었는데, 이 점은 곧바로 바울이 그의 서신에서 바로잡으려 했던 것이었다.

갈라디아 교회에 쓴 바울서신의 전반적인 주제는 “율법에 대한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울은 그의 독자들이 거룩함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필요하지 않다는 결론에 이르도록 작정했을까? 물론 그렇지 않다.

우선, 우리는 바울이 다시 한 번 갈라디아에 와서 새로운 회심자들에게 할례를 받지 않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들이 구원받을 수 없다고 가르치고 있었던 유대인들과 맞서 싸웠음을 알 수 있다.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반복적으로 할례에 대한 문제를 언급하였는데, 그것이 유대인 율법주의자들의 주안점이었기 때문이었다(갈 2:3, 7-9, 12; 5:2-3, 6, 11; 6:12-13,15을 보라). 바울은 갈라디아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계명에 너무 순종하는 것을 우려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구원을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안에 믿음을 두는 것이 아닌 할례를 행하고 자기의 노력으로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데 의지할까봐 우려했다.

우리가 갈라디아 교회에게 보낸 바울의 서신을 전반적인 맥락에서 보면, 그가 제5장에서 다음과 같이 쓴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갈 5:18-21, 강조 추가).

만일 바울이 갈라디아 신자들에게 그들이 거룩하지 않아도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을 전달하려 했었다면, 그는 그 같은 내용을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메시지는 거룩하지 못한 사람들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희생을 폐하고 할례와 모세의 율법을 통해 구원을 얻으려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할례는 구원을 이루지 못한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만이 신자를 거룩한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시키는 구원을 이룬다.

할례나 무할례자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갈 6:15).

이 모든 것은 성경을 해석할 때 문맥을 고려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다시금 보여준다. 복음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왜곡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문맥을 무시하는 것이다. 우리는 고의적으로, 뻔뻔스럽게 이런 일을 하는 “사역자들”의 마음이 궁금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한 번은 한 목사가 성경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신다”(롬 2:4)고 말씀하시기에 우리가 복음을 전파할 때에는 하나님의 진노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따라서, 그의 말에 따르면, 복음을 전파하는 적절한 방법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선하심만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아마도 사람들을 회개하게 인도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 목사가 로마서 2장에서 인용한 구절의 앞뒤 구절을 읽어보면, 그 구절은 하나님의 심판과 거룩한 진노로 에워 쌌음을 발견하게 된다! 문맥상으로 보았을 때 그 목사가 말한 것이 바울의 의도와 같을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이런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 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며(롬 2:2-9, 강조 추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대한 바울의 언급은 하나님이 진노를 늦추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공개적으로 죄인들에게 회개하라고 경고하는 설교자들의 예로 가득한 성경의 큰 맥락 속에서, 어떻게 사역자가 그런 터무니없는 말을 할 수 있는지 궁금해할 것이다.

성경의 일관성(Scripture’s Consistency)

성경은 하나님의 묵시로 쓰인 것이기 때문에, 그 메시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적이다. 때문에 우리는 전후 맥락을 신뢰하여 특정 구절에서 나타내려는 하나님의 의도를 해석할 수 있다. 하나님은 한 구절에서 다른 구절과 충돌되게 말씀하시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런 경우가 있다면, 우리는 두 구절에 대한 우리의 해석이 조화될 때까지 공부를 계속해야 한다. 예를 들어, 예수님은 산상수훈 중 여러 곳에서, 구약 성경의 도덕적 율법에 모순되거나 심지어 그것을 수정하는 듯한 말씀을 하셨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또 눈에는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 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마 5:38-39).

예수님은 이 계명을 모세의 율법에서 직접 인용하신 후 그것과 모순되는 듯한 말씀을 하셨다.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하나님께서 기본적인 도덕성에 대한 마음을 바꾸셨는가? 복수하는 것이 구약에서는 허용하는 행위였지만, 신약에서는 아닌가? 문맥을 보면 우리한테 도움이 될 것이다.

예수님은 주로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는데(마 5:1-2을 보라), 그들이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접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는 회당에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의 가르침을 받는 것이었다. 거기에서 그들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하나님의 율법을 듣게 되는데 그 의미는 이미 문맥을 무시하고 가르치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새인들에 의해 왜곡된 후 였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항상 사소한 잘못에 대해 개인적인 복수를 하라는 뜻으로 그 계명이 해석되기를 원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사실, 모세의 율법에서 복수는 그분의 것이고(신 32:35을 보라), 사람은 마땅히 그들의 원수에게 선을 행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셨다(출 23:4-5을 보라). 그러나 율법 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은 그 계명을 무시하고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자기방식대로 해석하여, 그들에게 개인적인 복수를 할 수 있는 권리에 대해 편리를 주었다.[3] 그들은 문맥을 무시하였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하나님의 계명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법정에서 정의로운 재판이 이루어지게 하기 위해 주신 계명들 가운데서 발견된다(출21:22-24; 신 19:15-21을 보라). 하나님께서 재판제도를 세우신 자체가 개인적인 복수에 대해 기뻐하시지 않음을 보여준다. 증거를 조사하는 공정한 재판장은 피해를 당하거나 편견이 있는 개인들보다 정의를 훨씬 더 잘 행사할 수 있다. 하나님은 법정과 재판장들이 공정하게 범죄를 처벌할 것을 기대하신다. 따라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처음에 모순되는 것처럼 생각했던 것이 조화를 이룰 수 있게 된다. 예수님은 단순히, 삶 속에서 거짓 가르침을 받고 있던 그의 청중들에게, 이미 모세의 율법에 있지만, 바리새인들에 의해 왜곡된, 개인 복수에 대한 하나님의 진정한 뜻을 이해하도록 돕고 계셨다. 예수님은 그분이 모세에게 주신 율법을 어기지 않으셨다. 그분은 단지 그것의 원래 의미를 보여주셨을 뿐이다.

이것은 또한, 우리로 하여금 법정까지 갈 수 있는 큰 분쟁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바를 알게 해준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동료에 의해 받은 어떠한 피해나 고통도 그냥 넘어가기를 원하지 않으셨다, 그렇지 않으면 그분이 법정을 만드시지 않았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도 동료 신자(또는 불신자)에 의해 받은 어떠한 피해나 고통도 그냥 넘어가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신약 성경은 서로 화해 할 수 없는 그리스도인들은 동료 신자의 중재를 도움받을 수 있다고 하였다(고전 6:1-6을 보라). 그리고 큰 침해에 관해서 그리스도인과 불신자가 법정까지 가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다. 큰 침해란 당신의 눈 또는 이가 뽑힐 정도로 피해를 입는 것을 말한다! 사소한 침해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뺨을 맞거나, 또는 작은 일(옷 같은 것) 때문에 고소당하거나, 또는 1마일을 걷도록 강요당하는 것 같은 일을 말한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들이 그분을 본받고 무지한 죄인들과 악인들에게 특별한 은혜를 보여주기를 원하신다.

이 같은 사로 대로, 예수님께 순종한다는 생각으로, 일부 마음 좋은 신자들은 그들에게서 물건을 훔친 사람들에 대해 법적 고소를 거부하고 있다. 그들은 자기들이 “다른 뺨을 돌려대는” 줄로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도둑들이 다시 훔칠 수 있도록 방임하고 있으며 그들에게 범죄에 대한 결과가 없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은 같은 도둑에 의해 도난당한 다른 모든 사람을 향해 사랑으로 걸어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도둑들이 정의의 심판을 받고 회개하기를 원하신다. 하지만, 누군가 당신의 뺨을 때리는 것 같은 사소한 침해를 주었을 때에는 그를 법정에 고소하거나 다시 때리지 말고 그에게 자비와 사랑을 보여주라.

 

신약에 근거하여 구약을 해석하라(Interpreting the Old in Light of the New)

신약 성경을 구약 성경에 근거하여 해석할 뿐 아니라 구약 성경을 신약 성경에 근거하여 해석해야 한다. 예를 들어, 일부 신실한 신자들은 모세의 음식 법을 읽고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율법에 따라 자신의 식단을 제한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신약 성경의 두 구절만 읽었더라면 모세의 음식 법은 새 언약 아래에서는 적용되지 않음을 발견할 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 이는 마음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로 들어가 뒤로 나감이라 이러므로 모든 음식물을 깨끗하다 하시니라(막 7:18-19).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혼인을 금하고 어떤 음식물은 먹지 말라고 할 터이나 음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딤전 4:1-5).

새 언약 아래에서, 우리는 모세의 율법이 아닌, 그리스도의 율법을 따라야 한다(고전 9:20-21을 보라). 비록 예수님이 모세의 율법의 도덕적 측면을 분명히 인정하셨지만(따라서 그것을 그리스도의 율법안에 통합하셨다), 본인이나 사도들은 그리스도인들은 모세의 음식 법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고 가르치지 않으셨다.

그러나 초기 그리스도인이 모두 회심한 유대인이었으므로 그들의 문화적인 신념으로 말미암아 구약의 음식 법을 계속하여 지켰음이 분명하다(행 10:9-14). 그리고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기 시작하면서 초기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에게 모세의 음식 법을 지키도록 요구하였는데 이는 순전히 주변의 유대인들에 대한 배려로 말미암은 것이다(행 15:1-21을 보라). 따라서, 그들은 그 법을 지키는 것을 통하여 구원을 받는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모세의 음식 법을 지키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다.

초기 그리스도인 중 일부는 또한, 우상에게 제물로 바친 고기를 먹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바울은(자신처럼)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신자들에게 그들의 “믿음이 연약한” 형제들을 사랑으로 대하고, 그들이 양심의 가책을 받게 하는 일은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가르쳤다(롬 14:1을 보라). 만일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의 신념 때문에 특정한 음식을 먹지 않는다면(그런 신념이 근거가 없더라도), 그는 오해에 대한 심판보다는 헌신에 대한 칭찬을 받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개인적인 신념으로 특정한 음식을 먹지 않는 사람은 그 음식을 먹는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 두 부류의 사람은 마땅히 서로를 사랑으로 품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분명한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이다(롬 14:1-23을 보라).

성경은 점진적 계시되어 있기 때문에, 어떤 경우라도, 우리는 항상 가장 오래된 계시(구약 성경)는 가장 새로운 계시(신약 성경)에 근거하여 해석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계시한 것 중에 어느 것도 모순되는 것이 없으며 항상 상호 보완적이다.

문화적 그리고 역사적 배경(Cultural and Historical Context)

 

가능한 한, 우리는 또한, 우리가 공부하는 성경 구절의 문화적, 역사적 배경을 고려해야 한다. 성경 속의 한 상황이 처해 있는 독특한 측면인 문화적, 지리적, 역사적 배경에 대한 요해는 종종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놓쳤을 수도 있는 통찰력을 얻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 물론, 이것은 성경 외의 다른 책들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좋은 성경공부는 보통 이 방면의 도움을 포함한다.

다음은 성경을 읽을 때 역사적 또는 문화적 정보가 어떻게 우리로 하여금 혼란에 빠지지 않도록 도와주는지에 대한 몇 가지 예이다.

1.) 우리는 때때로 성경에서 사람들이 지붕에 올라가거나(행 10:9을 보라),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는 장면들을 보게 된다(막 2:4을 보라). 성경이 씌어질 당시 이스라엘에서 가정집의 지붕은 일반적으로 평평했고, 대부분의 집은 그 평지붕까지 올라갈 수 있도록 외부에 계단이 있었다는 것을 아는 것은 우리한테 도움이 된다. 만일 우리가 그 사실을 모른다면, 우리는 어떤 성경 인물이 지붕을 올라타고 굴뚝을 붙잡고 있는 모습을 상상할 수도 있다!

2.) 우리가 마가복음 11:12-14에서 예수님이 “무화과의 때”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무화과나무가 열매 없음을 저주하는 장면을 읽을 수 있다. 그것은 무화과나무가 제 계절이 아닐지라도 보통 몇 개의 열매는 맺는다는 사실을 안다면 예수님의 기대가 불합리하다고 여기지 않을 것이다.

3.) 우리는 누가복음7:37-48에서 한 여자가 예수님이 식사하고 계시는 한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갔음을 읽게 된다. 성경은 그녀가 예수님의 뒤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었다고 말씀한다. 우리는 예수님이 식탁 위에 앉아서 식사하시는 중에 어떻게 이런 일이 진행될 수 있었는지 궁금할 것이다. 그녀가 식탁 아래로 기어들어 갔을까? 그녀는 어떻게 식사하는 다른 사람들의 다리를 빠져나갔을까?

그 답은 “식탁에 기대어 앉으셨다”(눅 7:37, ESV)는 누가의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그 당시 사람은 식사할 때 낮은 식탁을 에워싸고 옆으로 누운 자세로 한쪽 팔로 몸을 받쳐 세우고 다른 팔과 손으로 음식을 먹었다. 예수님은 이 자세로 그 여자에게 향유를 부음 받았다.

이것은 또한, 우리가 최후의 만찬에서 요한이 예수님께 질문하려고 예수님의 품에 의지하여 누운 이유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요한은 예수님께 등을 돌린 상태로 그분의 옆에 누워 있다가 예수님의 품에 허리를 기대고 직접 질문하였을 것이다(요 13:23-25을 보라). 다빈치의 유명한 그림인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을 중심으로 식탁의 양쪽에 제자가 여섯 명씩 앉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화가의 성경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고 있다. 그는 역사적 배경을 알 필요가 있다!

의복에 대한 보편적인 질문(A Common Question About Clothes)

나는 종종 전 세계의 목사들로부터 이 같은 질문을 받는다. “성경에서 여자는 남자의 옷을 입지 못하도록 하고 있는데 그리스도인 여자는 바지를 입을 수 있습니까?”

이것은 우리가 일부 해석규칙들과 약간의 문화적 배경을 적용하여 대답할 수 있는 좋은 질문이다.

우선, 성경에서 여자가 남자의 옷을 입지 못하도록(남자도 여자의 옷을 입지 못한다)고한 말씀을 보도록 하자.

여자는 남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요 남자는 여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라 이같이 하는 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자이니라(신 22:5).

우리는 먼저 “이 계명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인가?”부터 질문해봐야 할 것이다. 여자가 바지를 입는 것을 금하는 것이 그분의 목표일까?

