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지기 직분(Stewardship)

제32장(Chapter Thirty-Two)

이전 장의 예수님의 산상수훈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청지기 직분에 관하여 하신 말씀을 살펴보았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그들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 두라고 말씀하셨다. 그분은 일시적인 보물에 투자하는 사람들의 어리석음뿐 아니라 그들 마음의 어두움에 대해 지적하셨다(마 6:19-24).

땅에 보물을 쌓아 두는 사람들의 진정한 신은 돈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돈을 섬기고 돈은 그들의 삶을 지배하기때문이다. 예수님은 한 사람이 하나님과 돈을 동시에 섬기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만일 하나님이 우리의 진정한 주인이시라면, 그분은 또한 우리 돈의 주인이심을 분명하게 나타낸다. 다른 무엇보다도, 돈은 사람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하나님과 경쟁하고 있다. 때문에 예수님은 우리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그분의 제자가 될수 없다고 가르치셨다(눅 14:33을 보라). 그리스도의 제자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다. 그들은 단순히 하나님의 청지기이며, 하나님은 그분의 돈을 그분의 성품을 반영하고 그분의 나라를 확장하는 일에 사용하기를 즐기신다.

예수님은 청지기 직분에 대해 많은 말씀을 하셨으나 그분의 말씀은 종종 그분의 추종자라 자칭하는 사람들에 의해 무시된 듯 보인다. 사람들은 종종 성경을 왜곡하여 여러가지 형태의 현대 ≪번영 교리≫를 만들어 내고 있는데 어떤것은 미묘하게, 어떤것은 노골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러나 제자 삼는 사역자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모든 계명에 순종하라고 가르치기를 원한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모범과 말과 성경적인 청지기 직분을 통하여 가르칠것이다.

아래에 우리는 성경은 청지기 직분에 대해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동시에 번영에 대한 일반적인 거짓 가르침을 폭로할것이다. 여기에서 모든 부분을 다 망라하기 어려울것이다. 나는 이 주제에 관하여 완전하게 쓴 책의 영어본을 우리의 웹 사이트(ShepherdServe.org)에 올려놓았다. 그것은 ≪성경적인 주제≫란 표제 아래의 부표제 ≪예수님이 논하신 돈≫에서 찾을수 있다.

필요를 채워주시는 하나님(The Supplier of Needs)

긍정적인 말씀으로 시작해보자. 우리는 성령님의 령감을 받은 바울이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것을 채우시리라≫(빌 4:19)라고 말한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 익숙한 약속을 종종 인용하거나 주장하고 있는데 그 말씀은 도대체 무슨 뜻일까? 우리가 문맥적으로 읽어보면 곧 바울이 하나님께서 빌립보 신자들의 모든 쓸것을 채워주실것이라고 확신한 리유를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번뿐 아니라 두번이나 나의 쓸것을 보내었도다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풍성한 열매를 구함이라 내게는 모든것이 있고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준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것이라(빌 4:14-19, 강조 추가).

바울이 예수님께서 빌립보 신자들의 필요를 채워주실것이라고 확신했던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조건을 만족했기때문이다. 그들은 바울이 교회를 계속하여 개척할수 있도록 그를 희생적으로 섬김으로써 그들이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였음을 립증하였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음을 기억할것이다.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2-33).

그래서 우리는 빌립보서 4:19에서의 바울의 약속이 그것을 인용하고 주장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적용되는것이 아님을 알수 있다. 오히려, 그것은 오직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사람들에게 적용될 뿐이다.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것은 무엇인가?(What Do We Really Need?)

우리는 마태복음 6:32-33의 예수님의 약속에서 다른 무언가를 배울수 있다. 우리는 가끔 우리가 원하는것과 필요한것을 구별하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필요에 대해 정의를 내리셨다. 그분은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줄을 아시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더해주시겠다고 했던 이 ≪모든것≫은 무엇일까? 그것들은 먹을것, 마실것, 그리고 입을것이다. 아무도 이점에 대해 반론할수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가 살펴본 이 말씀 바로전에 그렇게 말씀하셨기때문이다(마 6:25-31을 보라). 먹을것, 마실것, 그리고 입을것이야말로 우리의 진정한 물질적 필요이다. 사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전도 려행을 다니실때에도 그것만 소유하셨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아래와 같이 쓴것을 보아, 그도 우리의 필요에 대한 예수님의 정의에 동의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리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가지고 온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가지고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것과 입을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것이니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6-10, 강조 추가).

바울은 먹을것과 입을것만이 우리가 진정 물질적으로 필요로 하는것이라고 믿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우리가 그것에만 만족하라고 말하지 않았을것이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바울이 빌립보 신자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들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실것이라고 약속한것에 대해 조금 다른 관점으로 보게 한다! 어떤 설교자들이 그 구절을 해설하는 방식은 당신으로 하여금 ≪나의 하나님은 너의 모든 욕심을 채워주실것이다!≫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또한, 만일 우리가 먹을것과 입을것에만 만족해야 한다면, 우리 대부분은 실제로 소유한것, 단지 먹을것과 입을것만을 훨씬 초월한것에 대해서 더 많이 만족해야 하지 않겠는가?

불만(Discontentment)

우리의 문제는 우리가 우리의 실제 필요보다 훨씬 더 많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는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만드셨을 때, 그들은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았지만 낙원에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라. 분명히 하나님은 우리가 물질을 소유하는데서 행복해지기를 의도하시지 않았을것이다. 당신은 예수님은 한번도수도물을 사용하신 적이 없으며 욕실에서 샤워하신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그분은 세탁기로 옷을 세탁하신 적이 없다. 그분은 냉장고의 문을 열어보신 적도 없다. 그분은 자동차 또는 자전거를 운전하신 적도 없다. 그분은 한번도 라지오를 들어보신 적이 없으며 전화로 누군가와 통화하신 적이 없으며 레인지로 요리를 하신 적이 없으며, 음향 설비를 통해 대중 설교를 하신 적이 없다. 그분은 비디오 또는 TV 쇼를 시청하신 적이 없으며, 전등, 에어컨이나 선풍기를 사용하신 적이 없다. 그분은 손목시계를 착용하신 적이 없다. 그분은 옷으로 가득 찬 옷장을 소유하신 적이 없다. 그런데 어떻게 그분은 행복하실수 있었을까?

미국에서(그리고 아마도 당신의 나라에서도), 우리는 사람들이 새로운 물질로 인해 얼마나 행복해하는지를 보여주는 광고들의 공세를 당하고 있다. 결국, 우리는 세뇌당하여 행복은 더 많이 소유하는데서 온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는 얼마나 많이 모으는것과는 관계없이 만족하지 못한다. 이것은 예수님이 ≪재물의 유혹≫(마 13:22)이라고 언급하신것이다. 물질은 행복을 약속하지만 그렇게 된 적은 드물다. 그리고 우리가 더 많은 물질을 얻으려는 세상의 열광적인 경주에 참가함에 따라, 우리는 실제로 우상 숭배자가 되며, 재물의 노예가 되여, 하나님과 그분의 지상명령인 그분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우리 이웃을 우리 몸처럼 사랑하라는것을 잊어버리게 된다. 하나님은 이 점에 대해 이스라엘에게 경고하셨다.

내가 오늘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삼갈지어다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여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때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였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신 8:11-14).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진정한 신자가 ≪재물의 유혹≫이 자기를 미혹하도록 허락함으로써 령적 생활이 결실하지 못하게 하는것에 대해 경고하셨다(마 13:7, 22을 보라). 바울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라고 경고했다. 히브리서 저자는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 13:5)라고 권면했다. 이것들은 단지 재물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한 몇가지 성경의 례에 불과하다.

돈이 주인이 되였을 때(When Money is Master)

아마도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측량할수 있는것은 우리와 돈과의 관계일것이다. 돈은 벌기 위해 사용한 시간과 방법, 그리고 돈을 어떻게 사용하는가는 우리의 령적인 삶에 대해 많은것을 드러낸다. 우리가 돈이 있든지, 없든지를 막론하고 우리를 가장 잘 시험할수 있는것은 돈이다. 돈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가장 큰 계명을 쉽게 저버리게 할수 있다. 왜냐하면, 돈은 우리의 유일하신 하나님 이상의 신이 될수 있으며,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이웃보다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게 우리를 부추길수 있기때문이다. 반면에, 돈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증명할수 있는 수단으로 사용될수도 있다.

예수님은 어느 한번, 한 사람이 하나님이 아닌 돈이 자신을 지배하게 한 비유를 말씀하셨다.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령혼에게 이르되 령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령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것이 누구의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눅 12:16-21).

예수님은 이 부자를 매우 어리석은 사람으로 묘사하셨다. 비록 그는 건강과 비옥한 땅과 경작 기술을 가진 축복을 누렸지만,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여분의 재산을 쌓지 않았을것이며 쉬면서 리기적인 즐겁고 평안한 삶을 살려고 하지 않았을것이다. 오히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청지기란것을 깨닫고 그가 받은 축복으로 무엇을 할수 있을지 주님의 뜻을 물었을것이다. 물론, 하나님은 그가 자신의 풍요로움을 다른 사람과 나누기를 원하셨고 그가 계속하여 일함으로써 그 풍요로움이 계속하여 나뉘기를 바라셨을것이다. 어쩌면, 유일하게 받아들여지는 대안은,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셨다면, 그가 농사를 접고 자비량 사역에 헌신하는 일일것이다 .

예수님의 비유 속의 부자는 자신의 죽는 날짜에 대해 큰 오산 을 했다. 그는 죽기 몇 시간 전만 하여도 아직 남은 년수가 많다고 생각했다. 예수님 요점은 명백하다. 우리는 날마다 마지막 날인것처럼 매일 하루를 살아야 하며 하나님 앞에서 계산할 준비가 항상 되여 있어야 한다.

가지 관점(Two Perspectives)

하나님의 관점은 사람의 관점과 얼마나 많이 다른지 모른다!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부자는 그를 아는 대부분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었을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불쌍히 여기셨다. 그는 인간의 눈에는 부하였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가난했다. 그는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어 그것을 영원히 소유할수 있었지만, 그가 죽을 때에 그에게 아무 리익도 가져다줄수없는 땅에 쌓아두기로 선택했다. 예수님께서 탐욕스러운 사람들에게 가르치신것을 비추어 볼 때, 그분은 우리가 부자가 죽은 뒤에 천국에 갔다고 믿지 않기를 바라셨을 가능성이 높다.

이 비유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가진 모든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며, 그분은 우리가 신실한 청지기가 되기를 기대하신다는것을 기억하는데 도움을 준다. 이 비유는 물질적인 소유를 가진 사람뿐 아니라 물질적인것을 너무 중요하게 생각하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 예수님은 이 점에 대해 제자들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수 있느냐 그런즉 가장 작은 일도 하지 못하면서 어찌 다른 일들을 염려하느냐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것이 이 꽃 하나만큼 훌륭하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래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이 모든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것을 아시느니라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둑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눅 12:22-34).

예수님의 말씀은 현대의 ≪번영 설교자들≫과는 관점과는 다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미 소유한것을 팔아 구제하라고 가르치심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더 많이 소유하기를 바라신다는 가르침을 받고 있다! 다시 한번, 그분은 자신의 보물을 땅에 쌓아두는 자들의 어리석음을 드러내셨다. 그 보물의 주인의 마음은 땅에 있으며 그 곳에 쌓아둔 보물은 썩어 없어지기 마련이다.

예수님께서 이 어리석은 부자의 교훈을 소유가 적음으로 인해 먹을것과 입을것에 대해 근심하는 자들에게 적용하셨음을 주목하라. 이런것에 대한 근심은 우리의 초점이 잘못되였음을 드러낸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본분대로 우리를 보살피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신뢰한다면, 우리는 걱정하지 않을것이며 그런 근심 없는 태도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데 초점을 맞추게 할것이다.

그리스도의 (Christ’s Example)

예수님은 돈에 대해 많은 말씀을 하셨지만, 모든 제자 삼는 사역자가 해야 하듯이 자신의 본을 보여주시면서 가르치셨다. 그분은 자신이 행하신것을 설교하셨다. 예수님은 어떻게 사셨을까?

예수님은 자신의 상황을 리용하여 쉽게 큰 부자가 되실수 있었지만, 땅에 재물을 쌓지 않으셨다. 많은 은사를 가진 사역자들은 그들의 사역이 돈을 벌수 있으면, 하나님은 그들이 개인적으로 부해지기를 원하심이 틀림없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분의 개인적인 리익을 위해 은사를 사용하시지 않았다. 그분은 자기한테 주어진 돈을 제자 삼는 일에 사용하셨다. 그분은 심지어 제자들의 전도 려행 경비까지 부담하셨다.[1] 우리의 시대에서, 젊은 제자들은 신학교에서 년장의 사역자들의 강의를 대부분 돈을 지급하고 들어야만 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정반대의 본을 보여주셨다!

예수님은 또한 그분께서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워줄수 있게끔 그분의 아버지께서 그분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고 축복해주실 줄을 믿는 신뢰의 삶을 사셨다. 우리는 그분께서 때로는 저녁 만찬에 초대되시기도 하고, 때로는 밭에서 밀 이삭을 드신 적도 있었음을 발견할수 있다(눅 6:1을 보라).

예수님은 적어도 두번 그분의 말씀을 들으러 온 수천명의 사람들에게 음식을 제공하셨다. 이것은 강연을 듣기 위해 립장료를 내야만 하는 현대 기독교 회의와 얼마나 많이 다른가! 우리는 우리의 사역자 회의에 참석하는 사람들을 위해 무료로 음식을 제공하는데, 사람들은 종종 우리가 ≪돈을 지급하여 사람들이 우리의 설교를 듣게 한다≫고 조롱한다. 실은, 우리가 예수님의 본을 따르고 있었을 뿐이다.

예수님은 또한 가난한 자들도 보살피셨는데 그분의 제자들은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돈궤를 관리하고 있었다.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것은 예수님의 사역의 일반적인 기능이었으며 그분께서 유다에게 최후의 만찬이 끝난후 그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고 분부하셨을 때, 다른 모든 제자들은 유다가 가서 음식을 사거나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줄로 알았다(요 13:27-30을 보라).

예수님은 그분의 이웃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셨기에 단순하고 나누는 삶을 사셨다. 그분은 세례 요한이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한 벌 있는 자에게 나눠 줄것이요≫(눅 3:11)라고 설교할때 회개하실 필요가 없었다. 예수님께는 단 한 벌의 옷밖에 없었다. 그러나 일부 번영 설교자들은 예수님이 오직 부자들만 입었을것 같은 호지 아니하고 우에서부터 통으로 짠 속옷을 입으셨기에(요 19:23을 보라) 그분은 부자였다고 우리를 설득하려 한다. 누군가가 수많은 다른 성경 말씀과 모순되는것을 증명하기 위해 성경 본문에서 찾아낸 요점은 참으로 놀랍다! 우리도 예수님께서 자기의 부를 숨기려고 통으로 짠 겉옷을 착용하시지 않았다는 터무니없는 결론을 내릴수도 있다.

예수님은 돈에 대해 많은 말씀들을 하셨으며 우리가 그것을 다 고려하기에는 공간이 부족하다. 그러나 성경 말씀을 왜곡하고 사람을 속이는데 숙달된 현대 번영 설교자들의 보편적인 가르침에 대해서 몇가지 더 살펴보자.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부하게 하셨다≫(God Made Solomon Rich)

이것은 많은 번영 설교자가 자신의 탐욕을 위장하는데 사용하는 변명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부하게 하신 리유를 기억하지 못한다. 그 리유는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모든 요구를 들어주시겠는 약속을 하셨을 때, 솔로몬이 백성을 다스리는 지혜를 구했기때문이다. 하나님은 솔로몬이 재부를(다른것을 포함하여) 구하지 않은것에 대해 기뻐하셨기에 지혜에 재부를 더하여 주셨다. 그러나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를 그분의 뜻대로 사용하지 않았고 결국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 되었다. 그가 현명했더라면, 그가 태여나기 오래전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하신 말씀에 주의를 기울였을것이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이르러 그 땅을 차지하고 거주할때에 만일 우리도 우리 주위의 모든 민족들 같이 우리 우에 왕을 세워야겠다는 생각이 나거든 반드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자를 네 우에 왕으로 세울것이며 네 우에 왕을 세우려면 네 형제 아니 타국인을 네 우에 세우지 말것이며 그는 병마를 많이 두지 말것이요 병마를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말것이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후에는 그 길로 다시 돌아가지 말것이라 하셨음이라 그에게 안해를 많이 두어 그의 마음이 미혹되게 하지 말것이며 자기를 위하여 은금을 많이 쌓지 말것이니라(신 17:14-17).

이것은 번영 설교자들이 항상 무시하는 또 다른 성경 말씀인데 그들은 죽을 때까지 그 말씀을 무시했던 솔로몬의 본을 따르고 있다. 그리고 그와 같이, 그들도 우상 숭배자가 되었다. 솔로몬의 마음은 그의 많은 안해로 말미암아 우상 숭배를 하게 되였으며 그가 재부를 람용하지 않았다면 그 많은 안해를 감당할수 없었다는것을 기억하라.

하나님은 솔로몬이 그분께서 주신 재부를 사용하여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기를 바라셨지만, 솔로몬은 그것을 자기를 사랑하는데만 사용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계명에 직접적으로 불순종하여 자신을 위해 금, 은, 병거, 그리고 안해들을 늘렸다. 그는 궁극적으로 칠백명의 안해를 두고 삼백명의 첩을 소유하였는데 이것은 천명 남자의 안해를 강탈한것과 같다. 솔로몬은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기보다는 자기 욕망만을 채웠다. 번영 설교자들이 솔로몬이 이기심과 우상 숭배로 가득차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모든 신약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의 본보기로 떠받드는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우리의 목표가 그리스도를 본받는것이 아니었던가?

하나님아브라함을 부하게 하셨으며 아브라함의 우리에게 약속하셨다≫(God Made Abraham Rich, and Abraham’s Blessings Are Promised To Us)

이러한 변명은 갈라디아서 3장에 나온 바울의 말에서 지어낸것이다. 나는 자주 잘못 인용되는 구절을 앞뒤 문장과 함께 아래에 인용했다.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무릇 률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률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률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률법은 믿음에서 난것이 아니니 률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률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갈 3:8-14, 강조 추가).

바울이 14절에서 쓴 ≪아브라함의 복≫은 모든 민족이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이다(이것은 바울이 8절에서 인용한것과 같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바울이 몇 구절 뒤에 설명한것처럼, 아브라함의 한 자손 곧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된다(갈 3:16). 우리가 금방 읽은것에 따르면, 예수님은 모든 민족에게 그 약속된 복을 주시기 위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세상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한다≫는것은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아브라함처럼 물질적으로 부하게 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이방인들에게 복을 주시겠다는 약속이며 그 약속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그들을 위해 죽으심으로 성취되었다(여기에서 바울의 요점은 이방인도 유대인처럼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구원받을수 있다는것이다).

다른 왜곡(Another Twisting)

이와 같은 구절은 종종 자신의 교리를 정당화하기 위한번영 설교자들에 의해 또 다른 방식으로 사용된다. 그들은 률법은 그것을 지키지 않는 자들은 저주를 받아 가난하게 될것이라고 약속하였고(신 28:30-31, 33, 38-40, 47-48, 51, 68을 보라), 바울도 갈라디아서 3:13에서 ≪그리스도께서 률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고 썼기때문에, 그리스도안에 있는 우리는 가난의 저주에서 속량받았다고 주장한다.

첫째, 바울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률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셨다고 쓸때, 신명기 28장의 특정 저주를 념두에 두었는지에 대해서는 론쟁의 여지가 있다. 바울은 그리스께서 률법의 ≪저주들≫(복수)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고 쓰지 않고 단수인 률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셨다고 썼는데 아마도 모든 률법은 그것을 지킴으로써 구원을 얻으려는 사람한테는 저주라는것을 암시했을것이다. 우리가 일단 그리스도에 의해 속량받았으면, 더 이상 률법을 지킴으로써 자신을 구원하려는 잘못을 범하지 않게 되며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률법의 저주에서 속량받았다.≫

만일 바울이 실제로 그리스도께서 신명기 28장에 라렬된 모든 재앙에서 우리를 속량하셨고 우리에게 물질적인 번영을 약속했다는것을 의미했다면, 우리는 그가 왜 자신에 대해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다≫(고전 4:11)고 썼는지 궁금할수 밖에 없다. 또한, 우리는 바울이 왜 아래와 같이 썼는지 궁금할것이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롬 8:35-36).

분명한것은, 만일 그리스도께서 률법의 모든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면, 모든 그리스도인은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의 위협을 받지 않을것이며 바울도 이 같은 말을 쓸 필요가 없었을것이다.

우리는 또한 예수님께서 왜 다음과 같은 천국의 장면을 예언하셨는지에 대해서도 궁금할수밖에 없다.

그때에 임금이 그 오른 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내가 주릴때에 너희가 먹을것을 주었고 목마를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였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때에 주께서 주리신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때에 나그네 되신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때에 병드신것이나 옥에 갇히신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것이 곧 내게 한것이니라 하시고(마 25:34-40, 강조 추가).

따라서 ≪률법의 저주에서 속량받은≫ 신자가 별로 풍요롭지 못한 상황에 있는것이 이상할것이 없다. 그러나 이렇게 힘든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고통받는 신자들의 필요를 채워주실것이며 그분은 필요 이상을 소유한 다른 신자들을 통하여 이 일을 이루신다는것을 주목하라. 우리는 상황이 일시적으로 달라 보일찌라도 항상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기를 기대할수 있다.

마지막으로, 아브라함처럼 부해지기를 원하는 번영 설교자들은 그들의 일생을 전기와수도물이 없는 천막에서 보내기를 원하는지를 자신한테 성실하게 질문해봐야 할것이다! 하나님께로부터 어느정도 물질적인 축복을 받은 구약의 인물들은 그들의 재부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고 그들의 풍요로움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눠야 했다. 아브람함은 그렇게 하여 수백명의 사람을 고용하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었다(창 14:14을 보라). 욥도 그렇게 하였고 자기의 재산으로 과부와 고아들을 보살펴주었음을 증언하였다(욥 29:12-13, 31:16-22을 보라). 사업에 은사가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최고 사업이 하나님께 순종하여 그들의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것임을 다짐해야 한다.

성경은 예수님이 가난하게 되신것은 우리를 부요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한다≫(Scripture Says That Jesus Became Poor So That We Could Become Rich)

사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8:9).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이 분명히 예수님은 천국에서는 물질적으로 부요하셨지만 땅에서는 물질적으로 가난하게 되셨다고 했으므로 바울이 그의 독자들이 그리스도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부요하게 된다고 쓴것은 물질적인 부요를 념두에 둔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바울이 만일 이 구절의 첫 부분에서 물질적인 부요와 가난함을 썼다면, 두번째 부분에서 령적인 부요함에 대해 쓰지 않았을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만일 바울이 실제로 그리스도의 물질적인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물질적으로 부요해진다는것을 의미했다면, 우리는 그가 왜 동일한 서신에서 몇 구절 뒤에 아래와 같이 썼는지 궁금할것이다.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 11:27).

만일 바울이 고린도후서 8:9에서 그리스도의 물질적인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물질적으로 부요해진다는것을 의미했다면, 그리스도의 뜻은 분명 바울의 생애에서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바울은 분명히 그리스도가 물질적으로 가난해졌기때문에 우리가 이 땅에서 물질적으로 부요해질수 있다는것을 의미하지 않았다. 그는 우리가 령적으로 부요해지는것을 의미했으며 예수님의 표현을 빌면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고≫(눅 12:21), 우리의 보물과 마음이 있는 천국에서 부요하다는것을 의미했다.

번영 설교자들은 바울이 그 구절의 앞 부분에서 물질적인 부요함을 말했기때문에 그 구절의 뒷 부분에서 령적인 부요함에 대해 말했을 가능성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생각하는것이 과연 안전할까? 예수님께서 서머나 교회에 하신 말씀을 읽어보라.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계 2:9 상).

분명히, 예수님은 서머나 신자들이 겪고 있는 물질적인 궁핍을 말씀하셨으며 바로 뒤에 그 신자들의 령적인 부요함에 대해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우리가 버린것의 백 배를 받을것이라고 약속하셨다≫(Jesus Promised a Hundred-Fold Return on Our Giving)

예수님은 우리가 그분과 복음을 위하여 버린것의 백배를 받을것이라고 약속하셨다. 그분께서 과연 어떠한 말씀을 하셨는지 살펴보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래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막 10:29-30).

번영 설교자들은 이 약속을 자주 인용하지만, 이 약속은 목사에게 헌금하는 사람들에 대한것이 아님을 주목하라. 오히려 이 약속은 자기 집이나 전토나 친척들을 멀리 떠나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들에게 하신것이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현세에 백 배나 받을것이라고≫ 약속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일부 번영 설교자들이 주장하는것처럼 그런 사람들이 집이나 전토를 문자적으로 백배를 소유할것이라고 약속하셨을까? 아니, 그분은 그런 사람들이 문자적으로 백명의 어머니나 백명의 자녀를 얻게 된다고 하신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집과 가족을 남겨 두고 복음을 위해 떠난 사람들은 동료 신자들이 그들에게 자기 집을 개방하고 그들을 자기 가족처럼 받아주는것을 경험하게 됨을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또한 그런 사람들에게 박해와 영생을 약속하셨음을 주목하라.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본문 중 영생을 바라는 한 부자 청년이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돌아갔을 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것보다 쉬우니라≫(막 10:25)라고 말씀하신것을 생각나게 한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매우 놀랐으며 그들 자신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수 있을지가 궁금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이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이미 모든것을 버렸음을 예수님께 말했다. 바로 이때, 예수님의 ≪백 배≫의 약속을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몇 초전에 예수님이 부자 청년에게 영생을 얻으려면 가서 있는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말씀에 비추어 보면, 번영 설교자들이 예수님은 문자 그대로 백 배의 물질적인 보답을 약속하셨으며 그로 인해 우리는 짧은 시간 내에 큰 부자가 될수 있다고 우리를 설득하려 한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번영 설교자는 우리가 살펴보았던것 외에도 많은 다른 말씀들을 왜곡하고 있다. 편폭의 제한을 받아 이 책에서 그것을 일일이 다 적을수는 없다. 조심하라!

기억해야 할 격언(A Maxim to Remember)

존 웨슬리 영국 감리교 교회의 창시자이며 돈에 대한 적절한 관점을 보여주는 훌륭한 격언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할수 있는 한 많이 벌고, 할수 있는 한 많이 저축하고, 할수 있는 한 모든것을 주라≫이다.

즉, 그리스도인들은 우선 돈을 벌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능력과 기회를 사용하여 열심히 일해야 한다. 하지만 성실하게 일하고 그리스도의 계명에 어긋나지 않게 해야 한다.

둘째로, 그들은 검소하고 간단한 삶을 살고 자신을 위해 가능한 한 적게 지출하여 ≪할수 있는 한 많이 저축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처음 두 단계를 수행한후, 그들은 ≪할수 있는 한 모든것을 주어야 한다.≫ 자기 자신을 십일조를 내는것에만 제한하지 말고 할수 있는 한 자기 자신을 부인하여 과부와 고아들을 공급하고 복음이 전 세계에 선포되게 해야 한다.

초대 교회는 확실히 이런 청지기 직분을수행했으며 주위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는것은 신약 시대 신자들의 일반적인 생활 특징이였다. 그들은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둑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눅 12:33)라는 예수님의 계명을 엄격하게 준수하였다. 누가는 초대 교회에 대해 아래와 같이 썼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여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행 2:44-45; 4:32-35).

성경은 초대 교회가 가난한 과부들을 구제하였음을 명백히 적고 있다(행 6:1; 딤전 5:3-10을 보라).

가장 위대한 사도이며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고 대부분의 신약 서신을 쓴 바울은 가난한 자들의 물질적인 필요를 채워주는것을 자신의 사역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간주하였다. 바울은 그가 세운 교회에서 가난한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많은 돈을 모금하였다(행 11:27-30; 24:17; 롬 15:25-28; 고전 16:1-4; 고후 8-9; 갈 2:10을 보라). 바울은 회심한후, 적어도 17년동안 자기가 받은 복음을 예루살렘을 오가면서 전했으며 베드로, 야고보와 요한의 감찰을 받았다. 그들 중 누구도 바울의 메시지에서 잘못된 점을 찾을수 없었다. 바울은 그 때 상황을 회상하면서 갈라디아서에서 그들은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갈 2:10)라고 썼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과 바울의 마음에는 가난한 자들을 련민하는것이 복음을 전하는것에 버금가는 일이였다.

요약(In Summary)

이 주제에 관하여, 제자 삼는 사역자에 대한 가장 좋은 충고는 사도 바울에게서 온다. 그는 디모데에게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며 그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라고 경고한 뒤, 아래와 같이 권면하였다.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라(딤전 6:11, 강조 추가).

 


[1]번영 설교자들은 종종 이 사실로 예수님의 사역이 번영했음을 증명한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필요를 채워주심으로써 그분께서 사명을 이루시게 했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예수님과 번영 설교자들의 차이점은 예수님은 이기적이 아니시며 그분은 사역의 돈을 자신을 부하게 하는데 사용하시지 않았다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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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th Korean » 청지기 직분(Stewardship)

전도의 비밀(Secrets of Evangelism)

제33장(Chapter Thirty-Three)

아브라함이 그의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는 의지를 보였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아래와 같은 약속을 하셨다.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창 22:18).

사도 바울은 이 약속은 아브라함과 그의 , 복수 씨들이 아닌 단수 씨에게 주신것이며 그 씨는 곧 그리스도라고 지적하였다(갈 3:16을 보라). 그리스도안에서 천하 만민, 더 정확하게 말하면, 모든 민족이 복을 받을것이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이 약속은 전 세계 수천 개의 민족이 그리스도안에 있는 복을 누리게 된다고 예언하였다. 그 민족들은 서로 다른 지리적 지역에 살고 있고, 서로 다른 인종이며 다른 문화에서 다른 언어를 구사한다. 하나님은 그들 모두가 그리스도안에서 복을 받기를 원하시며 그때문에 예수님은 온 세상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요일 2:2을 보라).

비록 예수님께서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다고 하셨지만(마 7:14을 보라), 사도 요한은 미래 하나님의 나라에는 세상 모든 민족의 대표들이 있으리라는것을 믿게 하는 좋은 리유를 우리에게 남겨주었다.

이 일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수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에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계 7:9-10, 강조 추가).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언젠가는 여러 민족의 무리와 함께 하나님의 보좌 앞에 모일것을 기대할수 있다.

많은 현대의 선교 전략가들은 전 세계의 나머지 수천 개의 ≪숨겨진≫ 민족에게 복음을 전파하여 그들 각 민족에게 생명력이 있는 교회를 세우는것에 큰 중점을 두고 있다. 이것은 확실히 칭찬할만하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가 세상으로 가서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명령하셨기때문이다(마 28:19). 그러나 사람이 아무리 좋은 의도로 계획하였다 할찌라도, 특별히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없다면, 종종 나쁜 결과를 초래할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그분의 지혜를 따르는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분은 우리에게 전 세계의 제자를 삼는 방법에 관해 마태복음 28:19의 말씀보다 더 많은 정보와 가르침을 주셨다.

아마도 지상명령을 성취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간과하는 사실은 하나님이 가장 위대한 전도자이며 우리는 그분을 위해 일하는것이 아니라 그분과 함께 일해야 한다는 사실일것이다. 그분은 누구보다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관심이 있으시며 누구보다 그 일을 위해 열심히 일하신다. 그래서 그분은 그 일을 위해 죽으시고 심지어 우리를 만드시기 전부터 그 일을 생각하셨으며 지금도 여전하시다. 이것이야말로 헌신이다.

그리스도를 위해 세상을 이기라≫(Wining the World For Christ)

흥미롭게도, 우리가 신약 서신을 읽어보면, ≪나가서 그리스도를 위해 세상을 얻으라!≫는 신자들을 위한 열정적인 간구함이 없음을 발견할수 있다(오늘날 우리는 종종 그렇게 하고 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과 기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큰 노력을 기울이고 계시며, 그들이 해야 할 일은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라 그분과 함께 동역하는것임을 알고 있었다. 누군가가 이것에 대해 알고 있었다면, 그 사람은 바로 사도 바울이었을것이다. 왜냐하면, 아무도 그를 ≪주님께 인도하지≫ 않았기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하나님의 직접적인 행하심으로 회심하였다. 그리고 사도행전을 통해, 우리는 성령님의 기름부으심과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들이 성령님과 동역하는것을 통해 교회가 확장되였음을 볼수 있다. 비록 사도행전은 ≪사도들의 행함≫으로 자주 언급되지만 ≪하나님의 행하심≫으로 언급되여야 마땅하다. 누가는 사도행전을 소개하면서, 그의 첫번째 기사(그의 이름을 딴 복음서)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행 1:1, 강조 추가) 기록하였다고 썼다. 누가는 사도행전은 예수님이 계속하여 행하시고 가르치신것을 적었음을 분명히 믿었다. 예수님은 성령님의 기름부으심과 그분과 동역하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종들을 통하여 일하셨다.

만일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나가서 이웃에게 증거 하고 그리스도를 위해 그들이 세상을 이기게끔 도왔다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것에 대한 그들의 책임은 무엇이었을까? 특별히 복음을 대중에게 선포하도록(사도들과 복음 전도자들) 은사를 받고 부르심을 받지 않은 사람들은 순종하고 거룩한 삶을 살도록 부르심을 받았으며 그들에게 욕하거나 질문을 제기하는 하는 자들의 공격을 막안해도록 준비되여야 한다. 례를 들어, 베드로는 이렇게 썼다.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리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량심을가지라 이는 그리스도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3:14-16).

베드로가 박해를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 글을 썼음을 주목하라.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과 구별되지 않는다면, 세상은 (당연히) 그들을 박해하지 않을것이다. 그것은 오늘날 많은 곳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적게 받고 있는 리유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소위 그리스도인이라 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게 행하지 않기때문이다. 그들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므로 아무도 그들을 핍박하지 않는다. 그러나 많은 이런 종류의 ≪그리스도인들≫은 주일 날에 ≪이웃들과 함께 자신의 믿음을 나누라≫는 가르침을 받고 있다. 그들이 이웃에게 믿음을 증거했을 때, 이웃들은 그들이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는것을 알고 매우 놀라고 있다. 더 나쁜것은, 그들이 전하는 ≪복음≫은 선행이나 하나님께 대한 순종은 구원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좋은 소식≫에 불과하며 그냥 ≪예수님을 그들의 개인적인 구주로 영접하기만 하면 된다≫는 식이다.

그것과는 대조적으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그들의 주님은 진정 예수님이였다) 어둠속에서 서 있는 빛과 같았기에 그들은 전도에 관한 수업을 듣거나 그들이 그리스도의 추종자라는것을 이웃에게 말하려고 용기를 낼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의로움을 행함으로 인해 그들에게 의문을 제기하고 욕설을 퍼붓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가 많이 있었다. 그들은 단지 베드로가 말한 대로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삼고 방어할 준비를 하면 된다.

아마도 현대 그리스도인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주요 차이점은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은 그가 알고 있는것과 믿는것 – 우리가 ≪교리≫라고 부르는것에 의해 특징지어진다고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으므로 우리는 그것을 배우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반면,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은 그의 행함에 의해 특징 지어진다고 생각했기에 그들은 그리스도의 계명에 순종하는것에 초점을 맞추였다. 흥미롭게도, 처음 14세기까지 개인 성경을 가진 그리스도인은 실제로 아무도 없었다는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현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는 기본적인 책임인 ≪매일 자신의 성경을 읽는것≫은 불가능했다. 나는 당연히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매일 그들의 성경을 읽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는것이 아니다. 나는 단지 너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경 공부를 하는것을 성경 말씀을 순종하는것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점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결국 (우리의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다른 29,999개의 교단의 그리스도인들을 반대하여) 험담하고 거짓말하고 땅에 보물을 쌓는 교리들을 바로잡은것에 대해 자부감을 느낄것이다.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여 그들이 복음을 더 잘 받아들일수 있게 하려면, 우리는 우리의 교리보다는 우리의 행동에 의해 그렇게 할 가능성이 더 크다.

하나님위대한 복음 전도자시다(God, the Greatest Evangelist)

하나님께서 그분의 나라를 세우시면서 하신 일들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우리가 그분이 행하신 일들을 더 잘 리해할수록, 그분과 더 잘 동역할수 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을 때에는 마음으로 믿는다(롬 10:9-10을 보라). 그들은 주 예수님을 믿기때문에 회개한다. 그들은 자기 뜻을 버리고 예수님의 뜻을 높인다. 믿음은 마음의 변화를 포함한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을 때에도 마음으로 믿지 않는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거역하기에 회개하지 않는다. 그들은 의식적인 결정으로 예수님을 그들의 마음에서 버린다. 불신은 마음을 변화하지 않으려는 지속적인 결정을 포함한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마음이 너무 굳어져 있어 하나님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그분께로 나아가지 않는다고 지적하셨다(요 6:44을 보라). 하나님은 자비를 베푸셔서 여러가지 방법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모든 사람을 예수님께로 이끄시며 그것을 통하여 그들은 반드시 그들의 마음을 굳게 할것인지 아니면 부드럽게 할것인지를 지속적으로 결정해야만 한다.

하나님은 어떤 방법을 사용하셔서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나아가도록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실까?

첫째로, 그분은 그분이 만드신 만물을 사용하신다. 바울은 이렇게 썼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 1:18-20, 강조 추가).

바울은 사람들이 ≪그들 속에 분명히 보여진 진리를 막는다≫고 말했음을 주목하라. 즉, 그 진리가 그들 속에서 떠올라 그들을 대면했지만, 그들은 그것을 밀쳐 내고 내적인 확신을 거부하였다.

모든 사람의 내면에 분명히 보여진 진리는 정확히 무엇일까? 바울은 그것이 하나님이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진 그분의 ≪보이지 아니하는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만드신 만물을 보면 그분의 존재하심을 마음속으로 분명히 알게 되며[1] 그분의 크신 능력, 놀라운 창조와 믿을수 없을만큼의 총명과 지혜를 알게 된다.

바울의 결론은 이런 사람들은 ≪핑계할수 없다≫는것이였다. 그의 생각은 맞았다. 하나님은 지속적으로 모든 사람을 향해 외치시며 자신을 보여주시고 그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려고 노력하시지만, 대부분 사람은 귀를 막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속적으로 기적을 – 꽃, 새, 아기, 눈송이, 바나나, 사과, 그리고 무수히 많은 다른것들을 통하여 그들에게 삶의 전반에 걸쳐 외치시는것을 멈춘 적이 없다.

만일 하나님이 존재하시고 그분은 그분이 만드신 만물이 보여주는만큼 위대하시다면, 우리는 분명히 그분께 순종해야 한다. 사람 내면의 계시가 외치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회개이다! 이런 리유로, 바울은 모든 사람이 이미 하나님의 회개하라는 부르심을 들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냐 그렇지 아니하니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롬 10:18).

바울은 실제로 시편 19편의 잘 알려진 구절을 인용하였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시 19:1-4상, 강조 추가).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분이 만드신 만물을 통해 모든 사람에게 밤낮 말씀하심을 다시 한번 보여준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창조물의 메시지에 올바르게 반응한다면, 땅에 엎드리어 아래와 같은 말을 했을것이다. ≪위대하신 창조주시여, 당신이 저를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당신의 뜻을 위하여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당신께 순종하겠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또 다른 방법(Another Means by Which God Speaks)

이 외적인 계시와 내적인 계시에 관련된 또 다른 내적인 계시도 하나님께서 주신것인데 그것은 창조물의 기적을 보는것을 통한것이 아니다. 이 내적인 계시는 각 사람의 량심이다. 량심은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법을 드러내는 음성이다. 바울은 이렇게 썼다.

(률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률법의 일을 행할때에는 이 사람은 률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률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량심이 증거가 되여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률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곧 나의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롬 2:14-16).

따라서, 모든 사람은 옳고 그름을 분별할수 있다. 더 강경히 말하면, 모든 사람은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무엇이 노하시게 하는지를 알고 있으며 그분은 심판의 날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책임을 물으실것이다. 사람은 나이가 들면서 자신의 죄를 정당화하는데 더 익숙해지며 량심의 소리를 무시하지만, 하나님은 절대로 그들에게 그분의 법을 말씀하시는것을 멈추시지 않는다.

세번째 방법(A Third Means)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가장 위대하신 복음 전도자이신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회개에 이르도록 그들에게 또 다른 방법으로 말씀하신다. 바울의 말씀을 읽어보자.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롬 1:18, 강조 추가).

바울은 하나님의 진노가 언젠가 나타날것이라고 말한것이 아니라 나타난다고 말했음을 주목하라. 하나님의 진노는 많은 슬프고 비극적인 사건과 크고 작은 재앙 속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분명히 나타났다. 만일 하나님이 전능하시고 모든 일을 행하실수 있고 모든 일을 막으실수 있다면, 그분을 무시하는 사람들에게 재앙이 일어났다는것은 그분의 진노가 나타났다는것을 의미할수밖에 없다. 단지 무감각한 신학자와 어리석은 철학자들만이 이것을 볼수 없을 뿐이다. 그러나 그분의 진노 속에도 그분의 자비와 사랑이 나타난다. 왜냐하면, 진노의 대상은 종종 그들이 받아야 할 진노보다 훨씬 적은 진노를 받고 있으며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는 영원한 진노에 대해 경고받고 있기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회개해야 할 사람들의 주의를 끄시기 위해 사용하시는 또 다른 방법이다.

네번째 방법(A Fourth Means)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창조, 량심과 재앙을 통해 사람을 이끄실 뿐 아니라 복음을 통하여 각 사람을 부르신다. 왜냐하면, 그분의 일꾼들은 그분께 순종하고 복음을 전할때 창조, 량심, 재앙에 관한 메시지를 재확인하여 회개를 촉구하고 있기때문이다.

당신은 복음화를 위해 우리가 한 일과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비교할수 없다는것을 알수 있다. 가장 위대한 복음 전도자가 몇년을 걸쳐 수십만명에게 복음을 전할수 있는것에 반하여, 그분은 지속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매일 삶의 모든 순간을 통하여 복음을 전하신다. 그리고 그 복음 전도자들은 일반적으로 특정 그룹의 사람들에게 짧은 시간동안 한번만 설교한다. 사실, 이런 전도자들이 예수님의 계명대로 그들의 말을 듣지 않는 집이나 마을이나 도시에서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고 떠날수 있도록 허용받은 기회도 한번밖에 없다(마 10:14을 보라). 이 모든것은 우리의 매우 제한적인 복음 전도는 하나님의 전 인류를 향한 끊임없고 극적이고 내면적인 복음 전도와는 비교되지 않음을 말하려는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우리가 복음화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데서의 우리의 책임을 더 잘 리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우리의 역할에 대해 더 자세히 살펴보기전에,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다른 하나의 중요한 요소가 있다.

이전에 언급한 바와 같이, 회개하고 믿는것은 사람들이 마음으로 하는 일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자신을 낮추고 마음을 부드럽게 하여 회개하고 주 예수님을 믿기를 바라신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지속적으로 설명한것과 같이 다양한 방법으로 사람들의 마음에 역사하신다.

하나님은 물론 모든 사람의 마음 상태를 알고 계신다. 그분은 누구의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누구의 마음이 굳어지고 있는지를 아신다. 그분은 누가 그분의 영원한 메시지를 듣고 누가 무시하는지를 아신다. 그분은 누가 삶속에서 재앙을 겪은후 마음의 문을 열고 회개하는지를 아신다. 그분은 누구의 마음이 너무 강퍅하여 회개할 희망이 없는지를 아신다. (례를 들어, 그분은 예례미야에게 세번이나 이스라엘을 위해 기도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그들의 마음 상태가 회개하기에는 이르렀기때문이다; 렘 7:16; 11:14; 14:11을 보라.)[2] 그분은 누구의 마음이 부드러워져서 단지 성령님께서 조금만 확신을 주시면 회개할수 있는지를 아신다.

이 모든것을 고려했을 때, 복음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움에 있어서, 우리는 교회의 책임에 대해서 과연 무엇을 배울수 있을까?

원칙 1 (Principle #1)

첫째, 전체 복음화 작업의 95%를 감당하고 계시고 끊임없이 매일 사람들을 향해 외치시는, 가장 위대한 복음 전도자이신 하나님께서 그분의 일꾼들을 마음이 굳어진 사람보다 마음이 가장 열려있는 사람들에게 보내여 복음을 전하게 하신다는것이 합리적이지 않을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또한, 이미 모든 사람에게 그들 삶의 매 순간마다 복음을 전파하신 위대한 전도자 하나님께서 수년동안 그분의 말씀을 무시해왔던 사람들에게 더 이상 복음을 보내지 않음으로써 그들을 귀찮게 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왜 그분은 그분께서 이미 말씀하신 95%의 내용을 무시하는 자들에게 나머지 5%를 들려주시기 위해 노력하시겠는가? 나는 하나님께서 그들이 마음을 부드럽게 하기를 바라시는 마음에서 그들에게 심판을 내리실 가능성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그렇게 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그분의 일꾼들을 보내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실것으로 생각하는것이 합리적인것 같다.

일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회개하지 않을 사람들에게 그분의 일꾼들을 보내셔서 그들이 그분 앞에서 심판을 받을 때 핑계할수 없게 하실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명심할것은, 성경에 따르면, 그런 사람들은 이미 하나님 앞에서 핑계하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분의 창조물을 통하여 그들에게 끊임없이 그분 자신을 보여주셨기때문이다(롬 1:20). 따라서, 하나님께서 이러한 사람들에게 그분의 일꾼들을 보내셨기때문에 그들이 책임을 져야 하는것이 아니라 그들은 이때문에 더 큰 책임을 져야 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복음에 더 수용적인 사람들에게 그분의 일꾼들을 보내신다는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그분의 일꾼으로서 추수하기에 합당한 사람들에게 인도될수 있게끔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그분의 지혜를 구해야 한다.

성경의 (A Scriptural Example)

이 원칙은 사도행전에 기록된 복음 전도자 빌립의 사역에서 잘 드러났다. 빌립은 사마리아의 복음에 수용적인 무리에게 복음을 전하였지만, 나중에 한 천사의 지시를 받고 다른 길에 들어선다. 그곳에서 그는 복음에 매우 수용적인 구도자를 만나게 된다.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말하여 이르되 일어나서 남쪽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관리인 내시가 례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는데 수레를 타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더라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수레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는것을 보고 말하되 읽는것을 깨닫느냐 대답하되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수 있느냐 하고 빌립을 청하여 수레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니라 읽는 성경 구절은 이것이니 일렀으되

그가 도살자에게로 가는 양과 같이 끌려갔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이 조용함과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가 굴욕을 당했을 때 공정한 재판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그의 세대를 말하리요 그의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하였거늘

그 내시가 빌립에게 말하되 청컨대 내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한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냐 자기를 가리킴이냐 타인을 가리킴이냐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그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냐 이에 명하여 수레를 멈추고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베풀고 둘이 물에서 올라올새 주의 령이 빌립을 이끌어간지라 내시는 기쁘게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행 8:26-39).

빌립은 하나님께 례배하기 위해 아프리카에서부터 예루살렘까지 온, 그리고 적어도 일부 이사야 예언서의 두루마리 사본을 돈을 주고 구매한, 령적으로 굶주려 있는 사람에게 사역하도록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았다. 그 사람은 이사야서 53장을 읽으면서(이것은 구약 성경에서 예수님의 대속에 대해 가장 명확하게 쓴 부분이다), 이사야가 쓴 사람이 누구인지가 궁금했었는데 바로 그 때, 빌립이 나타나서 그에게 그 말씀의 의미를 설명해 주었다! 그는 회심할 준비가 되여있었다! 하나님은 그의 마음을 아셨기에 빌립을 보내셨다.

나은 방법(A Better Way)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복음에 수용적인 사람에게 전도하는것은 우리가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전도하지 않으면 그들이 복음화되기 어렵다는 생각때문에 무작위로 또는 체계적으로 그들에게 전도하는것보다 훨씬 효과적이다. 당신이 만나는 모든 사람은 이미 하나님의 끊임없는 전도를 받아왔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한 사람의 하나님에 대한 수용 여부를 확인하려면 먼저 그들의 량심이 그들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물어봐야 할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모두 모종의 방법으로 죄책감에 대응하기때문이다.

이 같은 원칙의 또 다른 예는 고넬료의 한 가족이 베드로의 사역을 통하여 회심한 사건이다. 베드로는 초자연적인 인도하심을 받아 복음에 매우 수용적인 이 이방인 가족에게 설교하였다. 고넬로는 그의 구제와 기도생활이 보여주다시피 량심의 소리를 듣고 하나님을 추구했던 사람이었음이 틀림없다(행 10:2). 하나님은 그를 베드로와 련결해주셨고 그는 열린 마음으로 베드로의 메시지를 듣고 영광스럽게 구원받았다.