아니다, 그것은 그분의 의도일 수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이스라엘에는 바지를 입는 남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바지는 남성의 옷이나 사람의 옷으로 간주되지 않았었다. 사실, 사람들이 성경이 기록되었을 당시 남자들이 입은 의복들은 오늘날 대부분의 우리에게 있어서 더 많이는 여자 의복처럼 보였을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려는 바를 올바르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역사와 문화적인 정보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사람이 이성의 옷을 입는 것은 주님에 가증한 것임을 읽었다. 그것은 꽤 심각한 일이다. 만일 한 남자가 여자의 수건을 3초 동안 머리에 쓰고 있는다면, 그것만으로 그가 하나님께 가증스러운 존재가 될까? 아주 의심스럽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이성으로 보이려고 입는 것을 반대하셨을 가능성이 더 크다. 왜 사람들이 그런 짓을 하려고 할까? 그것은 사람들이 동성을 유혹하고 싶어하기 때문인데 이런 증상을 일명 복장도착증이라고 하는 데 성도착의 일종이다. 나는 우리가 그것이 왜 하나님께 가증한 것인지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한 여자가 복장도착자가 아닌 이상, 신명기 22:5을 근거로 그녀가 바지를 입는 것이 잘못됐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 그녀가 여자로 보이는 이상, 그녀가 바지를 입는 것은 죄가 되지 않는다.

물론, 성경은 여자들은 단정하게 옷을 입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으며(딤전 2:9을 보라), 몸에 꼭 맞고 노출이 심한 바지는(몸에 꼭 맞는 옷과 치마도 마찬가지다) 부적절하다고 가르치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남자들을 정욕에 빠지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많은 서양 국가들의 여성들이 공개적으로 착용하는 옷들은 완전히 부적절하며, 이런 옷들은 개발 도상국에서 매춘부들만 착용한다. 어떤 여성 그리스도인도 “섹시” 하게 보이기 위해 옷을 입지 말아야 한다.

몇 가지 그밖의 생각들(A Few Other Thoughts)

흥미로운 것은, 내가 종래로 중국의 목회자들로부터 여성이 바지를 입는 것에 관한 질문을 받은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대부분의 중국 여성들이 오랫동안 바지를 입어왔기 때문일 수 있다. 나는 단지 대부분 여성들이 바지를 입지 않는 나라의 목회자들로부터 여성과 바지에 관한 질문을 받았었다. 이것은 그들의 문화적 편견을 보여준다.

또한, 나를 흥미롭게 하는 것은, 남자들이 전통적으로 롱기라고 부르는, 우리에게는 치마처럼 보이는 의복을 입는 미얀마에서는 여성 사역자들이 종래로 이와 비슷한 질문을 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다시 한 번, 여성과 남성의 의류구성은 문화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우리의 문화적인 이해를 강요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나는 수많은 남자들이 신명기 22장5절 말씀에 따라 여자들이 바지를 착용하지 않기를 기대하면서도 왜 레위기 19장27절 말씀은 자신한테 적용하지 않는지 궁금하다.

머리 가를 둥글게 깎지 말며 수염 끝은 손상하지 말며(레 19:27).

어떻게 남자들이 자기들은, 레위기 19:27의 말씀을 거역하여, 그들을 여자들로부터 명확하게 구분시켜주는 하나님이 주신 수염을 모두 깎으면서, 남자처럼 보이기 위해 바지를 착용하는 여자들을 비난할 수 있는가? 그것은 조금 위선적으로 보일 수 있다!

부수적으로, 약간의 역사적인 자료는 우리가 레위기 19:27의 말씀 속에 담긴 하나님의 의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얼굴 주위의 수염을 깎는 것은 이교도의 우상 숭배 의식의 일부였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이 이방 우상에 헌신한 것으로 나타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누가 말하고 있는가?(Who is Speaking?)

우리는 항상 주어진 성경 구절에서 말하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유의해야 하는 데 그런 문맥에 관한 정보는 우리가 정확하게 해석하는 데 도움이 된다. 비록 성경의 모든 말씀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이지만, 성경 안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말씀은 아니다. 무슨 뜻일까?

성경의 많은 구절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사람의 말이 기록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 속의 사람들이 한 말들이 모두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욥과 그의 친구들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처럼 인용하는 오류를 범한다. 그것이 오류라고 하는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로, 욥과 그의 친구들은 서른네 장에 걸쳐 변론했다. 그들은 서로 다른 주장을 하였다. 하나님은 자신을 부정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분명한 것은 그들이 한 말들을 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만이라고 할 수 없다.

둘째로, 욥기의 마지막 부분에, 하나님 그분께서 말씀하시는데, 그분은 욥과 그의 친구들이 옳지 못한 말을 한 것에 대해 질책하셨다(욥38-42을 보라).

신약 성경을 읽을 때에도, 우리는 똑같이 주의하여야 한다. 바울은 자신의 서신 중, 몇 곳에서 어떤 부분은 자기만의 견해라고 명백하게 밝혔다(고전 7:12,25-26,40).

누구에게 한 말인가?(Who is Being Addressed?)

우리는 주어진 성경 구절에서 누가 말하고 있는지를 물어야 할뿐 아니라, 또한, 그 말은 누구에게 한 것인지를 주목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그것을 주의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해당하지 않는 것을 적용해야 한다고 잘못 해석할 수 있거나, 또는 우리에게 해당되는 말씀을 적용되지 않는다고 해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일부는 시편 37:4의 약속이 그들에게 적용된다고 주장한다.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시 37:4).

하지만, 그 약속은 그것을 읽거나 알고있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까? 아니다. 우리가 문맥을 읽어보면, 겨우 다섯 조건을 충족시키는 사람들에게만 적용됨을 알 수 있다.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 거리로 삼을지어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시 37:3-4).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에게 말한 것인가를 주목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다.

또 다른 예를 보자.

베드로가 여짜와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막 10:28-30).

일부 교회권에서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을 물질로 지원하는 사람은 “백배를 돌려받는다”고 주장하는 것이 유행하고 있다. 하지만, 이 약속이 그런 사람들에게 적용될까? 아니다. 이 약속은 예수님께 그와 다른 제자가 받을 상이 무엇인가 하고 여쭸던 베드로처럼,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실제로 가족, 전토, 집을 떠난 사람들에게 하신 것이다.

흥미롭게도, 항상 백배를 돌려받는다고 설교하는 사람은 초점을 주로 집과 전토에 두지, 자식이나 박해에 두지 않는다! 물론, 예수님은 집을 떠난 사람은 대가로 백 개의 주택을 보상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그들이 그들의 가족과 집을 떠나면, 그들의 새로운 영적인 가족들은 그들의 집을 개방하여 그들에게 숙박을 제공할 것이라는 뜻이다. 진정한 제자들은 소유권에 대해 신경 쓰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무것도 소유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 그들은 단지 하나님의 청지기일 뿐이다.

마지막 예(A Final Example)

 

사람들이 예수님의 “감람산 강론”으로 알려진 마태복음 24-25장의 말씀을 읽을 때, 일부는 그분이 구원받지 못한 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이라고 잘못 생각함으로써 그 말씀들이 자기들에게 아무런 적용거리가 없다고 결론 내린다. 그들이 악한 종의 비유와 열 처녀의 비유를 구원받지 못한 자들에게 하신 것처럼 생각하며 읽는다. 하지만, 내가 이미 말했듯이, 두 비유는 모두 예수님의 가장 가까운 제자 중의 일부에게 하신 것이다(마 24:3; 막 13:3을 보라). 그러므로 만일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는 그들이 예수님의 재림에 준비되어 있지 않을 가능성에 대해 경고받을 필요성이 있으며, 우리도 마찬가지다. 감람산 강론에서의 예수님의 경고는 모든 신자에게 적용되며, 또한, 예수님이 누구에게 말씀하신 것인지를 깨닫지 못함으로 인해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적용된다.

세 번째 규칙: 정직하게 읽기. 당신의 신학을 말씀에 강제적으로 주입하지 말라. 만일 당신이 믿는 것과 모순되는 말씀을 읽었다면, 그 말씀을 바꾸려 하지 말고, 당신이 믿고 있던 것을 바꾸라.

우리는 모두 사전에 형성된 편견을 가지고 성경에 접근한다. 그 이유 때문에, 우리는 종종 성경을 정직하게 읽기를 매우 어려워한다. 우리는 성경이 우리의 신학을 다듬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우리의 믿음을 성경 말씀에 강요하는 것으로 끝난다. 우리는 때론 심지어 우리의 교리를 뒷받침해줄 말씀을 성경에서 사냥하며 우리의 믿음과 위배되는 것은 무시한다. 이렇게 하는 것을 “제멋대로 갖다 붙이기”(proof-texting)라고 한다.

아래의 것은 내가 최근에 부딪힌 신학을 말씀에 강요한 사례이다. 한 교사가 먼저 예수님의 말씀인 마태복음 11:28-29을 읽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 11:28-29).

그리고는 교사는 계속하여 예수님이 두 가지 서로 다른 쉼을 주신다고 설명했다. 첫 번째 쉼(아마도)은 11장 28절의 구원을 받음으로 얻는 쉼이고, 두 번째 쉼은 11장 29절의 제자가 받는 쉼이라고 했다. 첫 번째 쉼은 예수님 나아 감으로 받고, 두 번째 쉼은 그분을 주님으로 삼거나, 그분의 멍에를 짐으로 받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것이 예수님이 의미하는 바일까? 아니, 말씀을 보면 그런 의미가 명시되지도 않았고 암시되지도 않았다. 예수님은 두 가지 쉼을 준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그분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에게 한 가지 쉼을 주시며, 그 쉼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님의 멍에를 지는 것이며, 그것은 바로 그분께 순종하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예수님의 명백한 의미이다.

왜 그 교사는 그러한 해석을 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그 말씀의 명백한 의미가 천국을 약속받은 그리스도인은 신자와 제자 두 가지 종류가 있다는 자신의 믿음과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이 말씀 구절을 정직하게 해석하지 않았다.

물론, 우리가 전에 이 책에서 인용한 많은 성경 말씀을 보면서 그 교사의 신학을 고려해보면 그의 해석은 예수님이 가르치신 나머지 부분과 맥락이 맞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약 성경 아무 데도 천국을 약속받은 그리스도인은 신자와 제자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가르쳐주지 않는다. 모든 진정한 신자들은 제자다. 제자가 아닌 사람은 신자도 아니다. 제자가 되는 것은 진정한 믿음의 열매이다.

우리 모두 순결한 마음으로, 정직하게 성경을 읽기 위해 노력하자. 만일 우리가 그렇게 하면, 그 결과 그리스도께 더 큰 헌신과 순종을 하게 될 것이다.

 


[1]분명한 것은, 바울은 무조건적인 영생보장을 믿지 않았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구원받은 디모데가 자신의 구원을 보장하기 위해서 뭔가를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2]모세도 하나님이 “지나가실” 때 그분의 등을 본 적이 한 번 있다. 하나님은 그분의 손으로 모세를 덮었다가 손을 거둠으로써 모세가 그분의 얼굴을 보지 못하게 하셨다. 출 33:18-23을 보라.

[3]또한, 예수님이 그분의 청중들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그들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좀전의 설교 중에 말씀하셨음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마 5:20을 보라). 예수님은 계속하여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구체적인 부족점을 드러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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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th Korean » 성경적 해석(Biblical Interpretation)

가정교회(House Churches)

제4장(Chapter Four)

사람들이 처음으로 가정교회에 대해 들었을 때, 그들은 종종 가정교회와 제도적인 교회 사이의 유일한 차이점은 크기와 “사역”을 제공하는 상대적인 능력이라고 잘못 생각할 수 있다. 사람은 가끔 가정교회는 건물 교회에서 제공하는, 질 높은 사역을 제공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사역”의 정의가 제자가 되도록 돕고, 그들이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예수님을 섬기도록 도와주는 것이라고 한다면 제도적 교회는 이점이 없을 뿐 아니라 내가 이전 장에서 지적한 것처럼, 그런 교회의 조건은 더 나쁠 수 있다. 물론 가정교회가 다원적인 측면의 활동을 제도적 교회만큼의 수량은 제공할 수 없지만, 진정한 사역은 뛰어나게 제공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가정교회가 단지 실제 교회 건물이 없다는 이유로 진정한 교회로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한다. 그 사람들이 교회의 첫 삼백 년 사이에 살았었다면, 전 세계의 모든 교회를 거부했을 것이다. 사실, 예수님은 이렇게 선언하셨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 예수님은 신자들이 어느 곳에 모이라는 말씀을 하시지 않았다. 그리고 두 명의 신자들이 있더라도 그분의 이름으로 모이면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레스토랑에서 종종 식사하고, 진리에 대해 나누고, 서로를 가르치고 권면하는 모습이 일요일 아침에 많은 교회 건물 안에서 진행되는 일보다 실제로 신약의 교회 모식에 더 가깝다.

이전 장에서는, 나는 가정교회가 제도적 교회가 갖고 있지 않는 장점 일부를 열거했다. 나는 가정교회 모식이 제자를 삼는 목표를 달성함에 있어서 매우 효과적인 성경적인 대안임을 말해주는 이유를 몇 가지 더 열거하면서 이번 장을 시작하고 싶다. 그러나 말하기에 앞서 첫째로 나의 목적이 제도적 교회와 목사들을 공격하려는 것이 아님을 천명하고 싶다. 제도적 교회에는 많은 경건하고 성실한 목사가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자신의 구조 내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 나는 해마다 수천 명의 제도적 교회의 목사들을 향한 사역을 하고 있으며 개인적으로 그들을 많이 사랑하고 좋게 생각하고 있다.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들에 속한다. 나는 그들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잘 알고 있기에 그들의 고통을 줄여주는 동시에 보다 효과적이고 행복한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가정교회 모식은 성경적이며, 제자들을 삼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할 수 있다. 나는 제도적 교회 목사들의 대다수가 가정교회 모식으로 사역하면 더 효과적이고, 훨씬 더 행복해하고, 더 많은 것을 이룩하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나는 제도적 교회에서 20년 넘게 목사로 사역했으며, 그동안 나는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으로 최선을 다 해 왔다. 그러나 몇 개월 동안에 걸쳐 많은 교회의 주일예배를 방문한 뒤, 나는 처음으로 평신도로 교회에 다닌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나의 눈을 뜨게 했고, 나는 왜 수많은 사람이 이렇게 열정 없이 교회에 다니는지를 이해하기 시작하였다. 목사를 제외한 거의 모든 사람처럼 나도 정중하게 앉아 예배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예배가 끝난 뒤, 나는 적어도 지루하게 구경하기보다 참가자로 다른 사람들과 상호 교통할 수 있었다. 그 때 경험은 나로 하여금 더 나은 대안에 대해 생각하게 한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 나는 가정교회 모식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고 놀랍게도 전 세계에 가정교회가 수백만 개나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했으며 가정교회는 제도적 교회보다 몇 가지 확실한 장점을 갖고 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이 책을 읽는 목사들의 대부분은 가정교회가 아닌 제도적 교회를 관리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내가 쓴 많은 내용을 그들이 처음부터 중요하게 받아들이기에는 어려움이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이 자신에게 시간을 주어 내가 할 수밖에 없었던 말들을 고민해보기를 바란다. 나는 그들이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나는 목사들을 위하여 이 책을 썼으며, 그들과 그들의 교회에 대한 사랑에 의해 쓰게 되었다.