우리가 성령님께서 우리를 마음이 열려있는 사람에게로 인도하시기를 간구하는것은 도시를 여러 구역으로 분할한후 복음을 증거하는 팀을 만들어 집집마다 다니면서 전도하게 하는 광범위하고 시간을 랑비하는 계획을 세우는것 보다 훨씬 더 현명하다. 만일 베드로가 예루살렘에서 선교 전략회의에 참석했다거나 빌립이 사마리아에서 계속하여 복음을 전했다면, 고넬료의 가족과 에디오피아의 낸시는 아직도 복음을 듣지 못했을것이다.

물론, 복음 전도자와 사도들은 복음을수용하는 사람들과 거부하는 사람들이 섞인 무리 앞에서 복음을 선포하게 될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께서 그들이 어디에서 복음을 전하기를 원하시는지에 대해 인도하심을 구해야 할것이다. 사도행전의 기록은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그분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들이 성령님과 동역하여 그분의 나라를 세워가는것임을 볼수 있다. 초대 교회의 전도 방법은 현대 교회에 비하면 많이 다르며 그 결과도 많이 다르다! 왜 그토록 성공적인 모식을 본받지 않는가?

원칙 2(Principle #2)

우리가 이 장의 첫 부분에서 고려했던 성경의 원칙들은 복음화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데서의 우리의 역할을 리해하는데 또 어떤 도움을 줄수 있을까?

만일 하나님께서 창조물, 량심, 재앙을 설계하신것은 모두 사람을 회개하게 하기 위함이라면,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들은 그것과 모순된 메시지를 선포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러나 그런 일들은 너무 많이 발생하고 있다! 그들의 설교는 하나님께서 이미 죄인에게 말씀하시려고 했던것과 직접 모순된다! 그들은 거룩함과 순종이 궁극적인 영생을 얻는데 중요하지 않다는 비성경적인 은혜를 주장하고 있다. 구원을 위한 회개의 필요성을 언급하지 않고 구원이 행함으로 이루어지는것이 아니라는것을 강조함으로써(바울은 종래로 이렇게 리해되기를 뜻하지 않았다), 그들은 실제로 하나님을 대적하여 사람들을 더욱 큰 미혹에 빠지게 하여 영원한 파멸로 이끌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실제로 구원받지 못한 상태에서 구원받았다고 확신하고 있기때문이다. 하나님의 사자가 하나님을 대표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다는것은 얼마나 큰 비극인가!

예수님은 우리에게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눅 24:47)를 전파하라고 명하셨다. 그 메시지는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그의 전체 생애를 통하여 하시는 말씀을 재확인시켜준다. 복음을 전파하는것은 사람의 마음을 찌르게 되며 마음이 굳은 사람들을 불쾌하게 한다. 그러나 현대의 복음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얼마나 그들을 사랑하시는지를 알려주는데(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복음을 전파할때 누구도 이 부분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었다),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은 그들에게 성내시지 않는다는 오해를 하게 만든다. 그들은 종종 그저 ≪예수님을 영접하기만 하면 된다≫는 말을 듣는다. 그러나 만왕의 왕이신 주님은 우리의 영접이 필요없다. ≪당신은 예수님을 영접하였는가? ≫라고 물어볼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당신을 받아들이셨는가? ≫라고 물어야 할것이다. 그리고 대답은 당신이 회개하고 그분을 따르지 않는 한, 당신은 그분께 혐오스러운 존재이며, 오직 그분의 자비만이 지옥으로 향하는 당신의 운명을 늦춰줄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값 내려가게 하는 현대의 복음에 비추어 보면, 나는 왜 하나님께로부터 권세를 받은 지도자들의 통치를 받는(이것은 론쟁의 여지가 없다; 단 4:17, 25, 32, 15:21; 요 19:11; 행 12:23; 롬 13:1을 보라), 그렇게 많은 나라들이 서방의 선교사들에게 완전히 폐쇄적인지 궁금하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나라들을 거짓 복음으로부터 보호하시기 위함은 아닐까?

원칙 3(Principle #3)

이 장의 앞부분에서 살펴보았던 원칙들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거짓 종교를 따르고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보시는지를 더 잘 리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그들은 진리를 들어 본 적이 없으므로 동정해야 할 무지한 사람들인가? 이 모든 책임은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하지 못한 교회에 있을까?

아니, 그런 사람들은 진리에 대해 무지하지 않았다. 그들은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이 알고 있는 모든것을 다 알지 못할수는 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께서 창조물, 량심, 재앙을 통하여 드러내신 그분 자신에 대해서는 다 알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삶 전체를 통하여 회개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다. 비록 그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았거나 복음을 들어보지 못했다 할찌라도 말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향하여 자신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지 않으면 굳어지게 하였다.

바울은 불신자들의 무지함에 대해 쓰면서 그 리유에 대해 밝혔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여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것을 욕심으로 행하되(엡 4:17-19).

이방인들이 무지한 리유가 ≪그들의 마음이 굳어졌기때문임≫을 주목하라. 바울은 또한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였다고 선었하였는데 그들의 마음 상태를 말하였음이 분명하다. 손의 굳은살은 부드러운 피부가 거친것과 지속적으로 접촉하면서 형성된다. 굳은살은 덜 민감하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창조물, 량심과 재앙을 통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거역하면 그들의 마음은 점차 덜 민감해지게 된다. 이때문에 사람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일반적으로 복음에 덜 수용적이라는 통계가 나온다. 나이가 든 사람일수록 회개할 가능성이 작다. 지혜로운 전도자는 주로 젊은 사람들을 목표로 삼는다.

불신자들의 죄(The Guilt of the Unbelieving)

하나님께서 복음 전도자에게서 복음을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죄를 물으신다는 추가적인 증거는 그분께서 그들을 적극적으로 심판하신다는 사실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죄를 물으시지 않는다면, 그들에게 형벌을 내리시지도 않을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징벌하시므로 우리는 그분께서 그들의 죄를 물으심을 확신할수 있다. 그리고 그분께서 그들의 죄를 물으신다면, 그들은 무엇이 그분을 기쁘시게 못하는지를 분명히 알고 있다.

하나님께서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징계하시는 한가지 방법은 그들을 그들의 마음의 정욕대로 ≪내버려 두심으로써≫ 더 타락하게 만드는것이다. 바울은 이렇게 썼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여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이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녀자들도 순리대로 쓸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녀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롬 1:21-32, 강조 추가).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의 죄와 책임을 강조하였음을 주목하라.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을 알고는 있지만, 그분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것으로 바꾸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 들어보았음이 틀림없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들이 타락한 삶을 살도록 ≪내버려 두셨으며≫ 그들은 죄의 노예가 되여갈수록, 가장 기괴하고 순리를 거스르는 변태적인 일을 하는 정도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하나님은 실제로 ≪네가 나를 섬기는 대신 죄를 섬기려고 하느냐? 그럼 네 마음대로 하거라. 내가 말리지 않을 테니. 하지만 너는 네가 사랑하는 우상에게 점점 더 매이게 될것이다. ≫라고 말씀하시는것과 같다.

나는 사람들이 이러한 심판을 하나님의 자비의 표시로 여길수도 있다고 가정한다. 정상적으로, 사람은 더 완악해지고 죄악스러워질수록 자신의 죄을 깨닫고 정신을 차릴것이다. 왜 많은 동성애자들이 자신에게 ≪왜 나는 실제로 완전한 성관계를 가질수 없는 동성한테 성적 매력을 느낄까? 이것은 이상한 짓이다!≫라는 질문을 해보지 않는지 궁금할것이다. 모종 의미에서 사람들은 실제로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렇게 만드셨다≫고 주장할수 있다(그들은 종종 자신을 위해 이렇게 변명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것을 허용하시는것은 그들이 정신을 차려 회개하고 그분의 놀라운 자비를 경험하게 하기 위한 바램때문이다.

스스로 그 같은 질문을 해야 하는것은 동성애자뿐만이 아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섬기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내려진 그분의 심판의 증거로 많은 죄를 라렬하였다. 수십억의 사람들은 자신의 이상한 행동에 대해 스스로 질문해야 한다. ≪왜 나는 내 자신의 가족을 미워하는가?≫, ≪왜 나는 남의 험담을 하는것에서 만족하는가?≫ ≪왜 나는 자신이 소유한것에 대해 만족한 적이 없는가?≫ ≪왜 나는 점점 더 노골적인 포르노를 보는것을 억제할수 없는가?≫ 하나님은 그들을 자신의 우상에게 매이도록 내버려 두셨다.

물론, 어느 시점에 있든지 누구나 다 자신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여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을수 있다. 이 땅에서 가장 완악한 죄인 중 일부는 그렇게 하였고, 하나님은 그들을 죄로부터 깨끗하게 하시고 자유롭게 하셨다! 사람이 살아 숨 쉬고 있는 한, 하나님은 여전히 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시고 있다.

핑계할수 없다(No Excuses)

바울에 따르면 죄인은 핑계할수 없다. 그들은 다른 사람을 판단할때, 이미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의 판단을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것은 남을 판단하는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줄로 생각하느냐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롬 2:1-4).

바울은 하나님의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은 사람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시기 위함이라고 말했다. 또한, 바울이 계속하여 쓴것과 같이, 회개하고 거룩한 삶을 사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는다.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분노로 하시리라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령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며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롬 2:5-10).

분명히 바울은 사람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기만 하면≫ 영생을 얻는다는 가르침에 동의하지 않을것이다. 오히려, 회개하고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만이 영생을 얻을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들이 기독교가 아닌 다른 종교를 믿어도 회개하고 하나님께 순종하기만 하면 구원받을수 있음을 의미할까?

아니, 예수님을 떠나서는 구원받을수 없다. 거기에는 여러가지 리유가 있는데 그 중 한가지는 예수님만이 사람을 죄에서 자유롭게 하실수 있기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회개 하고 싶은데 예수님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다면 어떻게 예수님께 부르짖을수 있을까?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은 진심으로 그분을 찾는 사람에게 그분 자신을 드러내실것이다. 예수님은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것이다≫(마 7:7)라고 약속하셨으며,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그분을 찾기를 바라신다(행 17:26-27을 보라). 그분은 누군가의 마음이 그분의 끊임없는 복음화에 응답하는것을 보시면, 그분께서 에디오피아 내시와 고넬료 가족에게 하셨던것처럼 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실것이다. 다소의 사울의 회심에서 립증하시다시피, 하나님은 교회의 참여에만 의지하시지 않는다. 진심으로 구주를 찾는 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하나님은 직접 전하실것이다! 나는 폐쇄 국가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환상을 보고 회심했다는 수많은 현대의 사례들을 들은 적이 있다.

사람이 종교적인 리유(Why People Are Religious)

사실은 거짓 종교를 믿는 대부분 사람들은 신실한 구도자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단지 자신의 죄를 정당화하거나 덮기 위해 종교를 믿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지속적으로 자신의 량심을 위반하기에 종교의 탈을 쓰고 뒤에 숨으려 하기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의 종교심때문에 지옥에가지 않을것이라고 자신을 설득한다. 이것은 불교, 이슬람교, 힌두교가 그런것처럼 종교적인 ≪그리스도인≫(싸구려 은혜의 복음을 주장하는 그리스도인을 포함한다)도 마찬가지이다. 심지어 그들은 종교활동을 할때에도, 량심의 정죄를 받는다.

불교 신자가 경건하게 자신의 우상에게 또는 그의 앞에 앉아 있는 승려에게 절할때에도 그의 량심은 그가 잘못하고 있다고 알려준다. 힌두교 신자가 병에 걸린 길거리의 거지가 전생에 죄를 지었기에 고통받는것이라고 정당화하며 불쌍히 여기지 않은것에 대해서도 그의 량심은 그를 정죄한다. 이슬람 극단주의자가 알라의 이름으로 ≪이교도≫의 머리를 벨때, 그의 량심은 그에게 살인한 위선자로 외치고 있다. 복음주의 ≪그리스도인≫이 세상의 보물을 쌓고, 정기적으로 색정적인 텔레비죤을 보고, 교인들의 험담을 하면서 자기가 은혜로 구원받았다고 믿는다면, 그의 량심은 그를 정죄할것이다. 이 모든것은 계속하여 죄를 짓기를 원하면서 그것을 합리화해주는 종교적인 거짓말을 찾아낸 사람들의 례이다. 거듭나지 못한 종교적인 사람들의 ≪의로움≫은 하나님의 기대에 전혀 미치지 못한다.

이 모든것은 거짓 종교를 따르는 사람들이 진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고 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을 불쌍히 여김을 받을만한 무지한 사람으로 보시지 않는다는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또한, 하나님은 그들의 무지함을 교회가 그들에게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하지 못한 탓으로 돌리시지 않을것이다.

다시 한번, 우리는 하나님께서 교회가 전 세계에 복음을 전파하기를 원하시는것을 알지만,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추수할 밭≫을(요 4:35을 보라) 찾아야 한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말미암아 마음이 부드러워졌기때문에 복음에 수용적이다.

원칙 4(Principle #4)

우리가 이 장의 앞부분에서 살펴보았던 성경의 진리에서 알수 있는 마지막 원칙은 이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죄인들이 마음을 부드럽게 하기를 원하시는 마음에서 적극적으로 그들의 죄를 심판하신다면, 우리는 일부 죄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견디거나 다른 사람이 견디는것을 보는것을 통하여 자기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할것을 기대해야 한다. 따라서, 재앙이 지나간후에는 믿지 않던 사람에게 다가갈수 있는 기회가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사람들이 고통받는 곳에서 복음을 전할수 있는 기회를 찾아야한다. 례를 들어, 최근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더 열려있을수 있다. 내가 목사로 섬기고 있을 때, 나는 항상 ≪초상집에 가는것이 잔칫집에 가는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전 7:2, 강조 추가)라는 말씀을 기억하고 장례식에서 복음을 전할 기회를 붙잡았다.

사람들은 질병, 재물의 손실, 깨진 관계, 자연재해, 죄의 결과와 죄에 대한 심판으로 말미암아 고통받을 때 응당 자기가 받는 고통이 정신 차리라는 경고임을 알아야 한다. 일시적인 고통을 통해 하나님은 죄인들을 영원한 심판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노력하신다.

요약(In Summary)

하나님은 그분의 나라를 세우시는 일의 대부분을 행하신다. 우리의 책임은 그분과 지혜롭게 동역하는것이다.

모든 신자는 거룩하고 순종적인 삶을 삶으로써 어둠속에 있는 사람들의 주의를 끌어야 하며 그들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리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것을 항상 준비하여야 한다.

하나님은 지속적으로 창조물, 량심, 재앙을 통하여, 그리고 어떤때에는 복음을 통하여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심으로써 그들이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회개하도록 역사하신다.

죄인들은 그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그들이 복음을 들어본 적이 없다 할찌라도 하나님께 책임을 져야 한다는것을 알고 있다. 그들의 굳어진 마음이 곧 죄의 증거이다. 그들이 점점 더 타락하고 죄의 노예가 되여가는것은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의 표시이다.

종교적인 사람들이 반드시 진리를 추구하는것은 아니다. 그들은 그들의 종교의 거짓말을 믿는것을 통하여 자신의 죄를 정당화할 가능성이 크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마음 상태를 알고 계신다. 비록 그분은 우리를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에게 인도하실수도 있지만, 복음에 수용적인 사람에게 인도하실 가능성이 더 크다.

하나님께서 고통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기때문에, 우리는 그런 기회를 잡아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하기를 원하시지만, 우리가 그분의 지상명령을 이룸에 있어서 사도행전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르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진심으로 그분을 찾는 자에게 자신을 보여주실것이다 .

하나님은 우리가 전하는 메시지가 그분의 메시지와 일치하기를 원하신다.

언젠가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 모든 민족의 대표들이 모여 그분을 경배할것인데, 우리는 그 날이 올때까지 하나님과 동역하는 역할을 다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모든 백성은 그들이 만나는 모든 민족의 일원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 주어야 한다. 하나님은 그분의 일부 일꾼들이 특히 다른 문화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교회 개척자를 파송하고 지원하거나 직접 가게끔 인도하실수 있다. 파송 받은 사람들은 제자를 삼아 그들이 제자 삼는 사역자임을 증거해야 한다!

맺는말(Final Words)

나는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이 책을 당신의 언어로 출판하여 당신이 읽을수 읽게 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나는 이 책이 당신에게 축복이 되였기를 바랍니다. 만일 이 책이 당신에게 축복이 되었다면, 저한테 편지로 그것을 알려주겠습니까? 제가 영어밖에 읽을수 없기에 당신은 영어로 편지를 쓰거나 영어로 번역한 뒤 저한테 보내줘야 합니다!

저한테 편지를 보낼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전자 메일로 보내는것입니다. 나의 전자 메일 주소는 다음과 같습니다: [email protected]. 당신이 전자 메일을 사용할수 없다면, 내가 사역하는 곳으로 보내주면 됩니다. 하지만 이 책을 받은 시기에 따라 주소가 변경될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2006년도 주소는 Shepherd Serve, P.O. Box 12854, Pittsburgh, PA 15241 USA입니다.

 


[1]바로 그 리유때문에 성경은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한다≫고 선언했다(시 14:1, 강조 추가). 오직 어리석은 자만이 이같이 명백한 진실을 부인한다.

[2]이 외에도, 성경은 하나님께 지속적으로 마음이 강퍅한 사람들의(바로와 같은) 마음을 더 강퍅하게 하실수 있음을 가르치고 있다. 이런 사람들은 회개할 가능성이 거의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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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th Korean » 전도의 비밀(Secrets of Evangelism)

령적 전쟁에 관한 현대 신화 부

제31장(Chapter Thirty-One)

이 장에서 우리는 계속하여 사탄과 령적 전쟁에 관한, 잘못되였지만 널리 보급되고 있는 가르침에 대해 추가로 살펴볼것이다. 결론에서, 우리는 성경이 실제로 가르치는, 모든 신자가 연습해야 하는 령적 전쟁에 관해서 살펴볼것이다.

신화 5: ≪우리는 령적 전쟁을 통해 공중에 있는 마귀의 요새를 무너뜨릴수 있다.≫(Myth #5: We can pull down demonic strongholds in the atmosphere through spiritual warfare.)

성경에 따르면, 사탄이 이 땅의 공중에 거하면서 그를 도와 어둠의 나라를 통치하는 악의 령들의 계층 구조를 지배한다는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 악의 령들은 ≪지역적≫으로 분포되여 특정 지리적 지역을 통치하는데 이 점 또한 성경에 언급되었다(단 10:13, 20-21; 막 5:9-10을 보라).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사람에게 들린 귀신을 쫓아낼 권한과 책임이 있다고 보는것은 성경적이다(막 16:17; 약 4:7; 벧전 5:8-9을 보라).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도시의 악령을 이길수 있을까? 대답은 그럴수 없다. 또한, 그렇게 하려고 시도하는것은 시간 랑비일 뿐이다.

우리가 사람들에게서 귀신을 쫓아낼수 있다고 하여 우리가 도시의 악령도 이길수 있다고 가정하지 말아야 한다. 복음서와 사도행전에는 귀신을 쫓아낸 수많은 사례가 있지만, 당신은 복음서나 사도행전에서 누군가가 한 도시 또는 지역을 통치하는 악령을 이겼다는 사례를 단 한번이라도 읽어본 적이 있는가? 그런 사례가 존재하지 않기에 당신은 읽어보았을 리가 없다. 당신은 서신서에서 우리가 공중의 악령을 이겨야 할 책임이 있다는 가르침을 본 기억이 있는가? 없을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가르침은 존재하지 않기때문이다. 이러한 리유때문에, 우리가 공중의 악령에 대하여 ≪령적 전쟁≫을 벌릴수 있다거나 또는 벌려야 한다고 믿는것은 성경적인 근거가 없다.

비유에 대한 지나친 해석(Pushing Parables Too Far)

그리스도인들은 종종 은유가 포함된 성경 구절을 읽을 때 하나님이 의도하신것보다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하는 잘못을 범한다. 은유적인 언어를 잘못 해석한 전형적인 예는 ≪요새를 무너뜨리는≫것에 대한 바울의 말이다.

우리가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리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 아는것을 대적하여 높아진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너희의 복종이 온전하게 될때에 모든 복종하지 않는것을 벌하려고 준비하는 중에 있노라(고후 10:3-6).

제임스 버전에서는 우리가 ≪모든 리론을 무너뜨린다≫고 쓴것이 아니라 ≪요새를 무너뜨린다≫고 썼다. 이 하나의 은유적인 표현으로부터, 공중의 악령들이 거하는 ≪요새를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령적 전쟁≫을 해야 한다는 주장을 지키기 위해 실질적으로 완전한 신학체계가 세워졌다. 하지만 새로운 미국 표준 버전의 명확한 해석에 따르면, 바울은 공중의 악령을 말한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거짓 믿음의 요새를 말한것이다. 바울은 높은 곳에 있는 악한 령이 아닌, 리론들을 무너뜨린것이다.

우리가 문맥적으로 읽어보면, 이 점은 더 뚜렷해진다. 바울은 ≪모든 리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 아는것을 대적하여 높아진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강조 추가)라고 말하였다. 바울이 상징적으로 썼던 전쟁은 생각 또는 인식에 대한 전쟁이며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것에 대적한다.

바울은 군사적인 은유를 사용하여, 우리가 사탄의 거짓말을 믿는 사람들의 마음에 대한 전투를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전투에서 우리의 주요 무기는 진리이며, 진리로 말미암아 우리는 전 세계로 가서 복음을 전파하여, 사로잡힌 자들에게 자유를 줄수 있는 메시지로 적의 령토에 침입하도록 명령받았다. 우리가 무너뜨려야 할 진은 거짓말과 속임수로 세워졌다.

하나님의 전신 갑주(The Whole Armor of God)

바울이 쓴 글 중에 종종 잘못 해석되는 또 다른 구절은 우리가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어야 할 책임에 관해 쓴 에베소서 6:10-17에서 발견된다. 이 구절이 마귀와 악의 령들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싸움에 관한것은 확실하지만, 도시의 악령을 이기라는 언급은 없다. 우리가 이 구절을 자세하게 살펴보면, 바울은 주요하게 각 개인이 자신의 개인 생활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적용하여 사탄의 계략에 저항해야 할 책임에 관해 썼음이 분명해진다 .

우리가 이 말씀을 읽을 때, 또한 은유적인 언어로 쓴것이 분명한 부분을 주목해야 한다. 바울이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몸에 갑주를 입어야 한다고 말한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오히려 그가 쓴 전신 갑주는 비유적이다. 갑주의 각 부분은 그리스도인들이 마귀와 악령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사용해야 하는 다양한 성경적인 진리를 나타낸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믿고 또 적용하는것을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은 비유적으로 말하여 하나님의 갑주를 입었다고 할수 있다.

에베소서의 이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면서, 바울이 우리에게 진정 전달하려고 했던것이 무엇인지를 자신한테 물어보자.

우리의 령적인 힘의 근원(The Source of Our Spiritual Strength)

첫째로, 우리는 ≪주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 지라≫(엡 6:10)는 분부를 받았다. 강조점은 우리의 힘이 우리 자신이 아닌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진일보 바울의 다음 주장을 가져온다: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엡 6:11). 이것은 우리의것이 아닌 하나님의 갑주이다. 바울은 하나님 자신이 갑주를 입으신다고 한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제공하신 갑주가 필요하다고 말한것이다.

왜 우리는 하나님이 제공하신 갑주가 필요할까? 그것은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함이다≫(엡 6:11). 이 갑주는 주요하게 방어하기 위함이지 공격하기 위함이 아니다. 따라서 전신 갑주는 우리로 하여금 나가서 도시의 악령을 무너뜨릴수 있게 하는것이 아니라 사탄의 간계에 대적하여 굳게 설수 있게 해준다.

우리는 마귀가 우리를 공격하기 위한 악한 계획을 갖고 있으며 우리가 하나님이 제공하신 전신 갑주를 입지 않으면 공격받기 쉽다는것을 알았다. 또한, 전신 갑주를 입는것은 우리의 책임이지 하나님의 책임이 아님을 주목하라.

계속하여 읽어보자.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령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여기에서 바울이 혈과 육의 전쟁을 말한것이 아니라 령적인 전쟁을 말한것임이 더욱 명백해진다. 우리는 바울이 라렬한 다양한 계층의 악의 령들의 간계와 싸우고 있다. 대부분의 독자들은 바울이 악의 령들을 아래에서 위로의 순서로 라렬했으며, ≪통치자≫가 가장 낮은 계층이고, ≪하늘에 있는 악의 령들≫이 가장 높은 계층이라고 가정한다.

우리는 어떻게 령적인 존재에 대적할수 있을까? 그 질문은 ≪령적인 존재가 어떻게 우리를 공격할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통해 해답 될수 있다. 그들은 주로 유혹, 생각, 제안,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모순되는 인식들을 통해 우리를 공격한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믿고, 순종함으로써 방어할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후에 서기 위함이라(엡 6:13).

다시 한번, 바울의 목적은 우리를 장비시켜 사탄의 공격에 대적하고 서게 하려는것임을 주목하라. 그의 목적은 우리가 나가서 사탄을 공격하고 공중의 악령들을 이기는것이 아니다. 이 구절에서 바울은 우리에게 세번이나 굳게 서라고 말했으며 우리는 공격이 아닌 방어의 위치에 있다.

진리 우리의 주요한 방어(Truth–Our Primary Defense)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엡 6:14 상).

진리는 우리의 갑주를 고정해준다. 진리는 무엇인가? 예수님은 그분의 아버지께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 17:17)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사탄의 거짓말을 대적하는 진리를 알지 못하면 그의 공격 앞에 굳게 서기 어렵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사탄의 시험을 받으실때, ≪기록하였으되≫라는 말씀으로 그의 모든 제안을 대답하심으로써 이 점을 잘 보여주셨다.

바울은 계속하여 말하였다.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엡 6:14 하).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두가지 의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첫째,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를 선물로 받았다(고후 5:21을 보라). 그분의 의는 그들의 죄를 십자가에서 담당하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전가 되었다. 그 의는 우리를 사탄의 권세에서 벗어나게 하였다.

둘째, 우리는 의롭게 살고 예수님의 계명에 순종하여야 한다. 그것은 아마도 바울이 의의 흉배에 대해 생각했던 바일것이다. 그리스도께 순종함으로써, 우리는 마귀에게 틈을 주지 않게 된다(엡 4:26-27을 보라).

복음의 신을 신고 굳게 서라(Firm Footing in Gospel Shoes)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것으로 신을 신고(엡 6:15).

복음의 진리를 알고, 믿고, 적용하는것은 우리에게 사탄의 공격에 대적할수 있는 견고한 발판을 제공한다. 로마 군인들이 착용한 신발의 바닥에는 스파이크가 있어 전장에서 굳게 설수 있게 해준다. 예수님이 우리의 주님이 되실때, 우리는 사탄의 거짓말에 대적하여 굳게 설수 있다.

모든것 우에 믿음의 방패를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엡 6:16).

바울의 강조점이 우리의 방어 자세에 있음을 다시 한번 주목하라. 그는 우리가 도시의 귀신을 무너뜨리는것에 관해 말하지 않았다. 그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으로 마귀의 거짓말을 대적하는것에 관해 말하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대로 행한다면, ≪악한 자의 불화살≫에 비유된 사탄의 거짓말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는 방패를 가진것과 같다.

우리의 령적인 검인 하나님의 말씀(Our Spiritual Sword–God’s Word)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가지라(엡 6:17).

구원은, 성경의 설명처럼, 사탄의 속박에서 우리를 건져내는것을 포함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골 1:13). 이것을 아는것은 우리가 우리의 생각을 우리가 여전히 그의 권세 아래에 있다는 사탄의 거짓말을 믿는것으로부터 보호해주는 투구를 가진것과 같다. 사탄은 더 이상 우리의 주인이 아니며 예수님만이 우리의 주인이시다.

또한, 우리는 바울이 설명한 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비유인 ≪성령의 검≫을 가져야 한다. 내가 이미 언급 한 바와 같이, 예수님은 그분의 령적인 검을 능숙하게 다루시는 령적 전사의 완벽한 모델이다. 그분께서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시는동안, 그분은 매번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인용하여 사탄의 제안에 답하셨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령적 전투에서 마귀를 물리치고 그의 속임수에 빠지지 않으려면 반드시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믿어야 한다.

또한, 예수님께서 ≪성령의 검≫을 방어용으로 사용하셨음을 주목하라.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쓴 전신 갑주가 주로 방어하는데 사용된다고 믿는 우리에게 검은 명백히 공격용이라고 지적하고 싶어한다. 따라서, 그들은 무력한 논거로 에베소서 6:10-12의 말씀이 우리가 공격적으로 하늘에 있는 악의 령들의 ≪요새를 무너뜨려야≫ 할 책임이 있다는것을 보여준다는 리론을 정당화하려 한다.

분명히, 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여야 하는지에 대한 바울 자신만의 리유를(그렇게 하여야만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할수 있다) 읽는것을 통하여 우리는 그가 전신 갑주를 주로 방어용으로 사용하는것에 대해 말하고 있음을 알수 있다. 또한, 비록 검이 공격 무기로 생각 될수 있지만, 그것으로 상대가 칼로 찌르는것을 막고 보호할수 있기에 방어용으로 생각될수도 있다.

더욱이, 우리는 전체 비유를 왜곡하지 않도록 반드시 주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존재하지도 않는 갑주의 여러 부분들의 의미를 짜내려고 시도하는것이 될수 있기때문이다. 우리가 검의 방어와 수비의 특성을 논할때, 우리는 비유를 ≪너무 지나치게 해석하여≫ 단순한 비유를 분해하여 저자가 의도하지 않은 방식으로 분석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더러 강한 자를 결박하라고 가르치지 않으셨는가?(But Didn’t Jesus Instruct Us to Bind the Strong Man?)

우리는 예수님께서 신약 성경에서 ≪강한 자를 결박하라≫는 언급을 세번 하신것을 찾을수 있다. 그러나 이 세번의 사례에서, 그분은 그분의 추종자들에게 ≪강한 자를 결박하는것≫을 실천하라고 말씀하신 적은 없다. 그럼 예수님이 정확히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그가 바알세불이 지폈다 하며 또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예수께서 그들을 불러다가 비유로 말씀하시되 사탄이 어찌 사탄을 쫓아낼수 있느냐 또 만일 나라가 스스로 분쟁하면 그 나라가 설수없고 만일 집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 집이 설수없고 만일 사탄이 자기를 거슬러 일어나 분쟁하면 설수없고 망하느니라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강탈하지 못하리니 결박한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모든 모독하는 일은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 하시니 이는 그들이 말하기를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 함이러라(막 3:23-30, 강조 추가).

예수님께서 그분의 추종자들에게 강한 자를 결박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음을 주목하라. 오히려, 그분은 예루살렘 서기관들의 비판에 공격할수 없는 론리와 분명한 은유로 답하셨다.

그들은 예수님이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냈다고 비난했다. 예수님은 사탄이 스스로 분쟁하는것은 비상식적이라고 말씀하셨다. 아무도 이 말씀을 지적으로 반박할수 없었다.

예수님이 귀신을 쫓안해실때 사탄의 힘을 사용하시지 않았다면, 그분은 누구의 힘을 사용하셨을까? 그 힘은 반드시 사탄의 힘보다 강해야 했다.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 성령님의 능력이어야만 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탄을 자신의 소유물을 지키는 강한 자에 은유적으로 비유했다. 강한 자의 소유물을 취할수 있는 유일한 분은 그보다 더 강하며 그분은 바로 예수님이시다. 이것은 그분께서 귀신을 쫓안해신것에 대한 진정한 설명이다.

강한 자에 대해 언급한 이 말씀과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 언급한 류사한 말씀은 우리가 도시의 ≪강한 자를 결박할수 있다≫는것을 정당화하는데 사용될수 없다. 또한, 우리가 신약 성경의 나머지 부분을 살펴보면, 사람이 도시의 ≪강한 자를 결박했다≫는 어떠한 예거나 그렇게 하라는 가르침을 찾을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그리스도인이든지 도시 또는 특정 지역의 ≪강한 자-악의 령≫을 결박 또는 무력하게 하려고 시도하는것은 비성경적이라는 결론을 내릴수 있다.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인다는것은 무슨 뜻일까?≫(What About Binding on Earth and in Heaven?”)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복음서에 단 두번 나오는데 모두 마태복음에 기록되었다.

예수님은 우리가 공중의 악의 령을 ≪맬≫수 있고 또 매야 함을 가르쳤을까?

첫째, 매다풀다는 그분의 말씀을 살펴보자. 그분은 이 단어들을 분명히 비유적으로 사용하셨다. 왜냐하면, 그분은 그분의 추종자들이 밧줄이나 끈으로 문자적으로 무언가를 매거나 푸는것을 의미하시지 않아기때문이다. 그럼 예수님은 무엇을 뜻하셨을까?

해답을 얻기 위해, 우리는 그 당시 예수님이 말씀 중에 매다풀다를 어떻게 사용하셨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분은 악령의 주제에 대해 말씀하셨는가?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매다에 관한 그분의 말씀을 악령을 매는데 적용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매다와 풀다에 관해 언급하신 첫번째 구절을 살펴 보자.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우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마 16:15-19, 강조 추가).

이 구절이 그토록 다양한 방법으로 해석되는 리유는 그것이 적어도 5가지 은유적인 표현을 담고 있기때문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1) ≪혈육≫ (2) ≪반석≫ (3) ≪음부의 권세(문)≫ (4) ≪천국 열쇠≫ (5) ≪매다/풀다.≫ 이런 표현들은 모두 다른 뭔가를 나타내는 비유이다.

음부의 문(Hades’ Gates)

은유의 정확한 의미와는 관계없이, 당신은 이 구절에서 예수님이 악령을 언급하시지 않았음을 알수 있다. 그것과 가장 가깝게 느껴지는 언급은 ≪음부의 문≫인데 이것은 물론 상징적이다. 왜냐하면, 음부의 문이 문자적으로 교회를 방해하기 위해 아무것도 할수 없기때문이다.

≪음부의 문≫은 무엇을 상징할까? 아마도 그것은 사탄의 힘의 상징이며, 예수님은 사탄의 힘이 그분의 교회가 세워지는것을 막을수 없음을 의미하셨을것이다. 아니면, 예수님은 그분께서 세우실 교회가 사람들을 음부의 문 뒤에 투옥될 운명에서 구원해주리라는것을 의미하셨을수 있다.

예수님이 실제로 두개의 문에 대해 언급하셨음을 주목하라. 음부의 문과 그분께서 베드로에게 ≪천국 열쇠≫를 주시는것을 통하여 암시하신 천국의 문이다. 이런 대조는 음부의 문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 사람들을 음부로부터 구원해주는 교회의 역할을 상징한다는것을 뒷받침한다.

예수님께서 ≪사탄의 힘이 그분의 교회를 막을수 없다≫는것을 의미하셨다고 할찌라도 우리는 매다와 풀다에 관한 그분의 말씀이 우리가 도시의 악령들에 대해 해야 할 일에 대한 가르침이라는 결론을 내릴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누군가가 도시의 악령을 맸다는 어떠한 예도 찾을수 없으며 서신서에서도 그런 일을 해야 한다는 어떠한 가르침도 찾을수 없기때문이다. 그러나 매다와 풀다에 관한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해석은 반드시 문맥적으로 신약 성경의 나머지 부분들에 의해 뒷받침 되여야 한다.

성경적인 례가 없다는것으로부터 비추어 볼 때, 그리스도인들이 ≪내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매였다≫ 또는 ≪내가 그 사람 우의 천사를 풀어주었다≫와 같은 말들을 자주 하고 있다는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당신은 신약 성경에서 이런 말을 한 사람을 아무도 찾을수 없을것이다. 사도행전과 서신서가 강조하고 있는것은 마귀에게 말을 하거나 악령을 매거나 푸는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파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는것이다. 례를 들어, 바울이 사탄의 사자에 의해 괴롭힘을 당할때, 그는 그것을 ≪매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그는 그것에 대해 하나님께 간구하였다(고후 12:7-10을 보라).

천국 열쇠(The Keys to Heaven)

≪매다≫와 ≪풀다≫에 관한 예수님 말씀의 문맥을 더 살펴보자. 그분은 매다와 풀다에 관해 언급하시기 바로전에, 베드로에게 천국 열쇠를 주실것이라고 말씀하셨음을 주목하라. 베드로는 종래로 천국의 문을 여는 문자 그대로의 열쇠를 받은 적이 없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은 비유임이 틀림없다. ≪열쇠≫는 무엇을 상징할까? 열쇠는 잠겨있는 뭔가에 접근하는 공구를 나타낸다. 열쇠를 갖고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열수없는 특정 문을 열수 있다.

우리가 사도행전에 기록된 베드로의 사역을 살펴보았을 때, 다른 사람에게 잠긴 문을 여는것에 간주 될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우리는 그가 모든 믿는 자에게 천국의 문을 열어주는(그리고 음부의 문을 닫아주는) 복음을 선포했음을 발견할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대사이기때문에, 천국의 열쇠를 받았다. 천국 열쇠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며 그 복음만이 천국의 문을 열수 있다.

매다와 풀다의 의미(And Now, Binding and Loosing)

마지막으로, 베드로에게 천국 열쇠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신후, 예수님은 ≪매다≫와 ≪풀다≫에 관해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이 구절의 다섯번째 비유적인 표현이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말씀의 맥락을 보았을 때, 예수님은 무엇을 의미하셨을까? 베드로의 ≪매다≫와 ≪풀다≫가 예수님이 그분의 교회를 세우는것에, 음부에서 사람들을 구원하는것에, 그리고 복음을 전파하는것에 어떻게 적용될까?

거기에는 한가지 가능성밖에 없다. 예수님은 단순히 ≪나는 너에게 천국을 대표할수 있는 권한을 주었으니 이 땅에서 너의 책임을 다하라. 그리고 천국에서도 너를 지지할것이다≫라는 뜻이었을것이다.

만일 한 고용주가 자신의 판매원에게 ≪당신이 방콕에서 무엇을 하든 간에, 본사에서도 이루어질것이다≫라고 말했다면, 판매원은 상사의 이 말을 어떻게 해석했을까? 그는 그가 방콕에서 회사를 대표 할 권한을 부여받았다고 생각할것이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이 땅에서 천국의 하나님을 대표할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음을 의미하셨다. 이 약속은 베드로가 예루살렘에서 자기들이 하나님이 위임하신 대표라고 생각하는, 그리고 베드로가 이전에 존경했었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비판의 눈초리 앞에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선포할때 큰 버팀목이 되였을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이런 해석은 마태복음에서 18장에서 사용된 동일한 표현과 잘 조화된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15-20, 강조 추가).

≪매다≫와 ≪풀다≫에 관한 두번째 구절에서, 우리는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께서 악령을 매는것을 말씀하셨다고 믿게 하는것은 아무것도 없다. 여기에서 그리스도는 교회의 징계를 말씀하신 직후에 ≪매다≫와 ≪풀다≫에 관해 말씀하셨다.

이 구절의 ≪매다≫와 ≪풀다≫에 관하여 예수님은 ≪나는 너희에게 누가 교회에 있어야 하고 누가 있지 말아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책임을 주었다. 그것은 너희의 일이다. 너희가 책임을 다할때, 천국에서도 너희를 도울것이다. ≫라는 뜻이었을것이다.

더 광범위하게 적용하면, 예수님은 단순히 ≪너희는 이 땅에서 천국의 대리인으로서 위임받았다. 너희에게는 책임이 있으며 너희가 이 땅에서 책임을 다할때, 천국에서는 항상 너희를 지원할것이다.≫라고 말씀하신것이다.

문맥상에서의 ≪매다≫와 ≪풀다≫(Binding and Loosing in Context

이 해석은 문맥상에서뿐 아니라 신약 성경의 나머지 부분의 보다 넓은 맥락에도 잘 부합된다.

문맥상으로 보았을 때, 예수님은 ≪매다≫와 ≪풀다≫에 관해 말씀하신후 바로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마 18:19, 강조 추가)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또다시 ≪너희가 땅에서 하는 일은 하늘에서도 지원될것이다≫라는 주제이다. 땅에 있는 우리는 기도할 권세와 책임이 있다. 우리가 기도하면 하늘에서 이루실것이다.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매다≫와 ≪풀다≫에 관한 그분의 말씀에 대해 진일보 해석하셨음을 나타내는것 같다.

이 구절에서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라는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도 역시 ≪천국에서 너희를 지원할것이다≫라는 주제를 뒷받침하고 있다. 신자들이 그분의 이름으로 모이면, 천국에 계신 그분도 나타나신다.

당신이 나의 해석에 대해 완전히 반대하더라도, 예수님이 도시의 악령들을 매는것에 말씀하셨다는 성경적인 주장을 펼치기는 어려울것이다!

사탄이 포함된 하나님의 계획(God’s Divine Plan Includes Satan)

사탄과 그의 천사들은 반란군이지만 하나님의 통제를 벗어나지는 않았다. 이 반역군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 (그들은 처음 만들어졌을 때 반역적이지 않았다). 바울은 이렇게 썼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것들과 보이지 않는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였고(골 1:16, 강조 추가).

예수님은 사탄을 포함한 모든 계층의 천사들을 만드셨다. 그분은 그들 중 일부가 반역할것을 알고 계셨을까? 물론, 아셨다. 그럼 왜 그분은 그들을 창조하셨을까? 왜냐하면, 그분은 그 반역적인 령들을 그분의 계획을 성취하는데 사용하실수 있기때문이다. 만일 그분께서 그들에 대한 목적이 없으시다면, 그들을 언녕 지옥에 던졌을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그분께서 이미 일부 반역적인 천사들에게 그렇게 하셨으며(벧후 2:4을 보라), 언젠가는 사탄에게도 그렇게 하실것이라고 말씀하기때문이다(계 20:2을 보라).

하나님께는 사탄과 모든 악령이 땅에서 역사하게 하시는 리유가 있다. 만일 그분께서 허용하시지 않는다면, 그들은 땅을 완전히 떠나게 될것이다. 하나님은 어떤 리유때문에 사탄이 땅에서 역사하도록 허락하실까? 나는 모든 사람이 모든 리유를 다 리해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분의 말씀에서 일부 리유를 드러내셨다.

첫째, 하나님은 인간을 시험하시려는 자신의 계획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사탄이 땅에서 제한적으로 역사하도록 허락하신다. 사탄은 인류가 충성할수 있는 대체 선택으로 제공된다. 사람들은 그것을 인식하는 여부와 관계없이 하나님 또는 사탄에게 복종한다. 하나님은 그분이 주신 자유의지를 가진 아담과 하와를 시험하시기 위해 사탄이 그들을 유혹 하도록 허락하셨다. 자유의지를 가진 모든 사람은 그들의 마음에 들어있는 순종 또는 불순종을 드러내기 위해 반드시 시험을 받아야 한다.[1]

둘째, 하나님은 사탄이 악인에 대한 그분의 진노의 대리인으로서 땅에서 제한적으로 역사하도록 허락하셨다. 나는 이미 하나님께서 악령을 통해 사람들에게 심판을 내리신 몇가지 사례를 보여주면서 이 점을 증명하였다. 하나님께서 사탄이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통치하게 허락하셨다는 사실은 그들에 대한 그분의 진노의 표시이다. 하나님은 악인이 악인을 통치하게 허락하심으로써 그들을 심판하셨고, 또한 악의 령이 그들을 통치하게 하심으로써 그들의 삶을 더욱 비참하게 만드셨다.

셋째, 하나님은 사탄이 땅에서 제한적으로 역사하게 허락하심으로써 그분 자신께 영광을 돌리셨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요일 3:8). 매번 하나님께서 사탄의 일을 파괴하시는것은 그분의 능력과 지혜를 찬양하게 된다.

예수님은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시다(Jesus is the Head Over Principalities and Powers)

그리스도인으로서, 사탄과 악령에 대적해야 할 우리의 책임은 두가지이다. 우리 자신의 삶에서 마귀를 대적하는것과(약 4:7) 마귀에게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들린 귀신을 쫓안해는것이다(막 16:17). 다른 사람들에게서 귀신을 쫓아낸 경험이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귀신 들린 자가 귀신에게서 벗어나기를 원하지 않는 한, 원칙적으로 그들은 그 귀신을 쫓아낼수 없다는것을 알고 있다.[2]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자유 의지를 존중하시며 사람이 악한 령에 복종하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은 그를 제지하시지 않을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지역적으로 분포된 특정 령역의 령들을 무너뜨릴수 없는 또 다른 리유이다. 악의 령들은 그곳의 사람들을 속박하고 있는데 그 리유는 그 사람들이 한 선택때문이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것을 통하여, 우리는 그들에게 선택할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만일 그들이 옳바른 선택을 한다면, 그들은 사탄과 악령으로부터 자유를 얻게 될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잘못된 선택을 하여 회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사탄이 그들을 속박하도록 허용하실것이다.

성경에 따르면, 예수님은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시다≫(골 2:10). 통치자(arche)와 권세(exousia)에 대응한 희랍어가 종종 인간의 정치적 지도자를 가리키는데 사용되지만, 신약 성경에서 그들은 또한 마귀의 령적 통치자로 사용되었다. 에베소서 6:12은 통치자(arche)와 권세(exousia)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싸움을 묘사한 전형적인 구절 중의 한 례이다.

우리가 바울이 골로새서 2:10에서 예수님은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시라고 했던 말씀을 문맥적으로 살펴보면, 그가 령적 능력을 말했음이 분명해진다. 례를 들어, 네 구절 뒤에, 바울은 예수님이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여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골 2:15)라고 썼다.

예수님이 령적 통치자와 권세들의 머리시라면, 그분은 그들을 주관하신다. 이것은 이교도적이고 정령 숭배적인 문화에서 살면서 그들을 통치하는 악령에 대한 두려움으로 우상을 숭배했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멋진 계시이다.

탈출할수 있는 유일한 방법(The Only Way of Escape)

악령의 사로잡힘에서 탈출할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것이다. 그것만이 하나님이 제공하신 탈출이다. 아무도 도시의 악마의 힘을 결박하고 당신을 자유롭게 해주거나 부분적으로 자유롭게 해주지는 못할것이다. 사람이 회개하고 복음을 믿기전에는, 하나님의 진노가 그 우에 머물러 있을것이다(요 3:36). 그것은 악마의 힘에 지배받는것을 포함한다.

령적 전쟁에 관한 대회를 주최한 도시들에서 큰 변화를 볼수 없는 리유는 정작 그 지역을 통치하는 마귀의 계층에 영향 줄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기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정사와 권세를 향해 밤낮 부르짖을수 있다. 그들은 소위 ≪대적 방언≫으로 악마를 괴롭힐수 있다. 그들은 ≪나는 도시의 악령을 결박하였다≫라고 말할수 있다. 그들은 심지어 이 모든것을 비행기안에서 거나 고층 빌딩의 꼭대기에서 행할수 있다(어떤 사람은 실제로 그렇게 한다). 그리고 악령이 받을수 있는 유일한 영향은 어리석은 그리스도인들때문에 한바탕 크게 웃는것뿐일것이다.

아래에 령적 전쟁에 대한 여섯번째 현대의 신화를 살펴보자.

신화 6: 지역적인 악령에 대한 령적 전쟁은 전도에 효과적이다.(Myth #6: Spiritual warfare against territorial spirits opens the door for effective evangelism.)

지역적인 악령에 대해 령적 전쟁을 하는데 깊이 관여된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동기는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것을 보려는 소망때문이다. 이때문에 그들은 칭찬받아야 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더 많은 사람들이 사탄의 속박에서 벗어나는것을 보려는 소망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는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은 무엇이 역사하고 무엇이 시간 랑비인지를 알고 계신다. 그분은 그분의 나라의 확장에 관하여 우리의 책임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려주셨다. 우리가 성경에서 찾을수 없는 무언가를-예수님, 베드로, 또는 바울이 사역 중에 종래로 하지 않았던 일들을 함으로써 전도의 효과를 배가하려는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럼 왜 그렇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령적 전쟁이 전도에 효과적이라고 생각할까? 그들은 대개 이런 추리를 한다: ≪사탄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사탄을 대적하여 령적 전쟁을 하여 이런 일을 막아야 한다. 그들의 마음을 가리운것을 없애면, 더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믿게 될것이다.≫ 이것은 사실일까?

사탄이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했다는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바울은 이렇게 썼다.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 4:3-4).

문제는, 바울은 고린도 그리스도인들이 령적 전쟁을 하도록 동기 부여함으로써 지역적인 악령들을 무너뜨려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복음을 더 잘 받아들이게 하려는 목적에서 이것을 썼을까?

대답은 아니다이며 몇가지 분명한 리유가 있다.

첫째, 바울은 계속하여 ≪그러므로 고린도인들아, 사탄이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였으므로 나는 너희가 령적 전쟁을 하여 지역적인 악령들을 무너뜨려 그들을 혼미하게 하는것을 제거하기를 바란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곧이어 그리스도를 전파하였는데 그것이야말로 령적 무지를 제거할수 있는 방법이다.

둘째, 바울은 종래로 그의 서신 중에서 신자들에게 도시의 악령의 진을 무너뜨리는데 참여함으로써 복음 전도의 효과를 높이라고 가르친 적이 없다.

셋째, 우리는 바울의 모든 서신서를 읽는것을 통하여 그가 사탄이 혼미하게 하는것이 불신자들이 믿지 않는 주요 리유라고 여기지 않았음을 알수 있다. 사탄이 혼미하게 하는것은 한가지 요인이 될수 있지만 주된 요인 또는 유일한 요인이 아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구원받지 못한 상태에 머무르게 하는 주요 원인은 그들의 마음이 굳어있기때문이다. 이것은 사탄이 모든 사람을 혼미하게 할수 없는 명백한 리유이다. 어떤 사람들은 진리를 들었을 때,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들이전에 믿었던 모든 거짓말을 거부한다. 사람들이 믿지 않는것은 사탄이 그들을 혼미하게 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불신이 사탄이 그들을 혼미하게 하도록 한다.

감각 없는 마음(Callous Hearts)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왜 사람들이 믿지 않는지에 대해 분명하게 말하였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여 주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여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것을 욕심으로 행하되(엡 4:17-19, 강조 추가).

바울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왜 그들은 무지할까? 왜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졌을까?≫ 그것은 사람들이 구원받지 못한 근본적이고 주된 리유이다.[3] 그들 자신이 비난을 받아야 한다. 사탄은 단지 그들이 믿고 싶어하는 거짓말을 제공할 뿐이다.

씨 뿌리는 자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는 이 점을 완벽하게 보여준다.

씨를 뿌리는 자가 그 씨를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밟히며 공중의 새들이 먹어버렸고…이 비유는 이러하니라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길 가에 있다는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가서 그들이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것이요(눅 8:5, 11-12).

복음을 나타내는 씨앗이 길 가에 떨어져 밟혔음을 주목하라. 씨앗은 사람들이 자주 걸어 다니는 굳은 땅을 침투 할수 없다. 따라서, 마귀를 나타내는 새가 그 씨앗을 먹어버리기 쉽다.

전체 비유의 요점은 사람의 마음 상태를(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그들의 수용성) 여러가지 류형의 땅에 비유한것이다. 예수님은 왜 어떤 사람들은 믿고 어떤 사람들은 믿지 않는지를 설명하셨다. 그것은 모두 그들에게 달려있다.

사탄은 어떤 영향을 줄수 있을까? 그는 단지 굳은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서 말씀을 훔칠수 있을 뿐이다. 이 비유 속의 새들은 단지 씨앗이 싹트지 않는것에 대한 부차적인 원인이다. 주요 문제는 땅에 있다. 사실, 땅이 굳기때문에 새들이 씨앗을 얻을수 있었다.

복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진정한 문제는 자유의지를 가진 사람들의 굳어진 마음이다. 사람들이 복음을 거부하는것은 마음이 혼미해지려는 선택을 한것과 같다. 그들은 진리보다 거짓말을 더 선호한다. 예수님이 말씀하셨듯이,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것이니라≫(요 3:19, 강조 추가).

성경은 사람은 성실하고 마음이 착하여 사탄이 그들을 혼미하게 하지 않기만 하면 복음을 믿을것이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지 않았다. 반대로, 성경은 인성의 어두운 면을 보여주고 있으며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그들이 지은 죄에 대한 책임을 물으실것이다. 심판의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은 ≪마귀가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는 식의 변명은 받아들이시지 않을것이다.

사탄은 어떻게 사람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는가?(How Satan Blinds People’s Minds)

사탄은 정확히 어떻게 사람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할까? 그는 신비한 령적인 힘으로 사람의 머리에 약 같은것을 부어 넣어 그들의 총명을 어둡게 하였을까? 악마가 발톱으로 그들의 머리에 파고들어 가 그들의 합리적인 사고를 파괴하였을까? 아니, 사탄은 그들에게 거짓말을 제공하여 믿게 함으로써 그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한다.

분명한것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그들의 죄를 위하여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진리를 정말로 믿는다면, 그들이 언젠가는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삶에 대해 결산해야만 한다는것을 정말로 믿는다면, 그들은 회개하고 그분을 따를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일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무언가를 믿는다. 그들은 하나님이 없다고 믿거나 또는 죽음 이후에는 생명이 없다고 믿을수 있다. 그들은 환생을 믿거나 하나님은 절대로 사람을 지옥에 보내시지 않는다고 믿을수 있다. 그들은 그들의 종교 활동들이 그들로 하여금 천국에 들어갈수 있게 해준다고 생각할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무엇을 믿든 간에, 그것이 복음이 아니라면, 한 단어로 요약할수 있다. 거짓말. 그들은 진리를 믿지 않으므로 사탄이 거짓말로 그들을 혼미하게 한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스스로 겸비하여 진리를 믿는다면, 사탄은 더 이상 그들을 혼미하게 할수 없다.

어둠에 관한 거짓말(The Lies of Darkness)

사탄의 나라는 성경에서 ≪흑암의 권세≫(골 1:13)로 언급되었다. 물론, 흑암은 진리가 없는 상태-빛이나 깨달음이 없는 상태를 나타낸다. 당신이 어둠속에 있으면 자신의 상상력에 의해 이동하며 마지막에는 종종 상처를 입게 된다. 그것은 곧 사탄의 어둠의 나라의 상황과 같다. 거기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상상력에 의해 자신의 삶을 살아가며, 그들의 상상력은 사탄의 거짓말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령적 어둠속에 있다.

사탄의 나라는 명확한 국경으로 정의되는 지리적인 나라가 아니라 거짓말에 대한 믿음의 나라이다. 어둠의 나라는 빛의 나라와 같은 장소에 있다. 진리를 믿는 사람들은 바로 거짓말을 믿는 사람들 사이에 살고 있다.[4] 우리의 주요 임무는 이미 거짓말을 믿는 사람들에게 진리를 선포하는것이다. 누군가가 진리를 믿게 될때, 사탄은 그를 더 이상 속일수없기때문에 또 한명의 신하를 잃게 된다.

따라서 우리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을 사탄에게서 풀어주는것은 그들을 사로잡은 악령을 매는것을 통하여서거나 아니라 진리를 선포하는것을 통해서이다. 예수님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 강조 추가)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진리를 통하여 령적인 무지에서 벗어난다.

요한복음의 같은 구절에서 예수님은 구원받지 못한 청중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때마다 제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였음이라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요 8:44-45, 강조 추가).

예수님께서 자신과 마귀를 대조시키신것을 주목하라. 그분은 진리를 말씀하시지만, 사탄은 궁극적으로 거짓말쟁이이다.

또한, 예수님께서 청중들에게 그들의 아비가 마귀이고 마귀는 거짓말쟁이라고 지적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그분의 말씀을 믿어야 할 책임이 있다고 말씀하셨음을 주목하라. 그들이 혼미 된것은 마귀의 잘못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잘못이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셨다. 사탄은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제공하여 믿게 함으로써 그들이 ≪어둠을 사랑하여≫ 어둠의 나라에 거하게 도와주고 있다. 하지만 사탄은 진리를 믿는 어떤 사람도 속일수 없다.

이 모든것으로 보아, 우리는 어둠의 나라를 물리칠수 있는 주요 방법은 빛인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전파하는것이다. 그때문에 예수님은 ≪세상으로 나아가 마귀를 결박하라≫라고 말씀하신것이 아니라 ≪세상으로 나아가 복음을 전파하라≫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바울에게 그가 복음을 전파하는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것≫(행 26:18, 강조 추가)이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사람들이 복음의 진리를 듣고 어둠에서 빛으로 돌아가고 거짓말이 아닌 진리를 믿으려는 결정을 내릴때에 사탄의 권세에서 벗어난다는것을 잘 보여준다. 우리가 ≪무너뜨려야 할≫ 유일한 요새는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거짓말의 요새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 이다(This is God’s Plan)

하나님께서 사탄을 천국에서 땅으로 쫓안해셨다는 점을 잊지 말라. 그분은 사탄을 우주의 다른 곳에 영원히 갇아두실수도 있다. 하지만 그분은 그러시지 않았다. 왜서일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탄을 사용하여 그분의 궁극적인 목적을 이루시기 위함이다 – 그 목적은 바로 언젠가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섬기기 위해 택함을 받은 자유의지를 가진 사람들의 큰 가족을 이루시는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분을 사랑하는 자녀들로 이루어진 가족을 원하신다면, 다음 두가지가 필요하다. 첫째, 사랑의 기초가 자유 의지이기때문에 자유 의지를 가진 사람을 만드셔야 한다. 로봇과 기계는 사랑할수 없다.

둘째, 하나님은 그들이 그분께 순종 또는 불순종하거나, 그분을 사랑 또는 미워할수 있는 선택을 할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여 그들을 시험하셔야만 한다. 자유 의지를 가진 사람은 반드시 시험받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충성도에 대한 시험이라면, 불충성하게 하는 유혹도 존재할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왜 사탄을 땅에 두셨는지를 리해하기 시작한다. 사탄은 인간의 충성에 대한 대체 선택으로 사용될것이다. 그는 자기의 거짓말에 수용하는 사람들에게 (제한적으로) 영향 주도록 허락받게 되었다. 모두 사람들은 선택에 직면하게 될것이다: 나는 하나님을 믿을것인가 아니면 사탄을 믿을것인가? 사람들의 그것에 대한 인식 여부를 떠나서 그들 모두는 이미 결정을 내렸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잘못된 선택을 한 사람들로 하여금 회개하고 복음을 믿고 옳바른 선택을 하게 하는것이다.

이것은 에덴 동산에서 일어난 일이 아닌가? 하나님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그곳에 두고 아담과 하와가 그 나무의 열매를 먹는것을 금지하셨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들이 그 나무의 열매를 먹는것을 원하시지 않았다면, 왜 그 나무를 그곳에 두셨을까? 그것은 그 나무가 시험으로 사용되기때문이다.

우리는 또한 사탄이 하나님의 허락을 받고 하와를 유혹했음을 보게 된다. 다시 말하지만, 충성도를 시험하기 위해서는 불충성하게 하는 유혹이 반드시 존재한다. 사탄은 하와를 속였고 그녀는 사탄을 믿었으며 그와 동시에, 그녀는 하나님이 말씀하신것을 믿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그 결과, 첫번째로 자유 의지를 가진 사람은 마음속에 있던 하나님에 대한 불충성을 드러냈다.

비슷한 방식으로, 모든 자유 의지를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평생동안 시험을 받게 된다. 하나님은 그분이 창조하신 만물을 통해 그분 자신을 계시하셨기에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보아낼수 있다(롬 1:19-20을 보라).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량심을 주셨기에 우리는 옳고 그름을 알수 있다(롬 2:14-16을 보라). 사탄과 그의 악령들은 제한적인 방식으로 사람들을 속이고 유혹할수 있도록 허락 받았다. 그 결과, 모든 자유 의지를 가진 사람들은 시험을 받게 된다.

안타깝게도, 모든 자유 의지를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께 반역하고 ≪진리를 거짓것으로 바꾸었다≫(롬 1:25).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값을 치르시고 그분의 가족으로 거듭날수 있는 방법을 주신것에 감사하다. 예수님의 희생적인 죽음이야말로 우리의 문제를 완전하게 해결할수 있다.

지금과 나중의 사탄의 속임수(Satan’s Deception, Now and Later)

그러므로 우리는 마귀와 그의 반란군들이 이 땅에서 역사하는 리유 중 적어도 한가지는 알수 있다. 바로 어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속이기 위함이다.

사탄이 언젠가는 한 천사에 의해 천년동안 감금당할것이라는 요한계시록의 기록을 살펴볼 때, 이 같은 사실은 더욱 확증된다. 사탄이 감금당한 리유는 무엇인가? 그가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계 20:3) 하기 위함이다. 그 천년동안,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직접 이 세상을 다스리실것이다.

하지만 그 천년이 지난후, 사탄은 잠깐 놓이게 되며 그 결과, 그는 ≪나와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할것이다≫(계 20:8).

하나님께서 사탄이 그 때 사람을 미혹하는것을 원하시지 않았다면, 왜 그분은 사탄을 놓아주셨을까? 특히 원래 하나님께서는 사탄이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그를 감금하신 사실에 비추어보면 말이다.

물론, 하나님은 사탄이 사람을 미혹하지 않기를 바라실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탄이 그분의 말씀을 믿지 않는 사람들밖에 미혹하지 못한다는것을 아신다. 사탄은 오직 진리를 거부하는 사람들밖에 미혹하지 못하며 바로 그 리유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이 지금 그리고 나중에 역사하도록 놔두신다. 사탄이 사람을 미혹하면, 그들의 마음 상태가 명백해지므로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가라지속의 곡식≫을 뽑으실수 있기때문이다(마 13:24-30을 보라).

이것은 정확히 사탄이 천년의 끝에 풀려날때 일어날 일이다. 그는 어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미혹하여 그들의 군대를 모아 예루살렘을 포위하여 그리스도의 통치를 뒤엎으려고 시도할것이다. 하나님은 누가 그분을 사랑하고 누가 그분을 미워하는지를 아시므로 ≪하늘에서 불을≫ 내려보내 ≪그들을 태워버릴것이다≫(계 20:9). 사탄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사용될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역적인 악령들을 무너뜨릴수 있다≫고 생각하는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이 역사하게 허락하시는것은 그분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이다.

성경적인 전도(Biblical Evangelism)

예수님과 신약 성경의 사도들 중 아무도 이런 령적 전쟁을 하지 않았다는것이 명백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일부 사람들은 그것이 오늘날 효과적인 전도를 하는 관건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예수님, 베드로, 요한, 스데반, 빌립, 또는 바울이 그들이 복음을 전파했던 곳에서 ≪령적인 요새를 무너뜨렸다≫거나 ≪강한 자를 결박하였다≫는 기록을 찾을수 없다. 오히려, 우리는 그들이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면서 하나님께서 그들이 복음을 전파하기를 원하시는 곳을 찾았음을 발견할수 있다. 우리는 그들이 사람들에게 단순한 복음-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으라는-을 전했으며 놀라운 결과를 얻었음을 발견할수 있다. 그리고 그들이 복음을 거부했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을 때, ≪사탄이 그 사람들의 마음을 계속하여 혼미하게 하지 않게끔 령적 전쟁을 하였다≫는 기록은 찾을수 없었다. 오히려, 예수님은 그들에게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고≫ 다른 성으로 가라고 명령하셨음을 볼수 있다(마 10:14; 행 13:5을 보라).

교회 력사상 수천 번의 큰 부흥에서 ≪령적 전쟁≫을 했다는 언급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어떤 사람들은 성공적인 전도의 전제 조건이 ≪령적 요새를 무너뜨리는것≫과 ≪강한 자를 결박하는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우리의 기술은 효과가 있다! ≫라고 어떤 사람들은 말할것이다. ≪우리가 이런 령적 전쟁을 하기 시작해서부터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고 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나는 그 리유가 그와 동시에, 더 많은 령적 기도와 전도가 있었기때문이거나 한 그룹의 사람들이 갑자기 복음에 더 수용적이 되였기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만일 한 전도자가 당신에게 ≪오늘 밤, 나는 부흥 집회에서 설교하기전에, 바나나 세개를 먹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설교하자 16명이 구원받았습니다! 나는 마침내 효과적인 전도의 비밀을 발견했습니다! 지금부터, 나는 설교전에 반드시 바나나 세개를 먹을것입니다!≫라고 말했다면, 당신은 무슨 말을 해주겠는가?

당신은 그 전도자에게 당연히 이렇게 말할것이다. ≪당신이 먹은 세개의 바나나와 구원받은 16명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당신이 성공할수 있었던 리유는 당신이 복음을 전했으며 16명의 복음에 수용적인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있었기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말씀을 지키신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셨고 누군가가 그 약속의 조건을 충족시킨다면, 하나님은 그 사람이 비성경적인 일을 하고 있을찌라도 그 약속만은 지키실것이다.

이것은 오늘날의 령적 전쟁의 실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당신이 전도지를 전달하고 도시의 ≪강한 자를 결박한다면≫, 일정 비률의 사람들이 구원받을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 전도지만 전달해도, 같은 비률의 사람들이 구원받을것이다.

령적 추수를 위한 성경적인 기도 방법(How to Pray Scripturally for a Spiritual Harvest)

우리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 첫째, 우리는 신약 성경에 우리가 하나님께 사람을 구원해주시기를 기도해야 한다는 가르침이 없으며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기도했다는 기록도 없다는것을 리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그분은 전 세계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는데 필요한 일을 이미 하셨기때문이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그분의 아들을 내여주어 죽게 하실 정도로 그들이 구원받기를 바라셨다.

그런데 왜 아직까지 모든 사람이 구원받지 못했을까? 그것은 모든 사람이 다 복음을 믿은것이 아니기때문이다. 그럼, 왜 그들은 복음을 믿지 않았을까? 거기에는 두가지 리유가 있다: (1) 그들이 아직 복음을 들어본 적이 없거나, 또는 (2) 그들은 복음을 들어 보았으나 거부했다.

바로 그 리유때문에,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성경적인 기도 방법은 그들에게 복음을 들을 기회가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는것이다. 례를 들어, 예수님은 ≪추수할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눅 10:2, 강조 추가)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구원받게 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만 한다. 바로 그때문에 우리는 그들에게 사람을 보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초대 교회는 령적 추수에 관해 이렇게 기도하였다.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행 4:29-30, 강조 추가).

그들은 (1)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기회를 간구했거나 (2) 복음을 전할 기회를 가졌을 때 복음을 전할수 있는 담대함을 구했다. 그들은 또한 하나님께서 치유, 표적과 기적을 통해 복음을 확증해주시기를 바랐다. 이것은 성경적인 기도이며 그 기도의 목적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들을 기회를 주는것임을 주목하라.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를 응답하셨다: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행 4:31).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령적 추수에 관해 기도하는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 그는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더 많은 사람을 구원해주시기를 간구해야 한다고 가르쳤는가? 아니, 그가 한 말을 읽어보자.

끝으로 형제들아 너희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퍼져 나가 영광스럽게 되고(살후 3:1, 강조 추가).

또 나를 위하여 구할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것이니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6:19-20, 강조 추가).

사람들이 현재 구원받았는지 아닌지는 하나님보다 그들 자신한테 더 달려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이 복음을 들을수 있게 하는것과 하나님께서 우리가 복음을 담대히 선포할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간구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을것을 보장하시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들에게 자신만의 선택을 할수 있는 권리를 주셨기때문이다. 그들의 구원은 복음에 대한 그들의 반응에 달려있다.

신화 7: ≪그리스도인이 죄를 범하면, 마귀가 그에게 들어와 그와 함께 거하게 된다.≫(Myth #7: When a Christian sins, he opens the door for a demon to come and live in him.)

그리스도인이 죄를 범하면, 악령의 유혹에 넘어갔기때문에 그럴수도 있다. 그러나 악령의 제안에 굴복한다는것이 악령이 신자안에 들어올수 있다는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죄를 지으면 그분께 불순종한것이므로 하나님과의 교제를 파괴하게 되며(요일 1:5-6을 보라) 죄책감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분과의 관계가 깨지지 않았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것이다≫(요일 1:9). 그런 다음, 우리와 그분과의 교제도 회복될것이다. 요한은 우리가 우리안에 내주하는 마귀로부터 깨끗함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음을 주목하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날마다 세상, 육체, 마귀부터 오는 유혹을 대면해야 한다. 바울은 우리가 참으로 다양한 악의 령들을 상대해야 한다고 썼다(엡 6:12을 보라). 따라서, 모든 신자들은 어느정도 마귀의 령의 교란을 받는다. 그것은 정상이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으로 마귀를 대적하는것은 우리의 책임이다(벧전 5:8-9을 보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대로 행하는것이 곧 마귀를 대적하는것이다.

례를 들어, 사탄이 우리에게 우울한 생각을 가져다 주면, 우리는 우울함을 없애주는 성경 말씀을 생각하며 ≪항상 기뻐하라≫(살전 5:16)는 말씀과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8)는 말씀에 순종하여야 할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행동하고 하나님의 생각으로 사탄의 생각을 대체하는것은 우리의 책임이다.

우리는 자유 의지를 가진 사람으로서 자신이 원하는 대로 생각할수 있다는 점을 반드시 인식해야 한다. 만일 신자가 계속하여 악령의 제안을 경청하고 따르기를 선택한다면, 그는 잘못된 생각의 억압을 받아 그것에 더 수용적이고 더 좌우되도록 자신의 마음을 열어놓게 된다. 그가 더 많이 굴복할수록 그는 잘못된 생각으로 인해 더 많은 괴롭힘을 당할것이다. 이런 상황은 그리스도인에게는 매우 드물지만, 발생할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이 자유함을 누리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고 순종하여 마귀를 대적하려는 결정만 내리면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귀신들릴수 있을까? 오직 그가 억압을 받지 않고 마음속으로부터 의지적으로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그분으로부터 완전히 등을 돌리려는 결정을 했을 때에 그럴수 있다. 그렇게 되면, 그는 더 이상 그리스도인이 아니므로[5] 만일 그가 그를 억압하는 악령에게 더 많이 굴복한다면 귀신들릴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한 사람이 죄를 지으면 마귀가 그에게 들어와 그와 함께 거하게 된다는 주장과는 거리가 멀다 .

신약 성경에는 귀신 들린 그리스도인에 대한 례가 단 하나도 없으며 귀신 들릴 위험한 가능성에 대해 그리스도인들을 경고한 적도 없으며 동료 그리스도인에게 들린 귀신을 쫓안해는 방법에 대한 가르침도 없다.

진실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귀신을 쫓아낼 필요가 없다 – 우리에게 필요한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는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성경적이다. 바울은 이렇게 썼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우리의 마음이 일단 낡은 사고방식을 씻어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로 새롭게 되면, 우리는 죄의 습관을 이기고 일관성 있게 그리스도를 닮은 삶을 살수 있다. 진리는 우리를 자유하게 하는것이다(요 8:32). 우리는 모든 귀신을 쫓아 내서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는다.

그럼 왜 그토록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기에게 들린 귀신을 쫓아낸 적이 있다고 증언하는가? 한가지 가능성은 그들은 단지 그들에게 들린 귀신을 쫓아냈다고 환상했을수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속기 쉬우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리해가 부족하여 심리적으로 사람들을 조종하여 자신이 귀신 들렸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구원의 사역자≫들의 먹이로 전락할수 있다. 사람들은 일단 자신이 귀신 들렸다는 확신이 들면 자연스럽게 귀신을 쫓아낼수 있다고 자신하는 사람들과 협조하게 된다.

또 다른 가능성은 자신에게서 귀신을 쫓아냈다는 사람들은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여길찌라도, 그 당시 그리스도안의 진정한 신자가 아니었을수 있다. 성경의 복음과는 대조적인 현대의 복음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생각이 들도록 속이고 있다. 그들은 비그리스도인들과 구별되지 않으며 예수님은 그들의 주님이 아니시다. 성경을 보면, 사람이 복음을 믿고 거듭나면, 그들에게 붙었던 귀신들은 자동으로 나가게 된다(행 8:5-7을 보라). 성령님이 내주하시고 사람에게는 귀신이 들릴수 없으며 성령님은 모든 거듭난 사람안에 내주하신다.

신화 8: ≪한 도시의 력사에 대한 공부를 통해, 우리는 그 도시가 어떤 악령의 지배를 받고 있는지를 알수 있으므로 령적 전쟁과 궁극적인 복음 전파에 더 효과적일수 있다.≫(Myth 8: Through studying the history of a city, we can determine which evil spirits are dominating it, and thus be more effective in spiritual warfare and ultimately in evangelization.)

이 신화는 몇가지 성경적 근거가 없는 주장에 기반을 둔다. 한가지 주장은 지역적인 악령은 한 지역에 오래동안 머문다는것이다. 즉 수백년전에 그곳을 통치했던 악령은 지금도 여전히 그곳에 있다는것이다. 따라서, 만일 한 도시가 탐욕스러운 사람들에 의해 세워졌다면, 우리는 그 도시가 오늘날에도 탐욕의 악령의 지배를 받는다고 결론 내릴수 있다. 만일 한 도시가전에 오래된 인디언 마을이였다면, 우리는 오늘날 그 도시를 지배하는것은 샤머니즘과 마법이라는 결론을 내릴수 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추론할수 있다.

하지만 수백년전에 그곳에 있던 악의 세력이 오늘날에도 그곳에 있다는것이 사실일까? 아마도, 하지만 반드시 그런것은 아니다.

우리가 이전에 다니엘서 10장에서 살펴보았던 이야기를 생각해보자. 미가엘의 도움을 받아 ≪바사의 군주≫와 싸웠던 무명의 천사는 다니엘에게 ≪이제 내가 돌아가서 바사 군주와 싸우려니와 내가 나간후에는 헬라의 군주가 이를것이라≫라고 말했다(단 10:20; 강조 추가). 력사는 알렉산더 대왕의 그리스가 바사 제국을 정복했음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러나 이 무명의 천사는 그것에 대응한 절박한 령적 령역의 변화-≪헬라의 군주≫가 오고 있었음을 알고 있었다.

헬라의 군주가 왔을 때, 바사의 군주가 바사 제국의 령적 령역을 통치했던것처럼 그리스 제국의 령적 령역을 통치했을까? 그것은 합리적인 결론인 듯 보인다. 그리고 만일 그렇다면, 그리스 제국이 실질적으로 바사 제국의 령토를 차지했으므로 일부 높은 계층의 악령들도 지리적인 위치를 변경했을것이다. 이 땅에 정치적 변화가 있을 때, 어둠의 나라에서도 변화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실제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것을 계시하시지 않는 한, 우리는 그것을 알수 없다.

어쨌든, 어느 악령이 어느 지역을 통치하는지는 큰 차이가 없다. 우리가전에 증명했던 바와 같이, ≪령적 전쟁≫을 통해 우리가 그것에 대해 할수 있는것이 아무것도 없기때문이다.

악령에 대한 지나친 분류(Over-Categorizing Evil Spirits)

또한, 특정 죄를 짓게 하는 특정 악령이 있다고 생각하는것은 우리만의 가정이다. ≪탐욕의 령≫, ≪욕망의 령≫, ≪종교의 령≫ 등이 있다는 관점은 성경적인 근거가 없으며 어둠의 나라를 통치하는 높은 계층의 악령들에게는 이런 종류가 존재하지 않는다.

사복음서를 자세히 공부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께서 세 종류의 특정 귀신만 쫓안해셨다는 사실은 놀라울것이다. 예수님은 ≪말 못하게 하는 귀신≫(눅 11:14)에 대해 한번 언급하셨고,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막 9:25)에 대해서도 한번 언급하셨고, ≪더러운 귀신≫에 관해 한번 이상 언급하셨는데 그것은 그분께서 쫓안해신 모든 귀신을 포함하는데 심지어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도 포함한다(막 9:25을 보라).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이 사람을 말 못하고 못 듣게 하는 외에 다른 무언가도 할수 있지 않을까? 당연히 할수 있다. 왜냐하면, 그 귀신은 마가복음 9장에서 한 아이가 심한 경련을 일으키게 하기도 했기때문이다. 따라서,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은 특정 종류의 악령을 가리킨것이 아니라 그 귀신이 어떻게 특정 사람을 해쳤는지를 가리킨것이다. 우리 중 일부는 성경의 계시를 벗어나, 귀신에 대해 ≪너무 지나치게 분류≫하고 있다.

전체 구약 성경에서, 이름을 갖고 있고 특정 악령으로 간주할수 있는것은 아마도 ≪거짓말하는 령≫(왕상 22:22-23), ≪어지러운 령≫(사 19:14), 그리고 ≪음란한 령≫(호 4:12, 5:4)일것이다. 첫번째와 두번째 령에 관해서, 모든 악령은 당연히 ≪거짓말하는 령≫, ≪어지러운 령≫으로 볼수 있다. 세번째 ≪음란한 령≫은 반드시 특정 악령을 가리키는것일 필요가 없다. 그것은 그저 일반적인 태도를 나타낼 뿐이다.[6]

사도행전 전체에서 특정 악령에 관한 언급은 16장 16절에서 유일하게 한번 나오는데,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모든 서신서에서 특정 종류의 악령으로 언급된것은 ≪미혹하는 령≫(딤전 4:1)인데 그것 또한 모든 악령에 대한 설명이 될수 있다.

특정 종류의 귀신에 대한 성경의 언급에 비추어 보았을 때, 사람에게 붙어있거나 도시를 지배하는 수백가지 종류의 귀신을 포함한 현대 목록을 읽을수 있다는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우리는 죄의 종류에 따라 높은 계층의 악령들을 분류할수 있다고 가정하지 말아야 한다. ≪그 도시에 많은 도박꾼이 있는것으로 보아 도박의 령이 그곳을 통치하는것이 틀림없다.≫라고 말하는것은 가설일 뿐이다.

흡연의 령?(Smoking Spirits?)

누군가가 ≪그 도시에 많은 사람들이 담배를 피우는것으로 보아 그곳에는 흡연의 령들이 많이 있는것이 틀림없다≫라고 말하는것이 얼마나 어리석게 보일지 생각해보라. 그 도시들이 생기기전에 ≪흡연의 령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으며 어디에 있었을까? 사람들이 담배를 피우기 시작하기전에 그들은 무엇을 하였을까? 지금 흡연하는 사람들이 줄어들고 있는 리유가 ≪흡연 마귀≫들이 죽어가거나 새로운 지역으로 옮겼기때문일까?

당신은 우리가 ≪그 도시는 음란의 령의 지배를 받기때문에 성매매가 많이 일어나고 있다≫라고 말하는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알만한가? 진실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섬기지 않는 곳마다 어둠의 나라가 존재한다는것이다. 많은 악령들은 어둠의 령역에 있는 사람들이 죄를 짓고 계속하여 하나님께 반역하도록 유혹한다. 그 악령들은 죄의 모든 령역에서 사람들을 유혹하며 어떤 곳에서 사람들은 다른 죄보다 한 죄에 더 많이 굴복하게 된다. 그들의 유일한 희망은 우리가 선포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복음이다.

특정 종류의 악령들이 특정 죄를 짓게 하고 특정 지역을 통치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에게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것을 쫓안해기 위해 할수 있는것은 아무것도 없기때문이다. 우리의 책임은 미혹당한 사람들을 위해 (성경적인 방식으로)기도하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이다.

특정 도시를 지배하는 가장 큰 죄를 알안해는것의 유일한 좋은 점은 우리가 그곳에 사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때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죄책감을 느끼게 하는 죄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말할수 있음으로 하여 그들의 마음을 찌르는 메시지를 전파할수 있다는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결정하기 위해 도시의 력사까지 연구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단지 그곳을 잠깐 방문하여 보고 듣는것을 통하여 그곳에 가장 창궐한 죄가 무엇인지를 곧 알아낼수 있다.

마지막으로, 신약 성경에서 령적 전쟁 또는 복음화의 준비수단으로 ≪령적 지도≫를 그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서신서에서 그렇게 해야 한다고 가르친 적도 없다. 신약 성경에서, 사도들은 그들이 어느 곳에서 복음을 전파해야 할지에 관해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랐으며 충성을 다하여 복음을 선포하고 사람들의 회개를 촉구하였으며 주님께서 잇따라 행하신 표적을 통하여 복음을 증거하였는데 그들의 방법은 매우 효과적이였다.

신화 9: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세대의 저주 또는 사탄의 저주에서 풀려나야 한다≫(Myth 9: Some Christians need to be set free from generational or satanic curses.)

≪세대의 저주≫의 개념은 본질적으로 같은것을 말하고 있는 구약 성경의 네개의 구절에서 파생되었다. 그들은 출애굽기 20:5; 34:7; 민수기 14:8과 신명기 5:9이다. 먼저 민수기 14:8을 살펴보자.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자가 많아 죄악과 허물을 사하시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사하지 아니하시고 아버지의 죄악을 자식에게 갚아 삼사대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셨나이다(강조 추가).

우리는 이 성경 말씀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그것은 한 사람이 그의 부모, 조부모, 증조 부모, 또는 증증 조부모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저주 또는 형벌을 받아야 한다는것을 의미할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한 사람이 예수님을 믿을 때 그가 지은 죄를 용서해주시지만, 그의 증조 부모가 지은 죄에 대한 형벌은 내리신다고 믿을것인가?

당연히 아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은 심하게 불공평하고 위선적이다는 비난을 정당하게 받게 되기때문이다. 그분 자신은 한 사람이 부모의 죄때문에 형벌을 받는것은 도덕적으로 잘못된것이라고 주장하셨다.

그런데 너희는[이스라엘] 이르기를 아들이 어찌 아버지의 죄를 담당하지 아니하겠느냐 하는도다 [하나님의 대답:]아들이 정의와 공의를 행하며 내 모든 율례를 지켜 행하였으면 그는 반드시 살려니와 범죄하는 그 령혼은 죽을지라 아들은 아버지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할것이요 아버지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하리니 의인의 공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겔 18:19-20, 강조 추가).

또한, 모세의 률법에 따라, 하나님은 아버지 또는 아들이 대방의 죄를 담당하지 말아야 한다고 명령하셨다.

아버지는 그 자식들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지 않을것이요 자식들은 그 아버지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지 않을것이니 각 사람은 자기 죄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할것이니라(신 24:16).

사랑과 정의의 하나님이 조상의 죄때문에 한 사람을 저주하시거나 처벌하실 가능성은 없다.[7] 그럼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사하지 아니하시고 아버지의 죄악을 자식에게 갚아 삼사대까지 이르게 하리라≫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무슨 뜻일까?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그들의 자손에게 죄인의 본을 보인것에 대한 책임을 물으시며, 그들은 그들의 자손이 그들의 영향때문에 지은 죄에 대해 부분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는것을 의미할수 있다. 하나님은 그들의 악한 영향때문에 증증 자손이 지은 죄에 대해 그들에게 부분적으로 책임을 물으신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이러하시며 아무도 그분이 불공정하다고 말할수 없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은 ≪아버지의 죄악을 자식에게 갚으시겠다≫고 하셨음을 주목하라. 하나님께서 벌하시는것은 아버지의 죄악이다.

따라서, ≪세대의 저주≫에 대한 주장은 미신이며, 하나님을 불의하게 보이게 하는 나쁜 생각이다.

사탄의 저주?(Satanic Curses?)

하지만 ≪사탄의 저주≫는 어떠한가?

첫째, 전체 성경은 사탄이 사람을 저주할수 있다는 능력을 암시한 적이 없으며 그렇게 했다는 예도 없다. 확실히 우리는 성경에서 사탄이 사람을 괴롭힌 례를 찾을수 있지만, 가족을 저주하여 그들과 그들의후손들에게 지속적인 불운을 가져다주었다는 사례는 찾을수 없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삶속에서 사탄과 악령의 괴롭힘을 (제한적으로) 받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부모로부터 우리에게 전해진 ≪사탄의 저주≫를 누군가에 의해 끊을 필요가 있다는것은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성경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말씀 우에 굳게 서서 믿음으로 마귀를 대적하는것이다(벧전 5:8-9을 보라).

성경에서 하나님은 축복하고 저주하는 힘을 가지신 분이다(창 3:17; 4:11; 5:29; 8:21; 12:3; 민 23:8; 신 11:26; 28:20; 29:27; 30:7; 대하 34:24; 시 37:22; 잠 3:33; 22:14; 애 3:65; 말 2:2; 4:6을 보라). 다른 사람들은 자신의 입으로 우리를 저주 할수 있지만, 그 저주는 우리를 해칠 힘이 없다.

까닭 없는 저주는 참새가 떠도는것과 제비가 날아가는것 같이 이루어지지 아니하느니라(잠 26:2).

발람은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도록 발락에게 고용되였지만, 그는 정확한 말을 했다. ≪하나님이 저주하지 않으신 자를 내가 어찌 저주하며 여호와께서 꾸짖지 않으신 자를 내가 어찌 꾸짖으랴≫(민 23:8).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는 마가복음 11:23의 예수님의 말씀때문에 다른 사람의 저주를 받을까 봐 두려워하고 있다.

그러나 단지 말하는것은 아무런 힘도 없으며 마음에서부터 믿는 말을 하는것이 힘이 있음을 주목하라. 믿음은 바라는것들의 실상이기때문에(히 11:1),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 대한 그의 저주가 실제로 그 사람에게 해를 입힐수 있다는 믿음을 가질수 없다. 그리고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서 난다(롬 10:17).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 대한 그의 저주가 그 사람에게 불행을 가져오기를 희망할수는 있지만, 그것을 믿을수는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을 저주하는것에 대해 믿을수 있는 약속을 주시지 않았기때문이다.

유일하게 례외적인것은 하나님께서 한 사람에게 ≪믿음의 은사≫와 ≪예언의 은사≫(아홉가지 성령의 은사 중 두가지)를 주셨고, 그 은사들이 축복 또는 저주의 방식으로 말해질때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일부 구약 인물의 삶속에서 가끔 이렇게 하셨음을 볼수 있다(창 27:27-29, 38-41; 49:1-27;수6:26, 왕상 16:34; 삿 9:7-20, 57; 왕하 2:23-24을 보라). 심지어 그런 경우에서도, 축복 또는 저주가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로부터 난것이며 따라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저주≫할수 있다는것은 미신일 뿐이다. 이때문에 예수님은 우리가 ≪사람들이 우리에게 퍼부은 저주를 깨라≫고 가르치신것이 아니라 ≪우리를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하라≫고 가르치셨다. 우리는 어떤 사람의 저주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누군가의 저주를 두려워한다는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부족을 나타내는것이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종종 하나님의 능력보다 사탄의 능력을 더 신뢰하는 목사들을 볼수 있다. 비록 내가 매달 다른 나라로 다니면서 사탄의 나라를 파괴하는 많은 일들을 하고 있지만, 나는 사탄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나에게 저주가 내려질까 봐 두려워하지 않는다. 내가 두려워할 리유가 없다.

주술의 저주?(Occult Curses?)

우리가 과거에 주술에 개입했다고 해서 우리에게 사탄의 저주가 내려질까?

우리는 우리가 거듭났으며 사탄의 권세와 어둠의 나라에서 벗어났다는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행 26:18; 골 1:13을 보라). 우리가 사탄에게 굴복하지 않는 한, 사탄은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할수 없다. 비록 성경은 에베소 그리스도인들이 회심하기전에 마술을 행하는데 깊이 관여되였다고는 기록 했지만(행 19:18-19을 보라), 그들이 거듭난후, 바울이 그들이 받은 ≪사탄 의 저주≫를 풀었다거나 사탄의 권세를 결박하였다는 기록은 없다. 그 리유는 그들이 예수님을 믿은 순간부터 자동적으로 사탄의 통치에서 벗어났기때문이다.

또한, 바울이 에베소 그리스도인들에게 쓴 서신에는, 사람들을 세대 또는 사탄의 저주에서 풀어주는것에 관한 가르침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단지 그들이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고≫(엡 4:27),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고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할수 있기를≫(엡 6:11) 부탁하였다. 그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책임이다.

하지만 왜 어떤 경우에 누군가에 의해 ≪세대의 저주≫ 또는 ≪사탄의 저주≫에서 벗어난 그리스도인들은 분명한 도움을 경험하게 될까? 도움이 필요했던 사람은 ≪저주≫가 일단 풀리면 마귀가 도망갈것이라는 믿음을 가졌을 가능성이 있다. 마귀를 쫓아낼수 있는것은 믿음이며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들이 마귀를 대적할때 마귀가 도망한다는것을 믿어야 한다. 그러나 사탄을 쫓안해기 위해 ≪마귀 전문가≫를 청할 필요가 없다.

마지막으로,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률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갈 3:13, 강조 추가)고 우리에게 알려준다. 우리는 모두 죄를 범했기때문에 전에는 하나님의 저주 아래에 있었지만, 예수님께서 우리의 형벌을 담당하심으로써 우리는 저주에서 풀려났다. 하나님을 찬양하라! 더 이상 저주하지 말라. 우리는 지금 ≪그리스도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받는≫(엡 1:3) 축복을 받았으므로 기뻐할수 있다.

성경적인 령적 전쟁(Scriptural Spiritual Warfare)

지금까지 우리는 많은 령적 전쟁에 관한 현대 신화를 제시했다. 하지만 성경적인 령적 전쟁은 과연 존재할까? 그렇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그것에 대해 살펴볼것이다.

아마도 우리가 령적 전쟁에 대해 알아야 할 첫번째것은 그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초점이 되여서는 안 된다는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점점 그리스도를 닮아감에 따라 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춰야 하며 그분을 따르고 그분께 순종하여야 한다. 신약 성경은 령적 전쟁에 대해 아주 작은 비률로 언급하였는데 그것은 령적 전쟁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중요치 않음을 나타낸다.

우리가 령적 전쟁에 대해 알아야 할 두번째것은 성경은 우리가 알아야 할것에 대해서는 알려준다는것이다. 우리는 ≪사탄에 대해 깊이 알기 위해≫ 특별한 통찰력(또는 특별한 분별력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설교자)이 필요하지 않다. 성경적인 령적 전쟁은 단순하다. 사탄의 계획은 성경에 분명하게 드러났다. 우리의 책임도 똑바르게 설명되여 있다. 당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믿기만 하면, 령적 싸움에서 이기는것은 보장된다.

태초로 돌아가 보자(Back to the Beginning)

우리가 처음으로 마귀에게 소개되였던 창세기로 돌아가 보자. 창세기 처음 몇 장에서, 사탄은 뱀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 뱀이 마귀라는것에 의심이 든다면 요한계시록 20:2은 그것을 제거해 줄것이다.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강조 추가).

창세기 3:1은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다≫고 우리에게 알려준다. 당신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들이 생존을 위해 경쟁하고 먹이에 접근하는 모습을 보면 사탄이 얼마나 교활한지가 느껴질것이다. 반면에, 사탄은 하나님처럼 전지하지 않음으로 우리는 사탄을 대적함에 있어서 우리가 지적인 렬세에 처해있다고 가정하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가 ≪같이 지혜롭기를≫(마 10:16, 강조 추가) 바라셨다. 바울은 사탄의 계책을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라고 주장했으며(고후 2:11을 보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다고 했다(고전 2:16).

사탄이 처음으로 기록된 공격을 시작한것은 하와에게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를 묻는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녀의 대답은 사탄이 그녀로 하여금 하나님께 불순종하게끔 속일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을 드러내게 된다. 사탄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사람들을 속일 방법이 없다. 이때문에 그의 전체 전략은 사람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하는 생각이 오락가락하게 만드는것이다.

사탄은 그녀에게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창 3:1)라고 물었다. 이것은 그저 사탄이 무심결에 던진 질문인 듯 해 보이나 사탄은 자신의 목표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하와는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창 3:2-3)라고 대답했다.

하와는 거의 맞게 대답했다. 그러나 사실, 하나님은 그들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만지지 못하게 하신 적이 없으시며 단지 그들이 그것을 먹는것을 금지하셨을 뿐이다.

하와는 확실히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창 3:4)라는 사탄의 대답이 거짓말임을 인식하기에 충분한 진리를 알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뻔뻔스러운 부인이며, 하와는 그것을 완전히 믿지는 않았을것이다. 그래서 사탄은 그가 종종 그렇게 하듯이 그의 거짓말에 진실로 사탕 칠하여 삼키기 쉽게 만들었다. 그는 계속하여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여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5)라고 말했다.

사탄은 거짓말을 한 뒤, 실제로 세가지 진실을 말했다. 우리는 아담과 하와가 금단의 열매를 먹은후에 사탄의 말대로 그들의 눈이 밝아졌다는것을(창 3:7을 보라) 알고 있다. 또한, 하나님도 나중에 그 사람이 하나님같이 되여 선악을 알게 되였다고 말씀하셨다(창 3:22을 보라). 사탄은 종종 사람들을 속이기 위해 거짓말에 진실을 섞는다는것을 조심하라.

또한, 사탄이 하나님의 성품을 비방했음을 주목하라.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자신의 안녕과 행복을 위해서 금단의 열매를 먹지 않기를 바라셨는데 사탄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무슨 좋은것을 주시지 않은것처럼 말했다. 사탄의 대부분 거짓말은 하나님의 성품, 뜻 및 동기를 헐뜯는다.

유감스럽게도, 이 땅 최초의 부부는 진리를 거부하고 거짓말을 믿음으로써 그에 따른 고통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그들의 이야기 속에 있는 현대적인 령적 전쟁의 모든 요소를 주목하라. 사탄의 유일한 무기는 진실 뒤에 매복한 거짓말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지 아니면 사탄의 말을 믿을지 선택해야 한다. 진리를 믿는것은 그들의 ≪믿음의 방패≫가 될수 있었지만, 그들은 이 ≪믿음의 방패≫를 들지 않았다.

예수님의 령적 전쟁(Jesus’ Spiritual Warfare)

우리가 예수님이 광야에서 사탄의 시험을 받는것을 읽어보면, 사탄은 수천년동안 자신의 방법을 바꾸지 않았다는것을 알수 있다. 그가 공격하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게 하는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적을 물리칠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분으로 하여금 진리를 믿거나 순종하지 못하게 하는것임을 알고 있었기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다시 전투의 중심에 놓였다. 사탄은 자신의 거짓말을 발사하였고 예수님은 진리로 그것이 빗나가게 하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말씀하신것을 믿고 순종하셨다. 그것이야말로 성경적인 령적 전쟁이다.

예수님도 하와, 아담 그리고 우리 모두와 같은 상황에 직면하게 되셨다. 그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실지 아니면 사탄의 말을 들으실지를 결정해야만 하셨다. 예수님은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령적 전쟁을 하셨다. 사탄과의 령적 전쟁에서 무엇을 배울수 있을지 살펴보자.

예수님이 받으신 두번째 시험에 관해, 마태는 이렇게 썼다.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로되였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였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마 4:5-7).

이곳의 핵심 문제도 하나님의 말씀이다. 사탄은 심지어 시편 91편을 인용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 말씀을 하나님께서 뜻하시지 않은것을 의미하도록 왜곡하였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약속한 시편 91편에 대한 균형 잡힌 리해를 가져오는 말씀을 인용하여 대답하셨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하실것이지만, 우리가 어리석게 ≪그분을 시험할때≫는 아니다. 내 성경의 여백에 있는 각주도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 말씀을 전체 성경의 문맥을 떠나서 해석하지 않는것은 매우 중요하다. 모든 성경 말씀은 성경의 나머지 부분의 말씀과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성경을 왜곡하는것은 령적 전쟁 에서 사탄이 사용하는 가장 일반적인 전술 중 하나이며, 안타깝게도, 그는 현대의 령적 전쟁 운동을 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그 전술을 사용하는데 매우 성공적이였다. 이러한 왜곡의 전형적인 예는 ≪요새를 무너뜨리라≫는 성경 구절을 왜곡하여 공중의 악령을 무너뜨리라는 주장을 펼치는것이다.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그 구절은 문맥적으로 읽어보면, 공중의 악령을 무너뜨리는것에 전혀 적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마귀는 우리가 그렇다고 생각하기를 바랄것이다. 그래야만 우리가 하늘의 정사와 권세를 향해 소리치는데에 시간을 랑비 할수 있기때문이다.

예수님이 받으신 세번째 시험에 대해 마태복음은 이렇게 쓰고 있다.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마 4:8-10).

이것은 권세에 대한 시험이였다. 만일 예수님이 사탄을 숭배했고, 사탄이 그분께 자신의 약속을 지켰다면, 예수님은 어둠의 나라에서 부사령관의 지위를 얻었을것이다. 그분은 모든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과 모든 악령들을 통치하시고 사탄이전에 갖고 있었던것과 같은 세계적 권위를가지시게 될것이다. 우리는 단지 악몽에서나 예수님이 시험에 굴복하시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추측할수 있을 뿐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기록 된 말씀으로 사탄의 제안을 물리치셨음을 다시 한번 주목하라. 예수님은 ≪기록되였으되≫라는 말씀으로 세가지 시험을 극복하셨다. 우리도 사탄에게 미혹되고 그의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믿어야 한다. 이것이 령적 전쟁에 관한 모든것이다.

전쟁터(The Battle Ground)

대부분의 경우, 사탄과 그의 귀신들이가지고 있는 유일한 힘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생각을 심는것이다(비록 하나님에 의해 제한받지만; 고전 10:13을 보라). 이점을 념두에 두고 아래의 말씀들을 살펴보자.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행 5:3, 강조 추가).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요 13:2, 강조 추가).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령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딤전 4:1, 강조 추가).

뱀이 그 간계로 너희를 미혹한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고후 11:3, 강조 추가).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협의상 얼마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가 절제 못함으로 말미암아 사탄이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전 7:5, 강조 추가).

이러므로 나도 참다 못하여 너희 믿음을 알기 위하여 그를 보내었노니 이는 혹 시험하는 자가 너희를 시험하여 우리 수고를 헛되게 할까 함이니(살전 3:5, 강조 추가).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 4:4, 강조 추가).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계 12:9, 강조 추가).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때마다 제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였음이라(요 8:44, 강조 추가).