성경 속의 유일한 종류의 교회 (The Only Kind of Church in the Bible)

첫째로, 신약에는 특별한 건물에서 모이는 제도적 교회가 없었으나 가정교회는 명확하게 초대 교회의 표준이었다.

깨닫고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에 가니 여러 사람이 거기에 모여 기도하고 있더라(행 12:12).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분명히 교회건물이 아닌 곳)에서나 각 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행 20:20, 강조 추가)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또 저의 집에 있는 교회에도 문안하라(롬 16:3-5을 보라; 롬 16:14-15에서도 로마에 있는 또 다른 두 개의 가정교회인듯한 교회들을 언급하고 있다.)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고전 16:19).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들과 눔바와 그 여자의 집에 있는 교회에 문안하고(골4:15).

자매 압비아와 우리와 함께 병사 된 아킬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 편지하노니(몬 1:2).

초대 교회가 건물을 짓지 않은 유일한 이유가 그것이 초기 단계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논쟁이 지속하였는데 신약 성경의 역사기록에 따르면 초기 단계는 몇십 년 동안밖에 지속하지 않았었다(그리고 두 세기 이상 존속하였다). 그러므로 만일 교회 건물이 교회 성숙의 표시라면, 우리가 사도행전에서 읽었던 사도들의 교회는 종래로 성숙해본 적이 없는 셈이다.

나는 어느 한 사도도 교회 건물을 짓지 않은 이유는 그들이 최저한도로 이런 일은 하나님의 뜻을 벗어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그러한 모본이나 지시를 우리한테 남겨주신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특별한 건물이 없이 제자를 삼았고, 그는 제자를 삼으라고 그의 제자들에게 말했다. 그들은 특별한 건물에 대한 필요성을 못 느꼈을 것이다. 이것은 바로 이렇게 간단하다. 예수님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세상으로 나아가서 제자를 삼으라고 하셨을 때, 그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건물을 짓고 일주일에 한 번씩이 사람들에게 설교하는 것이다”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또한, 특별한 건물을 건설하는 것은, 이 땅에 보물을 쌓지 말고 완전히 불필요한 무언가에 돈을 낭비하지 말고, 사람의 생명을 변화시키는 사역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하나님 나라의 자원을 훔치지 말라는 그리스도의 계명을 직접적으로 위반하는 것으로 간주하였을 수도 있다.

성경적 청지기(Biblical Stewardship)

이 생각은 가정교회가 제도적 교회를 능가하는 두 번째 장점으로 연결해준다. 가정교회 모식은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 자원의 영적인 청지기가 되는 것을 제창하는 데 이는 확실히 제자도의 매우 중요한 측면이다.[1] 교회 건물을 소유하고, 임대하고, 수리하고, 확장하고, 재구축하고, 난방 또는 냉방 하기 위해 돈을 낭비하지 않는다. 따라서, 건물에 낭비될 뻔했던 돈들이 사도행전 때 사람들이 사용했던 처럼, 가난한 자들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제공하고, 복음을 전파하고, 제자를 삼는 데 사용될 수 있다. 교회 건물에 소요되는 수십억 달러가 복음을 전파하고 가난한 자들을 위해 사용된 경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얼마나 큰일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라! 거의 상상할 수 없다.

또한, 인수가 20명이 안 되는 가정교회 내에 성숙한 신자들이 있다면 실제로 “장막을 만드는”(곧 지불받지 않는) 장로/목사/감독들에 의해 감독 될 수 있다. 이러한 교회 운영에는 돈이 거의 필요 없다.

물론, 성경 말씀은 장로/목사/감독들은 자신의 노동에 비례하여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는 것 같다. 이 때문에 전직 사역자들은 응당 생계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돈을 받아야 한다(딤전5:17-18을 보라). 가정교회에서 10명이 십일조 헌금을 하면 한 명의 전직 목사가 평균수준의 생활을 유지할 만큼 지원할 수 있게 된다. 가정교회에서 5명의 십일조 헌금은 한주 노동시간의 절반을 헌신할 수 있는 목사를 확보할 수 있다.

가정교회 모식을 따르면 건물에 사용될 돈이 목회자를 지원하기 위해 쓰일 수 있으므로 제도적 교회 목사가 가정교회의 확산이 자신들의 직업을 위협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대신에, 많은 형제자매들이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속에 이미 심어놓은 소원 즉 직업을 갖고 사역하라는 것을 인식할 수 있음을 의미할 수도 있다.[2] 결과적으로, 그것은 제자를 삼는 목표를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또한, 20명의 직업인으로 구성된 가정교회는 잠재적으로 그 수입의 절반을 밖으로 사역하고 가난한 자들을 돕는데 사용할 수 있다.[3]

만일 제도적 교회가 가정교회의 네트워크로 전환하는 경우, 자신의 일자리를 잃을 수 있는 사람은 교회 행정 및 프로그램 지원 직원일 것이며 아마도 일부 전문 부처직원(예를 들어, 큰 교회의 어린이나 청소년 목사)들은 성경적 근거가 있는 사역과 성경적 근거가 미약한 사역을 바꾸기를 꺼린다. 가정교회는 어린이나 청소년 목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부모들은 성경에서 그 책임을 부여받았고, 가정교회의 사람은 일반적으로 문화적 기독교 규범보다는 성경을 따르기 위해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믿지 않는 부모를 둔 청소년도 제도적 교회에 가입되듯이 가정교회에 가입되고 제자로 훈련받을 수 있다. 혹시 왜 “청소년 목회자” 또는 “어린이의 목회자”가 신약에 언급되지 않았는지 궁금한가? 이러한 사역들은 기독교 역사상 첫 1900년까지는 존재하지 않았었다. 그런 사역들이 왜 지금 부유한 서구 국가에서 갑자기 필수적이 되었을까?[4]

마지막으로, 특별히 가난한 나라들에서, 목회자들이 서양에 기독교인들의 보조를 받지 않고서 교회 건물을 임대하거나 소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의존성은 많은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를 낳았다. 사실은, 300년 이래 기독교에는 이런 문제가 존재하지 않았다. 만일 당신이 개발도상국에 있는 목사이고, 당신의 회중이 교회 건물을 지급할 능력이 없는 상황이라 해도, 방문 온 미국인들에게 지원받으려는 희망으로 아첨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이미 당신의 문제를 해결했다. 당신은 정말로 성공적으로 제자를 삼기 위해 교회 건물이 필요하지 않다. 성경 모식을 따르라.

조각난 가족들의 최후(The End of Fragmented Families)

가정교회가 가진 또 다른 장점은 어린이와 청소년을 제자로 훈련시키는 것에 뛰어나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침투된 제도적 교회들(특별히 미국의 큰 교회들)의 가장 큰 거짓말 중 하나는 바로 그들이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훌륭한 사역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흥미로운 어린이와 청소년 사역에 참석한 어린이들의 대다수가 “둥지를 떠난” 후에 다시는 교회에 돌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숨기고 있다. (아무 청소년 목회자에게 이 통계수치에 대해 물어보라 – 그 사람은 이 상황에 대해 알아야 한다.)

또한, 청소년 목회자와 어린이의 목회자들이 있는 교회들은 계속해서 부모들에게 그들은 자녀의 영적 훈련에 대한 능력이 없고 책임도 없다는 거짓말을 침투시키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가 당신들의 자녀들의 영적 훈련을 책임질 것이다, 우리는 훈련된 전문가들이다.”

이 같은 사역체계는 계속하여 늘어나는 타협의 순환을 형성하기 때문에 실패하기 마련이다. 이런 일은 부모가 자신의 자녀가 즐길 수 있는 교회를 찾는 데서 부터 시작된다. 만일 한 아이가 집으로 가는 길에 교회에서 재미있었다고 한다면 부모들은 감격해 마지 않는데, 그것은 그들이 아이가 교회에서 즐거웠다는 것과 그 아이가 영적인 일에 흥미를 느꼈다는 것을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종종 이런 잘못된 생각을 한다.

성공 중심의 담임목사들은 그들의 교회가 성장하기를 원하며, 따라서 어린이와 청소년 목회자들도 종종 회의 중 동역자들에게 아이들이 생각하기에 재미있는 “관련”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한다는 압력을 느끼게 한다. (“관련”은 “재미”에 비해 항상 부차적이고, “관련”은 반드시 “아이들을 회개, 믿음, 예수님의 계명에 대한 순종으로 인도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만일 아이들이 이런 프로그램을 좋아하게 되면, 순진한 부모들은(그들의 돈과 함께) 교회에 나오게 되며, 교회는 따라서 커지게 된다.

특히 청소년 그룹의 성공 여부는 출석 인수에 의해 측정된다. 청소년 목회자들은 출석률을 높이기 위해 그들이 할 수 모든 일을 하게 되며 이는 종종 진정한 영성을 외면하게 된다. 부모들이 자신의 아이가 청소년 목회자의 메시지가 지루하고 정죄 적이라고 불평한다며 담임목사에게 고발하는 것을 듣게 되는 청소년 목회자는 참으로 불쌍하다.

하지만 청소년 목회자들에게 있어서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가정교회의 지도자가 되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른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이미 좋은 관계성 기술과 젊음의 열정과 충만한 정력을 갖고 있다. 그들 중 많은 사람이 청소년 목회자로 있는 이유는 청소년 목회자가 점차 담임목사가 되는데 필요한 초 인간적인 기술을 습득하기 위한 첫 번째 단계이기 때문이다. 그들 중 대부분은 가정교회를 목회하기에 충분한 능력이 있다. 그들이 청소년 그룹에서 해왔던 사역들이 교회 성전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보다 더 성경적인 교회모식에 가까울 수 있다! 동일하게 어린이 목회자들에게도 말할 수 있다. 그들은 어린이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이 작은 원을 이루어 함께 음식을 나누는 가정교회에서 담임목사보다 훨씬 더 잘 섬길 수 있을 것이다.

어린이와 청소년들은 자연적으로 가정교회에서 제자로 더 잘 훈련받는다. 가정교회에서 그들은 진정한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체험하고, 참여와 질문의 기회를 갖게 되며 기타 연령층의 사람들과의 교제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의 가족의 일원이 될 수 있다. 제도적 교회에서 그들은 지속적으로 큰 쇼와 “재미”를 주는 것들에만 노출되어 있어 진정한 공동체 생활을 체험하기 어렵다. 그들은 보편적인 위선에 익숙해 있으며, 학교에서처럼 자신의 동료에 관한 것만 배운다.

그러나 모든 연령층이 다 있는 모임에서, 울고 있는 아기나 진정 못하는 어린아이들은 어떻게 할까?

그들은 항상 즐길 수 있어야 하며, 문제가 될 때에는 실제 단계를 거쳐 해결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그들을 다른 방으로 옮겨 즐겁게 놀아주거나, 또는 크레용과 종이를 주어 바닥에서 색칠하게 할 수 있다. 가정교회 모임에서, 아기와 아이들은 문젯거리가 아니며 낯선 사람한테 맡기지 않아도 된다. 그들은 가정교회 가족 안의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제도적 교회에서 울기 시작한 아기는 종종 예배의 형식에 영향을 주며 이로 말미암은 낯선 사람들의 아기를 향한 뜨거운 눈총은 부모들을 난처하게 만든다. 가정교회에 울기 시작한 아기는 그의 가족들에 둘러싸여 있어 아무도 그들이 안았었던 하나님의 작은 선물이 그들 가운데에 있음을 알리는 것을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아이들을 통제 못 하는 부모들은 그들이 알아야 할 것을 다른 부모들에 의해 부드럽게 가르쳐 질 수 있다. 다시 한 번 신자들은 진정으로 보살펴주는 관계속에 있다. 그들은 제도적 교회에서 자주 일어나는 것과 같이 서로에 대해 험담하지 않는다. 그들은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사랑해 준다.

기쁜 목사들(Happy Pastors)

20여 년간 교회에서 목회하면서, 전 세계 수만 명의 목회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또 많은 목회자들과 개인적으로 친구가 되면서, 나는 내가 현대 교회를 목회하는 데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제도적 교회의 모든 목사처럼 나도 사역의 “어두운 면”을 경험했다. 어떤 때에는 매우 암흑할 수 있다. 사실, “잔인하다”라는 표현이 그것을 더 잘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대부분의 목회자는 사람들의 기대 때문에 자연스럽게 놀라운 압력을 받고 있으며 때로는 자신의 가족관계까지 파괴한다. 목사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낙담한다. 그들은 정치인, 판사, 고용주, 심리학자, 활동 감독자, 건설 계약자, 결혼 상담가, 대중 강사, 관리자, 심리 전문가, 행정가여야 한다. 그들은 종종 자신이 그리스도의 몸의 더 큰 조각을 얻기 위해 다른 목회자와 치열한 경쟁 속에 있음을 발견한다. 그들에게는 개인적인 영성훈련을 위한 시간이 거의 없다. 그들 중 대부분은 자신의 직업에 갇혀 있으며 봉급이 적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회중은 그들의 고객이자 고용주이다. 어떤 때에는 그 고용주들과 고객들이 목회자의 삶을 아주 어렵게 할 수도 있다.

비교해보면, 가정교회 목사는 쉬운 축이다. 첫째, 만일 그가 진정한 제자로서 본이 되는 삶을 살고, 예수님의 계명에 타협이 없는 순종을 가르치면, 아주 적은 무리의 염소들만이 그 그룹의 일부가 되는 것에 관심을 두게 될 것이다. 사실, 가정집에서 모임을 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염소가 떠나게 하는 데 충분하다. 그렇게 함으로 그는 온전한 양들만을 목양할 수 있다.

둘째로, 그는 자기의 모든 양을 개개인의 수준으로 사랑하고 제자 삼을 수 있다. 그가 감독하는 성인은 12-20명뿐이기 때문이다. 그는 가족의 아버지처럼 그들과 함께 진실한 친밀감을 즐길 수 있다, 그는 그들에게 그들이 응당 받아야 할 시간을 내줄 수 있다. 나는 제도적 교회의 목사였을 때, 종종 고독감을 느꼈다. 나는 회중 중의 어떤 사람과도 가깝게 지내지 못했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그런 친구처럼 나와 가깝게 지내지 못함으로 인해 화를 내거나 또는 그런 친구들을 질투하지 않게끔 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다른 신자들과 진실한 친밀함을 바랐으나, 진정한 친구를 얻음으로 인해 치러야 할 값은 감수하지 못했다.

가정교회의 관계가 긴밀한 가족안에서, 지체들은 자연스럽게 목사가 책임 적이 되도록 도울 것이다. 그것은 목사가 그들의 친한 친구이지 무대 위의 배우가 아니기 때문이다.