이 말씀들과 성경의 다른 말씀들은 령적 전쟁의 주요한 전쟁터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라는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사탄은 악한 제안, 잘못된 생각, 잘못된 철학, 유혹, 각종 거짓말 등의 생각으로 우리를 공격한다. 우리가 방어할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믿고 그 말씀에 따라 행동하는것이다.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는 모든 생각이 반드시 자기안에서 나온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리해하는것이 매우 중요하다. 사탄은 자기를 도와 사람들의 마음에 자기의 생각을 심어주는 많은 대변인을가지고 있다. 그는 신문, 책, 텔레비죤, 잡지, 라지오, 친구와 이웃, 심지어는 설교자를 통해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 심지어 사도 베드로도 어느 한번 무의식적으로 사탄의 대변인이 되여 예수님께 그분이 죽는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말한 적이 있다(마 16:23을 보라).

그러나 사탄과 악령은 인간이란 중개인을 통하지 않고도 인간의 마음에 직접 역사할수 있으며,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직접적인 공격을 받고 있음을 종종 발견할수 있다. 그때부터 령적 전쟁은 시작된다.

나는 한 그리스도인 녀성이 어느 한번 나에게 찾아와 자신의 문제를 고백한것을 기억한다. 그녀는 자신이 기도 할때마다 모독적인 생각과 욕설이 마음에 떠오른다고 했다. 그녀는 교회에서 가장 예쁘고, 친절하고, 소중하며, 헌신적인 녀성이였다. 그러나 그녀는 이런 끔찍한 생각의 문제를 안고 있었다.

나는 그런 생각들이 그녀안에서 생긴것이 아니며 그는 지금 그의 기도 생활을 망치려는 사탄의 공격을 받고 있는것이라고 그녀에게 설명했다. 그녀는 그런 생각들이 다시 떠오를까 봐 날마다 기도하는것을 멈췄다고 말했다. 사탄이 성공한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다시 기도를 시작하고, 불경의 생각이 그녀의 마음에 떠오르면,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로 대적하라고 말했다. 만일 ≪예수님은 단지…≫라는 생각이 그녀에게 들면, 그녀는 ≪아니,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말해야 하며, 만일 그녀에게 욕설이 떠오르면, 그녀는 예수님을 찬양하는 생각으로 그 생각을 대체해야 할것이다.

나는 또한 그녀가 잘못된 생각을 할까 봐 두려워할수록 그런 생각들을 불러온다고 알려줬다. 왜냐하면 두려움은 믿음의 반대인 마귀에 대한 믿음이기때문이다. 뭔가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함으로써, 우리는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기 위해 그것을 생각할수밖에 없다.

례를 들어, 내가 당신에게 ≪당신의 오른손에 대해 생각하지 마십시오≫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즉시 나의 말을 따르기 위해 당신의 오른손에 대해 생각하게 될것이다. 당신이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쓸수록, 더 생각하게 될것이다. 당신의 오른 손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의식적으로 다른 뭔가를 생각하는것이다. 례를 들면, 당신의 신발과 같은것이다. 당신이 일단 신발에 대해 생각하면, 손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게 된다.

나는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친것처럼 그녀가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는 생각을 인식할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되는 생각으로 그것을 대체하라고 그녀를 격려했다.

나는 그녀가 나의 충고를 따른것에 대해 기쁘다. 비록 그녀는 기도 하면서 여러 번의 공격을 받았었지만, 그 문제에 대한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다. 그녀는 성경적인 령적 전쟁의 승리를 거두었다.

내가 많은 교회를 조사해본 결과, 흥미롭게도 그녀의 문제가 매우 보편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내가 조사했던 그리스도인 중 절반 이상은 기도할때, 불경스러운 생각을 해본적이 있었던것으로 나타났다. 사탄은 너무 기발하지 않다.

≪너희는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Take Care What You Listen To)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공격하는 사탄과 악령을 중지할수는 없지만, 우리는 그들의 생각이 우리의 생각이 되지 않게 할수는 있다. 즉, 우리는 마귀의 생각과 제안에 빠져 그런 생각속에 머물 필요는 없다. ≪새가 내 머리위를 지나가게 할수는 없더라도 내 머리에 둥지를 틀지않게는 할수 있다≫는 속담처럼 말이다.

또한 , 우리는 우리의 마음이 사악한 영향에 빠지지 않도록 우리가 통제할수 있는 범위안에서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한 시간동안 텔레비죤을 보거나, 신문을 읽을 때, 우리는 사탄의 생각일수 있는 영향에 환영하고 있는것이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말씀하신후, 예수님은 바로 ≪너희는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막 4:24)라고 경고하셨다. 예수님은 사탄이 그의 ≪씨앗≫을 우리의 마음과 생각에 심어 우리로 하여금 거짓말을 듣게 하는것의 파괴적인 영향을 알고 계셨다. 그 씨앗들은 결국 가시떨기로 자라나 우리의 삶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결실하지 못하게 막을것이다(막 4:7, 18-19).

베드로가 말한 령적 전쟁(Peter on Spiritual Warfare)

사도 베드로는 진정한 성경적인 령적 전쟁을 리해했다. 그의 서신에서 그는 종래로 그리스도인들에게 도시의 정사와 권세를 무너뜨리라고 가르친 적이 없다. 그러나 그는 그들에게 그들의 개인 생활에 대한 사탄의 공격을 저항할것을 가르쳤으며, 어떻게 저항해야할지에 대해 정확하게 알려주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벧전 5:8-9).

첫째로, 베드로는 우리가 공격이 아닌, 방어하는 위치에 있다는것을 나타냈음을 주목하라. 두루 다니는것은 사탄이지 우리가 아니다. 사탄이 우리를 찾고 있지 우리가 사탄을 찾는것이 아니다. 우리의 임무는 공격이 아닌 방어이다.

둘째로, 사탄이 사자 같이 삼킬 자를 찾고 있음을 주목하라. 그가 어떻게 그리스도인을 삼킬수 있겠는가? 베드로는 사탄이 문자 그대로 사자처럼 그리스도인들의 살을 먹을수 있음을 의미하였을까? 분명히 아니다. 사탄이 그리스도인들을 삼킬수 있는 유일한 방식은 그들이 거짓말을 믿게끔 속임으로써 그들의 믿음을 파괴하는것이다.

셋째로, 베드로는 우리에게 믿음을 통해 마귀를 대적하라고 말했음을 주목하라.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관한것이 아니며 우리가 공중에 주먹을 휘두른다 하여 사탄을 이길수 없다. 그는 거짓말로 우리를 공격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굳건한 믿음으로 그 거짓말에 대항한다. 그것이야말로 성경적인 령적 전쟁이다.

베드로는 여러가지 심각한 박해를 겪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서신을 썼으며, 그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포기하도록 유혹 받고 있었다. 우리는 사탄의 의심과 거짓말의 공격을 받는 역경속에 종종 놓이게 된다. 그때에 당신은 믿음우에 굳건히 서야 한다. 그것은 곧 바울이 우리는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어야 한다≫(엡 6:11, 강조 추가)고 쓴 ≪악한 날≫이다.

야고보가 말한 령적 전쟁(James on Spiritual Warfare)

사도 야고보도 그의 서신에서 령적 전쟁에 대해 언급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의 기도가 천사들의 전투의 결과를 결정할수 있다고 말했는가? 아니다. 그는 그들에게 그들의 도시 우에 있는 욕망의 령, 무관심의 령, 그리고 술 취함의 령을 무너뜨리라고 말했는가? 아니다. 그는 그들이 어떤 악령이 처음부터 그들의 도시에 있었는지를 알게 하기 위해 그 도시의 력사를 공부하게 하였는가? 아니다.

야고보는 령적 전쟁에 대해 성경적으로 알고 있었으며 다음과 같이 썼다.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 4:7, 강조 추가).

다시 한번, 그리스도인이 취해야 할 자세는 방어임을 주목하라. 우리는 공격이 아닌 방어를 하여야 한다. 우리가 마귀를 대적하면 우리를 피할것이라고 야고보는 약속했다. 사탄은 자신의 제안에 따라 거짓말을 믿거나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사람에게 붙어있을 리유가 없다.

또한, 야고보는 우리더러 먼저 하나님께 복종하라고 가르쳤음을 주목하라.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그분께 복종한다. 사탄에 대한 우리의 저항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순종에 달려있다.

요한이 말한 령적 전쟁(John on Spiritual Warfare)

사도 요한도 그의 첫번째 서신에서 령적 전쟁에 대해 썼다. 그는 우리에게 높은 곳으로 올라가 악마의 요새를 무너뜨리라고 말했는가? 아니다. 그는 어떻게 하면 화를 자주 내는 그리스도인에게서 분노의 귀신을 쫓안해는지에 대해 말해주었는가? 아니다.

오히려, 요한은 베드로와 야고보처럼 오직 성경적인 령적 전쟁을 믿었으며 그의 가르침도 마찬가지었다.

사랑하는 자들아 령을 다 믿지 말고 오직 령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령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것을 시인하는 령마다 하나님께 속한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령마다 하나님께 속한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령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지금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 그들은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그들의 말을 듣느니라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령과 미혹의 령을 이로써 아느니라(요일 4:1-6).

이 말씀 속에서 요한은 사탄의 거짓말과 하나님의 진리를 중심으로 토론한것을 알수 있다. 우리는 령들이 하나님께 속한것인지를 분별해야 하며 그 분별은 진리에 근거해야 한다. 악령은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것을 시인하지 않는다. 그들은 거짓말쟁이이다.

요한은 또한 우리가 악령을 이겼다고 말했다. 즉, 빛의 나라의 시민으로서, 우리는 더 이상 그들의 통치 아래에 있지 않다. 더 크신 분인, 예수님이 우리안에 살아 계신다. 자기안에 그리스도가 살아계시는 사람들은 귀신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요한은 또한 이 세상은 악령의 말을 듣는다고 말했는데 그것은 그 악령들이 말할수 있음을 나타낸다. 우리는 그들이 음성으로 말하는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 거짓말을 심어놓는것임을 알고 있다.

그리스도의 추종자로서, 우리는 악령의 거짓말을 듣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요한은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는다고 했는데 그것은 우리안에 진리가 있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가지고 있기때문이다.

다시 한번, 사탄의 전략은 사람들이 자기의 거짓말을 믿도록 설득하는것임을 주목하라. 우리가 진리를 알고 믿는자면, 사탄은 우리를 이길수 없다. 그것이 성경적인 령적 전쟁에 관한 모든것이다.

믿음이 관건이다(Faith is the Key)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것만으로는 령적 전쟁에서 승리하기 어렵다. 관건은 하나님의 말씀을 진정으로 믿는것이다. 마귀를 대적하고 귀신을 쫓안해는것도 마찬가지이다. 례를 들어, 우리가전에 살펴보았던, 예수님이 열두 제자에게 ≪더러운 귀신을 쫓안해는 권세≫(마 10:1)를 주신 사례를 다시 살펴보자. 우리는 일곱 장 뒤에, 제자들이 귀신 들린 아이를 고치지 못했음을 찾을수 있다.[8] 예수님은 그들의 실패를 아셨을 때 한탄하셨다.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마 17:17, 강조 추가).

예수님이 한탄하신 리유는 그들에게 믿음이 없었기때문이다. 나중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왜 그들이 귀신을 쫓아낼수없었는지를 물었을 때, 예수님은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다≫(마 17:20)라고 대답하셨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의 귀신을 쫓아낼수 있는 권세가 믿음을 떠나서는 의미없음을 알수 있다.

우리가 귀신을 쫓안해고 마귀를 대적하는데 성공하는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믿음에 달려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진정으로 믿는다면, 우리는 그 말씀처럼 말하고 행동할것이다. 강아지가 그들에게서 달아나는 사람을 쫓아가는것처럼, 마귀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당신이 믿음 우에 굳게 서면, 마귀는 당신을 피할것이다(약 4:7).

제자들이 그 아이게서 귀신을 쫓안해려고 애썼지만 실패한것은 그들의 믿음이 부족한 까닭임은 모든 사람들이 보아낼수 있었다. 만일 그 귀신이 예수님 앞에서 행했던것처럼, 제자들 앞에서 그 아이를 거꾸러뜨리고 그에게 ≪심한 경련≫을 일으켰다면(눅 9:42), 그리고 거품을 흘리게 했다면(막 9:20을 보라), 제자들의 믿음은 두려움으로 변했을것이다. 그들은 아마도 그들이 목격한것으로 말미암아 마비되였을수도 있다.

그러나 믿음을 가진 사람은 눈에 보이는것에 의해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만을 따라 행동한다. ≪우리는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것으로 행하지 않는다≫(고후 5:7, 강조 추가). 하나님은 거짓이 없으시기에(딛 1:2을 보라), 우리의 상황이 겉으로는 하나님의 말씀과 달라보일찌라도, 우리는 믿음을 굳건히 해야 한다.

예수님은 단 몇 초 만에 그 아이에게서 귀신을 쫓안해셨음을 주목하라. 그분은 ≪귀신을 쫓는 작업≫에 시간을 랑비하시지 않았다. 하나님이 주신 권세를 믿는 사람은 귀신을 쫓는데 몇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또한, 예수님이 귀신에게 소리치셨다는 기록도 없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소리칠 필요도 없다. 예수님은 반복적으로 귀신에게 나오라고 명령하시지 않았다. 한번의 명령은 충분했다. 두번째 명령부터는 의심하고 있음을 나타냈을것이다.

요약(In Summary)

제자 삼는 사역자는 자신의 모범과 말로써 성경적인 령적 전쟁을 가르친다. 따라서, 그의 제자들은 사탄의 계략에 대적하여 그리스도의 계명에 순종할수 있다. 그는 그의 제자들이 현재 ≪류행하고 있는 교리≫들을 따라 비성경적인 령적 전쟁을 진행하라고 인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들은 초점이 잘못되고 실제로는 사탄에게 미혹당했으나 승리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임을 알고 있기때문이다.

 


[1]이 개념은 나의 책 ≪하나님의 시험≫이란 책에서 더 철저하게 론의되었다. 이 책은 우리의 웹 사이트www.shepherdserve.org에서 영어로 읽을수 있다.

[2]이 규칙의 례외는 사람이 귀신의 지배를 너무 강하게 받아 자유를 원하는 자신의 욕구를 표현할수 없는 경우일것이다. 이런 경우에, 귀신을 쫓안해기 위해서는 특별한 성령의 은사가 필요하며 그 성령의 은사는 성령님의 뜻대로 역사한다.

[3]로마서 1:18-32 에 기록한 불신자에 대한 바울의 설명도 이 같은 개념을 뒷받침한다.

[4]물론, 부동한 지역에 따라, 빛의 나라와 어둠의 나라에 있는 사람들의 비률도 다를것이다.

[5] ≪한번 구원받은 사람의 구원은 영원하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분명히 동의하지 않을것이다. 나는 그들이 ≪만일≫이란 단어가 나오는 곳을 특별히 주의하면서 롬 11:22; 고전 15:1-2; 빌 3:18-19; 골 1:21-23과 히 3:12-14를 읽어볼것을 권장하고 싶다.

[6]민수기 5:14-30에서 언급한 ≪의심의 마음(령) ≫과 잠언 16:18에서 언급한 ≪거만한 마음(령)≫은 령이란 단어가 실제 마귀가 아닌 어떤 지배적인 태도를 전달하는데 사용된 좋은 예다. 민수기 14:24에서 우리는 갈렙의 ≪마음(령)이 달랐다≫는 구절을 읽게 되는데 그것은 분명 갈렙의 좋은 태도를 가리키는것이였다.

[7]이것은 자식이 부모의 죄때문에 고통받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종종 고통받고 있기때문이다. 그들이 고통받는것은 하나님께서 부모의 죄때문에 자식을 벌하신다는것을 나타내는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완악하여 자신의 죄가 아이들에게 고통을 줄수 있음을 알면서도 특정 죄를 짓고 있다는것을 나타낸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자비하심으로 한 사람을 심판하시지 않았지만, 나중에 그처럼 악하거나 그보다 더 악한 자손을 심판하신다는것이 분명하다. 마찬가지로, 그분은 자비하심으로 악한 세대에 대한 심판을 미루시지만, 그 뒤에 그 세대와 동등하거나 그 세대보다 더 심판을 받아 마땅한 세대에게 심판을 내리신다(렘 16:11-12을 보라). 그것은 한 사람의 조부모의 죄때문에 그를 징벌한다는것과는 전혀 다르다.

[8]우리는 모든 간질이 다 내주한 악령에 의해 발생한다는 가정을 함에 있어서 매우 신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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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th Korean » 령적 전쟁에 관한 현대 신화 부

휴거와 마지막 때(The Rapture and End Times)

제 29 장 (Chapter Twenty-Nine)

예수님이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계실 때, 그분은 제자들에게 이 땅을 떠나실 것이며 언젠가는 다시 오실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그분께서 다시 오실 때에는 그들을 천국에 데려가실 것이다(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휴거”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날 밤에 충실한 열한 사도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1-3, 강조 추가).

예수님의 이 말씀은 열한 제자가 살아 있을 동안 그분께서 재림하실 것이라는 가능성을 분명하게 암시한다. 실제로,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은 후, 제자들은 그분께서 그들이 살아 있을 동안에 재림하실 것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예수님은 또한 반복적으로 제자들에게 그분의 재림을 위해 준비하라고 경고하셨는데 이것은 그분께서 그들이 살아 있을 동안 재림하실 것이라는 가능성을 다시 한 번 암시한다(예를 들어, 마 24:42-44을 보라).

서신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임박한 재림(Jesus’ Imminent Return in the Epistles)

신약 서신을 쓴 사도들은 예수님이 1세기의 독자들이 살아 있을 동안 재림하실 것이라고 확신했다. 예를 들어, 야고보는 이렇게 썼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약 5:7-8, 강조 추가).

야고보는 그의 독자들에게 그들의 생애에 일어나지 않을 일에 대해 인내하라고 권면했을 이유가 없다. 그는 주님의 강림이 가깝다고 믿었다. 문맥적으로 보아, 야고보는 교회가 박해를 받을 당시에 이 글을 썼으며(약 1:2-4을 보라), 신자들은 자연스럽게 주님의 재림을 바라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바울은 예수님이 동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살아 있을 때에 재림하신다고 분명하게 믿었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살전 4:13-18, 강조 추가).[1]

이로부터 우리는 예수님이 천국에서 재림하실 때에, 죽은 신자들의 몸이 부활하게 되며, 살아 있는 신자들과 함께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됨”(휴거)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바울은 예수님이 천국에서 “그분 안에서” 자는 자들을 데리고 오실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휴거 때 천국의 신자들의 영혼이 그들의 부활한 몸과 결합 될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베드로는 그의 첫 번째 서신을 쓸 때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했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1:13, 4:7, 13, 강조 추가).[2]

마지막으로, 요한이 교회에 편지를 쓸 때에 그는 마지막 때가 가까웠으며 그 당시 독자들이 예수님의 재림을 볼 수 있다고 믿었다.

아이들아 지금은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오리라는 말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자녀들아 이제 그의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가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 2:18, 28, 3:2-3, 강조 추가).

주님의 지연(His Delay)

지난 이천 여년을 돌아보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사도들이 기대했던 만큼 빨리 오시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심지어 그 당시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떠나신 후로 오랫동안 오시지 않았으므로 예수님의 재림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벧후 1:13-14을 보라), 베드로의 생이 마감되는 시점까지 예수님이 여전히 재림하시지 않음으로 인하여 베드로는 그의 마지막 서신에서 재림을 의심하는 자들을 향해 아래와 같이 말하였다.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그들이 일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이로 말미암아 그 때에 세상은 물이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벧후 3:3-10).

베드로는 예수님의 지연이 그분의 사랑과 자비 때문이라고 긍정했다 – 그분은 사람들이 회개하도록 더 많은 시간을 주고 싶어 하신다. 그러나 그는 또한 예수님의 재림이 의심의 여지가 없음을 긍정하였다. 그분께서 재림하실 때에는 큰 진노하심으로 오실 것이다.

우리가 보겠지만, 성경은 그리스도가 재림하시기 몇 년 전부터 세상에는 전례 없는 대환난이 임할 것이며 악인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질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한다. 요한계시록의 대부분 주제는 미래에 일어날 일들에 대해 쓰고 있다. 우리가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성경은 미래에 칠 년간의 환난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한다. 교회의 휴거가 그 칠 년 내에 또는 가까운 어떤 시점에 이루어질 것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휴거는 정확히 언제 일어나는가?(When Exactly Does the Rapture Occur?)

휴거의 정확한 시간에 관한 질문은 기독교인들을 종종 분열시키는 한 가지 질문이다. 일부 사람들은 휴거가 칠 년 환난 전에 발생하며, 따라서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휴거가 정확히 칠 년 환난의 중간 지점에 발생한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휴거가 칠 년 환난의 중간 지점을 지나서 발생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휴거가 환난이 끝나는 시점에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발생한다고 말한다.

이 문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들이 분열할 가치가 없으며, 네 부류의 사람들은 모두 휴거가 미래의 칠 년 기간 내에 또는 그것과 가까운 시점에 발생한다는 데에 동의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것은 수천 년의 역사를 놓고 보면 매우 작은 부분에 속할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불일치 때문에 분열되기보다는 우리가 서로 동의하는 부분에 대해 기뻐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 각자가 믿는 것과는 관계없이 그것들이 실제로 일어날 일들을 개변시킬 수는 없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첫 25년 동안의 삶 속에서 줄곧 휴거가 칠 년 환난 전에 일어난다고 믿었음을 당신에게 말하고 싶다. 내가 그렇게 믿었던 것은 내가 그렇게 배워왔기 때문이고, 또 나 자신도 요한계시록의 내용을 자세히 연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나 자신을 위해 성경을 공부했을 때, 나는 다른 견해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럼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고 또 그것으로부터 어떠한 결론을 내릴 수 있는지 함께 살펴보도록 하자. 내가 당신을 나의 편에 서도록 설득하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서로 사랑해야한다!

감람산 강화(The Olivet Discourse)

먼저 마지막 때 및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기초적인 말씀인 마태복음 24장을 보도록 하자. 마태복음 24장은 25장과 함께 감람산 강화로 알려졌는데, 그것은 이 두 장의 말씀은 예수님이 감람산에서 그분의 가장 가까운 제자들에게[3] 하신 말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마지막 때에 일어나는 많은 사건들에 대해 알아볼 것이며, 강화의 대상인 예수님의 제자들은 휴거의 시기에 대해 어떤 결론을 내렸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오니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예수께서 감람 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와서 이르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마 24:1-3).

예수님의 제자들은 미래에 대해 알고 싶어했다. 그들은 특히 성전 건물이 언제 파괴되고(예수님의 예언대로) 주님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는지에 대해 알고 싶어했다.

돌이켜 보면, 우리는 성전 건물이 로마 군대에 의해 기원 70년에 완전히 파괴되었음을 알고 있다. 우리는 또한 예수님이 아직까지 자신의 교회를 모으러 돌아오시지 않았음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이 두 사건은 동시적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Jesus Answers Their Questions)

마태가 첫 번째 질문인 성전 건물의 미래 파괴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을 기록하지 않은 반면,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서 기록한 것 같다(눅 21:12-24을 보라).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은 그분의 재림과 세상 끝에 나타날 징조에 대해 바로 말씀하시기 시작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마 24:4-8, 강조 추가).

이 말씀은 예수님이 그분의 1세기 때의 제자들이 그분의 재림 전까지 살아있으리라는 것을 믿으셨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분께서 “너희“라는 대명사를 사용한 횟수를 주목하라. 예수님은 “너희”라는 대명사를 24장에서만 최소한 20번 사용하셨으며, 그로 말미암아 그분의 모든 청취자들은 예수님이 예언하신 것을 볼 때까지 살아있을 것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물론, 우리는 그날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던 모든 제자들이 오래전에 죽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이 그들을 속였다고 결론 내릴 것이 아니라 그분 자신도 재림의 정확한 시간을 모르셨다고 봐야 한다(마 24:36을 보라). 그러므로 예수님의 감람산 강화를 들었던 사람들은 살아있을 동안 그분의 재림을 볼 수 있는 가능성이 실제로 매우 컸다.

예수님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그분의 제자들이 거짓 그리스도에 의해 속지 않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마지막 때에 거짓 그리스도가 많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우리는 적그리스도가 거짓 그리스도이며 세상의 많은 사람들을 속이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들은 거짓 그리스도를 멋진 구세주로 간주하게 된다.

예수님은 전쟁, 기근과 지진이 있을 것이며, 그런 사건들이 재림의 징후가 아니라 “재난의 시작”이라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징후들이 지난 이천 년 동안 지속적으로 발생했다고 말하는 것이 안전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다음 말씀들은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들이다.

전 세계적인 대환난의 시작(Worldwide Tribulation Begins)

그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 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 때문에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그때에 많은 사람이 실족하게 되어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9-14, 강조 추가).

다시 말하지만, 당신이 그날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던 사람에게 “당신은 살아 있을 동안 이 모든 것이 이뤄지는 것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라고 묻는다면 그들의 대답은 틀림없이 긍정적일 것이다. 예수님은 너희라는 대명사를 계속 사용하셨다.

우리가 읽다시피, “재난의 시작”이후로 그리스도인에 대한 전례 없는 전 세계적인 박해가 일어날 것이다. 우리는 “만국” 또는 “모든 민족과 족속”의 미움을 받을 것이다. 예수님은 수백 년이라는 막연한 시간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시간을 가리키셨다. 왜냐하면, 그분은 그다음 구절에서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실족하게 되어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분의 말씀은 분명히 그리스도인 신자들로부터 실족한 사람들이 다른 신자들을 미워함을 가리키신 것이다. 왜냐하면, 불신자는 “실족”할 수 없으며 그들은 이미 서로 미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 세계적인 박해가 시작되면, 그 결과로 그리스도의 추종자라고 주장하는 많은 사람들의 배교가 이어질 것이다. 그들이 진짜 신자이든 거짓 신자이든, 양이든 염소이든, 많은 사람들이 실족하게 될 것이며, 그들이 한때는 사랑한다고 고백했던 신자들을 박해하는 권세에게 넘겨줄 것이다. 그 결과로 전 세계의 교회가 정화될 것이다.

그다음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중 하나는 요한계시록에서 적그리스도의 공범으로 특별히 묘사되고 있다(계 13:11-18; 19:20; 20:10을 보라). 불법은 사람의 마음속에 조그마한 사랑도 없을 만큼 성할 것이며 죄인들은 완전히 무정해지게 된다.

순교자와 생존자(Martyrs and Survivors)

비록 예수님께서 신자들이 목숨을 잃을 것이라고 예언하셨지만(24:9을 보라), 분명한 것은 모든 신자가 다 죽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24:13을 보라). 즉, 그들이 거짓 그리스도나 거짓 선지자들의 미혹을 받지 않고 그들로 하여금 믿음을 버리고 실족하게 하는 유혹을 이겨낸다면, 그들은 그리스도가 재림하셔서 하늘에서 그들을 모으실 때에 구원받게 될 것이다. 환난과 구원의 시간은 선지자 다니엘에게도 간결하게 계시되었다.

또 환난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래로 그 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이며 그 때에 네 백성 중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단 12:1-2).

그 때에도 예수님께서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문자적으로, “모든 민족과 족속”)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될 것이라고 약속하신 것처럼 구원의 은혜가 만민에게 임할 것이고, 그들에게 회개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주실 것이며 그제야 끝이 올 것이다.[4] 우리는 흥미롭게도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님의 약속이 성취된 것 같은 모습을 읽을 수 있다.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주하는 자들 곧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 그가 큰 음성으로 이르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계 14:6-7, 강조 추가).

일부 사람들은 그 때에 천사가 복음을 선포하는 이유는 7년 환난 때에 휴거가 이미 발생하여 모든 신자가 떠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물론, 그것은 추측일뿐이다.

적그리스도(The Antichrist)

선지자 다니엘은 적그리스도가 실제로 7년 환난의 중간에 예루살렘의 중건된 성전을 차지하고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선포할 것이라고 계시 받았다(단 9:27을 보라, 우리가 나중에 살펴볼 것이다). 예수님은 바로 이점을 염두에 두시고 감람산 강화를 계속 하셨다.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이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 안에 있는 물건을 가지러 내려 가지 말며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너희가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5]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마 24:15-22).

이것은 예수님이 전에 말씀하신 환난(24:9을 보라)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이다. 적그리스도가 예루살렘의 성전에서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선언할 때, 예수님 안에 있는 신자들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박해가 임할 것이다. 적그리스도는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선포하며 모든 사람이 그를 하나님으로 모실 것을 바란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진정한 추종자들은 곧 잡아 죽여야 할 나라의 공식적인 원수로 전락될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예수님은 유대에 있는 자들은 지체없이 산으로 도망해야 하며 어떤 것도 도망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

내 생각에는 전 세계 신자들이 그 사건이 일어날 때에 먼 곳으로 도망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왜냐하면, 그 사건은 전 세계적으로 보도될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온 세상이 적그리스도의 미혹을 받아 그를 그리스도로 여기며 그에게 충성할 것이라고 말씀한다. 그가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선포할 때, 사람들은 그를 믿고 그에게 경배할 것이다. 그가 진짜 하나님 – 그리스도인들의 하나님 – 에 대해 신성모독의 말을 할 때 그는 전 세계의 미혹당한 사람들이 그에게 경배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미워하도록 영향 줄 것이다(계 13:1-8을 보라).

예수님은 환난의 날들을 “감하시는 것”을 통하여 그분의 백성들을 궁극적으로 구원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다”(24:22).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신다”는 것은 그분께서 하늘에서 나타나시고 그분의 백성들을 모으실 때를 가리키는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기에서 적그리스도가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선언한 뒤 얼마 뒤에 구원이 이루어질지에 대해서는 말씀하시지 않았다.

어쨌든, 우리는 예수님은 그분의 청취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적그리스도가 자신의 신성을 선언하고 그리스도인들에게 전쟁을 선포하는 것을 살아서 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들도록 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이런 관점은 그 사건이 있기 전에 신자들은 천국으로 휴거될 것이라는 관점과 대조된다. 만일 당신이 베드로, 야고보 또는 요한에게 예수님은 적그리스도가 자신의 신성을 선언하기 전에 재림하셔서 그들을 구원하실 것인가하고 묻는다면, 그들은 “분명히 아니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성도를 향한 전쟁(War Against the Saints)

성경의 다른 말씀도 신자들에 대한 적그리스도의 박해를 예고하고 있다. 예를 들어, 요한계시록을 기록할 때 요한은 이러한 계시를 받았다.

또 짐승이 과장되고 신성 모독을 말하는 입을 받고 또 마흔두 달 동안 일할 권세를 받으니라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비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사는 자들을 비방하더라 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계 13:5-7, 강조 추가).

적그리스도가 마흔두 달 또는 정확히 3년 반 동안 “일할 권세”를 받았음을 주목하라. 흥미로운 것은 이것은 정확히 7년 환난의 절반이다. 적그리스도가 “일할 권세”를 받은 것은 7년 환난의 마지막 마흔두 달이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왜냐하면, 환난이 끝나고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때에 그분은 적그리스도와 그의 군대들과 싸울 것이며 적그리스도의 권세도 완전히 없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적그리스도의 “일할 권세”는 어떤 특별한 권세를 말한다. 왜냐하면, 적그리스도가 일어나는 동안 하나님께로부터 일부 권세를 강의적으로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니엘서에서 읽다시피, 이 특별한 “일할 권세”는 그가 성도들을 이기기 위해 받은 것일 수 있다.

내가 본즉 이 뿔이 성도들과 더불어 싸워 그들에게 이겼더니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와서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을 위하여 원한을 풀어 주셨고 때가 이르매 성도들이 나라를 얻었더라…그가 장차 지극히 높으신 이를 말로 대적하며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를 괴롭게 할 것이며 그가 또 때와 법을 고치고자 할 것이며 성도들은 그의 손에 붙인 바 되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지내리라(단 7:21-22, 25, 강조 추가).

다니엘은 성도들이 적그리스도의 손에 붙인 바 되어 “한 때 두 때와 반 때”를 지낼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요한계시록 12장 6절과 14장과의 비교에 따라, 이 난해한 구절은 3년 반 동안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요한계시록 12:6에 따르면, 어떤 상징적인 여자는 광야의 예비된 곳에서 1,260일 동안 “양육”받았다고 하는데 이 시간은 일 년을 360일로 계산했을 때 마침 3년 반이 된다. 그다음, 여덟 구절 뒤에, 그 여자는 다시 한 번 언급되는데, 그녀가 광야의 한 곳에서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 받았다고 한다. 그러므로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는 1,260일 또는 3년 반 동안과 같다.

따라서 이 문맥에서 “한 때”는 일 년, “두 때”는 이 년, “반 때”는 반 년을 의미한다. 요한계시록 12:14의 이 표현은 다니엘서 7:21에서와 마찬가지로 같은 내용을 의미하는 것이 틀림없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성도들이 3년 반 동안 적그리스도의 손에 붙인 바 될 것이며, 그 시간은 요한계시록 13:5에서 말씀하신 적그리스도가 “행할 권세”를 가진 시간과 동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경에는 이 두 번의 마흔두 달의 기간이 모두 동일한 기간이라는 말씀은 없다. 만일 그것이 적그리스도가 자신의 신성을 선언한 7년 환난의 중간 시점부터 시작된다면, 성도들은 다음 3년 반 동안 적그리스도의 손에 붙인 바 되며 예수님은 7년 환난이 끝날 때 또는 끝날 무렵에 하늘에서 나타나시고 성도들을 모으실 때 구원해 주실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이 마흔두 달이 7년 환난 기간의 다른 시점에서 시작한다면, 우리는 휴거가 7년 환난이 끝나기 전의 어느 시점에 발생한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이러한 두 가지 가능성 중 후자 의 어려움은 적그리스도가 자신의 신성을 선언함으로 인해 성도들이 위험에 놓여 산으로 도망하기 전에 그들이 적그리스도의 손에 붙인 바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비논리적이 돼 보인다.

이러한 두 가지 가능성 중 전자의 어려움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요한계시록에서 읽은 것처럼 대환난과 전 세계적인 심판을 내리실 때 성도들이 여전히 이 땅에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나중에 이 어려움을 살펴볼 것이다.

지금은 감람산 강화로 다시 돌아가 보자.

거짓 메시아(False Messiahs)

예수님은 그분의 제자들에게 거짓 그리스도의 미혹을 받지 않는 것의 중요성을 더 자세히 설명하셨다.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그러면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일 것이니라(마 24:23-28).

예수님께서 너희라는 대명사를 많이 사용하셨음을 다시 한 번 주목하라. 감람산에 있던 청중들은 살아 있는 동안 큰 표적을 행할 수 있는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가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이 하늘에서 번개가 번쩍임같이 재림하시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물론, 그 당시 신자들은 실족할 수 있다. 왜냐하면, 신자들에 대한 박해가 매우 무서웠고,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은 그들의 표적으로 인해 매우 설득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예수님은 반복적으로 제자들에게 그분이 재림하시기 전에 있을 일들에 대해 경고하셨다. 그분은 그들이 많은 사람들처럼 미혹되지 않기를 바라셨다. 진정한 그리고 견고한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이 하늘에서 번개같이 임하실 것을 기다리는 반면, 그분의 진정한 추종자가 아닌 사람들은 독수리가 광야에 버려진 시체에 끌리듯이 거짓 그리스도에게로 이끌려 간다.

하늘의 징후(Signs in the Sky)

예수님은 계속하여 말씀하셨다.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그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마 24:29-31).

예수님의 감람산 강화의 이 부분에 대해 그 당시 유대인들도 매우 익숙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모습은 이사야와 요엘이 말했던 세상 끝날에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 때 곧 “주님의 날”, 하늘의 별들과 별 무리가 그 빛을 내지 아니할 때(사 13:10-11; 욜 2:31을 보라)와 같기 때문이다. 그다음에 세상의 모든 주민들은 예수님이 하늘에서 영광 중에 임하시는 것을 보게 될 것이며 그들은 통곡하게 될 것이다. 그다음에 예수님의 천사들은 “그분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는데”, 이것은 신자들이 실제로 공중에서 예수님을 만날 것이며 이 일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일어날 것이다.

다시 한 번, 당신이 감람산 강화 당시에 베드로, 야고보와 요한에게 예수님이 적그리스도와 대환난이 있기 전에 오시는지 아니면 있은 후에 오시는지를 묻는다면 그들은 당연히 있은 후에 오실 것이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재림과 휴거(The Return and the Rapture)

감람산 강화의 이 부분은 바울이 쓴 서신서의 한 사건과 매우 비슷하다. 그 사건은 틀림없이 교회의 휴거에 대해 쓴 것이나 많은 주석가들은 그것이 대환난이 시작하기 전에 일어난 일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이 장의 앞부분에서 보았던 다음의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자.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살전 4:13-5:3, 강조 추가).

바울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며 신자들은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된다고 썼다. 이것은 예수님이 마태복음 24:30-31에서 묘사하신 모습과 같아 보인다. 예수님은 그것이 분명 적그리스도와 대환난이 일어난 후에 발생한다고 하셨다.

또한, 바울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언제 일어날지에 관해서도 언급하였다. 그는 “때와 시기”에 관하여서는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그들 자신이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성도들의 휴거는 “주님의 날”에 일어나며 그날에는 그리스도가 재림하여 그분의 교회를 데려가며 “평안과 안전”을 기대하는 사람들에게는 무서운 진노와 멸망이 이를 것이라고 믿었다.

이것은 바울이 그리스도가 진노와 함께 재림하시는 것에 관하여 나중에 데살로니가에 쓴 서신과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너희로 환난을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환난을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자기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그 날에 그가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받으시고 모든 믿는 자들에게서 놀랍게 여김을 얻으시리니 이는 우리의 증거가 너희에게 믿어졌음이라(살후 1:6-10, 강조 추가).

바울은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박해를 받던 데살로니가 신자들에게(살전 1:4-5을 보라) 안식을 주시며 “자기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에” 나타나실 때에 신자들에게 환난을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응당한 형벌을 내리실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7년 환난이 시작하기 전에 교회를 데려가신다는, 또 일반적으로 예수님이 비밀스럽게 나타나시고 조용하게 교회를 데려가신다고 묘사되는 환난 전 휴거의 모습과 전혀 다르다. 바울의 말은 정확히 예수님이 마태복음 24:30-31에서 설명하신 것과 같다. 그분은 환난이 끝날 때 또는 끝날 무렵에 재림하셔서 신자들을 데려가시고 불신자들에게 그분의 진노를 쏟을 것이다.

주님의 날(The Day of the Lord)

나중에 같은 서신에서, 바울은 이렇게 썼다.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 영으로나 또는 말로나 또는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해서 쉽게 마음이 흔들리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라(살후 2:1-2).

첫째, 바울의 주제가 그리스도의 재림과 휴거임을 주목하라. 바울이 우리가 그분 앞에 “모인다”라고 쓸 때 사용한 단어는 예수님이 마태복음 24:31에서 천사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모으리라”라고 말씀하실 때 사용하신 단어와 동일하다.

둘째,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4:13-5:2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런 사건들이 “주님의 날”에 일어난다고 하였음을 주목하라. 그보다 더 분명할 수 없다.

바울은 계속하여 말하였다.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니 그는 대적하는 자라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과 숭배함을 받는 것에 대항하여 그 위에 자기를 높이고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내세우느니라(살후 2:3-4, 강조 추가).

바울에 의하면 주님의 날은 반드시 휴거와 그리스도의 재림과 같이 시작하는데 데살로니가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날이 이미 왔다고 오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배교하는 일이(아마도 예수님이 마태복음 24:10에서 말씀하신 많은 사람들의 실족을 말할 것이다) 있기 전에는 그 날이 이르지 않으며, 적그리스도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자신의 신성을 선언한 후에야 그날이 이를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하였다. 때문에, 바울은 데살로니가 신자들에게 적그리스도가 자신의 신성을 선언하기 전까지는 그리스도의 재림, 휴거 또는 주님의 날이 올 것을 예상할 수 없음을 명확하게 말하였다.[6]

바울은 계속하여 그리스도의 재림과 적그리스도에 멸망에 대해 말하였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이 일을 너희에게 말한 것을 기억하지 못하느냐 너희는 지금 그로 하여금 그의 때에 나타나게 하려 하여 막는 것이 있는 것을 아나니 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하였으나 지금은 그것을 막는 자가 있어 그 중에서 옮겨질 때까지 하리라 그 때에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니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그를 죽이시고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폐하시리라 악한 자의 나타남은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살후 2:5-10).

바울은 그리스도가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적그리스도를 폐하실 것이라고 말하였다. 만일 이 “나타나심”이 아홉 구절 앞에서 언급한 휴거 때의 그분의 강림하심과(2:1을 보라) 같다면, 적그리스도는 교회가 공중에서 모여 주님을 영접할 때 죽임을 당할 것이다. 이것은 요한계시록 19장과 20장에 의해 확증된다. 우리는 거기에서 그리스도의 재림(계 19:11-16을 보라), 적그리스도와 그의 군대의 멸망(19:17-21을 보라), 사탄의 결박(20:1-3을 보라)과 “첫째 부활”(20:4-6을 보라) 곧 7년 환난 중에 순교한 사람들의 부활을 읽을 수 있다. 이것이 진짜 의인의 첫 번째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부활이라면, 휴거와 그리스도의 진노의 재림이 적그리스도의 멸망과 동시에 발생할 것이라는 데 대해서는 의심이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성경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휴거 때 몸이 부활한다고 명백하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살전 4:15-17을 보라).[7]

준비 되라(Being Ready)

감람산 강화에 다시 돌아가 보자.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8]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 24:32-35).

예수님은 그분의 제자들이 준비되어 있지 않기를 바라시지 않았는데 그것은 감람산 강화의 요점이다. 제자들은 전 세계적인 환난, 배교, 거짓 선지자와 거짓 그리스도의 일어남, 적그리스도의 신성 선언, 그리고 그분의 재림이 가까워짐에 따라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과 같은 “모든 일들”을 보게 될 때, 그분이 “곧 문 앞에” 이르신 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재림하시기 몇 년, 몇 개 월 또는 몇 일 전에 일어날 일들에 대해 말씀하신 후, 바로 그분의 재림의 정확한 시간에 대해서는 비밀에 부치셨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 24:36).

이 구절은 문맥을 떠나서 얼마나 자주 인용되는지 모른다! 그것은 종종 예수님은 언제든지 재림하시고 교회를 휴거하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이 언제 재림하실지에 대해 모른다는 관점을 지지하기 위해 인용된다. 그러나 문맥상으로 보아, 그것은 예수님이 의미하신 바가 아니다. 그분은 단지 제자들에게 그분이 재림하시기 직전에 발생하는 여러 가지 일들을 말씀해 주심으로써 그들이 그분의 재림에 준비되기를 보장하기 위하여 노력하신 것뿐이다. 그분은 단순히 정확한 날짜와 시간은 그들에게 계시되지 않을 것임을 알려주셨다. 또한, 이 구절에서 예수님은 그분께서 7년 환난 전에 오셔서 비밀리에 교회를 휴거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7년 환난이 끝날 때거나 끝날 무렵에 재림하실 것을 말씀하셨다. 우리가 정직하게 문맥을 살펴본다면 이런 관점은 논쟁할 여지가 없다.

주님의 재림 – 완전한 기습인가?(His Return–A Complete Surprise?)

휴거가 환난의 마지막 무렵 또는 마지막 때에 발생한다는 관점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 같은 재림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 같이 갑작스럽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재림은 환난의 발생에 따라 예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휴거가 반드시 환난 전에 일어난다고 말한다. 그렇지 않으면 신자들은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아직도 7년 또는 더 이상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성경의 말씀을 따라 준비되고 깨어있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틀렸다. 예수님의 감람산 강화의 요점은 제자들이 환난이 끝날 때 또는 끝날 무렵의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재림 전에 발생할 많은 표적들을 제자들에게 알려주셨다. 왜 감람산 강화에서 예수님은 그분의 재림이 그 시점부터 적어도 7년 뒤에 발생함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에게 준비되고 깨어 있으라는 경고를 그렇게 많이 하셨을까? 예수님은 그분의 재림이 몇 년이 지나야 일어나더라도 그리스도인들은 준비되고 깨어있어야 한다고 믿으셨음이 분명하다. 사도들이 자신의 서신에서 신자들이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 준비되고 깨어있으라고 권면했던 것은 단지 예수님을 모방한 것이다.

또한, 환난 전의 휴거만이 준비되고 깨어 있으라는 권면을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또 다른 문제가 있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첫 번째 재림은 환난이 끝나기 7년 전에 온다고 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첫 번째 재림은 언제든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환난이 끝나기 7년 전에 일어나야 한다. 따라서 실제로, 세계 국세가 7년 환난을 일으킬 준비가 되지 않은 이상,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 예상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세계 국세는 예측하고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환난 전 휴거를 믿는 대부분 사람들은, 그들이 정직하다면, 예수님이 세계정치 상황으로 인해 오늘이나 내일에는 재림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고 말할 것이다. 7년 환난이 일어나기에는 아직도 성취되지 않은 예언된 사건들이 남아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곧 다니엘서에서 살펴보겠지만, 적그리스도는 이스라엘과 7년 동안의 언약을 맺게 되는데 그것이 환난의 시작이 된다. 따라서, 휴거가 7년 환난이 끝나기 전에 발생한다면, 반드시 적그리스도가 이스라엘과 7년의 언약을 맺을 때 일어난다. 정치적인 요소로 인해 그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 한, 환난 전 휴거를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기대할 필요가 없다.

또한, 환난 전 휴거의 옹호자들도 예수님이 환난의 에 오신다고 믿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두 번째 재림의 정확한 날짜를 계산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휴거가 일단 발생하면, 예수님께서 아버지만 아신다고 말씀하신 그 날을 7년 앞서 계산을 통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실제로 하신 말씀으로부터 보아, 그분은 그분의 재림이 예상 못할 비밀스러운 일이 되기를 원하시지 않았다. 사실, 그분은 그것이 특정 환난들을 통해 예측될 수 있기를 바라셨다. 간단히 말해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 세상처럼 방심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았다. 그분은 계속하여 말씀하셨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9]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둑이 어느 시각에 올 줄을 알았더라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마 24:37-44).

다시 말하지만, 예수님의 명백한 관심사는 제자들이 그분의 재림에 준비되는 것이었다. 사실, 그것이야말로 감람산 강화의 주된 요점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준비되고 깨어있으라고 하신 많은 경고들은 그분의 재림이 갑작스러움을 나타내기 위함이 아니라 그 때까지 준비되고 깨어있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나타내기 위함이다. 그렇기 때문에, 환난 전에 언제든지 휴거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자신이 다른 그리스도인들보다 준비가 더 잘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실제로 준비되지 못했을 수 있다. 만일 그들이 환난을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적그리스도의 통치 하의 전 세계적인 박해 속에 있다면 유혹 앞에서 쉽게 실족할 수 있다. 우리는 성경이 실제로 발생할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에 대하여 준비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만일 당신이 베드로, 야고보나 요한에게 언제 예수님의 재림을 볼 수 있다고 예상하는가 하고 묻는다면, 그들은 예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신 모든 표적들이 발생한 후에야 그분께서 재림하실 것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들은 환난이나 적그리스도가 일어나기 전에 그분을 볼 수 있다고 예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밤의 도둑(A Thief in the Night)

예수님은 제자들이 그분이 재림하실 때 깨어있게 하기 위하여 많은 표적들을 설명하실 때 “밤의 도둑”이란 비유를 드셨음을 주목하라. 그러므로 “밤의 도둑”이란 비유를 사람들이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서 어떠한 생각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사용할 수 없다.

바울과 베드로는 “주님의 날”에 관해 쓸 때 모두 “밤의 도둑”이란 비유를 들었다(살전 5:2-4, 벧후 3:10을 보라). 그들은 그 비유가 7년 환난의 끝 또는 끝날 무렵에 임할 예수님의 진노의 재림과 관계가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바울은 그의 독자들에게 “형제들아 너희는 어둠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둑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살전 5:4)라고 말했다. 그는 예수님의 비유를 정확하게 해석했다. 그는 표적들에 대해 깨어 있고 예수님을 순종적으로 따르는 사람들은 어둠에 있지 않으며 그리스도의 재림이 그들에게는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밤의 도둑처럼 오시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처럼 오직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만이 놀라게 될 것이다(예수님이 계 3:3과 16:15에서 “밤의 도둑”의 비유를 아마겟돈 전쟁에서 사용하신 것도 보라).