가정교회 목사는 미래 가정교회 지도자들을 키우기 위해 시간을 보낼 수 있다. 그렇게 하면 때가 되어 배가할 때에 지도자들이 이미 준비되어 있게 된다. 그는 자기의 가장 유망한 미래 지도자들이 그들의 은사를 갖고 다른 곳에 있는 신학교에 가는 것을 보지 않아도 된다.

그는 자신의 지역 회중 이외에 다른 사역들을 개발하는 데 충분한 시간이 있을 것이다. 아마도 그는 감옥이나 개인요양원에 가서 사역할 수 있고, 난민들이나 사업가들에게 일대일 전도에 참여할 수 있다. 그는 사역경험을 토대로, 다른 가정교회를 개척하거나, 자신의 사역을 통하여 성장한 젊은 가정교회 목회자들을 지도하는 데에 그의 시간을 할 수 있는 대로 바칠 수 있다.

그는 주일 아침 출연자가 되어야 한다는 압력을 느끼지 않는다. 그는 토요일 밤에 3점 식의 설교를 준비할 필요가 없으며 어떻게 하면 영적 성장이 다른 수준에 있는 많은 사람을 만족하게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5]그는 모임에서 성령님이 모든 사람을 사용하시는 것을 즐겁게 볼 수 있으며, 그들이 자신의 은사를 사용하도록 격려할 수 있다. 그가 모임에 참가하지 않을 수도 있으며, 심지어 그가 없이도 모든 것은 제대로 진행될 것이다.

그에게는 그를 괴롭히는 건물도, 그가 관리해야 하는 직원도 없다.

그는 다른 지역 목회자들과 경쟁할 이유가 없다.

그의 삶을 비참하게 만드는, 정치적 내분이 보편화해가는 “교회 구조”는 없다.

즉, 그는 문화적 기독교가 그에게 부여한 신분이 아닌 하나님이 그를 부르신 모습이 될 수 있다. 그는 주연배우, 회사의 회장, 또는 사역의 중심이 아니다. 그는 제자 삼는 사역자이며, 성도들을 영적으로 무장시켜주는 사람이다.

기쁜 양들 (Happy Sheep)

진실하고 성경적인 가정교회에 관한 모든 것은 모든 진정한 신자가 소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다.

모든 진정한 신자들은 다른 신자들과 진정한 관계를 갖기를 원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이미 그들의 마음속에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계는 가정교회의 중요 부분이다. 그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공동체다. 다른 형제자매와 자신의 진실한 삶을 나누는 것을 말한다. 가정교회는 신자들이 마땅히 해야 하는 것들 즉 많은 신약 성경에 쓰인 “서로에게”란 구절 중에 말씀하는 것들을 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 준다. 가정교회 모식에서 신자들은 권면하고, 격려하고, 고양해주고, 위로해주고, 가르치고, 봉사하고 서로를 위해 기도할 수 있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고 좋은 일을 하도록 자극하고, 자신의 죄를 서로 고백하고, 서로의 짐을 부담해주고, 시편, 찬송가와 영적인 노래로 피차 권면할 수 있다. 그들은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며 우는 사람들과 함께 눈물을 흘릴 수 있다. 이러한 일은 제도적 교회의 주일 아침 예배에서는 자주 발생하지 않는다. 신자들은 그냥 앉아서 보고 있기만 할 뿐이다. 한 가정교회 성도가 나한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우리 지체 가운데 누군가가 병 들었을 때, 나는 단지 음식사역에 등록했기 때문에 낯선 사람의 집에 음식을 보내주지 않는다. 나는 자연스럽게 내가 알고 있고 사랑하는 사람한테 음식을 가져다준다.”

진정한 신자들은 상호 작용하고 서로 참여하는 것을 즐긴다. 수년 동안 수동적으로 앉아서 관련이 없거나 중복적인 설교를 듣는 것은 그들의 지성과 영성에 대한 모욕감을 준다.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관한 자신의 통찰력을 공유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을 선호하고 가정교회가 그런 기회를 제공한다. 무화적인 모식이 아닌 성경적인 모식을 따를 때 각 사람은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다”(고전 14:26). 가정교회에서는 아무도 무리 속에서 길을 잃거나 교회 당파에 의해 배척되지 않는다.

진정한 신자들은 하나님께 쓰임 받기를 원한다. 가정교회에서 사람마다 다른 사람을 축복할 기회와 책임이 있으므로 아무도 제도적 교회의 헌신적인 신자들에게 공통으로 나타나는 소진되는 현상을 경험하지 않는다. 그렇게 최소한 모두가 일반적인 식사를 나누기 위해 음식을 가져올 수 있으며, 이것이 바로 성경에서 나오는 “애찬”(유 1:12)과 같은 것이다. 많은 가정교회의 경우, 그 식사는 실제 유월절 식사의 일부인 주의 만찬의 예를 따른다. 주의 만찬은 내가 목회했던 교회의 어린 소년이 말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간식”이 아니다. 교회 예배때 몇 초 동안을 들여 모르는 사람들과 작은 제병을 먹고 약간의 주스를 마시는 방식은 성경과 성경적인 가정교회에 있어서는 완전히 생소한 것이다. 서로를 사랑하는 제자가 함께 모여 나누는 식사는 성찬의 성례적인 의미를 여러모로 더하여 준다.

가정교회에서 예배는 간단하고 신실하고 참여적이지 하나의 쇼가 아니다. 진정한 신자는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기를 원한다.

교리적 균형과 관용(Doctrinal Balance and Toleration)

작은 교회의 모임 중 부담 없고 열린 토론은 글을 읽을 수 있는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가르침에 대한 의견을 나눌 수 있게 된다. 서로를 알고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은 그들 것과 다른 관점들을 신중하게 고려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설사 그룹이 어떠한 합의에 도달하지 않을지라도, 교리가 아닌 사랑은 그들로 하여금 여전히 같이 결속되어 있게 한다. 장로/목사/감독을 포함한 모든 사람의 어떠한 가르침도 모두 다른 사람들 사랑의 검증을 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가르치는 자가 우리 모두에게 내주하시기 때문이다(요일 2:27을 보라). 내적인 견제와 균형 잡힌 성경적인 모식은 교회가 교리적으로 탈선하는 것을 방지해준다.

이것은 현대 제도적 교회의 규범에 비해 매우 대조적이다. 제도적 교회의 교리는 처음부터 설립되었고 도전할 수 없었다. 따라서, 잘못된 교리는 부단히 연속되어 갔고, 교리는 수용에 대한 리트머스 시험이 되었다. 같은 이유 때문에, 한 설교 중의 하나의 요점도 “같은 생각을 하는 신자들”을 찾아 나서는 반대자들의 즉각적인 출교를 유발할 수 있다. 그들은 목사와 교리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안다. 심지어 목사가 자신의 입장을 변경하도록 설득당했다 하더라도, 그는 교회의 많은 곳에서뿐 아니라 자신의 교단 내의 높은 사람들에게 이 부분을 감출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제도적 교회에서 교리적인 차이는 이 세상에서 가장 숙련된 정치인과 모호하게 얼버무리는 연설가와 같은 목회자들을 배출한다. 그들은 논쟁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모든 사람이 그들이 자기편이라고 생각하게 하려고 한다.

하나의 현대적 흐름(A Modern Trend)

흥미롭게도, 점점 더 많은 제도적 교회들에서 제도적 모식내에서 소그룹 구조를 개발하고 있으며 제자 훈련함에 있어서의 소그룹 구조의 가치를 인식하고 있다. 일부 교회들에서는 더 나아가서 그들의 핵심구조를 소그룹에 두며, 소그룹을 그들의 사역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보고 있다고 한다. 큰 “축하 모임들”은 소그룹들보다 차요적이라고 한다(적어도 이론적으로는).

이런 것들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발걸음들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러한 발걸음들을 축복하시는데, 그것은 우리를 향한 그분의 축복이 우리가 그분의 뜻에 얼마나 맞는지에 따라 정비례하기 때문이다. 사실, 제자 삼는 데 있어서 제도적 교회보다 “셀 교회들”이 더 잘 구성되어 있다. 셀 교회는 제도적 교회 모식과 가정교회 모식사이에 있으며 두 가지 교회모식의 요소들이 결합되어 있다.

소그룹 구조를 가진 현대 제도적 교회와 고대와 현대 가정교회를 비교해보면 어떨까? 약간의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제도적 교회 내의 소그룹들은 불행하게도 때때로 제도적 교회 내에서 많은 잘못을 빚어내는데 특히 소그룹사역을 시작한 실제 동기가 담임목사가 자신의 교회 왕국을 구축하는 것이라면 말이다. 그는 결과적으로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사람들을 이용하게 되고, 소그룹은 그 계획에 잘 맞춰주게 된다. 이런 문제가 발생하면, 소그룹 지도자들은 모 교회에 대한 충성심을 근거로 선출되게 되며, 마귀가 그들의 머리에 그들이 스스로 할 수 있다는 생각을 주입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은사가 너무 많거나 카리스마가 넘쳐서는 안 된다. 이러한 종류의 정책들은 소그룹의 효과성을 방애하고, 다른 모든 제도적 교회에서처럼, 진정으로 부르심 받고 열심 있는 지도자들을 신학원으로 몰아내고, 교회의 은사들을 강탈하여, 그들을 강의만 듣고 실제 재직훈련이 없는 곳으로 데려간다.

제도적 교회의 소그룹은 종종 교회모임의 성격을 벗어날 때가 있다. 제자 삼는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 사람들이 아마도 주일 아침에 영적 양식을 공급받는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소그룹은 때때로 하나님의 말씀 외의 다른 것들에 초점을 두려 하고 주일 아침의 반복을 원하지 않는다.

제도적 교회의 소그룹들은 종종 교회의 직원으로 구성된 것이며 성령의 역사로 생긴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교회의 다른 많은 프로그램 중 하나가 된다. 사람은 연령, 사회적 지위, 배경, 취미, 결혼 여부 또는 지리적 위치에 따라 분배된다. 염소는 종종 양들과 함께 섞여 있게 된다. 이 육적인 조직은 신자들이 서로의 차이를 용납하고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초대 교회는 많은 유대인과 이방인들의 혼합물이었다는 것을 기억하라. 그들은 정기적으로 함께 식사하였다. 비록 유대인의 전통에 의해 금지되는 것들이 있었지만 말이다. 이런 모임은 서로 배우는 좋은 경험임에 틀림없었을 것이다! 사랑으로 행하는 아주 좋은 기회였다! 복음의 능력을 얼마나 증거하는지를 보여준다! 그럼 왜 우리는 반드시 같은 종류의 그룹으로 모두 나누어져야만 소그룹의 성공을 보장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소그룹을 가진 제도적 교회는 여전히 주일 오전 쇼를 하고 있으며 관중은 프로들의 연기를 보고 있다. 제도적 교회에서 가장 중요함을 나타내는 “진정한” 예배가 있을 경우 소그룹 모임은 진행되지 않는다. 이런 메시지 때문에 주일 아침 참석자 중 절대다수가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은 비록 소그룹 모임에 참여하도록 격려받지만 참석하지 않으려 하며 그것을 단지 선택사항으로 보고 있다. 그들은 그들이 가장 중요한 주일 예배에 참석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 그래서 소그룹 개념은 다소 중요한 것으로 홍보되고 있지만, 주일 제도적 활동만큼은 중요하지는 않다. 진실한 공동체, 제자 훈련과 영적 성장을 위한 가장 좋은 기회가 경시된 것이다. 잘못된 메시지가 전달되었다. 제도적 활동은 여전히 우선시되고 있다.

더 많은 차이점들(More Differences)

소그룹을 가진 제도적 교회는 여전히 모든 사람이 계급 구조에서 자신의 위치를 알 수 있는 피라미드식 기업구조로 구성되어 있다. 상단에 있는 사람은 스스로 “섬기는 지도자”라고 자칭할 수 있지만, 더 많이는 경영진 의사결정 책임을 진 최고 경영자와 같다. 더 큰 교회일수록, 목사는 그의 회중들과 더 멀리 떨어져 있다. 만일 그가 진정한 목사라면 당신은 무실 결에 그가 밝히는 진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는 보통 작은 무리를 목회할 때 더 행복하다고 말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소그룹을 가진 제도적 교회는 여전히 교목과 평신도 사이의 분리를 조성하고 있다. 소그룹 지도자는 지불받는 전문가들의 하위 계층에 항상 있다. 소그룹 지도자에게 너무 많은 권한을 부여할 만큼 신뢰받지 못하기 때문에 성경 공부는 종종 교목들에 의해 계승하거나 승인된다. 소그룹은 주의 만찬을 진행하거나 침례를 주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이 신성한 의무는 명목과 학위가 있는 엘리트들이 집행하게 되어 있다. 교회 지체 중 전직 사역에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반드시 신학원에 가야만 엘리트 그룹에 가입할 수 있는 “진짜”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

제도적 교회 내의 소그룹 예배는 60-90분 정도 진행되고, 한 은사 있는 사람이 예배를 인도하고 다른 은사 있는 사람이 검증된 가르침을 주는 소규모의 교회 예배에 지나지 않는다, 성령님이 다른 사람을 사용하고 은사를 주고 사역자들을 개발할 공간이 거의 없다.

사람은 종종 제도적 교회의 소그룹에 진지하게 헌신하지 않으며, 산발적으로 참석한다. 그리고 그룹들은 때때로 임시로 설계되어 그 깊이가 가정교회보다 얕다.

제도적 교회에서 소그룹들은 보통 주중에 만나게 함으로 토요일의 다른 교회모임들과 충돌되지 않게 한다. 따라서, 주중 소그룹 모임은 일반적으로 참석할 수 있는 사람들을 위해 시간상으로 두 시간 이상 진행할 수 없으며 집에 학생이 있거나 거리 적으로 먼 곳에 있는 사람은 다니기 어렵다.

제도적 교회에서 소그룹 사역을 추진할 때에도, 돈을 낭비하는 건물은 여전히 존재한다. 사실, 만일 소그룹 프로그램이 교인들을 증가시킨다면 더 많은 돈이 건물을 짓는데 낭비될 수 있다. 또한, 제도적 교회 내의 소그룹들은 적어도 한 명의 추가 유료 직원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더 많은 돈이 또 다른 교회 프로그램에 쓰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마도 최악의 상황은, 소그룹을 가진 제도적 교회 목사가 종종 개인적으로 제자를 삼는 일에 매우 제한받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많은 책임 때문에 너무 바쁜 삶을 살고 있으며, 일대일 제자 훈련을 할 시간이 거의 없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제자 훈련이라고는 소그룹 지도자들을 훈련시키는 것뿐이지만, 그것마저도 종종 한 달에 한 번씩 모이는 것으로 제한된다.