감람산 강화에서 이 시점부터, 예수님은 반복적으로 제자들에게 그분의 재림에 준비되라고 권계하셨다. 같은 시점에서 그분은 악한 종의 비유, 열 처녀의 비유, 달란트의 비유, 그리고 양과 염소에 대한 심판에 대한 예언 등(모두 읽을 가치가 있다)을 통하여 제자들에게 어떻게 준비할지를 알려주셨다. 거의 모든 경우에, 그분은 그분의 재림을 준비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지옥이 기다리고 있다고 경고하셨다(마 24:50-51; 25:30, 41-46을 보라). 그분이 재림했을 때 그분의 뜻대로 살고 있어야만 준비되었다고 할 수 있다.[10]

다른 이의(Another Objection)

휴거가 환난이 끝날 때 또는 끝날 무렵에 일어난다는 데 대해 일부 사람들이 반대하는 이유는 성경적으로 노아, 롯 그리고 애굽에서의 이스라엘과 같이 입증된 예로부터 보아 의인은 종래로 악인들과 함께 처벌되지 않았다는데 근거한다.

확실히, 우리에게는 의인이 7년 환난 중에 하나님의 진노를 받지 않을 좋은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경의 많은 선례와 약속들에 어긋나기 때문이다(예를 들어, 살전 1:9-10; 5:8을 보라).

그러나 예수님은 대환난 기간에 의인들은 고통을 받을 것이라고 예언하셨다. 그들은 하나님의 손이 아닌 악인의 손에 붙여질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박해에서 면제되지 않는다 – 그것은 약속된 박해이다. 7년 환난 중에 많은 신자들이 목숨을 잃게 된다(마 24:9; 계 6:9-11; 13:15; 16:5-6; 17:6; 18:24; 19:2을 보라). 많은 사람들은 목 베임을 당할 것이다(계 20:4을 보라).

따라서, 만일 특정 국가의 모든 신자들이 순교했다면, 하나님의 진노가 그 나라 전체에 떨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만일 한 나라에 신자들이 살아 있다면, 하나님은 악인들을 심판하실 때 그들을 보호하실 수 있을 것이다. 모세의 시대에 애굽을 심판하실 때, 그분은 이 능력을 증명하셨다. 이웃 애굽사람들이 한 번 또 한 번의 심판을 받을 때에, 하나님은 심지어 개 한 마리도 이스라엘을 향해 짖지 못하게 하셨다(출 11:7을 보라). 마찬가지로,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읽으면 하나님께서 황충이 다섯 달 동안 땅의 악인들을 해하게 하셨지만, 이마에 특별한 인침을 받은 144,000명의 유대인 종들은 해하지 못하게 하신 것을 알 수 있다(계 9:1-11을 보라).

요한계시록에서의 휴거(The Rapture in Revelation)

우리는 요한계시록의 아무데에서도 교회의 휴거를 읽을 수 없으며, 요한계시록 19장에서 그리스도가 아마겟돈 전쟁에서 적그리스도와 그의 군대들을 결박하시기 위해 오신 것 외에는 아무데에서도 그분의 나타나심에 대해 읽을 수 없다. 심지어 그 때까지 휴거에 대한 기록이 없다. 그러나 그와 같은 때에 환난 중 순교한 사람들의 부활은 언급되고 있다(20:4을 보라). 왜냐하면,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교회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부활한다고 썼으며, 그것은 교회가 휴거하는 시기와 같은데, 이것은 이미 고려했던 다른 말씀들과 함께 보았을 때, 우리로 하여금 휴거가 요한계시록 19장과 20장에 묘사된 7년 환난이 끝날 때까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믿도록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관점도 있다.

일부 사람들은 요한계시록 6장과 7장에서 휴거를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요한계시록 6:12-13에서 해가 “검은 털로 짠 상복 같이 검어지고” 별들이 땅에 떨어진다고 기록되었는데, 이것은 예수님이 재림하시고 택하신 자들을 모으시기 전에 일어나는 두 가지 징후이다(마 24:29-31). 그런 다음, 7 장 에서, 우리는 천국에 각 나라와 족속과 방언에서 나온 큰 무리가 있었는데 그들은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7:14)임을 읽게 된다. 그들은 앞 장에서 나온 다른 한 그룹의 사람들처럼(6:9-11을 보라) 순교자로 묘사되지 않았는데,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순교 당한 것이 아니라 휴거했다는 추측을 하게 한다 – 그들은 대환난 때 구원받은 신자들일 것이다.

단순히 요한계시록 6:12-13에서 묘사한 우주적인 사건이 마태복음 24:29-31의 예수님의 말씀과 비슷하다는 이유로, 휴거가 그 사건들 뒤에 일어날 것이라고 가정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요한계시록 6:12-13의 우주적인 사건이 7년 환난 중에 발생한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없다. 만일 요한계시록 6:1-13 에 묘사된 사건들이 순차적이고, 휴거가 정확히 6:13 이후에 발생한다면,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적그리스도(6:1-2를 보라), 전 세계적인 전쟁(6:3-4을 보라), 기근( 6:5-6을 보라), 전쟁, 기근, 전염병과 짐승으로 인한 땅의 사 분의 일의 죽음(계 6:7-8을 보라),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순교(계 6:9-11을 보라)가 있기 전에는 휴거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믿게 한다. 물론 이 말씀에서 묘사한 모든 사건들이 7년 환난 전에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사건들은 환난 끝에 휴거가 일어나는, 7년 환난의 전반 과정을 묘사했을 수도 있다.

휴거가 7년 환난 전에 발생한다는 관점에 무게를 더 해 주는 사실은 바로 요한계시록 8장 이후에 “나팔 심판”과 “대접 심판”, 두 가지 일곱 심판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중 후자를 통해 하나님의 진노가 마친다는 말씀이 있다(15:1을 보라). 그러나 대접의 심판이 있기 전에, 요한은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 가에 서있는 것”(15:2)을 보았다. 이 승리한 성도들은 이미 휴거했을 있다. 반면에, 그들은 순교 당했을 수도 있다. 이 부분에 대한 성경의 말씀은 없다. 또한, 우리는 15장 2절이 그 근처에 설명된 장면과 어떤 연대적인 관계가 있는지도 모른다.

요한계시록에서 휴거가 7년 환난 전에 발생한다는 관점에 무게를 더 해 주는 또 다른 사실은 이것이다: 요한계시록 9:1-12에 기록된 다섯 번째 “나팔 심판”의 경우, 황충들은 “이마에 하나님의 인침을 받지 아니한 사람들만”(9:4) 해할 수 있는 권세를 가졌다고 했다. 그리고 유일하게 그 인침을 받은 사람은 144,000명의 이스라엘 자손들이라고 했다(계 7:3-8을 보라). 따라서 다른 모든 신자들은 다섯 번째 “나팔 심판”이 이르기 전에 휴거할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황충들에게 쏘임당하는 것을 면할 수 없다. 또한, 황충은 다섯 달 동안 사람들을 괴롭힐 것이기 때문에(9:5, 10), 휴거는 7년 환난의 끝에서 적어도 다섯 달 전에 발생해야 할 것이다.

물론, 이런 논리 외에도 다른 방법들이 있다. 요한계시록에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인침을 받은 다른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것이 만일 휴거가 다섯 번째 나팔 심판 이전에 발생한다는 것을 증명한다면, 이것은 또한 황충의 공격이 있기 전에 휴거하지 못한 144,000명의 이스라엘 자손들이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가 황충들을 통해 나타날 때 그것으로부터 보호받는 은총을 받았다.

이 모든 것에 대해 어떤 결론을 내려야 할까? 나는 단지 휴거가 7년 환난이 끝날 무렵 또는 끝에 발생한다는 결론밖에 내릴 수 없다. 신자들은 하나님의 진노로 인한 고통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그들은 심한 박해와 순교할 준비는 해야 한다.

환난 기간(The Tribulation Period)

성경이 7년 환난에 대해 무엇을 가르치는지를 좀 더 면밀하게 살펴보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자. 우리는 환난의 기간이 7년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우리는 요한계시록 외에, 아마도 성경에서 마지막 때에 관한 계시가 가장 많이 기록된 다니엘서에 대해 공부해야 한다.

다니엘서 9장에서 우리는 다니엘이 그의 동료 유대인들과 함께 바벨론의 포로로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다니엘은 예레미야서에 대한 공부를 통해 유대인이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70년 동안 하게 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단 9:2; 렘 25:11-12을 보라). 이 70년이 거의 끝난다는 것을 깨달은 후, 다니엘은 기도하여 그의 백성의 죄를 자백하고 주님의 자비를 구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가브리엘 천사가 그에게 나타나서 그리스도의 재림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이 겪어야 할 환난의 기간을 계시하였다. 다니엘서 9:24-27에 기록된 예언은 성경에서 가장 놀라운 부분 중의 하나이다. 나는 그것을 괄호 안의 설명과 함께 아래에 인용했다.

네 백성[이스라엘]과 네 거룩한 성[예루살렘]을 위하여 일흔 이레를 [우리가 이것에 대해 보겠지만, 분명 70개의 7년, 또는 총 490년을 가리킨다] 기한으로 정하였나니 허물이[어쩌면 이스라엘의 죄악의 정점인 자신의 메시아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을 가리킬 수 있다] 그치며 죄가[아마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속죄를 가리킬 것이다] 끝나며 죄악이 용서되며[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속죄를 가리킴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하나님의 왕국에서 예수님의 지상 통치의 시작] 환상과 예언이 응하며[아마 성경이 씌어지는 것이 끝나거나 천 년 통치 이전의 모든 예언이 성취되는 것을 가리킬 수 있다] 또 지극히 거룩한 이가 기름 부음을 받으리라[어쩌면 천 년 왕국의 건립을 가리킬 수 있다]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이 영은 BC 445년에 아닥사스다 왕에 의해 반포되었다]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주 예수 그리스도]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예순두 이레가[총 예순 아홉 이레, 또는 483년] 지날 것이요 그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광장과 거리가 세워질 것이며[이전에 바벨론에 의해 파괴된 예루살렘의 재건을 말한다] 예순두 이레 후에[BC 445년의 영이 있은 뒤 483년이 지난 시점을 말한다]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1년을 360일로 보는 유대인의 달력에 따라 계산하면 예수님은 AD 32년에 십자가에서 죽으신다] 장차 한 왕의[적그리스도] 백성이[로마인]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무너뜨리려니와[AD 70년에 디도와 로마 군대에 의한 예루살렘의 멸망을 가리킨다] 그의 마지막은 홍수에 휩쓸림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 그가[장차 오게 될 왕 – 적그리스도] 장차 많은 사람들과[이스라엘]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또는 7년 동안 – 이것은 환난의 기간이다] 언약을 굳게 맺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3년 반 때 즈음이다]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포악하여 가증한 것이[적그리스도가 예루살렘의 유대인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내세울 때; 살후 2:1-4을 보라]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예수님이 재림하실 것이다]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하게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 하니라[예수님에 의한 적그리스도의 패배](단 9:24-27, 강조추가).

특별한 490년(490 Special Years)

BC 445년에 예루살렘을 재건하라는 아닥사스다 왕의 법령이 반포돼서부터 하나님은 미래의 490년을 특별하게 배분하셨다. 하지만 그 490년은 순차적이 아니며 483년과 7년, 두 부분으로 나뉘었다. 첫 번째 483년이 완성되었을 때에(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해), 시계는 멈추었다. 다니엘은 아마 시계가 거의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 멈춰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미래의 어떤 시점에서, 그 시계는 다시 작동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 마지막 7년은 “환난”뿐 아니라 “다니엘의 일흔 번째 이레”를 가리킨다.

그 7년은 두 개의 3년 반으로 나누어진다. 우리가 다니엘의 예언에서 읽다시피, 중간 시점에서 적그리스도는 이스라엘과의 언약을 깨고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다.” 그다음에 그는 바울이 말한 것처럼 예루살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내세울 것이다.[11]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언급하신 “멸망의 가증한 것”이다(마 24:15).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유대에 있는 신자들은 “산으로 도망해야 한다”(마 24:16). 왜냐하면, 그것은 이 세상 누구도 본적이 없는 최악의 환난이 시작됐음을 나타내기 때문이다(마 24:21을 보라).

요한계시록 20장에 기록된 것 같이 요한은 그의 환상에서 “유대인의 도망”을 상징적으로 보았을 수 있다. 만일 그렇다면, 유대의 신자들은 광야에 예비된 특별하고 안전한 곳에서 7년 환난의 나머지 시간, 정확히 3년 반 동안 “양육” 받게 될 것이다(계 12:6, 13-17). 요한은 그들의 도망에 분노한 사탄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과 싸우려는 것을 미리 보았다(계 12:17). 이 때문에 나는 전 세계의 신자들이 적그리스도가 예루살렘에서 그의 신성을 선언했을 때 먼 곳으로 도망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다니엘의 마지막 계시(Daniel’s Last Revelation)

우리가 아직 고려하지 않은 다니엘서의 또 다른 흥미로운 구절은 마지막 12장이다. 그것은 한 천사가 다니엘에게 한 말씀이다. 나는 그것을 관호 안의 설명과 함께 아래에 인용했다.

그 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큰 군주 미가엘이[천사] 일어날 것이요 또 환난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래로 그 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이며[이것은 예수님이 마태복음 24:21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은 환난일 것이다] 그 때에 네 백성 중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이것은 유대인들의 도망 또는 휴거 때 신자들이 구원받는 것을 가리킬 것이다]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의인과 악인들의 부활]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그들이 부활한 후, 의인은 새로운 몸을 입고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빛날 것이다]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합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지난 세기 동안 교통과 지식의 놀라운 발전은 이 예언의 성취를 보여주는 듯 하다]

나 다니엘이 본즉 다른 두 사람이 있어 하나는 강 이쪽 언덕에 섰고 하나는 강 저쪽 언덕에 섰더니 그 중에 하나가 세마포 옷을 입은 자 곧 강물 위쪽에 있는 자에게 이르되 이 놀라운 일의 끝이 어느 때까지냐 하더라 내가 들은즉 그 세마포 옷을 입고 강물 위쪽에 있는 자가 자기의 좌우 손을 들어 하늘을 향하여 영원히 살아 계시는 이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되 반드시 한 때 두 때 반 때를[요한계시록 12:6과 12:14에 대한 판독에 따르면 3년 반의 시간이다] 지나서 성도의 권세가 다 깨지기까지이니 그렇게 되면 이 모든 일이 다 끝나리라 하더라[성도들이 적그리스도의 손에 3년 반 동안 붙여진다는 다니엘서 7:25의 말씀처럼, 여기서도 7년 환난의 마지막 3년 반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천사가 말한 모든 일의 끝은 “성도의 권세가 다 깨질 때이다.”] 내가 듣고도 깨닫지 못한지라 내가 이르되 내 주여 이 모든 일의 결국이 어떠하겠나이까 하니 그가 이르되 다니엘아 갈지어다 이 말은 마지막 때까지 간수하고 봉합할 것임이니라 많은 사람이 연단을 받아[환난을 통해서임이 틀림없다] 스스로 정결하게 하며 희게 할 것이나 악한 사람은 악을 행하리니 악한 자는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되 오직 지혜 있는 자는 깨달으리라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며 멸망하게 할 가증한 것을 세울 때부터 천이백구십 일을 지낼 것이요[이 두 사건 사이의 기간이 1,290이라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 두 사건은 모두 7년의 중간에 발생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두 사건이 일어난 후로부터 마지막 때에 매우 중요한 무언가가 일어나기까지 1,290일을 지내야 한다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 1,290일은 360일을 일 년으로 계산했을 때 3년 반 그리고 30일이 되는데 이 기간은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의 예언에서 반복적으로 언급된 것이다. 왜 30일이란 시간이 추가되었는지는 추측할 수밖에 없다. 천사가 그 다음에 다니엘에게 한 말은 오묘함을 더 해 준다.] 마지막 때에 기다려서 천삼백삼십오 일까지 이르는 그 사람은 복이 있으리라[이에 우리는 신비의 또 다른 45일을 보게 된다] 너는 가서 마지막을 기다리라 이는 네가 평안히 쉬다가 끝날에는 네 몫을 누릴 것임이라[다니엘의 부활에 대한 약속](단 12:1-13).

분명한 것은, 마지막 때에 추가된 75일 동안에 아주 멋진 일이 일어날 것이다! 우리는 기다려야만 볼 수 있을 것이다 .

우리는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장을 읽는 것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재림 이후에 일어나는 많은 사건 중의 하나가 어린양의 혼인 잔치임을 알 수 있다. 한 천사는 요한에게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다”(계 19:9)라고 말하였다. 아마 그것은 천사가 다니엘에게 말했던 것과 같은 축복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영광스러운 잔치는 예수님이 재림하신 후 두 개월 반 정도 지나서 벌어질 것이다.

그 75일 동안에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장에 기록된,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가 불못에 던져지고, 사탄이 결박당하고, 그리스도의 왕국이 세워지는 것(계 19:20-20:4을 보라)과 같은 다른 사건들이 일어날 수도 있다.

천 년 왕국(The Millennium)

천 년 왕국은 예수님이 7년 환난 후에 천 년 동안 이 땅을 통치하시는 것을 말한다(계 20:3, 5, 7을 보라). 이사야는 거의 3천 년 전에 이 땅에 대한 그리스도의 통치를 예언하였다.

이는 한 아이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사 9:6-7, 강조 추가).

마찬가지로, 가브리엘 천사는 마리아에게 그의 아들이 무궁한 나라를 다스릴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천사가 이르되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눅 1:30-33, 강조 추가).[12]

천 년 왕국 기간에,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모든 산 위에 뛰어난 시온산에서 다스리실 것이다. 그분은 모든 국가를 공정하게 다스리실 것이며 온 땅에 평화가 가득할 것이다.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들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들의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사 2:2-4).

스가랴도 똑같이 예언하였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며 그를 위하여 크게 분노함으로 질투하노라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시온에 돌아와 예루살렘 가운데에 거하리니 예루살렘은 진리의 성읍이라 일컫겠고 만군의 여호와의 산은 성산이라 일컫게 되리라…만군의 여호와가 이와 같이 말하노라 다시 여러 백성과 많은 성읍의 주민이 올 것이라 이 성읍 주민이 저 성읍에 가서 이르기를 우리가 속히 가서 만군의 여호와를 찾고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자 하면 나도 가겠노라 하겠으며 많은 백성과 강대한 나라들이 예루살렘으로 와서 만군의 여호와를 찾고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와 같이 말하노라 그 날에는 말이 다른 이방 백성 열 명이 유다 사람 하나의 옷자락을 잡을 것이라 곧 잡고 말하기를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심을 들었나니 우리가 너희와 함께 가려 하노라 하리라 하시니라(슥 8:2, 20-23).

성경은 신자들이 실제로 그리스와 함께 천 년 동안 다스릴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들은 지금 얼마나 신실하게 사느냐에 따라 그분의 나라에서 상응한 책임을 지게 된다(단 7:27; 눅 19:12-27; 고전 6:1-3; 계 2:26-27; 5:9-10; 그리고 22:3-5을 보라).

우리는 부활의 몸을 입게 되지만, 그 때에 이 땅에는 죽을 수밖에 없는 몸을 가진 사람도 거주하게 될 것이다. 또한, 족장 시대의 수명이 회복되고 야생 동물도 잔인성을 잃게 될 것처럼 보인다.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워하며 나의 백성을 기뻐하리니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 가운데에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며 거기는 날 수가 많지 못하여 죽는 어린이와 수한이 차지 못한 노인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 곧 백 세에 죽는 자를 젊은이라 하겠고 백 세가 못되어 죽는 자는 저주 받은 자이리라…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을 양식으로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사 65:19-20, 25; 또한 사 11:6-9도 보라).

성경에는 미래의 천 년 왕국에 대한 언급이 많은데 특별히 구약 성경이 더 많다. 더 맣은 연구를 위해 이사야 11:6-16; 25:1-12; 예레미야 23:1-5; 요엘 2:30-3:21; 아모스 9:11-15; 미가 4:1-7; 스바냐 3:14-20; 스가랴 14:9-21; 요한계시록 20:1-6을 보라.

대부분의 시편도 천 년 왕국에 대한 예언으로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시편 48편의 아래 구절을 읽어보라.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우리 하나님의 성, 거룩한 산에서 극진히 찬양 받으시리로다 터가 높고 아름다워 온 세계가 즐거워함이여 큰 왕의 성 곧 북방에 있는 시온 산이 그러하도다 하나님이 그 여러 궁중에서 자기를 요새로 알리셨도다 왕들이 모여서 함께 지나갔음이여 그들이 보고 놀라고 두려워 빨리 지나갔도다 거기서 떨림이 그들을 사로잡으니 고통이 해산하는 여인의 고통 같도다(시 48:1-6, 강조 추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그분의 천 년 통치를 시작하셨을 때, 환난에서 생존한 이 땅의 많은 통치자들이 예수님의 통치에 대해 듣게 될 것이며 그것을 보러 직접 길을 떠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이 본 것에 의해 충격을 받게 될 것이다.[13]

그리스도의 천 년 통치에 대해 언급한 다른 시편을 보려면 아래의 장절을 참조하라. 2:1-12; 24:1-10; 47:1-9; 66:1-7; 68:15-17; 99:1-9; 그리고 100:1-5.

영원한 상태(The Eternal State)

천 년 왕국의 끝은 성경학자들이 말하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시작하는 “영원한 상태”의 시작을 표시한다. 고린도전서 15:24-28에 따르면, 예수님은 그 후에 모든 것을 아버지께 바칠 것이다.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예수님]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반드시 왕 노릇 하시리니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만물을 그 발 아래에 두셨다[시 8:6] 하셨으니 만물을 아래에 둔다 말씀하실 때에 만물을 그의 아래에 두신 이가[아버지] 그 중에 들지 아니한 것이 분명하도다 만물을 그에게[아버지] 복종하게 하실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신 이에게 복종하게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

천 년 동안 결박당한 사탄은 천 년 왕국의 끝에서 풀려난다. 그 후 그는 겉으로는 예수님께 순종하는체 하지만 속으로는 반역하는 사람들을 미혹할 것이다(시 66:3을 보라).

하나님은 사탄이 그들을 미혹하도록 허락하셔서 그들 마음의 진실한 모습을 드러내어 그들이 정당한 심판을 받게 하실 것이다. 사탄의 미혹속에서, 그들은 모여서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예수님의 통치를 뒤엎으려고 시도할 것이다. 전투는 오래 지속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의 군대를 태워버리고 사탄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져서 영원히 괴로움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계 20:7-10을 보라).

시편 2편에서도 이 전투에 대해 예언하였다.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들의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는도다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 그 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그들을 놀라게 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드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그런즉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재판관들아 너희는 교훈을 받을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의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

최후의 심판(A Final Judgment)

영원한 상태에 이르기 전에, 최후에 심판이 이루어질 것이다. 모든 연령대의 모든 악인들은 몸이 부활하여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을 것이다(계 20:5, 11-15을 보라). 하데스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크고 흰 보좌의 심판”을 받은 후 불못인 게헨나에 던져질 것이다. 이것을 둘째 사망이라고 한다(계 20:14).

영원한 상태는 첫 째 하늘과 땅이 없어진 후 시작되며, 이것은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 24:35)라는 이천 년 전의 예수님의 약속을 성취한다.

그런 다음 하나님은 베드로후서에서 예언한 것처럼,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드실 것이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 3:10-14; 또한 사 65:17-18도 보라).

마지막으로,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땅에 내려올 것이다(계 21:1-2을 보라). 우리의 머리로서는 도저히 면적이 미국의 절반 크기인(계 21:16을 보라) 그 거룩한 성의 영광과 시간이 영원해지는 것의 경이로움을 이해할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 완벽한 사회에서 생활하게 될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릴 것이다!

 


[1]바울이 예수님께서 그의 동시대에 재림하실 수 있다고 믿었음을 보여주는 성경 구절은 빌 3:20; 살전 3:13; 5:23; 살후 2:1-5; 딤전 6:14-15; 딛 2:11-13; 히 9:28이다.

[2]베드로가 예수님께서 그의 동시대에 재림하실 것이라고 확신했음을 보여주는 다른 성경 구절은 벧후 1:15-19; 3:3-15이다.

[3]마가복음 13:3에서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과 안드레가 그 자리에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는데 마침 감람산 강화도 마가복음 13:1-37과 누가복음 21:5-36에 기록되었다. 누가복음 17:22-37도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다.

[4]사람들은 종종 앞 뒤 문맥을 무시한 채 이 약속만 가지고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우리는 반드시 전 세계 복음화 작업을 완성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문맥상으로 보면, 이 약속은 말세가 오기 전에 전 세계에 복음이 선포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5]어떤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교회의 휴거가 정확히 칠 년 환난 전에 발생한다면, 그들은 모두 휴거될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라는 예수님의 지시를 따를 필요가 없게 된다.

[6]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감람산 강화는 대환난 기간에 거듭난 유대인 신자들에게만 적용된다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대환난 전에 거듭난 사람은 이미 모두 휴거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의 이방인 신자들에게 그들의 휴거와 그리스도의 재림은 칠 년 환난 중에 적그리스도가 그의 신성을 선언하기 전에는 발생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7]어떤 사람들은 요한계시록 20:4-6에서 언급한 부활은 실제로 첫째 부활의 두 번째 부분이며 첫째 부활은 휴거 때 그리스도가 처음 재림하셨을 때 발생한다고 말한다. 이 해석의 근거는 무엇인가? 만일 요한계시록 20:4-6의 부활이 두 번째 부활이라면, 왜 성경은 그것을 “두 번째 부활”이라고 말씀하지 않았을까?

[8]비록 그 날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이 그들의 세대가 그 모든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오늘날 우리는 그들이 보지 못했음을 알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24:34의 예수님의 말씀을 해석할 때, 그 말씀은 그 모든 일이 한 세대에서 발생한다거나 그리스도인(또는 유대인)의 민족이(세대란 단어가 종종 민족으로 번역된다) 그 모든 일이 있기 전에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고 보아야 한다.

[9]이 예에서 심판을 받는 사람이 구경 데려감을 당한 사람인지 아니면 버려둠을 당한 사람인지가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점에 대해 종종 변론하고 있다. 요점은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준비될 것이지만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들의 준비된 정도가 그들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할 것이다.

[10]분명히, 예수님께서 그분의 가장 가까운 제자들에게 그분의 재림에 준비되라고 경고하신 것으로 보아 그들이 아직 준비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었다. 만일 그분께서 그들이 죄 때문에 준비되지 않아 받게 될 영원한 형벌에 대해 경고하셨다면, 그들은 죄 때문에 구원을 상실할 가능성이 있다. 우리는 이로부터 거룩함의 중요성과 신자가 구원을 상실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알 수 있다.

[11]물론, 이것은 예루살렘에 성전이 재건되어야 함을 우리에게 나타낸다. 왜냐하면, 현재(이 글이 쓰인 2005년)까지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없기 때문이다.

[12]이 성경 말씀은 우리가 성경 말씀을 오해함으로써 예언이 성취되는 시간을 쉽게 잘못 가정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마리아는 쉽고 논리적으로 그녀의 특별한 아들이 몇십 년 내에 다윗의 왕좌에 군림할 것이라고 가정할 수 있었다.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 그녀가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릴 아들을 낳게 될 것이라고 알려주었는데 이것은 마치도 예수님의 출생과 통치가 연속적인 것처럼 들린다. 마리아는 그들 사이에 적어도 이천 년이란 간격이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도 예언을 해석함에 있어서 그와 비슷한 가정을 하지 않기 위해 주의해야 한다.

[13]다른 성경 말씀을 살펴보면, 천 년 왕국은 신자뿐만 아니라 불신자가 땅에 충만할 때 시작하는 것으로 보인다(사 2:1-5; 60:1-5; 단 7:13-14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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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th Korean » 휴거와 마지막 때(The Rapture and End Times)

영적 전쟁에 관한 현대신화, 1부

제 30 장 (Chapter Thirty)

영적 전쟁의 주제는 최근 몇 년 동안 교회에서 점점 인기를 끌고 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많은 가르침의 내용은 성경에 모순된다. 그 결과, 전 세계 많은 목사들은 성경에서 종래로 언급한 적이 없는 영적 전쟁에 대해 가르치고 연습하고 있다. 물론 성경적인 영적 전쟁도 있다. 그리고 그것은 제자 삼는 사역자가 마땅히 연습하고 가르쳐야 할 것이다.

이 장과 다음 장에서 나는 사탄과 영적 전쟁에 대한 가장 흔한 오해 중 일부를 제기할 것이다. 이것은 내가 쓴 “사탄과 영적 전쟁에 대한 현대 신화(Modern Myths About Satan and Spiritual Warfare)란 책에 대한 요약이다. 그 책의 영어본은 우리의 웹 사이트 www.shepherdserve.org에서 읽을 수 있다.

신화 1:영원한 과거에, 하나님과 사탄 사이에는 큰 전투가 있었다. 오늘날에도, 그들 사이에는 이 우주적인 전투가 계속되고 있다.”( Myth #1: “In eternity past, God and Satan engaged in a great battle. Today, the cosmic struggle still rages between them.”)

이 신화는 성경에서 계시된, 하나님은 모든 능력 위에 뛰어나시다는 또는 전능하시다는 하나님에 대한 가장 잘 확립된 근본적인 진리에 모순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에게는 모든 것이 다 가능하시다고 알려주셨다(마 19:26을 보라). 예레미야는 그분에게 너무 어려운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재확인 하였다(렘 32:17을 보라). 어떤 사람 또는 힘도 하나님의 계획을 막을 수 없다(대하 20:6; 욥 41:10; 42:2을 보라). 예레미야를 통해 하나님은 “나와 같은 자 누구며 출두하라고 나에게 명령할 자가 누구며 내 앞에 설 목자가 누구냐?”(렘 50:44)라고 물으셨다. 아무도 그분 앞에 설 수 없으며 사탄도 예외가 아니다.

만일 위에서 언급한 성경 말씀처럼 하나님이 진정 전능하시다면, 하나님과 사탄 사이에 전투가 있었다고 또는 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분이 전능하시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과 같다. 만일 하나님이 사탄에게 한 번이라도 지셨거나, 사탄에게 조금 압도당하거나 사탄에게 잠깐이라도 아주 작은 정도의 대항을 해야만 하셨다면, 그분은 그분이 말씀하신 것처럼 전능하시지 않다.

사탄의 힘에 대한 그리스도의 해석(Christ’s Commentary on Satan’s Power)

예수님은 어느 한 번 사탄이 하늘에서 떨어진 것에 대한 말씀을 하셨는데 이것은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에 비해 사탄의 힘이 어느 정도 되는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칠십 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눅 10:17-18).

전능하신 하나님이 하늘에서 사탄의 추방을 명령하셨을 때, 사탄은 저항할 없었다. 예수님은 사탄이 떨어지는 속도를 강조하시기 위해 “번개같이”와 같은 은유를 사용하셨다. 사탄은 당밀같이 떨어진 것이 아니라 번개같이 떨어졌다. 1초 전만 하여도 하늘에 있던 사탄은 붐하고 땅에 떨어졌다!

만일 하나님이 이렇게 빠르고 쉽게 사탄을 쫓아내실 수 있다면, 그분이 위임하신 종들도 빠르고 쉽게 귀신을 쫓아낼 수 있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첫 제자들처럼, 오늘날 너무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마귀의 힘에 대해 크게 두려워하면서도 하나님의 능력이 그것보다 훨씬 더 크시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나 사탄은 단지 피조물에 불과하다. 사탄은 하나님의 상대가 될 수 없다.

종래로 있은 적이 없는 전쟁(The War That Never Was)

우리에게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우리는 하나님과 사탄 사이에는 종래로, 그리고 앞으로 영원히 전쟁이 없을 것이라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비록 그들은 서로 다른 계획이 있고 서로 대적하고 있지만, 한쪽이 다른 쪽보다 막대하게 강력할 때, 그들의 충돌은 전투로 간주할 수 없다. 지렁이가 코끼리와 싸울 수 있을까? 사탄은 지렁이처럼 자신보다 막대하게 강력한 자에게 대항하려 시도했다. 그의 반항은 신속하게 처리되었고, 그는 하늘에서 “번개같이” 땅에 떨어졌다. 전투 같은 것은 없었으며 다만 추방만 있었을 뿐이다.

만일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면, 사탄은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들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방해할 기회가 없다. 그리고 만일 하나님께서 사탄이 어떤 일을 하는 것을 허용하셨다면, 그것도 궁극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뜻을 이루는데 사용될 것이다. 이 같은 진리는 우리가 이 주제에 대해 성경을 살펴볼수록 더 명백해진다.

흥미롭게도, 사탄에 대한 하나님의 최고 권위는 영원한 과거에서만 입증된 것이 아니라 또한 미래에서도 입증되었다. 우리는 요한계시록에서 천사가 사탄을 결박하여 천 년 동안 감금하리라는 것을 읽을 수 있다(계 20:1-3을 보라). 사탄이 처음 하늘에서 쫓겨난 것을 전투로 보지 않는 이상, 이 미래의 사건도 하나님과 사탄 사이의 전투로 간주할 수 없다. 또한, 사탄은 그의 감옥에서 탈출할 수 있는 능력이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뜻에 따라 풀려날 수 있다는 것을 주목하라 (계 20:7-9을 보라).

미래의 하늘의 전쟁은 어떠한가?(What About the Future “War in Heaven”?)

만일 하나님과 사탄이 종래로 전투한 적이 없고, 하지도 않으며, 앞으로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왜 우리는 요한계시록에서 사탄이 관여된 하늘의 전쟁에 대해 읽게 되는가?(계 12:7-9을 보라). 이것은 좋은 질문이며 또한 쉽게 대답 될 수 있다.

이 전쟁은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사탄과 그의 사자들 사이에 있은 것임을 주목하라. 하나님 자신이 이 전투에 관여되었다는 언급은 없다. 만일 그분이 관여하셨다면, 이 전투는 전쟁으로 묘사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분은 전능하시므로, 이미 입증되다시피 어떤 반항이든지 순식간에 진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가엘을 포함한 사자들은 전능하지 않으며 그들과 사탄과 그의 사자들과의 전투는 실제로 한동안 지속되기 때문에 그것은 전쟁으로 묘사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더 강력하므로 사탄과 그의 무리들을 정복하게 될 것이다.

왜 하나님은 이 전투에 직접 참여하시지 않고 그분의 천사들을 보내셨을까? 나는 알 수 없다. 물론 하나님은 전지하시므로 그분의 천사들이 이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아신다. 아마도 그래서 그분은 직접 참여해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셨을 수 있다.

여호수아의 시대에 하나님이 쉽고 빠르게 악한 가나안을 섬멸하실 수 있었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그분은 이스라엘에게 그 작업을 주시기로 하셨다. 하나님은 그분이 몇 초 안에 쉽게 해결할 수 있었던 일을 그들이 몇 개월 동안 큰 노력을 들여 이루도록 요구하셨다. 아마도 이것은 이스라엘에게 믿음을 요구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더 기쁘시게 할 수 있다. 아마도 그 이유 때문에 그분은 미래의 하늘의 전쟁에 직접 관여하시지 않았을 수 있다. 하지만 성경은 이 부분에 대해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지 않았다.

언젠가는 하늘에서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과 사탄과 그의 사자들 사이에 전쟁이 있을 것이라고 하여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은 전능하시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할 수 없다. 꼭 마치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의 전투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전능하시지 않다는 생각이 들지 않게 한 것처럼 말이다.

사탄은 십자가에서 예수님께 패배당하지 않았는가? (Was Not Satan Defeated by Jesus on the Cross?)

마지막으로, 하나님과 사탄의 전투에 관한 첫 번째 신화에 관해서, 나는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말로 결론을 내리고 싶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사탄을 패배시키셨다. 실제로 성경은 종래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사탄을 패배시키셨다는 말씀을 한 적이 없다.

우리가 예수님이 사탄을 패배시키셨다고 말할 때, 우리는 마치도 예수님과 사탄이 전투한 것처럼 말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전능하시지 않고 사탄이 하나님의 완전한 권세 아래에 있지 않다는 것을 나타낸다. 예수님이 갈보리에서 그분의 생명을 내주셨을 때 사탄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보다 성경적인 방법으로 묘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성경은 예수님은 그분의 죽으심을 통해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를 멸하셨다”(히 2:14-15)고 우리에게 알려준다 .

예수님은 사탄을 어느 정도로 무력화시켰을까? 분명한 것은, 사탄이 지금 완전히 무력한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도 요한은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요 5:19, 강조 추가)라고 기록하지 않았을 것이다. 히브리서 2:14에 따르면, 사탄은 “죽음의 세력”에 관해 무력해졌다고 했는데 이것은 무슨 뜻일까?

성경은 세 가지 죽음에 대해 언급하였는데, 영적인 죽음, 육체적 죽음둘째 사망이다.

우리가 이전 장에서 배운 것처럼, 둘째 사망(또는 영원한 죽음)은 요한계시록 2:22, 20:6, 14; 21:8에서 언급되었으며 불신자가 불못에 던져질 때에 발생한다.

육체적 죽음은 사람의 영혼이 자신의 몸에서 분리될 때 발생하며 육체는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영적인 죽음은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은 인간의 영적 상태를 설명한다. 영적으로 죽은 사람의 영은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있으며 죄의 본성을 지닌, 어느 정도 사탄과 결합한 영이다. 에베소서 2:1-3은 영적으로 죽은 사람에 대해 잘 묘사하고 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바울은 에베소 그리스도인들이 허물과 죄로 죽었다고 썼다. 그는 육체적으로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썼기 때문에 이것은 육체적 죽음에 대한 언급이 분명히 아니다. 따라서 그는 영적으로 보았을 때, 그들은 죽었다고 말한 것이 틀림없다.

무엇이 그들을 영적으로 죽게 하는가? 그것은 그들의 “허물과 죄”이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불순종하는 날에 그가 죽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할 것이다(창 2:17을 보라). 하나님은 육체적인 죽음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영적인 죽음을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날에 육체적으로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그 날 영적으로 죽었으며 그 후 수백 년이 흐르기까지 육체적으로 죽지 않았다.

바울은 계속하여 영적으로 죽은 에베소 사람들이 허물과 죄 가운데 행하고 “세상의 풍조”(즉, 다른 모든 사람들이 하는 것)를 따르며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다고 했다.

누가 “공중의 권세 잡은 자”인가? 바로 사탄이다. 그는 악의 영들이 거주하는 어둠의 세상을 주관하는 자이다. 에베소서 마지막 장에서는 그 악의 영들에 대해 순위별로 나열하였다(엡 6:12을 보라).

바울은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고 말하였다. “불순종의 아들들”이란 표현은 곧 모든 불신자들에 대한 또 다른 표현이며 그들의 본성이 죄임을 강조한 것이다. 바울은 나중에 그들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다고 말했다(엡 2:3, 강조 추가). 또한, 그는 사탄이 그들 가운데서 역사한다고 말했다.

아비인 마귀(The Devil for a Dad)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알든 모르든, 사탄을 따르고 있으며 어둠의 왕국에서 사탄의 신하로서 살아간다. 그들의 영적으로 죽어있는 영은 사탄의 사악하고, 이기적인 본성을 지니고 있다. 사탄은 실제로 그들의 영적인 주님과 아비이다. 바로 이 때문에 예수님은 구원받지 못한 종교 지도자들에게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요 8:44)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바로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의 씁쓸한 모습이다! 그는 영적으로 죽어있는 삶을 살고 있으며, 사탄의 본성으로 가득 차 있으며 그가 두려워하는 피면 할 수 없는 육체적인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 그리고 그가 인식하든 못하든, 불못에 던져지므로 언젠가는 최악의 죽음인 영원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영적, 육체적, 영원한 죽음이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표현이며 사탄도 그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은 사탄이 어둠의 세상과 모든 “어둠을 사랑하는 자들”(요 3:19)을 통치하도록 허락하셨다. 사실상, 하나님은 사탄에게 “당신은 나한테 순종하지 않는 자들을 당신의 힘으로 사로잡을 수 있다”라고 말한 것이다. 사탄은 인간의 반역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도구가 되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므로 모든 사람은 사탄의 권세 아래에 있으며 그들의 영이 사탄의 본성으로 가득 차 있어 그에게 사로잡힌 바 되어 그의 뜻을 따르기

때문이다(딤후 2:26).

포로가 된 우리의 몸값(The Ransom for Our Captivity)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베푸신 자비 때문에 그분께 감사해야 한다. 그리고 그분의 자비 때문에 아무도 처량한 상태로 살아갈 필요가 없다. 예수님의 대속적인 죽으심이 하나님의 공의의 요구를 만족시키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신자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있지 않으며 영적인 죽음과 사탄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성령님은 우리의 영에 들어오셔서 사탄의 본성을 근절해 버림으로써 우리의 영이 거듭나게 하셨으며(요 3:1-16을 보라),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셨다(벧후 1:4을 보라).

이제 다시 우리의 원래 질문에 돌아가 보자. 히브리서의 저자는 예수님께서 그분의 죽으심을 통해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셨다”고 썼을 때, 그는 사탄이 모든 구원받지 못한 자들에게 가지고 있는 영적인 죽음의 세력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자들에게는 멸하였음을 뜻하였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위해 치른 대가로 영적으로 살아났다.

더욱이, 우리가 더 이상 영적으로 죽어있지 않고 사탄의 지배 속에 있지 않기에 우리는 더 이상 육체적인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육체적인 죽음 뒤에는 영광스럽고 영원한 산업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불못에 던져지는 번째 죽음에서 벗어났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마귀를 패배시키셨을까? 아니, 예수님과 사탄 사이에는 전투 자체가 없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탄이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죄에 사로잡히게 하는 영적인 죽음에 대한 세력을 멸하셨다. 사탄은 여전히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영적인 죽음의 세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무력하다.

권세들에 대한 무력화(The Disarming of the Powers)

이것은 또한 우리가 골로새서 2:13-15에 기록된 “통치자들과 권세들에 대한 무력화”에 대한 바울의 주장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영적으로]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강조 추가).

바울은 이 구절에서 분명히 은유적인 언어를 사용했다. 첫 번째 부분에서, 그는 우리의 죄를 “법조문으로 쓴 증서”에 비유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우리의 죄를 못 박고 우리가 갚을 수 없는 죄값을 치르셨다.

두 번째 부분에서는, 고대의 왕들이 승전한 후 의기양양하게 적의 무기를 도시의 거리를 통과하며 구경시키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죽음도 “통치자들과 권세들”에 대한 승리이다. 그들은 반역적인 인간을 지배하고 사로잡은 낮은 계급의 마귀들이다.

이 구절에 근거하여 우리는 그리스도가 사탄을 패배시키셨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우리는 바울이 이 구절을 은유적으로 썼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가 성경적인 해석에 대한 장에서 배운 것 같이, 모든 은유는 유사한 점도 있지만, 다른 점도 있다.

골로새서 2:13-15에서의 바울의 은유를 해석함에 있어서 우리는 반드시 주의해야 한다. 분명한 것은, 우리의 모든 죄를 적은 “법조문으로 쓴 증서”가 실제로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성취하신 것에 대한 상징이다.

마찬가지로, 구원받지 못한 인간을 통치하는 마귀들은 예수님에 의해 문자 그대로 칼과 방패를 빼앗기고 공중 앞에서 걸으면서 구경거리가 된 것이 아니다. 바울이 사용한 언어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성취하신 것에 대한 상징이다. 우리는 악의 영에게 사로잡혔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우리를 풀어주셨다. 예수님은 문자 그대로 악의 영들과 맞서 싸우신 것이 아니며 그들도 그분과 전쟁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의로우신 허락 아래에 우리를 모든 삶 가운데서 지배하였다. 그들의 “무기”는, 말하자면, 그리스도를 향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무력하게” 하셨다. 그들은 우리를 더 이상 지배할 수 없다.

우리는 예수님과 사탄의 악한 영 사이에 오랜 세월의 싸움이 있었으며 마지막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그 전투의 승리를 거두셨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이 마귀를 패배시키셨다고 말하려면, 그분이 그분 자신에 대한 마귀의 세력이 아닌 우리에 대한 마귀의 세력을 이기셨다는 것을 확신해야 한다.

어느 한 번, 나는 마당에서 어린 딸을 위협하는 한 마리 강아지를 쫓아낸 적이 있다. 나는 내가 그 강아지를 이겼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나는 당신이 그 강아지가 결코 나에게 어떤 위협도 줄 수 없었음을 이해하기를 바란다. 그것은 예수님과 사탄에 있어서도 동일하다. 예수님은 그분을 전혀 귀찮게 할 수 없는 개를 우리에게서 멀리 쫓아내신 것이다.

그분은 어떻게 그 사탄이란 개를 쫓아내셨을까? 그분은 우리의 죄에 대한 형벌을 감당하심으로써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해 주셨으므로 반역하는 인간들을 지배하도록 하나님께 허용받았던 악의 영들은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할 권한이 없게 되었다. 이 모든 것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하라!

이것은 우리를 두 번째 관련 신화를 점검할 수 있는 적절한 위치로 인도한다.

신화 2: 하나님의 천사와 사탄의 천사들은 영적인 영역에서 지속적으로 전투를 벌이고 있다. 전투의 결과는 우리의 영적 전쟁에 의해 결정된다.(Myth #2: “There are constant battles in the spiritual realm between God’s angels and Satan’s angels. The outcome of those battles is determined by our spiritual warfare.”)

우리는 이미 요한계시록을 통하여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과 사탄과 그의 사자들 사이에 언젠가는 하늘의 전쟁이 있으리라는 것이라는 것을 배웠다. 그 외에, 성경에서 천사의 전투에 대해 언급한 것은 단 한 번뿐인데 다니엘서 10장에 기록되었다.[1]

다니엘은 그가 바사 왕 고레스 제삼 년에 세 이레 동안 슬퍼하고 있을 때, 힛데겔 강가에서 한 천사가 그에게 나타났다고 우리에게 알려준다. 천사의 방문목적은 우리가 이전 장에서 다니엘이 휴거와 마지막 때에 관해 들은 바를 살펴본 바와 같이, 그에게 이스라엘의 미래에 대한 이해를 주기 위함이었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한 천사가 다니엘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가 내게 이르되 다니엘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깨달으려 하여 네 하나님 앞에 스스로 겸비하게 하기로 결심하던 첫날부터 네 말이 응답 받았으므로 내가 네 말로 말미암아 왔느니라 그런데 바사 왕국의 군주가 이십일 일 동안 나를 막았으므로 내가 거기 바사 왕국의 왕들과 함께 머물러 있더니 가장 높은 군주 중 하나인 미가엘이 와서 나를 도와 주므로(단 10:12-13, 강조 추가).

다니엘은 그의 기도가 이 천사와 만나기 3주 전에 이미 응답받았으나 천사가 그에게 나타나기까지 3주가 걸렸음을 알게 되었다. 천사가 늦은 이유는 “바사 왕국의 군주”가 그를 막았기 때문이었다. 그 천사는 돌파할 수 있었으나 “가장 높은 군주 중 하나”인 미가엘이 와서 도울 때까지 기다렸다.

그 천사는 다니엘을 떠날 때 이렇게 말했다.

그가 이르되 내가 어찌하여 네게 왔는지 네가 아느냐 이제 내가 돌아가서 바사 군주와 싸우려니와 내가 나간 후에는 헬라의 군주가 이를 것이라 오직 내가 먼저 진리의 글에 기록된 것으로 네게 보이리라 나를 도와서 그들을 대항할 자는 너희의 군주 미가엘뿐이니라(단 10:20-21).

이 성경 구절에서 몇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알 수 있다. 다시 한 번, 우리는 하나님의 천사들은 전능하지 않으며 그들은 악한 천사들과의 싸움에 실제로 관여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둘째로, 우리는 일부 천사들이(예: 미가엘 등) 다른 천사들(예: 다니엘과 말한 천사)보다 더 강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해답할 수 없는 질문들(Questions for Which We Have No Answers)

우리는 “왜 하나님은 처음부터 다니엘에게 미가엘을 보내어 메시지를 전달하심으로써 3주의 지연이 발생하지 않게 하지 않으셨을까?”라고 물을 수 있다. 성경은 왜 하나님께서 그 천사가 “바사 왕국의 군주”를 미가엘의 도움이 없이는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아시면서도 그를 보내셨는지에 대해 우리에게 말씀해주지 않았다. 사실,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메시지를 전달하시기 위하여 어떤 천사를 보내시는지 알 수 없다! 왜 그분은 직접 찾아가시거나 혹은 다니엘에게 음성으로 말씀하시거나 다니엘을 천국에 일시적으로 데리고 와서 말씀하시지 않으실까?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구절은 하나님의 천사들과 사탄의 천사들 사이에 영적인 영역에서 지속적인 전투가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을까? 아니, 그것은 단지 몇 천 년 전, 하나님의 약한 천사 중 하나와 사탄의 천사 중 하나인 “바사 왕국의 군주” 사이에 3주간의 전투가 있었으며, 그 전투는 하나님이 원하시면 발생하지도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을 증명할 뿐이다. 그 외에 전체 성경에서 언급한 유일한 천사의 전투는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하늘의 미래 전쟁이다. 그것뿐이다. 다른 천사의 전투가 발생했을 수도 있지만, 그러한 결론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가정일 뿐이다.