내 생각에는, 이 모든 것은 가정교회가 제자나 제자 삼는 자를 삼고 배가하는 데 있어서 더 성경적이고 효과적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나는 내 의견이 수백 년간의 교회 전통을 매우 빠르게 변경하기에는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제도적 교회 목사가 그들의 교회를 제자를 삼는 성경적인 모식으로 이동하기 위해 뭔가를 하기를 촉구한다.[6] 그들은 개인적으로 미래의 지도자들을 훈련시키거나 또는 소그룹사역을 다시 시작하는 것을 고려해볼 수 있다. 그들은 “초대교회 주일”을 개최하여 교회건물을 닫고 모든 사람이 처음 3세기 동안 그리스도인이 했던 것처럼 집에서 식사를 나누고 만나는 것을 시도해볼 수 있다.

자신의 교회에 소그룹이 있는 목사들은 일부 소그룹들을 풀어서 가정교회를 구성하고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지켜볼 수 있다. 만일 소그룹이 건전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목사/장로/감독들에 의해 인도될 때 그 소그룹들은 자체적으로 운영할 수 있게 된다. 그들은 부속되지 않은 젊은 교회보다 더 모교회를 필요로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을 풀어주는 것이 어떨까?[7] 회원들이 모 교회에 헌금하는 돈으로 가정교회의 목사를 지원할 수 있다.

내가 가정교회를 지지한다고 해서 제도적 교회에는 좋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일까? 절대 그렇지 않다. 제도적 교회에서도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제자가 양성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칭찬할 만 하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목표를 달성하는 데 있어서 그들의 관행과 구조들은 때론 도움보다는 방애가 될 수 있으며, 그들은 종종 목사의 살인범이다.

가정교회 모임에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가?(What Happens at a House Church Gathering?)

모든 가정교회들이 같게 구성되어야 할 필요는 없으며, 거기에는 다양성을 위한 많은 공간이 있다. 매 가정교회마다 자신의 문화적 사회적 차이를 반영하게 된다 –이것은 가정교회가 특히 기독교 문화와 전통이 없는 나라에서 전도에 매우 효과적일 수 있는 이유이다. 가정교회 회원들은 그들의 이웃들을 그들에게는 완전히 낯선 교회건물로 초대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완전히 낯선 의식에 참여시키지 않을 것이다. 이런 것들은 의사소통의 주요 장애물들이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의 이웃들을 그들의 친구들과 함께 식사에 초대한다.

일반적인 식사는 보통 가정교회의 주요 구성요소이다. 많은 가정교회들에서, 그 음식들은 주의 만찬이거나 그것을 포함하며, 각각의 가정교회는 어떻게 하면 그것이 가지는 영적인 의미를 가장 잘 드러낼 수 있을지를 결정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원래의 주의 만찬은 실제로 유월절 식사로 시작했으며 그 자체가 영적인 의미로 가득했다. 주의 만찬을 기념하는 것은 식사 식사의 일부로서 명백히 초대 교회 신자들이 모였을 때 가진 형식을 따른 것이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었다(행 2:42,46).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말 그대로 떡 덩어리를 떼고 함께 나누었는데 이것은 그들의 문화 속에서 거의 매 식사때마다 해왔던 것들이다. 식사하는 동안 떡을 떼는 것이 그리스도인에게 어떤 영적인 의미가 있을까? 성경에는 확실한 대답이 없다. 그러나 윌리엄 바클리는 그의 책, “주의 만찬”에서 “주의 만찬이 가족 식사거나 개인 집에서 친구와의 식사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하나의 작은 떡 조각과 한 모금의 포도주에 관한 생각은 원래의 주의 만찬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주의 만찬은 원래 집에서 친구들과 함께 하는 가족식사였다.” 놀라운 것은 모든 현대 성경학자들이 바클리에 관점에 동의함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여전히 이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전통을 따르고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분이 그들에게 명령하신 것을 그들의 제자들에게 가르치라고 명령하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떡을 먹고 포도주를 마실 때 그분을 기억하라고 명령하셨을 때 제자들도 그들의 제자들에게 똑같이 가르치기를 원하셨다. 일반적인 식사에서 주의 만찬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우리가 고린도 신자들에게 쓴 바울의 서신을 읽을 때 그것에 대해 확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여기서 그는 교회건물에서 모이는 것을 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교회건물이 없었기 때문이다)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함이라(고전 11:20-21, 강조 추가).

만일 주의 만찬이 현대 교회방식으로 진행된다면 바울의 말들은 엉터리가 아닌가? 당신은 혹시 현대 교회에서 누군가가 자신의 만찬을 먼저 먹으므로 인해 어떤 사람은 주의 만찬과 함께 취하였는데 어떤 사람은 시장함을 일으키는 문제에 대해 들어 본 적 있는가? 이런 말들은 오직 주의 만찬이 실제 식사와 함께 시행되었을 때에야 이해된다. 바울은 계속하여 썼다.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바울은 교회건물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인 사람들의 모임을 말하고 있음을 기억하라)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고전 11:22).

이런 일이 실제 식사과정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면 빈궁한 자들이 왜 부끄러워했겠는가? 바울은 그들의 모임 중에 먼저 도착한 고린도 신자 중 일부가 다른 사람들이 도착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자신의 만찬을 먹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일부 아마도 너무 가난하여 식사에서 같이 나눌 음식을 가져오지 못한 사람은 배고픔을 당할 뿐 아니라 그들이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았음이 너무 분명하게 드러나서 부끄러움을 당했을 것이다.

바로 이후, 바울은 “주께 받은”(고전 11:23) 성례인 주의 만찬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썼으며 첫 번째 주의 만찬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자세히 적었다(고전 11:24-25을 보라). 그 후 바울은 고린도 신자들에게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에 대해 경고하고, 스스로를 살피지 않는자는 실제로 자기들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며 허약함, 질병, 심지어 조기사망까지 일으킬 수 있다고 말했다(고전11:26-32을 보라).

그리고나서 그는 결론 지었다.

그런즉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 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판단 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전 11:33-34).

문맥상으로 보아서는 주의 만찬을 범한다는 것은 다른 신자들을 고려하지 않는 것이다. 바울은 다시 같이 나누었어야 할 식사임에도 자신의 만찬을 먼저 먹은 사람은 하나님께 심판(또는 훈계)을 받을 위험에 있다고 경고했다. 이 해결방법은 간단했다. 만일 한 사람이 다른 사람 기다릴 수 없을 정도로 시장하다면 그 모임에 오기 전에, 그는 뭔가를 먹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주의 만찬에 먼저 도착한 사람은 늦게 도착하는 사람들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전체 문맥을 봤을 때, 바울은 주의 만찬을 같이 나눈다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식으로 하여야 하며, 서로에게 대한 사랑과 배려가 반영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어떠 상황에서도, 초대 교회에서 성직자 없이 가정에서 일반적인 식사의 목적으로 주의 만찬을 연습했던 것이 분명하다. 왜 우리는 그렇게 못하고 있는가?

떡과 포도주(Bread and Wine)

주의 만찬의 구성 요소의 특성이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다. 만일 우리가 원래의 주의 만찬을 완벽하게 모방하려면, 우리는 떡의 정확한 재료와 원래의 포도주를 만드는 데 쓰인 포도의 정확한 종류를 알고 있어야 한다. (처음 몇 세기 동안 일부 교부들은 포도주를 반드시 물에 희석하여야 한다고 엄격하게 규정하였는데, 그렇지 않으면 성찬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떡과 포도주는 고대 유대인들 식사의 가장 일반적인 요소 중의 일부였다. 예수님은 거의 모든 사람이 날마다 먹는 매우 일반적인 두 가지 음식에 깊은 의미를 주셨다. 그분이 만일 역사의 다른 시간에 다른 문화를 방문했었다면, 첫 번째 주의 만찬은 치즈, 염소 젖, 또는 쌀 케이크, 파인애플 주스로 구성되었을 수도 있다. 따라서 그분이 제자들과 함께 나눴던 식사의 모든 음식과 음료는 잠재적으로 그분의 몸과 피를 나타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영적 의미이다. 우리가 율법을 문자적으로 잘 지키는 동시에 율법의 영적인 의미를 무시하지 말자.

사람들이 일반적인 식사를 할 때 꼭 엄숙해야 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이미 읽은 바와 같이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었다”(행 2:46). 그러나 예수님의 희생을 기억하며 식사를 하는 동안에는 반드시 진지하여야 할 것이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1:17-34에서 엄숙하게 지적했듯이 주의 만찬을 먹기 전에는 자기를 살피는 것은 항상 절절하다. 서로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징계를 자초한다. 모든 다툼과 분열은 식사하기 전에 해결하여야 한다. 모든 신자는 자기를 살피고 모든 죄를 자백하여야 하는 데 이것이 바로 바울이 말한 “자기를 살피라”라는 뜻일 것이다.

성령님은 지체를 통하여 나타나신다(The Spirit Manifested Through the Body)

일반적인 식사는 예배와 가르침과 성령의 은사들을 나누는 모임 전이나 후에 진행할 수 있다. 각각의 가정교회마다 진행형식을 결정할 수 있으며, 그 형식은 같은 가정교회에서도 모임마다 다를 수 있다.

성경을 보면 초대 교회의 모임이 현대 제도적 교회의 예배와 매우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특히, 고린도전서 11장부터 14장까지 초기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모였는지에 대해 우리에게 풍부한 통찰력을 주고 있으며, 오늘날 우리가 그 같은 형식은 따를 수 없거나 따르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할 이유가 없다. 그리고 바울이 기술한 초대 교회 모임에서 일어난 일은 오직 소그룹 모임에서만 일어날 수 있음이 분명하다. 바울이 형용한 모임들은 큰 모임에서 일어날 수 없다.

나는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기술한 네 장절의 내용을 모두 이해하지 못함을 먼저 인정한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1장부터14장에서 묘사된 모임의 가장 뛰어난 특징은 그들 중에 함께 하신 성령님의 임재하심과 그분이 제체들을 통해 자신을 나태내셨다는 것이다. 그분은 그분의 몸을 세우는 모든 지체들에게 은사를 주셨다.

바울은 적어도 아홉 가지 성령의 은사들을 나열하였다. 예언, 방언, 방언의 통역, 지식의 말씀, 지혜의 말씀, 영적 분별력, 병 고치는 은사, 믿음, 그리고 능력 행함. 바울은 이 모든 은사가 모임을 할 때마다 나타난다고 하지 않았지만, 그 은사들이 나타날 가능성을 암시하고 있었으며, 고린도전서 14:26에서는 자주 나타나는 성령의 역사에 대해 요약한 것 같다.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먼저 이 다섯 가지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은사들을 살펴보고, 다음 장에서 고린도전서 12:8-10에 나와 있는 성령의 아홉 가지 은사들을 더 철저하게 고려해 보자.

목록 중 첫 번째 은사는 찬송시다. 바울은 다른 두 서신서에서도 성령님이 주신 찬송시가 교회 모임에서의 갖는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엡 5:18-19).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골 3:16).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의 차이는 불분명하지만, 요점은 그것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말씀에 근거한 것이며,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이며, 서로 가르치고 권면하기 위해 신자들에 의해 불려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신자들이 교회 역사 속에서 신자들에 의해 불린 많은 찬송가와 노래들은 이 세 가지 종류중의 하나에 해당한다. 불행하게도, 너무 많은 현대의 찬양과 노래들은 성경적인 깊이가 빠졌으며 성령님이 주신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너무 얕으므로 신자들을 가르치고 권면할만한 가치가 없다. 그럼에도 가정교회에 모인 신자들은 성령님이 개개인한테 영감을 주어 과거와 현재에 잘 알려진 기독교 노래들을 인도할 뿐 아니라 일반적으로 덕을 세우는 데 활용될 수 있게끔 구성원 중의 일부에게 특별한 노래를 제공해주기를 기대한다. 교회가 성령님이 주신 자기만의 노래를 갖는다는 것은 얼마나 특별한 일인가!

가르침 (Teaching)

바울의 목록 중 두 번째는 가르침이다. 이는 다시 한 번 모임 중에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은 아무나 가르칠 수 있음을 나타낸다. 물론, 모든 가르침은 그것이 사도들의 가르침에 맞는지에 따라 판단되어야 하며(왜냐하면, 그들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이다: 행 2:42을 보라), 오늘날 우리도 똑같이 하여야 한다. 그러나 신약 성경 어디에도 지역교회 모임에서 매주 같은 사람이 설교해야 하고 모임을 지배해야 한다는 말씀이 없다는 것을 주의하라.

예수살렘에서는 사도들은 큰 모임은 사원에서 가르쳤다. 우리는 장로들도 교회에서 가르침의 책임이 주어졌고 그들 중 일부는 교육사역에 부르심을 받았음을 알고 있다. 바울은 공개적으로 또는 집집마다 다니면서 많은 사람을 가르쳤다(행 20:20을 보라). 그러나 신자들의 작은 모임에서 성령님은 사도, 장로나 교사 외의 사람들을 사용하여 가르치게 할 수도 있다.

가르침에 있어서, 우리가 모임에 개인 성경사본 가지고 다닐 수 있으므로 초대 교회 때보다 훨씬 우세가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반면에, 아마도 성경에 대한 우리의 접근이 쉬움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의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것보다 교리를 더 우선시하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려는 생명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우리는 죽음으로 교리화 되어가고 있다. 많은 소그룹 성경 공부는 주일 아침 설교처럼 삶과는 관련이 없이 지루하기만 하다. 가정교회의 가르침을 따르는 다음과 같은 좋은 규칙이 있다. 큰 아이들이 지루함을 숨기지 않는다면, 어른들은 아마도 그들의 지루함을 숨기고 있을 것이다. 아이들은 아주 좋은 진리의 지침이다.

계시(Revelation)

세 번째로 바울은 “계시”를 나열하였다. 그것은 예수님의 몸의 일부 지체들에게 하나님이 드러내신 무언가를 의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바울은 특별히 불신자가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을 들어왔을 때 예언의 은사로 그들의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된다고 하였다. 그 결과로 그는 “책망을 들으며, 판단을 받을 것이며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신다 전파할 것이다”(고전 14:24-25).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성령님의 실제 임재가 교회 모임의 예상 기능이며 그런 초자연적인 일은 예수님의 임재로 발생함을 알 수 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라는 예수님의 약속을 믿었다. 만일 예수님 자신이 그들 중에 있다면, 기적은 일어날 수 있다. 그들은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였다”(빌 3:3).

어떤 경우라도, 예언은, 그것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곧 말하겠지만, 사람들의 마음에 대한 계시를 포함하고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계시는 다른 것들에 관한 것일 수 있고 다른 것을 통해 받을 수 있다. 예를 들어 꿈이나 비전을 통해 계시를 받을 수 있다(행2:17 을 보라).