신화에 근거한 신화(A Myth Based Upon a Myth)

다니엘과 바사 왕국의 군주 사이의 이야기가 우리의 영적 전쟁이 천사의 전투의 결과를 결정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하지만, 이런 생각은 (소수의 성경 말씀에 근거하여) 천사들 사이에 정기적으로 전투가 있다가정하는 것이다. 한 발 물러서서 천사들 사이에 정기적인 전투가 있다고 치자. 그렇다고 해서 다니엘에 대한 이 이야기가 우리의 영적 전쟁이 천사의 전투 결과를 결정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을까?

이런 신화를 제창하는 사람들은 “만일 다니엘이 하루 후에 포기했다면 어떠했을까?”라는 질문을 자주 한다. 물론,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다니엘은 익명의 천사가 오기 전까지 하나님을 구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질문이 암시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다니엘의 지속적인 영적 전쟁으로 말미암아 익명의 천사가 저애를 물리칠 수 있었음을 믿게 하려는 것이다. 만일 다니엘이 영적 전쟁을 포기하였다면, 그 천사는 바사 왕국의 군주를 통과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우리가 다니엘처럼 영적 전쟁을 계속하지 않으면 악한 천사가 하나님의 천사를 이기게 된다는 것을 믿기를 원한다.

첫째로, 나는 다니엘이 “영적 전쟁을 한 것”이 아님을 지적해야겠다 – 그는 하나님께 기도했을 뿐이다. 그가 어떤 악한 천사들에게 어떤 말을 하거나, 그들을 결박하거나, 그들과 “전쟁”했다는 언급은 아무데도 없다. 사실, 다니엘은 3주가 흘러, 익명의 천사가 그에게 나타나기까지 천사들 사이에 전쟁이 있었다는 것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그는 이 3주 동안 금식하면서 하나님을 구하였다.

그러므로 질문을 한번 바꿔 보자. 만일 다니엘이 하루 또는 이틀 뒤에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분을 구하는 것을 멈췄다면, 익명의 천사가 하나님의 메시지를 그에게 전달하지 못했을까?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익명의 천사가 “당신이 기도하기를 잘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해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라고 말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그 천사는 그가 올 수 있었던 공을 미가엘에게 돌렸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익명의 천사 미가엘을 보내셨으며, 이스라엘의 미래에 대해 알려는 다니엘의 기도 응답으로 그들을 보내셨다.

사람들은 다니엘이 금식이거나 하나님을 구하는 것을 멈췄을 때 하나님이 “그래, 다니엘이 금식과 기도를 멈췄기 때문에, 그가 기도하기 시작한 첫날에 내가 너희 두 천사 중 하나를 그에게 메시지를 전하도록 보냈더라할지라도 이제는 그 일에 대해서 잊어라. 아무래도 다니엘서에 11장 또는 12장이 기록될 것 같지 않아 보인다”라고 말씀하셨을 것이라고 가정할 수도 있다.

다니엘은 분명 인내하며 기도하였으며(그것은 “영적 전쟁”이 아니다),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심으로 응답하셨다. 우리도 하나님께 기도할 때 인내해야 하며, 하나님의 뜻이라면, 우리는 천사로부터 응답을 받게 될 것이다. 하지만 성경 인물 중에는 3주보다 훨씬 적게 기도하거나, 또는 기도했다는 언급도 없는 사람들에게 천사가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했다는 경우도 많다는 것을 잊지 말라.[2] 우리는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또한, 성경적인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한 천사들 중에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길에 악한 천사들과 싸웠다는 언급이 없는 천사들도 많다. 그 천사들은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악한 천사들과 싸울 밖에 없었는지도 모르지만, 정말 그랬다 하더라도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에 대해 알 수 없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세 번째 일반적으로 믿고 있는 신화에 대해 알아보자.

신화 3: 아담이 타락할 , 사탄은 아담으로부터 세상을 지배하는 차용계약을 얻었다(Myth #3: “When Adam Fell, Satan Got Adam’s Lease to Control the World.”)

인류가 타락할 때 사탄에게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일부 사람들은 아담이 타락할 때, 사탄은 크게 진급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아담이 최초의 “이 세상의 신”이였지만, 아담의 타락 때문에 사탄이 그 지위를 얻게 되고, 땅에서 원하는 건 뭐든 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고 말한다. 심지어 하나님조차 아담이 사탄에게 자신의 지위를 내어주는 것을 막을 수 없었는데 그것은 아담이 자신의 지위를 사탄에게 줄 수 있는 “합법적인 권리”를 가지고 있었고 하나님도 지금은 사탄에게 속한 아담과의 약속을 존중해야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탄은 지금 “아담의 차용계약”을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도 “아담의 차용계약이 끝날 때”까지 사탄을 막을 수 없게 된다.

이 이론은 사실일까? 사탄은 인류가 타락할 때 “아담의 차용계약”을 얻었는가?

절대 아니다. 인류가 타락할 때, 사탄은 하나님의 저주와 그의 완전한 죽음에 대한 약속 외에 얻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사실, 성경은 아담이 최초의 “이 세상의 신”이라고 말씀한 적이 없다. 둘째로, 성경은 아담이 이 세상에 대한 자신의 권한을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합법적인 권한이 있다고 말씀한 적이 없다. 셋째로, 성경은 아담이 언젠가는 만료될 차용계약을 가졌다고 말씀한 적이 없다. 이런 생각들은 모두 비성경적이다.

아담은 원래 어떤 권한을 소유했을까?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 1:28, 강조 추가)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아담이 이 땅의 “신”이라거나, 그가 모든 것, 예하면, 날씨 그리고 앞으로 태어날 모든 사람들의 미래를 지배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그분은 단지 최초의 인간으로서의 아담과 하와에게 물고기, 새, 그리고 동물을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을 주셨으며 그들이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할 것을 명령하셨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심판을 선고하실 때에도, 아담이 “이 땅의 신”으로서의 지위를 잃었다고 하신 적이 없다. 또한, 그분은 아담과 하와에게 그들이 물고기, 새와 가축에 대한 지배를 잃었다고 말씀하신 적도 없다. 사실, 나는 인류가 아직도 물고기와 새와 “땅의 모든 움직이는 생물”을 다스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인류는 여전히 이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고 있다. 아담은 타락할 때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최초의 권한을 잃지 않았다.

사탄이 “이 세상의 신”이 아닌가?(Isn’t Satan “God of This World”?)

그러나 사탄에 대해 바울은 “이 세상의 신”으로, 예수님은 “이 세상의 통치자”로 언급하지 않았는가? 그렇다, 하지만 둘 중 아무도 아담이 원래 “이 세상의 신”이였다거나, 아담이 타락할 때 사탄이 그 지위를 얻었다고 암시한 적은 없다.

또한, “이 세상의 신”이란 사탄의 직함은 사탄이 땅에서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거나 하나님이 그를 막을 힘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지는 못한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 28:18, 강조 추가)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이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셨다면, 사탄은 그분이 허락하실 때밖에 역사할 수 없다.

누가 예수님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셨는가? 그분은 그것을 예수님께 주시기 위해 소유하고 계신 하나님 아버지임이 틀림없다. 바로 그 때문에 예수님은 그분의 아버지를 “천지의 주재”(마 11:25; 눅 10:21, 강조 추가)시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이 땅을 만드실 때부터 땅에 대한 모든 권세를 가지고 계셨다. 그분은 처음에 인간에게 약간의 권한을 주셨으며, 인류는 하나님이 주신 것을 결코 잃은 적이 없다.

성경이 사탄이 이 세상의 신 또는 통치자라고 할 때에는 단순히 이 세상의 사람들이(거듭나지 않은 사람) 사탄을 따르고 있음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그들은 알든 모르든 사탄을 섬기고 있으며 사탄은 그들의 신이다.

사탄이 천하 만국을 주겠다는 제안?(Satan’s Real-Estate Offer?)

사탄이 이 세상을 가졌다는 많은 이론들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기록된, 광야에서 사탄이 예수님을 유혹한 이야기에 기반을 두고 있다. 먼저 누가복음을 살펴보도록 하자.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이며 이르되 이 모든 권위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된 바 주 너희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눅 4:5-8을 보라).

이 사건은 사탄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지배할 수 있다거나, 아담이 그 권세를 그에게 넘겨주었다거나 또는 하나님이 마귀를 막을 힘이 없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가? 아니, 거기에는 여러 가지 충분한 이유가 있다.

첫째로, 우리는 예수님이 “거짓의 아비”(요 8:44)라고 하신 사탄의 주장에 신학의 기반을 두는 것에 대해 주의해야 한다. 사탄이 때로는 진실을 말할 때도 있지만, 이 경우에 우리는 각별히 경각성을 높여야 하는데 그것은 사탄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과 분명히 모순되기 때문이다.

다니엘서 4장에는 느부갓네살 왕의 굴욕적인 이야기가 기록되었다. 자신의 지위와 업적에 자부심으로 가득 찬 느부갓네살은 그가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알 때까지“(단 4:25, 강조 추가) 동물처럼 살게 될 것이라고 선지자 다니엘에게서 들었다. 이 이야기와 관련하여 이 같은 선언은 네 번 나오는데 그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단 4:17, 25, 32; 5:21).

다니엘이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신다”라고 말한 점을 주목하라. 그것은 하나님이 이 땅을 통치하신다는 말이 아닌가?

또한, 다니엘의 주장이 사탄이 예수님께 한 말과 직접 모순됨을 주목하라. 다니엘은 하나님이 “자기의 뜻대로 누구에게든지 주신다”라고 말했지만, 사탄은 “내가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눅 4:6)라고 말했다.

그럼 당신은 누구를 믿겠는가? 개인적으로, 나는 다니엘을 믿겠다.

그러나 사탄이 진실을 말했을 가능성도 있다. 만일 우리가 다른 각도에서 그의 말을 살펴보면 말이다.

내가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사탄이 “이 세상의 신”이라는 것은 그가 하나님께 반역하는 모든 나라의 사람들을 포함한 어둠의 나라를 통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은 “온 세상은 악한 자에게 처하였다”(요일 5:19)고 말씀한다. 사탄이 천하 만국의 모든 권세를 자기가 원하는 자에게 줄 수 있다고 말할 때, 그는 단지 자기의 나라인 어둠의 나라, 즉 부속국으로 이루어졌으며 대략 지정학의 나라에 해당하는 나라에 대해 말했을 가능성이 높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사탄이 여러 가지 계급의 악의 영들을 통하여 자기의 나라를 통치한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엡 6:12을 보라), 그가 지배자이기 때문에 각 계급의 영들의 지위를 높여주거나 떨어뜨릴 수 있다고 가정할 수 있다. 이 경우, 사탄은 합법적으로 예수님께 자기의 아래자리를 줌으로써 그를 도와 어둠의 나라를 통치하게 할 수 있다. 예수님은 다만 사탄에게 엎드리어 그를 경배하기만 하면 된다. 다행히, 예수님은 “승진”할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셨다.

누가 사탄에게 그의 권세를 주었는가?(Who Gave Satan His Authority?)

그러나 이 모든 권세를 “넘겨받았다”는 사탄의 주장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다시 말하지만, 사탄은 거짓말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가 진실을 말했다고 가정해보자.

사탄은 아담이 그에게 넘겨 주었다고 말하지 않았음을 주목하라.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듯이, 아담은 그 권세를 가진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것을 사탄에게 넘겨 줄 수도 없었다. 아담은 물고기, 새, 짐승을 다스렸지 이 세상을 다스린 것이 아니다. (실제로, 아담이 타락할 때에 그가 다스릴 수 있는 사람들의 나라가 없었다.) 또한, 사탄이 예수님께 모든 악의 영과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어둠의 나라를 다스리라는 제안을 하였더라도, 아담은 절대 이런 권한을 사탄에게 넘겨줄 능력이 없다. 사탄은 아담이 창조되기 전에 타락한 천사들을 다스리고 있었다.

사탄은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 복종하지 않기에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지 그에게 복종하여 그들을 통치하는 권세를 그에게 넘겨 주었음을 의미할 있다.

더 가능성이 있는 것은 하나님이 그 권세를 그에게 넘겨 주셨다는 것이다. 그것은 성경에 비추어 볼 때, 매우 가능한 일이다. 하나님은 사탄에게 “나는 너와 너의 악한 영들이 나에게 복종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을 통치할 수 있도록 허락한다”라고 말씀하셨을 수 있다. 당신은 지금 이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나중에 보면 알겠지만, 이것은 사탄의 주장에 대한 가장 가능성 있는 해석이다. 만일 하나님이 진실로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신다면”(단 4:25), 사탄이 사람에게 가지고 있는 모든 권세도 반드시 하나님이 주신 것임에 틀림없다.

사탄은 오직 “반역의 나라”라고도 할 수 있는 어둠의 나라만 통치한다. 그는 아담의 타락 이전에 천국에서 쫓겨난 후로부터 그 나라를 통치하였다. 아담의 타락하기 전까지는 어둠의 나라는 단지 천사들의 반역만 있었다. 하지만 아담이 죄를 지을 때부터, 그는 그 반역의 나라에 들어갔으며, 그때부터 사탄의 나라는 반역한 천사들뿐 아니라 반역한 인간들도 포함하였다.

사탄은 아담이 창조되기 전부터 그의 어둠의 나라를 통치하였기에, 우리는 아담이 타락할 때 사탄이 아담이 소유한 것을 넘겨받았다는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 아담이 죄를 지었을 때, 그는 이미 존재했던, 사탄이 통치하는 나라에 들어간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타락에 놀라셨을까?(Was God Surprised by the Fall?)

사탄이 권세를 가졌다는 이론의 또 다른 결함은 하나님을 바보로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도 하나님이 인류의 타락을 예상치 못하셨고 그 결과 슬픈 처지에 놓이게 된 것처럼 생각한다. 하나님은 사탄이 아담과 하와를 유혹할 것이며 그 결과 인간이 타락할 것이라는 점을 모르셨을까? 하나님이 전지하시다면, 그분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에 대해 알고 계셨음이 틀림없다. 바로 그 이유때문에,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속하시기 위해 창세 전부터 계획하셨다고 말씀한 것이다(마 25:34; 행 2:2-23; 4:27-28; 고전 2:7-8; 엡 3:8-11; 딤후 1:8-10; 계 13:8을 보라).

하나님은 마귀가 타락한다는 것을 아시면서도 마귀를 창조하셨고,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다는 것을 아시면서도 그들을 지으셨다. 사탄은 절대 하나님을 속이고 자기에게 없고 하나님께만 있는 무언가를 얻을 수 없다.

나는 하나님께서 사탄이 “이 세상의 신”이 되기를 원하셨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맞는가? 그렇다. 그것이 하나님의 목적에 부합된다면 말이다. 만일 하나님이 사탄이 역사하지 않기를 원하신다면, 요한계시록 20:1-2의 말씀처럼 그분은 그를 쉽게 저지시키실 수 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사탄의 지배 속에 살기를 원하신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사탄의 권세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신다(행 26:18; 골 1:13; 딤전 2:3-4; 벧후 3:9). 하지만 하나님은 사탄이 어둠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을 지배하도록 허락하신다(요 3:19을 보라) – 그들은 하나님께 계속하여 반항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람들이 사탄의 어둠의 나라를 벗어나게 도울 수 있는 일이 없을까? 있다. 우리는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에게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할 수 있다(예수님이 우리에게 명하신 대로). 그들이 그렇게 한다면, 그들은 사탄의 권세에서 벗어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을 사로잡은 악의 영들을 뒤엎을 수 있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사람들이 어둠 속에 살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은 그들을 내버려 두실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한 성에 있는 사람들이 그들의 메시지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들은 그들의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고 다른 성으로 가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마 10:14). 그분은 그들이 그 성에 거하면서 영적인 요새를 뒤엎어 더 많은 사람들이 영접할 수 있게 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하나님은 악의 영들이 회개하지 않고 그분께 돌아서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속박하도록 허락하신다.

하나님의 권세가 사탄보다 크다는 것에 대한 추가 증명(Further Proof of God’s Supreme Authority Over Satan)

인간이 타락할 때 하나님이 사탄에 대한 지배를 잃지 않으셨음을 증명하는 많은 다른 성경 말씀들이 있다. 성경은 반복적으로 하나님은 과거에도 그러셨지만, 앞으로도 항상 사탄을 지배하신다는 점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마귀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밖에 할 수 없다. 먼저 이 사실을 증명하는 몇 가지 구약 성경의 말씀들을 살펴보자.

욥기의 처음 두 장은 사탄에 대한 하나님의 권위를 전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사탄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욥을 고발하는 것을 읽게 된다. 그 당시, 욥은 이 땅의 누구보다 더 하나님께 순종하였으므로, 자연스럽게 사탄은 그를 표적으로 삼았다. 하나님은 사탄이 욥을 주의하여 보았음을 아셨으며, 욥이 그분을 섬기는 것은 그가 누리고 있는 축복들 때문이라고 사탄이 고소하는 것을 들으셨다(욥 1:9-12을 보라).

사탄은 하나님이 욥의 주위에 울타리를 두르셨기에 그분께서 욥의 축복들을 빼앗아 갈 것을 요청했다. 결국, 하나님은 사탄이 제한된 정도 내에 욥을 괴롭히도록 허락하셨다. 처음에, 사탄은 욥의 몸에 손을 댈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나중에 하나님은 사탄이 욥의 몸을 괴롭힐 수 있게 허락하셨다. 하지만 죽이지는 못하게 하셨다(욥 2:5-6).

이 성경 말씀은 사탄이 원하는 대로 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확실하게 증명한다. 그는 하나님이 허락하시기 전까지는 욥의 재산을 다칠 수 없었다. 그는 하나님이 허락하시기 전까지는 욥의 건강을 해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았기 때문에 욥을 죽일 수 없었다.[3] 하나님은 아담의 타락 이후에도 사탄을 지배하셨다.

하나님이 부리시는” 사울의 악령(Saul’s Evil Spirit “From God”)

구약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진노의 도구로써 사탄의 악의 영을 사용하신 몇 가지 예가 있다. 사무엘상 16:14에는 “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그를 번뇌하게 한지라”라는 말씀이 있다. 이 같은 상황이 발생한 것은 분순종한 사울 왕에 대한 하나님의 훈계 때문임이 분명하다.

문제는 “하나님이 부리시는 악령”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분과 함께 천국에 거하는 악령을 보내셨다는 뜻일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사탄의 악한 영 중의 하나가 사울을 괴롭히도록 허락하셨다는 뜻일까? 나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의 다른 말씀들의 가르침에 비추어 볼 때, 두 번째 가능성을 수용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한다. 성경에서 악령이 “하나님이 부리시는” 것이라고 한 이유는 사울에 대한 악령의 괴롭힘이 그에 대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징계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악령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사사기 9:23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 사이에 악한 영을 보내셔서” 그들이 악행에 대한 그분의 심판을 받게 했음을 읽게 된다. 다시 말하지만, 이 악한 영은 하나님의 천국에서 보내진 것이 아니라 사탄의 영역에서 보내진 것이며 특정 사람들에게 악한 계획을 역사하도록 하나님께서 허락받은 것이다. 악한 영은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누구에도 그들의 악한 계획을 실시할 수 없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하나님은 전능하시지 않다. 따라서 우리는 아담이 타락할 때, 사탄이 하나님의 통제를 벗어난 권세를 얻지 못했다고 한 번 더 안전하게 결론을 내릴 수 있다.

하나님의 권능이 사탄을 능가한다는 신약 성경의 예(New Testament Examples of God’s Power Over Satan)

신약 성경은 사탄이 권세를 얻었다는 이론을 반박하는 추가적인 증거를 제공한다.

예를 들어, 누가복음 9:1에서 예수님은 열두 제자에게 “모든 귀신을 제어하는 권위”를 주셨다. 또한, 누가복음 10:19에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강조 추가)라고 말씀하셨다.

만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사탄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수 있는 권능을 주셨다면, 그분 자신이 먼저 그 권능을 가지셔야 한다. 사탄은 하나님의 권능 아래에 있다.

나중에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눅 22:31)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읽을 수 있다. 이 문구는 사탄이 하나님의 허락을 받기 전에는 베드로를 괴롭힐 수 없다는 것을 나타낸다. 다시 한 번, 사탄은 하나님의 통제하에 있다.[4]

사탄의 결박 기간(Satan’s Thousand-Year Prison Term)

우리는 요한계시록 20장에서 사탄이 한 천사에 의해 결박당하는 것을 읽게 되는데, 거기에는 아담의 차용계약이 만기가 되었다는 언급이 없다. 사탄이 투옥된 이유에 대해서는 그저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계 20:3)이라고 하였다.

흥미롭게도, 사탄은 천 년 동안 투옥된 후 놓이게 되며 “나와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한다”(계 20:8). 미혹당한 백성들은 군대를 모아 예수님이 통치하시게 될 예루살렘을 공격하게 된다. 그들이 성을 둘렀을 때,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태워버린다”(계 20:9).

아담의 차용계약이 천 년 후의 마지막 짧은 기간까지 포함하기에 하나님은 사탄을 놓아 주실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있을까? 이런 생각은 터무니없는 것이다.

우리가 이 부분의 성경 말씀에서 한 번 더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마귀에 대해 완전한 통제권을 가지고 계시며 사탄이 사람들을 미혹하도록 허락하신 것은 그분의 계획을 성취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미래의 천 년 통치 동안, 사탄은 역사하지 못할 것이며 아무도 속일 수 없게 된다. 그러나 그 때에, 그리스도의 통치에 겉으로는 순종하지만, 내심으로는 그분의 전복을 원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철장으로 다스리시는”(계 19:15) 이를 뒤엎을 기회가 없다는 것을 알기에 반란을 시도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탄이 놓일 때, 그는 마음속으로 그리스도를 미워하는 사람들을 속일 수 있으며 그들은 어리석게도 불가능한 일을 시도한다. 사탄은 잠재적인 반역자들을 속이도록 허락받았기에, 사람들의 마음이 드러나게 되며 하나님은 그분의 나라에서 살기에 합당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의로운 심판을 내리실 것이다.

물론, 그것은 오늘날 하나님께서 사탄이 사람들을 미혹하도록 허락하시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우리는 나중에 사탄에 대한 하나님의 완전한 목적을 알아보겠지만, 지금 하나님은 아무도 미혹당한 상태에 남아있기를 원하시지 않는다고 충분히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분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고 싶어 하신다. 사탄은 진리를 알고 믿는 사람들을 미혹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마귀가 자신의 굳은 마음 때문에 진리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미혹할 수 있도록 허락하신다.

적 그리스도의 때에 관하여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그 때에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니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그를 죽이시고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폐하시리라 악한 자의 나타남은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미혹의 역사를 그들에게 보내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살후 2:8-12, 강조 추가).

“미혹의 역사를 그들에게 보내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주목하라. 그러나 또한 미혹당한 사람들은 “진리를 믿지 않았음”을 주목하라. 그들은 기회가 있었지만 여전히 복음을 거부했다. 하나님은 사탄이 적그리스도에게 거짓 이적과 표적을 행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할 수 있도록 허락하셔서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자들이 미혹당하게 하실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들이 모두 심판을 받는 것이다.” 같은 이유 때문에, 오늘날에도 하나님은 사탄이 사람들을 미혹하도록 허락하신다.

만일 하나님께서 사탄이 이 땅에서 역사하도록 허락하셔야 할 이유가 없다면, 그분은 그가 타락할 때 우주의 다른 곳으로 쉽게 내쫓으실 수 있다. 베드로후서 2:4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미 범죄한 천사들을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다.” 우리의 전능하신 하나님은 그분의 뜻이라면 사탄과 그의 천사들에게도 똑같이 행하실 수 있으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탄과 그의 천사들이 땅에서 오랫동안 역사하도록 허락하신 좋은 이유가 있다.

고통에 대한 귀신의 두려움(The Demons’ Fear of Torment)

세번 째 신화를 마무리 지으면서 마지막으로 살펴볼 성경의 예는 가다라의 귀신 들린 자에 관한 이야기이다.

또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귀신 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 그들은 몹시 사나워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지경이더라 이에 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마 8:28-29, 강조 추가).

이 이야기는 종종 사탄이 권세를 가졌다는 이론의 지지자들에 의해 사용된다. 그들은 “그 귀신들은 예수님의 공의를 호소했다. 그들은 아담의 차용계약이 만료될 때, 곧 그들과 사탄이 불못에 던져져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당하기 전까지는 예수님이 그들을 괴롭힐 권한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정반대가 진실이다. 그들은 예수님이 원하시면 언제든지 그들을 괴롭힐 수 있는 능력과 권한을 가지고 계심을 알고 있었기에 그분께 자비를 구했던 것이다. 그들은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이 그들을 보내어 훨씬 더 빨리 괴로움을 당하게 할까봐 매우 두려워했다. 누가는 그들이 예수님께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간구했다고 우리에게 알려준다(눅 8:31). 만일 예수님이 마귀가 가지고 있는 합법적인 권리 때문에 그러한 권한이 없으셨다면, 그들은 전혀 걱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예수님께 자기를 그 지방에서 내보내지 마시라고 간구하고(막 5:10), 돼지에게로 보내어 들어가게 해달라고 간구하고(막 5:12), “무저갱”에 들어가지 않게 해달라고 간구하며, 그리고 “때”가 이르기 전까지 괴롭히지 말라고 그리스도께 간구하는 모습으로 보아, 그 귀신들은 그들이 완전히 예수님의 자비 아래에 놓여 있음을 알고 있다.

신화 4: ” ‘이 세상의 신’으로서 사탄은 인간의 정부, 자연재해 및 기후와 같은 이 땅의 모든 것을 통치한다.”(Myth #4: “Satan, as ‘the god of this world’ has control over everything on the earth, including human governments, natural disasters, and the weather.”)

성경에서 사탄을 사도 바울은 “이 세상의 신”(고후 4:4)이라고 하였고, 예수님은 “이 세상의 임금”(요 12:31; 14:30; 16:11)이라고 하셨다. 이런 직함에 근거하여, 많은 사람들은 사탄이 이 땅을 완전히 통치한다고 가정한다. 비록 우리가 이미 충분한 성경 말씀들을 통하여 이 신화의 오류를 제시했지만, 우리가 사탄의 능력이 얼마나 제한적인지를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더 깊이 알아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사탄에 대한 우리의 완전한 이해가 단지 이 세상의 신, 또는 임금이라는 네 개의 성경 구절에만 의거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우리가 더 많은 성경 말씀을 살펴보면, 예수님이 사탄을 “이 세상의 임금”이라고 하셨을뿐 아니라 그분의 하늘의 아버지를 “천의 주재”(마 11:25; 눅 10:21, 강조 추가)시라고 하셨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사도 바울은 사탄을 “이 세상의 신”이라 하였을 뿐 아니라 예수님처럼 하나님이 “천의 주재”(행 17:24, 강조 추가)시라고 하였다. 이것은 예수님이나 바울 모두 우리가 사탄이 이 땅을 완전히 통치한다고 생각하지 않기를 바라신다는 것을 증명한다. 사탄의 권한이 제한적임이 틀림없다.

이러한 대조적인 성경 말씀 사이의 중요한 차이점은 세상이란 단어와 이란 단어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는 종종 이 두 단어를 동의어로 사용하지만,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일반적으로 동일하지 않다. 일단 우리가 그들이 어떻게 다른지를 이해한다면, 이 땅에 대한 하나님과 사탄의 권세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를 이 의 주재라고 하셨다. 땅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ge이다.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실제 행성을 가리키며, 그것으로부터 영어 단어 geography(지리)가 파생되었다.

이에 반하여, 예수님은 사탄이 이 세상의 임금이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세상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kosmos이며, 그것은 주로 질서 또는 배열을 의미한다. 그것은 실제 행성 자체보다 사람을 가리킨다. 그 이유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종종 사탄이 “이 세상 조직의 신”이라고 말한다.

현재, 하나님은 이 세상을 완전히 통치하시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통치하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분께서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주인을 선택할 수 있는 선택권을 주셨으며 많은 사람들은 사탄에게 자신의 충성을 바치기로 선택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의 자유 의지도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분이다.

바울이 이 세상의 신이란 표현을 쓸 때에는 다른 헬라어aion를 사용하였다. Aion는 종종 특정한 시대로 번역되었다. 사탄은 현 시대의 신이다.

이 모든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은 우리가 살고 있는 물질적인 행성이다. 세상은 지금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말하며, 더 구체적으로, 예수님을 섬기지 않는 사람들을 말한다. 그들은 사탄을 섬기고 있으며, 타락하고 죄로 가득한 조직에서 발견된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은”(요 17:11,14) 사람이어야 한다. 우리는 어둠의 나라의 시민들 사이에 살고 있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의 나라인 빛의 나라에서 살고 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해답을 찾았다.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이 땅 전체를 통치하신다. 사탄은 하나님의 허락하에, 어둠의 나라의 시민들을 지배하는 “세상의 조직”만 통치한다. 이러한 이유로, 사도 요한은 “온 세상은(온 이 아닌)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요일 5:19)이라고 썼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 세상, 또는 세상의 조직, 또는 세상의 사람들에 대한 권세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다니엘이 쓴 것처럼, 그분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신다”(단 4:25). 그분은 여전히 원하시는 대로 누구든지 높이시거나 낮추실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는” 지극히 높으신 이로서, 그분은 사탄이 그분께 반역하는 자들을 지배할 수 있도록 주권적으로 허락하셨다.

사탄의 제안(Satan’s Offer Considered)

땅과 세상 사이의 구별은 우리가 광야에서 예수님이 받은 유혹을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을 준다. 사탄은 예수님께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여주었다. 사탄은 예수님께 우리가 대통령이나 총리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어떤 세속적인 인간 정부의 정치적인 지위를 제안할 수 없었다. 사탄은 이 땅의 인간 통치자들을 높이거나 낮출 수 없다. 하나님만이 그러실 수 있다.

오히려, 사탄은 예수님께 어둠의 나라의 모든 하위 나라들을 보여주었음이 틀림없다. 그는 예수님께 각각 자기의 영역에서 어둠의 나라뿐 아니라 그들의 신하인 반역한 인간들을 다스리는 악한 영들의 계급 구조를 보여주었다. 사탄은 예수님께 자기의 영역을 다스릴 것을 제안하였다 – 만일 예수님이 하나님을 대항하여 사탄의 반역에 참여하기를 원하신다면 말이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은 어둠의 나라에서 부사령관이 될 것이다.

이 땅의 인간 정부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God’s Control Over Earthly, Human Governments)

먼저 이 땅의 인간 정부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를 확증하는 성경 말씀들을 살펴보면서 사탄의 권세의 한계를 더욱 구체적으로 확립해가자. 사탄이 인간 정부에 대해 일부 권세를 가지고 있는 것은 단지 그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 일부 권세를 가지고 있으며, 정부는 종종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 의해 조종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하나님은 인간 정부의 주권자이시며, 사탄은 단지 하나님이 허용하시는 정도 내에서 사람들을 조종할 수 있다.

우리는 이미 느부갓네살 왕에게 한 다니엘의 진술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그것의 계시가 크기 때문에, 다시 한 번 그것을 간략하게 살펴보자.

위대한 왕 느부갓네살은 그의 능력과 성취 때문에 점점 교만하여 높아졌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를 낮추시겠다고 선언하셨는데 그것은 그가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며 또 지극히 천한 자를 그 위에 세우시는 줄을”(단 4:17) 알게 하기 위해서였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느부갓네살 왕의 정치적 상승을 가져오셨다. 이것은 이 세상의 모든 지도자들에게도 해당된다. 사도 바울은 이 세상의 통치자들에 대해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라고 선언하였다(롬 13:1).

하나님은 전체 우주 최초의 그리고 가장 높은 권세이시다. 만일 어떤 사람이 어떤 권세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그분의 권세를 그분의 또는 허락받은 사람에게 어느 정도 위임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악한 통치자들은 어떠한가? 바울은 심지어 그들까지도 하나님에 의해 세움을 받았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렇다. 같은 서신의 앞부분에서 바울은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롬 9:17)라고 썼다. 하나님은 자신을 영화롭게 하시기 위한 목적으로 마음이 강퍅한 바로를 세우셨다. 하나님은 구원의 기적을 통하여 이방인들에게 그분의 능력을 보여주실 수 있었는데 이 기회는 그분이 세우신 마음이 강퍅한 사람이 제공하였다.

이 같은 사실은 예수님과 빌라도 사이의 대화에서도 분명하지 않은가? 빌라도가 예수님께 “내가 네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요 19:10)라고 말했을 때, 예수님께서 그의 질문에 대답하시지 않았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예수님은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요 19:11 강조 추가)라고 대답하셨다. 하나님은 빌라도의 비겁한 성격을 아시기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는 그분의 예정된 계획을 이루시기 위하여 그를 세우셨다.

구약 성경의 역사를 읽어보면, 하나님은 종종 악한 인간 통치자를 그분의 진노의 대리인으로 사용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느부갓네살은 하나님께서 구약 성경의 많은 민족을 심판하시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통치자들을 세우시거나 낮추신 사례가 매우 많다. 예를 들어, 신약 성경에서, 헤롯은 그의 백성들이 그의 연설을 듣고 그의 앞에서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행 12:22)라고 크게 부르짖었을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았다.

그 결과는 그는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었다”(행 12:23).

헤롯은 명백히 사탄의 나라의 시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음을 명심하라.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그분이 원하시면, 이 땅의 지도자를 누구든지 낮추실 수 있다.[5]

하나님의 증언(God’s Personal Testimony)

마지막으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신이 이 땅의, 인간의 국가에 대한 그분의 주권에 관하여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 하신 말씀을 읽어보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가 하는 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내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뽑거나 부수거나 멸하려 할 때에 만일 내가 말한 그 민족이 그의 악에서 돌이키면 내가 그에게 내리기로 생각하였던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겠고 내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건설하거나 심으려 할 때에 만일 그들이 나 보기에 악한 것을 행하여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면 내가 그에게 유익하게 하리라고 한 복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리라(렘 18:6-10).

당신은 사탄이 광야에서 예수님을 유혹할 때, 합법적으로 예수님께 이 땅의, 인간의, 정치적 나라를 제공할 수 없었다는 것을 알겠는가? 만일 그가 진실을 말했다면(그는 때로는 그렇게 한다), 그가 예수님께 제공할 수 있었던 것은 어둠의 나라를 통치하는 것일 것이다.

사탄은 인간의 정부에 영향을 줄 수 있을까? 있다. 그러나 단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인간의 정부에 참여하고 있으며, 그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의 영적 주재이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이 그에게 허락하신 만큼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은 원하시면 언제든지 사탄의 어떤 계획이라도 좌절시키실 수 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셨다”(계 1:5)고 썼다.

사탄이 자연재해와 이상 기후를 일으킬까? (Does Satan Cause Natural Disasters and Adverse Weather?)

사탄이 “이 세상의 신”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그가 기후를 조종하며 가뭄, 홍수, 태풍, 지진과 같은 모든 자연재해를 일으킨다고 가정한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이것을 가르치는가?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사탄에 대한 전체 이론을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다”(요 10:10)라는 한 성경 말씀에만 근거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나는 사람들이 이 구절을 인용하여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은 다 사탄에게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얼마나 자주 듣는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더 많이 살펴볼수록, 하나님 자신도 가끔 죽이고 멸망시키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러 가지 예제들 가운데 아래 세 구절을 살펴보자.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약 4:12, 강조 추가).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눅 12:5, 강조 추가).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 10:28, 강조 추가).

우리가 죽이거나 멸망시키는 것을 포함한 모든 것을 다 사탄의 역사라고 말하는 것은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죽이고 멸망시키셨다는 많은 예가 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기 위해 온 도둑에 관해 말씀하셨을 때, 실제로 마귀를 가리키신 것인지를 자신에게 물어봐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문맥적으로 읽을 필요가 있다. 그 말씀 전에 예수님은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요 10:8)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예수님은 선한 목자시라는 요한복음 10:1-15의 전체 말씀을 일어보면, 그분께서 도둑이라고 언급하신 것은 거짓 교사와 종교 지도자들이라는 것이 더욱 분명해진다.

이상 기후와 자연재해에 대한 다양한 관점(Various Views of Adverse Weather and Natural Disasters)

폭풍이나 지진이 발생했을 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머릿속에 이런 신학적인 질문이 들것이다. “누가 이것을 일으킬까?”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두 가지 가능성밖에 없다. 하나님 아니면 사탄이 그것을 일으킨다.

일부 사람들은 “아니, 하나님은 비난받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비난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죄 때문에 그들을 심판하시고 계십니다.”라고 반박할 수 있다.

만일 하나님께서 죄에 심판으로 폭풍이나 지진을 일으키셨다면, 우리는 확실히 하나님이 아닌, 반역적인 인간을 비난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책임을 갖고 계시는데, 그것은 자연재해가 그분의 명령 없이는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니면, 만일 하나님께서 사탄이 폭풍과 지진을 일으켜 죄인에 대한 그분의 심판을 가져오도록 허락하셨다면, 우리는 사탄이 그것을 일으켰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는 여전히 책임이 있다. 왜냐하면, 그분께서 사탄이 파괴를 일으키도록 허락하셨으며, 또한 이러한 파괴는 그분의 창조물이 지은 죄 때문에 일어났기 때문이다.

일부 사람들은 폭풍과 지진에 대해 하나님과 사탄, 누구에게도 책임이 없으며, 그것은 단순히 “죄로 타락한 세상의 자연적인 현상”이라고 말한다. 모호하게나마 그들도 역시 자연재해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물으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은 요점을 놓치고 있다. 이런 해석은 하나님의 책임을 없애지는 못한다. 만일 폭풍이 단순히 “죄로 타락한 세상의 자연적인 현상”이라면, 누가 그것이 일어날 것을 결정하는가? 폭풍은 분명히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다. 즉 폭풍은 대기 속에 특정 양의 거짓말이 전파될 때마다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지진은 특정 인수의 사람들이 간음할 때마다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폭풍과 죄 사이에 연관이 있다면, 하나님이 관여하셨을 것이다. 왜냐하면, 폭풍은 죄에 대한 그분의 심판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작위로 발생한다 할지라도, 무작위로 발생하도록 명령하신 분이 하나님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분은 관여하셨다.

죄와 자연재해 사이에 관계가 없다 할지라도, 세계를 설계하실 때, 하나님의 실수로 인한 오류 때문에 지각이 때때로 흔들리고 기후가 이따금 난폭해지므로 하나님은 지진과 폭풍에 대한 책임을 여전히 피하실 수 없다. 그분은 창조주이시고 그분의 실수 때문에 사람들에게 해가 되기 때문이다.

대자연 존재하지 않는다(There is No “Mother Nature”)

그래서 우리는 자연재해의 문제에 대해서 두 가지 해답밖에 없다. 하나님의 책임이 아니면 사탄의 책임이다. 정확한 해답이 무엇인지를 결정하기 위해 구체적인 성경 말씀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그 두 가지 가능한 해답에 관해 더 깊이 생각해보자.

만일 사탄이 자연재해를 일으켰다면, 하나님은 그를 막으실 수 있거나 없다. 만일 하나님이 사탄이 자연재해를 일으키는 것을 막으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막으시지 않았다면, 그분은 여전히 일부 책임을 지셔야 한다. 그분의 허락 없이는 재앙이 발생할 수 없다.

다른 측면에서, 하나님이 사탄을 제지시키시고 싶었지만 그럴 능력이 없었다고 잠시 가정해보자. 그것은 정말 가능성이 있는 일인가?

만일 하나님이 자연재해를 일으키는 사탄을 제지하실 수 없다면, 사탄이 하나님보다 더 강력하거나 총명하다. 이것은 사실상 “사탄은 아담이 타락할 때 이 세상을 통치하는 권세를 얻었다”는 이론이 말하는 것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그들은 사탄이 아담의 차용계약을 손에 넣었기에 이 땅에서 자기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합법적인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지금, 하나님은 사탄을 제지하시고 싶지만, 사탄이 갖고 있는 아담의 차용계약을 존중해야 하므로 제지하실 수 없다. 즉, 하나님은 아담의 타락 이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예측하시지 못할 정도로 어리석었지만, 사탄은 하나님보다 총명하여 하나님이 그가 갖기를 바라시지 않았던 권세를 얻었다. 개인적으로, 나는 사탄이 하나님보다 더 총명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사탄이 권세를 얻었다는” 이론이 사실이라면, 왜 사탄은 지금보다 더 많은 지진과 폭풍을 일으키지 않는지, 그리고 왜 더 많은 규모의 그리스도인들을 목표로 하지 않는지 우리는 알고 싶을 것이다(만일 당신이 “하나님께서 사탄이 그리스도인들을 목표로 삼지 못하게 하시기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곧 사탄이 하나님의 허락없이는 역사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 셈이 된다.)

우리가 범위를 좁혀 구체적으로 보면, 우리의 문제에 대한 유일한 두 가지 해답은 (1) 하나님이 지진과 폭풍을 일으키시거나 (2) 사탄이 하나님의 허락하에 일으키는 것이 된다.

당신은 어느 해답이 정확한지에 관계없이, 궁극적인 책임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은 그 폭풍을 보내시지 않았다. 사탄이 하나님의 허락하에 일으킨 것이다”라고 말할 때, 그들은 희망대로 하나님을 책임에서 완전히 벗어나게는 하지 못한다. 만일 하나님이 자신의 뜻과는 관계없이 사탄이 폭풍을 일으키는 것을 제지하셨다면, 그분은 책임을 지시게 된다. 반역한 인간들은 그들의 죄 때문에 비난받을 수 있다(하나님께서 폭풍을 일으키셨거나 심판의 도구로서 허락하셨다면), 하지만 하나님이 참여하시지 않았다거나 책임이 없으시다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성경의 증언(Scripture’s Testimony)

자연재해에 대해 성경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말씀하는가? 성경은 하나님이나 사탄이 그것을 일으킨다고 말씀하는가? 먼저 지진에 대한 성경의 말씀부터 살펴보자.

성경에 따르면, 지진은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때문에 일어날 수 있다. 예레미야서에서 우리는 “그[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땅이 진동하며 그 분노하심을 이방이 능히 당하지 못하느니라”(렘 10:10, 강조 추가)라는 말씀을 읽을 수 있다.

이사야도 아래와 같이 경고하였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레와 지진과 큰 소리와 회오리바람과 폭풍과 맹렬한 불꽃으로 그들을 징벌하실 것인즉(사 29:6, 강조 추가).

당신은 모세의 시대에 땅이 입을 열어 고라와 그의 반역자들을 삼켜버린 일을(민 16:23-34을 보라) 떠올릴 수 있다.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심판 행위였다. 하나님께서 지진으로 심판하신 다른 예는 겔 38:19; 시 18:7; 77:18; 학 2:6; 눅 21:11; 계 6:12; 8:5; 11:13; 16:18에서 찾을 수 있다.

성경에 기록된 일부 지진은 하나님의 심판 행위만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하나님에 의해 발생 하였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이 죽으셨을 때와(마 27:51, 54) 부활하셨을 때에(마 28:2) 지진이 일어났다. 사탄이 일으킨 것일까?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서 한밤중에 하나님을 찬송할 때,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졌다”(행 16:26, 강조 추가). 사탄이 그 지진을 일으켰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심지어 간수도 하나님의 능력을 증거한 후 구원받았다. 그리고 그것은 사도행전에서 유일하게 언급한 하나님이 일으키신 지진이 아니다(행 4:31을 보라).

나는 최근 일부 좋은 뜻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특정 지역의 지진예보를 듣고 그 곳에 가서 마귀를 대적하여 “영적 전쟁”을 벌렸다는 이야기를 읽었다. 당신은 그들이 범한 오류가 보이는가? 그들은 하나님께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기를 기도하는 것이 성경적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했다면, 시간과 돈을 낭비하면서 그곳까지 갈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 그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곳에서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었다. 지진을 막기 위해 마귀와 전투하는 것은 비성경적이다.

폭풍은 어떠한가?(How About Hurricanes?)

폭풍이란 단어는 성경에서 찾을 수 없지만, 우리는 광풍에 대한 예는 확실히 찾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배들을 바다에 띄우며 큰 물에서 일을 하는 자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들과 그의 기이한 일들을 깊은 바다에서 보나니 여호와께서 명령하신즉 광풍이 일어나 바다물결을 일으키는도다(시 107:23-25, 강조 추가).

여호와께서 큰 바람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에 큰 폭풍이 일어나 배가 거의 깨지게 된지라(욘 1:4, 강조 추가).

이 일 후에 내가 네 천사가 땅 네 모퉁이에 선 것을 보니 땅의 사방의 바람을 붙잡아 바람으로 하역금 땅에나 바다에나 각종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하더라(계 7:1).

분명히, 하나님은 바람을 일으키시고 멈추실 수 있다.[6]

성경 전체에서, 사탄이 바람을 일으켰다는 말씀은 한 곳밖에 없다. 욥이 시험을 받고 있을 때, 한 사람이 그에게 “거친 들에서 큰 바람이 와서 집 네 모퉁이를 치매 그 청년들 위에 무너지므로 그들이 죽었나이다”(욥 1:19)라고 보고하였다.

우리는 욥기 1장을 읽는 것을 통하여 욥의 불행의 원인이 사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사탄이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욥과 그의 자녀들을 해칠 수 없다는 것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한 번, 하나님이 바람을 주관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갈릴리의 광풍(The Gale on Galilee)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로 갈릴리 바다를 건널 때, 그들을 습격한 “맹렬한 광풍”은 어떻게 된 것일까?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실은 배에 광풍이 일게 하시지 않을 것이므로 그 바람은 사탄이 일으킨 것이 틀림없다.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는 무너지기 마련이다”, 그럼 하나님께서 왜 예수님과 열두 제자를 해칠 수 있는 바람을 일으키셨겠는가?

이것은 좋은 쟁론이다. 하지만 잠깐 멈추고 생각해보자. 하나님께서 그 폭풍을 보내시지 않고 사탄이 보냈다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께서 사탄이 바람을 보낼 수 있도록 허락하셨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래서 같은 질문은 여전히 답변 되어야만 한다. 왜 하나님은 사탄이 예수님과 열두 제자를 해칠 수 있는 폭풍을 보내는 것을 허락하셨을까?

해답은 무엇일까? 아마도 하나님은 제자들에게 믿음에 관해 가르치시고 계셨을 것이다. 어쩌면 그분은 그들을 시험하시고 계셨을 수도 있다. 혹은 그분은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신”(히 4:15) 예수님을 시험하시고 계셨을 수도 있다. 완벽하게 시험받으시기 위해, 예수님은 두려움의 시험도 받으셔야만 했을 수 있다. 혹은 하나님은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시고 싶었을 수 있다. 혹은 이상의 모든 것을 다 이루시고 싶었을 수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들을 홍해로 이끄실 때, 그들이 바로의 군대의 함정에 빠지게 될 것을 잘 아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시지 않았는가? 그러면 하나님이 그들을 몰살당하게 될 곳으로 인도하신 것은 자기 자신을 대적하신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것은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의 한 예가 아닌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학살당하도록 내버려 두실 의도가 없으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분은 자신이 갈릴리 바다에 광풍을 일으키시거나 사탄이 그렇게 하는 것을 허락하셔서 예수님과 열두 제자가 물에 빠지게 하시려는 의도가 없으셨다.

어쨌든, 성경에는 사탄이 갈릴리 바다에 광풍을 보냈는 말씀도 없고 하나님이 보내셨다는 말씀도 없다. 일부 사람들은 예수님이 바람을 꾸짖으셨기 때문에 바람을 보낸 자가 사탄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빈틈없는 주장은 아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꾸짖으신 것이 아니라 바람을 꾸짖으셨다. 하나님 아버지도 똑같은 일을 하셨을 수 있다. 즉, 그분은 한마디 말씀으로 바람을 일으키실 수도 있고 꾸짖으심으로 그것을 잠잠하게 하실 수도 있다. 예수님이 광풍을 꾸짖으셨다는 것은 사탄이 그것을 일으켰다는 것의 증거가 될 수 없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전체 신학을 아무것도 증명할 수 없는 한 구절의 말씀에 기반을 두어서는 안 된다. 나는 이미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바람을 제어하시며, 대부분의 경우, 그분께서 바람을 일으키신다는 것을 증명하는 많은 성경 말씀들을 언급하였다. 내 요점은 사탄이 비록 “이 세상의 신”이지만, 독립적으로 바람을 제어하거나, 자기가 원하면 언제든지 또는 어디에서든지 폭풍을 일으킬 수 있는 권한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폭풍이 발생할 때,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통제를 떠난, 그분께서 멈추고 싶으시지만 그러실 수 없는 것으로 보지 말아야 한다. 갈릴리 바다에서 예수님이 광풍을 꾸짖으신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폭풍을 멈추실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만일 하나님이 폭풍을 보내셨거나(또는 허락하셨다면), 그분에게는 꼭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분께서 불순종하는 사람들을 경고하시고 심판하시기 위해 광범위한 재난적인 황폐함을 가져오는 폭풍을 보내시거나 허락하신다고 보는 것이 가장 지혜로울 것이다.