방언과 통역(Tongues and Interpretation)

넷째로, 바울은 함께 사용되는 은사인 방언과 통역을 나열했다. 고린도 교회에서는 방언이 과도하게 사용되고 또 남용되는 현상이 있었다. 즉, 사람은 교회 모임 중에 방언을 말하지만 통역하는 사람이 없으므로 아무도 방언의 내용을 알 수가 없었다. 이 일은 어쩌면 사람들에게 통역의 은사를 주지 않은 채 방언의 은사만 주신 성령님의 잘못으로 보일 수 있고 고린도 교회는 왜 비난받아야 하는지 궁금해할 수 있다. 나는 이 질문에 대한 만족스러운 대답을 나중에 다시 다룰 것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바울은 방언을 금지한 적은 없었다(많은 제도적 교회에서는 금지하고 있지 않는 것처럼). 오히려, 그는 방언을 금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주님의 계명이었다고 선언하였다(고전14:37-39을 보라)![8] 그것은 제대로 사용되기만 하면, 교회의 덕을 세우고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임재를 확정할 수 있는 하나의 은사가 된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분의 진리와 그분의 의지를 사람들을 통해 말씀하시는 것이다.

제14장에서 바울은 예언이 통역되지 않은 방언보다 나음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는 고린도 신자들이 예언하기를 소망하도록 강력히 권장하였는데, 이것은 성령의 은사는 그것을 원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드러날 가능성이 더 큼을 나타낸다. 마찬가지로, 바울은 데살로니가 신자들에게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살전 5:19)라고 권면하였다. 이는 신자들의 예언 은사에 대한 잘못된 태도는 성령의 감동을 “소멸”할 수 있음을 나타낸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오늘날 대부분의 신자 사이에서 예언의 은사는 아주 드물게 나타난다.

어떻게 시작할까?(How to Start)

가정교회는 가정교회 개척자 또는 하나님이 주신 가정교회에 대한 비전을 받은 장로/목사/감독들에 의해 시작된다. 성경적인 장로/목사/감독은 제도적 교회가 말하는 성숙한 평신도를 말할 수 있음을 명심하라. 가정교회 개척자는 정식적인 사역교육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성령님에 의해 가정교회의 비전을 받은 개척자는 누구와 함께 동역해야 할지를 주님께 간구해야 한다. 주님은 그를 비슷한 비전을 가진 사람들과 만나게 하며, 그분이 인도하고 계심을 확인시켜 주신다. 또는 주님은 그에게 믿음을 가질 불신자들을 붙여주셔서 그들이 가정교회에서 제자로 훈련받게 할 수도 있다.

금방 가정교회를 시작하는 사람은 서로 편하게 느끼고, 성령님과 관계를 갖고 그분의 인도를 따르는 것을 배우기 위해서는 시간을 들여야 함을 예상해야 한다. 이 길을 따라가다 보면 많은 시행착오가 겪을 것이다. 모든 성원이 동참해야 한다는 개념, 성경적인 섬김의 지도력, 장로들을 장비하고, 성령님의 인도와 은사, 함께 식사를 나누는 것, 편하면서도 영적인 분위기 등 이런 것들은 제도적 교회에만 익숙해 있던 사람들에게는 매우 생소할 것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가정교회가 개척할 때에는 은혜와 인내로 하는 것이 지혜롭다. 처음 시작할 때 형식은 한 사람이 예배를 인도하고, 또 다른 사람이 준비한 말씀을 가르친후에 함께 기도하고, 교제하고 식사하는 것으로 마칠수 있다. 하지만 가정교회의 성경적인 진행방식은 매 개인에 의해 부단히 연구되어야 하며 장로/ 목사/감독들은 회원들이 하나님께 최선을 다하도록 격려해야 하며 그 과정을 즐겨야 할 것이다.

가정교회 모임은 매주 한 회원의 집에서 다른 회원의 집으로 바꿔가며 진행하거나, 한 사람이 매주 자기 집을 모임장소로 열수 있다. 날씨가 화창할 때에는 어떤 가정교회들은 가끔 아름다운 야외장소로 이동한다. 모임 시간과 장소는 반드시 주일 아침이어야 할 필요가 없으며, 구성원들의 시간에 맞출 수 있다. 마지막으로, 가정교회는 열두 명의 회원을 초과하지 않게, 작게 시작하는 것이 가장 좋다.

어떻게 제도적 교회를 가정교회로 전환할 수 있을까?(How to Transition from Institution to House Church)

이 책을 읽는 대부분 목사들은 제도적 교회에 소속되어 있을 것이며, 아마 당신도 그중의 한 명일 것이다. 내가 설명한 교회의 종류가 당신이 바라던 교회의 모습이라면, 당신은 이미 어떻게 하면 전환할 수 있는지를 궁금할 것이다. 서두를 필요가 없다. 기존의 구조와 틀 안에서 성경적인 진리만 가르치고, 예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제자를 만들기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일을 시작하라. 진정한 제자들은 그들이 일단 이해만 되면 성경적인 교회구조로 전환하고 싶어할 것이다. 염소와 종교적인 사람은 이러한 전환을 거부할 가능성이 훨씬 더 많다.

둘째로, 이 주제에 대한 성경 말씀을 공부하고 가정교회 구조와 그것이 가진 축복에 대해 회중에게 가르친다. 당신은 성숙한 신자들의 감독하에 가정집에서 매주 셀 모임을 시작하기 위해 평일이나 주일 저녁 예배를 취소할 수 있다. 그리고 모두사람이 참석하도록 권장하라. 점차적으로 이런 모임들이 가능한 한 가정교회의 성경적인 모식을 따르도록 하여야 한다. 그런 다음, 사람들로 하여금 소그룹이 주는 축복을 만끽할 수 있도록 시간을 들인다.

모든 사람이 가정교회 모임을 즐기게 되면 다음 달의 어느 한 주일날을 택하여 “초대 교회의 주일”로 정할 수 있다. 그 주일날에는, 교회 건물을 닫고, 모든 사람은 가정집으로 가서 초대교회가 했던 것처럼 모임을 하고, 함께 식사를 나누고, 주의 만찬, 교제, 기도, 예배, 가르침과 성령의 은사들을 즐길 수 있다. 만일 그것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면, 이런 모임들을 한 달에 한 번씩 가질 수 있으며, 점차 두 번, 세 번씩 가질 수 있다. 결국, 당신은 모든 그룹을 독립적인 가정교회로 풀어주며 몇 달에 한 번씩 함께 모여 연합예배를 드릴 수 있다.

내가 설명한 이 모든 전환 과정은 1-2년의 세월이 걸릴 수 있다.

당신이 더 조심스럽게 진해하려면, 자신이 인도하는 가정교회에 대해 가장 관심이 있는 몇 명 회원들과 함께 하나의 모임부터 시작할 수 있다(다시 반복하지만, 가정교회는 주일 아침에 모일 필요가 없다). 그것은 실험적으로 진행될 수 있으며 모두에게 좋은 학습경험이 될 것이다.

만일 그것이 성공하면 그 그룹에 감독을 임명하며 독립적인 교회로 풀어주며 한 달에 한 번씩만 제도적 주일예배에 참석하게끔 한다. 이렇게 하면 새로운 교회가 아직도 모교회의 한 부분으로 되어 있기에 여전히 제도적 교회에 소속된 회중들에게 부정적인 인상을 주지 않을 수 있다. 또한, 회중들로 하여금 제도적 교회가 개척하는 다른 가정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을 고려할 수 있게끔 영향 주는데 도움이 된다.

만일 첫 번째 그룹이 성장하면, 기도하면서 그것을 두 그룹으로 나눠 두 그룹 모두 좋은 지도자들과 충분한 은사가 있는 회원들로 구성되게 할 수 있다. 두 그룹은 달마다 혹은 3개월에 한 번씩 큰 행사에 함께 모일 수 있도록 합의할 수 있다.

당신이 어떠한 방식을 택하든지 목표에서 눈을 떼지 말고 실망하지 말라. 가정교회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람은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절대 포기하지 말라.

제도적 교회의 모든 회중이 이러한 전환을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당신은 개인적으로 언제쯤 제도적 교회를 떠나 가정교회에 자신을 완전히 헌신하기 시작해야 할지를 결정해야 한다. 그날은 당신에게 있어서 뜻깊은 날이 될 것이다!

이상적인 교회(The Ideal Church)

하나님 보시기에 가정교회의 목사가 실제로 거대한 건물과 주일마다 수많은 참석자를 거느리는 대형교회의 목사보다 더 성공적일까? 그렇다, 만일 그가 일주일에 한 번씩 쇼를 감상하고 문맥을 무시한 몇 구절 성경 말씀으로 거룩해 보이고 재미를 선사하는 설교를 듣는 단순한 영적인 염소가 아니라, 예수님을 따라 순종하는 제자들과 제자 삼는 자들을 배가시키고 있다면 말이다.

가정교회 모식을 따르기로 한 목사는 자기만의 많은 회중을 거느릴 수 없다. 그러나 긴 안목으로 보면, 그는 자기의 제자가 또 제자를 삼으므로 말미암아 많은 지속적인 열매를 맺을 수 있다. 40명에서 50명의 “적은” 회중들을 거느리면서 더 많은 무리를 얻고자 애쓰고 있는 목사들은 생각을 바꿔야 한다. 그들의 교회는 이미 너무 커져 있을 수 있다. 아마도 그들은 더 큰 건물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멈추고 두 개의 새로운 가정교회를 이끌 수 있는 사람들을 세워달라는 기도를 시작해야 할 것이다. (제발, 그렇게 되면, 새로운 교파를 만들거나 자신을 그 교회의 “주교”라고 칭하지 말기를 바란다!)

우리는 교회는 클수록 좋다는 생각을 근절해야 한다. 우리가 성경을 기준으로 순수하게 판단했을 경우, 특별한 건물 안에서 모이는 수백 명의 제자가 아닌 관객으로 구성된 하나의 교회는 매우 이상하다고 여겨질 것이다. 초대 사도 중 누구라도 현대 제도적 교회를 방문하면 머리를 긁적이게 될 것이다!

마지막 반대 이유(A Final Objection)

사람은 종종 기독교가 이미 문화의 한 부분이 된 서양 세계에서 집에서 만나는 교회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우리는 반드시 제도적 모식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먼저, 가정교회 운동이 서양 세계에서 급속한 추진력을 얻는 것으로 봐서는 그런 관점이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둘째, 사람은 이미 기꺼이 집에서 파티를 열고, 식사를 나누고, 교제하고, 성경공부와 셀 모임을 하기를 원한다. 조금만 생각을 조정하면 가정교회모식을 받아들일 수 있다.

셋째, 종교적인 사람들 즉 “영적 염소들”은 가정교회의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으리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들은 그들의 이웃들에게 이상하게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제자들은 그들이 일단 성경적인 기준을 이해하기만 하면 가정교회의 개념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그들은 인츰 교회 건물들이 불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할 것이다. 만일 당신이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고전 3:12) 큰 교회를 세우려면, 당신은 건물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 날에 이 모든 것은 다 타버릴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제자들과 제자를 삼는 자들을 배가시키려 하고 “금이나, 은이나, 보석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려 한다면, 건물에 돈과 정력을 낭비하지 않아도 된다.

오늘날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원주민 복음 전도운동인, 중국 가정교회의 “백투 예루살렘” 운동이 10/40 창을 전도한다는 특정 전략을 세웠다는 사실은 아주 흥미롭다. 그들은 “우리는 어디에도 교회 건물을 세울 생각이 없다! 이렇게 함으로 복음이 빠르게 전파될 수 있으며, 당국이 감지하는 데 어려움을 주며, 그리고 우리가 복음 사역에 우리의 모든 자원을 직접 사용할 수 있게끔 해준다.”[9] 이것은 실로 우리가 따라야 할 지혜롭고 성경적인 모범이다.

 


[1] www.shepherdserve.org싸이트의 홈 페이지에서 Biblical Topics목록아래의 “Jesus on Money” 를 보라.

[2]비록 이것이 급진적으로 들리지 모르겠지만, 교회 건물이 필요한 진짜 이유는 작은 가정교회를 감독할 지도자가 결핍하기 때문이다. 이는 제도적 교회 내에서 잠재적인 지도자에 대한 제자 훈련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결과이다. 큰 제도적 교회의 목사들이 실제로 그들의 회중들 가운데 하나님께 목사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의 정당한 사역의 권리를 박탈하는 죄를 범하고 있지는 않을까? 그렇다.

[3]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삼은 성경적인 모델과 모세가 십부장을 삼아 백성들을 재판한 모델(출 18:25을 보라)에 비추어 보면 일 대 십 또는 일 대 이십의 비율을 지나치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대부분의 제도적 교회의 목사들은 그들 자신이 효과적으로 제자 삼을 수 있는 인수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을 감독하고 있다.

[4]우리는 성경에서 왜 “담임목사”, “협동목사” 또는 “부목사”에 대한 언급이 없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 할 수도 있다. 현대교회에 있어서 구조때문에 매우 중요하게 여겨지는 이런 직함들은 초대 교회에서는 구조때문에 필요 없었다. 이십명 규모의 가정교회는 담임목사, 협동목사, 부목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5]비록 많은 목사들이 그리스도의 종들을 보살피도록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지만, 훌륭한 연설자는 되지 못했다. 사실, 사람들이 목사들의 많은 설교가 지루하다고 말하거나, 적어도 때론 지루하다고 말하는 것이 너무 가혹한 것일까? 한 교회 비평가는 회중들이 집중하지 못하는 것은 아주 보편적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이런 지루했던 연설자도 종종 아주 좋은 대화 상대가 되며, 사람들이 그들과 대화할 때에는 지루함을 거의 느끼지 못한다. 그것이 바로 가정교회에서의 대화형 가르침이 항상 흥미로운 이유이다. 이런 시간은 빨리 흐르는데, 이것은 교회에서 설교하는 동안 손목시계에서 왔다갔다하는 눈짓과 대조를 이룬다. 가정교회 목사들은 사람들이 지루해할까봐 걱정할 필요가 없다.

[6]미친 짓에 대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정의중 하나는 바로 반복적으로 같은 일을 하면서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것이다. 목사들이 모든 사람들의 제자 삼는 것에 관한 책임에 대해 수 년동안 가르칠 수 있지만, 그들이 교회의 형식이나 구조를 개변하지 않는 한, 사람들은 계속해서 교회당에 와서 앉아서 듣기만 하다가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목사들이여, 만일 당신이 과거에 사람을 개변시키지 못한 일을 계속해서 한다면, 그것은 앞으로도 사람들을 변화시키지 못할 것이다. 당신이 하고 있는 일부터 변화하라!

[7]물론, 많은 목사들이 이 생각을 반대하는 주된 이유가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아닌 자신의 왕국을 짓고 있기 때문이다.

[8]물론, 나는 어떤 사람들은 성령님의 모든 초자연적인 나타나심은 첫 세기에만 한정되며 그 시점에서 멈췄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따라서, 그들에 의하면 우리는 초대 교회가 경험 한 것을 추구 할 이유가 없고,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더는 유효하지 않게 된다. 나는 현대의 사두개인과 같은 그런 사람들에 대해 약간의 동정심이 생긴다. 나의 한 일본인 친구는 내가 일본어를 배운 적이 없지만 몇 번이나 일본어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나는 이런 은사들이 성령님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중단되지 않았음을 알고 있다. 나는 또한 이런 사두개인들이 왜 성령님이 여전히 죄인들을 부르시고 그들이 죄를 깨닫고 거듭나게 하신다는 주장은 유지하면서 성령님의 그런 기적들 이상의 역사는 부정하는 지 궁금하다. 이런 종류의 “신학”은 인간의 불신앙과 불순종의 산물이며 성경적인 근거가 없으며 실제로 그리스도의 목표를 위배한다. 이것은 바울이 고린도전서 14:37에 쓴 내용에 따르면, 이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직접적인 불순종이다.

[9] Brother Yun, Back to Jerusalem, p.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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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성장 (Church Growth)

제 5 장 (Chapter Five)

당신이 목사라면 당연히 자신의 교회가 성장하기를 원할 것이다. 그것은 목회자들 사이에서 매우 일반적인 욕망이다. 하지만 당신은 왜 당신의 교회가 성장하기를 원하는가? 마음속의 진정한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당신은 교회가 성장함으로 성취감을 느끼고 싶어서인가? 당신은 존경받고 싶고 영향력 있다고 느끼고 싶어서인가? 당신은 사람들을 지배하고 싶어서인가? 당신은 돈을 벌고 싶어서인가? 그것들은 모두 교회를 성장시키려는 잘못된 동기들이다.

만일 당신은 교회가 성장하여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성령님에 의해 변화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기만을 원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교회성장을 바라는 올바른 이유이다.

우리는 우리의 동기가 실제로는 이기적이나, 순수한 것처럼 생각할 때 우리 자신을 속일 수 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우리의 진정한 동기를 알 수 있을까?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려는 것인지 아니면 우리 자신의 왕국을 지으려는 것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한 가지 방법은 다른 목회자들의 성공에 대한 우리 내면의 반응을 보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동기가 순수하다고 생각하고, 진심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고 그분의 교회가 성장하는 것을 원하는데도 다른 교회의 성장을 들었을 때에 우리 마음속에 있는 시기나 질투를 발견한다면, 우리의 동기가 순수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우리가 진정으로 교회성장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교회성장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면 왜서 그럴까? 그것은 우리의 동기가 적어도 부분적으로 이기적이기기 때문이다.

우리는 또한 우리 지역에서 새로운 교회가 개척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였을 때 우리 내면의 반응을 보면서 우리의 동기를 확인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위협을 느낀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보다 우리 자신의 왕국에 대해 더 관심이 있다는 표시이다.

대형 교회거나 성장하고 있는 교회의 목회자들도 이 같은 방법으로 자신의 동기를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목회자들은 또한 자신에게 이 같은 질문을 해볼 수 있다. “나는 나의 교회가 작아질지라도 회중들 가운데서 주요 지도자들을 파견하여 새로운 교회를 개척하려고 생각해 본 적 있는가?” 이런 생각을 거부하는 목사들은 자신의 영광을 위해 자신의 교회를 구축할 가능성이 많다. (반면에, 대형 교회의 목사도 새로운 교회를 개척할 수 있다. 다만, 그것을 통해 자신의 교회에서 얼마나 많은 교회를 세웠는지 자랑하기 위해서일 수 있다.) 자신한테 할 수 있는 또 다른 질문은 “나는 작은 교회의 목회자들과 교제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들과 거리를 두려 하고 자신이 그들보다 우월하다고 느끼는가?” 또는 “나는 불과12~20명밖에 안 모이는 가정교회에서 목회할 의향이 있는가? 아니면 그것은 내 자존심을 너무 상하게 하는 것인가?”[1]

교회성장 운동(The Church Growth Movement)

미국과 캐나다 전역 기독교 서점에는, 교회성장에 관한 책들이 전반 선반을 가득 채울 정도로 많이 진열되어 있다. 이런 책들과 그 책들의 내용은 전 세계에 퍼져가고 있다. 목사들은 교회의 출석을 높이는 방법을 알아내기 위해 갈급해 있으며, 그들은 종종 교회건물의 크기와 주일예배에 참석하는 사람들의 숫자로 보기에 성공적이라고 간주되는 미국의 대형교회 목사들의 조언을 채택하기에 급급하다.

그러나 좀 더 분별력이 있는 사람들은 출석인수와 건물 크기는 제자 삼는 사역의 질을 나타내는데 필수적이지 않음을 알고 있다. 일부 미국 교회들은 성경적인 진리를 왜곡하는 매력적인 교회로 말미암아 성장해 왔다. 나는 전 세계 많은 목사들과 대화하는 가운데 그들이 한 번 구원받은 사람은 그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무엇을 믿고 어떻게 살든지 관계없다고 선언하는 수많은 미국 목회자들에 의해 충격받았다고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많은 미국 목회자들은 저렴한 은혜의 복음을 주장하며 사람들이 거룩함없이도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꽤 많은 목사들은 번영신학을 주장하여 신앙을 이 땅에 더 많은 재물을 쌓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탐욕만 부추긴다. 그런 목사들의 교회성장 기술은 절대로 모방애서는 안될 것이다.

나도 교회성장의 주제에 대한 책들을 읽어보았는데 그들에 대한 내 느낌은 혼잡스럽다. 많은 책의 전략들과 조언들은 어느 정도, 그리고 성경적이어서 읽을만한 가치가 있었다. 하지만, 거의 모든 것들은, 성경적인 교회모식이 아닌, 1,700년의 역사를 가진 제도적 교회 모식을 기반으로 한다. 따라서, 제자와 제자 삼는 자들을 배가시켜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가는 것이 아닌, 항상 큰 건물, 더욱 전문적인 교회의 직원들과 프로그램을 수요하는 개별적인 제도적 교회를 세우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며 그 구조는 가족보다는 기업에 더 가깝다.

일부 현대적인 교회성장 전략은 숫자상으로 커지기 위해서는 교회 활동은 예수님을 따르려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더 매력적으로 만들어져야 한다고 한다. 그들은 설교는 짧고, 긍정적이어야만 하고, 예배는 유형무실해야 하며, 많은 사회 활동을 벌리고, 돈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말아야 한다는 등의 조언을 하고 있다. 이런것을 통하여 자기를 부인하고 모든 그리스도의 계명에 순종하는 제자를 삼을수가 없다. 그것들은 세상에서 구별되지 않는, 지옥으로 향한 넓은 길에 있는 자칭 그리스도인들만 만들어 낸다. 이것은 세상을 이기려는 하나님의 전략 아니라 교회를 이기려는 사탄의 전략이다. 이것은 “교회성장”이 아닌 더욱 “세속화” 되는 것이다.

구도자 맞춤형 모식(The Seeker-Sensitive Model)

가장 인기 있는 미국의 교회성장 전략은 종종 “구도자 맞춤형” 모식으로 알려져 있다. 이 전략에 의하면 주일 아침 예배는 (1) 그리스도인들이 구원받지 못한 친구들을 초대하는 것을 편하게 느낄 수 있게끔 설계되어야 하고, 그리고 (2) 복음을 전할 때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의 비위를 거스르지 말아야 하고, 그들이 이해할 수 있고 또 관계있다고 느끼게끔 해야 한다. 주중 예배와 소그룹 모임들은 신자들을 제자훈련 시키기 위해 마련되어야 한다.

이 방법으로, 일부 개별 교회들은 매우 큰 성장을 이루었다. 미국의 제도적 교회들 중에서, 이런 교회들은 모든 사람이 소그룹모임에 소속되어 있고(종종 그렇지 않다) 제자훈련을 받는다면, 그리고 복음이 타협되지 않는다면(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으려는 것이 목표가 될 때에는 항상 복음과 타협하게 된다. 왜냐하면 진정한 복음은 인간의 자부심을 공격하기 때문이다) 전도하고 제자를 삼음에 있어서 가장 큰 잠재력이 있다. 적어도 구도자 맞춤형 교회들은 대부분의 제도적 교회들에서 갖지 못한,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나아가기 위한 전략들을 실천해가고 있다.

하지만 교회성장에 있어서 미국의 구도자 맞춤형 교회모식은 성경적인 모식과 비교할 때 어떻게 다른가?

사도행전에서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사도들과 복음 전도자들은 공개적으로 복음을 전파하고, 집집마다 다니면서 전파하였는데 가는 곳마다 표적과 이적이 함께 있었는데 이것은 불신자들의 주의를 끌었었다. 회개하고 주 예수를 믿은 사람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에 전념하고, 정기적으로 집에 모여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영적인 은사들을 행하고, 주의 만찬을 기념하고, 함께 기도하였는데 모두 장로/목사/감독들의 인도하에 있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교사들과 선지자들은 교회들을 돌아다녔었고, 모든 사람들은 친구들과 이웃들에게 복음을 나눴다. 교회의 성장을 늦추고, 복음을 전파하고 제자를 삼는 데 쓰일 수 있는 하나님 나라의 자원을 빼앗는 건물은 어디에서도 짓지 않았다. 지도자들은 신학원에 보내지지 않아도 재직 중에 훈련받을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은 빠른시간내에 해당 지역의 모든 구도자들에게 복음을 전파되기까지 급속한 교회성장을 이루었다.

비교해보면, 구도자 맞춤형 모식은 일반적으로 표적과 이적을 동반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것은 신적인 전파방식, 흡인력과 확신이 결여되었다. 그것은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건물에 사람들을 유치하기 위해 자연적인 방식인 홍보 및 광고에 크게 의존한다. 설교자의 웅변 기술과 설득력은 사람들이 결단할 수 있는 관건적인 수단이 되었다. 이것은 바울의 방법과는 어떻게 다른지 보자 바울은 이렇게 썼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4-5).

더 많은 차이점들 (More Differences)

구도자 맞춤형 모식은 일반적으로 사도들과 복음 전도자들이 없는데 그것은 목사가 주체이기 때문이다. 이런 질문을 생각해보자. “사도들과 복음 전도자들을 복음전파의 역할에서 제거하고 목회자에게 그 책임을 부여하는 것이 교회성장을 이루는데 있어서 과연 더 좋은 방식일까?”[2]

구도자 맞춤형 목사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교회로 인도하도록 격려하는 교회에서 매주 한 번씩 설교한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보아서는, 교회 속의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일주일에 복음을 한 번밖에 들을 수가 없다. 이러한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교회에 오기를 원해야 하고 또한 그들은 그들을 교회로 초대할 의향이 있는 교인들에 의해 초대받아야 한다. 성경적인 모식에서는, 사도들과 복음 전도자들은 공중장소에 및 개인적인 장소에서 지속적으로 복음을 선포하고, 모든 신자들은 자신의 친구들과 이웃 사람들과 복음에 대해 나눈다. 이 두 가지 모식중, 어느 모식을 통하면 더 많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복음을 들을 수 있을까?

구도자 맞춤형 모식은 신자들이 자신의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초대하기에 부끄럽지 않을 만큼, 그리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방문하기에 부끄럽지 않을 만큼의, 수락할만한 교회건물을 필요로 한다. 이것은 항상 상당한 액수의 돈을 필요로 한다. 복음이 “전파”되기 전에 수락할만한 건물을 반드시 취득하거나 또는 건설해야 한다. 미국에서 그 건물은 반드시 부유한 교외의 좋은 위치에 있어야 한다. 대조적으로, 성경적인 모식은 특별한 건물, 특수 지역이나 돈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복음 전파는 주일날 특별한 건물이 용납할 수 있는 사람 인수에 제한되지 않는다.

아직도 더 많은 차이점들(Still More Differences)

일부 구도자 맞춤형 교회들을 성경적인 모식들과 비교해보면, 심지어 더 많은 차이점들이 있다.

사도행전에서 사도들과 복음 전도자들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주 예수를 믿고 즉시 세례를 받도록 했다. 그들은 회심과 함께 예수님이 누가복음 14:26-33과 요한복음 8:31-32에서 말씀하신 제자의 조건을 만족시키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것을 예상했다. 그들은 예수님을 굉장히 사랑하기 시작했고, 그분의 말씀안에 거하였고, 그들의 십자가를 졌으며, 그들의 모든 소유를 포기하였으며 하나님께 속한 새로운 청지기가 되었다.

구도자 맞춤형 교회에서 자주 선포되는 복음은 다르다. 죄인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분이 어떻게 그들이 느끼는 필요를 충족시켜 주시는지, 그리고 어떻게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임므로써” 구원을 받는지에 대해 듣게 된다. 그들이 짧게 “영접기도”를 한 후에는, 제자로서 치러야 할 대가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으며, 그들은 종종 자기들이 진정으로 구원받았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하기 시작할 수 있는 단계를 밟았다고 확신한다. 만일 그들이 진짜 이런 단계에 가입한다면(많은 사람들은 교회에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계명에 더 순종하는데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종종 교회의 특정 교리에 관해 더 많은 지식을 얻는 것에 초점을 두고 체계적인 학습 과정을 밟는다. 이런 “제자훈련”프로그램의 절정은 신자가 결과적으로 교회에 자신의 소득의 십 분의 일을 바치기 시작할 때이며(헌금은 주요하게 은행 대부금 및 비 성경적인 직원들의 급여를 지급하고, 하나님이 정하지 않은 많은 일들을 지원하고, 하나님이 정작 지원하시고자 하는 일들은 박탈하면서 청지기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 그가 제도적 교회에서 성경에서는 한 번도 언급한적이 없는 일부 지원 역할을 감당하기 시작하면서 그가 “자신의 사역을 발견”했다고 믿게 될 때이다.

만일 당신의 나라에서 군대에 입대하려는 사람이 충분하지 않음으로 인해 우려하고 있을 때 정부에서 “구도자 맞춤형”방식으로 대처하기로 결정한다면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 정부가 만약 누구든지 참군 하기만 하면 그들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한다고 상상해보라 – 그들의 봉급은 공짜 선물이고, 노력 없이 받은 것이고, 공이 없이 받은 것이다. 그들은 매일 아침 자신이 원할 때 아무 때나 일어날 수 있다. 그들은 군사훈련에 참가할 수도 있지만, 원한다면 텔레비전을 시청할 수도 있다. 만일 전쟁이 발발하면, 그 전투에 참여하거나, 원한다면 해변에 갈 수도 있다. 이렇게 한다면 어떤 결과를 맞이할까?