그러나 폭풍이 때로는 그리스도인들을 해치기도 한다(“But Hurricanes Sometimes Harm Christians”)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자연재해의 피해를 입는 것은 어떻게 된 일인가? 폭풍이 덮칠 때, 그것은 비그리스도인들만 파괴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희생적인 죽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에서 제외되지 않았는가? 자연재해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큰 피해를 가져다 줄 때, 우리는 어떻게 그분께서 궁극적으로 이 모든 것의 발생을 주관하신다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참으로 어려운 질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사탄이 자연재해를 일으킨다는 잘못된 전제에 기초하면 쉽게 대답될 수 있다는 것을 반드시 인식해야 한다. 만일 사탄이 모든 자연재해를 일으켰다면, 왜 하나님은 사탄이 그분의 자녀들을 해칠 수도 있는 것을 일으키도록 허락하셨을까? 우리는 여전히 똑같은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성경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노하심에 이르지 아니할 것이다”(살전 5:9)고 명백하게 말씀한다. 동시에, 성경은 예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다”(요 3:36)고 말씀한다.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들이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 중에 살고 있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진노가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지 않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만 내려질 수 있을까? 그것에 대한 대답은 때로는 그렇지 못할 때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실을 대면해야 한다.

출애굽할 때,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 장소에서 함께 살았으므로 하나님이 심판의 도구로 내린 악성 종기의 재앙은 그들을 해치지 않았다(출 8:22-23; 9:3-7; 24-26; 12:23을 보라). 그러나 우리는 지금 “애굽인”들과 함께 살고, 나란히 일하고 있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들을 자연재해의 방식으로 심판하시려 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탈출해야 하는가?

탈출은 확실히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이해하는 핵심 단어이다. 비록 노아가 하나님이 땅에 홍수를 내리실 때, 하나님의 완전한 진노를 탈출하였지만, 그는 여전히 부정적인 영향을 받았다. 그는 방주를 구축하기 위해 수고해야 했고 냄새나는 동물 무리와 함께 배에서 1년 동안 보내야만 했다. (덧붙여, 구약과 신약 성경은 노아의 홍수는 사탄이 아닌 하나님이 내리신 것이라고 말씀한다; 창 6:17; 벧후 2:5을 보라).

하나님의 심판이 소돔과 고모라에 떨어졌을 때에, 롯은 그의 아내와 함께 탈출하였지만, 유황불의 파괴로 자신의 모든 소유를 잃어야만 했다.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의인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신자들이 성이 적군으로 포위당했을 때, 도망하라고 경고하셨다. 왜냐하면, 그것은 “징벌의 날”(눅 21:22-23)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기원 70년에 로마가 예루살렘을 포위하는 것을 허용하심으로써 그분의 진노를 분명하게 나타내셨다. 그리스도의 경고를 마음에 새긴 그리스도인들은 도망하여 목숨을 건졌지만, 그들은 예루살렘에 두고 온 모든 것을 잃었다.

위의 세 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이 악인에게 떨어질 때, 하나님의 백성들도 어느 정도 고통당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연재해가 종종 그리스도인들에게 영향 준다는 이유로 하나님이 자연재해에 대한 책임이 없으시다고 볼 수 없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What Then Shall We Do?)

우리는 하나님이 저주하신 세상에 살고 있으며, 이 세상은 하나님의 진노를 줄곧 경험하고 있다. 바울은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많은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난다”(롬 1:18)고 썼다. 우리는 악하고 하나님이 저주하신 세상에 살고 있으므로 하나님의 진노가 우리를 향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의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우리는 이것을 알았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첫째,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 예레미야는 이렇게 썼다.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 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렘 17:7-8).

예레미야는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가뭄에 직면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더위와 가뭄이 올 때,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친, 물 가에 심어진 나무와 같다. 온 세상이 쇠약해질지라도 그에게는 다른 공급원이 있다. 이스라엘에 기근이 들었을 때, 까마귀에 의해 공급받은 엘리사의 이야기도 한 예이다(왕상 17:1-6을 보라). 다윗은 의인은 “기근의 날에도 풍족할 것이다”(시 37:19)라고 썼다.

그러나 기근은 마귀가 일으키는 것이 아닌가? 아니, 성경에 따르면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항상 책임을 지시며, 기근은 종종 사람들에 대한 그분의 진노의 결과로 내려졌다. 예를 들면,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보라 내가 그들을 벌하리니 청년들은 칼에 죽으며 자녀들은 기근에 죽고(렘 11:22, 강조 추가).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칼과 기근과 전염병을 그들에게 보내어 그들에게 상하여 먹을 수 없는 몹쓸 무화과 같게 하겠고(렘 29:17).

인자야 가령 어떤 나라가 불법을 행하여 내게 범죄하므로 내가 손을 그 위에 펴서 그 의지하는 양식을 끊어 기근을 내려 사람과 짐승을 그 나라에서 끊는다 하자(겔 14:13, 강조 추가).

너희가 많은 것을 바랐으나 도리어 적었고 너희가 그것을 집으로 가져갔으나 내가 불어 버렸느니라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것이 무슨 까닭이냐 내 집은 황폐하였으되 너희는 각각 자기의 집을 짓기 위하여 빨랐음이라 그러므로 너희로 말미암아 하늘은 이슬을 그쳤고 땅은 산물을 그쳤으며 내가 이 땅과 산과 곡물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땅의 모든 소산과 사람과 가축과 손으로 수고하는 모든 일에 한재를 들게 하였느니라(학 1:9-11, 강조 추가).

위의 네 번째 예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의 죄 때문에 한재를 입었음을 읽게 된다. 하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그것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신다.[7]

만일 하나님이 악한 백성에게 기근을 보내셨고, 우리가 그 악한 사람들 사이에서 살고 있다면,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실 것을 믿어야 한다. 바울은 기근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없다고 말하였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 8:35, 강조 추가). 바울은 그리스도인은 결코 기근에 직면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음을 주목하라. 그는 율법 학자로서, 기근은 하나님이 악인들을 심판하시기 위해 내리시는 것임을 알면서도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도 기근을 만날 수 있음을 암시하였다.

순종과 지혜(Obedience and Wisdom)

둘째로, 우리는 순종하고 하나님의 지혜를 사용하여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에 휘말려 들어가는 것을 피면 해야 한다. 노아는 방주를 만들어야만 했고, 롯은 뒤를 돌아보지 말아야 했으며,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들은 도시에서 도망해야만 했다. 이 모든 사람들은 악인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에 휘말리는 것을 피면 하기 위해 하나님께 순종해야만 했다.

내가 만일 폭풍이 자주 발생하는 지역에 살고 있다면, 폭풍에 날아갈 수 없는 든든한 집 또는 쉽게 교체할 수 있는 싼 집을 지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기도할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기도하며 예수님이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신다”(요 16:13)고 약속하신 분 안에 깨어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들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다.

사도행전 11장에서 우리는 선지자 아가보가 유대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재난이 될 수 있었던 기근에 대해 경고한 것을 읽을 수 있다. 결국, 그들은 바울과 바나바의 믿음에 의해 부조를 받게 되었다(행 11:28-30을 보라).

오늘날에도 이러한 일들이 발생할 수 있을까? 물론이다. 왜냐하면, 성령님이 변하셨거나 하나님의 사랑이 무효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 지체들은 성령님의 이런 은사와 나타내심에 대해 열려있지 않다. 그들은 “성령을 소멸하여”(살전 5:19) 하나님의 일부 최선의 것을 놏치게 된다.

순복음 기업인의 설립자이자 전 사장인 데모스 사카리안은 그의 자서전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문맹인 남자아이를 통해 1800년대 후반의 아르메니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말씀하셨는지에 대해 자세히 적고 있다. 그는 임박한 대학살에 대해 경고하였는데, 그 결과로, 이러한 초자연적인 명시를 믿은 수천 명의 오순절파 그리스도인들은 그 나라에서 도망하였으며 그 가운데는 사카리안의 조부모도 있었다. 그후 머지않아, 아르메니아를 침공한 터키군은 수만 명의 아르메니아인을 학살하였으며 그 가운데는 하나님의 경고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그리스도인들도 포함되었다.

우리가 성령님께 열려있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현명하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정말 원하시지 않지만, 그분의 진노를 경험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엘리사는 어느 한 번 한 여인에게 “너는 일어나서 네 가족과 함께 거주할 만한 곳으로 가서 거주하라 여호와께서 기근을 부르셨으니 그대로 이 땅에 칠 년 동안 임하리라”(왕하 8:1)라고 지시한 적이 있다. 그 여자가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요한계시록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나오지 않으면 그녀가 받을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흥미로운 경고를 읽게 된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부터 다른 음성이 나서 이르되 내 백성아, 거기서[바벨론]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그의 죄는 하늘에 사무쳤으며 하나님은 그의 불의한 일을 기억하신지라…그러므로 하루 동안에 그 재앙들이 이르리니 곧 사망과 애통함과 흉년이라 그가 또한 불에 살라지리니 그를 심판하시는 주 하나님은 강하신 자이심이라(계 18:4-5, 8, 강조 추가).

요약하면, 하나님은 기후, 자연재해를 주관하신다. 하나님은 성경에서 그분께서 자연을 주재하심을 반복적으로 증명하셨다. 그분은 노아의 시대에 사십 일 동안 비가 내리게 하시고, 이스라엘의 원수에게 우박과 다른 자연재해를 내리시고, 요나의 배에 바람을 일으키시고, 갈리리 바다에서 바람을 꾸짖으셨다. 그분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천지의 주재시다”(마 11:25). 자연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증거하는 성경 말씀을 참고하려면, 수 10:11; 욥 38:22-38; 렘 5:24; 10:13; 31:35; 시 78:45-49; 105:16; 107:33-37; 135:6-7; 147:7-8, 15-18; 마 5:45; 행 14:17을 보라.

가지 질문에 대한 답변(A Few Questions Answered)

만일 하나님이 기근, 홍수, 지진을 통해 사람을 심판하신다면, 하나님을 대표하는 우리가 하나님이 징벌하시는 사람들을 도와주고 고통을 덜어주는 것은 잘못된 것일까?

아니, 전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그분이 심판하시는 사람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자연재해를 통한 그분의 심판은 실제로 그분의 사랑의 표현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자연재해가 가져오는 고난과 어려움을 통해, 하나님은 그분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그분은 거룩하시고 심판을 내리시기에 죄에 따른 결과가 있다는 것에 대해 경고하신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구주에 대한 필요를 느끼게 하시기 위해 그들에게 일시적인 고통을 허락하신다 – 그것은 그들이 불못에 던져지지 않게 하시기 위함이다. 그것은 사랑이다!

사람들이 숨을 쉬고 있는 한, 하나님은 여전히 그들에게 넘치는 자비를 베풀어 주시며 그들에게 회개할 시간을 주신다. 우리는 우리의 동정과 도움을 통해, 하나님의 일시적인 진노를 경험하고 있지만 그분의 영원한 진노에서 구원 될 수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낼 수 있다. 자연재해는 우리가 이 세상에 다가갈 수 있는 기회이다. 이 세상을 위해 예수님은 죽으셨다.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아닐까? 우리가 영원의 관점을 가지게 되면 자연재해의 고통은 앞으로 불못에 던져질 사람들의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고통당할 때 복음을 더 잘 받아들인다. 이웃 나라의 핍박에 회개한 이스라엘의 이야기부터 시작하여 방탕한 아들에 관한 예수님의 이야기까지 성경에는 이런 현상을 보여주는 수많은 예가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연재해를 수확할 시기가 곧 무르익을 것으로 보아야 한다.

진실을 말해 보자(Let’s Tell the Truth)

폭풍이나 지진이 일어난 후, 목숨을 건진 사람들에게 우리는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 그들이 자신의 처지에 대한 신학적인 답변을 요구하면, 우리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에 정직해야 한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거룩하시며 그들은 죄에 대한 결과를 져야 한다고 말해야 한다. 우리는 폭풍의 사나운 포효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소유하신 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며 그들의 집이 흔들릴 때 느끼는 두려움은 그들이 지옥에 던져질 때의 공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그들에게 알려주어야 한다. 우리는 그들에게 우리가 모두 지옥에 던져져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회개하고 그분의 진노에서 구원받을 수 있게 해주시는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시간을 주시는 자비를 베푸셨음을 그들에게 알려주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사람들을 겁주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라고 묻는다. 답은 성경에서 발견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다”(잠 1:7).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외하기 전에는 아무것도 모른다.

사람들이 하나님께 화가 난다면 어떻게 될까?(What if People Become Angry With God?)

사람들은 자신이 당하는 고통 때문에 하나님께 화를 내지 않을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자신의 거만함을 볼 수 있도록 조심스럽게 도와야 한다. 아무도 그에 대한 하나님의 대우 때문에 그분께 불평할 권리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오래전에 벌써 지옥에 던져졌어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재앙 때문에 하나님을 저주하기보다는 그들을 경고하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그분을 찬양해야 한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이기적인 길을 따라 지옥에 가는 것을 내버려두실 모든 권리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하시기에 날마다 그들을 부르신다. 그분은 사과나무의 꽃이 피는 것을 통하여, 새들의 노랫소리를 통하여, 산들의 장엄함을 통하여, 무수한 별들의 반짝임을 통하여 그들을 조용하게 부르신다. 그분은 그들의 양심을 통하여, 그분의 몸인 교회를 통하여, 그리고 그분의 성령을 통하여 그들을 부르시지만, 그들은 그분의 부르심을 무시하였다.

물론,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여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하지만 그들이 계속하여 그분을 무시하면, 그분은 그들의 관심을 얻으시기 위해 더 과감한 조치를 취하실 정도로 그들을 충분히 사랑하신다. 폭풍, 지진, 홍수, 기근은 그런 과감한 조치의 일부분이다. 하나님은 그러한 재난을 통하여 사람들이 겸손해지고 정신을 차리기를 바라신다.

하나님의 심판은 불공평한가?(Is God Unfair in His Judgment?)

우리가 오직 성경적인 관점에서 하나님과 이 세상을 바라보아야만 바르게 생각할 수 있다. 성경적인 관점이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는 것이 마땅하지만, 하나님은 자비로우시다는 것이다. 고통받는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더 좋은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말한다면, 그는 불평하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훨씬 더 많은 자비를 받고 있다.

이 주제에 관련하여, 예수님은 그 당시의 한 재난에 대하여 설명하여 주셨다. 누가복음을 보면,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아뢰니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눅 13:1-5).

빌라도의 손에 죽은 갈릴리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빌라도의 손에서 구해주시지 않은 것은 공평하지 않다!”라고 말할 수 없다. 그들은 죽어 마땅한 죄인들이다. 그리고 예수님에 따르면, 살아남은 갈릴리 사람들이 죽은 사람들보다 죄가 적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더 많은 사랑을 얻은 것이 아니다 – 그들은 더 큰 자비를 받은 것이다.

그리스도의 메시지는 분명했다: “당신들은 모두 죄인이다. 죄에는 결과가 따른다. 지금, 당신이 살아있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 때문이다. 그래서 더 늦기 전에 회개하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비유로서 이런 비극을 설명하셨다.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포도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 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눅 13:6-9).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에 대한 예증이다. 하나님의 공의는 “쓸모없는 나무를 찍어버리라!”라고 소리치지만, 그분의 자비는 “아니, 열매를 맺도록 시간을 더 주자”라고 간청한다. 그리스도가 없는 사람마다 모두 그 나무와 같다.

우리가 폭풍과 홍수를 꾸짖을 수 있을까? (Can We Rebuke Hurricanes and Floods?)

자연재해에 대한 마지막 질문은 이것이다: 만일 우리가 충분한 믿음이 있다면, 자연재해를 꾸짖고 그것의 발생을 막을 수 있을까?

믿음을 가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된 뜻을 믿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해야 하지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믿음이 아닌 희망 또는 억측이다. 성경에는 우리가 폭풍을 꾸짖을 수 있고 잠잠하게 할 수 있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없으므로 사람이 (하나님이 그에게 주권적으로 주시는 믿음을 떠나서) 그렇게 행할 수 없다

좀 더 깊이 설명해보자. 한 사람이 믿음을 갖고 폭풍을 꾸짖을 수 있는 유일한 경우는 그가 하나님께서 폭풍이 특정 지역을 타격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할 때이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 알다시피, 하나님은 바람을 다스리시는 분이시므로 폭풍에 대한 책임을 지신다. 그러므로 하나님 자신이 폭풍의 발생을 명령하신 상황에서 누군가가 확신적인 믿음을 갖고 그것을 막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유일하게 가능한 것은, 하나님께서 누군가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자비를 베푸시거나, 그분께서 심판하시려는 사람들이 회개한 것에 대한 응답으로 마음을 바꾸신 경우이다(한 예로, 요나의 시대의 니느웨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마음을 바꾸셨다 할지라도, 아무도 하나님이 마음을 바꾸셨고 그가 폭풍을 꾸짖고 잠잠하게 하기를 바라신다는 것을 알지 못한 이상, 폭풍을 꾸짖고 잠잠하게 할 만한 믿음을 가질 수 없다.

이제까지 큰 바람을 꾸짖으시고 잠잠하게 하신 유일한 사람은 예수님뿐이다. 우리 중의 누군가가 그렇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린도전서 12:7-11에 열거된 아홉 가지 성령의 은사 중 하나인 “믿음의 은사”를 주시는 것이다. 성령의 모든 은사와 마찬가지로, 믿음의 은사는 오직 성령님의 뜻대로 역사한다(고전 12:11을 보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특별한 믿음을 주셔서 닥쳐오고 있는 폭풍을 꾸짖게 하시지 않는 한, 당신은 그 길에 들어서서 믿음으로 행하려 해서는 안 된다. 당신은 그 곳을 벗어나야 한다! 나는 또한 당신이 하나님의 보호를 위해 기도하고, 그분께서 심판하시는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기를 간구하고, 그들이 회개할 수 있도록 그들의 목숨을 살려 주시기를 간구하기를 권한다.

바울이 로마로 가는 길에 배가 두 주 동안 광풍을 만났지만, 그는 바람을 꾸짖음으로써 잠잠하게 하지 않았음을 주목하라(행 27:14-44을 보라). 그가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그가 그렇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이 배에 있었던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셔서 배가 파선하였지만 276명 모두 살아남았음을 주목하라(행 27:24, 34, 44을 보라). 나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신 이유가 바울이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기를 하나님께 기도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1]두 가지 가능한 반대 의견에 대한 답변이 있을 수 있다. (1) 유다는 모세의 시체에 대한 미가엘과 사탄 사이의 변론을 언급하였지만, 실제 전투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사실, 유다는 미가엘이 “감히 비방하는 판결을 내리지 못하고 다만 말하되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유 1:9)라고 하였다고 우리에게 알려준다. (2) 엘리사와 그의 사환이 도단 성에서 아람 군대에 의해 포위되었을 때, 엘리사는 하나님께 그의 사환의 눈을 열어 보게 하여달라고 기도하였다(왕하 6:15-17). 그 결과, 그의 사환은 우리가 영적 영역에서 천사들의 군대의 지휘를 받는다고 가정한 “불말과 불병거”를 보았다. 그러나 이것은 그 천사들이 마귀들과의 전투에 참여했다거나 참여하고자 한다는 것을 명확히 나타내지는 못한다. 천사들은 가끔 하나님께서 악인에게 진노를 내리실 때 사용된다. 예를 들어, 열왕기하 19:35에 기록된 것처럼, 하나님의 천사는 앗수르 군사 185,000명을 쳤다.

[2]예를 들어, 마 1:20; 2:13, 19; 4:11; 눅 1:11-20, 26-38을 보라.

[3]이 전체 구절은 또한 욥이 어떤 사람들이 믿고 있는 것처럼 “자신의 두려움을 통해 사탄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았음을 증거한다. 하나님은 욥에 관하여 사탄에게 “네가 나를 충동하여 까닭 없이 그를 치게 하였어도 그가 여전히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켰느니라”(욥 2:3, 강조 추가)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이 부분에 대해 나의 책, “하나님의 시험” 175-181페이지에서 자세하게 다루었다. 이 책은 우리의 웹 사이트 www.shepherdserve.org에서 영어로 읽을 수도 있다.

[4]또한, 하나님께서 우리가 받는 시험을 제한하심을 나타내는, 곧 우리를 시험하는 자를 제한하심을 나타내는 고린도전서 10:13을 보라.

[5]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정부 지도자를 위해 기도하지 말고 선거에서 투표하지 말라는 뜻일까? 아니, 그렇지 않다. 민주주의에서 하나님의 진노는 우리가 자초한 것과 다름없다. 우리는 우리가 선출한 사람을 세우게 되며 악인은 다른 악인을 선출한다. 이러한 이유로, 의인은 투표해야 한다. 또한, 신구약 성경 모두가 우리에게 정부 지도자를 위해 기도하라는 가르침을 주고 있는데(렘 29:7; 딤전 2:1-4)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누구를 세울지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나타낸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심판은 때로는 악한 정부 지도자의 형태로 내려지며, 대부분 국가는 심판을 받아 마땅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분의 자비하심을 구하여 우리의 나라가 받아야 할 모든 심판을 다 받지 않게 할 수 있다.

[6]하나님께서 바람을 제어하심을 증명하는 다른 성경 구절들은 다음과 같다. 창 8:11, 출 10:13,19; 14:21; 15:10; 민 11:31; 시 48:7; 78:76; 135:7; 147:18; 148:8; 사 11:15; 27:8; 렘 10:13; 51:16; 겔 13:11, 13; 암4:9, 13; 욘 4:8; 학 2:17. 이 같은 예에서, 하나님은 바람을 심판의 수단으로 사용하셨다.

[7]하나님께서 기근을 일으키신다는 추가적인 근거를 보려면, 신 32:23-24; 삼하 21:1; 24:12-13; 왕하 8:1; 시 105:16; 사 14:30; 렘 14:12, 15-16; 16:3-4; 24:10; 27:8; 34:17; 42:17; 44:12-13; 겔 5:12, 16-17; 6:12; 12:16; 14:21; 36:29; 계 6:8; 18:8을 참조하라. 예수님 자신도 하나님께서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신다”고 말씀하셨다(마 5:45). 하나님은 비를 제어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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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th Korean » 영적 전쟁에 관한 현대신화, 1부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God’s Eternal Plan)

제 28 장 (Chapter Twenty-Eight)

하나님은 왜 우리를 창조하셨을까? 그분은 처음부터 몇 가지 목표를 염두에 두셨던 것일까? 그분은 모든 사람이 다 그분을 반역하게 된다는 것을 모르셨다는 말인가? 그분은 우리의 반역 결과 인류가 받게 되는 모든 고통과 슬픔을 예측하지 못하셨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왜 그분은 처음부터 사람을 창조하셨는가?

성경은 우리에게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답을 제공한다. 성경은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기 전부터 그들과 그 후의 모든 사람들이 죄를 지을 것을 알고 계셨다고 말씀한다. 놀랍게도, 그분은 이미 예수님을 통해 타락한 인류를 구원할 계획을 세우셨다. 하나님의 창조 전의 계획에 대해 바울은 이렇게 썼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 1:9, 강조 추가).

하나님의 은혜는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 전부터 우리에게 주신 바 된 것이다. 즉, 하나님은 태초부터 예수님의 희생으로 우리를 구속할 것을 계획하셨다.

마찬가지로, 바울은 에베소에 쓴 서신에서 이렇게 썼다.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엡 3:11, 강조 추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하나님께서 예상하시지 못한 것을 해결하기 위해 신속하게 고안해낸 계획이 아니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려는 영원한 목적을 가지셨을 뿐 아니라, 그분은 또한 그분의 은혜를 받을 사람들을 영원 전부터 아셨으며 심지어 그들의 이름을 책에 기록까지 하셨다.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계 13:8, 강조 추가).

아담의 타락은 하나님께 놀라운 일이 아니다. 당신과 나의 타락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지을 줄을 아셨다. 그리고 그분은 또한 누가 회개하고 주 예수님을 믿을지를 아셨다.

다음 질문(The Next Question)

만일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믿을 것이지만, 어떤 사람은 그분을 거부하리라는 것을 미리 아셨다면, 왜 그분은 예수님을 거부할 사람들을 만드셨을까? 왜 그분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을 사람들만 만드시지 않았을까?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이해하기가 어렵기는 하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첫째,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실 때 자유의지를 주셨음을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모두 하나님을 섬길지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뜻이다. 우리가 순종 또는 불순종하거나, 회개 하거나 또는 회개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예정하신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선택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모두 반드시 시험을 받아야 한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가 어떻게 할 것인지를 미리 아신다. 그러나 그분께서 미리 아시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느 시점에 반드시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모든 축구 경기가 진행되기 전에 그 결과를 미리 아신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경기 결과를 아시기 위해서는, 이런 결과가 있는 경기가 반드시 진행되어야만 한다. 하나님은 진행되지 않은 축구 경기의 결과를 아시지 못하며 아실 수도 없다. 왜냐하면, 진행되지 않은 경기에는 결과가 있을 수 없으므로 그 결과를 미리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자유의지를 가진 사람이 결정을 내릴 기회가 있고 또 결정을 내렸을 때에만 그들의 결정을 미리 아실 수 있다. 그들은 반드시 시험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이 때문에 하나님은 그분께서 미리 아시는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만 만드시지 않았다(그리고 만드실 수도 없다).

또 다른 질문(Another Question)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순종하는 사람만 원하신다면, 왜 그분은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는가? 왜 그분은 우리를 영원히 순종하는 로봇과 같이 만들지 않으셨는가?”라는 질문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그분은 우리와 부자간의 관계를 갖고 싶어 하시며 로봇과 같은 자식을 둔 아버지는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자유의지로 그분을 사랑하기로 선택한 자녀들과 영원한 가족을 이루는 것이다. 성경에 따르면, 그것은 하나님이 예정하신 계획이다.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4하-5, 강조 추가).

만일 당신이 하나님이 로봇한테서 얼마나 큰 기쁨을 얻는지를 알고 싶으면, 손에 인형을 잡고 인형에게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을 해달라고 요구해보라. 당신은 결코 마음에 따뜻함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 인형은 당신이 그에게 하라고 한 말만 할 뿐이다. 그는 당신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이 특별한 것은 그것이 자유의지를 가진 사람의 선택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인형과 로봇은 사랑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를 위해 아무 것도 결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가 마음에서부터 그분을 사랑하고 섬기기를 선택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그분은 자유의지를 가진 사람을 만들 수밖에 없다. 이러한 결정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어떤 자유의지를 가진 사람은 그분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을 선택하지 않는 위험을 감수하게 한다. 그리고 그런 자유의지를 가진 사람들은 일생 동안 그들에게 그분의 창조, 그들의 양심, 복음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드러내신 하나님을 거역하였고 결국 하나님의 진노와 의로운 심판을 대면해야 할 것이다.

지옥의 사람은 아무도 하나님께 비난의 손가락질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죄의 형벌을 피할 수 있는 길을 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딤전 2:4; 벧후 3:9을 보라). 그러나 각 사람은 반드시 자신을 위해 결정해야 한다.

성경의 예정론(Biblical Predestination)

그러나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우리를 선택하시고 예정하셨다는 신약 성경의 말씀들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일부 사람들은 불행하게도 개개인의 행위와는 관계없이 하나님은 특정 사람들만 구원하시고 나머지는 멸망하도록 내버려 두셨다고 생각한다. 즉, 누가 구원받고 누가 멸망할지를 하나님이 선택하신다는 뜻이다. 이런 생각은 분명히 자유의지의 개념을 없애는 것이며 성경은 이렇게 가르친 적이 없다. 성경에서 예정에 대해 어떻게 가르치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실로,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셨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이 사실은 반드시 규명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그분의 인도하심 아래에 회개하고 복음을 믿기로 자기 절로 선택한 사람을 미리 아셨으며 창세 전 부터 그들을 구원하시려고 선택하셨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이 선택하신 사람들에 대해 말한 것을 읽어보자.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고발하되 주여 그들이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을 헐어 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그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냐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므로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롬 11:2-5, 강조 추가).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그분 자신을 위하여 칠천 명을 남겨 두었다”고 말씀하셨음을 주목하라. 그러나 그 칠천 명은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기로 먼저 선택한 사람들이다. 바울은 이와 같이 지금도 하나님의 택하심을 따라 믿는 유대인들이 남아있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렇다. 하나님은 우리를 선택하셨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기절로 먼저 올바른 선택을 한 사람들을 선택하셨다”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선택하셨으며, 그것은 그분께서 창세 전에 계획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미리 아심(God’s Foreknowledge)

이와 같은 맥락에서, 성경은 또한 하나님은 올바른 선택을 하게 될 사람들을 미리 아신다고 가르친다. 예를 들어, 베드로는 이렇게 썼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벧전 1:1-2중, 강조 추가).

우리는 하나님의 미리 아심에 따라 선택받는다. 바울은 또한 미리 아신 자들에 대해 이렇게 썼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29-30).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기로 선택한 사람들을 미리 아시며, 우리가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아 그분의 거듭난 자녀가 되도록 미리 정하셨다. 그 영원한 계획을 이루시기 위하여 그분은 복음을 통하여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를 의롭게 하시고, 궁극적으로 그분의 나라에서 영화롭게 하실 것이다.

바울은 다른 서신에서 이렇게 썼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3-6, 강조 추가).

이곳에서도 동일한 진리를 볼 수 있다 – 하나님은 창세 전부터 우리가(그분께서 미리 아신 회개하고 믿는 사람들)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거룩한 자녀가 되도록 미리 정하셨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일부 사람들은 성경의 다른 모든 가르침을 무시하고 이 말씀을 왜곡해서 해석한다. 그들은 우리가 자기의 구원에 있어서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주장한다 – 그 선택은 하나님께만 있다고 본다. 그들은 이것을 “무조건적인 택하심”의 교리라고 부른다. 하지만 누가 이렇게 아무 조건도 만족시킬 필요가 없는 “무조건적인 택하심”에 대해 들어보았는가? 자유 국가에서 우리는 자기 마음속의 조건에 근거하여 정치 후보자를 선거한다. 우리가 배우자를 선택할 때에도 매력적인 성품의 조건을 만족시키는 사람을 선택한다. 하지만 일부 신학자들은 우리가 구원받는 것이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택하심”으로 말미암은 것이지 우리가 만족시킨 조건 때문이 아님을 믿기를 요구한다. 따라서 개개인의 구원은 순전히 기회에 불과하며 잔인하고 불의하고 위선적이고 무지한 하나님이란 괴물에게 달려 있다! “무조건적인 택하심”이란 문구는 자체 모순적인데 그것은 택하심이란 단어 자체가 조건적임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만일 그것이 “무조건적인 택하심”이라면, 그것은 전혀 택하심이 아닌 순수한 기회일 뿐이다.

큰 그림(The Big Picture)

이제 우리는 큰 그림을 보도록 하자.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지을 것을 아셨고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우리를 구속하실 계획을 세우셨다. 그 계획은 그분의 죄 없는 독생자가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죽을 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그분의 놀라운 사랑과 정의를 드러낸다. 바울이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 2:20)라고 말한 것처럼, 하나님은 회개하고 믿는 우리가 용서받을 뿐 아니라 그분의 아들 예수님처럼 될 것이라고 예정하셨다.

하나님의 거듭난 자녀가 된 우리는 언젠가 불멸의 몸을 받게 될 것이며 완벽한 사회에서 살면서 서로 섬기고 사랑하며 하나님 아버지와 교제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새 땅과 새 예루살렘에서 살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의 희생적인 죽음을 통해 가능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런 계획을 예정하심을 찬양한다!

현재의 삶(This Present Life)

일단 우리가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을 이해하게 되면, 우리는 현재의 삶에 대해 좀 더 완전하게 이해할 수 있다. 주요하게, 이 세상의 삶은 모든 사람을 시험하는 역할을 한다. 각 사람의 선택은 그가 하나님과 함께 영생을 누리게 되는 그분의 자녀가 받는 축복과 특권을 누릴 수 있는 여부를 결정한다. 스스로 자기를 낮추고 하나님의 그림에 복종하여 회개하고 믿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눅 18:14을 보라). 현재의 삶은 주요하게 미래의 삶을 위한 시험이다.

이것은 또한 우리가 현재의 삶 속에 존재하는 일부 오묘함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예를 들어, 많은 사람들이 “왜 사탄과 마귀들이 사람을 시험하도록 허용되었는지?” 또는 “사탄이 천국에서 쫓겨날 때 왜 이 땅에 올 수 있도록 허용되었는지?”에 대해 궁금해한다.

우리는 심지어 사탄이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그분의 목적을 위해 사용됨을 볼 수 있다. 사탄은 주요하게 인간에게 선택사항으로 제공된다. 만일 예수님을 섬기는 것이 우리의 유일한 선택이라면, 모든 사람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예수님을 섬길 것이다.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투표를 요구하지만, 후보가 한 명밖에 없는 선거와 같다. 그 후보는 만장일치로 선출 될 것이지만, 그를 선거한 사람들로부터 사랑 심지어 호감을 받는지에 대해 확신을 가질 수 없다! 그들은 그에게 투표하는 것 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만일 사람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하나님과 경쟁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하나님도 비슷한 상황에 놓이게 될 것이다.

이런 각도에서 고려해보자. 만일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아무런 금지사항도 없는 동산에 두셨다면 어떠했을까? 그러면 아담과 하와는 그들의 환경 때문에 로봇과 같이 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택하심을 받았다”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께 불순종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나는 아담과 하와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라고 말씀하실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 순종할 기회가 없음으로 하여 그분을 향한 그들의 사랑을 입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반드시 자유의지를 가진 사람에게 그분께 불순종할 기회를 주셔야만 그가 그분께 순종하기를 원하는지를 아실 수 있다. 하나님은 아무나 시험하시는 것은 아니다(약 1:13을 보라). 하지만 그분은 모든 사람을 연단하신다(시 11:5; 잠 17:3을 보라). 그분께서 시험하시는 한 가지 방법은 사람들이 사탄의 유혹을 받도록 허용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사탄은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 속에서 그분의 목적을 위해 사용 받게 된다.

완벽한 예(A Perfect Example)

우리는 신명기 13:1-3에서 아래의 말씀을 읽게 된다.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 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 그가 네게 말한 그 이적과 기사가 이루어지고 너희가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따라 섬기자고 말할지라도 너는 그 선지자나 꿈 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강조 추가).

이로부터 우리는 하나님께서 거짓 선지자에게 이적과 기사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 것이 아니라 사탄이 한 짓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허용하시고 사탄의 유혹을 그분 백성들의 마음에 대한 시험으로 사용하셨다.

이 같은 원칙은 사사기 2:21-3:8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순종 여부를 확인하시기 위해 그들이 이방 민족들의 유혹을 받도록 허용하실 때에도 반영되었다. 예수님도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에 가셨다(마 4:1을 보라). 따라서 그분도 하나님께 시험받으셨다. 그분은 죄가 없으시다는 것을 입증받아야만 했으며 유일한 방법은 유혹을 받아 시험받는 것이었다.

사탄이 모든 비난을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Satan Does Not Deserve All the Blame)

사탄은 이미 전 세계 많은 사람들의 마음의 눈을 멀게 하여 복음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도록 기만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사탄이 아무 사람이나 다 속일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반드시 인식해야 한다. 사탄은 단지 자기 자신을 속임수에 빠지도록 허용하고 진리를 거절한 사람들만 속일 수 있다.

바울은 불신자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엡 4:18) 무지해졌다고 선언하였으며 그 근본적인 이유를 밝혔다.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엡 4:17하-19, 강조 추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단지 슬프게도 사탄의 속임수에 빠진 불행한 사람들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인하여 의도적으로 무지해지고 속임 당하기를 원하는 완고한 죄인들이다.

아무도 속임당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자신의 생명이 증명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향한 당신의 마음이 일단 부드러워지면, 사탄은 당신을 계속하여 속일 수 없다.

궁극적으로, 사탄은 그리스도의 천 년 통치 동안에 결박당할 것이며 그때에는 다시는 아무도 미혹하지 못할 것이다.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 잡아서 천 년 동안 결박하여 무저갱에 던져 넣고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 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그 후에는 반드시 잠깐 놓이리라(계 20:2-3).

사탄이 결박당하기 전에는 “만국을 미혹했음”을 주목하라. 그러나 그가 결박당할 때에는 아무도 미혹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일단 놓이게 되면, 그는 만국을 또다시 미혹하게 된다.

천 년이 차매 사탄이 그 옥에서 놓여 나와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리니 그 수가 바다의 모래 같으리라 그들이 지면에 널리 퍼져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두르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태워버리고(계 20:7-9, 강조 추가).

하나님은 왜 사탄을 잠깐 놓아 주실까? 그것은 마음속으로 그리스도를 미워하지만, 그분의 통치 동안 겉으로 순종하는 체했던 사람들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그때에 그들은 공정하게 심판받을 수 있다. 그것은 마지막 시험이 될 것이다.

같은 이유로, 사탄이 지금 이 땅에 영향을 주는 것이 허용된다 – 마음속으로 그리스도를 미워하는 사람들이 드러나게 되며 궁극적으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목적을 성취하시는 데 사탄이 더 이상 필요 없게 되면, 그는 불못에 던져질 것이며 그곳에서 영원한 괴로움을 받게 될 것이다(계 20:10을 보라).

내세를 위한 준비(Preparing For the Future World)

만일 당신이 회개하고 복음을 믿었다면, 당신은 이생에서의 가장 첫 번째인 그리고 가장 중요한 시험을 통과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당신의 지속적인 헌신과 믿음을 결정하시기 위해 당신을 더 이상 시험하시지 않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말라. 오직 “계속하여 믿음에 거하는” 사람들만이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설 수 있다(골 1:22-23).

이 외에도, 성경을 보면 우리가 모두 언젠가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이며 그때에 각 사람이 이 땅에서 순종한 대로 상을 받으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받게 될 미래의 특별한 상급에 합당한지를 결정하기 위해 여전히 시험을 받고 있다. 바울은 이렇게 썼다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롬 14:10-12, 강조 추가).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전 4:5, 강조 추가).

무슨 상급을 받을까?(What Will be the Rewards?)

예수님께 대한 자신의 사랑과 헌신을 증명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상급은 무엇일까?

성경은 적어도 두 가지 상급에 대해 말씀한다 – 하나님의 칭찬과 그분을 섬길 수 있는 더 많은 기회이다. 이 두 가지 상급은 예수님이 하신 귀족의 비유에서 나온다.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그 종 열을 불러 은화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 하니라 그런데 그 백성이 그를 미워하여 사자를 뒤로 보내어 이르되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나이다 하였더라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돌아와서 은화를 준 종들이 각각 어떻게 장사하였는지를 알고자 하여 그들을 부르니 그 첫째가 나아와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 그 둘째가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의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만들었나이다 주인이 그에게도 이르되 너도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이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보소서 당신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 두었었나이다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 주인이 이르되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심판하노니 너는 내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로 알았느냐 그러면 어찌하여 내 돈을 은행에 맡기지 아니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와서 그 이자와 함께 그 돈을 찾았으리라 하고 곁에 섰는 자들에게 이르되 그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 하니 그들이 이르되 주여 그에게 이미 열 므나가 있나이다 주인이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리고 내가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하였느니라(눅 19:12-27).

분명한 것은, 예수님은 먼 나라로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귀인으로 그려졌다. 예수님이 돌아오셨을 때, 우리는 비유에서 귀인이 각 종에게 주신 므나처럼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사, 능력, 사역 그리고 기회에 대해 책임져야 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충성했다면, 우리는 그분의 칭찬을 받게 될 것이며, 비유에서 충성된 종들이 고을을 다스리는 권세를 받은 것처럼 우리도 그분을 도와 이 땅을 다스리는 권세를 받게 될 것이다(딤후 2:12; 계 2:26-27; 5:10; 20:6을 보라).

우리가 받게 되는 미래 심판의 공정성(The Fairness of Our Future Judgment)

예수님이 말씀하신 다른 한 비유는 우리가 미래에 받게 되는 심판의 공정성이 완벽함을 보여준다.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그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 또 제삼시에 나가 보니 장터에 놀고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하니 그들이 가고 제육시와 제구시에도 또 나가 그와 같이 하고 제십일시에도 나가 보니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 이르되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 제십일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이르되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마 20:1-16).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하나님의 모든 종들이 마지막에 다 똑같은 상급을 받게 된다고 가르치신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지 불공평한 것뿐 아니라 많은 다른 말씀들과 모순되기 때문이다(예를 들어, 눅 19:12-27; 고전 3:8을 보라).

오히려 예수님은 하나님의 종들이 받는 상급은 그들이 하나님을 위해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얼마나 많은 기회를 주셨는가에 근거한다고 가르치셨다. 비유에서 한 시간 동안 일한 품꾼도 집 주인이 기회를 주면 하루 종일 일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한 시간 동안 최선을 다해 일한 사람과 하루 종일 일할 기회를 가진 사람은 동일한 상급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분의 종들에게 각각 다른 기회를 주신다. 일부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놀라운 은사를 사용하여 수천 명의 사람들을 섬기고 축복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다. 다른 사람들은 그보다 적은 기회와 은사를 받았지만 충성 되게 주님을 위해 일한다면, 그들은 결국 같은 상급을 받을 수 있다.[1]

결론(The Conclusion)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언젠가는 모든 사람이 이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현명한 사람들은 지금 알고 있으며 그에 따라 행동한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전 12:13-14).

제자 삼는 사역자는 하나님께 전심으로 순종하며 그의 제자들도 똑같이 하도록 동기부여 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

우리가 받게 될 미래의 심판이라는 이 중요한 주제에 관해 진일보 연구하기 위해 아래의 성경 구절을 참고하라. 마 6:1-6, 16-18; 10:41-42; 12:36-37; 19:28-29; 25:14-30; 눅 12:2-3; 14:12-14; 16:10-13; 고전 3:5-15; 딤후 2:12; 벧전 1:17; 계 2:26-27; 5:10; 20:6.

 


[1]이 비유는 젊어서 회개하고 오랜 세월 동안 하나님을 충실하게 섬긴 사람과 생의 마지막 년에 회개하고 하나님을 일 년밖에 섬기지 않은 사람이 같은 보상을 받게 된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그것은 불공평하며 하나님께서 매 개인에게 주신 기회에 기초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그들의 전체 생애를 통해 회개할 기회를 주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많이 일한 사람은 적게 일한 사람보다 더 많은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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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th Korean »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God’s Eternal Plan)

내세(The Afterlife)

제 27 장 (Chapter Twenty-Seven)

대부분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이 죽을 때, 천국이 아니면 지옥에 간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천국이 의인의 최종 거주지가 아니며 음부가 악인의 최종 거주지가 아니라는 것을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이 죽을 때에, 그들의 영과 혼은 즉시 하나님이 거하시는 천국에 올라간다(고후 5:6-8; 빌 1:21-23; 살전 4:14을 보라). 그러나 미래의 어느 시점에 하나님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지으실 것이며 새 예루살렘이 하늘로부터 내려올 것이다(벧후 3:13; 계 21:1-2을 보라). 그곳에서 의인은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악인은 죽으면 즉시 음부로 내려간다. 그러나 음부는 그들의 몸이 부활할 때까지 일시적으로 대기하는 장소이다. 그 날이 되면,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이며 그다음에는 성경에서 게헨나라고 하는 불과 유황으로 불타는 호수에 던져질 것이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이 모든 것에 대해 더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악인이 죽을 때(When the Unrighteous Die)

악인이 죽은 후에 어떻게 되는지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구약 성경의 한 히브리어 단어와 신약 성경의 세 헬라어 단어를 공부해야 한다. 비록 이 히브리어와 헬라어 단어들이 실제로 세 가지 다른 장소를 설명하지만, 그것들은 어떤 성경에서 종종 모두 지옥으로 번역됨으로써 독자들에게 오해의 소지가 될 수 있다.

먼저, 구약 성경의 히브리어 스올에 대해 알아보자.

스올이란 단어는 구약 성경에서 60번 이상 언급되었다. 그것은 분명히 악인들의 죽음 뒤의 거처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고라와 그의 추종자들이 광야에서 모세를 거역했을 때, 하나님은 땅이 입을 열어 그들과 그들의 모든 소유물을 삼키게 함으로써 그들을 처벌하셨다. 성경은 그들이 스올에 빠졌다고 말씀한다.

그들과 그의 모든 재물이 산 채로 스올에 빠지며 땅이 그 위에 덮이니 그들이 회중 가운데서 말하니라(민 16:33, 강조 추가).

나중에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하나님은 스올에 그분의 진노의 불이 일어난다고 경고하셨다.

그러므로 내 분노의 불이 일어나서 스올의 깊은 곳까지 불사르며 땅과 그 소산을 삼키며 산들의 터도 불타게 하는도다(신 32:22, 강조 추가).

다윗 왕은 이렇게 선언하였다.

악인들이 스올로 돌아감이여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든 이방 나라들이 그리하리로다(시 9:17, 강조 추가).

그리고 그는 악인들을 대적하여 아래와 같이 기도하였다.

사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임하여 산 채로 스올에 내려갈지어다 이는 악독이 그들의 거처에 있고 그들 가운데에 있음이로다(시 55:15, 강조 추가).

현명한 솔로몬은 젊은이에게 창녀의 간계에 대하여 경고하였다.

그의 집은 스올의 길이라 사망의 방으로 내려가느니라…그 어리석은 자는 죽은 자들이 거기 있는 것과 그의 객들이 스올

깊은 곳에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잠 7:27; 9:18, 강조 추가).

솔로몬의 다른 잠언들은 우리로 하여금 의인은 결국 스올에서 끝장나지 않는다는 것을 믿게 한다.

지혜로운 자는 위로 향한 생명 길로 말미암음으로 그 아래에 있는 스올을 떠나게 되느니라(잠 15:24, 강조 추가).

네가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의 영혼을 스올에서 구원하리라(잠 23:14, 강조 추가).

마지막으로, 이사야는 지옥에 대한 예수님의 묘사를 예시하여 바벨론 왕에게 그가 스스로 높아지려 했지만 결국 스올에 떨어지게 됨을 말하였다.

아래의 스올이 너로 말미암아 소동하여 네가 오는 것을 영접하되 그것이 세상의 모든 영웅을 너로 말미암아 움직이게 하며 열방의 모든 왕을 그들의 왕좌에서 일어서게 하므로 그들은 다 네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도 우리 같이 연약하게 되었느냐 너도 우리 같이 되었느냐 하리로다 네 영화가 스올에 떨어졌음이여 네 비파 소리까지로다 구더기가 네 아래에 깔림이여 지렁이가 너를 덮었도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하는도다 그러나 이제 네가 스올 곧 구덩이 맨 밑에 떨어짐을 당하리로다 너를 보는 이가 주목하여 너를 자세히 살펴보며 말하기를 이 사람이 땅을 진동시키며 열국을 놀라게 하며 세계를 황무하게 하며 성읍을 파괴하며 그에게 사로잡힌 자들을 집으로 놓아 보내지 아니하던 자가 아니냐 하리로다(사 14:9-17, 강조 추가).

이런 말씀들과 이와 같은 다른 말씀들은 우리로 하여금 스올은 악인들이 죽은 뒤 고통받는 장소임을 믿게 해준다. 그리고 거기에는 더 많은 증거가 있다.

하데스(Hades)

신약 성경의 헬라어 하데스(Hades)는 구약 성경의 히브리어 스올(Sheol)과 같은 장소를 가리키는 것은 분명하다.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 우리는 시편 16:10과 사도행전 2:27을 비교하는 일만 남았다.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시 16:10, 강조 추가).

이는 내 영혼을 음부(Hades)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행 2:27, 강조 추가).

이로부터 보아, 신약 성경에서 하데스가 언급된 모든 열 번의 경우가 항상 부정적인 의미로 씌어졌으며 종종 악인들이 죽은 뒤 감금되어 고통당하는 장소로 씌어졌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마 11:23; 16:18; 눅 10:15; 16:23; 행 2:27; 2:31; 계 1:18; 6:8; 20:13-14을 보라). 다시 말하지만, 이 모든 것은 스올이나 하데스가 악인들이 죽은 뒤에 가는 곳이며 고통 받는 장소임을 보여준다.[1]

예수님은 스올이나 하데스에 가신 적이 있는가? (Did Jesus Go to Sheol/Hades?)

우리가 시편 16:10과 그것을 바울이 사도행전 2:27에 인용한 부분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두 곳에서 스올과 하데스는 같은 장소를 가리키고 있다. 베드로가 오순절 날 한 설교에 따르면, 다윗의 몸은 그리스도의 몸과는 달리 부패하기 때문에, 다윗은 시편 16:10에서 자신을 가리킨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예언적으로 가리킨 것이라고 하였다(행 2:29-31을 보라). 이 때문에, 우리는 시편 16:10은 실제로는 예수님이 그분의 아버지께 하신 말씀이며, 그분의 아버지가 그분의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그분의 몸이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선포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일부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 선언이 그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기 전 3일 동안, 그분의 영혼이 스올 또는 하데스에 갔었다는 증거로 해석한다. 그러나 그것이 암시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그분의 아버지께 하신 말씀을 다시 꼼꼼하게 살펴보라.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시 16:10).