의심의 여지가 없이 군대의 인수는 급격히 늘어날 것이다. 그러나 군대는 더 이상 군대가 아니며, 그 사명에 적합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구도자 맞춤형 교회들이 맞이할 결과이다. 기준을 낮추면 주일 출석률을 높일 수는 있지만, 제자도와 순종은 좀 먹을 것이다. 구도자 맞춤형 교회들은 주일에는 “복음을 전파”하고 주중에는 “제자훈련”을 시키려고 시도하지만, 주중 모임에서 예수님의 제자들만 천국에 갈 수 있다고 가르친다면 그들은 한가지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바로 사람들은 주일 오전 예배에서 기편 당한 것처럼 느낄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교회들은 주중 모임의 사람들도 반드시 속여야 하는데, 바로 제자도와 순종은 천국에 가는 요구조건보다는 선택사항일 뿐이라고 말이다.[3]

나는 일부 제도적 교회에서 다른 제도적 교회와 달리 성경적인 모식의 측면을 통합하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다. 하지만 그에 관계없이, 성경적인 모식은 제자들과 제자 삼는 자들을 배가시키는 데 있어서 가장 효과적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럼 왜 오늘날에는 성경적인 모식을 따르지 않을까? 그에 대한 변명은 끝이 없지만, 최종적으로 분석해보면 성경적인 모식을 따르지 않는 이유는 전통, 불신앙, 그리고 불순종이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적인 모식이 오늘날에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은, 오늘날 세계 각지에서 성경적인 모식을 따르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지난 반세기 동안 중국에서의 폭발적인 교회성장은 신자들이 성경적인 모식을 단순하게 따랐기 때문이다. 중국에서의 하나님이 다른 곳에서는 다를까?

이 모든 것은 전 세계적으로 퍼져가고 있는 미국의 교회성장 방법에 대해 미국 외의 목회자들이 조심해야함을 말하려는 것이다. 만일 그들이 교회성장에 있어서 성경적인 모식을 추구했었다면 제자를 삼는 그리스도의 목표를 달성하는 데 훨씬 더 성공적이었을 것이다.

여파 (The Aftermath)

나의 관찰에 의하면, 현대적인 교회성장 기법의 지지자들은 전 세계 일반적인 목회자들과 이탈되어 있다. 대다수 목사들이 목회하고 있는 회중 수는 백 명 미만이다. 그리고 이런 목사들은 그 교회성장 기법을 시도해보지만 효과 없거나 자신의 실수로 인한 것이 아닌 역효과를 경험하면서 마음이 식어가고 있다. 아무도 목회자의 통제를 벗어난 교회성장을 제약하는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런 요인들의 일부를 지금 생각해 보도록 하자.

가장 먼저, 교회성장은 지역 인구의 크기에 제한 받는다. 가장 큰 제도적 교회들이 대도시 지역에서 발견되는 것은 분명하다. 그들에게는 종종 교회 회원으로 모을 수 있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만일 숫자로 성공 여부를 가늠한다면, 교회의 크기가 아닌, 그 교회 회중들이 지역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로 판단해야할 것이다. 그런 기준으로 본다면, 열 사람을 가진 일부 교회는 만 명을 가진 교회보다 훨씬 더 성공적이다. 오십 명이 사는 마을에는 열 명의 교인을 둔 교회는 오백만 명의 인구를 가진 도시에 있는 십만 명의 교인을 둔 교회보다 더 성공적이다. (하지만 그 열 명의 교인을 둔 목회자는 교회성장 대회에서 연설하도록 종래로 요청되지 않을 것이다.)

교회성장을 제약하는 두 번째 요인(A Second Limiting Factor to Church Growth)

 

둘째, 교회성장은 특정 지역에 있는 모든 교회 속의 구도자들의 포화 정도에 의해 제한받는다. 어떤 특정 시간에, 한 지역에서 복음에 마음을 연 사람들의 인수는 어느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일단 그 구도자들이 복음을 받아들이면, 이미 교회에 다니던 사람들이 다른 교회로 옮기지 않는 이상(이것이 바로 많은 대형교회들이 그 지역 내의 다른 교회들을 희생시키는 대가로 성장하는 방식이다), 어떠한 교회도 더 이상 성장하지 않는다.

물론, 모든 현재의 그리스도인들은 한때는 복음을 거부했었지만, 성령님의 역사로 복음을 받아들인 것이다. 따라서, 현재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들도 언젠가는 받아 들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들이 받아들일 때면, 교회가 커질 수 있다. 복음을 거부하던 많은 사람들이 갑자기 받아들이게 될 때 우리가 흔히 “부흥”이라고 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여도 똑같이 부흥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단지 작은 규모일 뿐이다. 모든 큰 부흥은 한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이면서부터 시작된다. 그러므로 목사들은 자게 시작하는 그날을 멸시하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은 그분의 제자들을 한 성으로 복음을 전파하러 보내실 때 그곳에서는 한 사람도 회개하지 않을 줄을 이미 아셨다(눅 9:5을 보라). 그러나 예수님은 여전히 그들을 복음을 전파하도록 보내셨다. 그렇다면 그 제자들은 실패한 것일까? 아니, 비록 회심자가 없었지만(그리고 교회성장도 없었고), 그들은 성공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께 순종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여전히 마을, 도시, 그리고 교외로 목회자들을 보내시는데 그분은 그곳에서 작은 비율의 사람들만이 복음을 받아들일 것을 알고 계신다. 자신의 작은 교회에서 신실하게 섬기는 목회자들은 일부 교회성장 전문가들의 눈에는 실패로 보일 수 있으나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성공적이다.

모든 지역의 목회자들은 하나님의 크신 자비로, 그리고 그분의 사람들의 중보에 대한 응답으로, 그분은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일하신다는 사실에 의해 격려 받아야 한다. 그분은 사람들의 양심, 그분의 창조, 주위 환경, 그분의 일시적인 심판, 교회의 생명력 있는 증언, 복음의 선포와 성령님의 질책을 통하여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려고 시도하신다. 그러므로 목사들은 심지를 굳건히 하여야 한다. 계속하여 순종하고 기도하며 설교하여야 한다. 모든 대규모 부흥이 있기 전에는 먼저 부흥에 대한 큰 수요가 존재한다. 그리고 거기에는 항상 부흥을 꿈꾸는 사람이 있다. 계속하여 꿈을 꾸라!

교회성장을 제약하는 세 번째 요인(A Third Limiting Factor to Church Growth)

개별적인 교회의 성장을 제약하는 세 번째 요인은 목회자의 능력이다. 대다수 목회자들은 대형교회를 감독하는 데 필요한 기술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그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그들은 대형교회가 필요로 하는 조직력, 행정력, 설교기술과 교육기술을 갖고 있지 않다. 분명, 이러한 목회자들은 대형 교회에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니며, 그들은 평균 크기의 제도적 교회거나 가정교회 외의 다른 것을 시도하는 것은 잘못된 것일 수 있다.

나는 최근에 미국에서 가장 큰 교회 중의 하나를 목회하고 있는 담임목사가 쓴 지도력 주제에 관한 인기서적을 읽은 적이 있다. 그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현대 목회자들에 대한 조언들을 읽었을 때, 나의 머리를 제일 먼저 스쳐 지나간 생각은 “그는 우리에게 목사가 되는 법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 아니라 대기업의 최고 경영자가 되는 방법을 말해주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미국의 대형 제도적 교회 담임목사들에게는 다른 선택은 없다는 것이다. 그는 대량의 동역자가 필요하며 그들을 관리하기 위해 모든시간을 사용해야 한다. 내가 읽었던 책의 저자는 대형 세속 기업의 최고 경영자가 되기에 충분히 숙련되어 있다(실제로, 그의 책에서 그는 종종 유명한 대형 기업관리 고문들을 조언을 인용하여 목회자독자들에게 적용하였다.) 하지만 많은 독자들은, 만일 대부분이 아니라면, 그가 가지고 있는 리더십과 관리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

같은 책에서 저자는 자신이 큰 교회를 세우면서 그의 가족과 사역의 미래를 망칠 뻔 했던 치명적인 실수들을 여러 번 저질렀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는 살아남았다. 그러나 그의 경험은 나로 하여금 똑같은 종류의 성공을 위해 애쓰다가 비슷한 오류를 범함으로 파선을 맞은 많은 다른 제도적 교회 목사들이 생각나게 하였다. 그들 중 일부는 교회에 자신을 헌신하였지만, 자신의 아이들을 잃었거나 결혼을 망쳤다. 일부는 신경쇠약에 시달리고 사역에 있어서 심각한 저조기를 맞았다. 기타는 환멸을 느끼고 궁극적으로 모든 사역을 포기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살아남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전부다. 그들은 그들의 초인간적인 희생에 의문을 품고 조용히 절망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 책을 읽을수록, 나의 마음속에는 현대적인 제도적 교회와 달리 한 목회자가 25명 이상의 양 떼를 담당하지 않는 초대교회의 지혜가 점점 강화되었다. 내가 이전 장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자신의 교회가 너무 작다고 생각하는 많은 목회자들은 성경에 비추어 자신의 사역을 다시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만일 회중 수가 50명이 되면, 그들의 교회는 실제로 너무 커져 있을 수 있다. 만일 그들 중에 가능한 지도자들이 있으면, 그들은 제자를 삼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기 위해 건물을 팔고 교회를 세 개의 가정교회로 나누는 것을 기도하면서 결정할 수 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너무 급진적으로 보이면, 그들은 적어도 미래의 지도자들을 키우기 위해 제자를 삼고, 소그룹을 시작할 수 있다. 만일 이미 소그룹들을 갖고 있다면, 그들 중 일부를 자율적인 가정교회로 풀어놓아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를 지켜볼 수 있다.

기타 현대적인 교회성장 기술(Other Modern Church-Growth Techniques)

구도자 맞춤형 교회모식외에 오늘날 교회성장에 필수적이라고 홍보되고 있는 다른 기술들이 있다. 다른 기술의 대부분은 이 비 성경적이며 “영적 전쟁”에 분류된다. 그들은 “요새를 무너뜨리고”, “전쟁의 기도”, 그리고 “영적 지도”와 같은 이름들을 사용하여 선전한다.

우리는 이러한 사례들 중 일부를 영적 전쟁에 대해 이후 장에서 파헤쳐볼 것이다. 우리는 사도들에게는 완전히 생소했던 이러한 활동들이 왜서 오늘날에는 교회성장에 필수적이라고 간주되는지에 대해 궁금할 수 있다.

많은 새로운 교회성장 방법들은 “내가 이렇게 해보니까 내 교회가 성장했다. 그러니까 당신도 똑같은 방법으로 하면 당신의 교회도 꼭 성장할 것이다”라고 말하는 몇 명의 목회자들의 경험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들은 부인하겠지만, 교회의 성장과 그들이 했던 특정 일들 사이에는 실제 연결이 없었다. 이 점은 다른 목회자들이 그 독특한 가르침을 따르고, 똑같은 일을 한다 해도 그들의 교회는 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 반복적으로 입증되고 있다.

교회성장을 이룬 목사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종종 듣게 된다. “우리가 도시 안의 귀신들을 향해 큰소리로 꾸짖기 시작했을 때 우리 교회는 부흥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니까 당신들도 교회가 부흥하기를 원한다면 큰 소리로 귀신을 향해 꾸짖기 시작해야 한다.”

하지만 왜서 도시 속의 귀신들을 향해 큰 소리로 꾸짖은 적이 없는데도 교회 역사를 보면 과거 이천 년 동안 세계 각국에서 그렇게도 많은 놀라운 부흥들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이것은 목사가 부흥은 귀신을 큰 소리로 꾸짖어서 일어났다고 생각할지라도, 그의 생각이 틀렸음을 보여준다. 그보다도 교회가 연합하여 기도한 결과로 그 도시의 사람들이 복음에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하였고 마침 목사가 복음을 전할 때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인 것일 수 있다. 대부분의 경우, 교회성장은 교회가 적절한 시간에 적절한 장소에 있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성령님은 우리가 적절한 시간에 적절한 장소에 있을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

만일 도시 안의 귀신을 향하여 큰 소리로 꾸짖는 것이 특정 목사의 교회에 부흥을 갖다 준다면, 왜서 일정한 시간이 흐른 뒤, 부흥은 느려지다가 중단되는가? 귀신을 향하여 큰 소리로 꾸짖는 것이 관건이라면, 우리가 그냥 귀신을 향하여 꾸짖기만 하면, 도시의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께로 나아올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가 조금만 생각해보면 진리를 명확해진다. 교회성장에 있어서 유일한 성경적인 방법은 기도, 설교, 가르침, 제자 삼기, 성령님의 도우심 등이다. 그리고 심지어 이런 성경적인 방법도 교회가 꼭 성장할 수 있다고 보증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회개하거나 회개하지 않거나 선택할 수 있다. 심지어 예수님도 어떤 때에는 방문한 도시가 회개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교회를 성장시키는 데 실패했다고 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오직 성경적인 방법으로 교회를 세워가야 함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다른 모든 것들은 시간 낭비이며 그런 공적들은 나무, 풀, 짚으로 만든 것이기에 마지막 날에 불에 타버릴 것이고 아무 상도 받지 못할 것이다(고전 3:12-15을 보라).

마지막으로, 우리의 목표를 단지 숫자적인 성장이 아니라 제자를 삼는 것에 두어야 한다. 우리가 제자를 삼음에 따라 교회가 성장하고 있다면 곧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것이다!

 


[1]가정교회의 또 다른 장점은 교회의 크기가 집의 크기에 의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목사들은 잘못된 동기로 큰 교회를 구축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2]이것은 오늘날 왜 그토록 많은 복음 전도자, 교사, 선지자, 심지어 사도들이 교회를 목회하고 있는지에 대한 이유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많은 사역들이 제도적 교회의 구조 내에서 제대로 펼쳐지지 못하고 비 목회 사역자들이 교회를 목회함으로 인해 성경적인 교회구조내에서 더 많은 지체들이 받을 수 있는 큰 축복을 빼앗아 간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진정한 소명과는 관계없이, 제도적 교회의 모식에서 자신의 왕국을 세우는 것으로 되돌아 가는 것 같다. 왜냐하면 목사들은 “그들의 사람들”로 하여금 십일조를 내게 할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대부분의 십일조는 건물을 세우고 유지하는데 사용되기 때문이다. 비목회사역자들은 자신이 실제로 부르심을 받은 사역을 위한 재정 지원을 받기 위해 교회를 목회하는데 의존한다.

[3]누가복음 14:26-33에서 예수님이 진정한 제자가 되기 위한 요구조건을 열거하신 것은 이미 신자가 된 사람에게 영적 성장의 두 번째 단계를 제시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라. 오히려, 그분은 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분의 제자가 되는 것은 예수님이 제시한 유일한 단계이며 그것은 구원을 받는 단계이기도 하다. 이것은 대부분의 구도자 민감형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과는 현저히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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