예수님은 아버지께 “나는 내 영혼이 스올/하데스에서 며칠 보낼 것이지만 주께서 내 영혼을 그곳에 버리시지 않는다는 것을 믿습니다”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나는 내가 죽을 때, 주께서 나를 악인들을 대하듯이 나의 영혼을 스올/하데스에 버리시지 않는다는 것을 믿습니다. 나는 단 한 순간도 그곳에서 보내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당신께서 나를 사흘 만에 부활시키시며 나의 몸이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라고 말씀하셨을 것이다.

이 해석은 확실한 보증이 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을 예수님의 몸이 사흘 동안 점점 부패해지다가 부활하실 때에 회복된다고 해석할 수 없다. 오히려, 우리는 그 말씀은 그분의 몸이 죽으시고 부활하실 사이에 어떠한 부패도 겪은 적이 없음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마찬가지로, 그분의 영혼이 스올/하데스에 버려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분께서 스올/하데스에 며칠 동안 머무를 것이나, 궁극적으로 그곳에 버려지지 않는다고 해석할 필요가 없다.[2] 오히려, 그것은 그분의 영혼은 스올/하데스에 버려지는 악인들이 영혼처럼 취급되지 않는다는 의미로 해석 되어야 한다. 그분의 영혼은 그곳에서 단 일 분도 머무르지 않으실 것이다. 또한, 예수님은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 버리지 아니하시며”라고 말씀하셨지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안에 버리지 아니하시며”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음을 주목하라.

이 사흘 동안 예수님의 영혼은 어디에 계셨을까? (Where Was Jesus’ Soul During the Three Days?)

예수님께서 그분은 사흘 동안 땅속에 계실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마 12:40을 보라). 그분의 몸이 사흘 동안 무덤 속에 있었다고 보는 것은 합당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무덤을 “땅속”으로 간주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오히려, 예수님은 그분의 영혼이 땅속 깊은 곳에 계셨음을 뜻하셨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의 영혼이 죽으시고 부활하시기 전까지는 천국에 계신 것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을 때 마리아에게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다”(요 20:17을 보라)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이 점을 확인하셨다.

예수님은 또한 십자가에서 회개한 도둑에게 그날 그가 그분과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라고 알려주셨음을 명심하라(눅 23:43을 보라). 이러한 사실들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영혼이 땅속에서 밤낮 사흘 동안 계셨음을 알 수 있다. 그분은 그 동안 적어도 얼마 동안은 “낙원”이라 부르신 곳에 계셨다. 이 곳은 확실히 고통받는 곳인 스올이나 하데스와 같아 보이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은 나로 하여금 땅속에 스올/하데스 외에 반드시 낙원이라는 곳이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이 생각은 예수님께서 어느 한 번 하신 불의한 사람과 의로운 사람, 부자와 나사로에 관한 이야기에 의해 뒷받침된다.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그가 음부(하데스)에서 고통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수도 없게 하였느니라(눅 16:19-26, 강조 추가).

물론, 나사로와 부자 모두가 죽은 뒤에 몸속에 있지 않고 영/혼으로 그들이 가야할 곳으로 갔다.

나사로는 어디에 있었는가? (Where Was Lazarus?)

부자는 자신이 음부(하데스)에 있음을 발견 하지만, 아브라함과 같이 다른 장소에 있는 나사로를 볼 수 있었음을 주목하라. 사실, 나사로는 어떤 장소가 아닌 “아브라함의 품”에 있었다고 했는데 그것은 가능하게 나사로가 그곳에서 아브라함의 위로를 받았음을 나타내려는 것 같다.

부자와 나사로가 죽은 후, 그들 사이의 거리는 얼마나 되었을까?

성경에서 부자는 나사로가 멀리 있는 것을 보았다고 했으며 그들 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들 사이의 거리는 추측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들 사이의 거리가 땅속에서 천국까지의 거리만큼은 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인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부자가 (신적인 도움이 없이는) 나사로를 볼 수가 없을 것이며, 두 곳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다는 언급을 하여 누구도 두 곳 사이를 오갈 수 없음을 밝힐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또한, 부자는 아브라함을 향해 울부짖었고 아브라함은 그에게 대답하였다. 그들이 “큰 구렁텅이”를 사이 두고 서로 대화할 수 있었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두 곳 사이가 매우 가까웠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이 모든 것은 나로 하여금 나사로가 우리가 천국이라 부르는 곳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땅속의 독립된 곳에 있었다는 것을 믿게 한다.[3] 이 곳은 예수님이 회개한 도둑에게 말씀하셨던 낙원이라 불리는 곳이었음에 틀림없다. 그것은 구약 속의 의인들도 죽은 후에 땅속의 낙원으로 갔다. 그 곳은 나사로가 간 곳이며 예수님과 회개한 도둑이 간 곳이었다.

선지자 사무엘도 죽은 후에 그 곳에 갔음이 명백하다. 사무엘상 28장을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죽은 선지자 사무엘의 영이 사울에게 나타나서 예언하게 허락하실 때, 엔돌의 여인은 사무엘을 “땅에서 올라온 영”(삼상 28:13, 강조 추가)으로 묘사하였다. 사무엘 자신도 사울에게 “네가 어찌하여 나를 불러 올려서 나를 성가시게 하느냐?”(삼상 28:15, 강조 추가)라고 말했다. 분명히, 사무엘의 영/혼은 땅속의 낙원에 갔었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부활 때 낙원이 비워지고 구약 시대에 죽은 의로운 사람들이 예수님과 함께 천국에 올라갔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것 같다. 성경은 예수님이 땅의 낮은 곳에서 천국으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혔던 자들을 사로잡으셨다”고 말씀한다(엡 4:8-9; 시 68:18). 나는 그 사로잡혔던 자들이 낙원에서 살던 모든 사람들이라는 가정을 했다. 예수님은 당연히 스올/하데스의 사람들은 풀어주시지 않았을 것이다![4]

예수님은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설교하셨다(Jesus Preached to Spirits in Prison)

성경은 또한 예수님께서 죽음과 부활사이의 어느 시점에서 육체를 떠난 영들에게 설교하셨다고 우리에게 알려준다. 베드로전서 3장에서 다음의 말씀을 읽게 된다.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벧전 3:18-20).

이 성경 말씀들은 분명히 내가 해답을 가지고 있지 않는 몇 가지 문제를 제기한다. 왜 예수님은 특별히 노아의 홍수 때 죽은 일부 불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선포하셨을까? 예수님은 그들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을까?

어쨌든,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부활까지 밤낮 사흘 동안 낙원에서 보내지 않았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것 같다.

게헨나(Gehenna)

오늘날, 의로운 사람들이 죽을 때에는 그들의 영/혼은 천국으로 바로 올라간다(고후 5:6-8; 빌 1:21-23; 살전 4:14를 보라).

불의한 사람들은 여전히 스올/하데스에서 고통당하고 몸의 부활과 최종 심판, 그리고 스올/하데스와는 다르고 구별된 “불못”에 던져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이 불못으로 묘사된 단어는 자주 지옥으로 번역되는 세 번째 헬라어 단어 게헨나이다. 이 단어는 예루살렘의 외곽에 위치한 힌놈 골짜기의 쓰레기장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그곳은 벌레와 구더기가 욱실거리는 쓰레기 더미이며 어떤 곳은 끊임없이 불타고 연기 난다.

예수님이 게헨나를 말씀하셨을 때, 그분은 사람의 몸이 던져질 장소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다. 예를 들어, 그분은 마태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또한 만일 네 오른 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 5:30, 10:28, 강조 추가).

게헨나와 하데스는 동일한 장소가 아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악인은 몸을 떠난 영/혼의 형태로 하데스에 간다고 말씀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천 년 동안 다스리신 후에야만, 악인들은 몸이 부활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후 불못 또는 게헨나에 던져지게 된다(계 20:5, 11-15을 보라). 또한, 하데스 자체도 언젠가는 불못에 던져지게 된다(계 20:14을 보라). 그러므로 하데스는 반드시 불못이 아닌 다른 장소여야 한다.

타르타로스(Tartaros)

성경에서 지옥으로 번역되는 네 번째 단어는 헬라어 타르타로스이다. 신약 성경에서 그 단어를 단 한 번만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벧후 2:4).

타르타로스는 일반적으로 죄를 지은 천사들을 위한 특별한 감옥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그것은 스올/하데스 또는 게헨나가 아니다. 유다 또한 결박당한 천사에 대해 썼다.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유 1:6).

지옥의 공포(The Horrors of Hell)

회개하지 않은 사람이 죽으면, 그는 더 이상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한다. 그의 운명은 봉인되었다. 성경은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히 9:27)고 말씀한다.

지옥은 영원한 것이기에 거기에 갇혀 있는

사람들은 탈출할 희망이 없다. 악인에 대한 미래의 심판에 대하여 예수님은 “그들은 영벌에, 의인은 영생에 들어가리라”(마 25:46, 강조 추가)라고 말씀하셨다. 악인이 지옥에서 받게 되는 형벌은 의인이 받게 되는 영생만큼 영원하다.

마찬가지로, 바울은 이렇게 썼다.

너희로 환난을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환난을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자기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살후 1:6-9, 강조 추가).

지옥은 끝없는 형벌이기에 그곳은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의 장소이다. 그곳에 영원히 갇힌 악인들은 영원한 죄책감을 안고 꺼지지 않는 불속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겪게 된다 .

예수님은 지옥은 “바깥 어두운 데”이며, “울며 이를 갈게 될” 곳이며, “거기에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마 22:13; 막 9:48)고 말씀하셨다. 아, 우리가 사람들에게 그곳에 대하여 경고하고 그리스도에게만 구원이 있음을 알리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가!

어떤 교단에서는 연옥의 개념에 대하여 가르치는데 그 곳에서 신자는 한동안 고통을 받음으로써 자신의 죄를 제거하고 천국에 합당한 존재가 된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에 대한 가르침은 성경 아무곳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죽음 후의 의인(The Righteous After Death)

신자가 죽을 때에, 그의 영혼은 즉시 천국에 올라가며 주님과 함께 있는다. 바울은 자신의 죽음에 대해 쓸 때 이 사실을 분명하게 썼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빌 1:21-23, 강조 추가).

바울은 자신이 세상을 떠나기를 원하며 세상을 떠나면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될 것이라고 말했음을 주목하라. 그의 영혼은 어떤 무의식 상태에 빠져 부활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불행하게도 일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한다).

또한, 바울은 그에게 있어서 죽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고 말했음을 주목하라. 하지만 그가 죽은 후에 천국에 갈 수 있을 때에만 그럴 것이다.

바울은 또한 고린도에 쓴 두 번째 서신에서 만일 신자의 영혼이 그의 몸을 떠나면, 그는 “주와 함께 있게 된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으로 있을 때에는 주와 따로 있는 줄을 아노니…우리가 담대히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고후 5:6-8).

더 나아가서, 바울은 이렇게 썼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살전 4:13-14).

만일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자는 자들과 함께 오시려면, 그들은 반드시 지금 그분과 함께 천국에 있어야 한다.

천국에 대한 예견(Heaven Foreseen)

천국은 어떤 모습일까? 우리의 유한한 생각으로는 결코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영광을 모두 파악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성경은 우리에게 천국에 대해 흘끗 보여주었을 뿐이다. 신자들에게 있어서 천국에 대한 가장 흥미로운 사실은 우리가 주님과 구주가 되신 예수님과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아버지의 집”에 살게 될 것이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2-3).

우리가 천국에 가면, 우리의 마음은 지금은 이해할 수 없는 많은 신비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바울은 이렇게 썼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요한 계시록은 우리에게 천국의 모습에 대한 최고의 그림을 보여주었다. 천국은 축제와 아름다움, 무한한 변화, 그리고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충만한 곳으로 묘사되었다. 천국은 사람들이 종일 구름 위에 앉아서 하프나 치는 곳이 아니다!

천국에 대한 비전을 보여준 요한은 제일 먼저 하나님의 보좌, 우주의 중심을 주목하였다.

내가 곧 성령에 감동되었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또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쓰고 앉았더라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우렛소리가 나고 보좌 앞에 켠 등불 일곱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뒤에 눈들이 가득하더라 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데 네 생물은 각각 여섯 날개를 가졌고 그 안과 주위에는 눈들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시라 하고 그 생물들이 보좌에 앉으사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돌릴 때에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리며 이르되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음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계 4:2-11).

요한은 지구 위의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천국을 땅의 언어로 설명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직접 천국을 직접 보기 전 까지는 모든 것을 다 이해할 방법이 없다. 그러나 요한의 기록은 확실히 그것을 읽는 사람에게 영감을 줄 것이다.

천국에 관한 말씀 중 가장 감격스러운 구절은 요한 계시록 21장과 22장에서 요한이 새 예루살렘을 묘사하는 부분이다. 새 예루살렘은 현재는 천국에 있지만, 그리스도의 천 년 통치 후에 이 땅에 내려올 것이다.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두 천사가 있고 … 내게 말하는 자가 그 성과 그 문들과 성곽을 측량하려고 금 갈대 자를 가졌더라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길이와 너비가 같은 지라 그 갈대 자로 그 성을 측량하니 만 이천 스다디온이요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같더라…그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그 열두 문은 열두 진주니 각 문마다 한 개의 진주로 되어 있고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라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이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21:10-22:5).

예수님의 모든 추종자들은 계속하여 믿음을 지킨다면 이 모든 경이로움을 기대할 수 있다. 의심할 여지 없이, 우리는 천국에서 서로에게 “아! 이것이 바로 요한이 계시록에서 설명하려고 했던 것이었구나!”라고 말하면서 며칠 동안 보낼 것이다.

 


[1]어떤 사람들은 창세기 37:35, 욥기 14:13, 시편 89:48, 에스겔 9:10과 이사야 38:9-10과 같은 성경 말씀에 근거하여 의인도 죽은 후에 음부에 내려간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런 주장에 사용된 성경 구절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만일 음부가 악인과 의인이 죽은 후에 모두 가는 곳이라면, 음부는 반드시 두 개의 별도의 장소가 있어야 하는데 한 곳은 지옥이고 한 곳은 낙원이어야 한다. 이것은 이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이다.

[2]이 해석에 동의하지 않는 자들은 다음 두 이론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 한 가지 이론은 스올/하데스는 악인 의인의 죽은 후의 거처인데 두 구획으로 나뉘며 한 곳은 고통받는 곳이고, 한 곳은 예수님이 가셨던 낙원이라는 것이다. 다른 한 가지 이론은 예수님이 3일 동안 밤낮 저주를 받아 고통당하여 우리를 대신하여 죄의 형벌을 받으셨다는 것이다. 이 두 이론은 모두 성경에서 증거를 찾기 어렵다. 그리고 예수님이 스올/하데스에서 가신 적이 없다면, 이 두 이론은 모두 필요 없게 된다. 그것이야말로 그분의 선언이 실제로 의미하는 것이다. 두 번째 이론에서처럼 예수님은 죽음과 부활 사이에 3일 동안 밤낮 고통을 당하시지 않았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분께서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으로 속량받은 것이지 스올/하데스에서 받은 고통으로 속량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골 1:22을 보라).

[3]나사로와 부자가 모두 그들의 몸에서 분리하였지만 모두 의식이 있었고 시각, 촉각, 청각과 같은 모든 기능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주목하라. 그들은 고통과 편안함을 경험할 수 있고 과거의 경험을 기억할 수 있었다. 이것은 사람이 죽으면 무의식 상태로 들어가며, 몸이 부활할 때 의식을 되찾는다는 “영혼이 잠잔다”는 이론을 반증한다.

[4]일부 사람들은 에베소서 4:8-9에서 말한 사로잡혔던 자들이 죄에 사로잡혔지만, 지금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하여 자유롭게 된 우리 모두를 가리킨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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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th Korean » 내세(The Afterlife)

금식(Fasting)

제 26 장 (Chapter Twenty-Six)

금식은 일정 기간 음식 또는 음료를 먹지 않는 자발적인 행위이다.

성경은 금식한 사람들의 많은 사례를 기록했다. 어떤 사람들은 금식 기간에 모든 음식을 먹지 않았고 어떤 사람은 특정 음식만 먹지 않았다. 후자의 예는 다니엘의 3주 동안의 금식이 될 것이다. 그는 “좋은 떡을 먹지 아니하고 고기와 포도주를 입에 대지 않았다”(단 10:3).

성경에는 또한 음식과 물을 모두 금식한 사람들의 예가 있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금식은 매우 드물며 3일 이상 지속하는 경우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고려해야 한다. 예를 들어, 모세가 사십 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고 마시지 않았을 때, 그는 하나님의 임재아래에 있었으며 자신의 얼굴이 광채가 나기까지 하였다(출 34:28-29을 보라). 그 번의 금식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두 번째 사십 일 금식을 반복하였다(신 9:9, 18을 보라). 그가 했던 두 번의 금식은 매우 초자연적이기에 아무도 이 점에서 모세를 모방하려고 시도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도움이 없이 사람이 물을 마시지 않고 며칠 이상 생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탈수는 사망에 이르게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건강한 사람들은 음식을 먹지 않고도 몇 주 동안은 생존할 수 있다.

금식하는가? (Why Fast?)

금식의 주요 목적은 기도와 주님을 구하는 데 여분의 시간을 들이는 것을 통해 제공되는 혜택을 얻기 위함이다. 성경은 기도를 떠난 금식을 언급한 적이 없는데 우리가 기도하지 않고 금식만 하는 것은 무의미한 것임을 알게 해준다.[1] 예를 들어, 사도행전에서 언급한 두 번의 금식은 모두 기도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행 13:1-3). 안디옥 교회의 선지자들과 교사들은 단순히 “주를 섬겨 금식하였다.” 그렇게 했기 때문에, 그들은 결국 예언과 계시를 받고 바울과 바나바를 그들의 첫 선교여행에 보냈다. 두 번째 경우에서, 바울과 바나바는 갈라디아의 새로운 교회에서 장로들을 임명하였다.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 하며 그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위탁하고(행 14:23).

아마도 이 두 번째 경우에서, 바울과 바나바는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를 택하기 위해서 밤새도록 기도하신(눅 6:12을 보라) 모범을 따라 했을 것이다. 영적 지도자를 세우는 것과 같이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에는 한 사람이 주님의 인도하심을 확신할 때까지 기도해야 하는데 금식은 이런 기도를 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줄 수 있다. 만일 신약 성경이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잠시 동안 분방할 것을 권하였다면(고전 7:5을 보라), 우리는 잠시 동안 금식하는 것이 똑같은 목적을 위함임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2]

따라서 우리가 영적인 의사결정을 위하여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위하여 기도할 때, 금식은 그 목적을 이루도록 도와준다. 많은 다른 필요를 위한 기도를 위한 금식은 상대적으로 짧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하기 위해서 금식을 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기” 어렵기 때문에 인도하심을 위한 기도는 더 많은 시간을 소요한다. 왜나하면, 하나님의 음성은 종종 우리 안에 있을 수 있는 어떤 잘못된 욕망이나 동기, 또는 헌신의 부족과 싸우기 때문이다. 인도하심에 대한 확신을 얻기 위해서는 기도를 연장할 필요가 있는데, 이 경우 금식은 도움이 된다.

물론, 그냥 좋은 목적을 위해 기도하는 데 시간을 보내는 것은 영적인 유익을 가져다 준다. 그 이유 때문에, 우리는 금식이 기도와 결합되어 있는 한, 그것을 우리의 영적인 힘과 효과성을 위한 훌륭한 수단으로 간주해야 한다.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초기의 사도들이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썼음”(행 6:4)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우리에게 적어도 그들의 영적인 힘과 효과성의 비밀의 일부를 확실히 보여주고 있다.

일부 잘못된 금식 이유(Wrong Reasons to Fast)

우리가 새 언약에서 금식에 대한 몇 가지 성경적 이유를 확립한 이상, 금식에 대한 몇 가지 비성경적인 이유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금식하는 것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응답하실 가능성을 높이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기도 응답의 주요 방법은 금식이 아닌 믿음이라고 말씀하셨다(마 21:22을 보라). 금식은 “하나님의 팔을 비트는” 수단이거나 하나님께 “당신이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으면 나는 굶어 죽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성경적인 금식이 아니라 단식 투쟁이다! 다윗이 밧세바가 낳은 그의 아픈 아기를 살려 주시기를 며칠 동안 기도하였으나 다윗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 때문에 아기가 죽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금식은 그의 상황을 개변시키지 못했다. 다윗은 믿음으로 기도한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는 아이가 살 것이라는 아무런 약속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과가 보여주듯이, 실제로 그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기도와 금식을 하였다.

금식은 부흥의 필수 조건이 아니다. 신약 성경에서 아무도 부흥을 위하여 금식한 적이 없다. 오히려 사도들은 단순히 예수님께 순종하여 복음을 전파하였다. 만일 한 성이 영접하지 않으면, 그들은 예수님께 순종하여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고 다른 성으로 갔다(눅 9:5; 행 13:49-51을 보라). 그들은 그곳에 머물며 “영적인 요새를 무너뜨리기” 위해 노력하면서 부흥이 오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그러나 금식 기도가 복음 사역을 하는 사람들에게 확실히 유익이 되며 그들로 하여금 부흥을 위한 효과적인 일꾼이 되게 한다. 우리는 교회 역사에서의 영적 거인들은 모두 기도와 금식의 습관을 가진 사람들임을 볼 수 있다.

금식한다는 것은 “육체의 욕망을 내려놓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먹으려는 욕구는 갈라디아서 5:19-21에 나와 있는 명백한 “육체의 소욕”과는 달리 합법적이며 죄가 아닌 욕구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금식은 자기를 다스리는 훈련이며, 이 같은 미덕은 육체를 따르지 않고 성령님을 따르는 데에도 필요하다.

자신의 영성을 증명하거나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헌신을 광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금식은 시간 낭비이며 위선의 표시이다. 이것은 바리새인들이 금식하는 이유이며, 그 때문에 예수님은 그들을 비난하셨다(마 6:16; 23:5을 보라).

어떤 사람들은 사탄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 금식한다. 그러나 그것은 비성경적인 것이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으로 사탄을 대적하면, 그들은 우리를 피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약 4:7, 벧전 5:8-9을 보라). 금식이 필요하지 않다.

하지만 예수님은 어떤 귀신들은 오직 “기도와 금식”으로만 쫓아낼 수 있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이 말씀은 단지 귀신 들린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말씀이지, 사탄의 개인적인 공격에 대적함으로써 승리를 얻어야 할 모든 신자들에 대한 말씀이 아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금식으로 마귀에 대해 더 큰 권한을 얻을 수 있음을 나타내지 않는가?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귀신 들린 아이를 능히 고치지 못함을 들으신 후, 처음 하신 일이 제자들의 믿음이 없음을 책망하신 것임을 기억할 것이다(마 17:17을 보라). 제자들이 예수님께 왜 자기들이 실패했는지를 물었을 때, 그분은 그들에게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하셨다(마 17:20을 보라). 그분은 또한 각주로 “이런 종류의 귀신들은 기도와 금식이 없이는 쫓아낼 수 없다”(마 17:21)라고 추가하셨을 수 있다. 내가 그분께서 이런 말씀을 각주의 방식으로 추가하셨을 있다고 하는 것은 그 말씀이 마태복음의 원문에 포함되지 않았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성경 (새로운 미국 표준 성경 the New American Standard Version, 높이 평가받고 있는 영문 번역본)의 여백에는 대부분의 마태복음 원문에는 그런 말씀이 없다고 씌어 있다. 그 뜻인즉 예수님은 “이런 종류의 귀신들은 기도와 금식이 없이는 쫓아낼 수 없다”라는 말씀을 가능하게 하신 적이 없음을 의미한다. 영어권 사람들은 그들의 언어로 된 성경의 여러 가지 번역본을 읽을 수 있는 혜택이 있다. 하지만 다른 언어로 된 많은 성경 번역본은 원래의 히브리어와 헬라어 사본을 직접 번역한 것이 아니라 400여 년 전에 번역된 킹 제임스 버전을 번역한 것이다.

같은 사건에 대하여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은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막 9:29)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새로운 미국 표준 성경의 여백에는 많은 사본에는 “그리고 금식”이라는 말씀이 추가되어 있음을 밝히고 있다.

예수님께서 실제로 그 말씀을 하셨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한 사람이 모든 귀신을 쫓아내기 위해서는 금식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만일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에게 귀신을 쫓아내는 권능을 주신 것처럼(마 10:1을 보라) 한 사람에게 그런 권능을 주셨다면, 그 사람은 이미 권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금식하는 것이 자신의 권능을 더 늘려줄 수 없다. 물론, 금식은 그로 하여금 기도하는 데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함으로써 영적인 민감성을 높아지고 하나님께서 주신 권능 안에서 아마 믿음도 커가게 될 것이다.

또한, 예수님은 실제로 종류의 귀신들에 대해서만 그러한 말씀을 하셨음을 명심하라. 비록 예수님의 제자들이 한 특정 종류의 귀신들을 쫓는 데는 실패했지만, 그들은 성공적으로 다른 많은 귀신을 쫓아냈다(눅 10:17을 보라).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우리에 대한 사탄의 공격을 이기기 위해서 금식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금식에 관한 지나친 강조(Overemphasis Regarding Fasting)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불행하게도 금식을 하나의 종교로 만들고, 그것을 자신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에서 지배적인 부분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신약 서신에서는 단 한 번도 금식을 언급한 적이 없다.[3] 신자들에게 금식을 어떻게 하고 언제 해야 할지에 대해 가르친 적이 없으며 금식할 것에 대한 격려도 없다. 이것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따르는 데 있어서 금식이 중요한 요소가 아님을 보여준다.

구약에서 금식은 더 자주 언급되었다. 가장 많이는 한 사람이 죽었을 때와 같이 애도의 기간이거나 회개하는 기간, 혹은 국가적인 또는 개인적인 위기 때 하는 절박한 기도와 연결되었다(삿 20:24-28; 삼상 1:7-8; 7:1-6; 31:11-13; 삼하 1:12; 12:15-23; 왕상 21:20-29; 대하 20:1-3; 스 8:21-23; 10:1-6; 느 1:1-4; 9:1-2; 에 4:1-3, 15-17; 시 35:13-14; 69:10; 사 58:1-7; 단 6:16-18; 9:1-3; 요 1:13-14; 2:12-17; 욘 3:4-10; 슥 7:4-5을 보라). 나는 이러한 것들이 오늘날 금식을 타당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라고 믿는다.

구약 성경은 또한 같은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것과 같은 더 중요한 계명에 순종하지 않으면서 금식에만 치중하는 것은 균형을 잃은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사 58:1-12; 슥 7:1-14을 보라).

물론, 예수님은 금식을 지나치게 조장시켰다는 비난을 받지 않을 것이다. 그분은 금식하지 않는다고 바리새인들에게 비난 받으셨다(마 9:14-15을 보라). 그분은 그들이 더 중요한 영적인 일들보다 금식을 더 중히 여김을 꾸짖으셨다(마 23:23; 눅 18:9-12을 보라).

반면에,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그분을 따르는 자들에게 금식에 관하여 말씀하셨다. 그분은 그들이 올바른 동기로 금식할 것을 분부하셨는데, 이것은 그분께서 그들이 정기적으로 금식할 줄을 예상하셨음을 나타낸다. 그분은 또한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들의 금식에 대해 보상하심을 약속하셨다. 그분 자신도 어느 정도 금식하셨다(마 17:21을 보라). 그리고 그분은 그분의 제자들이 금식할 때가 올 것이며 그 때는 바로 그분이 그들을 떠나실 때라고 말씀하셨다(눅 5:34-35을 보라).

얼마나 오랫동안 금식해야 하는가?( How Long Should One Fast?)

내가 이전에 말했듯이, 성경에 기록된 사십 일 동안의 금식은 모두 초자연적인 것으로 분류할 수 있다. 우리는 이미 모세가 두 번 사십 일 동안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금식한 것을 살펴보았다. 엘리야도 사십 일 동안 금식하였으나 그는 미리 천사가 주는 떡을 먹었다(왕상 19:5-8). 예수님 사십 일 동안의 금식에도 매우 초자연적인 요소가 있다. 그는 초자연적으로 성령님에 의해 광야로 인도받으셨다. 그분의 금식이 끝날 무렵 사탄의 초자연적인 유혹을 경험하셨다. 또한, 금식이 끝날 때에 천사들이 그분의 수종을 들었다(마 4:1-11을 보라). 사십 일 금식은 성경의 규범이 아니다.

만일 한 사람이 자발적으로, 주님을 찾는 데 시간을 보내기 위한 목적으로 한 끼의 음식을 먹지 않는다면, 그는 금식한 것이다. 금식을 단지 금식한 날 수로 판단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우리는 이미 살펴보았던 사도행전에서 언급한 두 번의 금식은 분명히 긴 시간의 금식이 아니었다(행 13:1-3; 14:23을 보라). 그것은 단지 한 끼의 금식일 수 있다.

금식은 주님을 추구하기 위한 목적으로 주로 하므로 나는 당신이 필요한 만큼 오랫동안 금식하여 당신이 하나님께 구한 것을 받을 때까지 하기를 권장한다.

금식은 하나님이 당신께 말씀하시기를 강요하는 것이 아님을 기억하라. 금식은 단지 성령님에 대한 당신의 민감도를 향상시킬 수 있다. 당신이 금식하는 여부를 떠나서 하나님은 당신에게 말씀하신다. 우리의 어려움은 자신의 욕망 속에서 그분의 인도하심을 분별해내는 것이다.

몇 가지 실용적인 조언(Some Practical Advice)

금식은 일반적으로 인체에 여러 면에서 영향을 미친다. 금식함으로써 사람들은 연악함, 피로, 두통, 메스꺼움, 현기증, 복부 경련 등을 경험할 수 있다. 만일 한 사람이 커피, 차 또는 다른 카페인 음료를 마시는 습관이 있다면, 이러한 증상 중 일부는 카페인 섭취를 중단한 데 있다. 이런 경우에 속한 사람들은 금식하기 며칠 전부터 그런 음료를 마시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 만일 한 사람이 정기적 또는 반 정기적으로 금식하다 보면, 그는 보통 적어도 처음 두 주에 어느 정도 연약함을 경험하게 되지만, 점차 자신의 금식이 쉬워짐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금식할 때 탈수하지 않기 위해서는 충분한 물을 마시도록 해야 한다.

금식을 멈출 때에는 조심스럽게 천천히 진행해야 한다. 그리고 오랫동안 금식했을수록 멈출 때에는 더 조심해야 한다. 만일 한 사람의 위장이 사흘 동안 단단한 음식을 소화하지 않았다면, 소화하기 어려운 음식을 섭취하여 금식을 멈추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다. 그는 소화하기 쉬운 음식과 과일 주스로 시작해야 한다. 긴 시간의 금식은 소화기계통이 다시 먹는 것을 조정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필요하게 하지만, 한 두 끼의 금식은 특별한 조정 기간이 필요 없다.

일부 사람들은 적당한 금식은 실제로 우리 몸의 건강을 증진하는 수단임을 확신하는데 나도 그중의 한 명이다. 나는 아픈 사람들이 금식하면서 치유받았다는 증언을 많이 들었다. 금식은 몸을 휴식시키고 정화하는 수단으로 여겨진다. 아마 이 때문에 사람들이 첫 번째 금식 때 가장 힘들어 할 것이다. 금식한 적이 없는 사람들은 인체 내의 정화를 가장 많이 필요로 할 수 있다.

사람은 일반적으로 2~4일 동안 금식하면 배고픔을 느끼지 못한다. 배고픔이 다시 시작하는 것은(보통 몇 주 후), 조심스럽게 금식을 중단해야 한다는 신호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신체가 저장된 지방을 다 활용하고 이제는 필수적인 세포를 활용하는 기아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사십 일 동안 금식하신 후 주리셨다고 우리에게 알려준다(마 4:2을 보라).

 


[1]나는 이레 동안 금식했지만 아무런 영적인 혜택도 받지 못한 적이 있다. 그 이유는 내가 영적인 목적이 없었고 기도하는데 여분의 시간을 할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킹 제임스 버전의 고린도전서 7:5에서는 부부가 “금식과 기도”에 전념하기 위하여 동의를 구해 얼마 동안 성관계를 갖지 말라고 명령하고 있다. 이 구절을 번역한 대부분의 현대 영어 번역본은 금식을 언급하지 않고 기도만 언급했다.

[3]유일한 예외는 고린도전서 7:5에서 결혼한 부부의 금식에 대한 바울의 언급일 것이다. 하지만 성경의 영어 번역본 중에서 이것은 다만 킹 제임스 버전에서만 발견된다. 비자발적인 금식에 대한 언급은 사도행전 27:21, 33-34, 고린도전서 4:11과 고린도후서 6:5; 11:27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런 금식은 영적인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어려운 상황이거나 먹을 것이 없어서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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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징계(God’s Discipline)

제 25 장 (Chapter Twenty-Five)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히 12:3-13).

히브리서 저자의 계시에 따르면,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는 모든 자녀를 징계하신다. 만일 우리가 그분께 징계받은 적이 없다면, 우리가 그분의 자녀가 아님을 나타낸다. 따라서 우리는 그분의 징계에 대해 알고 민감해야 한다. 하나님의 축복과 선하심에만 초점을 두는 일부 자칭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부정적인 상황들을 하나님의 뜻과는 관계없이 모두 마귀의 공격으로 해석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징계를 통하여 사람들을 회개하게 한다면 이런 생각은 큰 오류가 될 수 있다.

좋은 부모라면 자녀들이 배워가고, 성숙해지고, 성인으로서의 책임 있는 삶에 준비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자녀들을 징계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하고, 그분을 더 잘 섬기고, 그분의 심판대 앞에 설 준비가 되게 하기 위해 우리를 징계하신다. 그분이 우리를 징계하시는 것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며 우리가 그분의 거룩하심을 닮기를 바라시기 때문이다. 사랑이 풍성하신 하늘 아버지는 우리의 영적 성장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셨다. 성경은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라고 말씀한다.

어떤 자식도 부모의 채찍질을 즐기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가 좀 전에 읽다시피 우리가 하나님께 징계받을 때의 경험은 “즐거운 것이 아닌 슬픈 것이다.” 그러나 결국, 우리는 더 좋아질 것이다. 왜냐하면, 징계가 “의의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언제 어떻게 우리를 징계하시는가? (When and How Does God Discipline Us?)

모든 좋은 아버지들처럼,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들이 불순종할 때에만 그들을 징계하신다. 우리는 하나님께 불순종할 때마다, 그분의 징계를 받을 위험에 처해 있다. 그러나 주님은 매우 자비로우시며 일반적으로 우리에게 회개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제공하신다. 그분의 징계는 일반적으로 우리의 반복적인 불순종과 그분의 반복적인 경고 다음에 나타난다.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를 징계하시는가? 우리는 앞 장에서 배운 것처럼, 하나님의 징계는 연약함, 질병, 심지어 조기 사망의 형태로도 올 수 있다.

그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1:30-32).

우리는 모든 질병이 다 하나님의 징계의 결과라고 결론 내려서는 안된다(욥의 경우가 머리에 떠오를 것이다). 그러나 만일 질병의 타격을 입었다면, 우리가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써 징계를 받지 않았는지 자신의 영적 건강을 점검해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우리가 만일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는 자기 심판을 한다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병이 하나님의 징계의 결과라면, 우리가 회개하면 치유받을 수 있다고 결론짓는 것은 논리적일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의 방식으로, 바울은 우리가 실제로 세상과 함께 정죄 받는 것을 피면 하였다고 말했다. 그는 무엇을 의미했을까? 그는 오직 하나님의 징계는 우리로 하여금 회개하게 인도하며 우리는 궁극적으로 세상과 함께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을 것이다. 천국에 가는 길에 있어서 거룩함은 선택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점을 수용하기 어렵다. 그러나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읽은 사람들은 오직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들만이 그분의 왕국에 들어갈 수 있음을 알고 있다(마 7:21을 보라). 따라서, 우리가 죄를 계속 짓고 회개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영생을 상실할 수 있는 위험이 있다. 우리로 하여금 회개에 이르게 하고 지옥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징계하심을 찬양한다!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서의 사탄(Satan as a Tool of God’s Judgment)

성경의 많은 말씀은 하나님께서 징계의 목적을 위해 사탄을 사용할 수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18장에 나오는 용서하지 않는 종의 비유에서 예수님은 그 종의 주인이 자신이 용서해 준 종이 그의 동료를 용서하지 않음을 알았을 때 “노하였다”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주인은 그의 용서하지 않은 종이 “그 빚을 다 갚을 때까지 옥졸들에게 넘겼다”(마 18:34). 예수님은 엄숙한 말씀으로 이 비유를 마무리 지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 18:35).

누가 “옥졸들”인가? 그것들은 악마와 그의 귀신들일 가능성이 커 보인다. 하나님은 순종하지 않는 자녀를 악마에게 내어줌으로써 그가 회개에 이르게 하실 수 있다. 탕자가 배운 것처럼 고난과 재앙은 사람들을 회개하게 하는 일종 방식이다(눅 15:14-19을 보라).

구약 성경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탄이나 악한 영을 사용하셔서 그분의 진노를 받아 마땅한 사람들을 그들의 삶 속에서 징계하시거나 심판하신 예를 찾을 수 있다. 한 예로, 사사기 9장에서 “하나님은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 사이에 악한 영을 보내시매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배반” (삿 9:23)하게 하는 것을 통하여 기드온의 아들들에 대한 그들의 악행을 심판하셨다.

성경은 또한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사울 왕을 번뇌하게 함으로써 그가 회개하게 하였다고 말씀한다(삼상 16:14). 그러나 사울은 회개하지 않았으며 결국 그의 반역 때문에 전쟁에서 죽고 말았다.

이러한 구약의 두 예에서, 성경은 악한 영은 하나님이 보내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께 부림을 받기를 기다리는 악한 영이 천국에 있다는 말이 아니다. 그보다는 하나님은 단순히 사탄의 악한 영이 죄인에게 고통을 주는 것을 허락하심으로써 그들이 고통 아래에서 회개하기를 바라셨을 가능성이 더 크다.

하나님의 다른 징계방법(Other Means of God’s Discipline)

구약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종종 불순종하는 자녀들의 삶 속에 기근이거나 외적의 지배 아래에 놓이게 하는 것과 같은 문제들을 허락하심으로써 그들을 징계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은 결국 회개하게 되고 그분은 그들을 원수에게서 구원해 주셨다. 그들이 몇 년 동안의 억압과 경고 후에도 회개하기를 거부하면,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외부 세력이 그들을 완전히 정복하고 그들을 포로로 삼아 그들의 땅에서 추방하는 것을 허용하신다.

신약에서, 하나님께서 불순종하는 자녀들의 삶 속에 문제가 생기는 것을 허용하시거나 그들의 원수가 그들을 괴롭히는 것을 허용하심으로써 그들을 징계하시는 것은 당연히 가능하다. 예를 들어, 이 장의 첫 부분에 인용한 하나님의 징계(히 12:3-13)에 관한 말씀은 그 당시 히브리 신자들이 믿음 때문에 박해를 받았던 배경 속에서 한 것이다. 모든 박해가 다 불순종 때문인 것은 아니다. 모든 경우는 개별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하나님의 징계에 대한 올바른 반응(Rightly Reacting to God’s Discipline)

이 장의 시작 부분에 인용된 권고에 따르면, 우리는 하나님의 징계에 두 가지 방식으로 잘못 반응할 수 있다. 우리는 “주님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거나”,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할 수 있다”(히 12:5). 만일 우리가 주님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긴다는 것은” 우리가 징계를 인식하지 못했거나 경고를 무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징계 때문에 낙심한다는 것은 우리가 그분의 징계가 너무 엄격하다고 생각하여 그분을 기쁘시게 하려는 노력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어느 쪽의 반응도 잘못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의 유익을 위해 징계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징계가 사랑임을 인식했을 때에는 회개하고 그분의 용서를 받아야 한다.

우리는 회개하고 나면, 하나님께서 징계를 멈추시기를 기대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비록 주님께 자비와 도우심을 구할 수는 있어도, 우리의 죄에 대한 필연적인 대가를 면해주기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한 자에게 응답하신다(사 66:2을 보라). 성경은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시 30:5)라고 약속하셨다.

이스라엘을 심판하신 후, 하나님은 이렇게 약속하셨다.

내가 잠시 너를 버렸으나 큰 긍휼로 너를 모을 것이요 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렸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네 구속자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사 54:7-8).

하나님은 선하시며 자비로우시다!

하나님의 징계에 관한 보다 많은 연구를 위하여 아래의 말씀들을 참조하라. 역대하 6:24-31, 36-39; 7:13-14; 시편 73:14; 94:12-13; 106:40-46; 118:18; 119:67, 71; 예레미야 2:29-30; 5:23-25; 14:12; 30:11; 학개 1:2-13; 2:17; 사도행전 5:1-11; 요한계시록 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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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례(The Sacraments)

제 23 장 (Chapter Twenty-Three)

예수님은 교회에 두 성례를 주셨다. 물세례(마 28:19을 보라)와 주의 만찬(고전 11:23-26을 보라)이다. 먼저 물세례에 대해 살펴보자.

새 언약에서, 모든 신자는 세 가지 부동한 세례를 경험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의 세례, 물세례와 성령세례이다.

사람은 거듭날 때 자동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례를 받는다. 즉, 그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한 구성원이 된다.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고전 12:13; 롬 6:3; 엡 1:22-23; 골 1:18, 24을 보라).

성령세례는 구원받은 후에 받게 되며, 모든 신자는

이 세례를 받을 수 있으며 또한 받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모든 신자는 회개하고 주 예수를 믿은 후 가능한 한 빨리 물세례를 받아야 한다. 물세례는 새 신자의 첫 번째 순종의 행동이어야 한다.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막 16:15-16, 강조 추가).

초대 교회에서 세례를 받으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매우 중요하게 여겨졌다. 새로운 회심자는 개종한 후 거의 예외 없이 즉각적으로 세례를 받았다(행 2:37-41; 8:12-16, 36-39; 9:17-19; 10:44-48; 16:31-33; 18:5-8; 19:1-5을 보라).

세례에 대한 가지 비성경적인 생각들(Some Unscriptural Ideas About Baptism)

일부 사람들은 새 신자에게 세례를 베풀 때 몇 방울의 물을 뿌리는 것에 그치는데 이것이 과연 정확할까? 신약 성경에서 세례로 번역된 동사는 헬라어로baptizo인데 이 단어는 문자적으로 “잠긴다”는 뜻이다. 따라서 물세례를 받는 사람들은 단순히 몇 방울의 물에 뿌림 받는 것이 아니라 물속에 잠겨야 한다. 우리는 곧 살펴보게 될 기독교 세례의 상징적 의미도 잠겨야 한다는 관점을 지지한다.

일부 사람들은 유아 세례를 베푸는데, 성경에는 유아 세례에 대한 예가 없다. 이런 세례는 사람이 세례를 받은 후 거듭난다는 “세례 재생”의 교리에서 유래했다. 성경은 사람이 세례를 받기 전에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고 명확하게 가르친다. 따라서 회개하고 예수님을 따를 만큼 충분히 큰 아이들은 세례를 받을 자격이 있지만, 유아와 어린아이들은 없다.

일부 사람들은 한 사람이 예수님을 믿어도 물세례를 받기 전까지는 구원받지 못한다고 가르친다. 그것은 성경에 따르면 사실이 아니다. 사도행전 10:44-48과 11:17에서, 우리는 고넬료의 가족들은 물세례를 받기 전에 구원받고 성령세례를 받았음을 읽을 수 있다. 한 사람이 구원을 받기 전에 성령세례를 받는 것은 불가능하다(요 14:17을 보라).

일부 사람들은 사람이 그들의 특정 공식에 따라 세례를 받지 않으면 진정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고 가르친다. 성경은 올바른 세례를 위해 따라야 할 구체적인 의식을 제공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일부 사람들은 신자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마 28:19)이 아닌 “예수님의 이름”(행 8:16)으로 세례를 받아서는 구원받지 못한다고 가르친다. 이런 사람들은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 바리새인들과 다를 바 없다. 세상은 복음을 듣기를 기다리는데 그리스도인들은 세례를 받을 때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를 논쟁하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비극인가!

세례의 성경적인 상징(The Scriptural Symbolism of Baptism)

물세례는 새 신자의 삶에 이미 발생한 여러 가지 일들을 상징한다. 가장 단순하게,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죄를 씻어버렸다는 것을 나타내며, 지금은 하나님 앞에서 깨끗해졌음을 나타낸다. 아나니아는 사울(바울)이 회개한 후 그에게 가서 이렇게 말하였다.

이제는 왜 주저하느냐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행 22:16, 강조 추가).

둘째로, 물세례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장사되고 부활했음을 상징한다. 우리가 일단 거듭나고 그리스도의 몸 가운데 있다면, 우리는 그 시점부터 “그리스도 안에”있다고 하나님에 의해 간주된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우리를 대리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예수님이 성취하신 모든 것을 우리에게 돌렸다. 이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장사되었고, 새로운 사람으로 부활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도 또한 생명 가운데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 6:3-4).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골 2:12).

모든 신자는 물세례를 받을 때마다 이 중요한 진리에 대해 가르침을 받아야 하고, 예수님을 믿은 후에는 가능한 한 빨리 세례를 받아야 한다.

주의 만찬(The Lord’s Supper)

주의 만찬은 구약의 유월절에서 기원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구출하신 날 밤에, 매 가정에게 일 년 된 어린 양을 잡고 그 피를 그들의 집의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뿌리라고 지시하셨다. “죽음의 천사”가 그날 밤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면서, 애굽 땅에 있는 모든 처음 난 것을 죽일 것이며, 이스라엘 백성의 집에 묻은 피를 볼 때에 “넘어갈” 것이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 어린 양을 먹고, 또한 이레 동안 무교병을 먹으면서 그날을 기념하였다. 이 일은 이스라엘의 영원한 규례로 삼아 매년 같은 시간에 기념하도록 하였다(출 12:1-28을 보라). 분명한 것은, 유월절의 어린 양은 고린도전서 5:7에서 “우리의 유월절 양”으로 불리신 그리스도를 대표한다.

예수님께서 주의 만찬을 제정하실 때, 그분과 그분의 제자들은 유월절을 기념하였다. 예수님은 유월절 축제 기간에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써 진정으로 “세상 죄를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 1:29)으로의 부르심을 성취하셨다.

우리가 먹는 떡과 마시는 주스는 우리를 위하여 찢어진 그분의 몸과 우리의 죄 사함을 위해 흘리신 그분의 보혈을 상징한다.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마 26:26-29).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 11:23-26).

때와 방법(When and How)

성경은 주의 만찬에 얼마나 자주 참여해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않았지만, 초대 교회 때에는 그것이 가정교회 모임에서 정기적으로 진행되는 하나의 완전한 식사이었음이 분명하다(고전 11:20-34을 보라). 주의 만찬은 유월절 식사에 그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것을 완전한 식사의 한 부분으로 제정하셨으며, 초대교회 때에는 주의 만찬을 완전한 식사로 먹게 되었다. 오늘날 교회에서도 주의 만찬을 그렇게 먹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교회에서는 “사람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

우리는 마땅히 경외하는 마음으로 주의 만찬에 참여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합당하지 않게 주의 만찬에 참여하는 것은 심각한 죄라고 가르쳤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1:27-32).

우리는 주의 만찬을 취하기 전에 자신을 살펴보도록 권면 받았으며, 만일 어떠한 죄라도 발견하면 그것을 회개하고 고백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지을 수 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자유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시고 피를 흘리셨다. 우리는 고백하지 않은 죄와 함께 그분의 몸과 피를 상징하는 성찬에 참여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렇게 한다면, 고린도 그리스도인들처럼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게 되며 그로 말미암아 병들고 조기 사망에 이를 수 있다. 하나님의 징계를 피하는 방법은 “우리 자신을 살피는 것”이다. 즉, 우리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는 것이다.

고린도 그리스도인들의 주요한 죄는 사랑의 부족이었다. 그들은 서로 말다툼하고 싸우고 있었다. 실제로, 서로에 대한 헤아림이 부족한 것은 심지어 주의 만찬에서도 드러났다. 그들은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음으로 인해 어떤 사람은 시장하나 어떤 사람은 취하였다(고전 11:20-22).

우리가 먹는 떡은 지금은 교회인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한다. 우리는 떡 한 덩어리를 나누는데 그것은 우리가 한 몸임을 상징한다(고전 10:17을 보라). 그리스도의 한 몸을 나타내는 떡을 나눌 때에 한 몸 안의 다른 지체들과 싸우고 분쟁하는 것은 얼마나 큰 죄인가! 우리는 주의 만찬에 참여하기 전에, 그리스도 안의 형제 자매들과 올바른 관계에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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